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부선 선교사 평전 - ● 38. 경남노회 분규와 고려파의 분열

  선지자선교회

400>19485월에 열린 제 34회 총회에서 전남 순천노회는 고려신학교에 학생을 추천해도 좋으냐는 문의를 했는데, 일제 치하에서 조선교단 통리를 지냈던 정치부장 김관식은 고려신학교는 우리 총회와 아무 관계가 없으니, 노회가 추천서를 줄 필요가 없다는 법적인 유권해석을 내렸다. 목사 후보생 추천권이 법적으로 노회에 있었으므로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해당 노회의 신중한 판단에 맡길 수도 있었다. 당시 고려신학교는 경남노회의 인정을 받고 운영되었던 신학교이었으므로, 김관식의 답변은 교권에 좌우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처사는 경남노회에 고려신학교 인정을 취소하라는 명령의 의미가 있었으며, 더 나아가 고려신학교를 지원하는 경남노회 내의 인사들을 총회에서 축출하고자 하는 저의가 도사리고 있었다. 이러한 총회의 처사에 힘입어 경남노회 안의 교권주의자들은 고려신학교 지원세력을 제압하고 교권을 장악할 수 잇는 절호의 기회를 잡게 되었다. 고려신학교 관계자들에 대한 조소와 비난이 가득 담긴 불온 성명서를 교회에 뿌리며 임시노회 소집을 요구하였다. 그들이 유포한 고려신학교와 소위 신성파에 대하여라는 성명서 속에는 다음과 같은 악의에 가득 찬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었다.「…이제 우리는 생각합시다. 미국의 남북 장로교회에서 작당분쟁을 일삼아 평화와 질서를 의식적으로 파괴하다가 반역자로 몰려 축출 당한 극소수인 그들(메이첸파)의 손에 우리 조선 장로교회를 맡긴다는 것은 조선 장로회를 전 세게적인 대 생명체에서 절단하는 것이며또는 그들이 취하는 지도 원리인 사상에 절대맹종하는 것은 조국을 잊어버리고 타국에 예속하는 공산주의와 무엇이 다르리요. 지난 서울 총회에서는 고려신학을 총회와 절연하였고…」

 

401>이러한 근거 없는 비판은 자유주의 신학의 도전에 직면해 잇던 미국 북장로 교회 안에서 기독교 신앙의 역사성과 구원론적 특성을 상실하지 않게 하려고 부단한 노력을 기울려왔던 메이첸을 축출하고 분리주의자로 낙인찍었듯이, 한국 장로교회의 교권주의자들도 신사참배로 인한 신앙의 훼절과 손상된 장로교회의 정체성을 회복하고자 일으킨 교회 재건운동을 그렇게 단죄하고 있는 것이다. 고려신학교의 설립은 어떤 해외교회나 선교단체의 의논한 일이 없는 자생적인 것이었고, 한부선이 참여한 것도 그 어떤 분리를 지향하는 목적이 아닌, 한국 장로교회의 바른 신학적 전통과 신앙을 유지하기 위함이었고, 고려신학교가 설립된 이후 초청에 의해 협력했을 따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신학교 인사들과 메이첸파 선교사들에 대한 모략은 점점 더 퍼져만 갔다. 더 나아가 경남노회 내의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한 교권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재기를 위하여 재건을 외치는 자들을 희생양으로 삼고 있었다. 그리하여 1948921일 김길창이 시무하고 있었던 항서교회에서 열린 제49회 임시노회에서 고려신학교 취소를 4421로 가결하고 말았다. 고려신학교와 교회 재건운동을 허물려는 교권주의자들 공세에 소위 중도를 걷는 보수주의자들도 가세하여 이러한 결과가 나오게 되었다. 경남의 교권주의자들의 기세가 당당해졌다. 이들은 경남노회가 자신들의 교권 하에 들어 온 것으로 확신하고 자만하였다.

 

402>이제 회개, 정화, 교회재건 등의 구호들은 지난날의 유물이 된 것처럼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 해 127일 마산 문창교회에서 모인 제50회 경남노회에서 노회원 중의 한 목사가 일어나 송도 앞 바다에서 천조대신의 이름으로 미소기바라이를 받게 된 것을 회중 앞에 자복하고 통회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 일로 인하여 노회의 분위기는 숙연해지고 미소가바라이에 동원책임을 맡은 연성국장을 지냈고 신사참배할 것을 가장 강력하게 주장했던 친일파였던 김길창을 제명하자는 동의와 재청이 뒤따르게 되자 노회는 이 문제를 다음 노회 시까지 유보하자는 결정을 내렸다. 이 때부터 경남노회는 분열의 조짐이 확연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 “고려신학교를 중심한 진리 파수꾼들과, 고려신학교를 적극 반대하는 교권주의자들과 중도보수주의자들의 세 집단으로 분리되어진 것이다. 김길창을 비롯한 교권주의자들은 다음 노회까지 기다리기보다는 신앙신조가 다르고 신앙양심에 구애된다는 이유로 별도의 노회조직을 위한 소집 통지서를 발송하고 권남선 등 10여명이 194938일 부산 항서교회에 모여 다른 노회를 조직하였다. ”이것이 남한의 장로교회에서 일어난 첫 번째 교회분열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경남노회는 예정대로 같은 달 38일에 마산 문창교회에서 제51회 정기노회로 모였다. 이 후 경남노회는 불법노회와 스스로 구별지어 법통노회라고 불렀다.

