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자교회의 시체적 진실 (6)

2007.05.15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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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중선     번호 : 34
선지자선교회 게시일 : 2002/04/04 (목) AM 08:11:02     조회 : 71  

■ 삼자교회의 실체적 진실 (6)    



5. 삼자회는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다.
삼자회는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다. 이는 정광훈이 한 말이다.


5.1 삼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가 아니다.(신학지 10기 2항)
정광훈이 말하기를 삼자회 조직은 줄곧 정치성이 비교적 강한 조직이라 인정되고 있다.--- 한 차례 한 차례 정치 운동에 따라 모든 국가는 점점 고도로 집중된 일원화 지도자를 찾는데 교회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적지 않은 지방에서 교회의 일에 실제 지도권은 삼자조직에 집중되었다.

이렇게 되어 적지 않은 지방 삼자는 애국의 기치를 높이 들어 자치 자양 자전의 군중운동과 군중조직이 교회 옆에 혹은 교회 위에 있게 되었다. 교회 같으면서 교회가 아니고 정부 같으면서 정부가 아니다. 삼자교회는 이러한 한 개의 교회 지도자 관리 부분이다.(신학지 18기 30항)


정광훈은 또 50년대 후기 당시 역사적 원인으로 삼자는 교회를 관리하는 기구로 되었다. 교회 위의 지도자로 되었다. --바울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라는 교회관은 중시 받지 못하였다.----삼자 조직 통치교회, 그리스도의 머리 위에 삼자의 머리를 더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고 교회는 그의 몸이다.  이것은 성경의 교회에 대한 교훈이고 이단은 판단하는 기준이다.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지 않는 집단은 당연히 교회가 아니고 더구나 하나님의 교회는 아니다. 몸의 머리가 장삼이면 그 몸은 장삼의 것이다. 몸의 머리가 이사이면 몸은 이사의 것이다. 몸이 머리를 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하나의 정치적 강한 삼자조직 즉 삼자회의 머리 그러면 삼자회는 교회인가 아닌가. 하나님의 교회인가 아닌가? 당연히 삼자는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다.  즉 교회가 아니고. 잘 분별하여 나와서 하나님께로 돌아 오라.



5,2 삼자회는 여러 머리의 교회
"삼자의 책임자는 목사가 아니고, 신학훈련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교회 일을 관리하고, 목사를 관리하고 성도를 관리한다. 모인 사람과 재물을 관리하는 권한을 같고 있다. 어느 신자는 농으로 목사 아닌자가 목사를 관리한다 한다.(신학지 24-25기 51항)  


"종교 사업 부문에서 정도가 지나치게 월권행사를 하는 상황이며 예로 어느 지방에서는 慕道友領洗(진리를 사모하는 자에게 세례를 줌) 모두 그들의 피준을 받아야한다. 이럼에도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가 교회를 관리한다고 한다.(신학지 24-25 52항)  "어느 지방 정부부문에서는 교회를 아주 엄격하게 관리한다. --교회가 구속을 받기 때문에 원래의 독립성과 자치권을 잃었다.(신학지 24-25, 106항)



어떤 지방의 교회활동에 대하여 일명 '삼정' 관리방법을 택한다 즉 `부분` `사람` `장소`의 세가지를 정한다. 한부분의 성도와 성직자들은 다만 규정된 어느 장소에서만 종교의 활동을 해야한다. 위반자는 법으로 처벌한다.(신학지 10기 10항)

어느 지방은 교우증과 성도증을 발급한다.(신학지 18기 30항) 어느 지방의 종교사무와 간부들은 종교단체의 돈을 점유하고, 먹고 마시는 일에  돈을 낭비하는 일은 한 번 두 번의 일이 아니다.(신학지 10기 15항)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삼자회는 각 삼자회와 기협회(`양회`라 함)에서 종교활동의 관리를 받는다. 전국의 성, 지방, 시 , 현의 양회와 종교부분에서 층층히 내려오면서 우산을 돌려 물을 뿌리 듯 각층의 단위를 만든다. 때문에 삼자회는 그리스도가 그들의 머리는 아니지만 머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교회' 그래 머리가 많은 교회다. 모든 머리는 교회를 관리한다. 교회는 그들의 지도를 받는다.


