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자교회 안개 걷기

2007.05.15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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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중선     번호 : 18
선지자선교회 게시일 : 2002/02/23 (토) AM 11:00:06  (수정 2002/05/18 (토) PM 10:05:32)    조회 : 58  

■ 삼자교회 안개 걷기    

                                                                                     인보라

1. 서언

삼자교회에 대한 견해가 천차만별이다. '삼자교회에는 구원이 없다'부터 '삼자교회가 진정한 교회이다'까지 이해의 진폭이 너무나 크다. 삼자교회가 중국의 현실 교회임은 사실이다. 그러나 삼자교회에 구원이 없는 것도 아니고, 삼자교회가 진정한 교회도 아니다.

삼자교회에 대한 견해가 이렇게 천차만별인 것은 삼자교회에 짙은 안개가 끼어있기 때문이다. 이 안개는 삼자측에서 인공적으로 만든 것도 있고, 삼자교회가 태생적으로 품어내는 안개도 있다.


안개가 잔뜩 끼어 있으면 앞을 바로 볼 수 없다. 본 다 해도 짐작할 뿐 정확하게 볼 수 없다. 삼자교회의 안개가 해외교회를 눈멀게 만들고 선교사들까지도 헷갈리게 한다. 삼자교회의 안개를 걷기 전에는 삼자교회를 정확히 볼 수 없다.

삼자교회와 교류하고 협력하려든, 삼자교회를 기피하고 비삼자가정교회와 교통하고 동역하려든지 삼자교회를 가리우고 있는 안개를 걷우어 내고 삼자교회를 바로 보아야 한다. 본 고는 삼자교회를 덮고있는 안개를 걷어 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2. 삼자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성도의 교제가 이루어지는 신앙공동체인가?

삼자교회는 신앙공동체가 아니라 애국종교사회조직이다. 그럼에도 삼자교회라는 교회명칭을 사용하기 때문에 교회라고 생각한다. 삼자교회에 신도들이 상당수 있고, 목사와 전도사, 장로들이 있고, 웅장한 예배당이 있으며 예배와 성례가 있으니 해외교회의 눈으로 볼 때 삼자교회를 교회로 보는 것이 무리는 아니다. 삼자교회가 조직이냐 공동체이냐가 규명되어야 한다. 삼자교회가 애국종교사회조직이라면 교회일 수 없고, 신앙공동체라면 교회일 것이다.


2.1 삼자교회는 중국공산당과 정부의 통일전선전략상의 필요에 의해 조직된 것이다.

주은래가 오요종 등의 친공적인 당시 교회 지도자들을 불러 몇 번에 걸쳐 설득하고 공작함으로 삼자교회가 시작되었다. 삼자교회는 공산당의 지시에 의해 시작된 것이지 당시 교회의 새로워진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대응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다. 삼자교회는 결코 삼자교회 신도들과 지도자들의 사회주의체제에 적응하기 위한 몸부림이나 상황화 작업으로 시작된 것도 아니다.

신앙공동체는 성령의 인도와 역사하심으로 형성된다. 초대교회는 성령의 역사로 성도들이 모여 신앙공동체를 이루었고, 초대교회가 되었다. 어느 교회나 진정한 교회는 성령의 인도와 역사하심으로 세워진다. 삼자교회가 중국에 시작된 것은 결코 성령의 인도와 역사하심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물론 하나님이 모택동을 통하여 중국 선교를 위한 정지작업을 하신 차원에서라면 하나님이 삼자교회의 설립도 허락하셨을 것이다.


2.2 삼자교회는 중국공산당의 영도와 중국정부의 법규에 따라 행동한다.

삼자교회는 말끝마다 당의 영도를 앞세운다. 중국공산당은 하나님이 만드신 신앙공동체가 아니라 무신론자들이 만든 애국종교사회조직이다. 물론 요즈음 중국기독교에 대한 문건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라고 천명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 삼자교회가 당의 지도에 순응하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신앙공동체인 교회는 성경 말씀을 모든 결정과 행동의 기준으로 삼는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행동한다.


출애굽 당시 광야교회는 불기둥과 기룸기둥으로 상징되는 하나님의 임재와 인도하심에 따라 진행하고 정지하였으며(민9:17-23) 신약시대 안디옥교회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파송하였다.(행13:1-3)

물론 삼자교회 내에 오바댜와 같은 믿음의 사람들은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 삼자교회의 교역자나 신도들 가운데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 있고, 받는 사람들도 있다고 본다. 그러나 삼자교회 전체적으로 볼 때 성령의 인도가 당의 영도를 대체하고 있다는 증거는 없다.


