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자선교회

존 로스 선교사 - 5. 교회 내에서 영적인 근원들의 심화(1888-1900)

 

18884월 로스목사는 두 번째 안식년을 맞아 런던 선교 수양회에 참석하여 중국과 한국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불행했던 것은 그가 떠나기 전 그의 어린 아들 쟈키가 죽었다. 로스목사는 캐나다를 경유, 거기에서 오타와에 있을 때 애도의 편지를 받았다.

 

그 선교회는 611일에서 19일까지 거행되었고, 그후 그 가족은 글래스고우로 돌아갔다. 8월부터 로스목사는 정열적으로 발표에 몰두했다. 18817월 이전으로 더 거슬러 가서 로스목사는 휴가를 가졌던 선교사들이 그들의 사업과 교회선교에 대해 항거했다. 그는 그때 말하길 교회는 안식년을 가진 선교사들을 대표하여, 이 목적을 위해 일련의 발표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두 번째 안식년 때는 그 위원회는 그의 요구에 동의해서 그에 대해 여러 가지 협정을 한 것 같다. 9월중에 그는 아일랜드에 아일랜드 장로교회를 대표해서 순회했다. 이 소개연설은 188811월까지 계속되었다.

 

18891월까지 그는 자기의 생각을 두 가지 문제로 귀결시켰는데, 하나는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선교회를 합병해서 만주에서 장로교 선교회를 하나로 만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친구이며 동료인 왕징밍을 기리는 책을 쓰는 것이었다. 지나간 해의 개인적 슬픔은 2월 그의 차녀 캐티제인(Cathie Jane)의 출생으로 씻어졌다.

 

로스목사는 5'왕 징밍'('Old Wang')이라는 책을 출판했는데, 그것으로 선교자서전의 모범으로 상을 받았다. 6월 로스목사가 가족은 네른(Narin)'엉컹퀴 오두막'(Thistle Cottage)에 살고 있었고, 7월엔 (Fearn)에 있었다. 8월 그곳에 머무르는 동안 로스목사는 두 선교회의 합병에 대해 방법을 모색했고, 그 후부터 11월 말까지 대중들 앞에서 설교하거나 가르쳤다. 10월 그들은 닉에 있는 친척들을 방문했고, 11월 글래스고우에 정착했다. 11월 하순에 그는 지난달 27일 봉천에 있는 중국풍의 교회가 헌당되었다는 것을 알았고, 이 교회에서 맥킨타이어목사가 이르기를

 

"고대의 용무늬가 아로새겨지고 전설적인 동물들이 지붕으로 소용돌이치며, 흠이 파인 굴뚝에서 용솟음치는 중국문화의 건축양식보다 더 나를 매료시키는 것은 없었다." 고 했다. 이 건물의 건축은 만주에 있어서 교회성장의 중요한 일면을 나타냈다.

 

1890년 초 로스목사는 연합장로교 선교보고에 두 강연 내용을 보도했다. 그것은 '만주에서 우리의 사역'('Our Work in Manchuria')'조선에 있어서 복음'('The Gospel in Corea')이었다.

 

첫 번째 내용에서 그는 자기의 초기 생활과 사역을 기술했고, 외국 선교사들에 대응한 만큼 자국의 대행인을 두여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간도지방에서 일어나는 기독교복음화의 과정을 간단하게 썼다. 그는 또 기독교 지식이 진보할려면 외국 선교사의 노력 없이 일어났음을 강조했고, 또한 그가 믿기로는 조선이 기독교 복음을 받아들이는 첫 아시아 국가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의 논점엔 두 가지 바탕이 깔려 있는데, 첫째는 불교가 민중에게서 멀어졌고, 둘째 조선인은 고등신(高等神)(Supreme Being)에 대한 신앙을 가졌다는 것이었다.

 

2월 말까지 로스목사 기록은 만주로 돌아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마 마아가렛과 어린 캐티제인이 앓고 있어서 갔었는지에 대해 몇 가지 의문점이 있다. 그러나 36일까지 그 가족은 런던에 배를 타기 위해 갔을 것이다.

