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자교회의 실체적 진실 (8)

2007.05.15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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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중선     번호 : 36
선지자선교회 게시일 : 2002/04/04 (목) PM 01:45:54  (수정 2002/05/18 (토) PM 10:13:45)    조회 : 115  

■ 삼자교회의 실체적 진실 (8)  

                                                                                       인보라

7.  결말
성도라면 반드시 교회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것은 중생하여 구원을 얻은 사람은 하나님 집의 식구이다. 마치 어린 아이처럼 태어나면 집에 속하게 되고, 집은 성장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그의 일생의 행위가 이 집을 세우는데 작용을 한다.  그러나 대다수의 평신도들은 이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나도 원래는 그러했다.


우리는 하나님 손에 있는 活石(살아 있는 돌)이다, 하나님의 영적 궁전을 건설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교회를 통하여 나타난다. 동시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이 몸에서 점차로 자라나는 것이다. 사랑 안에서 지어져 간다. 최후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 교회가 우리와 하나님에게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고 있다.


교회의 건립을 꺼내면 꼭 교회의 나아갈 길을 접하게 된다. 교회의 세움을 말하면 어떤 방향으로 발전하는 교회를 건설할 것인가? 매우 엄숙한 문제이다. 게다가 열심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이 증거하기를 하나님을 향한 이스라엘의 열심히 있었으나 참 지식이 없었기에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비통하고 교훈적인 것이다.


우리는 평신도이지만 교회의 지도자는 아니지만 교회 발전을 장악한 사람은 아니지만 우리는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 길을 걸으며  객관적으로 볼 때 교회의 건설에 작용한다. 무지는 쉽게 다른 사람을 뒤따른다. 맞으면 요행이고 틀리면 스스로 책임을 져야한다. 때문에 바보같아서는 안된다. 특히 지도자는 성경의 신학사상과 부합하여야한다. 그것은 신학의 방향이 교회의 나아갈 길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전은 황량하다. 자신은 지붕이 있는 집에 있다고 안심할 수 있는가?  건강한 성도는 가만히 있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이 혼란한 처지를 개인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먼저 하나님의 말로서, 특히 교회의 나아갈 길의 원칙을 삼아 참과 거짓을 교회는 분별해야 한다. 그리고 진리의 교회 입장에 굳건히 서야한다.


만약  거짓 교회가 앞길을 막아서면 개인의 힘으로 시대의 파도를 구할수 있겠는가? 확실히 힘들다,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의지를 조심스레 명석하게 운용해야 하는 것이다. 자유의지는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큰 신임이다. 최고의 영광과 존엄이다. 사람에 대한 제일 정확한 시험이기도 하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성경에 기록되어 후대에 경고하는 것이다. 때문에 그 안에서 경험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북쪽의 여로보암 왕은 두 마리의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이스라엘 민족을 숭배하게 하였다. 이것은 여로보암이 한 일이다. 무엇 때문에 성경에서 " 이것이 이스라엘을 죄중에 빠지게 하였다"고 말하는가 (왕상12;30)

그는 왕이다. 백성이 어찌 권력자의 말을 듣지 않겠는가? 백성은 어찌해야 하는가? 이 동일한 시대 배경하에  심지가 굳은 레위인과 여호화를 찾는 이스라엘 백성은 왕이 여호와의 도를 벗어나 자신들의 산업을 버리고 단호히 남하하였다. 여호화의 규정대로 예루살렘에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금송아지를 섬기지 않았다.(대하11;13-16)

이 한 무리의 레위인과 백성이 여로보암의 죄에 속하지 않았다. 분명하게 남아 있는 자들은 여로보암이 여호화를 떠난 죄 속으로 같이 빠지고 말았다. 그들은 어째서 레위인과 여호화를 추구하는 백성이 남하하여도 마음이 동하지 않았는가?  마음 편히 북쪽에 남아 벧엘과 단에서 금송아지에게 기도하는가? 그들은 어떻게 평민을 받아들이는가, 레위인은 그들의 제사장이 아니란 말인가?


당연하다. 그들 중 많은 사람이 무식한 사람들이다. 여호와를 율법에서 어떻게 제사하고 또 율법의 규정이 어떠한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평상시에 추구하지 않았기에 정확히 알지 못하여 판단을 흐리고 방향을 잃은 것이다. 그러나 한편 많은 사람들은 율례와 규범 그리고 율법을 알았지만 왕과의 대항이 무서워 득실을 고려하기 때문이며, 양심을 속여 변명하기를 "여호화여 금송아지는 여로보암이 만든 것이며 표면상으로는 숭배하는 척 하지만 마음으로는 하나님이 신이시며, 구하나니 책하지 마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용서하옵소서"


여호화 나의 하나님! 나는 힘없는 작은 백성인데 우리에게 왕의 명령에 따르며 권력에 복종하라 하셨습니다. 군왕도 하나님의 명령으로 되었으니 여로보암의 말에 복종함이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벧엘에서 금송아지를 숭배하지 않으면 어디에서 경배하겠습니까?

없는 것보다 낫지 않습니까? 나의 마음은 그래도 성실한 것인데. 금송아지도 좋고 벧엘도 좋고 레위인도 아닌것도 모두  외면적 일이다. 예절을 따질 필요가 없다. 심령과 성실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사실 이 모두는 스스로 안위하고 양심의 가책을 벗으려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의 말씀은 원칙이다. 조금도 융통 협상의 여지가 없다. 성경의 다른 곳에는 계 2장에서  두아두라 교회를 말했다. 자칭 여선지 요시벨이 나와 사단의 심오한 도리로 하나님의 종을 가르치고 신앙에서 간음의 죄를 범하게 하고, 이교도 우상 숭배자와 음행을 행했다.

이런 음란의 도가 교회에 주류가 될 때 요시벨의 교훈을 듣지 않는 무리가 있었다. 하나님은 그들을 그시대의 승리자로 불러주셨다(계2;18-26) 계 2,3장 일곱 교회 중 라오디아교회는 유일하게 칭찬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이런 실패의 라오디아 시대에도 승리자가 있었다(계 3;21) 이 사실은 오늘날 모든 충심으로 주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안위와 고무가 된다.


여로보암 그는 다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로보암처럼 여호와의 말씀을 마음대로 고치는 죄를 범하는 사람은 반복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

요시벨 여인, 오늘날 볼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을 유인하고 신앙에서 간음을 행하고 주님의 도를 혼란시키는 죄는 역사 중에서 여러 번 나타났다.


오늘날 종교 대연합의 소리는 시대의 새소식 처럼 들리고 솟아 보이고, 조류에 휩쓸리게 하는 힘이 있다. 바짝 따르지 않으면 필연적으로 파도에 휩쓸려 매몰되고,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게되며, 보수로 보이고, 완고하며 극단적인 사람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시대의 진리는 성경의 진리에 비하면 촛불과 햇빛을 비교함 같아 흑암이 사라지고 그림자가 자취를 감출 것이다.


사람이 만약 그날 하늘에서  나타나는 빛 가운데 있다면, 멀리서 자색옷을 입고 많은 민족, 사람, 나라를 유혹하는 멋있는 대음녀가 결국 불에 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오늘 삼자회는 종교대연합의 신학을 공개적으로 내어놓았다. 이것은 적그리스도의 두목이다. 요시벨의 음란한 도이고, 진리같은 비학문의 적인 것들이 이미 명확히 우리 앞에 놓여져 있다.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나갈 것이며,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