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교회사(요약)

2007.05.15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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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중선     번호 : 37
선지자선교회 게시일 : 2002/06/11 (화) PM 08:03:00  (수정 2002/06/30 (일) PM 10:52:20)    조회 : 153  

■ 중국교회사



1942년 남경조약이 체결되고 외국 선교사가 중국 연안 5개 항구 범위 내에서 자유로이 전도할 수 있게 되자 구미 선교회에서는 잇달아 선교사들을 중국으로 보냈다.

1858년 천진 조약 및 1860년 북경 조약 체결 후 중국의 선교 사역은 개척시기로 접어들었다. 서양 선교사 외에 중국 본지의 전도 동역자들도 양육되어지기 시작하였으며 각처에 전도소가 설치되었다. 전도 사역은 이 시기에 중국교회에 주요 임무였다.

교회와 선교회에는 중국에서 1877년 제 1차 [전국전도대회]가 있었고, 1890년 제 2차 [전국전도대회]를 개최했는데 당시 1,296명의 서양 선교사가 있었으며, 중국인 전도사는 1,657명이나 되었다.

1890년에서 신해혁명(1911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동북, 하남, 하북, 산동, 산서, 연해의 복주, 소주, 상해 등을 막론하고 교회는 모두 부흥을 이루었다.
산지에 사는 '묘족'의 경우에 집단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일이 일어났다.

민국 성립 후 기독교는 합법적 지위를 얻게 되어 복음이 더욱 널리 전파되었다.
신도들은 자신의 선교 책임을 느껴, 뜻을 세워 자립, 자양의 교회를 설립했다.

1911년에서 1919년까지는 중국교회의 자립시기라 할 수 있다.
화남의 장로회에 자립, 자양운동이 있었고,
화중에는 '중국예수교자립회' 운동이 있었으며,
화북에는 '중국기독교회'의 자립 운동이 있었다.

1918년 중국교회 지도자들은 중국내지전도회'를 발기하여 최초로 중국인이 조직한 선교회가 생겼다.

1920년대에 들어와 중국교회는 반기독교의 애국주의와 공산주의가 충돌하는 어려움을 당했다.

1921년 중화인민공화국이 건립되고 계속하여 국공합작 및 혁명군 북벌이 있었으며 비기독교운동이 전 교회의 전도 사역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교회는 핍박을 받았으나 끊임없이 성장하였다.

1930년대 교회는 더욱 서로간의 단결합일하고 자치, 자전, 자양(삼자)를 강조했다.

1936년- 1949년에는 중일전쟁을 겪었으나 신도수는 더욱 증가하여 56%의 성장을 536,689명(1936년)에서 834,909(1949년)으로 성장했다.

1951년 정부는 [미국원조금을 받는 기독교 단체의 처리]라는 회의를 열었다.
기독교 지도자들과 [중국 기독교 항미 원조 삼자 혁신 준비위원회]를 만들어 오요종이 주석이 되어 전국 기독인과 더불어 배척 운동을 벌였으며, 배척의 대상은 [제국주의]와 관련 있는 중서(中西) 선교사, 목사, 지도자였고, 이미 세상을 떠난 모리슨 테일러도 배척의 대상이 되었다. 이 때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중국을 떠났다.
그리고 서방교회와 무관한 자립교회 지도자 왕명도 등도 모두 계속하여 투옥되었다.

1954년 7월 '중국기독교 삼자애국위원회'가 설립되었으며 가입치 않으려는 전도인들은 모두 체포되었다.
'대약진' 시기에 목회자들도 모두 노도생산에 투입되었음으로 전도인들이 심히 부족하게 되었다.

1958년에 와서는 거의 유명무실하게 되자 예배드리고자 하는 신도들은 가정집회를 조직하게 되었다.

1966년 문화혁명 폭발 이래로 삼자교회의 활동조차도 정지되었으며 책임자들은 비판을 받았다. 신도들은 집회를 지하적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 환란 속에 많은 신도들이 핍박을 당했다.

1979년에 삼자 예배당이 다시 열렸다.

역사를 볼 때 '삼자'는 결코 교회의 새로운 구호가 아니다. 자치, 자전, 자양 정신은 일찍이 중국교회에 존재하던 것이다.
기독교가 중국에 들어온 후 험난한 개척시기를 거쳐서야 중국에 복음의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였다. 중국의 신도들은 이미 스스로 복음을 전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하였다.

1876년에 중국인 전도사는 750명으로 당시의 서양 선교사 473명보다 많았다.
다른 한편으로 중국에서 선교하면서 적지 않게 중국과 서양의 불평등 조약에 의한 편익을 제공받음으로 인하여 제국주의의 침략이라는 어두운 그림자를 뒤집어쓰게 되었다. 더욱이 [비기독교운동]의 질책, 반대 회의가 중국교회로 하여금 자립의 길을 걷도록 하였다.

1950년대에는 교회가 원래 사용하였던 자립, 자양을 하나의 조직으로 사용하여 교회에 핍박과 상처를 주었다.
100여 년 동안 중국교회는 전란, 불안, 공격, 핍박을 당했으나 신도의 숫자는 오히려 계속적으로 불어났다. 복음의 씨앗은 이미 중국 대륙에 뿌려졌으며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100배의 좋은 수확을 거둘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