 

329일 글랜노글(Glenogle)호에 타기 전 로스목사가 만주에 가는 것에 대해 방해하는 3명의 선교사 즉 더글라스(Douglas), 잉글리스(Inglis) 로버트슨(Robertson)의 급파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항해를 기다리며 선창에서 로스목사는 '만주의 마지막 요구, 교회를 분열시키는 망언들'('The Needs of Manchuria,Parting Words to the Chruch)이란 글을 썼다. 거기서 그는 만주에 있는 교회의 위치에 대한 그의 관심을 언급했다. 그는 말하길

 

"아주 중대한 이유로 나는 중국에 있는 많은 유럽 선교사의 주장에 항거하는 것이 분명히 이해되길 원했으므로, 안수 받은 사람이 증가해 가면서 그 지역이 완전히 복음화 되었다고 생각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 사람들이 전략적 요충지에 있는 두 사람에 의해 배치되어져야 하며, 또 그들은 중국기관을 훈련시키고 도우고 지도키 위해 거기 가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의 두 번째 요청은 간도지방을 위한 것이었는데 그는 그것을 결코 잊지 않았다. 그는 한 선교사가 간도지방에 영구적으로 머물기를 원했다. 이 단평에서 로스목사는 비록 자신이 이 임무를 기꺼이 떠맡을려고 했던 스코틀랜드의 한 신학생에 대해 알고 있었으나, 그가 활동하는데 자기네들의 일반적 선교비 외에 추가로 특별 헌금으로서 그를 후원할 사람이 있을까 하는 문제가 남았었다.

 

1890년 여름,18881월에 나왔던 맥킨타이어 목사와 제임스 와일러(James Wylie)는 간도지방으로 여행해서 많은 조선인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로스목사 자신은 선교지에 포함된 대평구 주위의 여러 지역을 시찰키 위해 그 해 가을 여행했다. 12월엔 그와 제임스 웹스터가 봉천의 북쪽 전지역을 여행했다. 그들은 철령에서 안식을 가졌고 다음날 개원으로 왔다.

 

하룻밤을 묵고 나서 그들은 서쪽으로 향했고, 마친타이(Machintai)에 있는 세관을 지나 내 몽고의 동쪽지방을 둘러싸고 있는 평야로 들어갔다. 그들은 대평구에서 5일을 머물고 나서 개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로스목사는 50세가 되어서도 아직 모험가였으며 선교사역을 돌아 보기 위해 넓은 지역을 여행했고, 교회가 더 확장될 수 있는 새로운 지역이 없을까 하고 찾아 다녔다.

 

이 원정보고에서 그는 후에 봉천에서부터 동쪽으로 조선국경선까지 '빈공간을 메꾸기 위해'일하기를 바라며, 또한 그들이 만주 북동쪽 지역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매매가에 지부를 설립토록 촉구했다.

 

1890년 여름 로스목사는 상해의 제2차 중국 선교 수련회에 참석했는데 이것이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는 한 논문에서 만주인의 제사문제를 다루고 토의에 참석, 그것을 제출했다. 그는 또한 세계선교의 재음미(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라는 잡지에 두 논문을 제출했는데, 하나는 '조선에 있어서 기독교의 여명'('The Christian Dawn in Korea')이고, 다른 하나는 '중국 선교의 문제'('The Chinese Missionary Problem')이란 제목을 붙였다.

 

여름이 거의 끝나 갈 때 로스목사 가족은 또 다시 둘째 딸 캐티제인(Cathie Jane)이 죽는 불운을 맞았다. 189012월과 18911월에 그는 북방으로 여행을 했는데, 아주 놀랍게도 조선반도의 왕국에서 나온 조선인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평북지방인 강계에서 온 어떤 최씨라는 사람이 로스 목사를 찾아와 교인들이 있었던 그 시 부근에 많은 사람이 있다는 정보를 제공했는데, 또한 로스목사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 온 것이었다.

 

얼마 후 로스목사의 조선인 서적판매원인 김청송이 강계에서 온 다른 조선인과 같이 봉천에 도착해서 최씨의 얘기를 뒷받침했다. 그 후 조정관리의 두 번째 직급에 해당하는 강계의 호방에서 온 사자가 도착해서 최씨가 복음서, 신약성서 및 교회 문답서를 가져오도록 요구해서 이것들을 보냈다.

 

로스목사는 그때 그 상황을 파악키 위해 그의 조선인 식자공인 공씨라는 사람을 최씨와 같이 보냈다. 그는 관리가 직접 보낸 회답을 받았는데, 거기엔 그가 열심히 성경을 공부하고 있었고, 최씨와 공씨가 도착한 후 그는 강계와 자성, 후창지방에 있는 교인들에게 신앙을 키워 주기 위해 노력했다고 쓰여 있었다.

