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동행

2007.06.05 15:16

김반석 조회 수: 추천:

제목 : 하나님과 동행
선지자선교회 본문 : (창5:21-24)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드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삼백육십오 세를 향수하였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서론>

창5:1-32 말씀에는 아담 자손의 계보가 나옵니다. 제일 처음 1절 말씀에는 '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되' 하셔서 사람을 창조하신 그 창조의 속성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을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느냐 하면 창5:21-24에 기록 된 대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창5:3에는 '아담이 일백삼십 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하셨습니다. 가인과 아벨이 이 말씀에서 없는 것은 아벨은 순교의 피를 흘렸고, 가인은 하나님의 형상이 없는 자이기 때문에 아담 자손의 계보에서 제외되었습니다.

창5:1-32에는 사람이 나고 살고 죽고 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므두셀라'는 구백육십구 세를 향수하고 죽었는데도 그의 생애가 단 성구 세 절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그 성구 세 절 안에 들어가 보면 사람이 나서 살다가 죽는 것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서 살다가 죽는 그 범위를 좀 더 늘여서 보면 사람에게는 두 종류의 생애가 있는 것이 보입니다. 한 종류는 전적 사망에 속한 생애여서 하나님과의 동행을 떠나 세상이 주는 기쁨으로 살다가 영원한 멸망의 받는 종류입니다.

또 한 종류는 생명에 속한 생애여서 하나님과 동행하여 주님이 주시는 기쁨으로 살아서 영원한 영생을 하는 종류입니다.

그러하므로 우리 사람이 제일 크고 중요하고 귀한 것은 하나님과 동행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과 동행하도록 하기 위해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었습니다.

<본론>

사람의 생애는 두 종류

창5장1-32 말씀에서 모든 사람은 두 종류의 생애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생명의 생애, 또 하나는 사망의 생애입니다. 그래서 아담의 계보에 속한 자는 생명의 생애이며, 아담의 계보에 속하지 못한 자는 사망의 생애에 속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 두 가지 생애법칙

또 생애 법칙이 둘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법칙으로 살고, 하나는 하나님과 동행을 버리고 자신이나 그 어떤 피조물과 동행하는 법칙으로 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므로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동행은 영생인 것을 상징적으로 계시하여 주신 것입니다.

우리 사람이 제일 두려워하고 제일 싫어하는 것은 죽음의 사망입니다. 그러나 이 죽음의 사망을 이기고 생명의 영생을 가지는 법칙이 있으니 곧 하나님과 동행입니다. 이 이치는 영원불변의 진리이치입니다.

하나님과 동행을 떠나서 그 무엇과의 동행도 그것은 죽음의 사망이 오는 것이니 이 또한 영원불변의 진리이치입니다.

사람에게 두 가지 기쁨

사람의 기쁨도 두 기쁨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생명의 영생에 속한 기쁨이 있고. 또 하나는 죽음의 사망에 속한 기쁨이 있습니다.  

창4:5에 보면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가인은 하나님과 동행을 버리고 저와 피조물과 동행하는 법칙으로 살므로 결국은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하는 죽음의 사망에 속한 기쁨을 가졌습니다. 즉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였습니다.

생명의 영생에 속한 기쁨은 주님이 주시는 십자가의 기쁨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기쁨은 십자가의 기쁨인데 왜 십자가의 기쁨이라 하느냐 하면 십자가라는 것은 일차 죽고 이차 부활하는 것이 십자가로서 마귀가 주는 기쁨은 죽이고 주님이 주신 기쁨으로 다시 사는 것이 십자가의 기쁨입니다.

그러기에 마귀가 주는 타락된 생사화복관 희로애락관은 죽이고 이제는 주님이 주시는 생사화복관 희로애락관을 가지는 것이 십자가의 기쁨입니다. 그러므로 마귀가 말하는 死는 生으로, 禍는 福으로 怒는 喜로, 哀는 樂으로 바꾸어 가지는 것이 십자가의 기쁨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주시는 십자가의 기쁨은 주님을 위해서 수고하는 기쁨, 또 이웃을 위해서 주님 안에서 희생하는 기쁨입니다.

마귀가 주는 세상의 기쁨은 자신만을 위해서 수고하는 기쁨, 또 이웃을 희생시키더라도 자신을 위하는 기쁨입니다.

<결론>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 동행을 떠나므로 사망이 왔는데 그 사망에서 구원하여 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도 우리들이 하나님과 동행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또 신구약 성경 진리를 주신 것도 구속받은 우리들이 하나님과 동행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성령을 보내신 것도 구속받은 우리들이 하나님과 동행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영원자존 하신 하나님과 그 하나님의 목적과 예정과 창조와 섭리, 그 전부가 우리들로 하나님과 동행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한데 우리들이 간과하는 것은 하나님과 동행은 버리고 그 외에 하나님과 동행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 조성한 것만 상대합니다. 그래서 물질만 상대하고, 또 사람만 상대합니다. 또 하나님과 동행하는 법칙인 신구약 성경말씀만 상대합니다. 하나님과 동행은 두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법칙만 상대하는 이것을 외식이라 하고 율법주의라 합니다.

말세지 말 오늘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법칙만 상대하는 이것은 두고서라도 타락에 타락이 쌓여서 사람만 상대하고 더 타락해서 이제는 물질만 상대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하나님과 동행이라는 것은 거의 잊어버린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동행이라는 말씀은 거의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좀 잘 믿는다는 교회도 말씀대로 사는 것을 말하지 그 말씀대로 사는 것의 그 중심은 하나님과의 동행이라는 것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이라는 측면으로 우리의 신앙생활을 돌아보면 거의 외식이며 불신의 수준입니다. 또 하나님과 동행을 말하고 동행을 한다고 하지만 지극히 부족하고 미약합니다.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입니다.

우리 구속받은 성도는 생명에 속한 생애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생애법칙은 하나님과 동행으로 사는 법으로 살아야 하고, 주님이 주시는 기쁨을 받아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성도의 참 신앙생활입니다.

오늘 하루, 한 시간, 한 현실에서 하나님과 동행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받고 또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받아서 사람에게 전해 주고, 또 어떤 일을 만나든지 하나님께 여쭈어 보고, 또 하나님과 의논하고, 또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고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능치 못하심이 없는 분이신 것을 알려주시고, 또 하나님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도 알게 하여 주시고, 또 우리의 대적은 하나님의 물리쳐주시고, 등 하나님과 인격교제 하나님과 동행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영원히 하나님과 동행으로 사는 곳입니다.

에덴동산에서도 하나님과 동행
구약시대에서도 하나님과 동행
신약시대에서도 하나님과 동행
하늘나라에서도 하나님과 동행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신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도록 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기에 구속받은 우리들은 늘 하나님과 동행을 위한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피와 성령과 진리도 하나님과 동행을 위해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과 동행 한 것만이 우리의 성화구원입니다. 우리의 영생구원입니다.


◎ 백영희목회설교록(1985년 7월 28일 주일오후) 참조/ 김반석목사 재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