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부선 선교사 평전 - ● 33. 해방과 한부선의 귀국

  선지자선교회

338>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194312, 미국과 영국 그리고 중국은 이탈리아가 연합군에 항복한 직후에 그들의 승리를 기대하며 카이로에서 정상회담을 열고 이 회담에서 소위 카이로 선언을 채택했다. 그 후 19455월에 독일마저 항복하자 연합군은 베를린 교외의 포스담에서 카이로 선언을 재확인하였다. 194589, 일본군이 항복하기를 불과 일주일 전, 러시아는 일본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이러한 국제 정세 속에서 마침내 일본은 1945815일에 무조건적인 항복을 하기에 이른다.

 

339>그렇게 학수고대하던 광복의 날, 일본의 항복과 함께 한국은 해방의 기쁨을 맛보지만, 북한에 진주한 러시아군으로 말미암아 또 다른 비극이 시작되었다. 해방된 지 얼마 되지 않아 38선이라는 군사분계선에 의해 나라가 분단되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340>신사참배의 강요에 결사 반대하다가 투옥된 70여 명의 교직자 중 주기철 목사 이하 50여명은 순교하였고, 남은 20여명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해방과 함께 출옥하였다. 그들은 출옥 후 순교자 주기철 목사가 시무 하던 평양 산정현교회에 모여 약 2개월간 체류하며 한국교회를 재건할 수 있는 방법들을 논의하였는데, 신사참배에 굴복했던 교회를 바르게 회복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원칙들을 제시하였다. 1. 교회의 지도자(목사 및 장로)들은 모든 신사에 참배하였으니, 권징의 길을 취하여 통회 정화한 후에 교역에 나갈 것. 2. 권징은 자책 혹은 자숙의 방법으로 하되, 목사는 최소한 2개월간 휴직하고 통회 자복 할 것. 3. 목사와 장로의 휴직 중에는 집사나 혹은 평신도가 예배를 인도할 것. 4. 교회재건의 기본원칙을 전한(全韓) 각 노회 또는 지교회에 전달하여 일제히 이것을 실행케 할 것. 5. 교역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를 복구 재건할 것.

 

341-342>그러나 신사참배를 가결한 1938년의 제 27회 총회 당시 총회장이었던 홍택기 목사와 그의 추종자들은 이들의 제안을 거세게 반대하였다. 그들은 옥중에서 반대한 사람이나 교회를 지키기 위하여 고생한 사람이나, 그 고생은 마찬가지였고, 교회를 버리고 해외로 도피생활을 했거나, 혹은 은퇴생활을 한 사람의 수고보다는 교회를 등에 지고 일제의 강제에 할 수 없이 굴()한 사람의 수고가 더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와 책벌은 하나님과의 직접관계에서 해결될 성질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금후 한국교회의 지도의 용이하지 않을 것을 알게 되었다.

 

344-345>2차 세계대전이 종식되고 한국 사회가 여러모로 혼란스러운 상황 가운데, 총회는 장로교의 원리와는 상관없이 조직되었다. 전쟁 바로 직후에도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의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상태였다. 실상은, 그 당시 총회는 신사참배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지도자들에 의해서 장로교회의 헌법과 행정질서와는 무관하게 재조직되었다. 또한 38 군사분계선으로 인해 남부총회는 북한의 많은 교회들을 관리하며 치리 할 수 없는 실정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한국의 대부분의 교회는 기구적으로는 재건을 했지만 영적인 쇄신은 추진하지 못하였다. 한편 신사참배에 조금도 타협 없이 5년 넘게 투옥되었던 주남선과 한상동을 비롯한 몇몇 목사들은 그들에게 처음으로 기독교 신앙을 소개해 주었던 선교사들의 성경적 가르침과, 구 평양신학교의 신학적 기초 위에 신학교를 다시 세우기로 결정하였다. 한상동 목사가 평양신학교를 1936년에 졸업한 후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전개했던 경남지역은 해방 후 고려파가 교회재건 및 개혁운동을 일으키는 본거지가 되었다./ 해방 후 한상동은 주기철 목사가 시무했던 산정현교회에서 청빙을 받았으며 1945919일 평양에서, 그리고 수개월 후에는 만주 봉천에서 박형룡을 만나 평양에 새로운 신학교를 시작할 것에 대하여 논의하기도 하였다. 한상동은 평양에서 공산당의 압박이 더욱 심해지자 남하하기로 결정하고 19463월에 부산으로 가는 도중에 서울에서 박윤선을 만나게 되었다.

