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땅에 뿌려진 첫 '순교성혈' - 선교사 로버트 토마스

 

로버트 토마스

 

서울 종로입구 보신각, 매년 그해의 마지막 시간이면 송구영신하는 제야의 종을 울리는 곳 이다. 정원수로 단장된 종각자리 한쪽에는 보신각과 직접 관련이 없는 조그만 표석이 하나 있다. 그 새김글은 이렇다. "척화비가 있던 자리, 19세기 후반 고종의 생부 흥선대원군에 의해서 서양인의 조선침투를 방어 격퇴시켰다는 의미로 세웠는 바 그 중의 한 척화비가 있던 곳" 다소 거친 듯한 이 글의 이면에는 한국교회사적으로도 숱한 이야기들이 묻혀있다.

 

쇄국을 내세운 대원군 집권 3년인 1866년은 우리나라 교회 역사상 가장 다사다난했던 해로 이 땅의 기독교인들이 한번쯤 기억해둘 필요가 있는 연대다. 우선 이해에는 천주교 대박해 사건인 병인박해가 일어난다. 병인년 새해 벽두부터 종교적 으로 '혹세무민'하고 정치적으로 '모반의 우려'가 있다하여 숱한 천주교인들이 무차별 체포· 투옥·고문·학살당한 것이다. 이 핍박의 와중에 박해를 피해 중국으로 탈출한 프랑스 신부 리델은 프랑스 로즈제독이 지 휘하는 함대를 이끌고 와 이 해 9월 강화도에 상륙, 공격하였다. 병인양요라 일컬어지는 이 전쟁은 결국 조선의 승리로 끝났고,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한층 강화되었다.

 

통역자격 '셔먼호' 동승

 

'대원군은 새로운 척사윤음(斥邪綸音)을 발표하고 서울 장안 한복판에 척화비를 세워 백성 들이 다 읽을 수 있게 하였으니' 지금의 보신각 앞 척화비 자리는 바로 이때의 것인 듯하다.

 

국내외적으로 이런 혼란이 가중되고 있던 1866년 8월, 평양의 대동강에 항해목적이 모호한 미국적의 무장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나타났다. 이 배에는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지푸지부의 후원을 받은 로버트 토머스*1840~1866) 선교사가 통역 자격으로 동승하고 있었다.  이 사람이 바로 한국 개신교의 첫 순교자다. 이 땅에 온 외국 선교사중 유일한 순교자다. 귀츨라프가 첫 복음을 전한지 33년만의 일이고, 개항과 함께 이 당에 공식적으로 복음이 들 어오기 10년 전의 일이다.

 

840년 영국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토머스는1863년 '이교의 잔멸과 이교도의 회심을 향한 선교사로서 하나님께서 직접 자신을 임명했다는 사실을 믿으며' 런던선교회의 파송을 받아 중국 상해로 건너왔다. 신학교 재학 중에도 학업보다는 전도의 열정을 더욱 불태운 그는 학생 신분으로 수차례 지 방 전도에 나서기도 했다. 이로 인해 졸업장도 중국에 선교하러 간다는 구실로 억지로 받아 냈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업보다 전도에 열중

 

24세의 나이로 출발한 그의 선교사역은 그 열정과는 달리 곧 난관에 부딪혔다. 같이온 아 내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곧 병사했고, 런던선교회 상해주재 책임자 무어헤르와의 불화가 겹쳐 한때 선교회에 사표를 내고 청나라 해상세관의 통역으로 일하기도 했다. 셔먼호를 타고 평양을 방문하기 한해전인 1865년에 그는 조선에 1차 방문한 일이 있다.

 

지푸에서 우연히 대원군의 박해를 피해 황해도 장연에서 목선을 타고 필사 탈출한 김자평 최선일 등 천주교인 2명을 만났는데 이들이 놀랍게도 성경에 대한 지식이 아주 없다는 것 (당시 조선천주교회는 복음서 한 권이나 성경의 어느 한 부분도 번역하려 하지 않았고 실제 로 신자들에게 성경지식을 가르쳐주지 않았다-백낙준 '한국개신교사')에 자극받아 조선선교 를 결심하게 된다. 그해 9월 지푸를 떠나 송천이나 옹진 부근으로 추정되는 서해안 창린도의 자리리에 도착, 약 두달 반동안 인근 선진포 석호정 만경대 등을 돌며 한국말을 배우기도 하고 1백여권의 성경을 나누어주기도 하며 선교활동을 벌였다. 그후 쪽배로 서울을 향해 떠나다 폭풍우를 만나 만주 피즈우에 표루, 겨우 목숨만 건진 채 1866년1월 북경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그후 북경에서 조선의 동지사 일행을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그들을 통해 자신이 지난해 조 선에 전했던 성경이 평양까지 흘러 들어갔음을 확인하고는 다시 조선선교에 대한 열정이 달 아올랐다.

