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부선 선교사 - ● 15. 한국 장로교회와 제한 장로교 선교사들의 신학적 특성

  선지자선교회

156>초기 한국 장로교회의 형성과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사람들은 미국과 캐나다, 그리고 호주 장로교회로부터 파송된 선교사들이었다. 그들은 근대 영적 대 각성운동으로 말미암아 형성된 부흥운동과 경건주의적 영혼구원의 전도 열정을 가지고 해외 선교운동의 일환으로 은둔의 나라 한국에 찾아 왔던 사람들이다. 장로교 선교사들 중의 대부부분은 미국 장로교회에서 파송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미국 교회의 전반적인 신학적인 특성을 중심으로 그들의 신학적 배경과 선교 동기를 고찰해도 무방할 것이다.

 

157>한국에 파송된 미국 선교사들은 대체적으로 복음주의 신앙을 소유한 사람들이었다. “19세기의 미국 개신교도들은 거의가 복음주의자였다. 다시 말해, 경건주의와 개혁주의 유산이 결합된 신앙 형태를 견지하였고, 18세기와 19세기에 일어난 미국의 영적 대 각성운동의 토양 속에서 성장했다

 

158>초기 재한 선교사들의 신학적 특성을 구체적으로 정의하는 것은 쉽지 않은 작업이지만, 대체로 근본주의와 개혁주의 신앙을 포함하여 보수주의적 복음주의신학이 초기 장로교 선교사들의 신학을 설명하는데 가장 적절한 용어일 것이다. 선교 초기부터 그들은 복음주의적 정신을 강하게 유지하면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절대적인 믿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죄로부터의 구원의 복음을 일관성 있게 외쳐왔다.

 

159>한국교회에서 활동했던 미국 선교사들의 신학적 영향에 대해서, 전성천은 한국에 온 초기 선교사는 뉴잉글랜드에서 온 몇몇 감리교 출신 선교사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 구파 장로교 신학사상이 지배적인 지역에서 왔기 때문에 극도로 보수주의적이거나 근본주의적인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구파 장로교의 전통을 근본주의와 동일시하는 것은 잘못된 견해이다. “근본주의라는 용어는 1920년대 이후에야 비로소 미국 교회에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근본주의라는 개념 자체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하기 때문에 그 용어를 사용하는 데에 좀 더 신중하고적절한 주의가 요구된다. 구 프린스톤 신학과 근본주의와의 연관성을 강조한 나머지 이 둘을 동일시하는 경향도 있지만 그러한 주장은 매우 피상적인 견해가 아닐 수 없다.

 

160>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미국 개신교의 전반적인 신학적 경향은 대체로 다음의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고찰하는 것이 타당하다. "고전적 혹은 청교도적(Classical of Puritan) 복음주의, 경건주의적(Pietistic) 복음주의, 근본주의적(Fundamentalistic) 복음주의, 그리고 진보적 혹은 에큐메니칼(Progressive or Eccumenical) 복음주의가 그 유형들이다. 한국에 온 선교사들은 어느 한 유형에 속한 특성만 소유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신학적 특성들을 공유했으며, 대체적으로 경건주의적이며 근본주의적인 성향이 강했다고 간주할 수 있다.

 

162>또한 한국 기독교의 초기 단계의 중요한 신학적 영향은 1901년에 세워진 평양신학교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그 학교 교수의 대부분은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프린스톤, 맥코믹, 그리고 버지니아의 유니온신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163>당시 한국에서 사역하던 40여명의 선교사들은 7개의 신학교 출신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프린스톤신학교의 출신이 16명으로 제일 많았고, 그 다음이 맥코믹신학교 출신이 11, 샌안셀모신학교 출신이 4명이었으며, 그 다음은 뉴욕 유니온신학교 출신이 3명이었다. 또한 성경학교는 약 10개의 학교로 분류될 수 있는데, 무디성경학교 출신이 가장 많았으며, 그 다음은 뉴욕성경신학교였다. 가장 영향력 있는 선교사들은 1890년 한국에 온 마포삼열(Samuel A. Moffett), 1902년의 곽안련(Charles A. Clark) 1892년의 이눌서(William Davis Reynolds)와 소아론(William L. Swallen), 1906년의 어도만(Walter C. Erdman), 1907년의 나부열(Stacy L. Roberts), 그리고 구례인(John Curtis Crane)과 함일돈(Floyd E. Hamilton)이다. 그리고 결코 적지 않은 영향력을 발휘했던 초기 선교사로는 1897년 프린스톤 출신인 한위렴(William B. Hunt)1901년 맥코믹 출신의 방위량(William N. Blair)을 꼽지 않을 수 없는데, 이들은 평양신학교의 설립자가 되었고, 교수로 사역하면서 한국에서의 보수 신학을 배양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164-165>한국선교 희년(禧年)을 맞이한 1930년대 중반에 원로 선교사로 그리고 평양신학교의 설립자요 교장으로 1924년까지 지냈던 마포삼열은 유언과도 같은 의미심장한 설교를 한국 장로교회에 남겼다. 근래에 신신학이니 신복음이니 하는 q말을 하며 다니는 사람이 잇는 모양인데 우리는 그러한 인물을 삼가야 한다. 조선에 잇는 선교사들이 다 죽는다든지, 혹은 귀국한다든지, 혹은 선교사업을 최소한도로 축소한다든지 할지라도 조선 교회 형제들에게 사십년 전에 전파한 그 복음을 그대로 전하자그 복음은 그들의 지혜로 한 것이 아니었고 오직 성신의 감동을 받아 전한 것이었으니 앞으로도 그것을 조금도 변경치 말고 받은 그대로 전하라. 바울이 청년 목사 디모데에게 부탁한 것같이 나도 조선에 잇는 원로 선교사와 원로 목사를 대표하여 조선 청년 교역자들에게 부탁한다. 원로 선교사와 원로 목사들이 전한 그대로 전하라.