우리는 모두 안다.  하나의 몸에는 하나의 머리가, 삼자는 머리가 여러 개다. 괴물이 아니면 무어란 말인가?




5.3 삼자회의 스스로 빛을 낸다.
한 몸에 여러 머리는 비정상이다. 행동상 서로 협력하지 않는다. 그들의 신앙 원칙에 지불한 대가는 생존공간을 쟁취하였다. 교회를 잘 치리하지 못하여 문제는 점점 많아지며 목사를 고발하는 편지가 어떤 때는 매일 백 통이 넘는다.  집안의 험은 밖으로 안 전하려해도 그럴 수 없었다. 아예 내부를 정돈해 드러내어 삼자의 현상을 새롭게 수립해야했다. 그래서 구중들에게 인상을 바꿔주어야 했는데 그러나 그것은 쉽지 않았다(얼음이 3척이요, 이한기를 하루아침에 능히 바꿀 수 있는가). 아래는 그들이 폭로한 문제인데 사람을 놀라게 한다.(신학지 26기 46항)


"왜 오늘날 우리의 교회는 아직 많은 사람들이 삼자를 가까우면서도 멀리하는가? 그리고 많은 일부의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심지어 반대한다. 사광의 선생은 자르는 아픔 중에 부정을 내어놓는다(갈라서 부정을 꺼냄).

'어떤 지방의 삼자 애국교회의 지도자들이 상태와 품행이 바르지 못하고 어느 성도들과 책임자의 의견을 따르며 삼자애국회를 벗어났다. --어떤 지방의 양회 지도자는 삼자의 깃발을 들과 삼자의 원칙에 어긋나는 일들을 하는데 외국사람들에게 비굴하고 심지어 외국 종교세력의 대리인이 된다.

재무 장부는 오랫동안 공포하지 않고 교회는 개인의 세상으로 되었다. 한 사람이 말하면 모든 것이 결정된다. 성도들은 목양을 얻지 못하고 상한 심령을 끌어안고 일어나지 못하고 갈 수밖에 없다. 돈만 보고 덕을 보지 않으며 인재들을  중시하지 않는 신앙의 기초를 갖고 위에서의 분부만 듣고 성도의 목소리는 듣지 않으며, 어떤 이는 개방의 기회를 이용해 삼자의 도를 역행하고 꾀를 써 자신의 입지 만을 세우며 어렵게 이어온 삼자의 단결을 부숴 버린다.---근심스럽다 몇 글자로 형용할 수 있는가?(신학지 10기 6항)



중국교회(삼자회) 내에서 생긴 많은 문제는 우리가 확대경으로만 찾도록 작은 것이 아니라, 많게는 교회의 성질과 같지 않은 현상이 교회의 간증에 영향을 받게했다. 오늘날 교회의 권력화는 교회의 책임자는 높은 곳에 있고 권력과 지위를 이용해서 사욕을 채우므로 성도들에게 매우 나쁜 영향을 남긴다.  일부 교회의 책임자들의 크고 작은 아래 기관에 일들을 상부에(정부) 전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들은 예우를 받겠지만 성도 앞에서는 위신을 잃었다.  그들은 심지어 권력을 이용하여 교회 내에 명령을 내리고 교회가 교회답지 않게 한다.


사욕이 많은 사람은 사리를 위하여 연관된 동역자들을 고발해 정부 간부들의 머리를 흔들게 한다. 당을 지어 암투하는 저들의 모습을 보는 성도들의 마음은 싸늘하다.  한탄하며 실망하며 교회를 떠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어떤 교회 지도자들의 한 면에서 봉건 가장제의 모습을 보게된다. 오직 홀로 독존. 한 지방의 지역 황제. 교회는 개인을 위해 경영하는 사업으로 되었다.  성직상 선후배의 서열을 정하고 능력있는 자들을 시기 질투하고  반대자들을 배척하여 무형의 교회를 건설하는데 저해 요인이 되었다.(신학지 26기 44항)


어느 지방에서는 이런 이야기가 떠돈다. 목사의 직업화, 설교사업 상업화, 성도 숭배양식화, 교회의 점차적 세속화(신학지 24기-25기 52항) 전도자는 그리스도의 대언자이지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주인이 아니다. 현실상 교회 패권을 형성하고 교회가 개인의 권력사업장, 세력의 범위로 되었다.