2.3 삼자교회는 당과 정부가 지시하고 요구하는 사항을 집행하기 위해 노력한다.

지역에 따라, 교역자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정부의 부적절한 지시와 현지 정부기관의 부당한 요구를 거부할 힘이 삼자교회에는 없다. 신앙공동체는 사람의 말을 우선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에 생명을 건다.(행4:17-20) 하나님을 대적하며 무신론을 강요하는 당과 정부의 지시와 명령을 집행하는 교회는 애국종교사회조직일 수는 있어도 신앙공동체인 교회일 수는 없다.


2.4 삼자교회는 예배는 드리고 종교적 행위는 있으나 성도의 교제는 없거나 약하다.

삼자교회는 같은 교회에 다니는 신도들간의 종교행위는 제한된 범위에서 허용해도 허용된 지역 밖의 신도들이 신앙을 목적으로 교제하는 것은 허용하지 않는다. 성도의 교제는 같은 지역교회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접촉할 수 있는 모든 성도들과의 교제가 되어야 한다. 신앙공동체는 성도의 교제가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성도의 교제는 성도간에 이루어지는데 명백한 불신자들이거나 그들의 조종을 받는 자들에 의해 구성된 삼자교회에서 진정한 성도의 교제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진실 일 수 없다.

삼자교회에서 신도간에 교제가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신도의 관리를 위한 것이지 그리스도의 몸을 건강하게 유지하게 하기 위한 성도의 교제는 아니다. 이와 같은 근거를 통해 볼 때 삼자교회는 중국정부의 의도대로 중국에 있는 기독교신도들에게 제한된 종교행위를 할 수 있는 장을 제공하면서 통일전선전략을 수행해 나가는 애국종교사회조직이지 결코 신앙공동체는 아닌 것이다.


3. 삼자교회는 성경적이고 복음적으로 변화하고 있는가?

삼자교회에 나타나는 현상들만을 볼 때 삼자교회가 제한된 여건 속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는 교회로 인식되기 쉽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삼자교회를 가정교회와 다름없는 교회로 인정하고 어떻게 하든 교류와 협력을 모색하려고 한다. 과연 삼자교회는 지금 우리가 교류하고 협력하기에 전혀 문제가 없는 형제 교회인가? 그렇지 않다.


삼자교회의 변화는 본질적인 변화가 아니라 필요에 의한 변신일 뿐이다. 삼자교회는 문화혁명 이전과 개혁개방 이후에 추구하는 바가 확실히 다르다. 50년대와 문혁이전에 삼자교회는 집요하게 기독교의 소멸을 추구하였다. 그 당시 삼자교회가 한 일이라곤 신앙을 가진 성도들을 박해하고 교회를 페쇄하며 명목상의 교회만 있게하여 기독교가 스스로 소멸하도록 하는데 치중하였다.


그러나 문화혁명이후 기독교를 소멸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개혁개방과 함께 삼자교회를 재건하도록 허락하였을 때 삼자교회는 기독교 소멸의 목표를 버리고 신도의 관리를 추구하게 되었다. 모든 법규와 내규, 삼자교회의 모든 역량을 신도의 관리에 두었다. 신도 관리에 필요한 일이라면 그동안 삼자교회가 금기시 하던 것까지도 허용하였다. 그래서 해외 교회들과 선교사들이 기대밖의 삼자교회의 사역을 보면서 삼자교회가 변하였고 변화가 가능하다고 착각하게 만들었다.


3.1 삼자교회는 복음적인 설교를 하는 교회들도 상당수 있다.

이는 복음적인 설교를 하지 않으면 교인들이 가정교회로 가는 등 신도 관리에 누수현상이 생기기 때문에 고육책으로 종교국이나 통전부 등 삼자교회를 관리하는 정부기관이 묵인하거나 종용에 의한 것이다. 정부의 묵인을 활용하는 삼자교회 교역자도 있고, 정부의 신도관리를 위한 종용에 따라 복음적이고 성서적인 설교를 하는 교역자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자생적이거나 본질적인 변화가 아니기 때문에 한계를 갖게 된다. 정부의 필요에 의해 얼마든지 다른 종용을 받을 수 있고, 그 종용을 마냥 거부만 할 수 없다는데 한계가 있다. 모 선교사에 의하면 2000년 6월 1일에 종교국에서 각 지역의 삼자교회에 다음과 같은 지침을 내렸다고 한다.

