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주재 토마스 선교사와 한국 선교

  선지자선교회

중국과 한국은 예부터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나라이다. 때로는 그들이 일으킨 엄청난 전쟁의 재난으로 고통을 받았던 것도 사실이지만 또 어느 때는 그러한 과거를 잊은 채 이웃형제처럼 지내왔던 것도 사실이다. 한때 굴욕의 역사도 이었고, 그러한 굴욕의 역사 속에서 중국을 통해 많은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갖기도 하였다.

 

한국에 천주교가 전해진 것 역시 중국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아시아에서의 천주교 선교는 사비엘 선교사의 의해서 1549년 일본 선교로부터 출발하였다. 그 후 그는 아시아에서의 선교는 중국을 빼 놓고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을 하고, 15528월 중국 광동성에서 가까운 상천도라는 섬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아깝게도 사비엘 선교사는 중국 선교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 후 로마 교황청에서는 1568년에 카르네이오를 중국 주교로 임명하여 본격적인 중국 선교에 착수하였으며, 1573년에는 카르네이오의 뒤를 이어 발리야니가 40명의 선교사를 이끌고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다시 발리야니 선교사는 루지에리를 초청하였으며, 또한 루지에리는 마테오 리치를 초청하였다. 이들은 마카오에 머물면서 중국어 학습을 받았는데, 드디어 1583년 중국 본토 광동성 책임자로부터 허락을 받은 것을 계기로 중국 선교의 문이 열리게 되었다.

 

이미 중국에 천주교 선교사들이 입국하여 선교를 펴 나가고 있을 때, 우리나라에서는 임진왜란이 터졌는데, 이 왜란은 1598년에야 끝이 났다. 그런데 이러한 왜란이 지난 지 30년만인 1627년에 북방에 자리잡고 있던 여진족(후금 또는 청나라)의 침략으로 정묘호란을 만나게 된다. 이러한 침략은 다시1636-7년 병자호란으로 끝나지만 결국 승리는 청나라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 일로 승리한 청나라는 엄청난 물자를 조선에 요구하면서 아울러 왕세자인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인질로 데리고 갔다.

 

당시 청나라는 국토를 정비하고 다시 명나라를 침공하고 나섰으며, 명나라의 수도 북경을 함락하고 1644년에 수도를 북경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 때 서현세자와 그 일행도 모두 북경으로 옮기게 되었는데 여기에서 소현세자는 북경에 머물고 있던 천주교 선교사 아담 샬 과 사귀게 되었다.

 

따라서 한반도에서는 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조선 사회에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고, 이 일로 조선에서는 중국의 여행자들이 빈번해지면서 한역 서학서의 유입이 있게 되었다. 한편 조선과 중국, 중국과 조선의 정기적인 외교 사절이었던 부연사행의 일원이었던 조선 사신들은 북경을 방문하면서 서양의 문화를 자연스럽게 접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북경에 있던 천주교회당을 방문하여 선교사를 만나게 됨으로써 천주교가 한국에 유입되게 되었다. 한편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자였던 이승훈은 아버지 이동욱을 따라서 북경 가게 되었다. 1784년 그라몽 선교사로부터 영세를 받게 되었다. 이때가 바로 한국 천주교의 역사적 시발점이 된 것이다.

 

이렇게 조선과 중국이 천주교를 통하여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에 중국에 들어온 개신교 선교사들은 자연스럽게 한국에 대하여 깊은 선교적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 때문에 한국에 대한 선교의 기도는 끊이지 않았다. 이들 중 한국 선교에 가장 관심을 깊이 가진 사람들은 영국 회중교회 출신인 [토마스 선교사]와 스코틀랜드 선교회소속 [로스 선교사], 중국 동북 지방(또는 만주)에 흩어져 살고 있던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선교를 실현하기 위하여 안간힘을 기울였다. 결국 이들의 기도와 깊은 선교적 관심과 선교에 대한 노력으로 조선과 중국 동북부 지방 선교의 역사가 꽃을 피우게 되었던 것이다.

