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자교회의 실체적 진실 (2)

2007.05.15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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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중선     번호 : 30
선지자선교회 게시일 : 2002/02/23 (토) PM 02:23:50  (수정 2002/04/03 (수) PM 09:45:37)    조회 : 88  

■ 삼자교회의 실체적 진실 (2)    



4. 삼자회의 신학은 現代派(자유주의 新神學) 신학사상 체계이다.

근대에는 기독교의 신학 분파는 아주 많으나 대략 현대 신파와 복음파의 두 개 분파로 나눌 수 있다. 자유주의와 복음주의는 다섯 가지 관점이 있다.



현대파는

1) 성경은 마땅히 역사적 비판의 방법으로 이해해야 하고, 일점일획도 오점이 없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자연의 발전에 따라 진화되는 것이다. 심지어 사람은 원숭이가 진화되어 온 것이라고 여긴다.

2) 말씀이 성육신하는 것은 승인하나 동정녀 탄생에 대하여는 하나의 우화(寓話)로 본다.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것은 동정녀와 충분한 필연적인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3) 십자가는 하나님의 자애로운 능력을 표시하는 것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하나님과 일체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분노의 하나님이나, 구속의 대가를 치르도록 요구하는 것은 믿지 말아야 한다.

4) 부활을 부인하지는 않으나 부활을 육체의 부활로 여기지 않는다.

5) 그리스도의 재림을 말하는 것은 단지 시적 의미의 상징이고 정의가 죄악을 정복하는 것을 상징한다.(오요종의「암흑과 광명」, pp.189-191)


이 다섯 가지는 기독교의 기본신앙과 관계된 것이다.
복음주의는 이런 다섯 가지 점에서 자유주의와 맞서고 절대로 조화를 이룰 수 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삼자회의 창시자이고 첫 번째 지도자인 오요종은 철저한 자유주의자로서 미국의 자유주의 신학교를 졸업하였다. 그의 저서 <암흑과 광명>에 있는 그의 신앙고백에서 산상보훈은 매우 감동적이라고 하였다.

그는 신학 문장에서 <주여! 나의 구주여>라는 말을 많이 인용한다. 이것으로 자기 신앙의 순수함을 증명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단락에서 그는 한 번도 <주여! 나의 구주여!>를 인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단락은 복음의 기본 도리를 부정하는 것이다.
오요종은 성육신, 동정녀 탄생, 부활, 삼위일체, 최후의 심판, 예수 재림 등을 모두 황당하고 괴이한 것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신앙이라고 한다. "나는 이런 것을 믿지 않아도 종교신앙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라고 말하였다.(암흑과 광명, p.76)


오요종이 창설한 삼자회가 어떤 신학관점을 갖고 있는가 하는 것이 밝혀진다. 오요종이 자기는 복음주의를 초월하는 사람이라고 자칭하는데, 이것은 사람들을 기만하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한 사람의 신앙을 평가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신앙 경향을 반영하는 것이다. 지금의 삼자회 지도자인 정광훈은 "오요종은 나의 40여년간의 스승이며 친밀한 벗이다"라고 하면서 "훌륭한 스승이 훌륭한 제자를 낳는다"고 하였다.

훌륭한 자유주의의 스승이 훌륭한 자유주의 제자를 배양해 낸다는 말이 하나도 틀린 말이 아니다. 오요종을 계승한 신학적 관점은 현대파와 한 혈통일 뿐 만 아니라 오요종보다 더 현대적이어서 오요종과 비교할 바가 못되었다. 다만 표현 방식이 다를 뿐이고 표면에 두터운 양가죽을 더 입었을 뿐이었다.

정광훈은 오요종보다 투명하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더 크게 신자들을 미혹한다. 반 세기가 지나서야 신도들이 정광훈의 현대파적인 행태를 식별하게 되었다. 나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그들은 중국의 변혁기인 1949년 신중국이 설립되었을 때 전통적인 신앙을 반대로 생각해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전통에 반하는 사고의 결과 "신학에서는 솔직하게 조금도 보류함이 없이, 두려움 없이 한 차례 혁신을 해야 한다"고 호소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과 관계되는 기본 진리인 신앙과 불신의 분야, 동정녀 탄생한 예수, 중생, 부활, 이신칭의 등은 말 할 것도 없고 인성론, 기독론, 구속론 및 타종교에 대한 태도 등등에 대하여 혁신적이다.