1) 구원에 대해 전하지 말 것.
2) 예수의 죽으심, 부활, 재림에 대해 전하지 말 것.
3) 세례, 성찬식을 할 때는 허락을 받아서 할 것.
4) 선행을 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강조할 것.
5) 18세 이하는 절대 종교를 가질 수 없고, 복음을 전하지도 말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자교회에 아주 복음적이고 헌신적인 교역자가 사역하고 있는 교회가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개별적인 면보다는 전체적인 관점에서 삼자교회를 이해해야 할 것이다.


3.2 어떻게 삼자교회에 복음적인 교역자들과 신도들이 있는가?

필자는 건전한 신학적인 지식과 탁월한 지도력을 갖춘 삼자교회 교역자를 만나 본 적이 있고, 탁월한 조선족 삼자교회 지도자를 만나본 적도 있다. 필자는 그들을 존중하고 귀하게 생각한다. 삼자교회에 복음적인 교역자들이 있는 것은 그들이 삼자신학의 영향을 받기 전에 복음적인 신앙을 갖게 되었거나, 삼자신학을 졸업한 후 어떤 획기적인 사건을 통하여 변화되었거나, 복음적인 선교사를 만나 제자훈련을 받는 등 깊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복음적인 믿음이 있는 교역자들이 삼자교회에 남아 사역을 하는가?

1) 영적인 분별력이 약해서 그럴 수 있다. 특히 개혁 개방 이후에 주님을 영접하고 교역자가 된 사람들 가운데 이런 경우가 있을 수 있다.

2) 삼자교회에서 나오면 당장 직장 문제가 해결되지 않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 육신을 갖고 사는 사람이 의식주 문제를 결코 무시할 수 없다.

3) 삼자교회를 나온다고 해서 비삼자가정교회가 곧바로 그들을 받아들이거나 사역의 장을 제공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도들의 경우 그저 예배를 드리고 신앙생활을 하는데 큰 제한이 없고, 신앙이 깊이 장성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별 애로가 없다. 영적 분별력이 크지 않은 상황에서 성경에 있는 내용을 설교하는 삼자교회의 실체를 간파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삼자교회에 다니면서 그 안에서 맺어진 인간관계도 작용을 할 것이다.


3.3 삼자교회가 자체내에서 교회 개혁을 추구할 수 있는가?

필자가 만났던 삼자교회 교역자는 삼자교회 안에서 삼자교회를 개혁하기 위해 삼자교회에서 사역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삼자교회는 과연 개혁될 수 있는가? 삼자교회가 개혁될 수 있다면 귀한 일이다. 그러나 삼자교회는 자체적으로 개혁될 수 없다.

삼자교회의 개혁은 삼자교회 자력으로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삼자교회가 유지되고 성장하는 것은 성령의 권능이 아닌 외부의 힘, 즉 정부가 실어주는 힘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기 때문에 자력으로 개혁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삼자교회의 개혁은 중국의 정치 개혁과 불가분리의 관계를 맺고 있다. 중국의 정치가 개혁된다면 개혁된 만큼 삼자교회도 개혁될 것이다.


중국이 개혁을 추구하였지만 그것은 경제방면의 개혁이었지 정치의 근본적인 개혁은 아니었다. 삼자교회가 신앙공동체라면 개혁될 수 있고, 개혁이 진행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삼자교회는 애국종교사회조직이기 때문에 자력으로 개혁될 수 없고, 앞으로도 개혁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삼자교회에서 개혁을 추구하는 것은 연목구어와 같다. 중국교회의 주인이신 주님이 특별 섭리로 삼자교회를 다루실 때에 삼자교회는 본래의 교회됨을 회복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다.


3.4 삼자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의 핵심은 무엇인가?

삼자교회를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간과하는 것이 있다. 그들은 삼자교회에 부분적으로 존재하는 복음적인 교역자들을 보면서 삼자교회의 가능성을 확신하거나 긍정적인 관점을 갖게 된다. 그러나 간과해서 안 되는 것은 삼자교회가 갖고있는 문제의 핵심이다.

삼자교회에 다양한 문제들이 있지만 그 모든 문제의 근저에는 구조의 문제가 있다. 삼자교회가 갖고있는 구조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는 삼자교회는 개혁될 수도 없고 복음적인 교역자들과 신도들이 마음껏 사역과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

제한된 범위에서(신도관리의 차원에서) 삼자교회 교역자들은 사역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소신껏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역을 하려 할 때 구조의 벽에 부딪히게 된다. 이 구조의 장벽 앞에 그들은 무기력할 수밖에 없다. 교역자들이 개인적으로 지혜롭게 사역을 하고, 설교를 하며 사역자 배훈을 할 수는 있다. 은밀하게 해외 교역자들과 선교사들과 교류하며 협력할 수도 있다.


