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자교회의 실체적 진실 (7)

2007.05.15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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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중선     번호 : 35
선지자선교회 게시일 : 2002/04/04 (목) PM 01:32:22     조회 : 73  

■ 삼자교회의 실체적 진실 (7)    




6. 삼자회의 본질을 인식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삼자회의 본질을 인식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은 삼자회가 많은 거짓 이미지(假想)를 갖고있기에 삼자회의 본질을 투시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6.1 삼자회의 외모는 교회 같지만 실질은 크게 부패한 모임이다.
외모로 보면 삼자회는 모든 면에 장식이 구비되어 있다. 넓은 교회당이 있고 긴 까운을 입고 강단에 선 목사, 백의 천사같은 성가대, 같은 성경을 갖고 줄지어 앉은 신도들, 많은 이름을 가진 종교 지도자, 그 외에 합법적인 보호의 우산이 있다.

그러나 삼자회의 내부는 어떠한가?

현대파가 있는가 하면 복음주의자도 있다. 현대파와 복음파는 물과 불의 서로 상용되지 않고 조화되지 않는 두 개의 대립되는 관점이다. 신앙과 불신앙간의 구별이 서로 뒤엉켜지고 연합의 가짜 이미지를 부여하고 합일의 초대장을 들고 해외에 가서 선전선동을 한다.


말타고 꽃구경하는 식인 외국인은 그 안의 실징적인 것을 보지 못한다. 삼자회 밖의 신도나 심지어 삼자회 내부의 신도들도 분별하지 못하고 삼자회의 본질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교회의 현상태에 대해 이러 저러하게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어떤 사람들은 "삼자회는 중국의 유일한 정통교회이고 가정교회는 모두 오합지졸이다"라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삼자회나 가정교회나 모두 하나님이 교회이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보는 사람은 극력 양자의 합의를 촉구하려 한다. 그들의 좋은 마음은 도리어 거꾸로의 범죄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삼자회는 가짜교회이고 가정교회만이 하나님이 중국에서 일으킨 진짜 교회다. 그것은 가정교회의 머리가 예수이고 진정으로 삼자를 실행하는 교회이기 때문이다.

신도 자신들이 교회를 관리하고 자신들이 교회를 먹여 살리고 평신도들을 일으켜 세워 양떼를 목양하게 했다. 가정교회가 아직 유년 단계에 처해 있어 자발적이고 조직이 없고, 지도자가 없으며 광활한 지역에 분산되어 집중하여 통일적인 관리를 할 수 없다.

사역자들은 조직신학의 장비가 없어 제각기 강의하기에 이단사설이 기회를 갖게 된다. 그러나 뿌리가 똑 바르고 싹이 꼿꼿하기에 필연코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점차 성장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말하면 객관적 사실에 부합된다.



6.2 삼자회는 전후가 다르다.
삼자회는 교회의 외형을 갖고 있어 사람들이 식별하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더욱 깊은 미혹성이 있다. 바로 삼자회의 앞뒤가 다르고, 상하가 통일되지 않고, 겉과 속이 일치하지 않는다.


이것은 바로 삼자회가 생존하기 위한 필요 때문에 책략상 변한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변하든 삼자회의 본질은 떠나지 않는 삼자회는 여전히 삼자회이다. 본질적으로 삼자회는 한 번도 변화된 적이 없다. 삼자회의 지도자가 변하지 않았고, 삼자회의 신학이 변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더욱 앞으로 발전되고 더욱 구체화된다. 이것이 삼자회의 본질이다. 책략상 변하는 것도 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새로운 형상을 세우지 않으면 적을 많이 둘 것이고 자아 고립, 내부가 더 혼란하고 신도들은 모두가 버리고 저절로 무너지고 말 것이다.




그럼 먼저 삼자회 전후가 다르다는 것을 보자.
50년대 삼자회가 발표한 문장은 사기등등하고 피 냄새가 하늘을 찔렀지만 지금은 화약냄새가 감소되었다.

<斗>를 내걸고 일어선 삼자회가 지금은 <사랑 愛>의 깃발을 들고 크게 논하여 이것은 은덕이 "더욱 많아지고" 더한다.

