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자운동과 중국교회

2007.05.15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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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중선     번호 : 63
선지자선교회 게시일 : 2003/02/17 (월) PM 01:34:28     조회 : 203  

■ 삼자운동과 중국교회


자치, 자양, 자전의 3자 운동은 중화인민공화국의 기독교 중심적 운동이며, 또 이 3자 운동의 조직이 교회를 대표하는 조직으로 되어있다.

1949년 10월 종교계 대표 7명이 정부의 초청으로 인민정치활동협상회의에 참가했다.
이 7인중 2명은 불교 대표자이고 5명은 개신교의 대표자로서 오요종(吳耀宗), 조자신(趙紫宸), 등유지(鄧裕志), 장설암(張雪岩), 유양모(劉良模)였다.

1949년 12월 25일부터 12월 27일까지 개최됐던 중국기독교협진회의 위원회에서는 전국의 교회에 출판물을 통해서 신중국의 교회로서 특별히 다음 사항을 강조해서 전달할 것을 결의하였다.

(1)교회의 중국화
운영 면에 있어서는 아직도 완전히 중국화가 되어 있지 않으며, 다른 집단과는 가까운 장래에 본색화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따라서 지금부터 모든 기독교 집단은 기본적으로 중국인으로서만 구성되어야하며, 운영기구는 진실로 민주주의적 정신을 양성할 수 있는 원칙에 서서 조직되어야 한다.

(2)해외로부터의 원조
중국 교회는 완전히 자립해야 한다. 그러나 중국교회가 현재로서는 경제적으로나 인적으로나 모든 것이 부족하고 어려움이 많음을 위원회에서 인정하고 있다. 이러한 관계로 외국 선교부의 원조를 계속 받기를 희망하고 있다.

(3)자 양
아직도 완전히 자양이 안 된 교회는 하루 속히 독립해서 자양의 교회로 만들어야 하며, 이것을 제일 목표로 설정해 놓고 있다. 일정한 기간 내에 그 목표에 도달하도록 필요한 모든 노력을 하고, 관계하고 있는 선교부와 구체적인 방법을 수립하고 있다.

또한 상기 위원회에서는 교회 지도자들이 전국 주요 도시를 방문할 계획을 세우고 있으며, 그 방문에 있어서는 각 지방에서 교회의 회의를 개최할 것을 결의하였다. 교회 지도자의 파견 계획은 중화기독교협진회의 계획에 의해서 이루어졌으며, 지방 방문시 인민정치협상회의 개신교 대표자와 남녀 기독교청년회, 전국협의회 등의 지도하에 진행되며, 그 여비까지도 이들 단체에서 부담했다.

지도자 단체는 5개조로 편성하였으며 동부, 중부, 동남부, 북부 및 동북부(심양) 지방으로 나누어 방문을 실시했다. 그 목적은 신정부의 근본 방침과 기독교계에 대한 요망 등을 성명하고 새시대 교회의 구체적인 방침을 토의하기 위함이었다. 중부지방 방문단이 1949년 12월에 중화기독교협진회에 보낸 보고서에 따르면 남창에서는 교회 대표자 5명과 정부 대표5명이 모임을 갖고 교회와 정부가 처음으로 교섭을 가졌다.

방문단은 강서 지방의 교회 지도자와 더불어 다수의 정부 요인들과 회담을 갖기도 하였다.
북부 지방 방문단은 1950년 5월 북경에서 주은래를 비롯해서 정부 요인과 몇 차례 회담을 가졌다. 이때 주은래는 교회가 불평등 조약 이래 제국주의와 결탁해서 내려온 것을 지적하고 이 관계를 완전히 단절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후에 오요종이 중심이 되어 새시대의 교회 방침을 설명하기 위해서 선언문 초안을 작성하여 그 해 5월에 오요종을 비롯한 인민 정치 협상대표자를 포함한 기독교 지도자들이 북경을 방문하여 정치 요인 몇 사람과 몇 차례 회담을 갖고 선언문 초안을 제시한 후 주은래의 의견을 물었다.