 

강계에서 서약했던 100명의 교인 중 10명만이 세례를 받기에 적격이었고, 자성에서는 90여명 중 단지 7, 후창에선 150명중 15명만이 적격이었다.

 

32명의 이름이 로스목사에게 전달됐는데, 편지는 후창현의 공인이 찍혀 우송됐다. 나아가 그 현령은 최씨가 머무르면서 이 신자들을 가르치도록 요구했고, 후창에 있는 교인들이 그 중 한 사람인 최정홍이란 사람을 로스목사에게 보낸다고 적혀 있었다. 이것은 선교사들이 조선의 북방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기독교 사회가 성립되어졌다는 것을 가르킨다.

 

18912월 로스목사는 철령과 그 주위를 살펴보려고 여행했고, 26명에게 세례를 주었으며 4명의 집사들을 뽑도록 지도했다. 교회가 최초에 설립된 봉천의 북쪽지방에 있어서조차 자체 독립과 자체 전도의 단계가 이미 달성되었기 때문이었다.

 

18913월 대평구에서 더 멀리 떨어진 곳에서 47명이 세례를 받았다. 이러한 것들은 327일 그의 아들인 존 허버트(John Herbert)가 출생함으로 로스목사에게 기쁨을 더하게 했다. 잉글리스가 봉천에 왔고, 더글라스씨가 요양에 보내졌으며, 영박사(Dr.Young)와 로버트슨(Robertson)이 하르빈의 바로 남쪽에 있는 쌍성부에 새 지부를 설립해서 왔다.

 

이것은 선교부가 사람들이 타지방에서 많이 이주해 오는 지방을 접촉하기 위함이였다. 67일 제임스 와일러는 압록강의 초산지방에서 온 한 조선인의 세례소식을 알렸다. 아마 그 젊은 사람과 초산에서 군인과 리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둘 다 요양에서 웨스터워터(Westwater)박사와 같이 있었을 것이다.

 

1891227일 북미 선교사 중 조선으로 왔던 제임스 게일(James Gale0과 사무엘 마펫(Samuel Moffett)은 조선의 수도인 서울에서 북쪽으로 탐험 여행을 떠났다. 게일은 캐나다인으로 토론토대학교 YMCA의 파송을 받았고, 반면 마펫은 북장로교에서 왔다.

 

324일까지 그들은 의주에 도착했는데, 로스목사를 통해 믿었던 많은 교인들이 나와서 영접했고, 거기서 45일까지 머물렀다. 그 달 중순까지 그들은 봉천에 도착해서 로스목사와 4일간 같이 지냈다. 로스목사는 그들에게 강계지방에서 조선인과의 있었던 일을 알려 주었고, 그들 스스로 그 상황을 연구하도록 말했음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봉천을 출발한 뒤 그들은 통화를 거쳐 간도지방까지 갔다. 그곳에서 자성과 후창으로 갔고, 연안에 있는 장진을 거쳐 59일 원산에 도착했다. 로스목사는 조선과 만주지방에 어떤 선교사가 있어야 하며, 젊은 선교사들이 스스로 그 상황을 본다면 그들이나 동료 중 하나가 그곳에 파송되길 바란다고 했다.

 

18917월 한달간을 로스목사는 순회전도 여행을 하면서 보냈다. 그 해 여름 동역하여 활동 중인 에이레와 스코틀랜드 선교회가 단독 장로회 관학구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지방교회 연합의 중요한 단계였다. 그것은 하나의 선교회로서 더 이상 간주되지 않았고, 관동 장로교구로서 알려진 하나의 자립교회로 생각되었다.

 

그 장로교구의 영역을 청나라 시대에 전형적인 만주의 새 지방으로서, 만리장성 동쪽으로 조선국경과 남쪽으로는 흑룡강까지 이르는 거대한 지역이었다. 8월에 로스목사는 그에게 세례를 받으려 강계에서 왔던 교인 최씨와 있었던 경험을 글로 썼다. 따로 또 그는 선교부에 편지를 보내 최씨가 조선의 그 지역에서 그들의 대행자로서 활동할 수 있도록 원조를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에딘버러 선교부는 이것을 기각하고 만주 선교회로 다시 문의했다.