머리가 되어진 삼자회는 이제 하나님의 사랑인 사랑이라는 것을 내세워 더 많은 은혜, 은혜를 받는다 한다. <洪恩>이라 한다.


정광훈은 <우주적 그리스도>라는 문장에서 "생각하기에 은혜는 오직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만 부여한 것이다, 이 말은 사람은 실제로는 하나님이 성육신이 인류에 준 영향이 아담의 타락이 인류에 대한 영향보다 못하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우리가 본 하나님의 사랑과 모순되는 것이다."(신학지 제 14-15기 4항)


그들이 말한 뜻에 따르면 아담 한 사람이 죄를 범해서 모든 인간이 죄인이 되었다. 그러면 예수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는 신자든 불신자든 모두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의 영향력이 아담보다 못하다. 이런 설법은 성경의 가르침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사랑을 보편구원론으로 연장시킨다. 과거에 <斗>만 강의하던 그들이 지금 사랑을 크게 말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지금은 그들이 변하였다는 가짜 이미지를 심어준다.

과거 그들은 삼자회에 참가하지 않는 자는 나라를 사랑하지 않는 자이고 사회주의를 반대하는 반혁명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이렇게 하는 것은 그들 스스로 삼자회가 하나의 정부요, 관변 단체임을 스스로 승인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과거 삼자회는 공안보다 더 공안같이 하여서 신도들의 인상은 삼자회는 교회 중의 공안국이어서 인심을 얻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지금 종교 지도자들은 신도들을 체포하는 일에 참여하지 말라고 하는데 이것은 정말 여기는 은 삼백냥이 없다는 격이다.


나는 모 지방에서 두 번이나 집회를 취체당하고 사람들을 잡아간 일을 알고 있다. 이에 대해 삼자회 사람들은 공개적으로 전화를 걸어 공안국에 보고하였다고 하여 그들은 이것을 공(功)이라고 거리낌없이 말한다.

그전과 다른 점이라면 과거처럼 공개적으로 공안국 요원을 데리고 가지 않았을 따름이다. 해외 사람들의 마음을 사려고 지금 삼자회는 모든 외국 선교사들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고 재삼 설명하고 과거 이름을 거명했던 허드슨 테일러한테도 우호의 손을 내민다. 과거 자주 보던 라는 말도 삼자회 문장에서 다시 볼 수 없다. 필경 <之流> 설법은 일대...  이기에 타격면이 크다.



삼자회가 확대하고 단결하는데 불리하며, 적을 많이 만들게 되고 자아 생존을 위협한다. 그들은 과거가 투쟁이었다는 것을 승인하면서도 계속 싸우고, 스스로도 보장할 수 없으며, 서로의 좋은 관계를 위해 자리를 내어주어야 한다. 그러나 과거의 투쟁도 좋고 지금의 화목도 좋으나 모두 자기를 위하는 책략 수단일 뿐 아무리 변해도 중심을 변하지 않는다.




6.3 삼자회 상하가 통일되지 않는다.

삼자교회에 예배드리러 가서 가끔 사람을 감동시키는 설교를 들을 수 있어서 삼자교회도 괜찮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나의 친척 하나는 한번 삼자회의 설교를 듣고 감동을 받았다는 예기를 나에게 했다. 나 역시 감동을 받았다.

다만 그는 이렇게 설교하는 것을 지도층에서는 강력 반대함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들은 말하기 "많은 전도인들이 교회의 전통교리를 선포한다. 중요 사람은 서방에서 오고 내용상 보수와 복음주의에 속하고 형식상에서 부흥파에 속한다. 그들은 현대화와 상황화를 비정통, 위험과 이단으로 보고 일체의 현대화와 상황화로 혁신하는 것을 냉담하고 의심하고, 심지어 적대시하는 태도이다.(신학지 21기 21항)


성도들은 설교가 좋다고 여기지만 위에서는 욕한다. 그럼 왜 위에서는 반대를 하는데 아래인 교회에서는 기독교 진리가 담긴 설교를 하는가?