혁신 선언과 중국 교회

그 후 이 초안을 기독교 지도자 다수에게 제시하였으나 많은 비판이 가해져 이 수정안을 근거로 해서 정정을 하여 다시 주은래에게 제출해 인가를 얻어 그 해7월에 공포하였다. 이것이 그 유명한 '중국 기독교회 선언' 또는 '혁신 선언' 이라고 부르는 것인데, <중국기독교재신중국건설중노력적도경>이란 제목으로 전문을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1)총괄적 임무
① 중국 기독교회 및 단체는 철저하게 공동 강령을 옹호하며, 정부 지도 밑에서 제국주의, 봉건주의 및 관료자본주의에 반대하고 독립, 민주, 평화의 통일된 부강한 신중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싸운다.

(2)기본 방침
① 중국 기독교회 및 단체는 최대의 노력과 유효한 방법에 따라 교회의 군중에게 제국주의가 중국에서 저지른 죄악을 인식시키는 한편 과거에 제국주의가 기독교를 이용한 사실을 인식시켜 교회 내부의 제국주의 영향을 숙청하고 제국주의 중에서도 특히 미 제국주의가 종교를 이용해서 반동 세력을 배양하려는 음모를 경계토록 하며, 동시에 저들이 전쟁 반대, 평화옹호 운동에 참가하도록 호소하고, 정부의 토지 개혁 정책을 철저하게 주지시켜 옹호하도록 교육 시켜야 한다.

② 중국 기독교회 및 단체는 유효한 방법을 사용해서 일반 교인의 애국, 민주의 정신과 자존 자주의 심리를 길러내야 한다. 중국 기독교가 과거에 제창, 지도한 자치, 자양, 자전의 운동은 이미 상당한 성과를 거두어 왔다. 금후 최단 기간 내에 이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 동시에 자기 비판을 강화하여, 각종의 작업에서 검토, 정리하고 근검 절약하도록 하여 기독교 혁신의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중국 교회는 정부의 지도하에 반제국주의 운동을 추진하여 신중국 건설에 매진할 것을 새롭게 강조하고 나섰으며, 이를 근본 정신으로 해서 중화인민공화국의 교회 전체를 지도하며 통일시킬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운동이 바로 삼자 운동이다.
삼자란 자치, 자양, 자전의 약자이지만 1930년대의 중국교회 자립 운동과는 현저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이 운동의 성격은 철저하게 교회 혁신 운동 및 반제국주의 운동, 애국 운동을 의미한다. 삼자 운동으로서의 활동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혁신 선언의 서명 운동
이 혁신 서명 운동은 최초 선언문 발기일로서 인민정치협상회의 대표를 포함한 교계 지도자 40명의 서명이 있었는데 그 후 계속 서명운동을 펴서 1개월을 경과한 8월까지 1,527명이 서명을 하였고, 1951년 말까지는 326,465명이 하였으며, 1953년 9월까지는 400,222명이 서명함으로써 중국 각 지역의 개신 교회 지도자 대표 절반이 여기에 서명을 하였다. 이 혁신 운동에 앞장섰던 지도자는 1930년대의 삼자운동 책임자였던 오요종이었다.

(2) 반제국주의 운동 및 애국운동
이 운동은 1950년 한국 전쟁 때 '항미원조애국운동' 이라 명칭하고 교인들은 미 제국주의에 반대하고 조선을 원조할 것을 표명하였으며 교인이 개인 또는 연명으로 항미원조(抗美援朝)의 글을 써서 인민일보 및 공보 등에 발표하게 했다.

또 전국교회 및 기독교 단체는 '기독교삼자혁신호' 라고 명명하는 전투기 헌납을 위한 모금 운동도 전개하였다. 오요종의 보고에 따르면 15억 원을 목표로 출발하였는데 이것 보다 훨씬 많은 27억 원 이상이 모금되었다고 한다.

또 미국이 일본을 무장시키는 일에 반대하는 강연회와 시위운동을 전국에서 실시하였으며, 월남 전쟁이 발발한 후 1964년 9월에는 반미 투쟁을 지지하는 성명서를 내기도 하였다.

(3) 공소운동
이 공소운동은 교인들 가운데 스스로 반제국주의 분자를 고발하게 하는 운동으로 각지에 공소회를 개최케 하여 제국주의 분자와 친구로 생각되는 사람들이 고발 연설을 하게 하였다.

제1회 공소회는 1951년 5월에 시작하여 그 해 12월까지 108회에 걸쳐서 공소회가 있었다.
1053년 9월까지 133개 도시에서 227회나 성토가 있었다.
고발된 주요 이유는 종교의 이름 밑에서 제국주의와 반동통치 계급의 이익을 꾀하여 출판 사상, 무저항주의, 종말론의 사상을 선전하여 중국 교회의 애국사상을 소멸케 했다는 등의 조항이었다.