 

단념치 않고 로스목사는 다시 1027일 같은 청원을 써서 선교부가 그 지역에 외국 선교사를 보낼 것을 고려하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이 요구는 선교부 기록에 주제가 언급되지 않은 만큼 힘없이 거절되었음이 틀림없다.

 

923일에서 1016일 사이에 로스목사와 잉글리스는 북쪽을 두루 여행했다. 이 여행기간 그들의 진로는 철령과 위원을 거쳐 이통을 방문했고, 이통에서 매매가 지방을 거쳐 최북단까지와 그 지방의 최남단을 왕래할 때 이들을 중심지로 삼았다.

 

그 해 겨울 로스목사는 세계선교 재음미(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라는 잡지에서 "선교사 바울"("Paul the Missionary")이라는 논문을 기고했다. 얼마간 로스목사는 바울이 현대 선교사들이 따라야 하고, 사도 이후 그 자신을 특정 지우도록 시도했던 표본이었다고 느꼈다. 그는 또 고향교회에 편지해서 중국에 사회적 혼란이 비록 있었다 하더라도, 만주의 총독 자신이 외국 선교사들의 안전을 보장했다고 써서 보냈다.

 

1892216일 로스목사와 잉글리스는 또 한번의 여행을 했는데, 이때 봉천의 동서와 개원을 거쳐 처음엔 철령으로, 서쪽으로 대평구와 매매가로 갔고, 거기서 동쪽으로 이동, 남쪽으로 휘난 즉 오늘의 차오양에 이르렀다.

 

그 장소에서 떠날 때까지 그들은 통화와 간도지방으로 계속 여행했는데, 그들은 23일을 보낸 후 나흘 걸려 봉천으로 돌아 왔다. 517일 아침 그 장로회 관할교구가 봉천에서 모였는데, 외국선교회 본부의 의장인 던칸 맥레런(Duncan M'Laren)이 참석했다. 의장은 에딘버러 신문인 '스캇츠맨(The Scotsman)'에 편지를 보냈는데, 76일 로스목사와 그의 동력자들의 사업을 찬양했다.

 

던칸 레런은 어떤 선교회도 중국에서 이 선교회가 한 것 보다 더 빨리 성장한 것이 없다고 느꼈다. 이때 2,000명의 신자들이 있었고, 에이레 장로교회를 포함해서 간부진들이 18명이나 되었다. 에이레 사람들은 관성을 받았고, 쌍성부와 두개의 떨어진 지부엔 스코틀랜드인이 있었다. 또 그 회의에는 조선에 있는 성공회 선교사인 찰스 존 콜페(Charles John Corfe)수도원장이 있었다. 아마 주교 콜페의 최소 관할은 조선과 같이 만주도 포함되었고, 그의 영역에 있는 장로교 선교사들과의 접촉의 필요성을 느꼈는데, 특히 그들이 조선에 대해 중요한 영향을 끼쳤을 때 그러했다. 그가 방문하는 동안 조선의 교회에 대해 수련회에서 얘기했다.

 

11월 말경 로스 목사는 개원 근방 지역을 여행했는데, 이 해에 그는 '중국에서 복음을 전하는 방법'('How the Gospel Spreads in China')이라 이름 붙여진 세계 선교보고에 제출한 또 하나의 논문을 썼다.

 

18934월 로스목사는 봉천의 동쪽으로 순회전도 여행을 했는데, 선왕들의 무덤이 있는 흥경을 거쳐 조선과 중국 사이에 오래된 세관 중 하나인 왕청문에 도착했다. 거기서 통화를 지나 동쪽으로 발길을 돌려 통화와 환첸의 중간인 치안티엔추까지 도달했고, 거의 일주일을 거기서 보냈다.

 

일행 중 한 사람의 집 근처에 여러 젊은이들이 모여 방탕한 일을 하는 집이 있었는데, 거기서 로스목사는 그들과 긴토론을 벌였으며, 그들은 아마 불교와 도교의 한 분파였을 것이고, 사일리(Dsaili)로 알려졌다.

 

로스목사는 이 지역에 있어서조차 많은 조선인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 이들 중 한사람은 씨라는 사람으로부터 복음을 듣고 간도의 서적보급원으로 고용되어 세례를 받으려고 로스목사에게 왔다. 보고서에서 로스목사는 그 시대의 빛나는 활동상을 자세히 기록했고, 그가 전생애를 만주에서 보냈던 중요성을 기술했다.