 

토마스 선교사의 중국 선교

 

이처럼 중국 땅에서 기독교의 복음을 증거 하는 외국 선교사들의 관심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맡겨진 사명을 잘 감당하는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면 과연 누가 한국 선교의 선두 주자로서 선교의 씨앗을 뿌렸는가? 많은 사람들이 자못 궁금하게 여기는 일 가운데 하나이다. 어떤 사람은 '구츨라프'라고 하고 또한 어떤 사람은 '토마스'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로스'라고 하며 또 어떤 사람은 '알렌'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많은 사람들 가운데 누가 과연 한국 기독교의 첫 선교사였을까? 이제 그 사람에 대하여 이야기를 해 보자.

 

그는 바로 중국 선교사로 활동하면서 한국에 첫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평양 대동강변에서 순교했던 토마스 선교사이다. 토마스는 1839년 영국 웨일즈에서 영국 회중교회의 라야더 교회 담임 목사인 로버트 토마스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토마스는 14세 되던 해인 1853년 그 유명한 크란도버리 컬리지에 입학하여 3년 간 라틴어, 불어, 헬라어 등을 열심히 공부하였으며, 다시 뉴컬리지 신학부에 입학하여 신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면서 목사의 길을 준비하고 나섰다. 그는 비록 학교로부터 장학금을 받았지만 그렇게 넉넉하지 못하여 항상 책을 사서 보는 일이 거의 없었고 친구들의 책을 빌려서 많은 학문을 접할 수 있었다. 시골에서 목회 하시는 아버지의 도움을 거의 받을 수 없었기에 자연히 식사도 늘 부실하기 그지없었다. 결국 그의 건강은 극도로 쇠약하게 되었으며 급기야는 학교를 휴학하지 않으면 안 될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휴학계를 제출한 토마스는 시골에서 요양하면서 더 깊은 영적인 체험을 하였으며 더 많은 기도의 시간에 정력을 쏟았다. 오래지 않아 몸이 회복되자 그는 곧 복학을 하였고 다시 학교 생활에 매진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중국 선교에 많은 관심을 가졌고 그 일을 위해서 기도하였다. 아직도 졸업하려면 3년이라는 긴 세월이 그를 가로막았지만 그는 그 누구보다도 중국 선교에 대한 열정과 큰 소망을 가지고 날마다 기도를 잊지 않았다.

 

토마스가 이렇게 중국 선교에 대한 애정을 불태우고 있을 때 이미 런던선교회는 근대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월리암 케리를 인도해 첫 선교사로 파송하였으며, 다시 1807년에 모리슨 선교사를 중국 대륙에 파송 함으로써 세계 곳곳에서 선교의 거점들을 확보하고 있었다.

 

토마스는 학교만 졸업하면 이 런던선교회의 추천을 받아 중국 선교를 위해서 헌신하겠다고 서원하였는데, 그의 이러한 꿈은 13개월이나 앞당겨진 18635월 교수회의 최후 심사 결과 졸업 통과를 받음으로써 실현을 보게 되었다. 졸업장을 손에 쥔 토마스는 고향 하노버를 향해 달려갔으며, 드디어 18636월 하노버 회중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는 곧바로 런던선교회에서, 결혼한 지 얼마 안 되는 부인 캐롤라인과 함께 선교사로 임명을 받고, 같은 해 721일 그래이브샌드 부두에서 미지의 세계 중국을 향해 나아가는 파송 기도회를 가졌다.

 

그리고 중국을 향해 출항하는 폴메이스 호에 올랐다. 그 배에는 역시 런던선교회로부터 북경 기독교 병원 감독으로 임명받은 다젼 선교사 부부가 함께 승선하고 있었다. 그 중 월리암슨 선교사는 이미 지난 1855년에 런던선교회로부터 중국 선교사로 임명받아 활동하다가 건강이 악화되어 귀국하여 치료를 마치고 이번에는 스코틀랜드 성서공회로부터 지푸 지부 총무로 파송을 받아 다시 중국을 향해서 가는 길이었다.

