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부선 선교사 평전 - ● 39. 한부선과 한국교회 개혁운동

  선지자선교회

415>한부선은 한국 예수교장로회 100주년과 고신 30주년을 기념하는 격려사를 통하여, 비록 소수가 동참했지만 교려신학교의 설립을 교회나 신자를 분열시키는 기관으로 보는 이도 있지만, 신학교를 시작할 때부터 한국 교회의 두 가지 정신을 기르고 보전하는 기관으로 본다고 주장하였다. 주남선과 한상동 두 목사의 헌신적 노력으로 노회와 총회 안에 신학교를 세우고자 한 것이고 경남 부산에서 시작하면서” “이북 박사박형룡과 박윤선 두 분을 초청하고 학생들도 전국 각 지역에서 모였으며, 무엇보다도 성경중심, 개혁신학을 주장하고 가르치는 교수들을 특별히 뽑아 세웠다고 술회하였다. 또한 숫자의 많음이 능한 것이 아니고(18:20),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고전1:26-30)라는 말씀을 인용하면서 격려사를 마감하고 있다.

 

416>한국교회의 개혁과 재건에 동참한지 10여년이 흐르면서 한부선은 고려파 내의 많은 문제점들을 목격하였다. 그 중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소위 스푸너 사건이었다. 19607월의 어느 주일 날, 1956년부터 봉직해온 미 정통장로교회 소속 선교사 스푸너(Arthur Boyce Spponer)와 그의 가족이 미국으로 떠낫다. 원래 스푸너 가족은 금요일에 출항하기로 예정되어 있었지만, 불가피한 사정으로 출항이 주이로 연기되어 박윤선은 그들을 배웅한 뒤 주일 예배를 인근의 교회에서 드리려고 작정하였다. 그와 함께 갓던 일행이 선상에서 간단히 예배를 드리고 시간이 지체되어 그만 공적 예배에는 참석하지 못하는 일이 생겼다.

 

417>이 사건은 누군가에 의해 노회에 보고가 되었고 박윤선에게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재앙이 되고 말았다. 이 문제는 그 해 총회에까지 상정되었고, “주일성수에 관하여 본인 양심에 거리낌이 없어도 건덕상 문제가 될 때는 도의적 책임을 지도록 가결하였다. 이사회는 그가 총회의 결정에 따라 도의적 책임을 표명하기 전까지 신학교 교장직과 교수직에서 해임한다는 통고를 하였다.

 

418>고려신학교 이사회는 박윤선과 정통장로교 선교사들을 향하여 아주 강한 어조로 비판하였다. 박윤선을 급작스럽게 해임한 것은 단지 스푸너 사건에 연루 된 주일성수 문제만은 아니었다. 교회의 문제를 계속 세상 법정에 고소하는 문제를 가지고 박윤선과 반대의견을 가지고 논쟁을 벌인 적이 잇는 송상석 사이에는 이미 감정의 골이 깊게 패여 있었다.

 

419>송상석은 박윤선을 제거해야겠다고 결심하고 대리인을 통하여 이 문제를 총회가 끝난 후 이사회로 가져오고 가장 강력한 징벌을 주장했다고 알려지고 있다. 한부선도 이러한 음모가 게재되어 있음을 들은바가 있었다. 또한 박윤선과 한상동 사이에 신학교 경영 문제로 말미암은 갈등과 마찰이 있었다는 것은, 당시 이사장이었던 한상동이 곤경에 처한 박윤선의 입장을 위하여 한 마디의 지지발언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당시의 분위기로 보아, 그리고 한국교회의 일반적인 성향을 보아 한상동이 이 사건을 수습하려고 했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박윤선이 고려신학교를 떠난 지 2년 후에 고려신학교 학생회가 부흥회 강사로 박윤선을 초청하려 하자 한상동이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이 사건을 바라보고 있었던 한부선의 마음은 그야말로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성경적으로나 교리적으로 잘못됨이 없음을 해명하고 주장했을 때 그 양심을 강요하는 것은 무리였다. “진실주의로 평생을 살아 온 한부선도 박윤선의 주장을 옳게 여겼다. 그런데도 이사회는 박윤선에게 도의적 책임을 물어 교장직 해임과 교수 중지라는 중징계를 내렸다. 그 이후 고려파는 인물을 아낄 줄 모르는 편협한 교단이라는 평판을 듣게 되었다. 어쩌면 서영일이 비판하고 있듯이 고려파는 변질되었다. 개혁의 기치를 들고일어난 지 10년 만에 이들은 더 이상 진리를 수호하는 일에 헌신한 동지들의 집단이 아니라, 소수 의견에 관용을 베풀 수 없는 형식적인 기성교회가 된 것이다. 소수 의견이 전체 교회의 형식을 유지하는데 방해가 되고 평화를 깨뜨린다는 생각이 한부선의 마음에도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420>박윤선과 유사한 조처를 당한 한부선도 고려신학교를 떠났다. 그 이후로 한부선과 그가 그렇게 심혈을 기울려 헌신했던 고려신학교와의 공식적인 관계가 단절되었고 예전과 같은 관계 회복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필요할 때면 언제고 고신 교회와 신학교를 지원하고 협력하는 넓은 사랑과 아량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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