 

5월 시찰회에서 차기 대회의장에 선출됐다. 여름 동안은 그의 딸 마아가렛(Margaret)이 아파서 그 가족은 그녀의 건강을 위해 연대에 얼마간 머물렀고, 95일 영구로 돌아 왔다.

 

1893년 여름 양자강 계곡에서 사회적 소요가 일어나 식구들이 그들의 안전을 확보키 위해 영국 포함을 사용하리라 생각한데 대해, 로스목사가 말하기를 "중국에서 있는 어떤 작은 문제들을 간섭키 위해 세속적인 힘을 빌린다면, 복음이 중국에 전파되지 않을 것이다. 이런 '황제''영국 포함'에 대한 요구는 애국적인 중국인의 심중에 더욱더 선교사는 정치적 대행자라는 인상 - 모든 다른 복합적 원인보다 더 기독교사상을 감추는 믿음-을 짙게 할 것이다"라고 했다.

 

189311월 로스목사는 봉천과 철평 중간에 있는 일루(Ilu)에 지부를 설립할려고 생각했다.

 

18941월 로스목사는 봉천 전지역 특히 일루지방을 중점적으로 여행했다. 이 지역에 대한 그의 노력은 북쪽으로 선교영역을 넓히기 위해 한 지역을 활성화한다는 뜻이다.

 

3월에 로스목사는 글래스고우대학에서 신학박사학위를 받았는데, 그 공적으은 만주에서의 선교에 대한 노력뿐만 아니라 그의 두 저서인 'A History of Corea' 'History of the Manchus'때문이었다.

 

이 때까지 선교부는 만주에서 20년간 활동해 왔고 끊임없이 고요한 성장을 지속해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해 여름 조선의 영주권 문제를 둘러싸고 청.일 전쟁이 일어났다. 주된 격전지는 만주와 조선의 북쪽 지방으로 교회와 선교의 모든 방면에 타격을 주었다.

 

.일전쟁은 일본과 서양인 사이를 구별치 않았던 중국인에게 강한 애국심을 자극시켰다. 모든 외국인들은 중국을 공격하고 중국의 종주권 박탈에 대항하는 집단에 속하는 것 같았으며, 이런 감정 때문에 많은 폭도들과 훈련 안된 여러 집단의 군사들이 기독교 단체와 중국신자들을 공격했다. 810일 요양에 있는 한 폭도가 쳐들어와 제임스 와일러를 아주 심하게 때려 6일 후 그 상처로 죽었다. 비록 8월 말 범인들이 붙잡혀서 당국에 의해 처형되었으나, 그 분위기가 너무 거세어져 선교사들은 내륙지방에서 영구로 가는 것이 좋다고 여겨졌다.

 

소요 중반에 이르러 로스 목사는 세계일주 여행을 하는 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Bird Bishop)부인의 내방을 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820일 떠나 25일에 영구에 도착해야 했는데, 봉천을 떠나기 전 비숍 부인은 진료소를 세우는데 쓰도록 멕시코 은화 200불을 선사했는데, 후에 그 진료소는 그녀의 사별한 남편 이름을 따서 죤 비숍(John Bishop)이라 명했다.

 

로스목사와 크리스티(Christie)박사는 그들이 그 시를 떠나도록 정해진 1010일까지 봉천에 머물렀다. 이때까지 그는 건강의 악화와 체력을 소모하는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해 왔다. 10월 중순 그와 가족은 영국으로 가는 배를 타고 상하이에 들렸고, 122일 고향에 남아 예배와 거기 정박 중인 영국 및 미국전함들의 명사들을 위한 다른 활동들을 집행했다.

 

로스 목사가 영국의 고향에 돌아오기 전, 글라스고우에 있었던 드러몬드 (Drummond)와 발린토어(Balintore)에 있었던 그의 숙모는 가족에 대해 마음을 졸이며 편지를 보냈으나 그들의 안전엔 이상이 없었다.

 

로스목사가 영국에 도착했을 때 그의 건강은 거의 환자에 가까왔다. 스코틀랜드에서 약간의 여유를 가졌고, 1895년에 가족들은 펀(Fearn)에서 요양과 친족을 방문하면서 보냈다. 이 기간 동안 그와 선교부는 그가 소요 기간 중 영국에 남아 계속 활동할 것인가 혹은 현지로 선교사로 돌아 갈 것인가에 대해 다투었다. 또한 여선교사들이 만주에 돌아갈 수 있는가에 대해 토론했다.