또 외국 선교사의 경우는 좋은 집에서 잘 먹고 잘 살면서 단지 중국인에게는 빈곤을 감수하면서 영혼 구원만을 강조하는 일도 이에 해당되었다.
중국인의 경우에는 미 제국주의 수족으로 활약했던 자, 장개석을 돕고 인민을 압박한 자, 장개석 정권하에서 유교적 신생활 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자 등이다.

그 후 1958년, 즉 백화제방 시대를 지날 무렵에 전국 각지에서 개신교 대표자 130명이 북경에 초청되어 정부 요인으로부터 반혁명분자로 간주되는 목사, 전도사 6명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이유는 정부의 정책과 공산주의를 비판한 것과 삼자애국운동에 해를 주었다고 진술한 것이다. 대표자들은 각기 임지에 돌아간 후 이 노선에 따라 각지에서 공소회를 개최하였다.

(4) 학습 운동
이 운동은 그리스도를 신봉하는 교인들이 신중국 정치와 가치관을 학습하는 운동이다.
기독교 출판부인 '청년협회서국'은 <신시대 학습총서>를 출판하였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ː오요종<기독교 혁신운동 학습 수책>
ː유양모<기독교와 애국주의>
ː응원도<기독교적 공척운동>
ː유양모<모택동 사상 학습 수책>

또한 상해, 광주, 북경, 남경, 중경, 서안, 장사, 무한, 항주장 등지에서 시사 학습회를 조직하였다. 이 학습회는 삼자운동위원회와 정부 당국이 공동으로 개최하였다.
예를 들면 1953년 8월 20일부터 11월 16일까지 상해에서 개최한 학습회는 81명의 목사, 전도사 등이 참석을 하였으며, 강사는 9명의 공산당원과 2-3명의 교인이었다.
일과는 아침 30분간 예배를 드리고 강의, 토론으로 학습을 실시하였다. 강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①학습의 목적과 그 올바른 학습태도에 대하여
②중국의 위대함과 장래의 전망에 대하여
③제국주의에 대하여 특히 제국주의가 기독교를 문화 침략을 위해 이용한 것에 대하여
④정부의 종교정책과 삼자운동에 대하여

또한 토론은 참가한 한 사람씩 과거를 말하게 하고 자신에 대한 비판을 하게 하여 새로운 학습에서 얻은 지식의 바탕 위에 자신의 삶을 정립하게 하였다.

(5) 출판물 심사
기독교 출판물은 친미 반공의 독소를 갖고 있으며 이러한 출판물에서 제국주의 사상을 제거하기 위해서 심사하는 일이 출판물 심사이다. 최근 1951년도에 상해, 성도, 한구의 주요 기독교 출판사 서적 1,750종을 심사한 결과 절반 이상이 불합격을 당하였으며 또 상해에서 발행한 약 40종의 정기 간행물에서도 11종이나 정간 처분을 당하였다. 또한 1951년 4월 삼자혁신운동위원회 준비위원회가 성립되었을 때에 정식으로<주간 천풍>을 동 위원회의 잡지로 선정하였다.


삼자운동의 조직화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애국, 반제국주의, 삼자혁신운동의 조직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으며 1951년 4월 북경에서 북경회의가 개최되었을 때에 개신교 지도자 151명과 정부 요인간의 회의가 열렸다.  이 대에 25명의 인원으로 중국 기독교 항미 원조 삼자혁신운동위원회 준비위원회가 조직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해서 전국적인 조직망을 갖게 되었다.

1951년에는 170개, 1953년 9월까지는 257개가 조직되었다.
1954년에는 정식으로 '중국기독교 삼자혁신운동위원회'가 성립되었다.
위원장에는 오요종이 선출되었으며, 이 삼자 운동의 조직은 종전의 어느 교회 단체 보다 가장 많은 교파가 참여한 전국적인 조직체가 되었으며 중국의 모든 기독교를 통합해서 인민 단체로서 정부의 지도하에 혁명과 건설에 협력하고 나섰다.

이상과 같은 삼자운동 조직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종교 정책에 순응, 종교계에서 제일 먼저 새로운 체제로 정비를 한 것이며, 이 후에 카톨릭, 불교, 이슬람교, 도교도 모두 이와 비슷한 체제로 변모하였다.

