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부선 선교사 평전 - ● 41. 한부선의 해방 후 선교사역의 특징들

  선지자선교회

1) 개혁주의 신학의 확산

 

442>한부선은 교려신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면서 다양한 과목들을 강의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전파하였다. 또한 그는 신학생들에게 선교에 대한 관심을 증진시키고 열정을 불붙이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고려신학교 내에서 선교 상황실을 설치하고 외국선교 부분은 한부선 선교사가 관장함으로 신학생들에게 적지 않은 선교적 파장이 있었다. 그는 선교 없는 교회는 죽은 교회라는 신념으로 교회의 선교적 사명을 고취하는데 앞장섰으며, 한국교회는 자립되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신봉자로 최선을 다했다.

 

443>한부선은 단지 선교 이론만을 가르치는 교수가 아니라 자신이 실천하고, 그의 부친과 장인이 평생 적용했던 선교방법과 정신을 토대로 선교학 강의를 하였다. 칼빈주의의 정통신학에 자립적 선교정신을 불어넣음으로, 고신 교단이 작지만 알찬 선교과업을 국내외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데 기여하였다. 한부선은 해방 이후 개혁신학의 본질을 밝히고 개혁주의 교회가 지향해야 할 방향을 제시했으며, 자신이 편집인으로 수고했던 파수군지에 기고한 세계선교 소식란을 통하여 선교현장의 실황을 생생하게 알렸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젊은 사도들에게는 전도정신의 칼슘제를 제공함으로 세계를 호흡할 수 있는 안목을 제공하였다. 그리하여 한국의 교회들로 하여금 해방 직후의 혼란기 속에서 진리를 수호하면서 역사의 증언자로, 그리고 전도의 사명을 다해가도록 독려하였다.

 

446>개인적 관계 속에서도 한부선의 개혁신앙에 대한 철저함은 냉혹하리만큼 철저했다. 개혁신학을 전적으로 신봉했던 한부선은 그의 외아들 데이빗 헌트(David Hunt)가 웨스터민스터 신학교를 졸업한 이후 아버지의 의도와는 달리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교단에서 안수 받는 자리에서 축사를 부탁하지만, 정통장로교회의 목사로서 개혁신학을 반대하는 교단의 강단에서 공적으로 축사는 할 수 없다는 자신의 입장을 밝히기도 하였다./ 한부선이 1946년부터 고려신학교와 인연을 맺고 1976년에 은퇴하기까지 한국에서 행한 선교사역은 주로 교회 재건운동과 신학교육을 중심으로 개혁신학을 전파해 나가는 다양한 선교활동에 역점이 주어졌다./ 한부선은 해방 이후 주로 고신교단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선교활동을 해왔는데, 그 주된 이유는 고신교단이 개혁신앙을 잘 유지하고 교회개혁과 장로교 전통에 충실하려고 하는 열정에 동감했기 때문이었다.

 

 

2) 전도의 열정

 

449-450>한부선은 네비우스 선교방법의 신봉자로 어디를 가든지 전도에 대한 열정이 식지 않았다. 그는 고려신학교와 부산의 칼빈대학과 여러 성경학교에서 교수하면서 사역을 전개해 나갔지만, 항상 복음을 선포하는 설교와 전도를 병행하였다. 해장 전이나 후에나, 그의 선교사역은 "복음전파'를 위해 전심전력하였다. 그는 매년 거의 매일 한번 이상은 다양한 계층에서 설교하면서 선교사역을 펼쳐나갔다. 그는 무엇보다도 "자립하는 교회와 자생적인 교회"가 될 것을 강조하였다. 그는 전도하는 일을 하나님께서 주신 중한 책임인줄로 알고 형편이 허락하는 대로 수행하였다. 한부선은 누구보다도 "영혼을 사랑하는 선교사"였으며, 고려신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했지만 교수보다도 전도자로 더 존경을 받았다.

 

451>한부선의 설교의 초점은 우리가 믿는 성경적인 신앙을 어떤 도전에도 굴하지 않고 수호해 나가야 된다는 것에 맞춰졌다. 변화무쌍한 세상과 영합하기 위하여 불변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변형시킬 수 없으며, 인간의 취향에 맞추기 위해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위조해서는 결코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 이런 입장 때문에 그는 극단적보수주의자로 불려지기도 했지만, 이런 비판에 대해 조금도 개의치 않고 바른 신앙을 위한 적은 무리가 되기를 두려워 말 것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이런 신앙을 유지해 나가기 위해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10:28)”고 외치면서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적으로 살아갈 것을 촉구하였다.

 

 

3)학생신앙운동(Student For Christ. SFC)의 초석

 