실제로 화교들이나 한국교회 교역자들 가운데는 은밀하게 삼자교회에 가서 의공 배훈에 참여하고 이모 저모로 돕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 이상은 될 수 없다. 삼자교회의 구조가 정부의 관리에서 신앙공동체로서의 교회의 치리로 회복되지 않는 한 삼자교회는 교회의 교회됨과 교회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님이 특별 섭리로 삼자교회를 다루실 때에 삼자교회는 본래의 교회됨을 회복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다.



3.5 삼자교회의 전망은 어떠한가?

삼자교회의 장래에 대한 전망은 몇 가지로 예측할 수 있다. 중국의 정치개혁이 이루어지는 정도에 따라 다양한 양상으로 각지의 삼자교회들이 다른 선택을 할 것이다. 중국이 정치적으로 완전한 개방이 이루어질 때 삼자교회는 와해될 것이다. 왜냐하면 삼자교회는 자체의 응집력으로 유지되는 공동체가 아니라 외부의 힘에 의해 유지되는 조직체이기에 삼자교회를 지탱해주던 외부의 힘이 와해될 때 삼자교회도 와해될 것이다. 중국이 완전히 개방될 때 삼자교회가 선택할 수 있는 유형은 다음과 같이 예측된다.


1) 삼자애국운동에 앞장섰던 교역자들은 중국기독교회로 존립을 모색할 것이다. 다른 이름을 사용할지라도 지금의 중국기독교협회(CCC)를 유지하려 할 것이다.

2) 중도적인 입장에 섰던 교역자들은 중화기독교회(공산화 이전의 연합된 중국교회)의 이름으로 나아갈 것이다.

3) 상당수의 교역자들은 공산화 이전에 연계되었던 해외 교파교회를 재건하려 할 것이고, 현재 교류하고 있는 해외교파교회들과 연계하여 교파교회를 지향하게 될 것이다.

4) 상당수의 복음주의적인 교역자들은 비삼자가정교회로 들어갈 가서 그들의 일원이 될 것이다.


3.6 조선족삼자교회는 삼자교회의 진면목을 보여주는가?

한국교회에서 삼자교회를 접한 것은 대부분 조선족교회를 통해서이다. 그러나 조선족교회가 법적으로, 행정적으로는 중국교회이지만 삼자교회의 실체를 온전히 보여준다고 할 수 없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1) 중국 정부가 소수민족인 조선족교회에는 한족삼자교회를 엄격히 관리하는 것과는 달리 어느 정도 융통성을 갖도록 느슨함을 허용하는 특별관리정책을 실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한국교회의 선교비를 챙기려는 의도도 있고, 한국교회의 선교를 파악하고 관리하기 위한 목적도 숨어 있다.


2) 조선족 삼자교회는 한국교회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정서적으로 한국교회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심지어 조선족교회는 한국교회의 연장이라고 말하는 선교사도 있다. 그래서 조선족 삼자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설교를 들어도 한국교회와 별 차이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3) 조선족삼자교회에 소속된 처소들을 비삼자가정교회로 오해할 수 있다. 조선족삼자교회와 교통하고 협력하는 처소는 모두 삼자교회이지 가정교회가 아니다. 다만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여 비준을 받지 못하여서 처소로 남아 있을 뿐이다. 기회만 주어지면 비준을 받으려 할 것이다. 또한 조선족삼자교회와 교통하는 비삼자가정교회들이 있다면 그들은 진정한 비삼자가정교회라고 볼 수 없다. 비삼자가정교회는 성경 등을 삼자교회를 통해 구입하는 경우는 있어도 삼자교회와 교통하거나 협력하지 않는다.


4. 삼자교회와 교류하고 협력하는 것이 중국선교의 기회를 활용하는 것인가?
날이 갈수록 삼자교회와 교류하고 협력하는 해외 교회들이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이는 중국정부의 해외 교회에 대한 종교분야의 통일전선전략의 성공적인 공작의 결과요 삼자교회의 해외교회에 대한 수많은 기회를 활용하여 적극적으로 선전공작을 잘하였기 때문이다.

동시에 가정교회는 해외 교회에 공식적으로 자신의 형편과 처지, 그리고 가정교회의 결연한 의지를 천명할 기회를 갖지 못한데도 기인한다. 그래서 일부 중국선교지도자들은 삼자교회와 교류하고 협력하는 것을 유도하고, 삼자교회와 가정교회에 이중 교류와 협력을 하는 것을 장려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주어진 기회와 열린 문을 따라 삼자교회와 교류하고 협력하는 것이 중국선교에 헌신하는 지혜로운 처신인가?


