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동행하는 10가지

2007.06.10 22:46

김반석 조회 수: 추천:

제목 : 하나님과 동행하는 10가지
선지자선교회 본문 : 창세기 5:1-32

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아담이 일백삼십 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아담이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구백삼십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셋은 일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구백십이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게난을 낳은 후 팔백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구백오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사십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구백십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 *야렛을 낳은 후 팔백삼십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팔백 구십오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야렛은 일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 *에녹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구백 육십이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드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삼백육십오 세를 향수하였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므두셀라는 일백팔십칠 세에 라멕을 낳았고 *라멕을 낳은 후 칠백팔십이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는 구백육십구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라멕은 일백팔십이 세에 아들을 낳고 *이름을 노아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라멕이 노아를 낳은 후 오백구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는 칠백칠십칠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노아가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창5:1-32)

<서론>

창5:1-2에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하셨습니다.

히브리어로 아담은 곧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이며 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이기에 그 이름 또한 사람이라 일컬었습니다. 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의 그 후손이 되는 구속받은 우리 또한 사람으로서 그 이름 또한 사람입니다.

그러한 것은 창5:3에 '아담이 일백삼십 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하신 것을 보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

'셋'도 아담의 형상 같은 아들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의 형상대로 낳음을 받았습니다. '아담' '셋' 이렇게 이름은 구분해서 부르지만 그 이름들은 다 같이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입니다.

그렇기에 창5:1-32까지에 아담의 자손의 계보는 다 사람의 계보이며 또 그 계보에서 나오는 이름들은 각각 다르나 그 이름들은 다 '사람'이라는 이름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의 계보'라는 것은 '사람의 계보'라는 말과 같은 말이 되겠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고 또 아담의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아담이 '셋'을 낳고, 또 그 '셋'은 '에노스'를 낳고 해서 하나님과 동행한 '노아'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의 계보에 나오는 사람들은 각기 그 시대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산 사람들이라 하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덧붙인다면 우리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으로 구속받았으니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 사람이며 또 그 이름 또한 제각기 외부적 이름을 가졌으나 그 이면의 본질 근원적 이름은 '사람'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과 또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으로 구속받은 우리들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야 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류시조의 이름을 '아담' 곧 '사람'이라 일컬은 것입니다. '사람이라 일컬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으니 하나님의 형상대로 살아야 된다' 하는 말씀입니다. 곧 '하나님 나와 동행으로 살아야 된다' 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을 사람이라 하지 소(牛)라 하거나 개(犬)라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속을 들여다보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는 사람이 있고 또 하나님의 형상대로 살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 둘을 어떻게 구분해서 불러야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는 사람은 그 이름을 그대로 '사람'이라 일컫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살지 않는 완전 타락한 사람 곧 하나님과 영원히 동행이 없는 그 사람의 이름은 성경에 그 이름을 '육체'라 일컬었습니다.(창6:3)

(창6: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본문>

창5:1-32에 보면 사람이 나고 자라서 자녀 낳고 살다가 죽은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에녹은 나서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자녀 낳고 살다가 하나님이 데려 가심으로 죽지 않고 바로 하늘나라에 갔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동행은 죽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에게 구원도리로 나타내 주셨습니다.

그런데 마귀란 놈은 하나님과 동행은 죽지 않는다는 이 구원도리를 쏙 빼버리고 죽지 않고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 이렇게 미혹을 합니다. 그래서 죽지 않고 바로 승천한다는 휴거를 말하여 교회를 미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은 죽지 않고 또 하나님과 동행은 죽음과 상관없고 또 하나님과 동행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과 동행인데, 이 하나님과 동행은 두고서 죽음을 두려워하여 죽지 않고 하늘나라에 가려는 것은 이미 죽음에 종노릇한 자인 것입니다. 이런 자는 죽음이 두려워서 죽음이 시키는 대로 할 자들입니다. 그렇기에 죽음이 두려워서 죽지 않고 하늘나라에 바로 간다는 이 휴거는 마귀 사단의 미혹 역사입니다.