 

402하반-403>1949423일 서울 새문안 교회에서 모인 제35회 총회에서 고려신학교는 총회와 관계없다는 제34회 총회의 입장을 재확인하였고, 경남노회의 분열을 수습하기 위하여 5인 전권위원을 선정하였다. 전권위원들도 고려신학교를 중심으로 한 교회 재건운동에 앞장서는 것을 거세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회개와 재건운동이 강해질수록 교권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저질렀던 과거의 추한 죄가 드러남으로 자신들의 입지가 약화되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1949527일 자로 다음과 같이 결정하여 교회에 시달하였다.한부선 선교사 일파 및 고려신학교와의 관계는 이미 총회로서 결정한 것이니 노회는 순종하여 이를 실행할 것이며, 그들이 독선적 태도를 가지고교회의 분규와 소란을 일으킴으로 이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관계자들에게 강단을 허락하지 말 것이며, 35회 총회 이후로도 그 학교와 관계를 계속하며 지지하는 자는 총회를 거역하는 행위이니 노회가 적절히 처리할 일이라

 

404>이윽고 제35회 총회는 조선신학교와 함께 장로회 신학교를 총히 직영으로 결정하였고, 고려신학교와 경남노회의 입지는 점점 축소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경남노회는 삼분오열되는 분열의 아픔을 겪어야만 했으며, 전통적인 경남노회를 계승하려는 경남법통노회 초대들은 6.25 동안으로 정회되었다가 1951525일 부산 중앙교회에서 속회로 모인 제36회 총회에 입장마저 거절되는 수모를 당하게 되었다. 그 다음 해인 1952429일 대구 서문교회에서 모인 제37회 총회에 총대를 파송하여 총회의 불법을 지적하고 정상적인 관계를 회복하려 노력했지만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총회는 경남법통노회가 파송한 총대의 총대권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고려신학과 그 관계 단체와 총회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고 재천명 하였으며, 이로써 경남노회와 고려신학교는 장로회 총회 밖으로 축출되고 말았다./ 총회에서 축출된 후, 고려신학교의 설립자 한상동은 한국 장로교회 안에서 시도했던 모든 개혁 운동이 허사로 돌아간 것을 발견하고는, 교려파 총노회를 결성하는 예배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405>해방 이후 우리는 진정한 회개와 칼빈주의 신학, 즉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해 왔다. 적지 않은 귀한 그리스도인들이 우리의 호소에 반응해 왔지만, 우리는 이 훌륭한 운동을 방해하는 너무도 많은 장애물을 직면해 온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총회를 향하여 계속적으로 증거 하고자 했다. 총회는 지난 3년 동안 우리의 총대들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한국교회가 신사참배로 인해 타락하기 이전에 있었던 총회를 전승하기 위하여 장로교회의 헌법에 따른 참 된 총회를 조직하기로 결심했다.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우리는 오늘 총회를 설립하고자 한다. 우리는 끝까지 영적 전쟁을 올곧게 끝까지 지속할 것을 천명한다. 우리는 결단코 뒤로 물러서지 않고 전진할 뿐이다. 할렐루야결국 1952고려파가 총노회를 설립함으로 한국 장로교회 안에서 첫 교단 분열이 일어났다. “고려파라는 명칭은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을 계속 이어나가는 진정한 의미의 계승자라는 신념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한부선은 고려파라는 명칭보다는 한국개혁교회라는 이름이 좀 더 선명하게 신학적 정체성과 교단의 이미지를 드러낼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409>아무리 덮으려 해도 하나님과 교회 앞에서 행한 잘못과 허물은 흔적이 남는법이다. 더군다나 지도자라면 개인적인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공적인 차원에서도 죄와 허물에 대해 반드시 회개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한경직 목사는 지도자로서 늦게나나 자신의 허물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청산하였다. 템블턴 상을 수상한 한경직을 1992618일 여의도 63빌딩 코스모스 룸에서 교계 지도자들이 초청하여 수상 축하 예배를 드렸다. 한경직은 수상 소감을 언급하는 자리에서 먼저 나는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나는 신사참배를 하였습니다.”라고 지난 반세기 동안 가슴에 묻었던 그 말을 축하객들 앞에서 하고야 말았다. 아마도 이런 고백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자신이 받은 상은 한국교회를 대표해서 받았다는 인식과 함께. 워싱톤 포스트(Washington Post) 지에 소개 된 자신의 약력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사료(思料)된다. 축하의 자리에서 자신의 죄를 시인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한경직이 공식적으로 이런 고백을 좀 더 빨리 하였더라면 한경직과 같은 죄책감을 가지고 있던 목사들이 좀 더 솔직하게 신사참배의 허물을 고백하였더라면, 해방 직후 고신파가 갈라지는 불상사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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