그들은 혁신에 대하여 일종의 설법이 있다. 심지어 성경의 내용까지 고쳤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일반 자유파도 아니며 어떤 초월파도 아니다. 다음에 기술하는 것은 삼자회의 신학기관지인 <금릉신학지(金陵神學誌)>에서 인용한 것이다. 이 신학사상은 삼자회의 현재와 미래의 방향을 좌우할 것이기에 신학지에 기록된 글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



4.1 성경 내용을 개편하고 도교, 불교, 유교 경전을 더한다.

중국의 저명한 삼자회 기독교학자인 사부아(謝扶雅)교수는 봉상례(封尙禮)목사에게 성경을 개편할 것을 건의하였다. 삼자회 지도자들은 아무런 반응 없이 홍콩의 곽서겸(郭書謙)이 쓴 이 글을 신학지에 게재하였다.

다음은 그와 관련된 내용이다. 곽서겸이 말하기를 "중화기독교의 성경을 개편해야 하는가? 우리 중국기독교는 이런 넓은 가슴과 담량이 있는가? 사교수의 건의를 접수할 것인가?

여러 교파의 지도자들이 열린 마음으로 상의할 줄 믿는다. 성령의 계시로 이루어지기를 기다린다. 사교수는 1970년 말에 함경계간(函景季刊) 주필 봉상례 목사에게 중화기독교가 사용할 성경을 제출하였다. 그 성경은 신약전서, 구약록요(舊約錄要), 유경비지(儒經備旨), 도불권우(道佛拳隅)로 구성되었다.(신학지 24기-25기 p.81)

삼자회의 지도자들은 이렇게 정식으로 광대한 신도들에게 성경 개편의 건의를 전하였다. 그들은 이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하면 성경은 중화문화에 맞는 성경이 되고 기독교도 중국문화에 뿌리박을 수 있고 발달 할 수 있다.


곽서겸은 그 글에서 진일보하여 사교수가 무엇 때문에 유교, 도교, 불교의 경서를 성경에 보탰는가를 해석하였다. 사부아는 "중국의 유가 경전 중에 사서오경, 역경, 대학, 논어, 맹자는 몇 천년을 사용해 왔다. 그래서 이미 중화의 일부분으로 되었다. 도가의 노장(老壯)과 중국의 불장(佛臧) 등은 중국의 고승이 쓴 것이기에 절대로 구약의 선지서보다 손색이 없다.

예수는 유대의 율법과 선지교훈을 계승하였기 때문에 버리지 말고 승인해 주어야 한다. 만약 예수가 신주(神州)에서 태어났다면 그 역시 중화민족의 윤리도덕을 말할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버리지 말고 성사가 되게 해야 한다. 그는 최후로 말하기를 "여러 사람들이 개정하는 것을 상의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건의의 출발점은 중국의 기독교가 중국문화에 맞는 성경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성경의 본의를 배반한다고 평론할 수 없다."


본래 현대파인 오요종이 성경은 완전무결한 것이 아니라고 하였으나 어느 부분이 잘못되었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이것은 성경 전체를 부인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오늘 삼자회의 현대파는 성경에서 말씀을 한 마디 한 마디 믿을 필요가 없다(신학지 21기 p.30)고 하면서 성경을 다시 재편하는 것을 지지하기도 하였다. 성경에 다른 종교의 경서를 더하여 써 넣겠다고도 하였다.


성경을 사람에 따라 마음대로 고친다면 역대의 성도들의 신앙이나 순교자들은 원통한 것이다. 중국의 사교수가 중국의 도교, 불교, 유교를 보태면, 인도의 사교수도 인도교나 요가의 경전을 더할 수 있지 않는가? 각 나라마다 고유의 이교가 있는데 자기의 생각대로 각 나라의 특성에 따라 고쳐, 각 나라 특색의 종교가 된다면 기독교는 어떠한 종교가 되겠는가?


성경을 빙자해 말하기를 성령의 계시를 기다려 완성하리라 한다. 성령이 이랬다 저랬다 하는가? 그의 계시의 말씀을 그가 변개하시겠는가? 게다가 악령이 성경을 고칠 수 있겠는가?


동시에 그의 글 속에서 "넓은 가슴과 용기"는 "네가 하늘까지 높아지려냐, 네가 전능자와 같아 지려냐"의 사단의 용기이다. 하나님 외에 누가 하나님의 계시를 변개하겠는가? 계속 말하기를 "구약의 오경, 6선지서와 다윗의 시는 성도가 배워야하고 이스라엘의 역사나 전기는 사학자가 연구할 것이지 성도가 꼭 읽고 배워야할 필요가 없다.