 

168>마포삼열을 비롯한 미 북장로교 소속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성경 전부가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이며 신앙과 행위의 유일무오(唯一無誤)한 법칙이라고 믿엇다. 그리고 성경에 교시된 진리의 체계가 장로교회의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과 요리문답에 잘 개괄되어 있다고 간주하였다. 웨스터민스터 교리적 표준은 한국 장로교회의 신조를 구성하고 있었다. 한국 교회는 이 신조가 하나님의 말씀의 철저한 토대 위에서 작성되었기 때문에 이를 매우 중요시하였다. 이런 전통 교리를 중시하고 신경과 신조를 중심으로 기독교의 진리를 이해하고 전수해 나가고자 하는 구파 장로교의 영향을 받고 있었음을 반영하고 있다.

 

169>19343월에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이후, 미국 웨스터민스터신학교에서 두 차레에 걸친 신학연구를 한 박윤선은 이렇게 회고한바 있다. “웨스터민스터신학교에서 나는 칼빈주의를 확신하게 되었다. 칼빈주의는 곧 예수를 믿는 것을 뜻한다. 나는 내가 미래에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에 대해 분명한 이해를 가지고 한국에 돌아왔다

 

 

 

156>초기 한국 장로교회의 형성과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사람들은 미국과 캐나다, 그리고 호주 장로교회로부터 파송된 선교사들이었다. 그들은 근대 영적 대 각성운동으로 말미암아 형성된 부흥운동과 경건주의적 영혼구원의 전도 열정을 가지고 해외 선교운동의 일환으로 은둔의 나라 한국에 찾아 왔던 사람들이다. 장로교 선교사들 중의 대부부분은 미국 장로교회에서 파송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미국 교회의 전반적인 신학적인 특성을 중심으로 그들의 신학적 배경과 선교 동기를 고찰해도 무방할 것이다.

 

157>한국에 파송된 미국 선교사들은 대체적으로 복음주의 신앙을 소유한 사람들이었다. “19세기의 미국 개신교도들은 거의가 복음주의자였다. 다시 말해, 경건주의와 개혁주의 유산이 결합된 신앙 형태를 견지하였고, 18세기와 19세기에 일어난 미국의 영적 대 각성운동의 토양 속에서 성장했다

 

158>초기 재한 선교사들의 신학적 특성을 구체적으로 정의하는 것은 쉽지 않은 작업이지만, 대체로 근본주의와 개혁주의 신앙을 포함하여 보수주의적 복음주의신학이 초기 장로교 선교사들의 신학을 설명하는데 가장 적절한 용어일 것이다. 선교 초기부터 그들은 복음주의적 정신을 강하게 유지하면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절대적인 믿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죄로부터의 구원의 복음을 일관성 있게 외쳐왔다.

 

159>한국교회에서 활동했던 미국 선교사들의 신학적 영향에 대해서, 전성천은 한국에 온 초기 선교사는 뉴잉글랜드에서 온 몇몇 감리교 출신 선교사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 구파 장로교 신학사상이 지배적인 지역에서 왔기 때문에 극도로 보수주의적이거나 근본주의적인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구파 장로교의 전통을 근본주의와 동일시하는 것은 잘못된 견해이다. “근본주의라는 용어는 1920년대 이후에야 비로소 미국 교회에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근본주의라는 개념 자체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하기 때문에 그 용어를 사용하는 데에 좀 더 신중하고적절한 주의가 요구된다. 구 프린스톤 신학과 근본주의와의 연관성을 강조한 나머지 이 둘을 동일시하는 경향도 있지만 그러한 주장은 매우 피상적인 견해가 아닐 수 없다.