 

토마스 선교사와 그의 부인 캐롤라인은 희망에 넘치는 꿈을 안고 고향을 뒤로 두고 대서양을 가로지르고 아프리카의 최남단 희망봉을 돌아 향해할 때에 뱃전에서 찬란히 떠오르는 태양과 지는 석양을 바라보면서 자신들이 감당해야 할 선교의 길을 위해서 함께 기도하곤 하였다. 다시 배의 기선이 북쪽을 향하였고 적도선상에 이르렀을 때 불볕 더위가 기승을 부렸으나 그들은 이 불볕 더위도 주님의 은혜로 알고 계속 항진하여 인도를 지나고 광동성을 지나 드디어 목적지인 상해에 도착했을 때는 12월로 장장4개월의 긴 항해였다.

 

매서운 아침 공기를 마시면서 상해 부두에 첫발을 내디딜 때에 런던선교회의 소속으로 이미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무어헤드 선교사가 영접을 하였다. 토마스는 모든 것이 생소하기만 했다. 중국인들의 모습을 보았을 때 처음에는 모두 얼굴이 같아 구별하게 힘들었으며, 어학에 재간이 있다고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던 토마스 선교사의 언어는 현지인들과 전혀 통하지 않았다. 그렇게 열정적인 선교의 꿈을 가지고 중국 땅에 도착하였지만 그의 마음에 맞지 않는 것들이 한두가지 아니었던 것이다.

 

기후와 문화 음식은 말할 것도 없었으며 뿐만 아니라 형편없는 위생 시설 등 이곳에서의 생활은 매우 힘이 들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토마스 선교사의 부인 캐롤라인 선교사는 이때 임신을 하고 있어서 토마스 선교사와 같이 선교 활동을 한다는 것이 보통 힘든 일이 아니 었다. 여기에 음식이 전혀 입에 맞지 않아 그의 부인은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어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마스 선교사는 집에서 부인을 돌보면서 뒷바라지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중국주재 런던선교회의 본부가 있는 중국 내륙 도시인 한구(漢口)로 출장을 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토마스 선교사는 하는 수 없이 미국에서 파송을 받아 온 이웃 선교사 부인에게 자기 부인을 돌보아 달라고 부탁을 하고서 출장을 떠나야만 했다.

 

거기에서 토마스는 런던 선교회의 총무인 스파함과 그 지역의 선교회 책임자이며 스파함의 사위인 존 그리피스 선교사를 만나 중국 선교의 전망에 대하여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나 그가 이곳에 머물면서 생활하고 있을 때에 상해에 남아 있었던 부인 캐롤라인은 정신적 불안까지 겹치면서 몸이 쇠약할 대로 쇠약해지고 말았으며, 어느 날 이웃 미국 선교사 부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하여 크게 충격을 받아 이것이 원인이 되어 유산을 하고 말았는데, 하혈까지 하였지만 그를 돌보아 줄 이가 없어서 병원에도 가지 못한 채로 나흘이나 방치된 채로 지내면서 남편의 이름을 몇 번이고 애절하게 불러 보았지만, 1000km나 떨어져 있는 토마스가 들을 수 있을 리 만무하였다. 이렇게 하여 결국 그녀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일주일 후에야 남편 토마스에게 이 사실이 알려지자 그는 그 머나먼 길을 허겁지겁 달려왔지만 그 어디에도 캐롤라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그렇게도 함께 기도하면서 다짐하였던 중국 선교에 대한 열정의 메아리들만 허공에서 어지러이 들려 올뿐이었다. 토마스 선교사는 하나님께 소리치며 자신이 가야 할 길이 무엇이냐고 물었지만 아무런 대답도 들을 수 없었다. 하나님은 묵묵히 토마스를 지켜보시면서 스스로 이 고통을 이겨내기를 기다리고 계셨을까?

 

지푸에서의 활동과 한국인과의 만남

 

부인을 먼저 하늘나라에 보낸 토마스 선교사는 얼마 동안 넋을 잃고 사명이 흐려졌다. 그도 그럴 것이 그처럼 굳게 다짐하고 약속했던 선교의 동반자가 지금 그 곁을 떠나고 없기 때문이다. 중국의 수많은 사람들을 예수님께 인도하고 중국 여인들을 중국의 고루한 관습에서 해방시키고자 했던 부인과의 약속이 계속해서 그를 어지럽힐 뿐이었다. 결국 토마스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선교할 수 있는 축복을 허락하지 아니한 것이라고 스스로 결론을 짓고는 1864127일 영국에 있는 런던선교회에 사표서를 정식으로 제출하였다. 그 후 그는 산동성에 있는 지푸로 자리를 옮겼는데 함께 중국으로 왔던 웜리암슨 선교사를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푸는 발해만에 자리잡은 아름다운 항구 도시로 한국과 일본을 드나들기 편리한 곳이었으며 산동성 이남을 향해하기 아주 좋은 장소였다.