 

8월 로스목사 가족은 913일 런던에서 '피 엔드 오우(P & O;Peninsular and Orient)'회사 기선인 로마호를 타고 갈려고 했으나, 로스목사의 건강 때문에 영국에서 그해 겨울을 보내기로 했다. 그러나 그 해 여름이 다되어 갈 무렵, 만주에서 전보가 도착했는데 여성들을 축출할 것이라 했다. 이 전보를 받고 도착했는데 여성들을 축출할 것이라 했다. 이 전보를 받고 로스목사는 갑자기 그의 생각을 바꾸고 혼자 919일 영국을 떠나 제노아(Genoa)에 가서 23일 북독일 로이트(Lloyd)기선인 프린스 하인리히(Prinz Heinrich)를 타고 영구에 도착했다. 114일에 영구에 가서 1131일 봉천에 도착했다. 그때의 보고에서 봉천에 아직 약간의 소요가 있었으나 얼마간의 반외국인 감정폭발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의 인명손실이 없었다고 알렸다.

 

로스 목사는 한번 더 중국 내부의 문제에 서양의 무력이 참견해서는 안된다는 중요성을 강조하고, 교인들의 노력에 결정적으로 해를 끼친다고 느끼는 전함의 출동에 대해 단호했다. 그가 주둔지로 돌아 왔을 때, 제임스 웹스터는 사업이 해룡성에서 시작되어 개우너지역의 사업이 확장되기를 기대했다.

 

1869년 초 일반교회 활동은 정상을 되찾았고, 외국선교사들은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서까지 원상을 회복했다. 멀리 남쪽과 북쪽의 지부에서는 외국인들에 항거하는 소동의 소식은 하나의 결과로서, 교회나 선교사들 어느 쪽도 청.일정쟁의 어떤 피해도 입지 않을 만큼 그곳의 주민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다.

 

416일까지 로스목사 부인과 두 딸이 그와 같이 있기 위해 만주로 돌아 왔고, 614일 교회발전의 획기적인 사건이 봉천 출신의 첫 목사와 장로를 피택함으로 이루어졌다.

 

중국 양식의 두 번째 교회건물이 그 해 여름과 가을 동안 철령에 세워졌고, 처음으로 새 부속예배당이 봉천의 한 교외에 건축됐다. 9월 로스목사는 만주 수도 북쪽의 선교지부들을 연결하는 중요한 고리로 그가 생각했던 일루의 교회에 열중했다. 그가 발견한 것은 이 도시에만도 300명 이상의 세례 받을 사람이 있고, 그것이 확설화와 가능성을 방해했던 교회의 공포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9월 말인가 10월초에 상해로 여행한 적이 있는데 이 명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12월 성탄절 바로 전에 로스목사는 흥경과 영릉 동쪽으로 순회전도 여행을 하면서 44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18971월 그는 일루로 여행을 계속해서, 이 시장 주위 몇몇 마을에서 158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2월 그는 동쪽으로 또 여행했고 그 때 약 50마일을 선회했는데, 그가 관할했던 가장자리에서 개원의 서쪽인 파짜쯔우로 가서 그 후 영릉, 흥경, 통화와 치앙티엔쯔우 남부까지 갔다.

 

여행 중 159명에게 세례를 주었고, 동화에 있을 때 그가 남긴 말은 "내가 마음과 손에서 멀리 떨쳐 냈던 조선인들이 우리에게 다시 밀려온다"라고 한 것이었다. 그가 통화에 갔을 때 50명의 한국인이 참석해 21명이 세례를 받았다. 이유는 이들이 그에게 거대한 조선 사회에서 그를 필요로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그들의 필요를 충족시킬 선사를 보내 달라는 청원을 또 한번 피했다.

 

18974월 일루 부근 지역을 순회 전도했고, 5월 로스목사와 맥킨타이어목사를 위해 동북 중국선교 25주년으로 만주 선교부가 잔치를 베풀었다. 7월 중순부터 로스목사는 여름을 상해에서 보내면서 성서주석협의회에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 나온 결론은 로스목사가 욥기 주석, 이사야(절반), 마태복음(절반), 야고보서와 몇몇 서신의 주석을 쓰기로 되었는데, 후에 성경의 완전한 중국어 주석의 부분으로서 출판되었다.

