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자선교회

죤 로스 선교사 - 한글 성경 최초로 번역

 

1, 18729월 중국 산동성에 있는 지푸를 거쳐서 요령성 반도 하구에 있는 영구에 짐을 풀고 그곳에 정착한 John Ross 선교사는 평양에서 순교했던 토마스 선교사가 뿌린 순교의 씨를 열매 맺게 한 선교사입니다.

2, 만주 땅에서 선교 사역을 했던 죤 로스 선교사는 한국 기독교에 대하여 지대한 공헌을 한 선교사입니다. 그는 중국 만주 땅에 주재하면서 일생을 조선인을 위해서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여 중국 만주 지역에 살고 있는 조선인과 조선 땅에 성경을 전해 주었던 선교사입니다.

 

3, John Ross 선교사는 한국말로 그 이름을 '라 요한'이라 부릅니다. 요한이란 이름을 갖게 된 것은 그의 영어의 원 이름이 존 로스였기 때문입니다.

 

중국대륙에 도착한 죤 로스 선교사 부부

죤 로스 선교사는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출신으로서 스코틀랜드 서북쪽에 자리잡고 있는 조그만한 항구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그곳은 농사와 어업을 함께 하는 마을이었지만 늘 배가 드나드는 곳이어서 자연히 무역이 성행하여 많은 외국의 선박이 오가고 있었기에, 비교적 넓은 국제 감각이 어린 로서에게 까지 밀려와 바다 건너편에 있는 나라를 동경하는 마음이 솟아오르게 되었다.

 

로스의 가정은 비교적 여유 있는 가정이었으며, 그의 부친은 의류 도매업을 하는 상인이었다. 그러한 관계로 외부의 소식을 자주 접할 수 있었다. 그의 가정은, 많은 장로교회가 분열되어 있지만 시대의 흐름에 따라 스코틀랜드 장로교회가 연합을 해야 한다면서 교파가 하나되는 운동에 앞장섰던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 교인이 되었다.

로스는 8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으며 그의 모든 형제 자매들은 부모의 신앙과 사랑 속에서 잘 자랐다. 장남인 로스는 스스로 가문에 믿음의 뿌리를 전승해야 한다면서 많은 직종의 직업이 있었지만 목사의 길을 가기고 마음먹고는 그 길로 에딘버러에 있는 장로회신학대학에 진학하여 신학을 공부하였다.

 

신학을 연구하는 중에 선교사에 대한 꿈을 갖게 되었고 그 선교사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열심히 기도한 결과 당시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 해외 선교부의 총무인 맥길 박사를 만나 그의 도움으로 4년 만에 중국 선교의 길을 걷게 되었다. 원래 어학에 천재적인 재질이 있었기 에 가장 언어가 힘들다는 중국을 택하고 나섰다.

 

중국은 예나 지금이나 이 지구상에서는 가장 광활한 나라였다. 그 많은 사람들에게 누가 복음을 전할 것인가라는 자문 자답 속에서 로스는 스스로 주님께 헌신하기로 결심하고, 1872227일 스코틀랜드 장로회 인버네스 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스튜어트와 결혼을 하였다. 그리고 30세의 젊은 나이로 중국 대륙을 향해 선교사로 출발하게 되었다.

로스 선교사는 부인과 함께 캐나다 벤쿠버를 향해 가는 배에 몸을 싣고 대서양을 건너서 벤쿠버에 도착하였다. 다시 벤쿠버에서 일본으로 가는 배에 승선을 하였으며, 일본에 얼마 동안 머물면서 각국에서 모여온 선교사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1872823일 목적지인 중국 산동성 지부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같은 선교회에서 파송을 받았던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총무인 월리암슨 선교사의 영접을 받았다.