죽음이 해하지 못하는 자로 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로 살 수 있는 것은 하나님과 동행뿐입니다.

에녹은 삼백육십오 세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므로 하나님이 데려가셔서 세상에 있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삼백육십오 세 사는 동안 하나님과 동행을 하나씩 하다가 하나님과 동행을 온전히 다 이루었을 때에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이 데려 갔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동행은 죽음이 없는 생명으로서 그 생명은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이니 곧 영생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동행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과 떨어지지 않는 것이 하나님과 동행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떨어지지 않고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첫째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사모하는 것으로 동행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하고 사모하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은 우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동행입니다.

둘째는 하나님 말씀으로 동행

요일5:7에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진리말씀과 동행하면 하나님은 떠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동행입니다. 우리가 깨달은 성구 하나를 놓지 않고 붙들고 있으면 하나님은 떠나지 않습니다.

셋째는 영감으로 하나님과 동행

영감은 성령의 감화감동을 영감이라 합니다. 우리가 성령의 감화감동과 동행하면 하나님은 떠나지 않습니다. 영감은 볼 수 없는 하나님의 역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와 함께 하면 그 역사 하시는 하나님과 동행한 것이 됩니다.

넷째는 사죄로 하나님과 동행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 대속 공로를 베푸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으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떠나셨는데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사죄의 대속을 입혀주시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죄짓지 않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떠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동행입니다.

다섯째는 칭의로 하나님과 동행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 않는 불의로 하나님이 우리를 떠나셨는데 예수님의 칭의의 대속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되었습니다. 이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그 뜻은 곧 하나님이 가지신 뜻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떠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동행입니다.

여섯째는 화친으로 하나님과 동행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고 또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으므로 하나님과 불목이 되어서 하나님이 우리를 떠나셨는데 예수님의 화친의 대속 공로로 우리가 하나님과 화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과 화친되어 살면 하나님과 하나 된 것이니 하나님은 우리를 떠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동행입니다.

<참조>

●[사죄, 칭의, 화친] 명확한 구분적 설명

◎ 사죄

사죄는 '죄 사함을 받았다'는 말로서 예수님의 대형의 대속공로를 힘입어서 죄 짓지 않는 자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죄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죄 없는 자가 되었습니다. 곧 예수님의 대속으로 죄 사함을 받아 사죄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다고 다 의가 되느냐 하면 그것은 또 다릅니다. 의는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의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 곧 죄를 짓지 않는 것과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그 의와는 다른 면이 있습니다.

◎ 칭의

칭의는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말로서 예수님의 대행의 대속공로를 힘입어서 의롭게 사는 것을 말합니다.

의는 하나님의 뜻대로 산 것이 의입니다. 좀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 것이 의인데 사죄의 설명에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 것이 의가 안 되는 또 다른 면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나 그 현실에서 주시는 하나님 말씀 곧 그 현실에서 주시는 하나님의 뜻에 딱 명중시키는 면이 있어야 의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기는 살지만 하나님의 뜻에 명중이 되어야 의가 되지 하나님의 뜻에 딱 맞게 명중이 안되면 의가 안 되는 것입니다. 마치 과녁을 향해 화살을 쏘아라 할 때에 다들 화살을 쏘지만 과녁 중간에 딱 맞추는 것과 쏘기는 쏘나 과녁 중간에 딱 맞지 않고 과녁 바로 옆이나 아니면 과녁에서 좀 멀리 벗어 아게 쏠 수도 있습니다. 이래서 과녁 중간에 맞아야 명중이라 하고, 하나님의 뜻에 딱 맞게 행해야 의라 하는 것입니다.  

◎ 화친

화친은 '친목이 되었다'는 말로서 예수님의 대화친의 대속공로를 힘입어서 하나님과 친목 곧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것이 화친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 또 하나님의 뜻에 딱 맞게 하나님과 동하고 정했으니 하나님과 화친이 되었느냐하면 그것은 또 다릅니다. 화친은 하나님과 인격적 동행이 되어야 화친이 됩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지하고, 사모하는 인격적 밀접한 교제가 있어야 화친이 되는 것입니다.


