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자 애국 운동의 기원과 전개

2007.05.15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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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중선     번호 : 8
선지자선교회 게시일 : 2001/12/25 (화) AM 00:08:18  (수정 2002/05/18 (토) PM 09:57:15)    조회 : 73  

■ 삼자 애국 운동의 기원과 전개

                                                                                 인보라

1. 기독교혁신운동 인사와 주은래와의 만남과 담화

기독교혁신운동 인사들에 의해 주도된 「기독교방문단」이 화북지역의 북경을 방문한 후 태원으로 가려고 할 때 갑자기 주은래의 접견 요청을 받아 1950년 5월 2일, 5월 6일, 6월 13일, 6월 20일 등 네 차례 만나 기독교의 현황과 앞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요종은 각지 교회가 강점되고, 교회업무도 간섭받고 있으며, 심지어 교회의 사역자들로 단기 구류를 받는 일이 생겨났다. 오요종은 정부에서 교회 보호명령을 내려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주은래는 기독교의 근본적인 문제가 중앙에서 명령을 내려서 해결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기독교 내의 있는 근본적인 문제에 있다고 보았다. 즉 기독교는 중국인에게 나쁜 인상을 주었는데 기독교는 서양의 종교이고 제국주의의 중국 침략과 불가분의 관계를 갔고 있다. 그래서 중국교회는 한쪽으로는 민족 반 제국주의적 결심에 굳건히 서며 「제국주의와의 관계를 끊어버리고」다른 한쪽으로는 독립자주, 자력갱생, 자치 자양 자전의 교회를 세워 나가야 한다. 「이럴 때만이 기독교회는 중국의 교회로 탈바꿈 할 수 있다」고 하였다.



2. 「삼자선언」의 작성과 내용, 목적

오요종 등이 북경에서 주은래와 대화를 나누면서 기독교계에서 어떤 입장 표명의 선언을 작성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 생각되어 선언문을 기초하기 시작하였다. 5월 20일 담화에서 주은래는 5차에 걸친 수정된 선언문 보았고 한 글자도 바꾸지 말고 발표토록 하였다. 결국 총 8차에 거처 수정되어 1950면 7월 28일 「인민일보」에 발표하였다.

선언문의 원래 이름은 〈중국기독교가 새로운 중국 건설가운데 노력하는 길〉이며, 보통「삼자선언」이라 한다. 「삼자선언」은 4부분으로 나누어 졌다.

(1) 서론 : 기독교가 제국주의와 깊은 관계가 있으며, 이용을 당해왔다. 새 중국에서 기독교의 정치적 입장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 본 문서를 발표한다.

(2) 총체적 임무 : 중국기독교교회와 단체는 공동강령을 철저하게 옹호하고, 정부의 영도아
래  제국주의, 봉건주의와, 관료자본주의를 반대하고 독립, 민주, 자주, 평화, 통일과 부강한 새 중국의 건설을 위해 분투한다.

(3) 기본방침 :
1) 제국주의의 죄악을 바로 알고, 기독교내부의 제국주의의 영향을 제거하고, 제국주의를 경계한다. 교회로 하여금 전쟁 반대, 평화 옹호운동을 참여하며, 정부의 토지개혁운동을 이해하고 옹호하도록 교육한다.
2) 단 시일 내에 자치, 지양, 자전 운동을 완성하며, 자아 비판과 여러 가지에 있어 정검 정리, 간결 절약을 하여 기독교 혁신의 목표를 달성하자.

(4) 구체적 방법 :
1) 외국의 인재와 경제를 협조 받는 교회와 단체는 구체적 계획을 작성하여 최단 시일 내
에 자력갱생의 목표를 달성한다.
2) 이후의 기독교는 종교적인 측면에서 기독교 본질에 대한 깊이 있는 인식, 교파간의 단
결, 지도자의 양성, 교회제도의 개선 등에 주목 해야한다. 일반적인 측면에서는 반제국주의, 반봉건, 반관료자본주의의 교육과 노동생산, 시대에 대한 인식, 문화오락 활동, 글 익히기 교육, 의료보건, 아동교육등 인민을 위한 봉사에 주력 해야한다.