 

토마스는 이곳 지푸에 와서 막상 월리암슨을 만나기는 했지만 자신이 일을 해야만 생활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바로 지푸 세관에 통역관으로 취직을 하였다. 거기에서 그는 자연히 외국인과 거래를 해야 하기 때문에 중국어는 말할 것도 없이 몽고어 및 러시아어 등을 열심히 배웠다. 이렇게 지내기를 9개월, 다시 그는 이 생활을 청산하고 선교 사역에 임하겠다는 다짐을 한 후 월리암슨 선교사에게 그 뜻을 전달하고는 함께 기도하기에 힘썼다.

 

이때 토마스는 뜻하지 않게 한국에서 온 두 기독교 신자를 만나게 되었는데 바로 기자평과 최선일이었다. 이들은 사업관계로 지푸에 오게 되었다. 당시 한국의 조정은 철저한 쇄국 정책을 쓰고 있었기에 누구든지 조정의 허가 없이는 외국에 나갈 수 없었는데, 이들은 외국뿐만 아니라 외국인 선교사를 만나서 이야기까지 나누게 되었던 것이다. 더욱이 이들 두 사람은 한문에 능한 사람들인지라 자유롭게 토마스 선교사와 필담으로 의사를 나눌 수 있었다. 그런데 대화 중에 이들 두 사람이 천주교를 믿는다는 말에 토마스 선교사는 귀가 솔깃하여졌으며, 한국에서 자유롭게 기독교를 전파할 수 있느냐고 물어 보았다. 하지만 이들은 한국에서 이미 많은 사람들이 천주교를 믿다가 순교를 당하였다는 사실과 함께 한국에서는 선교할 수 없다는 절망적인 대답을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마스는 이 일을 계기로 한국 선교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되어 하루 속히 한국어를 배워 한국에서 선교 사업을 펼치겠다는 마음을 품고 이들에게 자신을 한국까지 안내해 주기를 부탁하였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도 이들은 선뜻 토마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토마스는 이들과 함께 한국에 들어가기로 하고 월리암슨에게 알렸다. 이때 윌리암슨 선교사는 토마스에게 순교할 각오로 선교에 임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

토마스 선교사는 월리암슨 선교사의 전적인 후원을 받아 다양한 한문 성서를 가지고 중국인 우문태의 배를 타고 김자평의 안내로 186594일 지푸를 출발하여 황해도 창린도 자라리 근처 포구에 도착하였다. 이때 토마스 선교사는 서해안 일대에 널려 있는 여러 섬을 순회하면서 성서를 배포하고 한글을 배우기도 하였다.

 

토마스 선교사는 서울에 올라가 국왕을 만나 선교의 윤허를 얻어 보려고 했으나 거듭되는 폭풍 때문에 이를 단념하고 일단 북경으로 돌아갔다. 그가 조선 선교의 재개를 꿈꾸면서 북경대학의 학장 서리직을 잠깐 맡아보고 있을 때에 평양감사 박규수가 동지사로 북경에 와 있었다. 그는 일행을 런던선교회 북경 지부로 초청하여 성서와 서구 과학서를 나누어주면서 자신의 조선 선교 계획을 말하였다.