 

이 해에 새로 안수 받은 목사 류첸야오는 영국을 여행하여 스코틀랜드에 있는 로스목사의 모교회를 방문할 수 있었다. 류목사의 방문은 로스목사의 오랜 숙원인 중국 교인들이 서양교회의 사정이 어떤가를 알아보기 위해 스스로 서양으로 갈 수 있음을 실증했다.

 

10월 로스목사는 봉천 북쪽을 잡지인 만주교회지 (Manchurian Church Magazine)를 내도록 활동했다. 그 외 한국인 서적 보급원이 이 때 도착해 간도에 있는 한국촌으로 다시 오도록 독촉했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이때 만주교회를 위한 전략은 교회의 성장을 증명했다. 즉 한 사람의 중국인 목사, 17명의 장로, 165명의 집사와 105개의 예배당 및 예배소, 전체 세례 받은 자가 5,802명에 달했고, 학습자가 6,300명이나 되었다.

 

로스목사는 불굴의 여행자였다. 18981월 다시 동쪽으로 여행했는데 흥정까지 여행했고, 먼 산골에 있는 작은 마을을 거치면서 북쪽으로 파치아쭈까지 갔다. 이 여행을 끝내고 2월에 다시 더 동쪽에 있는 마을들을 방문했고, 한 달 후 영릉, 흥경에 다시 갔으며, 그 후 통화 서도강, 예쉬호쭈, 치앙티엔쭈, 라클리큐, 쟈오징고우와 리쉬짜이를 방문했다.

 

여기에서 중국인 122, 조선인 95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 여행과 특히 조선인의 세례를 회고하면서 "모든 조선인의 문제는 나에게 무겁게 지워져 있다"라고 술회했다. 만주 전체의 두 배에 해당하는 인구가 서울에 있었으나, 이 중요한 지역에는 한 사람도 배치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다시 그의 모교회에 편지를 보내, 통화지방에 머무를 수 있는 그들에게 선교사를 보내는 것을 고려해 보도록 간청했다.

 

신앙을 숙련시키러 온 많은 조선인들이 세례를 받기 위해 몇 년을 기다렸고, 그렇지 않으면 이 많은 사람들이 천주교인이 될 것이고 사실 그렇게 되었었다. 로스목사는 이것에 대해 그러한 사람들이 그와 맥킨타이어 목사가 번역했던 신약성경의 보급을 통해 그리스도 사상에 대한 지식을 가졌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것이 특히 절박함을 느꼈다.

 

영국 및 해외성서회(The British and Foreign Bible Society)의 트러리(R.H.Turley)는 이 마지막 여행에 로스목사를 동반했고 4월 그는 외국선교부(Foreign Missions Committee)에 강력한 편지를 써서 압록강 기슭을 따라 사업을 시작하도록 촉구했는데, 교회는 그들이 도전하는 환경에 직면해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드러난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예상대로 그는 더 이상은 할 수 없었다.

 

가을에 로스목사의 주의가 집중된 것은 교회의 가장 밀접한 관련 중 하나인 숙련된 성직자의 교육이라는 견해였다. 로스목사가 초보적 평신도 교육기관은 이미 설립했으나, 좀더 조직적이고 복잡한 신학교육을 제공하는 대학을 설립하는 것이 더 절박하게 요청되어졌다.

 

로스목사와 에이레교회의 필턴(T.C.Fulton)은 교수들을 불러들이고 로스목사가 새 기관의 학장이 되었다. 다른 데 선교사들은 강사로 강의를 맡게 했다. 교육과정은 6개월에 매 4장과 이상을 짜고, 강좌는 10월에 시작해서 4월에 마쳤다. 고등학교 졸업자격이 없는 네 학생에게는 입학시험이 부과되었다.

 

189312월 세 사람이 로스목사의 부탁으로 간도지방을 여행했는데, 그들은 2월 여행에 동반했기 트럴리, 복음서 보급협회(The Society for the Propagation of the Gospel)의 스프랜트(Sprent)씨와 요양의 선교사인 그레함(J.Miller Graham)이었다.