이일에 어떤 사람은 걱정되는 일은 교회의 세속화뿐만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이 우리를 교회라 하는 것이다.(신학지 24-25기 53항)


현재 어떤 삼자교회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 임무가 아니고, 구원의 생명의 길을 설교하지 않고 마음의 경건은 없고 외모의 경건만 있다. 성도의 경건을 이용하거나 혹은 종교적 압력을 힘입어 성도를 어쩔 수 없게 그 길로 몰아넣어 성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신학지  20기 68항)

또 어떤 사람은 교회에서 관직을 얻기 위해서 수단을 가지지 않으며 일단 자기의 바램이 이루어지면 교회에서 제 멋대로 행동한다. 마음에 들지 않은 성도는 성경으로 압제하고 심지어 욕하며 동역자에게 중상모략 한다. 교회와 정부의 정상적인 관계에서의 왕래가 해하고 비방하며 농하는 것들이다.  

어느 주임 목사가 심지어 형제를 고발하는가 하면,  애굽의 요셉의 연극에서 산아제한을 위반하고 야곱이 12아들을 낳았다. 이렇게 선전함이  자식을 많이 낳아 많은 복을 받음이 국가 정책을 위반한 것이란 말인가?  

구에서 공안에까지 고발하고, 온 도시를 떠들썩하게 한다. 이것이 얼마나 황당한가?  그들은 많은 설교자들은 고발의 수단으로 내어 쫒는다. 성도들은 이에 대해 의견이 많다 하지만 힘이 모자라 눈물을 흘리며 이 교회를 떠나갈 수밖에 없다.


이것은 그들의 문서에서 뻬낀 일부이다. 삼자회의 진실된 모습을 능히 볼 수 있다. 사실상 사람들은 보고 들어서 이 일들을 능히 알 수가 있다. 삼자교회는  몇 개의 제도를 세우고, 내부를 정리하고, 자기를 개량하고, 국외 성원을 얻고, 일을 잘 처리해도 스스로 빛을 발할 수 없다.  사실이 증명하듯  80년대 이후 "교회 일을 잘하고, 도에 관계를 바르게 한다."  다만 지금까지 21세기로 넘어설 시점에서 삼자회는 여전히 예전과 같고 , 병이 들어 고치게 어렵게 되어, 성도들이 떠나는 현상이 점점 많아진다.


병을 고치자면 병에 따라 약을 먹어야 한다, 병에 대하여 병의 뿌리가 어디 있는지 먼저 찾아야 한다. 삼자회의 병의 근원은 그의 자유주의신학에서 생겼다. 자유주의신학은 일종의 철학신학이다. 생명의 도를 설교하지 않고, 외면이 개선되기를 企圖한다.  사실 주 예수의 새 생명의 도는 내면의 새로운 사람의 생명의 도다. 때문에 삼자회는 사람들을 끌지 못한다.

그래서 가정교회는 우후죽순으로 꽃을 피웠다. 이것이 사실 하나님의 아름다운 뜻이다.



5.4 삼자회는 이제 삼자가 아니다.
삼자회는 삼자의 기치에 세워졌다. 지금은 3자의 실제 내용이 없어졌다.

삼자는 자치 자양 자전을 말한다.

자치는
성도들이 스스로 교회를 치리함. 그렇지만 삼자의 머리는 삼자조직이다. 이 조직은 목사와 사람과 돈과 물질을 모두 관리한다. 성도들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성도가 교회를 관리한다는 것은 헛된말에 지나지 않는다.