「삼자선언」은 기독교가 제국주의에 의해 이용되었고 제국주의와 불가분의 관계가 형성되어 있음을 전제로 하며, 새로운 중국에서 기독교 교회와 단체는 정부의 영도를 받아 새 중국 건설을 위해 투쟁해야 하며, 최대의 노력과 효과적인 방법으로 제국주의를 숙청하고 경계하며, 최단 시일 내로 자치 자양 자전을 이루도록 천명하였다.



3. 서명운동의 전개와 기독교 항미원조 삼자혁신 운동위원회 준비위원회의 결성

「삼자선언」의 발표와 더불어 오요종등 선언문 발기인 40명이 <문서 발기인이 전국의 동역자에게 드리는 편지>를 「삼자선언」과 함께 전국 각 교회에게 발송하였으며, 「삼자선언」에 서명을 요구하였다. 이로서 서면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서명운동은 「삼자선언」의 취지, 목적에 대해 중국기독교인의 찬동과 태도 표명을 요구하는 것이지만, 당과 정부의 특별한 지지와 영도고 인해 군중운동의 형식으로 기독교 내에서 전개 될 수 있었으며, 1950년 8월에 1527명, 1951년 4월에 180,000명, 1954년에 총 417,389명이 서명하였다. 이 숫자는 당시 기독교 인구의 절반이 된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의 발발로 중국은 미국의 위협을 느꼈으며 특히 미국 제7함대의 대만해협 보호로 인해 중국의 전쟁 개입이 불가피 하게 되었다. 국내에서 「항미원조」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하였다. 또 1950년 12월 16일 미국 정부가 그의 관할 구역에서 중국과 한국의 재산을 통제하며 미국의 선박이 중국 항구로 들어가는 것을 금지하였다. 이러하기에 중국의 정무원에서도 12월 28일 중국내의 미국 재산도 통제하며, 공적으로 또는 사적인 적금도 동결시켰다.

1950년 12월 29일 정무원에서 미국의 보조금을 받는 문화, 교육, 구제기구와 종교단체에 대한 방침을 발표하였다. 1951년 4월 16-21일 북경에서 「미국의 보조금을 받는 기독교단체에 대한 처리 회의」(「북경회의」라 약칭함)를 개최하였다. 「북경회의」는 중앙인민정부 정무원 문화교육위원회의 종교사무처의 주최로 열렸으며 총154명의 인사가 31개의 기독교 교파와 26개의 기독교 단체의 대표로 참석하였다. 표면적으로 「북경회의」는 회의의 명칭처럼 미국의 경제적 지원을 받는 기독교 단체에 대한 처리회의로서 즉 일종의 「사무적 회의」였으나 실제로 이 회의의 목적은 기독교로 하여금 철저하게 제국주의와의 관계를 단절시키는데 있으며 그 방법으로 「고발운동」을 전개하였다. 또 「북경회의」 마지막날인 21일에는 「중국기독교 항미원조 삼자혁신 운동위원회 준비위원회」(이하 「준비위」라 약칭 함)를 결성하였다.



「준비위」의 주요 목적은 다음과 같다 :
(1) 기독교 단체와 기독교인 군중 속에서 애국 행동과 애국주의 교육을 추진한다.
1) 서명운동 -- 1950-1954년의 「삼자선언」, 1952년초의 「기독교인 반세균전 선언」
2) 애국시위 대행진 -- 1951년 「抗美援朝保家衛國大游行」
3) 헌금운동 -- 1951년 6월 1일 「준비위」에서 전투기 대포 의연을 호소, 총 선금 27억8
백 여만 인민폐로 「기독교삼자혁신호」라는 전투기 헌납
4) 여러 정치운동에 대한 옹호 -- 1951년의 토지개혁운동, 반혁명분자의 진압, 삼반오반운
동등의 운동 옹호, 예배당에서 국기 게양
(2) 제국주의가 기독교에게 준 영향을 철저하게 숙청한다.
「고발운동」의 전개를 통해 철저하게 숙청한다.
(3) 계획적으로 순서적으로 중국 기독교의 삼자혁신의 임무를 완성한다.
「삼자혁신학습반」을 통해 다시금 사상의 기초를 새우고, 기독교내의 미국 제국주의의 독소를 철저하게 숙청하여 「정화」의 임무를 완성한다.