 

9월에 그는 같은 선교회 소속인 매킨타이어의 뒤를 이어 그가 선교지로 활동할 만주 영구에 짐을 풀고, 집을 구하려고 했지만 당시 외국인 선교사들에게 대한 시선이 곱지 않았던 터라 몹시 애를 먹었다. 그러다가 가까스로 집을 구하긴 했지만 매서운 겨울의 혹한은 이들 두 부부를 괴롭혔다. 더구나 부인 스튜어트는 임신까지 하여 그 삶이 여간 고통스러운 게 아니었다.

 

이들 두 부부는 하나님의 의를 중국 땅에 전하겠다는 사명감으로 이곳까지 오기는 했지만 견디기 힘든 영하의 날씨는 몇 번이고 그들의 사명감을 통째로 흔들어 놓고는 하였다. 그러던 중 부인 스튜어트는 혹한 속에서도 아들 드리먼드를 출산하였다. 그러나 영하25도의 살인적 추위가 계속되는 날씨 속에서 산후 조리를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그의 부인은 불행하게도 1873331일 이역만리 중국땅 영구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입고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의 죽음을 지켜보았던 로스 선교사의 고통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로스는 곧 일어나 부인의 몫까지 일을 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다시 새롭게 하고는 중국 선교의 새로운 전략을 세웠다. 로스 선교사는 이렇게 굳게 마음을 먹었지만 어린아이를 중국인에게 맡겨 키우는 것은 늘 마음에 걸리는 문제였다. 그래서 여동생 캐더린을 중국으로 불러들였다, 그녀는 로스 선교사의 아들을 키우다가 얼마 되지 않아서, 혼자 와서 선교 활동을 하고 있던 스코틀랜드 출신 매킨타이어 선교사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녀는 결혼 후에도 계속해서 로스 선교사의 아들 드리먼드를 돌보면서 중국 미션 여학교에서 교장으로 일하였다.

 

로스 선교사는 아일랜드 선교사들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 선교구역을 분할하였다. 로스 선교사는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에서 파송을 받았기에 중국 동북부 지역을 맡게 되었고, 아일랜드 장로교회에서는 만주 서남부 지역을 맡게 되었다. 이러한 관계로 로스 선교사는 한국인이 자주 왕래하는 의주 쪽을 자주 여행하게 되었고, 자연히 영국런던선교회에서 파송을 받고 한국 선교에 문을 열고자 순교의 반열에 들어섰던 토마스 선교사에 대한 일을 듣고 크게 감동을 받았다.

 

한글 성경 번역과 조선인 청년들

 

로스 선교사는 토마스 선교사가 꿈꾸던 한국 선교를 실현시키기로 마음을 먹었고, 그 일환으로 압록강 줄기를 따라 농사를 짓고 잇던 조선인들에게 한글로 된 성경을 번역하여 전해주기로 선교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압록강을 따라 살고 있는 조선인을 만나고자 몇 번이고 의주 당을 밟아 보려고 하였지만 국경에 조선 병사들이 삼엄한 경계를 하고 있어서 수포로 돌아가곤 하였다. 그러다가 로스 선교사는 생각을 바꾸어 중국에 들어오는 조선인들을 만나 기회가 되면 신약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기로 하고 사람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이 때에 의주 출신 이응찬을 만난 것은 주님의 인도하심이었다. 이응찬은 압록강을 건너 다니면서 장사를 하던 사람이었는데 여느 때와 같이 물건을 가득 선적하고는 의주 건너편에 있는 단동을 향해서 가다가 뜻하지 않게 풍랑을 만나 그만 배가 파선되고 말았다. 겨우 목숨만 건져 중국 단동 근방으로 떠밀려온 조선인 이응찬이 로스 선교사를 만나 한국 기독교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놀라운 하나님의 선교 사역에 동참하게 된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랑 속에서도 생명을 부지하였던 이응찬은 로스 선교사의 도움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로스 선교사를 돕는 조사로서 활동하기에 이르렀다. 이응찬을 만난 로스 선교사는 좋은 협력자를 얻은 사실에 대하여 대단히 기뻐하였다. 당시 조선에서는 중인 계급에 속한 사람이라면 한자를 많이 아는 지식층에 속한 사람이었기에 로스 선교사와 이응찬은 한자로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로스 선교사는 1874년 최초로 조선 사람인 이응찬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를 어학 교사 겸 조사로 채용하여 성경을 번역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그 후 이응찬은 다시 고향 의주로 돌아가서 자신의 친구들인 이성하, 백홍준, 김진기, 이익세 등을 중국으로 데려와 1875년 로스 선교사에게 소개시켰다. 서상륜과 형제 서경조는 중국을 더나 들면서 홍삼 장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서상륜은 만주 고려문을 더나들면서 장사를 하다가 뜻하지 않게 열병을 앓게 되었는데 이때 매킨타이어 선교사를 만나게 되었다.

