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부선 선교사 평전 - ● 37. 박형룡과 고려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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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1>해방 직후, 보수신학의 거두 박형룡이 고려신학교에 동참한 것은 여러모로 역사적 의미가 있었다. 먼저 우리는 박형룡과 고려파와의 인연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아마도 박형룡이야말로 신학자 중에서 신사에 참배하지 않은 소수의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해방 직후 출옥성도들과의 조우를 통하여 자연스럽게 그들에게 신학적인 조언을 해 주는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일제로부터 피하여 망명을 하였으나 신사참배를 한 일이 없었고, 신사참배 거부에 대한 전력이 있었기 때문에 출옥성도들과는 심정적으로 매우 가까운 관계에 있었다.

 

387>박형룡과 한상동 사이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한국 장로교회의 현 상황에 대한 인식과 교회 재건의 원리와 방법에 대해서, 즉 교회관에 있어서 두 사람은 분명히 달랐다. 신학자 박형룡은 한국 전체 장로교회의 지지를 받으면서 보수신학을 기초로 한 신학교를 세워야 한다고 믿었다. 즉 그는 서울에 보수주의 신학교를 세우는 것을 강조했다. 그는 한국 장로교회의 전통이었던 개혁신학에 근거한 복음주의 신학을 보존하고, 1939년에 일본의 식민지 아래 김재준에 의해 세워진 조선신학교에 대항하기 위해서 이것이 필요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그는 평양신학교의 신학적 전통을 이어갈 신학교는 장로교 총회에 의한 전국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잇는 서울에 세워져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한국 장로교의 주류 안에서 보수주의 신학을 세우고 회복하자고 했다. 조선신학교에 의한 자유주의 신학의 도전으로부터 보수주의 신학을 보존하는 것이 박형룡의 궁극적인 목표였다. 한편 한상동은 평양신학교가 평양에서 발전하고 성공할 수 있었던 것처럼, 고려신학교의 위치가 전국적인 인정을 받는 일에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의 최우선적인 목표는 고려신학교를 통해 보수주의 신학을 수호할 뿐 아니라 회개운동을 촉구하는 것이었다. 한상동은 고려신학교 설립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지만, 신학자이기보다는 목회자로서 그의 활동은 회개운동을 이끈 교회 지도자들 사이에서 좀 더 지지를 받았다. 박형룡은 장기적인 안목에서 볼 때 총회의 인정과 지지를 받는 서울에 위치한 신학교를 통해 보수주의 신학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간주하였고, 반면에 한상동은 총회의 승인과 상관없이 회개운동과 보수주의 신학의 보존은 부산에서부터 시작하여 다른 지역으로 확대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394>마침내 박형룡은 19485월에 다음과 같은 이유를 지적하면서 고려신학교를 사임하였다. “1)고려파는 교회 밖에서 싸워서 새로운 교단을 형성하려한다. 2)고려파는 신사참배 문제를 과도하게 강조함으로 다른 선의의 사람들의 감정을 상하게 한다. 3)신학교가 소수의 사람에 의하여 운영된다.” 의견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는 가운데 고려파에서는 박형룡 박사를 내세워 진리운동을 드높이려던 의도가 그만 퇴색되고 말았다.

 

395>그래서 박형룡은 부산에서 고려파와 함께 지냈던 때와 그들의 철저한 신앙과 개혁정신을 동경했다애석하게도 박형룡 박사는 고려신학교를 떠나갔지만, 그의 대한 연민의 정은 고려파 인사들에게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으며, 고신을 떠난 박형룡도 마음 편할 날을 보내지 못했다. 상당한 시간이 흘렀지만, 한상동은 조선 신궁 터 구입문제로 총회신학교 교장직을 불명예 퇴진한 박형룡을 1975년 고려신학교 졸업식에 초청한 적이 있었다. 설교를 한 후, 박형룡은 한상동에게 자신이 실패한 이유는 고려신학교를 떠난 것이었다고 후회하는 언급을 했는데, 20여년의 세월이 지난 후 고려신학교에 돌아 온 그에게는 만감(萬感)이 교차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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