삼자교회의 기원과 역사

2007.05.15 12:06

선지자 조회 수: 추천:

이름 : 중선     번호 : 27
선지자선교회 게시일 : 2002/02/23 (토) PM 01:37:17  (수정 2002/05/18 (토) PM 10:15:07)    조회 : 125  

■ 삼자교회의 기원과 역사

                                                                                       인보라

1. 삼자교회의 기원

삼자교회는 중국이 1949년 공산화된 이후 형성된 교회이다. 삼자교회는 일원화된 중국공산당의 지도를 실행하기 위한 대중운동의 일환인 삼자혁신운동(三自革新運動)을 통해 생겨났다.

1951년 4월 16일부터 21일까지 전국 각지에서 모인 151명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정무원 종교사무처에서 개최한 「미국의 원조를 받는 기독교 단체회의의 처리를 위한 회의」에 참가한 후, 「연합선언」을 발표하고 「중국기독교 항미원조 삼자애국혁신운동 위원회 준비위원회」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1954년 7월 28일 244명의 교회 대표자들은 북경에서 열린 「제 1차 전국 기독교회의」에 출석하여 삼자애국혁신운동의 정신에 입각하여 중국기독교삼자애국운동위원회(약칭 三自會)를 건립하였다. 삼자회에 가입한 교회를 삼자교회라 칭한다.


삼자회는 "중국 공산당과 인민정부의 영도아래 전국의 기독교 신도들을 단결하여 조국을 사랑하면서 국가의 법령을 준수하고 자치. 자양. 자전의 삼자를 지지해 나가자"를 주장한다.  


삼자혁신운동의 목표는 정부의 지도를 받는 전국적인 성격을 띤 기독교 조직의 건립이었다.


1) 자치
자치는 각 교회가 제국주의와 관계를 철저히 단절하고 중국 기독교 신자들 스스로 교회를 다스리는 것을 말한다.

2) 자양
자양이란 제국주의와 경제적 연관성을 철저히 제거하고 중국 기독교 신자들 스스로 교회를 책임지고 양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3)자전
자전이란 제국주의의 남은 사상들을 철저히 말살하여 각 교회에서의 설교는 오직 성경에 의거한 순수한 복음을 전달하는 것이 목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2. 삼자교회의 역사
1950년대의 삼자교회는 중국공산당의 사회주의 개조와 국가건설이란 목표에 의해 당과 국가에서 원하는 교회와 기독교인으로 거듭나는 의식화 교육의 일환으로 사회주의 교육을 학습 받아야 했다. 그리고 교회정돈 작업을 통한 합병운동의 영향을 받아 교회가 많이 축소되었다. 1960년대의 삼자교회는 50년대보다 더 강력하게 정부의 관리와 통제를 받게 되었다.


교회가 계속적으로 감소되는 한편 하방(下放)운동을 통한 교역자외 교인의 노동개조, 인민공사란 집단화와 정치학습으로 교회활동에 참가하는 기회가 줄어들었다. 1961년부터는 주일학교와 각 부서의 활동이 차례로 금지되었다. 교회의 각 부서의 폐지는 교인들의 필요와 영성에 많은 결핍과 부족을 초래하였다. 문화대혁명(1966-1976) 시기에 많은 성도들이 단지 믿는다는 이유로 극심한 비판과 노동개조에 처해졌다. 홍위병들은 삼자회를 강제로 해체하고, 삼자회 지도자를 비판하였으며 수정주의 타도 대상으로 삼았다.


1980년대 공산당의 정책 전환으로 통일전선 전략적 고려에서 삼자교회와 삼자회의 활동이 재개될 수 있었다. 이 때 문화혁명 당시 중단되었던 통일전선부, 종교사무국, 삼자회 등이 재건되고, 1966년 이전까지의 중국공산당의 종교정책이 회복되어 1980년 4월에 삼자교회가 재건되었다.


1980년 남경회의를 통해 종교에 대한 통일전선적 측면에서의 종교신앙자유정책이 추진되었고, 이로 인하여 삼자교회와 가정교회 간에 대립과 충돌이 생겼다. 그 결과 1982년 3월에 <19호 문서>를 공포하였다. 1980년대 중반부터 삼자회는 정부의 현대화 정책에 부응하여 기존의 삼자원칙에 의거해 외부로부터의 어떠한 금전적인 지원이나 투자를 받지 않았던 것에서 나름대로 원칙과 틀을 마련하여 해외의 금전적인 지원과 도움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1990년대 삼자교회는 6.4천안문 사태의 영향으로 1990년에 종교사무국 간부회의를 소집하여 종교관리 문제를 의논하였으며, 1991년에 <6호 문서>를 발표하였다. 이때부터 종교관리를 위한 법규와 조례가 상당수 만들어졌다. 1989년 천안문사태시 정광훈(丁光訓)의 민주화운동지지 이후 종교사무국에서 좀더 직접적으로 삼자신학교를 관리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1991년에는 삼자전국회의를 열어 교회행정제도 건립에 초점을 두고 교회관리와 치리를 지방 삼자교회까지 이르게 하였다.


지금까지 되어진 과정을 보건대 삼자교회와 종교사무국 측의 종교법제화 움직임과 종교관리, 통제의 움직임이 강화되면서 삼자회의 정통성과 합법성은 더욱 보장받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