 

친구의 주선으로 헌터 의사의 치료를 받게 된 서상륜은 이때 매켄타이어의 전도를 받았으며 완쾌 후 로스에게 소개되었던 것이다. 누가복음을 번역한 후 서상륜은 세례를 요청하였으나 로스는 이응찬의 경우처럼 보다 확고한 신앙인으로 성장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하였다.

 

1879년은 한국교회사에 길이 기억될 해이다. 이 해에 백홍준과 이응찬을 비롯한 4명의 한국인이 매킨타이어로부터 세례를 받았고 이에 따라 한국 개신교 최초의 세례교인이 생겨지게 된 것이다

 

당시 한국은 철저한 쇄국 정책으로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그러나 세계 정세에 눈이 밝았던 로스 선교사는 머지 않아 조선에 문이 열려지고 동시에 선교의 자유가 올 것을 믿고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지원을 받아 성경 번역 사업에 정력을 쏟았다.

우선  로스 선교사는 1875년에 <예수 성교 문답><예수 성교 요령>이라는 전도 문서를 한글로 발행하였으며 이응찬을 만났던 1874년 가을부터 시작했던 라는 우리말 회화 책을 1877년에 출간하였고 1878년에는 역사적인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의 한글 성경 번역이 완료되었으며 1880년에는 라는 우리나라 역사책을 출간하였다.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1879년도 보고에 의하면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은 1878년에 로스 목사와 한국인 서기들에 의하여 번역이 완료되었는데 이 해에 로스 목사가 안식년으로 귀국케 되었음으로 매킨타이어 목사가 그 업무를 맡아 한국인 서기들과 함께 다시 수정을 더하였다.

 

1879년 로스 목사가 영국으로부터 돌아오자 수정된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일일이 재검토하여 최종 원고를 작성한 후에 그것들의 인쇄에 관한 준비를 서둘렀다. 1880년에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와 영국성서공회가 번역비와 인쇄비를 전담케 되었음으로 그 다음 해에 인쇄기를 상해로부터 구입하여 봉천 선교부에 설치하였고 한국인 번역자들에 의해 준비된 목활자를 일본 주재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총무 릴리 목사에게 보내어 40,000자의 연활자를 만들어서 그 해 우장을 거쳐 봉천(심양)으로 가져왔다.

 

이렇게 완벽한 준비 끝에 중국인, 일본인, 그리고 조선(한국) 사람들의 협력에 의해 성경이 간행되었다. 드디어 1882년 심양에서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간행되었으며 이것이 최초로 발행된 최초의 한글 성경이었다. 1883년에는 교정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 간행되었으며 다시 요한복음도 개정판으로 출간하게 되었다.

 

다시 1884년에는 마가복음, 마태복음이 간행되었으며 이어서 1885년에는 로마서, 고린도전, 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가 간행되었다. 다시 1887년에는 <예수 성교 전서>라는 신약전서 전체를 간행하게 되었다. 이것을 가리켜서 흔히들 '로스 번역' 이라고 말하고 있다.

 

최초로 서간도 지방에 조선인 교회 탄생

 

로스, 매킨타이어 선교사들의 활동은 한국인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선두 주자가 되었으며 또한 로스 선교사의 조사였던 이응찬과 서상륜의 도움으로 1882년 로스역인 누가복음이 만주 심양에서 최초의 한글 성경으로 발간되었다.