4. 고발운동의 시작, 전개 그리고 종료

「북경회의」에서 가장 중요한 순서와 시간은 무엇보다도 고발대회였다. 대회에서 욱정일(旭定一)은 19세기의 미국 선교사 브리지만(Elijah C. Bridgman), 세계 에큐메니칼운동의 지도자인 존 모트, 선교사인 프랭크 프라이스 등을 고발하였고 이들이 정치적 동기로, 제국주의 침력의 목적으로 또 장개석의 국민당과 야합하기 위해서 기독교를 이용하였다고 하였다. 그 뒤를 이어 중경신학원원장인 진숭계(陳崇桂)는 미국 제국주의가 종교를 이용하여 중국을 침략하였는데, 그 도구로 사용한 것이 교회요 선교사이며 기독교 교리였다. 고발에 나선 기독교 지도자들은 선교사들뿐만 아니라 소위 교회의 패류로서의 교회 및 단체의 중국인 지도자들에 대한 고발도 서슴지 않았다.

「북경회의」가 끝나 각지로 돌아온 대표들은 각지에서 「북경회의」의 정신과 내용을 해당 지역에 알리는 전달대회를 개최하였고 계속적으로 고발대회를 개최하였는데 이로서 전국적으로 고발운동이 전개되었다. 지역의 고발운동 전개가 가장 잘 진행된 곳은 상해, 남경, 청도였다. 고발대회를 동해 소위 미 제국주의 분자와 교회의 패류들이 즉각적으로 공안경찰과 법원에게 넘겨져 이들이 반당, 반국가, 반혁명적인 악행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교회 밖으로 축출되었다. 무엇보다도 고발운동은 당과 정부의 지지와 지도로 진행되었고 또 그 뒤에 공안경찰과 법원대판 등이 있어 소위 「인민」, 「애국」, 「혁명」등의 이름으로 공권력을 행사하였기에 파죽지세로 교회와 교회단체 안에서 무서운 힘을 갖고 전개되었다.

1951년 말까지 전국133개 도시에서 대소규모의 고발대회가 총 228회나 개최되었다. 1952년부터 고발운동이 소강상태에 저어들었으며 그 이유로는 첫째, 이미 많은 지역에서 고발대회가 개최되었고 어느 정도제국주의 분자들과 교회의 패류들이 제거되었다. 둘째, 고발을 이미 끝마친 지역은 학습반을 개최하였고 더 이상 고발을 전개하지 않았다. 셋째, 1952년부터 중국사회는 삼반오반운동이 전개되었기에 기독교계에서도 기독교인의 삼반오반운동에의 참여로 군중운동의 중심이 고발에서 삼반오반으로 전이되었다. 1952년 상반기에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고발운동의 폭풍우는 중국교회에서 떠나갔다.



5. 고발운동의 내용과 방법, 목적

고발운동은 고발대회를 통해 전개되었다. 고발대회는 「북경회의」를 참석한 대표들이 각지에 돌아와 정부의 도움을 받아 「북경회의」의 정신과 내용만 전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정부의 기독교에 대한 생각과 기독교가 마땅히 인민의 입장에서는 것, 제국주의와의 관계 단절 그리고 「북경회의」에서의 고발대회 개최 상황, 내용, 개인적 느낌, 경험 등을 참석치 못한 사람에게 알리고 교육시키는 데 있다. 그리하여 기독교인 모두가 정치적 각성을 새롭게 하여 자기 개조를 준비하라는 일종의 촉구대회인 셈이다.

