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부선 선교사 - ● 13.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교육

  선지자선교회

132>네비우스 선교정책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 중의 하나가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교육이었다.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교육이 벌써 189년부터 단편적으로 출발하고 있다는 사실은 선교 역사상 획기적인 사실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신학교라는 명칭으로 시작한 것은 1903년이지만, 1885년에 선교가 시작되어 5년 만에 신학교육이 절실한 요청으로 제기된 것은 하나의 경이적 사실이 아닐 수 없었다.

 

133>1890년 초가을부터 서울에서는 이른바 신학반이 시작되어 한국교회를 이끌어 갈 수 있는 거대한 고동소리가 울리기 시작하였다./ 신학반은 보통 말하는 사경회와는 달리 교회의 지도자를 양성해야 할 시급한 필요 때문에 매년 한번씩 모여 1개월 간 성경공부를 주요과제로, 교회치리와 기독교 일반에 관한 상식을 공부하였다. 초기의 교사는 언드우드를 위시하여 마포삼열, 기포드, 헤론 등이 수고하였다. 1892년에 선교본부에 발송한 마포삼열의 보고서에는 이미 서울에서 신학반이 운영되고 있었다는 것이 명시되어 있다. 최초의 학생으로는 의주 백홍준, 김관근, 솔내의 서경조, 최명오, 서울의 서상륜, 정공빈, 홍정후 등 일곱 명이 공부하고 있었으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학생수도 증가 일로에 있다는 언급이 있었다. 이 신학반에 공부한 사람들은 모두 전도인이라는 명칭으로 여러 지역으로 흩어져 전도를 통한 교회 설립에 중요한 일익을 담당하였다. 바로 서울의 신학반이 장차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이 될 인재들을 양성하는 초기 신학교 역할을 감당한 것이다.

 

135>평양공의회는 1900년 가을에 교회 사역에 임하고 있던 자들 가운데 몇 사람을 선정하여 평양에 신학교육을 실시하기로 합의하였고, 1901년 봄에 평양 장대현교회의 장로였던 방기창과 김종섭 두 사람을 목사 후보생으로 선발하였다. 이렇게 신학교가 시작되었지만 신학반의 형태는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점차 신학교육의 교과목이 체계화되고 교수진이 보완되고 다른 지방공의회에 신학생을 추천해달라는 요청을 하면서 신학교의 체제를 형성해 갔다. 평양신학교의 신학적 기반은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에 두었으며, 교수들도 이 고백에 충실한 가운데 신학교육에 헌신적인 노력을 하였다. 1903년 봄에는 평양공의회가 추천한 목사 후보생 여섯 명을 중심으로 평양신학교 1학년을 3개월간 교육하였고, 초기의 신학생들은 거의가 다 교회의 지도자들이었기 때문에 교회에서 사역하면서 학업에 임하였다. 이리하여 평양신학교는 정식으로 개교되었으며, 초창기의 신학교 교수로는 마포삼열과 소아론, 이길함, 한위렴, 그리고 편하설 선교사들이 수고하였다. 1906년에는 평양공의회 소속 선교사뿐 아니라. 다른 선교부 소속 선교사들도 교수로 선정하여 교육에 임하게 하였는데, 언드우드, 전위렴, 왕길지, 이눌서, 등이 참여하였으며, 평양신학교는 지역적으로 국한되거나, 어느 한 선교부가 독점하는 것을 최대한 피하면서 한국 장로교를 이끌고 나갈 영적 지도자들을 양성할 수 있는 든든한 토대를 마련하였다. 이렇게 급속하게 발전하던 신학교육을 통하여 한국 장로교회는 1907년을 맞이하여 역사적인 제 1회 졸업식과 함께 최초로 목사 7인을 안수하는 일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성대하게 집행하였다.

 

136>특별히 한국 장로교회는 제1회 총노회에서 교회의 신앙노선과 방향을 결정짓는 일에 매우 필수적인 신경(信經)과 규칙을 제정하자는 한위렴의 동의로 7인의 위원이 준비하여 명년 노회 시에 보고하자는 결의를 하게 되었다.

 

137>서문을 제외하고 12조에 달하는 신경은 1904년 인도 장로교회가 채택한 신경을 그대로 채용하였다. 한국 장로교회에 적합한 신경을 새롭게 만들기보다는 인도 장로교회의 신경을 그대로 수용한 것은 아쉬움의 여지가 잇지만, 한국 장로교회의 공적인 신경을 최초로 정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12조는 성경무오, 하나님의 절대성, 삼위일체론, 하나님의 창조, 인간창조, 인간의 타락, 그리스도의 속죄, 성령의 작용, 예정론, 성례, 신자의 본분, 부활과 심판 등으로 구성되었고, 엄격한 칼빈주의적 신앙을 내용으로 삼은 것이다. 이 신조에 강조되어 있는 칼빈주의 신학은 평양신학교에서 효과적으로 배양되었다./ 1회 노회에서 최초의 7인 목사 가운데 한 사람인 길선주 목사가 최초로 세례예식을 집행했을 때, 마포삼열은 보조자의 위치에서 도왔다./ 또한, 12조 신조 서문에서 밝힌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과 대소요리문답을 교회와 신학교에서 마땅히 가르칠 것으로 강조함으로써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적 기반이 구 프린스톤 신학에 의해 계승되고 있었던 구파적 장로교 특성을 중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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