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로스 선교사 - 1. 사상의 형성(1842-1872)

 

만주 개신교의 설립자는 특이한 사람이었다. 그는 모험과 인내성 및 외국 문물에 대해 정확한 식견을 가진 자로서 19세기 가장 중요한 선교사가 되었다. 그는 현대의 독자들에게 끼친 영향만큼 그 당시 사람들에게 대단한 열정을 가지고 큰 영향을 주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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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는, 우리가 흔히 그와 같이 활동성 있는 개성을 가지고 있는 데서 볼 수 있는 성급함은 없었다. 그와 수 십년간 같이 일했던 제임스 웹스터(James Webster)목사가 말하기를 "무레한 군중들에 대한 그의 놀라운 인내와 끊임없는 예의와 재치를 보았다. 여러 주간 매일 같이 있었으나 아무리 어려운 경우를 당해도 그가 자제력을 잃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그의 성격 중에서 어려운 상태를 직면했을 때 인내와 관용은 제일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단지 개재를 가진 사람으로서 뿐만 아니라 만주와 한국의 개신교의 설립자 및 한국을 서양에 소개한 사람으로서 중요시된다.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이며,또한 그의 조상은 누구였던가?

 

.로스(John Ross,중국명 :나약수(羅約翰)는 휴.로스(Hugh Ross)와 캐더린 서더런드(Catherine Sutherland)의 맏아들로서 184289일에 태어났다. 그때 로스가족은 크로마티 하구(Cromarty Firth)의 어귀에 있는 인버네스(Inverness)의 북쪽 닉(Migg)마을에서 살고 있었다. 이 작은 농촌지역에서 존.로스의 어린 시절에 있었던 영향을 살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19세기 중엽까지도 이 지역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대부분 갈릭어(Gaelic Lnanuage)를 사용하는 지역이었다. .로스는 갈릭어를 사용하면서 성장했고, (Fearn)교구의 힐턴(Hilton)마을에 있는 학교에 가서야 비로소 영어를 처음 배웠다. 말할 나위 없이 두 언어-영어, 갈릭어-를 배운 경험으로 중국어와 한국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었다.

 

바다에 접해 있는 고향도 또한 틀림없이 로스목사에게 일찌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로스목사의 고향은 북서 스코틀랜드와 같이 거대한 산맥도 아니고, 로디안 카운티(Lothian County)와 같은 풍부한 농작물 지대도 아니었다. 그의 고향지역은 낮은 언덕이 있는 작은 농촌지역 이었다. 농업, 어업 및 바다무역의 종합경제로 비교적 국제적인 분위기를 띠었다.

 

로스목사가 어렸을 때부터 바다 건너편에 있는 것에 대해 알게 되었으므로, 성장한 후에 해외로 나가고자 하는 생각을 가졌다는 것은 기이한 일이 아니었다.

 

로스목사의 어릴 때 성장발전에 영향을 주었던 또 하나의 요소는 교회였다. 해외에서는 스코틀랜드 교회를 커다란 하나의 조직으로 생각했으나, 18세기부터 스코틀랜드 교회는 여러 파로 갈라졌다. 이들 중에 하나가 '부속노회(Associate Synod)'였다.

 

이 단체는 스코틀랜드 교회에 속한 것으로 생각되나 지방노회와는 무관했다. 결과적으로 1847년에 스코틀랜드 연합 장로교회가 되었다. 닉에 이런 연합 장로교회가 있었고, 거기에 로스목사 가족이 속하게 되었다.

 

연합 장로교회를 창설케 했던 신앙 전통은 로스목사의 신학사상 발전에 깊은 영향을 주었고, 그는 가끔 그 때를 스코틀랜드 교회의 역사에 있어서 영광스러웠던 한 순간으로 회상하곤 했다. 회귀한 사상을 가졌던 교파에 속했으므로, 로스목사는 독특하고 비범한 것을 할려고 했다는 것은 있음직하다.

 

닉 지방은 갈릭어 통용지역일 뿐만 아니라, 갈릭문화의 전설을 가지고 있는 지역이었다. .로스는 라리키(Rarichie)부락의 브룸턴 카터지(Broomton Cottage)에서 자랐다. 집 근처에는 덴마아크 통치시대의 성이 있었고, 또 클라크 아카리드(Clach a'Charridh)라는 신비스러운 비석이 있었다.

 

그 비석에 관한 몇 가지 이야기가 있다. 닉 교구의 묘지에 그와 비슷한 비석이 있었다. 그 지방에 많은 우물에는 선녀들과 요정들에 대한 얘기가 있었는데, 그 중에 제일 유명한 것은 설..(Sul na Ba)였는데, 거기에서 선녀들의 왕 앞에 제사를 드렸다. 그는 그러한 얘기들 중에 깔려 있는 미신적인 감정을 수긍할 수 없었지만, 농민들이 가졌던 그러한 신앙들을 이해하게 되었다.