자양은
성도들이 스스로 교회를 살린다는 말이다. 특히 외국의 돈에 의지하지 않는데 이것은 교회의 자주의 관건이다. 50년대초, `삼자` 이 기치가 세워진 후, 외국에서 오는 경제 도움을 끊었다. 이것은 교회를 중국화 하는데 제일 중요한 보장이다. 지금은 외국의 경제지원이 삼자에 몰래 침입했고, 해방전의 그런 다른 회가 없고, 다른 명목이 나타났다. 개방후 각양각색의 돈이 들어옴으로 삼자 지도자들은 이것이 가장 큰 유혹이었음을 시인한다.

"해외의 일종의 개인조직과 기금회에서 교회와 신학원에 큰돈을 헌납하여 현대화의 공헌에 투자하였다. 이런유의 공헌은 유혹이 강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거절 못하게 한다. 때문에 삼자원칙이 위기에 봉착한다."(신학지 21기 21항)

그들은 거절하려고 해도 아쉽고, 받자니 자양의 기치가 걸려 공개적으로 못하고 변칙의 방법이 통용된다. 그래서 "개혁개방의 형식아래서 우리교회가 자양원칙을 견지하며 동시에 해외교회와도 조건없는 유익을 나눈다."(신학지 24-25기 22항)


이것은 관리의 방법의 말이다. 자양원칙을 견지해야하고 국외의 돈도 갖을 수 있다. `가지다`를 `나누다`로 말한다. 그러면 다른 사람의 돈을 갖은 것으로 되지는 않는다. 소량이니 조건이 없는 등으로 말하면 하늘이 웃지 않겠는가?

사실 주다는 것을 바꿔 말하면 자양하지 않는 것에 문을 연 것이다. 위에서 녹색의 불을켜 나눌 수 있다면 아래서 당연히 제재가 없다는 것이다. 때문에 외국 사람이 조건을 붙일 필요가 없다. 스스로 주권을 팔아먹은 것이다.;

거지의 말하는 모습이고 그것을 암시하는 모습이 있다. 그들 자신의 폭로를 보면 "어떤 교회지도자들은 거지처럼 외자를 얻기 위해 교회의 주권을 팔아먹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정말 거지같다.(신학지 24-25  31항) "현재 우리나라는 예전보다 더 개방적이다. 해외에서 오는 사람도 점점 많아진다. 별난 사람 다 있고, 돈도 더 많아지기에 암시적 요소가 더욱 많다.(신학지 18기 28항)



즉 문장의 폭로가 없어도 신학지의 매년의 큰 기사만 봐도 알 수 있다. 국제간의 서로의 방문은 성도들로는 되어질 수 없다. 그들이 손님을 접대하는 구격은 모두 큰 차원이다. 모두 고급의 차원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자양으로선 유지 할 수가 없다. 때문에 삼자회는 자양도 없는 것이다.



자전은
삼자 중 제일 주목하는 자 이다. 그들의 자전은 누가 와서 전하는가 만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무엇을 전하는가 이다. 의미는 중국에 전도가 되면서부터 무엇을 전하는가? 의 문제는 줄곧 해결이 되지 못하고 지금 그들이 정권을 잡아서 근본적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였다. 그러면 그들은 결국 무엇을 전하는가? 그들은 과거를 모두 부정하고 그들의 자유주의신학을 전한다. 이것은 그들이 50년대 성립될 때 결정한 취지이다.


정광훈은 우주적 그리스도를 쓰고 신학지 14-15 1-6항에서 실렸다. 이 글은 중국 기독교 생긴이래 유일한 기독교 신학이라고 추천을 받았다. 그들은 예전의 전도자가 전한 성도들의 믿음은 모두 틀렸기에 모두 바꿔야한다. 정광훈의 이 신학관으로 성경중의 기본도리를 새로히 받아들여야 한다. 앞에서 쓴 삼자회의 자유주의 신학 사상체계는 그들의 부분적 신학 관점이다.


우주적 그리스도는 실은 삼자회 자유주의 신학의 총강이다. 정은 이 문장의 마지막에서 우주의 그리스도는 응당 "그것은 더는 전통적인 기독론을 만족시키지 못하기에 새로운 기독교의 출현을 희망한다" 때문에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면 그들의 자전은 다른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기에 우리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고 이런 자전은 우리는 필요하지 않는다.