또 하나님처럼 자처하여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읽을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하나님께서 쓰라 하여 쓴 것을 사교수가 읽을 필요가 없고 삭제해야하고, 도교, 불교, 유교의 경전을 더하려 한다. 사 교수는 하나님께 대항하는 것이고, 연구하게 하는 사 교수의 머리는 누군가? 사단이다! 사 교수가 성경의 개편에 대한 건의는 개인 의견이다. 글을 쓴 곽을 대대적으로 추천한 것도 개인의 일이다. 한 사람이 어떻게 믿던, 모든 것은 개인의 자유이다. 문제는 중국기독교 신학 출판물의 대표인 금륭신학지가 사 교수의 글을 전면 보도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독자는 이런 종교 지도자들이 사 교수의 건의에 동의한다고 이해 할 것이다. 너희들이 성경을 개편하려 했다면 무엇 때문에 뒷 표지에 당당하게 성경의 권위를 확인하고 정통신앙을 견지하자고 커다랗게 인쇄하였는가? 책 내용에는 성령을 모독하고 성령의 권위를 비방하는 글이 나왔는가?
(주: 이것은 95년 24-25부터 책 뒤에 인쇄한 것)

이것은 너희들이 양의 가죽을 쓰고 교회에 들어온 잔혹한 승냥이라는 것을 증명하지 않는가?(마7:15) 너희의 행위는 분명히 양 머리를 걸어놓고 개고기를 파는 것이고, 성도들을 기만하는 비겁한 행위이기에, 반드시 밝혀야만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나는 중요한 질문을 할 수밖에 없다. 국내외의 중국 정통교회라 자처하며 전 중국 기독교 대표라는 명의를 걸고, 합법교회이며, 높은 자리에 앉아, 신학지의 고문이며, 편집, 주필, 교정하는 너희들은 우리 평신도들을 어디까지 우롱하려는 것이냐?

너희는 하나님의 교회를 어디로 끌고 가려느냐? 너희는 참 선지자냐, 거짓 선지자냐? 나는 너희가 바로 성경이 말하는 거짓선지자라 말한다. 우리는 결코 바보가 아니다. 너희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중국성도의 대표의 자격이나 권리가 없다.


너희 거짓선지자들아 하나님께서 이 일에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들어 보라.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모든 말을 너희는 지켜 행하고 그것에 가감하지 말찌니라"(신12;32).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신4;2).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 너는 그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잠30:5-6)


계시록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마음대로 말씀을 고칠 줄을 아시고 태초로부터 마지막 날까지 점점 엄하게 경고하셨다. 말씀하시기를 성경을 마음대로 고치는 자는 최후 심판의 저주를 받으리라.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이르노니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에함을 저하여 버리시리라"(계22:18,19)



4.2 믿음과 불신의 경계를 돌파하다.

믿음과 불신은 분명한 경계가 있다. 이는 각 사람마다 생사의 선이다.(요3;36) 엄숙한 개념인데 삼자회 지도자는 공개적으로 믿음과 불신의 선을 넘어서 믿음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한다.

하나님의 뜻인 인애와 공의를 실행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받으신다는 것이 대략적인 구조이지만 아직 완전한 체계를 갖추지는 못했고, 다만 그의 취향은 개방적으로 여러 진보적인 요소들을 용납하고 종교의 문호개방을 하자는 것이다.(신학지 35기 p.43)


이 말은 아주 분명히 그들의 신앙이 믿음과 불신앙에 관계하지 않고, 단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 딸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고 한다.(신학지 3기 p.23), "지금까지도 교회에 믿음과 불신의 선상에 선 사람이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거역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사람 누구도 자기의 자녀로 본다"(신학지 19기 p.67) 그들이 신앙, 불신앙을 파괴함이 개방적이라는 뜻은 그들이 이해하기에 인류의 문화, 과학, 예술, 정의, 화평, 쟁취, 진보등은 모두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라 여기기 때문이며, 이러한 일에 종사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며 하나님에 속한 사람이며. 다른 종교의 종교인도 포함하여 모두 하나님의 자녀이다.