구체적인 방법
①중국 기독교회 및 단체들 가운데 아직도 외국인 또는 외국의 경제 원조에 의존하고 있는 곳은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서 최단 시일 내에 자립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②금후 중국 기독교회 및 단체는 종교 활동 면에서 기독교의 본질을 깊이 인식하고 교파간의 단결, 지도자 양성 및 교회 제도를 개혁하는 일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일반 활동 면에서 반제국주의, 반봉건주의, 반관료주의, 반자본주의적 교육 및 노동 생산 시대를 인식하여 문예 활동, 식자교육, 의료위생 및 아동 복지 등 인민을 위한 사업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그렇다고 모든 중국 교회 지도자들이 삼자 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신중국 건설에 동참한 것은 아니다. 여기에 반대를 하는 사람들이 여기 저기서 나타났다.
개신교 대부분이 이 삼자 운동에 협력한 것처럼 말하지만 실은 혁신 선언문에 서명했던 사람들은 전체의 약 절반 정도였고, 이에 반대했던 사람들 중에는 삼자운동에 완강히 저항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 중에는 얼마 있지 않다가 체포되어 투옥당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 체포 이유가 정치적 이유이지 종교적 이유는 아니었다고 발표하였다.

실질적으로 삼자교회를 반대했던 사람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왕명도는 북경에서 유명한 설교자로 소문이 나 있었다. 그는 삼자운동은 "예수를 파는 것이다"라고 강하게 삼자교회에 대하여 비판하면서 끝내 삼자교회에 협력을 거부하였다. 그래서 1954년 9월 북경에서 왕명도를 고발하는 공소회가 열렸다. 그 후에도 왕명도는 계속해서 삼자 운동을 반대하고 나섰으며 그가 발행하였던 계간지 <영식(靈食)>에 삼자교회에 대한 반대 의견을 연재하였다.

이 일로 1955년 8월에 체포되었다가 그 다음 해인 1956년에 석방되었다. 그는 1년 간 옥중 생활로 건강을 잃어 출감 후 곧 바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1966년대에 접어들면서 삼자 운동 조직은 점점 확대, 강화되어 갔다. 이와 관련되어서 다른 성격의 교파와도 합동 운동이 진척되어 갔다. 또한 1958년 이후 노동법의 변화에 따라 목사, 전도사도 종전 보다 더 많은 시간을 생산 현장에 충원하게 되었다. 이 일로 한 지역에 하나의 교회만 남겨 두고 여러 교파가 합동이 되어 한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고, 이 일로 문을 닫는 교회가 속출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북경에 잇던 65개의 교회가 동서남북에 각각 1개만 남겨 두고 모두 문을 닫고 말았다. 역시 상해에서도 200여 교회 중 23개 교회만 남겨 두고 모두 문을 닫고 말았다.
폐쇠된 교회당은 정부가 공용기관으로 사용하였으며 많은 목사, 전도사, 신학생들이 주로 노동현장이나 공장에서 종사하게 되었다.

이러한 관계로 교회는 합동되고 이제 까지 삼자 운동에 가입하지 않았던 교회도 정부의 강요로 이 운동에 모두 참여하게 되었다.

산서성 태원에서는 중화기독교회, 내지교회, 구세군, 기독교청년회, 소그룹교회 등 8개 교파가 합동해서 하나의 교회로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여기에 3-4명의 목사님만 남겨 두고 다른 목사는 전부 생산 노동현장으로 투입시켰다.

이 가운데 노령자와 병약자는 퇴임을 시켰다. 따라서 8개 교단의 모든 행정과 조직은 해산되고 교회의 운영은 삼자운영위원회에서 맡고 교회 재산도 모두 위원회가 관리하였다.
또한 교파를 합동하였기 때문에 교회 의식이나 성경 해석도 공동으로 규칙을 만들었고, 찬송가는 삼자운영위원회에서 편집하여 하나로 만들었으며, 성경 강의에서는 최후의 심판을 제외시켰고, 정의와 악의 대립, 노동의 신성, 교회는 하나라고 강조하였다.

이상과 같이 삼자운동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종교정책을 위한 운동이었음으로 삼자교회는 교회로서의 본질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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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중국개신교회사'의 책에서 발췌하였습니다.
제  목: 중국 개신교회사
지은이: 김수진
출판사: 홍성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