 

346>부산으로 내려오면서 한상동은 거창에 들러 주남선을 만나 신학교 건립을 위한 준비를 진행시켜 나갔다. 그래서 1946520일 한상동, 주남선 박윤선은 신학교 설립위원회를 구성하고, 623일부터 823일까지 박윤선을 강사로 하기 신학강좌를 개최하였다. 그러나 설립위원회는 이 신학교가 명실공히 구 평양신학교의 전통을 계승하는 전()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교가 되기 위해서는 아직 만주에 머물고 있었던 박형룡을 교장으로 청빙 하기로 결정하고 그가 오기를 기다렸다. 박형용의 귀국이 늦어지자 박윤선을 교장 서리로 하여 구 평양신학교의 신학을 계승하고 회개운동을 확산시켜 나가기 위해 1946920일 부산진에 있는 금성중학교(구 일신여학교)의 교실을 하나 빌려 개교하게 되었다.

 

347>한부선은 무엇보다도 고려신학교가 개혁주의 신학의 토대 위에 설립된 사실에 마음이 끌렸으며, 그들의 초청에 흔쾌하게 응하였다.

 

349>해방 이후의 정치적 상황으로 인하여 장로교 신앙이 활발하게 자리를 잡앗던 북한에서의 교회 재건운동이 여의치 못하자 봉천으로 돌아갔던 박형룡은 한부선에게 그곳에 다시 와서 함께 동역할 것을 제의하였다. 한부선도 그 편지를 받기 전에 이미 선교지 만주로 다시 돌아가기를 희망했으나, 당시의 형편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박형룡은 해방 이후의 한국교회를 재건하는 첩경은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통해 전수되었던 보수신학을 토대로 목회자들을 교육하는 신학교를 세우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으며, 그러한 목적을 잘 이룰 수 있는 곳이 바로 만주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박형룡은 한부선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만주에 있는 한국교회가 예전처럼 부흥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상황이기에 이곳에 신학교가 필요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잇습니다. 그러나 신학교가 세워져 한국의 교회들을 위한 사역자들을 양성할 필요가 분명히 존재하고 잇습니다. 그래서 귀하가 그러한 사역을 맡아 졸업생들을 보수신학으로 교육시켜 내보낸다면 한국교회의 바른 신학운동에 지대하게 공헌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현재 평양에 있는 신학교는 소수의 목회자들에 의해 어렵게 유지되고 있습니다. 또 남한의 총회는 구() 평양신학교가 폐교되었을 때에 서울에 세워졌던 자유주의적인 신학교[조선신학교]를 후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보수적인 신학교가 만주에 존재하면서 보수적인 신학으로 교육한 사역자들을 한국에 배출하는 것은 귀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귀하께서 이 제안을 심사숙고하신 후 가능한 조속한 시일 내에 회신해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350>한부선은 정든 선교지 만주로 귀환하지 못했지만,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고려신학교 설립자들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 “선교사로서 신앙의 용장으로 널리 알려진 그였기에 그들과 동역의 기회는 쉽게 이루어졌다.

 

352>순교적 신앙의 공감대 때문에 한부선은 한국에 돌아 온지 얼마 되지 않은 19461113일부터 고려신학교에서 교수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는 당시의 상황에 대해, “나 또한 나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수감생활을 한 경험이 있기에, 물론 그것이 그들 대부분이 겪었던 5년이 아니라 단지 7개월이라 할지라도, 그리고 나도 그들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는 이 신학교의 초창기부터 가르칠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라고 언급하였다. 이것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경남 지방의 고려신학교와 관련하여 시작된 한부선의 선교사역의 서곡이었다. 사실상 이들 지도자들에 의한 참된 회개를 통한 교회 갱신운동과 평양신학교의 전통을 계승한 새로운 신학교의 건립은 한국 장로교회에 심겨졌던 신앙을 지속시켜나가는 주요한 발판을 마련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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