456>한부선은 누구보다도 학생신앙운동의 활성화를 도모하는데 남다른 열정을 쏟아 부었다. 1946년 초부터 부산 중앙교회에서 청년신앙운동(Youth For Christ. YFC)”이라는 한부선 선교사를 중심으로 하는 월요모임이 있었다. 이 청년신앙운동은 한명동 목사의 사택에서 시작된 기독청년들의 사명의식을 고취시키면서 매 토요일마다 기도회를 가졌고, 학업에 충실하며 전도를 통한 학원복음화를 위해 활동하던 학생 신앙협조회회원들이 참여하면서 더욱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며, 그 호칭도 194882일부터는 학생신앙운동으로 개정되었다. 개교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고려신학교는 이 신앙운동의 확산을 위해 진리 운동의 봉화를 담은 거룩한 그릇 역할을 담당했다. 뿐만 아니라, 고려신학교는 학생신앙운동의 신앙적 동기를 부여하는 등 여러 가지 후원을 아끼지 아니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회개와 기도, 전도의 불길을 학생들 사이에 확산시켜 나가는 데 중추적인 기반이 되었다. 학생신앙운동은 해방 후 고려파를 중심으로 일어 난 회개운동, 진리운동, 그리고 신앙운동이 평신도들 특히 청년들에게까지 파급되어 일어난 운동이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조직의 필요성이 제기 되었고 1952726일에 이르러 전국 학생신앙운동의 기구조직이 완비되었다. 이 운동의 조직면에는 한명동 목사가, 전도면에는 한부선 선교사가, 신학적 훈련에는 박윤선 목사가, 그리고 실무에는 전영창 선생이 크게 기여하였다. 이 학생신앙운동은 네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잇었는데, “첫째는 신앙적인 자발심에서 출발했다는 점이며, 둘째로는 신앙의 자립이다. 즉 개개인의 신앙인격 즉 중생체험이 이 운동의 특징이 되었다. 셋째로는 순수한 기독 학생운동이라는 점이다. 넷째로는 순수한 한국적인 기독학생 운동이라는 점이었다.

 

457>이렇게 시작된 학생신앙운동은 해방과 하께 한국교회가 하나님 앞과 교회와 민족 앞에 저지른 죄악을 회개하며 시작된 운동으로서 개혁신앙과 생활의 순결을 도모하는 학생들이 모여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그리고 교회 중심의 원리에 입각하여 학원과 국가의 복음화를 목표로 삼아 기도하고, 전도하고,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 그리고 생활의 일치를 의도하였다.

 

 

4)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의 벗

 

462>해방 후 한부선의 선교 사역은 소외된 자들을 위한 사역에 역점을 두면서 진행되었다. 2차 세계대전이 종식되자 1946년 한국에 홀로 온 한부선은 그 해 첫 성탄절을 나환자들과 함께 보내게 되었다. 미군부대에서 제공하는 겨울옷을 비롯한 구호물자를 가지고 부산 영도다리 밑에 기거하고 있는 나환자들을 방문하여 사랑을 베풀지만, 그들은 물품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한부선에게 성탄절 예배를 드려달라는 요청을 하였다. 한부선은 즉석에서 예배를 인도하며 설교하면서, 그의 생애 중에 가장 인상적인 성탄절을 맞이했을 뿐만 아니라, 진정한 성탄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한부선은 당시의 소감을 이렇게 남겼다. “어둠 속에 놓여 있는 그들이었지만, 그들에게 광명의 빛이 빛나고 있었다.” 성탄은 한부선에게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는 말씀을 기억나게 하는 절기였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를 거저 주셔서 우리가 구주를 거저 받아들이게 된 것이 성탄의 의의인 것이다라고 그 의미를 새겼다. 불우한 자들에게와 그리스도를 모르는 자들에게 남의 것을 받는 것보다 내가 가진 것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남에게 주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를 몸소 실천하였다.

 

463>이렇게 초기부터 한부선은 소외된 자들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경남지역에서 고려신학교에서 강의하면서도 고아들과 나환자들을 위한 사역에 많은 정성을 기울렸다.

 

465>한부선은 한국이 동족상잔으로 말미암아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낼 때에도, 손을 걷어 부치고 여러 관련 선교단체와 협력하면서 20개가 넘는 고아원과 17개의 나환자촌, 3개의 노인 복지원과 1개의 기독상이군인의 집과 2개의 병원을 돕는 자선 사역을 성실하게 펼쳐 나갔다. 더 나아가 어려운 가운데서도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선교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선교사를 파송하는 나라와 교회가 되도록 시련 속에서 선교의 열정을 고취시키는 데에 심혈을 기울였다./ 한국에서 태어나 한평생을 보낸 노년의 한부선은 외모는 미국인이었지만, 마음은 어느 한국 할아버지와 같은 모습이 자연스럽게 묻어 나왔다.

 

466>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은퇴하여 미국으로 떠난 후에도, 한부선과 한가태 부부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한국인 성도들과 동역자들에게 구제비를 계속 보냈다는 사실이다.‘ 199284, 웨스터민스터신학교 강단에서 열린 한부선 선교사 추모예배 중에, 하도례 선교사는 갈라디아서 522절 말씀 증거하면서 사랑과 희락과 화평이야말로 한부선의 성품과 행동에 나타난 특징들이라고 그의 선배이자 동료 선교사를 추모했다. 하나님과 복음 그리고 이웃과 형제를 향한 사랑이 넘쳐 났으며, 하나님을 기뻐하고 구원의 즐거움과 복음 사역에 대한 만족이 그의 마음 속에 가득하였다. 한부선은 화평케 하는 자로서 누구를 만나든지 그리고 무엇을 하든지 인내와 너그러움으로 하였다. 그리고 신실하고 온유하며 절제 된 삶을 영위한 그야말로 성령의 사람이었으며, 때로는 의분이 그의 마음 속에 있어도 결코 쉽게 화내거나 짜증내는 일이 없이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쫓아가노라(3:12)”는 말씀처럼 선교사역에 임하였다.

 

467>“한국말을 한국 사람보다 더 잘하는 한부선 선교사는 지금도 농촌을 순회전도하며 38선이 터지는 날 이북까지 가서 복음을 전할 결심으로 일하고 있다고 당시의 한부선의 선교적 비젼을 적고 있다. 그의 한국, 한국인, 그리고 한국교회를 지극히 사랑하는 마음은 선교사로서 말년을 보내면서 북한선교에 대한 간절한 염원으로 연결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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