이것이 그들의 대단원의 중심 사상이다. 그들은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 알리라."(요일2;29하)의 성경을 근거로 한다. 이것은 포장의 의미이다. 성경이 말하길 "너희가 그의 의로운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에서 "의를 행하는 자마다"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가리킴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사도 요한이 그들을 격려하는 것은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바 되면 그의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28절)는 목적이다. 그들은 왜 이 말씀을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하나님의 아들이라 말하는가? 그것은 정광훈이 "지금 중국의 배경 아래서 이신청의 교리를 신자와 불신자의 윤리 행동 상에 불필요한 거리로 만들었다.(신학지24-25기, p.41)고 한 것에 기인한다.


그들은 신앙과 불신앙을 모호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와 비기독교 사이를 혼란하게 했다. 그들은 "만약 예수가 사람을 질책하는 것은 비기독교인인 불교도나 이슬람 등등의 기타 교도가 아니라 부정의 한 사람이다."(신학지5기, p.78) 라고 말하였다.


삼자회는 신파 지도자들의 원칙을 적용해 필요에 따라 성경을 해석하며 교회지도자의 권위를 수호하고 무엇을 설교하며, 하지 말아야 함을 임의로 명령을 내린다. 이는 절대 불가한 것이다. 성도는 진리를 벗어난 설교를 용납할 수 없다. 성도의 손에는 성경이 있고, 누가 말하던 성경의 원칙을 준수해야한다.


신앙과 불신앙은 분명한 한계가 있고, 해석이 필요 없다.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3;18).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3;36).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자를 사랑하느니라"(요일5;1)

위의 말씀이 분명히 말하듯 믿는 사람은 살 것이고 불신자는 죽을 것이다. 이를 어길 수 있으랴?


하나님께서 성경에 분명히 말씀하셨지만 삼자의 지도자 정광훈은 이신청의를 강조하여 말하는 사람은 뼈에 사무치게 증오한다하며, 여러 가지로 풍자하였다. "어떤 사람의 신학이란 그가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을 중심으로 에워싸고 돈다---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믿고 안 믿는 것이나 구원문제도 나에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의 예수 믿는 신앙은 무엇이 있는가? 덕일진(德日進: 떼아르 드 샤르뎅)은 말하기를 우리의 기독교 신앙은 풍부할 수 있다 한다.(신학지3기, pp.19-20)


기독교는 확실히 풍부하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실제의 의가 있는가? 하나님의 풍부는 모두 주 안에서이며, 믿음을 전제로 한다.

만약 사람이 믿음 없이 하나님 앞에 나오면 예수와 관계가 없고 계약 밖의 사람이 된다. 이런 사람은 아무 소망이 없으며 하나님도 없다(엡2;12).

이렇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에게 분부한 사명은 전도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마28:19).

기독교는 전도의 종교이고, 안 믿는 자에게 전도하여 믿게 하는 것이 중심 사명이고 제일 중요한 일이다.

다만 정 주교는 상상외로 지적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은 우리와 같지 않고 믿고 안 믿는 문제를 글로 표현하는 것만 하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을 하는 주교는 이미 4복음서를 읽어보았다.
믿음을 강조하신 분은 먼저 예수님이시다. 사람이 묻기를 무엇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 하시니"(요6;29). 또 요한복음 6장에 예수님께서 큰소리로 외쳐신 것은 믿음! 믿음! 믿음! 아주 여러 번이다.(요6:35,37,39,40,44,47,51,54,56) "네가 어디 있느냐?"(창3:9)'

이 외침은 죄인을 찾는 것이다. 아담의 범죄 후 인류 역사상 오늘날까지 찾으시는 말씀이다. 이것은 탕자를 향한 아버지의 음성이다. 이에 믿음만이 유일한 대답인 것이다.


믿음은 사람의 이성이 하나님에 대한 항복(降服)과 귀의(歸依)이다. 믿음을 갖은자는 예수 안에서 도장 위에 도장을 찍음이다. 성령이 내주하고, 영원히 살고, 영생을 얻는다. 믿음은 이와 같이 중요하고 엄숙한 문제인데 "문장을 쓰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 말을 하는 자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을 것인가?


금능신학원 부원장 진택민은 말하기를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교회 안의 적지 않은 성도들은 자주 믿음과 불신앙, 영적인 문제 사이에 놓여있다.
전 인류를 이분화해 하나는 기독교 요, 하나는 비 크리스챤---이렇게 문제를 본다.