 

토마스 선교사는 뜻하지 않는 한국의 실력자를 북경에서 만난 일에 대하여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평양감사 박규수도 조선 선교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돕겠다고 굳게 약속을 하였다. 그런데 박규수가 돌아올 무렵 한국의 조정에서는 천주교에 대한 대박해가 일어나고 있었다. 프랑스 신부 9명을 포함해서 수천 명의 교인들을 살해하였던 것이다. 일이 이렇게 되자 중국에 주둔하고 있었던 프랑스는 한국에 대하여 잘 아는 토마스 선교사를 안내원으로 선정해 놓고 있었다. 그런데 프랑스의 식민지로 있던 인도차이나에 뜻하지 않는 소요 사태가 일어나자 그 군함이 그곳으로 가고 말았다. 다시 한번 한국에 들어가 선교를 펼쳐 보려고 했던 토마스의 선교 계획은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한국 선교와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

 

그러나 때마침 천진에 머물고 있던 미국 국적의 제너럴셔먼호가 많은 상품을 선적하고 조선으로 떠나려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토마스 선교사는 이 배의 안내원으로 부탁을 받게 되었다. 따라서 토마스는 다시 월리암슨 선교사로부터 많은 성서를 얻어 가지고 동승하게 되었다.

 

드디어 186689일 중국을 떠난 이양선 제너럴셔먼 호는 일주일 후 대동강 입구 용강군에 나타났고, 이어서 강 상류인 평양쪽으로 거슬러올라갔다. 평양에 가까워지면서 제너럴셔먼 호와 한국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이 고조되었다. 한국 측에서는 그 배가 닿는 곳마다 문정관을 파견, 목적지와 항해의 목적을 물었다. 통역으로 승선한 토마스는 제법 조선말에도 능통했던 듯, 그들의 목적지가 평양이며 통상을 원한다는 것을 밝혔다. 아울러 토마스는 한국의 문정관에게 천주교인 학살을 문책하기도 하면서 그들은 천주교와는 다른 야소성교(耶蘇聖敎)를 믿으며, 그들의 목적이 야소교를 전파하려는 데 있음도 밝혔다.

 

어느덧 제너럴셔먼 호는 대동강 하구 보산을 지나가고 있었다. 보산은 조그만 어촌이었지만 군사 기지로는 대단한 곳이었다. 이때 이상한 배를 보았던 조선 군인들이 일제히 활을 당기자 그 배에 승선해 있던 한 중국인이 순수한 상업을 위해 온 배니까 안심하라고 손짓하자 활을 멈추었다.

 

한편 대동강 강변에 살고 있던 천주교 교인들은 프랑스 함대가 온다는 말을 듣고 있던 중 그 배가 온 줄로 알고 지달해(池達海) 10여명이 배에 승선하였다. 토마스는 이들을 환대하고 성경책을 나누어주었다. 다시 배는 북상하여 포리에 정박하게 되었는데 토마스 선교사는 이곳에서 성경을 배포하였다. 후에 토마스 선교사에게 성경을 받았던 이 마을 사람들 중에 홍신길은 성경을 받고 열심히 읽어 신자가 되었다고 한다. 토마스 선교사의 연구가였던 오문환은 1928년 토마스 선교사의 전기를 집필하기 위해서 홍신길을 만났는데 그때 홍신길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정식으로 신자가 되기는 을미년이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종자를 받기는 지금으로부터 63년 전 병인년 포리에 있었을 때 토마스 목사에게서 성경을 받았을 때입니다. 81세의 늙은 것을 아직도 하나님께서 세상에 남겨 두시 것은 아마도 토마스 목사의 전도 사적을 증거하라 하심인가 보외다."

 

포리에 배가 정박했을 때에 토마스 선교사는 이 배에 몰려온 사람들에게 성경책을 자그마치 500여 권이나 배포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날 성경을 받았던 사람들은 모두 훗날 기독교인들이 되었으며, 한국 복음화에 크게 기여하였다고 한다.

 

배는 점점 북상하면서 만경대에까지 진입을 하게 되었다. 만경대는 평양성에서 10리밖에 안 되는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토마스 선교사는 계속해서 열심히 성경을 전달하면서, 북경에서 만났던 박규수를 생각하며 한국 선교의 꿈을 부풀렸다.

 

그러나 제너럴셔먼 호에 동승해 있던 중국인 이현익이 그만 붙잡혀 억류를 당하자 선원들은 총을 난사하였고, 이에 놀란 평양성 군인들이 주민과 합세하여 일대 혼전을 빚었다. 다행히도 이현익이 구출되자 다시 제너럴셔먼 호와 한국 군인들은 팽팽한 긴장감을 접어 두고 평온을 되찾게 되었다.