일곱째는 감사로 동행

영원 전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그 목적을 이루시 위해서 모든 것을 예정, 창조, 섭리하시는 이 구원에 대해서 감사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떠나시지 않습니다. 또 원죄와 본죄로 이 구원을 떠난 우리들에게 예수님의 피, 성령, 진리를 주신 이 은혜를 감사하면 하나님은 떠나시지 않습니다. 또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 수 있게 하여 주신 이 구원을 감사하면 하나님은 떠나시지 않습니다.

여덟째는 자복으로 동행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으로 살지 못한 것에 대해서 회개하면 떠나셨던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그러면 회개로 동행입니다. 요나가 자신이 지른 죄를 자복하며 회개할 때 하나님이 다시 함께 하셨습니다.

아홉째는 도고로 동행

하나님께 우리의 형편을 고하는 것이 도고입니다. 우리의 이런 것 저런 것, 이런 형편 저런 형편, 자신이나 자신에게 속한 사람이나 일이나 형편을 하나님께 의뢰할 때 하나님은 그 사람을 떠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동행입니다.

열째는 간구로 동행

간구는 간절히 구하는 것이 간구입니다. 그 간절은 어느 정도라야 간구가 되느냐 하면 '야곱'이 '야봅' 강가에서 형 '에서'가 죽이려고 달려 올 때에 하나님께 자기 목숨을 구해달라고 간절히 구했습니다. 그렇기에 간구라는 것은 죽음에서 구해달라는 이 정도의 간절한 구함이 있어야 간구가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므로 사망에 이르는 여기에서 하나님과 동행으로 생명에 이르게 해달라고 하는 이 간절한 구함이 있을 때에 하나님은 그 간구 하는 자를 떠나시지 않습니다.

<결론>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므로 죽음을 보지 않고 영생하였습니다.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므로 하나님의 심판을 통과했습니다. 그 반면에 사울 왕은 그가 하나님과 동행을 떠났을 때 하나님께서 지극히 큰 힘을 빼앗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제일 먼저는 형체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그 형체에 따르는 힘을 주셨습니다. 모든 만물도 형체가 있고 그 형체에 힘이 있는데 그 힘은 자연의 힘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형체를 만드시고 또 그 형체에게 힘을 주시고 또 그 위에 하나님의 지극히 큰 능력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형체를 만드시고 또 그 형체에 힘을 주신 것은 그 형체와 그 형체의 힘으로 하나님과 동행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지극히 큰 능력을 받아 가지라는 형체와 형체의 힘입니다. 하나님의 지극히 큰 능력은 영생의 생명입니다.

그렇기에 사울 왕이 하나님과 동행을 떠날 때 제일 먼저 하나님의 지극히 큰 능력이 떠났습니다. 그래도 회개하지 않으므로 그 다음에는 형체의 힘을 빼앗았고, 그래도 회개하지 않을 때에 그 형체까지 빼앗았으니 전쟁터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그렇기에 눈에 보이는 형체가 망했으면 그 이면에 그 형체의 힘이 벌써 망했고 또 그 이면에 하나님의 지극히 큰 능력은 벌써 먼저 떠나신 것입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형체가 죽었으면 이미 죽고 죽어 뿌리까지 뽑힌 죽음인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죽음의 사망의 영멸에서 영생의 생명의 구원의 길이 예수님의 대속 공로의 은혜로 열렸으니 곧 하나님과 동행하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이 실상의 열 가지로 하나님과 동행하여 죽음을 보지 아니한 '에녹' 같이 또 하나님의 심판을 통과한 '노아' 같이 영생구원을 이루어 가지는 우리의 신앙생활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행해야 구원이 됩니다.
알아도 행하지 않으면 구원이 안 됩니다.

◎ 백영희목회설교록(1984, 11, 23 금 새벽) 참조/ 김반석목사 재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