우리가 요구하는 삼자는 성도자신이 교회를 관리하고 자기의 것으로 교회를 배양하고. 은혜로 부르심을 받은 성도가 성경에 의하여 하나님의 도를 바르게 설교하는 것이다. 오늘 삼자회는 삼자 이미 변질한 삼자이다. 이름만이 있고 실질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때문에 삼자회는 더는 삼자가 아니다.



5.5 깊이 고려할 필요가 없다.
삼자는 80년대에 교회를 잘해가고 도리에 따르는 구호가 있다. 삼자는 잘해나가지 못하고 게다가 관계가 나빠지는 곤란한 함정에 빠졌다. 90년대 상황도 바뀌지 않았다. 이것은 무엇 때문일까? 아래는 음미해볼 말이다. "삼자는 비계의 비교와 같다. 중국의 이 건물이 진, 선, 미의 자태로 동방의 지평선 위에 세워졌을 때 자연적으로 비계는 보이지 않았다. 삼자는 교회의 건물을 건설하기 위해서이다."(신학지 18기 29항) 삼자회는 스스로 승인한 것이다. 삼자 조직은 그의 비계이다. 현재 그는 생각하기를 허리가 굳어짐이다. 이미 동방의 지평선 위에 세워졌다. 때문에 그들은 비계를 운반하려한다. 어찌해야 하는 것인가? 우리는 논할 권리가 없다. 하지만 심사숙고해야 할 것은 무엇 때문에 교회 건립을 하는데 비계가 필요한가 하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교회의 건립의 원칙이라면 성경의 도리라면 초기교회의 비계는 무엇인가? 역대 각국 각지의 하나님의 교회의 비계는 또 각각 무엇인가? 이것이 문제점이다.



지난 세기 십자가가 외국을 통해서 중국으로 전해졌기에 사람들에게 서양의 도의 형상을 주었다 하면 삼자회가 생겨 심지어 잉태하여 낳아, 권력의 결과 아래 놓이게함 때문에 사람들에게 교회를 관리하는 형상을 준다. 그들은 스스로 이렇게 말하기를 과연 다른 사람은 우리가 교회를 관리한다고 한다.


사람들은 잊지 못한다. 삼자는 전쟁하는 정치운동과 격렬한 투쟁 중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아래에 투쟁적 고소를 서술한다.

당시 공소의 대상은 제국주의 어떤 전도 관련자이다. 다만 모든 전도자는 아니다. 더욱이 중국의 전도자는 아니다. 실제 조작 중 이런 신앙의 경건은 영에 속한 것이고, 일시 삼자의 고려도, 한도에 같이 일한 것, 모두 반애국이므로 타격하자.(신학지 24-25 51항), 여기서의 타격은 피로 쓴 글자이다. 이것은 아벨 이후 흘린 아벨의 피이다.

의인의 피 역사는 최후에 공정한 판단이 있을 것이다. 지금 계속 심사숙고 해보라. 교회는 사랑의 단체인데 어떻게 정치운동을 할 수 있는가? 심지어 공안을 동원할 수 있을까?

삼자회는 교회인가? 하나님의 교회인가?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그의 교회를 건립하였는가?

만약 50년대 초 처럼 先知식의 충성된 종과 여인들을 제거가 삼자회의 본질을 능히 알게 나타낼 수 있다면, 그러면  반세기 이후 지금 이런 사람의 말처럼 흰 종이에 검은 글자를 쓰듯 범사에 하나님 것을 찾음을 똑똑히 보아야 한다.

삼자회가 교회인가 아닌가? 하나님의 교회인가의 문제는 쟁론할 필요가 없다. 그들 자신도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교회라 하는가 하고 솔직담백하게 말한다.

그들은 투쟁의 수단으로 생존의 공간을 열었다. 그러나 형상은 깨졌다. 스스로 잘못된 관계로 빠지고 말았는데 이는 자업자득이다. 개방후 그들을 계속 정치적 수단으로서 국제 기독교를 겨냥했다. 철판 하나가 아니다. 모두를 격파했다. 먼저 기독교 세계연합이 한자리를 차지하고 국외 복음파와 교통한다. 삽시간에 세계와 통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승리는 교회 자신의 건설을 돕지 않는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인데 몸은 성장해야 한다. 성장은 신체 내부를 결정하는 것이다.