 

1882(고종19)에 누가복음이 인쇄되자 로스목사는 매양 행상자를 종교책 행상인으로 삼아 동부 만주 골짜기에 흩어져 사는 한국 사람들에게 보내었다. 여섯 달 뒤에 그는 돌아와서 많은 사람이 신자가 되었다고 보고하면서 그들에게 세례를 주러 함께 가자고 선교사에게 권고하였다.

 

이러한 보고를 받았던 로스 선교사는 요한복음서를 발간하려고 하는 준비에 쫓기어 그만 세례를 받기 원하는 그들에게 가지 못하고 말았다. 다시 쪽복음인 누가복음을 상자에 가득 싣고 전도 여행을 떠났던 행상인들은 두 번째로 그 마을을 찾아 나섰다. 6개월만에 만난 조선 사람들은 매우 기뻐하였다. 그런데 섭섭하게도 로스 선교사가 오지 않았으므로 세례를 받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많은 조선 사람들은 실망이 컸다. 이와 같은 사실을 소상하게 보고 받은 로스 선교사는 1884년 겨울에 행상인의 안내를 받으면서 눈이 쌓인 골짜기를 찾아 나섰다. 로스 선교사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우리들은 첫7일 동안 마차로 타고 여행하였으나 눈이 너무 깊게 쌓이고 길이 좁아서 다음 한 주일 동안은 나귀를 타고 갔다. 영하20도의 추위는 우리를 몹시 괴롭혔다. 해가 지는 석양에 우리는 첫 한인촌 도착하였는데 약 30명의 흰 두루마기를 입은 한인들이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우리는 가장 우두머리 되는 사람의 집에 유숙하였는데, 그들의 호의와 친절은 말로 다할 수 없었다. 이 온순한 농민들은 20년 간 이 골짜기를 개간하고 농사를 지어 왔다. 그들의 유일한 염원은 그저 아무 연고 없이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것 이였다. 그런데 2년 전에 그들의 생활에 큰 변화를 일으킨 일이 생겼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 골짜기까지 들어온 것이었다. 그리하여 수백 명의 조선인들이 구원의 길을 찾아 날마다 즐거운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만주에 있는 조선인들은 조선 내의 정치 변동으로 정치적 망명 겸 생활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서 만주로 이주해 왔으며, 이들은 집단촌을 이루고 땅을 개간하면서 살았다. 바로 이들이 모여 살았던 곳이 서간도로서 뜻하지 않게 이곳에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고 있었다. 바로4개 부락에서 모여든 75명의 사람들에게 로스 선교사는 세례를 베풀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최초로 만주땅 서간도에 조선인 교회를 설립하게 되었으니 이 교회가 설립되었던 곳이 바로 길림성 즙안현, 이양자이다.

 

이곳은 옛날 고구려의 수도였던 자리로서 고구려 수도에 조선인 교회를 설립한 것은 정말 역사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들은 모두 조선에서 건너온 조선 사람들로서 집단적으로 세례 받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들의 삶에 놀란 조선 사람들은 더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겠다고 지원하고 나섰다. 이렇게 해서 중국 동북부 지역에 널려 있던 조선인들이 점점 예수께로 돌아와 구원의 확신을 갖고 열심히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다시 로스 선교사의 보고서를 읽어보면 다음과 같다.

 

서간도 조선인 촌에서 세례를 받은 사람은 모두 100명이었는데 그들은 수명의 소년을 제외하고는 모두 성인 남자였다. 이 사업은 아직도 북한의 압록강 양 연안에서 계속적으로 확장되고 있다.

 

이처럼 서간도 조선인 촌에서는 1년 간에 1백여 명의 세례 교인을 배출하는 등 한국 선교의 교두보적 역할을 담당할 뿐만 아니라 장차 중국 동북부 지방에 널려 있는 조선인 전도를 위한 좋은 전략지가 되기도 하였다. 서간도 지방에 모여들었던 조선인들은 아주 평안한 상태는 아니었다. 늘 중국인들은 조선인에 대하여 경쟁인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남이 알 수 없는 고통이 이들에게 가해지고 있었다.