이것에는 역사적인 배경이 있다. 중국의 대부분의 성도들은 복음적인 신앙이다. 이들은 일관적인 정치 설교에 매우 반감을 갖는다. 그래서 일시적으로 일부 복음파의 목사들이 강대상에 올라가는 것을 허용한다.


앞에서 이미 말한바와 같이 삼자회는 한차례의 정치운동과 공소 투쟁 중에서 탄생했다.  당시의 배경하에 삼자회에 참가하지 않는 자는 반동에 속했다.

못 견디는 자는 삼자회에 참가하는 것이 유일한 출로이다.
그리하여 적지 않은 전도자가 참가했다. 단 사람들이 비록 삼자회에 참석하지만 원래의 신앙이 하루아침에 현대화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러한 목사들이 일단 강단에 오르면 기독교의 진리를 설교하기 마련이다. 이것이 오늘날 상하 불일치의 현상이 형성되게 되었다.



삼자회의 상층이 바로 자유주의 신학의 관점이고 삼자의 주류이다.
복음주의 목사가 성도들을 돕고 꼴을 먹이지만 상층은 이런 현상을 중심에서 떠나고 분열하는 것으로 여긴다. 그러기에  문 앞에서 팔고 있는 물건은 점주의 물건이 결코 아니지만 최종지배자는 상층이다. 그래서 우리는 목전의 과도형식의 표면현상에 미혹되지 말아야 한다.



6.4 삼자회의 겉과 속의 불일치

겉과 속의 불일치, 이는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의 불일치 현상과 실질의 불일치이다.  표면상에서 중국기독교가 대연합을 했다. 중국은 기독교 중에서 유일하게 종파가 없는 나라가 되었다. 이것을 종교 지도자들은 자부심을 느끼고 나팔을 분다.


그러나 내부는 연합은 할 수 없어서 된 것이고,  본래 그들은 처등파성이 강한 작은 집단을 만들어서 연합의 앞에 뿌리려 했지만 현실이 그렇게 될 수 없는 것을 알고 일시 결합하여 과도적 현상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그들은 말하길 현재 계단적 연합 즉 저층적(底層次的) 연합이다 한다. 이러한 광범위한 연합을 그들은 거치장스러워 하고 그들의 신학 창조를 뜻대로 하였다. 그들을 말하면 진퇴양난에 놓이게 되었는데 그들이 갈망하는 것은 아무런 제약없는 독자적 천하이다.

그들의 말을 들어보면 "삼십년 경험으로 우리에게 알려준다. 이런 각종 기독교 성도들을 모두 포함해 광범위한 연합은 신학사상의 창조성과 교회의 개척성을 제한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주 기타 신도들의 민감을 건드릴까봐 걱정하고 위약적 연합을 파괴 할까봐 조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류가 진퇴양난에 빠진 것을 말하는데. --아무런 구속 없는 선택은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표명하는 것이 아닌가?"(신학지 21기 6항)


기독협회가 생긴 이후 표면상은 모두가 좋은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은 이 협력의 글자가 꼴보기 싫어 일찍부터 없애려 하였다. 다만 잠시 조용하기 위해 지도자는 말하기를 "중국의 기독교 협회는 저 협자를 잠시 보류해 두어야 할 것 같아 보인다"  이말 중 協자의 취소하는데 당연히 시간이 문제이고 어쩔수 없이 잠시 기다린다.



위에서 이미 말한대로 교회에서 아직 복음주의 신앙을 들을 수 있는 것을 보아 앞에서 말한 신파신학 관점이 아직 전반적으로 모든 층에까지 미치지 아니하였다. 왜냐하면 삼자의 상층은 광대한 복음파 성도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리라는 것을 심각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점에서 그들은 매우 조심하여 급히 서두루지 않고 접어두어 드러내지 않는다. 일단  터저 버리면 취약한 아래층과의 연합이 와해되어 그들이 중국 기독교 천하를 통일하려는 중간다리가 끊어져 버리기에 낭패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광훈은 그들의 신학자들에게 잠시 말을 적게하고 서두르지 말아 성도들의 종교 감정을 돌봐야 한다고 자주 말한다.