 

스프랜트가 온 것은 아마 간도지역 상황에 관계된 조선의 주교 코프씨의 제안이 있었을 것이다. 그들 셋은 1213일 봉천을 떠나 1899116일 집으로 돌아 왔다. 그의 보고에서 그레함이 언급하기를 "이 지역은 명백히 최소한 한 사람의 안수 받은 선교사가 필요하다"고 하고, 거기의 많은 새 신자들은 돌 보아줄 사람이 부족해서 많은 사람들이 장로교와 가까운 천주교인이 된다는 로스목사와 트러리의 견해를 강조했고, 또 지방집회를 표시하는 자립적 태도를 칭찬했다.

 

이 세 사람이 갔던 진로는 흥경, 황청문, 영액과 통화전체 지역이었다. 그들은 26일까지 통화에 머물렀고, 거기서 성탄절을 지내면서 그 교회의 헌금으로 생활했다. 또 성찬식을 거행하고 33명의 중국인과 조선인 6명에게 세례를 주었고, 압록강의 어귀인 통구성으로 가서 조선으로 건너갔다. 그들은 통화에 있는 교회가 그곳에 알려진 것을 보고 기뻐했다.

 

스프렌트는 거기서 떨어져 강계로 일주일간 여행했고, 그레함과 트러리는 압록강을 다시 건너 서남서쪽으로 강을 따라서 내려갔다. 그 길을 따라 내려 내려가면서 그들은 많은 조선인 거주자들을 만났고, 치앙티엔쭈와 환인, 태평초를 거쳐서 치우짜이코우에서 다시 만났는데, 거기엔 로스목사에게 잘 알려진 교인 가족이 있었다. 그 후 그레헴은 갈라져서 관전과 요양을 경유해서 봉천으로 갔고, 트러리와 스프랜트는 압록강으로 갔다가 영구로 왔다.

 

1898년 겨울과 1899년초 로스목사는 대부분의 시간을 신학생 고학년을 가르치며 보냈다. 7명의 학생들이 있었고 그들을 실천신학으로 양육했는데, 대부분이 설교준비와 설교하는 방법에 관한 것이었다. 1900년 정월 그는 사도들의 말씀의 내용과 거기에 관련된 열 가지 문제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는 로마서에 관한 221가지 레포트를 읽었다. 2월 욥기 강해와 시험이 있었고, 3월에 더 많은 실천훈련, 4월에는 누가복음에 집중했다. 저학년에는 126명의 학생과 60명의 청강생이 있었다.

 

길지 않은 교회생활에 성숙하는 기간 중 로스목사는 지방의 북청사변의 소식을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다. 중국인 신자들은 황태후의 '무례하고 천박한'행동 때문에 신앙의 괴로움을 겪고 있었다. 비록 아주 경미한 압박이 있었을 지라도 몇 달 내에 없어졌다. 성장한 반 외국 움직임에 대해 지시한 사항이 있었을 것 같지는 않다.

 

18996,7월에 지난 해 12월 물러났던 풀러(H.W.Fuller)는 통화 지역에서 일하기 위해 로스목사를 그의 할당된 구역으로 여행했는데, 그들은 영릉과 풀러가 그의 거주할 곳을 설치하려 했던 흥경을 지나 황청문을 거쳐 통화까지 갔다. 풀러는 통화가 중국인 및 조선인의 사역을 위해 중심지가 되리라 생각했다. 로스목사는 통화에서 한 용지를 구입했는데, 거기엔 이미 그 장소를 점유하고 있는 부속 예배당과 전도자가 방문하기 위해 팔도강 북쪽으로 갔고, 수많은 조선인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다시 계속해서 흥퉁가이 까지 가서 거기에서 더 많은 조선인들에게 세례를 주었고, 풀러는 젊은이 중 한 사람을 자기의 조선어 선생으로 선택했다. 그들은 서도강을 경유해서 돌아 왔는데, 도중 두 어린이를 포함해서 20명의 조선인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또 특기할 만한 재미있는 것은 조선인이 살고 있던 학교의 숫자가 20개나 있었다는 것이었다.

 

 

:

 

1) 휴 로스는 흔히 말하는 양복업자가 아니라 모든 옷을 만들어 파는 상당한 위치의 특수한 전문업자였음.

 

2) 라리키 근방의 마을

 

3) 'Corean Primer'는 존.로스 목사와 이응찬이 공부한 조선어 교재이다.

 

4) 장로교회 조직으로서 노회 위에 있으면서 총회 바로 밑에 있는 조직체.

 

5) 중국어 문법 중 가장 학식이 높은 사람이 쓰는 문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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