 

프랑스 신부에 대한 학살을 구실로 프랑스 로즈제독이 이끄는 함대의 조선원정이 논의되었 을 대 토머스는 통역으로 동행할 것을 제의 받았다. 그러나 이 원정은 무기 연기되었고 실 의에 빠진 그에게 이번에는 제너럴 셔먼호 측에서 동승제의가 들어와 그의 2차 조선방문이 이루어진 것이다.
선지자선교회

두달 체류하며 말 배워

그의 한국말과 한국해안에 대한 지식 때문이었고 그 또한 스스로 서양사람으로는 '유일한 조선통'으로 자부하고 있던 때였다. 한편 런던선교회는 그의 셔먼호행을 달갑잖게 여겼다. '무장한 선박을 타고 조선에 가는 것 은 위험을 자초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 우려는 곧바로 현실로 나타났다. 

 

8월9일 지푸를 떠난 셔먼호는 일주일 후 대동강 입구 용강 주영포에 도착, 평양 쪽으로 거 슬러 올라갔다. 조선의 쇄국정책과 부단한 외세침입과 맞물려 외국인에 대한 감정이 유난히 나쁜 때인지라 셔먼호와 조선측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이 흘렀다.

 

8월27일 평양의 한사정에 정박한 배는 통상을 요구하였고 토머스는 그들의 목적이 천주교 와는 다른 야수성교를 전파하는데 있음을 밝혔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배를 돌릴 것을 요구 하는 조선중군 이현익을 억류하고 총포를 쏘아 사상자를 내는 등 무례하고도 강압적인 행동 도 저질렀다.

 

9월2일 양각도 모래톱에 좌초되었던 셔먼호는 마침내 격분한 조선 군민들의 공격을 받아 승선자들 모두 죽음을 맞았다. 토머스의 나이 27세. 아직도 복음을 알지 못하던 땅, 뒷날 그 의 죽음 위에 수많은 교회가 세워질 평양의 대동강변에서 순교의 피를 흘린 것이다.

 

먼저 도발해 화근자초

 

"내가 서양사람을 죽이는 중에 한사람을 죽인 것은 내가 지금 생각할수록 이상한 감이 있 다. 내가 그를 찌르려고 할 때에 그는 두손을 마주잡고 무삼 말을 한 후 붉은 베를 입힌 책 을 가지고 우스면서 나에게 밧으라 권하였다. 그럼으로 내가 죽이기는 하엿스나 이책을 밧 지 않을 수가 없어셔 밧아왔노라" (오문환 '도마스 목사전') 토머스의 목을 친 병사 박춘권 의 말이다.

 

토머스는 최후의 순간까지 성경을 뿌리며 전도했다. 이때 그에게서 한문성경을 받았던 한 사람이 뒷날 마펫선교사를 찾아왔다는 일화는 그의 최후를 암시한다.

 

그에게 성경을 받은 이들 중에 훗날 평양의 유력한 신앙가문을 일으킨 이들이 많다. 박춘 권은 평양교회의 장로가 되었고, 장사포의 홍신길은 서가교회, 석호정 만경대의 최치량은 평 양교회를 창설한 인물로 지목되고 있다. 성경을 뜯어 벽지를 바른 영문주사 박영식의 집은 널다리교회의 예배처소가 되었다 한다.

 

한국교회는 토머스의 순교를 기려 1926년 순교 60년 기념회를 조직, 1927년 5월8일 그의 순교지에서 1천여명이 모여 추모예배를 드렸으며 1928년에는 오문환목사의 집필로 전기가 나왔고 1933년 9월14일에는 대동강변에 토머스기념 예배당이 세워졌다.

 

1933년 기념교회 세워

 

귀츨라프나 토머스처럼 조선에 대한 서구교회의 선교는 영구히 지속될 결실을 남기지 못하 고 문만 두드리고 지나갔다. 또 토머스를 후원했던 윌리엄슨목사의 경우처럼 '대영제국과 같 은 나라들은 조선처럼 무지하고 폐쇄된 나라를 개방하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무력을 사용하 는 것은 의무요 특권'이라는 식의 믿음은 국가와 교회의 철저한 분리를 전제한 교파형의 미 국교회에 비해 역사적 과오에 빠질 우려가 훨씬 많았고(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 토머스 목 사 또한 이에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시대적 신학적 한계를 인식하면서도, 그의 '복음주의적 경건'은 이 땅의 복음화를 향한 한톨의 썩은 밀알이었음을 또한 인정해야 한다.  지금 이 땅에는 토머스기념비 조차 하나 없다.

 

며칠후면 보신각에서 제야의 종소리가 울린다. 예나 지금이나 오욕으로 점철되기 마련인 역사지만 그 속에서 반짝이는 순교자의 열정만이라도 한번 새겨봄직하다.

 

<토머스 목사 약력>

1840년 9월 7일 영국 웨일즈라드노주 라야다에서 회중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남
1857~1863년 5월 런던대학 뉴칼리지에서 학업
1863년 6월4일 고향인 하노버 교회에서 목사안수(24세)
1863년 8월 런던선교회 파송선교사로 아내와 함께 중국 상해 도착. 아내 캐롤라인 곧 병사
1865년 1~8월 청나라 해상세관 통역으로 근무
1865년 9월 세관 사임. 1차 한국선교여행
13일 서해안 도착, 두달 반동안 선교활동. 서울 향해 떠나다 태풍만나 구사일생. 만주 거쳐 북경으로 돌아감
1866년 8월9일 제너럴 셔먼호 동승, 2차 한국여행
1866년 9월2일경, '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와중에 순교(27세)

 

글/전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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