고발대회의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를 수 있으나 진행방식은 거의 대등소이하였다.
첫째, 대회 개최를 위한 준비로서 자료를 수집하고, 고발대상자와 고발자를 선정하며, 학습회를 통한 정치 각성을 향상하고 의식을 강화하였다.
둘째, 정부의 종교사무국 관리와 협의를 통해 고발대회의 개회 날짜와 제반사항 등을 토의한다.
셋째, 고발대회에 참석하는 참석자는 지역에 따라 입장권을 발급해 입장권을 지닌 자만 참석하도록 하는 경우가 있으며, 고발대회의 식순은 먼저 국가 제창, 국가 지도자들에 대한 경례, 대회장의 보고, 약정 고발자들의 고발, 대회장 또는 고발자가 고발 대상자들에 대한 처벌 요구, 대회결의와 결정 사항 채택, 구호 외침으로 끝난다.
넷째, 고발대회 중에 행하는 대회장의 보고는 주로 고발 의미의 재 천명하며, 그 지역의 제국주의자들이 어떻게 기독교를 이용하여 중국을 침략했는지 또 기독교가 어떻게 이용을 당해 왔는지를 자아 검토, 비판한다. 한편 약정 고발자는 고발대상을 고발하는 데 상황에 따라 도중에 또는 끝날 때 구호를 외친다. 보통 「미국 제국주의는 우리의 적」,「미제 타도」,「미제와 굳건히 관계를 끊자」,「삼자혁신운동의 실시를 노력하자」등이다. 또 고발 대상자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를 처단하자」,「피 값을 돌려 받자」등의 구호를 외쳤다. 그리고 고발대상자들에 대한 처벌도 교적을 박탈, 체명, 공안경찰 당국이나 법원에 상고, 심지어 사형에 처하도록 요구 등 다양하다.



고발대회에서 고발하였던 내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첫째, 미국 제국주의자들은 기독교를 이용하여 중국을 침략을 하였다.
둘째, 선교사들이란 미제의 파송을 받아 중국에 온 것이요, 복음을 전한다고 위장하여 간첩활동을 하였다.
셋째, 미제는 기독교를 이용하여 중국인민이 해방을 쟁취하는 혁명 사업을 파괴하였으며, 공산주의 반대의 독소를 유포하였다.
넷째, 교회 내에 미제의 앞잡이와 주구들이 있다.
다섯째, 미제는 기독교내에서 소위 「경건파」를 이용하여 「정치초월」의 말들을 유포하였다.
여섯째, 미제는 기독교 문서와 교육사업을 통해 문화 침략을 하였다.
일곱째, 미제국주의가 개인에게 준 영향이란 정치초월 사상, 친미숭미 사상, 개량주의 사상, 온정주의 사상, 개인주의 사상 등이다.



고발대회의 결과와 목적은 다음의 것이었다.
첫째, 사상적으로 잘못된 부분에 대해 투쟁한다.
둘째, 인민의 입장에 확고하게 서게 한다.
셋째, 적과 친구에 대한 한계선을 확실히 설정한다.
넷째, 반제애국의 뜻을 굳건히 한다.
다섯째, 정치적 각성을 높인다.





6. 서명운동과 고발운동이 중국교회에게 준 영향

(1) 서명운동 :
1) 정부가 본격적으로 군중운동을 통해 중국교회를 감독하고 지도하는 첫 번째 운동이다.  기독교인은 자의 또는 타의에 의해서 동원 참가하게 되었다.
2) 서명을 할 때 본인과 소속 단체가 새로운 정부와 함께 새 중국 건설을 하겠다는 의지를보이고, 지지를 보내는 것을 의미한다.
3) 서명자들은 후일 정부와 삼자 조직의 관리와 통치 대상이 된다.
(2) 고발운동 :
1) 정부가 정면으로 또 배후에서 기독교의 개인, 교회, 단체에게 주는 단호하고도 투쟁적인 정치운동의 본격 시작이다. 서명운동이 개인의 자의에 의해 참여되고 온건하다면, 고발운동은 강압적으로 타인에 의한 고발의 대상이 되며, 강경하다 할 수 있다.
2) 고발운동으로 인해 기독교 지도자들이 정부의 정치적 입장에 서있든지 아니면 고발의 대상이 되어 징계를 받든지, 선택의 갈림 길 위에 강압적으로 놓이게 되었다. 결국 고발운동은 기독교 지도자에 대한 정치적 투쟁운동이 되었다.
3) 고발운동으로 중국의 기독교는 정치적으로 당과 정부의 입장에서 각성하게 되었고, 미국과 장개석 정부, 국민당에 대한 경각심을 갖게 되었다. 누구든지 정치에 대해 무관심해지거나 정치와 무관할 수 없다. 결국 중국의 기독교는 강압적으로 정치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