 

거기 사는 중국 사람들은 조선 사람들이 서양 사람들의 도움을 얻어 자기들의 이익을 침해하려 한다고 오해하여 조선인 신자들을 박해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에도 불구하고 영국과 외국 성공회는 전도를 계속하여 복음의 씨는 그 지방에 보존 될 뿐 아니라 더 널리 전파되었다.

 

조선 사람들은 때때로 중국인들의 박해를 받았지만 여기에 개의치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일이 가장 고귀한 일이라고 말한 뒤에 더 열심히 예수를 믿고 있었다.

한편 로스 선교사는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완성한 후에 이 쪽복음을 중국에 있는 조선인들에게 전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조선반도에 들여보내 수많은 조선인들이 예수 믿기를 원했다. 하지만 쪽복음을 조선에 반입하는 문제는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이성하는 자신들이 협력해서 번역하였던 복음서를 동족에게 전해 줄 수 없다는 사실에 울분을 터뜨린 나머지 그 복음서들을 압록강에 던져 버리고 일부는 불태워 그 재를 압록강에 뿌리면서 한탄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로스 선교사는 이렇게 말하였다.

 

성경 씻은 물을 마시는 사람마다 생명을 얻게 될 것이며, 성경 태운 재를 입은 사람마다 크게 성장하리라.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보라! 로스 선교사의 예언은 그대로 이루어졌다. 이 일이 있은 지 오래지 않아서 압록강가에는 많은 교회들이 생겨나 왕성하게 성장해 갔던 것이다.

 

첫 성경의 조선 땅 반입

 

1년에 몇 차례씩 만주 심양에서는 헌 종이를 사고 파는 장이 섰다. 이때 로스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던 의주 청년 백홍준은,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 커서 그 귀한 진리를 혼자서 간직하는 것보다는 고향 그리고 조선 땅에 전해야 한다는 간절한 마음을 갖고 복음서를 반입해 보려고 연구하던 중, 고서 행상인으로 가장을 하고 심양에 나가 헌 종이를 구입하여 한복판에는 복음서를 가득 채우고 가장자리는 헌 종이로 메꾸어 짐을 꾸렸다. 또 복음서를 낱장으로 만들어 끈을 해서 그 끈으로 멜빵을 하여 압록강을 건넜는데 때 마침 그 날 국경선 보초가 잘 아는 친구여서 조선으로 성경을 반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압록강을 건너는 데 성공한 백홍준은 그 길로 의주, 강계, 구성, 삭주 등을 다니면서 복음서를 나누어주며 전도하였다. 이때 백홍준의 전도를 받았던 의주 사람들 중 김이련과 그의 아들 김관근 등 33명이 예수를 믿기로 하고 1884년에 의주 교회를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백홍준의 뜨겁게 역사하는 예배 인도에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던 중 1889년 압록강가에서 언더우드 선교사의 집례로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의주 땅에 복음을 전파했던 백홍준은 1892년 외국인과 내통했다는 죄명으로 검속 되었으며, 그 후 봉천 감옥에 수감되어 2년 간 옥고를 치룬 뒤 이 세상을 떠났다. 백홍준으로부터 전도를 받았던 의주 청년 한석진은 예수를 믿고 1893년 평양 최초의 교회인 장대현교회의 조사를 거치면서 후에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생이 되기도 하였다.

 

한편 만주에서 열병으로 죽을 뻔하였다가 로스 선교사의 소개로 영국 의사에게 치료받고 살아났던 서상륜은 로스 선교사의 좋은 협력자가 되어 이응찬과 함께 한글 성서 번역에 동참하게 되었다. 그가 심양에 머물면서 로스 선교사를 돕고 있을 때 로스 선교사는 조선에 복음을 전해야 한다면서 1883년 심양교회에서 성대한 파송식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파송 예배가 끝나자 로스 선교사는 얼마의 한글복음서와 전도 문서 그리고 한문 성서를 그에게 전달해 주고 축복기도를 해주었다. 심양교회 교인들은 서상륜의 앞길을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심양 교외10리 밖까지 나와 전송하였다.