이는 너무 간단하며 주관적이 아닌가. 우리는 믿음의 문제를 말할 때 교리에 매달려 해석해서는 안 된다.(신학지2기, p.5) 인류에 대해 기독교 방식으로 분리하면 자연히 하나는 기독교 다른 하나는 비기독교이지 몇 개로 분리되겠는가?

이것이 단순화며 주관적인 것이 아닌 것이다. 이는 사실에 맞게 객관화 한 것이지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명백한 일을 가지고 믿음과 불신앙의 경계를 부수고 믿음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려 하는가?

새 빛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들은 또 이렇게 말한다. "이전에 어떤 사람은 늘 두 문제가 대두되는데 (믿음의 문제, 영에 속한 문제) 복음파와 현대파 사이에서 많은 분열과 필요 없는 다툼을 조성했다.

현재 30여년의 경험을 결산해 볼 때 중국의 현대 신학의 특징을 말하면 종교주의를 벗어났다.(신학지2기, p.5) 그들은 이 몇 마디말로, 새로운 현대파를 만들며 게다가 이 다툼은 필요 없으며, 이것이 혼란시킨다고 설득한다. 복음파와 현대파의 신학관점은 절대적으로 대립되며, 믿음과 불신의 구별이다.


이는 양자의 경계를 긋는 것이고 교회의 누룩을 없애는 것인데 이를 사람이 분열을 초래하며 필요 없는 다툼이다 말할 수 있는가?

종파를 초월하는 것은 마땅한데 현대파는 종파가 아니다. 그러니 이 두 개의 개념을 혼돈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서로는 자기가 초월파라 하며 서로 위에 있으려 하며 겉으로는 공정한 것처럼 한다. "신학사상 상 우리는 서로 존중하는 것을 찾기 시작했는데 이는 이전의 신파와 구파 그리고 복음파와 현대파의 불일치를 벗어나자는 것이다.(신학지13기, p.18)


이것은 사람을 기만하는 것이다. 그들은 오요종의 현대 자유파 보다 더 발전한 것이고 멀리간 것이다. 오늘날 연합이란 권력선전의 꾀이고, 중국교회를 신파로 통일하는 과정이다.

연합은 거짓이며 복음신앙으로 고치려는 것이 진짜이다. 간단히 보아 넘길 수 없는 것이 그들은 몇 개의 영향있는 복음파의 지도자들을 조직하였다면서 몇 마디 외쳐대는 "다수는 소수를 돌봐준다"는 말로 속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반드시 그들의 신학과 교회의 나아가는 방향과 성경에 부합되는지의 여부를 관찰해야한다. 이것이 관건이다. 만약 그들이 정말로 무엇을 초월했다면 그것은 기독교의 교훈을 초월한 것이고, 이와 같은 사람은 하나님이 없는 사람이다(요이 9), 이것이 그들의 진면목이다.



4.3 예수의 동정녀 탄생은 불필요한 것이다.


"예수의 탄생은 동정녀 수태인가 아닌가? 예수의 인간과 다른 점은 완전한 신인합일인가 아니면 불완전한 신인합일인가? 이 두 가지는 정도의 차이일 뿐 본질적인 차이가 아니다"(신학지2기, p.31)

이 말은 오요종계의 현대파의 말이다. "동정녀 출생의 예수는 하나의 만들어진 얘기고, 우화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예수의 성령수태로 인한 동정녀 출생을 부정하는 것이고,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고 성육신의 부인이며 나아가 예수의 구속주의 자격을 부인하는 것이다.


예수가 만약 동정녀 탄생한 것이 아니면 그는 필연적으로 부모가 난 것이다. 그러면 태중에서 죄를 갖고 나온 것이다. 그의 십자가에 달림은 자기의 죄를 담당한 것이며 대속의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이렇듯 구속 은혜까지 뿌리 채 뽑아버린 독설이 아닌가?

만약 예수가 일반사람과 정도 차이만 있고 본질적 차이가 없다면, 성육신이 아니고 또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다라고 인정하는 것은 마귀가 인간의 마음에 심어놓는 중요한 일인 것이다.


유대인들은 예수가 그리스도가 아니며 하나님의 아들도 아니며 그가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으로 정죄되었다.(마26;63-66, 요5;18) 하나님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 부활케 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게 하셨다.(롬1:4)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요3:13)고 자기를 말씀하셨다. 필연적으로 보여지는 것은, 예수는 하늘에서 내려온 것으로 인간과 정도의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본질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창조주이며 인간을 창조 하셨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