그러다가 적당한 시기가 오면 성도들을 이끌어 낼 수 있다고 한다. 다시 말해 이것은 완전히 약해서가 아니라 '역량의 원천을 숨긴' 이라하고 잠시적으로 참는 이것이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의 말을 보면 "합일을 위하여 신학자들은 필수적으로 자신을 억제해야 하며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평신도 앞에서 너무 앞서 주장을 내놓지 말아야한다. 하나의 중국교회를 위하여 신학을 썻다면 반드시 평신도의 신앙과 감정을 고려해야한다. 그러나 그들이 도전할 수 없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신학지 24-25기 43항)


중국 기독교 연합회는 매우 약하기에 교회의 지도자와 신학자들은 바삐 새로운 사상을 내놓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상황에서 속박이 있기는 하지만, 어느면에서는 약함이 표출되지만 다른이들을 너그럽게 하고 교회의 현실을 존중해  역량의 근원을 감추어야 한다.(신학지 24-25기 44항)



넓게 단결함은 필경 좋은 것이지만 부정적인 영향도 있다. 우리들이 신학적 사고를 할때 어떤 문제는 강의를 못하게 하거나 적게 말하게 한다. --단결을 위하여 우리의 신학 사유와 표달을 마음대로 하는 것은 일정 한도로 제한을 받는다. 이리하여 돌보는 것이 많아지게 끔되고 새로운 창조가 부족한 형세가 된다.  -- 단결이 많아지려면  신학의 새로운 것이 적어져야한다. --그러나 우리는 예전처럼 현재의 광경을 참아내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신학지 18. 23-24항)


위에서 볼 수 있듯이 그들은 자유주의 신학의 새로운 창조를 잊지 않고 있음을 매우 중시한다. 그것은 어느 날 아침 중국 기독교 이 성지를 정복하는 무기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신학자들이 잠시 안영하는 동안에 삼자회는 저희들의 계승자를 배양해 낸다. 그들의 희망은 후세대를 위탁하려고, 신학원을 계승자를 배양하는 실험 밭으로 만들었다.  

계승자에게  말하기를 "신학생은 사상상, 낡은 사상은 비교적 적고, 그들은 신 사회에서 성장해 쉽게 새 사물을 받아들인다. 우리는 신학원내의 큰 강에서 자전을 심는다(실험 밭)(여기서 자전은 신파신학)(신학지 3기 12항) 삼자회는 후계자 양서을 하는 동시에 또 백방백계로 기요파의 신앙을 바꾸려한다.

금릉신학원의 진택민 부원장은  절대다수의 복음파의 중국 성도는 투이지엔커라후터의 책을 추천하여 그들의 사상을 넓혀주고 배타주의 사상을 고쳐 주고 싶다.(신학지 17기 13항)



그들의 책략을 종합해보면 길은 몇 갈래로 나누어 동시에 병행하려한다. 연합을 과도형식으로 하고 소리 높여 모두를 받아들이고 다수로 소수를 부르고, 일시적 종교 각 인사들의 감정을 안정시키고, 복음파 목사들 앞에서 잠시 승부하는 것을 참고 먼저 삼자회 내부의 안정과 표면적 단결을 취하여 해외 기독교의 국제 승인을 얻는다.

이와 동시에 자유주의신학을 새로이 창조함을 가속화한다. 적극적으로 후계자를 배출하고, 동시에 연합도중 시기가 생기지 않도록 복음파 신앙에 대하여 트집을 잡는다.


그들은 생각하기에 일단 시기가 성숙되면 실험 밭의 새싹들이 중국의 기독교의 큰 밭에 이식하기에 충분하면 중국교회는 자연스럽게 모두가 자유주의 신학이 된다.

그때가 되면 각 종파를 장기적으로 세뇌 동화하는데, 방향은 그들의 사상관점에 적응하게 하여 순조롭게 변화하여 자유주의파의 방향을 따르며 같이 일하게 된다. 그때가 되면 기독교 협회의 협자도 실제상 취소된다.  이러면 삼자회가 중국기독교 통일의 한집으로의 이상이 실현되는 것이다.