 

로스 목사가 문화와 종교 및 지리에서 받았던 영향에 대해서 알 수 있으나, 그의 어렸을 때 영향은 더 강하게 그에게 작용했을 것이다. 로스 목사의 가족은 어떠한 사람들이었는가? 로스목사가 라리키에서 무역을 하면서 살고 부자가 됐던 '폴란더(Polander)'로스의 후손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그의 아버지가 그 지방에 주요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휴.로스(Hugh Ross)1832년에 설립된 콜레라방역회 회원이었다. 또한 그는 양복업자였다. 현대인에게는 이것이 특별한 직업으로 알려지지 않으나, 19세기 초 스코틀랜드의 농촌사회의 경우엔 달랐다. 양복업자들은 교구 밖의 사람들과 자주 접촉했다. 행상인과 여행자, 부락인들은 그 상점에 와서 바깥 세계의 소식을 전했다.

 

또한 양복업자1)가 우선 얼마만큼의 자본을 가져야 했다는 사실은 그들이 사회 중류계급이었다는 것을 뒷받침해 준다. 발린토어(Balintore)마을2)에 전해 오는 얘기 중에 로스목사는 편에 있 지방학교로 가기 전에 어머니로부터 먼저 교육을 받았다는 설이 있다. 그의 남편과 마찬가지로 로스목사의 어머니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높은 교육을 받았고, 가족들은 그 마을에서 식자층에 속했을 것이다.

 

로스목사는 여덟 아이들 중에 맏아들이었다. 그의 형제는 도널드(Donald), (Hugh), 윌리암(William), 알렉산더(Alexander), 캐더린(Catherine), 엘리자(Eliza)와 메리(Mary)였다.

 

이들 중 둘을 제외하고는 고향을 떠나 사회적으로 상당한 지위를 확보했다. 도널드는 1878년 글라스고우(Glasgow)대학교 의과대학을 나와 장차 자기 형 존과 선교활동을 할려고 계획했다.

 

휴는 라리키에서 농업을 계속했으나, 윌리암은 에딘버러(Edinburgh)의 항구인 리츠(Leith)에 가서 방앗간을 했고, 알렉산더는 에딘버러의 경찰국에 들어갔다. 캐더린은 1873 말에 만주에 있는 오빠 존에게 가서 그 후에 그의 동료인 존 맥킨타이어(John MacIntyre)와 결혼했다.

 

엘리사는 에딘버러에 있는 왕비 스코틀랜드 미술학원(Royal Scottish Academy of Art)에서 공부하고 거기서 미술전시회를 가졌다. 메리는 브룸턴 카티지에서 머물다가 후에 자기 언니 엘리사와 합류했다. .로스가족은 바깥사회에 잘 적응해서 더 좋은 지위를 확보했다.

 

1860년대 중반 존.로스는 에딘버러에 있는 연합장로교의 신학대학에 가서 신학을 공부했다. 졸업 후에 인버네스에 있는 조오지 브라운(George Brown0목사의 전도사로서 봉사했다. 1868년 가을부터 선교활동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해서 해외 선교부 총무인 윌리암 맥길(William McGill)박사와 접촉했다. 맥길박사는 로스목사의 초청을 쾌히 승낙하여 인도나 중국은 어떤지 의향을 물었다. .로스는 동시에 선교활동에 대해 두 의학도와 접촉해서 질문했다.

 

로스목사는 그 후 4년 간 해외로 나가는 문제에 대해 두 가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국내 선교부는 로스목사가 좋아하는 갈릭어 사용 지역인 하일랜드(Hithlands Region)에 머물러 있도록 권유했다. 그때 갈릭어를 사용하는 목사가 드물어서 가능한 국내 체류를 원했다. 반면에 해외 선교부는 로스목사의 언어능력을 인정해서 해외에서 봉사하기를 원했다.

 

인버네스에서 목회를 마친 다음 로스목사는 아일 오브 스카이(Isle of Skye)의 포오트리(Portree)에 있는 교회에서 잠시 봉사했다. 그는 거기서 2년 간의 목회가 여의치 않아 다시 다른 곳으로 옮겨 달라고 부탁했다.

 

이번에는 아우터 헤브리디즈(Outer Hebrides)에 있는 아일 오브 루이스(Isle of Lewis)의 스토너웨이(Stornoway)에 갔다. 그때 그는 맥길박사에게 "아마 스토너웨이가 국내와 해외선교에 어떤 실마리를 풀어 줄 것이다"고 했으나, 그렇게 되지 않았다. 이때 쓴 편지를 보면, 영국에 머물러 있을 것인가 해외로 갈 것인가를 결정하지 못했다. 또한 목회에 미숙함을 느끼고 있었다.

 

1881년 말 중국으로 가기로 결정하고 해외 선교부에 서류를 제출했지만, 18821월 그것에 대한 걱정을 맥길박사에게 편지로 전했다. 그는 급히 답장을 보내면서 그것에 대해 염려하지 말라고 했다. 그는 "동족 스코틀랜드의 화염보다 해외 선교의 불꽃이 더 낫다"는 것을 상기했다. 그런 강력한 언어에서 용기를 얻은 후에 그런 사명에 대해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

 

1882227일에 해외 선교부는 그를 중국선교사로 선택했고, 320일에 엘진(Elgin)과 인버네스의 노회는 그에게 안수했고, 325일에 엠.에이.스튜아트(M.A.Stewart)와 결혼했다. 30세에 그의 생애에서 가장 거대한 모험은 시작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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