 

일이 이렇게 감에도 불구하고 토마스 선교사와 굳게 약속을 했던 평양감사 박규수는 중앙 정부의 대응 방법에 대한 지시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박규수는 이번 기회에 조정이 마음을 활짝 열어 개국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그 누구보다 강하였음을 다음의 글에서 엿볼 수 있다.

 

자신이 개화론자였기 때문에 그는 당시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상황에 대하여 집권자인 대원군의 쇄국론과는 달리 개국론을 주창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양선 제너럴셔먼 호가 개국론자 박규수의 관찰 하에 들어온 것은 경우에 따라서는 개국 통상의 호기가 됨직도 했다. 그러나 제너럴셔먼 호의 오만한 접근방식은 이 개국론자의 결단의 폭을 좁게 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제너럴셔먼 호의 위협적인 행동은 평양성 당국자들에게 불안감을 갖게 했는데 이때와 시기를 같이하여 제너럴셔먼 호가 그만 대동강 입구에 위치하고 있는 양각도(羊角島) 모래톱에 좌초되고 말했다. 비 때문에 불어났던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던 제너럴셔먼 호가 그만 물이 줄어들면서 모래 위에 멈추고 더 이상 움직일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화공으로 공격하는 조선병사들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던 제너럴셔먼 호는 불타 버렸고 불을 피해 강으로 뛰어들었던 승무원들은 살려 달라고 애원하였지만 대동강변 모래 위에서 죽음을 맞았다. 토마스 선교사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186692일 토마스는 27세의 나이로 아직도 개신교의 복음을 알지 못하던 땅, 뒷날 그가 거름이 되어 수많은 교회가 그의 죽음 위에 세워졌던 평양의 대동강가에서 피를 흘렸다. 그는 최후의 순간에도 복음의 말씀을 이 땅에 전하려하였다.

이때 토마스 선교사에게 성경을 받았던 한 사람이 뒷날 선교사 마펫(한국명: 마포삼열)을 찾았다는 일화는 그의 최후가 어떠했으리라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다.

 

토마스 선교사가 순교 당했던 평양은 그 뒤 한국의 예루살렘이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으며 한국 개신교의 요람지가 되었다. 한편 제너럴셔먼 호의 사건과 관련해서 북경 주재 미국 대리공사는 청국 정부에 대하여 조사를 의뢰했으며 중국 지푸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던 미국 북 장로교 소속 콜벳 선교사는 황해도 장련에 한 주간 머물면서 주민들에게 제너럴 셔먼호와 토마스 선교사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하게 듣기도 하였다.

 

그 후 1년이 지난 후에도 토마스 선교사에 대한 이야기는 끝이 나지 않았으며 이일로 중국에 머물고 있던 선교사들은 조선(한국) 선교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중국 연태(필자 주: 지푸) 주재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총무 월리암슨 목사는 토마스 목사의 대동강변 순교 제 1주년에 해당되는 186799일에 고려문(高麗門)을 포함하는 제 2회 만주 전도여행을 떠났는데 그가 동 여행 스케줄에 고려문을 포함시킨 이유는 그곳에서 한국인을 만나 토마스 목사의 행방에 대한 정보를 얻어 보려는 것과 고려문을 통하여 토마스 목사가 기도하던 한국선교 사업의 단서를 얻어 보려는데 있었다.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에서 파송을 받고 중국 지푸에서 활동했던 월리암슨 선교사는 이미 소개한바 있지만 영국에서 토마스 선교사 부부와 함께 출발하여 중국 상해에 도착하여 함께 중국선교를 시작했었기에 그에 대한 관심은 남다르게 강하였다.

 

그래서 월리암슨 선교사는 한국인이 많이 다니고 있는 남만주 고려문을 방문하게 된 것이다. 거기서 그는 만나는 사람에게 성경책과 전도지를 나누어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렇게 관심을 가졌던 토마스 선교사에 대한 소식은 끝내 확인하지 못하고 말았다.

이 글은 중국 개신교회사에서 발췌하였습니다.

도서명: 중국개신교회사

지은이: 김수진 목사

출판사: 홍성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