 

160>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미국 개신교의 전반적인 신학적 경향은 대체로 다음의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고찰하는 것이 타당하다. "고전적 혹은 청교도적(Classical of Puritan) 복음주의, 경건주의적(Pietistic) 복음주의, 근본주의적(Fundamentalistic) 복음주의, 그리고 진보적 혹은 에큐메니칼(Progressive or Eccumenical) 복음주의가 그 유형들이다. 한국에 온 선교사들은 어느 한 유형에 속한 특성만 소유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신학적 특성들을 공유했으며, 대체적으로 경건주의적이며 근본주의적인 성향이 강했다고 간주할 수 있다.

 

162>또한 한국 기독교의 초기 단계의 중요한 신학적 영향은 1901년에 세워진 평양신학교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그 학교 교수의 대부분은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프린스톤, 맥코믹, 그리고 버지니아의 유니온신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163>당시 한국에서 사역하던 40여명의 선교사들은 7개의 신학교 출신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프린스톤신학교의 출신이 16명으로 제일 많았고, 그 다음이 맥코믹신학교 출신이 11, 샌안셀모신학교 출신이 4명이었으며, 그 다음은 뉴욕 유니온신학교 출신이 3명이었다. 또한 성경학교는 약 10개의 학교로 분류될 수 있는데, 무디성경학교 출신이 가장 많았으며, 그 다음은 뉴욕성경신학교였다. 가장 영향력 있는 선교사들은 1890년 한국에 온 마포삼열(Samuel A. Moffett), 1902년의 곽안련(Charles A. Clark) 1892년의 이눌서(William Davis Reynolds)와 소아론(William L. Swallen), 1906년의 어도만(Walter C. Erdman), 1907년의 나부열(Stacy L. Roberts), 그리고 구례인(John Curtis Crane)과 함일돈(Floyd E. Hamilton)이다. 그리고 결코 적지 않은 영향력을 발휘했던 초기 선교사로는 1897년 프린스톤 출신인 한위렴(William B. Hunt)1901년 맥코믹 출신의 방위량(William N. Blair)을 꼽지 않을 수 없는데, 이들은 평양신학교의 설립자가 되었고, 교수로 사역하면서 한국에서의 보수 신학을 배양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164-165>한국선교 희년(禧年)을 맞이한 1930년대 중반에 원로 선교사로 그리고 평양신학교의 설립자요 교장으로 1924년까지 지냈던 마포삼열은 유언과도 같은 의미심장한 설교를 한국 장로교회에 남겼다. 근래에 신신학이니 신복음이니 하는 q말을 하며 다니는 사람이 잇는 모양인데 우리는 그러한 인물을 삼가야 한다. 조선에 잇는 선교사들이 다 죽는다든지, 혹은 귀국한다든지, 혹은 선교사업을 최소한도로 축소한다든지 할지라도 조선 교회 형제들에게 사십년 전에 전파한 그 복음을 그대로 전하자그 복음은 그들의 지혜로 한 것이 아니었고 오직 성신의 감동을 받아 전한 것이었으니 앞으로도 그것을 조금도 변경치 말고 받은 그대로 전하라. 바울이 청년 목사 디모데에게 부탁한 것같이 나도 조선에 잇는 원로 선교사와 원로 목사를 대표하여 조선 청년 교역자들에게 부탁한다. 원로 선교사와 원로 목사들이 전한 그대로 전하라.

 

168>마포삼열을 비롯한 미 북장로교 소속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성경 전부가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이며 신앙과 행위의 유일무오(唯一無誤)한 법칙이라고 믿엇다. 그리고 성경에 교시된 진리의 체계가 장로교회의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과 요리문답에 잘 개괄되어 있다고 간주하였다. 웨스터민스터 교리적 표준은 한국 장로교회의 신조를 구성하고 있었다. 한국 교회는 이 신조가 하나님의 말씀의 철저한 토대 위에서 작성되었기 때문에 이를 매우 중요시하였다. 이런 전통 교리를 중시하고 신경과 신조를 중심으로 기독교의 진리를 이해하고 전수해 나가고자 하는 구파 장로교의 영향을 받고 있었음을 반영하고 있다.

 

169>19343월에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이후, 미국 웨스터민스터신학교에서 두 차레에 걸친 신학연구를 한 박윤선은 이렇게 회고한바 있다. “웨스터민스터신학교에서 나는 칼빈주의를 확신하게 되었다. 칼빈주의는 곧 예수를 믿는 것을 뜻한다. 나는 내가 미래에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에 대해 분명한 이해를 가지고 한국에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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