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3.26 00:27
한부선 선교사 평전 - ● 18. 웨스터민스터에서 보낸 한부선의 첫 안식년
202-203>당시 미 북장로교 선교부는 5년 동안 사역을 한 후에 안식년을 보내도록 하고 그 기간동안 신학연구를 하도록 규정하였다. 한부선은 첫 선교사역을 하는 동안 평양외국인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하던 한가태와 결혼하게 되었는데, 아내의 안식년과 맞추기 위해 2년을 더 사역하고 1935년에야 첫 안식년을 갖게 되었다. 미국에서 안식년을 보내는 동안, 한부선은 미 북장로교 선교부 서기의 기대와 달리, 웨스터민스터신학교에서 신학연구에 전념하였다. 그는 점차적으로 메이첸 박사와 그의 동료들이 시도하고 있는 교단 안에서의 개혁운동에 대해 동정하면서 미 북장로교 선교부의 정책의 문제점을 심각하게 인식하였다. 한부선은 1920년대뿐만 아니라, 1930년대까지 이어지고 있는 교단 안에서의 신학논쟁을 면밀히 주목하고 숙고하다가 결국은 다음과 같이 선언하면서 미 북장로교(PCUSA)로부터 탈퇴하였다. “미국 북 장로교회가 메이첸과 그의 지지자들을 교단으로부터 제명했을 때, 나는‘참된 신앙의 주창자들’을 용납하지 못하는 교단의 일원이 될 수 없다고 느끼게 되었다. 나는 그들과 함께 새로운 미국 장로교회(Presbyteriam Church of America, 후에는 정통장로교회/Orthodox Presbyterian Church로 개명함)에 참여하기 위해 탈퇴한다” 따라서 한부선은 정통장로교회 창립 위원 중에 일원이 되었고, 이 일로 인해 그는 1928년에 안수 받고 소속 선교사로 활동했던 미 북장로교회의 뉴 부른스윅 노회로부터 징계를 받게 되었다.
205>그리고 이 시기에 한국에서 유학 온 박윤선을 만나 그와 나눈 교제는 그와 평생 동역의 길을 가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박윤선은 1934년 3월에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박형룡의 소개로 웨스터민스터신학교로 유학을 떠나 그 해 9월부터 신학연구에 전염하게 되었다. 1926년에 프린스톤신학교를 졸업한 박형룡이 사랑하는 제자 박윤선을 웨스터민스터신학교로 보낸 것은 1920년대의 미 북장로교 내의 근본주의 대 현대주의 간에 논쟁에서 그의 신학적 입장이 무엇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박형룡은 나부열(S. L. Roberts)과 함께 박윤선을 웨스터민스터로 보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당시 교무처장이며 교회사 교수였던 폴 울리(Paul Wooley)에게 박윤선을 추천하는 내용과 함께 다음과 같이 그의 사역에 대해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