잊지말라. 50년대에 들고 나온 깃발이 "중국 기독교 삼자혁신 위원회"라는 것을. 그때 어떤 사람이 제안하길 혁신이라는 두자가 눈에 가시처럼 보여--복음주의신앙을 고쳐 없애는 것으로 보인다 하여 혁신이라는 말을 애국이라고 고쳤다.  

비록 애국이라는 말에 반발은 하지 못하지만 눈이 있는 사람은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어떤 깃발을 사용하던 말이다. 성경의 기본신앙을 바꾸지 않으려는 것이 그들의 결론이다.

삼자회가 정말 하나님의 교회라면 우리는 그들이 중국의 교회를 통일하기를 희망한다. 반갑게 참가할 것이다. 이렇듯 종파가 없는 교회를 건립하는 것을 도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신학의 대 방향은  교회를 대연합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다. 간음을 행하는 교회를 건립하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이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들과 선을 분명히 한다. 그가 행하는 길에서 우리의 발자취를 남길 수 없다.  시편 1편  3자의 부(不)로 착실하게 옮겨야한다.  不從, 不站 , 不坐  때문에 꼭 지적할 것은 우리와 삼자회는 파벌의 쟁탈이나 종파의 쟁탈이 아니다.


삼자회의 인식에 대하여 우리는 반드시 그들의 신학을 알아야 삼자의 본질과 해악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우리는 개인의 원한이나 개인이 포착한 표면적 현상이나 치우친 감정으로 삼자회에 대한 결정을 내릴 수 없다.

나와 삼자회는 개인적 원한이 없다. 그도 나를 해치지 않았다. 처음 나는 삼자회에 있을 때 배불리 먹지 못하였고 그래서 나왔다. 현재 그들의 쏟아져 나오는 문서들에서 잘못된 것들을 보았다. 그것은 그들의 신학 방향이 성경의 교리와 완전히 어긋나는 것이었기에 나는 그들과의 선을 분명히 하게되었다. 내가 만약 계속 삼자회에 있다면 신앙에 간음을 하는 거짓 교회를 도와 세우는 것이 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 특히 마음 착한 외국인과 해외성도들은 삼자회의 진정한 성도와 기요파 목사님만 보고,  삼자의 원칙적이 잘못을  일반적인 결점으로만 보고 있다. 그래서 천천히 고쳐질 것으로 생각한다.



이런 견해를 가진 사람은 아래와 같은 맹점이 있다.

1) 그들은 삼자회의 머리가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것을 보지 못했다. 머리가 그리스도가 아닌 신체를 건립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건립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허무는 것이다.


2) 그들은 삼자회의 신파 신학의 방향을 중시하지 않는다. 이것은 치명적이다. 왜냐하면 신학의 방향 그것이 교회의 방향이기 때문이다. 자유주의 신학은 반드시 자유주의 신학 방향의 교회를 세운다. 신파 관점을 세계 기독교 연맹이 삼자를 지지하는 것이 이상할 것이 없다.  이해 할 수 없는 것은 국외 복음파의 일부인사들도 그들과 연합하여 현대파가 지도하는 가짜교회를 공동으로 건립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당연히 심사숙고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3) 그들 신파 신학의 지도층은 보지 않고 일부 목사만을 본다. 이 과도 시기에 기독교 신앙을 설교하는 것을 보고 삼자가 하나님의 교회라 보고 당연시 지지하고 있다. 자유주의파가 삼자의 중요 신학 사상임을 알지 못하고 있다. 결국 신파 신학의 교회를 설립하게 될 것이다.
때문에 이런 중요한 신학 입장과 교회의 가는 길의 문제에서 우리는 반드시 멀리 바라보면서 양쪽이 다 좋은 그런파는 될 수 없다.


신앙은 억제할 수 없는 것이다. 신앙은 신앙, 진리는 진리이다.  50년대의 신앙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가 이겼다고 말할 수없다. 성경이 존재하는 한 신앙의 후배가 있을 것이다. 사심 없이 경건히 성경을 읽게 되면은 기요신앙을 사람이 읽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진리전쟁의 승리의 북소리는 다시 울리게 될 것이다. 시간이 문제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