 

그가 고려문에 도착했을 때에 중국 관헌에게 불심 검문을 당하여 그의 짐 속에 성서가 들어 있었으므로 그는 별정소라는 조선 측 검문소에 인도되어 구속, 투옥 당하였다. 그러나 다행히 별정소의 관리 김효순은 의주부의 관리로서 그의 먼 친척 되는 사람이었으므로 그가 야간에 탈출하는 데 도움을 주어 무사히 고향 의주까지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서상륜의 고향 의주에 돌아왔지만 모든 책들을 압수 당하고 말았으므로 그가 가지고 온 책은 몇 권되지 않아 복음을 전파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로스 선교사는 조선 조정을 고문으로 있었던 독일인 몰렌도르프의 도움으로 인천 세관을 통하여 6천여 권의 한글 복음서를 서상륜에게 전하여 주었다. 이것을 받아 든 서상륜은 그 길로 서울로 입성하여 고향 친구들을 대상으로 전도하였다. 그의 전도를 받고 13명의 고향 친구들이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자 그는 너무 기뻐서 로스 선교사에게 서울에 다녀가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로스 선교사는 만주 지방에서 행하고 있던 선교 사업이 너무나 복잡했던 고로 서상륜의 요구에 응해 주지 못하였다.

 

그러나 서상륜의 끈질긴 간청을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어서 1887년 가을 드디어 선편으로 서울 한강에 도착하였다. 이 때 서울에서는 1885년 아펜셀러와 함께 서울에 도착한 언더우드 선교사의 집례로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이미 14명의 세례 교인을 중심으로 하여 교회가 세워졌던 것이다. 이처럼 교회가 세워지기까지는 서상륜의 공로가 적지 않았음을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었다. 로스 선교사는 서울에 이처럼 교회가 세워 졌다는 사실에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공지 2021.02.23-119 김반석 2019.05.26
20 (한부선) 한부선 선교사 평전 - 서문 file 선지자 2014.03.25
19 (한부선) ● 한부선 선교사 선지자 2014.03.25
18 (존 로스) … … 선지자 2014.03.23
17 (존 로스) … … 선지자 2014.03.23
16 (존 로스) … … 선지자 2014.03.23
» (존 로스) 죤 로스 선교사 - 한글 성경 최초로 번역 선지자 2014.03.23
14 (존 로스) 존 로스 선교사 비문 file 선지자 2014.03.23
13 존 로스 선교사 - 7. 로스목사의 업적 file 선지자 2014.03.23
12 존 로스 선교사 - 6. 마지막 선교활동(1900-1916) 선지자 2014.03.23
11 (존 로스) 존 로스 선교사 - 5. 교회 내에서 영적인 근원들의 심화(1888-1900) 선지자 2014.03.23
10 (존 로스) 존 로스 선교사 - 4. 교회의 건설(1881-1888) file 선지자 2014.03.23
9 (존 로스) 존 로스 선교사 - 3. 첫 번째 안식년(1879-1881) file 선지자 2014.03.23
8 (존 로스) 존 로스 선교사 - 2. 선교활동 초기(1872-1879) file 선지자 2014.03.23
7 (존로스) 존 로스 선교사 - 1. 사상의 형성(1842-1872) 선지자 2014.03.23
6 (존 로스) JOHN ROSS(존 로스) file 선지자 2014.03.23
5 (죤 로스) ● 죤 로스 선교사 선지자 2014.03.23
4 언더우드 선교사 일대기 김반석 2014.02.09
3 Again 1907… 아, 하디 선교사여! 선지자 2007.06.15
2 정동제일교회 세운 아펜젤러 [1] 선지자 2007.05.15
1 새문안교회 세운 언더우드 목사 [1] 선지자 2007.05.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