삼자교회와 교류하고 협력하는 것을 터부시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중국정부의 통전전략을 정확하게 간파하고 삼자교회와 교류하고 협력하는 것의 실상을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이다. 삼자교회와 교류하고 협력하는 것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삼자교회와 협력하여 성경과 신앙서적을 출판하는 애덕기금회의 역할도 필요하고, 배훈과 신학교육, 신앙생활에 필요한 서적을 출판하는 홍콩복음증주협회 등의 사역도 가치가 있다.

그런 기회를 삼자교회와의 협력이라하여 거부한다면 그를 통하여 삼자교회는 물론 가정교회에 성경과 신앙, 신학서적을 공급할 수 있는 길이 차단되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삼자교회에 예배당을 지어주고, 삼자신학교 건축과 운영을 후원하고 신학생들의 장학금을 후원하는 것도 의미는 있다. 삼자교회와 공개적인 교류를 하는 것도 약간의 유익은 있다.

삼자교회를 방문하여 인사말을 통해 설교를 하고, 삼자신학교를 방문하여 장시간에 걸친 특강을 할 수도 있다. 설교를 통하여 복음을 증거하고, 특강을 통하여 신학의 핵심을 전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교류하는 복음주의적인 교역자가 사역하는 교회에서 은밀하게 진행하는 배훈반 등에서 강의를 하는 것도 필요한 일이다. 그렇게 함으로 삼자교회 사역자들에게 성경을 바르게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기능이 있음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삼자교회와 협력하여 성경과 신학, 신앙서적을 출판하여 공급함으로 보람을 누리고 있을 때 통전부는 그로 인한 해외교회에서의 중국의 종교자유에 대한 홍보를 충분히 하게 되어서 싱긋이 웃는다. 해외 교회가 삼자교회와 공개적인 교류를 할 때 해외 교회는 그런 기회를 통해서라도 삼자교회에 영향을 미쳤다고 좋아할 때


통전부는 그로 인한 삼자교회에 대한 해외 교회의 친밀감 조성과 이미지 향상에 쾌재를 부른다. 삼자교회와 삼자신학교에 주어지는 건축비와 운영비의 후원을 받고 설교와 특강의 기회를 주는 것을 묵인하고는 그로 인한 수입에 기분 좋고, 또한 삼자교회가 중국의 대표하는 교회인 것처럼 해외 교회에 각인되는 소득을 올리며 축배의 잔을 들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삼자교회와 교류하고 협력하는 것이 그렇게 좋은 일고 필요한 일이고 권장할만한 일인가? 누가 누구를 이용하는 것인가? 이것이 과연 주안에서 이루어지는 교회간의 교통이고 동역인가?


5. 결언  
삼자교회가 중국의 현실 교회임을 인정한다. 삼자교회에도 구원받은 신도들이 있고, 복음주의적인 교역자들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자교회는 신앙공동체인 교회가 아니라 중국 공산당과 정부의 통제와 관리를 받는 애국종교사회조직일 뿐이다.

그러므로 삼자교회는 외형적인 변신을 할 수는 있어도 본질적인 변화, 개혁, 교회됨의 회복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삼자교회의 복음주의적인 교역자들과 은밀하게 교류하고 협력하는 것도 필요하다. 하나님은 삼자교회 안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사랑하신다. 삼자교회 안에서 제한된 여건에서나마 믿음으로 살고 주님께 충성하고 있는 교역자들과 신도들을 섬기는 일도 필요하다.

다만 삼자교회의 안개를 거두어 내어 삼자교회의 실체를 정확히 이해하고 삼자교회에 있는 남은 자들을 섬기는 것이 요청된다. 삼자교회와 공개적으로 교류하고 협력할 때 통일전선전략에 이용당하지 않도록 주의하고 비삼자가정교회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삼가 조심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한국교회의 선교자원이 삼자교회에 편중되어 가정교회에 가야할 선교비까지 삼자교회와의 협력에 소진하는 과오를 범치 않도록 특별히 주의해야 한다. 지금까지 삼자교회에 선교비를 융단폭격하듯 퍼부은 것만으로도 족하다.

이제는 삼자교회와의 교류와 협력이 인재 양성으로 방향을 전환하고 프로젝트성 협력은 지양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 제한된 선교자원을 유효적절하게 활용하고 삼자교회가 변혁될 때를 대비해 준비하도록 섬길 수 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