교회는 생명의 유기체이다. 이것 또한 삼자가 중시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믿음과 불신을 돌파하면서 생명을 논할 수 있는가? 복음을 전하는 것을 책임하지 않으며 생명을 구하는 도를 논하지 않는다. 단 외국사람에게만 잘 보여 교회를 건전하게 건립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머리 문제는 엄숙한 문제이다. 주님을 말하시기를 "------" 여기서 강조하시기를 제일과 기타의 순서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절대로 바꿔서는 안된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여야 인간을 사랑할 수 있다. 사랑의 하나님을 앞자리에 놓아야한다. 하나님을 사람함이 인간을 사랑함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삼자회는 생명의 도를 중시하지 않고 입에만 달고 다닌다. 그들의 신학 사상은 실제와 결단하는 것인데 입에 다고 다니는 것은 그들 자신이다.


가정집회 핍박에 의해 나온 것이다. 생각해 보라 50년대 가정 집회는 반혁명 단체로 처단되었다. 누가 감히 가정집회를 가지겠는가? 하지만 삼자회는 사람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나도 이렇게 삼자회 조직을 떠난 것이다. 다른 교회를 세워 반대하자는 것이 아니다. 누구를 반대하고 정부를 반대하는 것이아니다.

진정한 신앙을 추구하는 사람은 진리를 논하고 진리를 행한다. 역대의 탐관 부패자 척결에서 그들의 자신이나 자녀는 없다. 그중의 적지 않은 사람은 공직에서 우수한 인력이다. 나 역시그렇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좋은 성도는 좋은 시민이다.

이밖에 또 하나의 문제를 생각해 봐야한다.  삼자회 속에는 확실히 중생 구원된 신도가 있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럼 우리는 같이 참가하지 않고 같이 삼자회를 건설하지 않는가? 따로 나올 필요가 있는가?  이 문제는 교회 발전의 방향에 관계된다.

우선 우리는 교회의 머리와 교회발전의 추세를 식별해야한다. 이는 교회의 권력과 긍극목적에 관계되는 것이다. 한사람이 어떤 일을 하기전에 이일을 할것인가? 결과는 어떨까 까지 생각해 봐야한다. 결과가 더 중요하다.

삼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권위를 행사하지 못한다. 삼자회는 그의 여러 머리의 권력에 복종하는 것이다.  이것이 앞서말한 노출(폭로)현상의 유래이다.

삼자회의 발전의 방향이 삼자회 스스로의 신학에 의해 정해졌다.  삼자회 신파신학은 보편주의 종교 대연합 신학 관념이다. 그러면 최종적으로 세계 각 종교 대 연합으로 결합할 것이다.


계시록 17장 음녀의 앉은 물은--만약 다리의 바른 몸이면, 오늘날 삼자회는 대연합의 여론이다. 이 다리는  진입교이다. 이것은 십분 엄숙한 원칙성의 문제이다. 만약 이 문제를 간단화하면 퇴자를 맞을 것이다. 나는 이런 류의 사람을 알고 있다. 일만하고 진리는 관계하지 않는다 하며 삼자회 속에서 일한다. 결과적으로 실행할 수 없다. 떠돌다 나올 수밖에 없다.



중국의 목장은 매우 크다. 삼자회는 대목장의 몇 개의 점에 불과하다.  북경의 1천만 인구에  삼자교회당은 7개 뿐이다. 북경이 큰가 7개가 큰가? 교회당 밖의 목장과 비길바가 못된다.  당연히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신다. 교회내의 모두를 사랑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건립은 그리스도를 머리로하는 하나님의 교회이다. 이것이 동녀, 순결한 신부이다.

다시말해 우리는 음녀앉은 물과 같은 죄를 거절한다. 봉사는 길이 있는 것이다. 진리의 길이 없는 봉사는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