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기독교

2007.05.15 16:53

선지자 조회 수: 추천:

게시일 : 2005/05/19 (목) PM 11:31:27     조회 : 94  
선지자선교회
■ 주간 기독교


세계최대 어린이 교회와 고 백영희 목사

세계에서 가장 많은 어린이가 모이는 예수교 장로회 총공회의 서부교회. 그 교회의 담임목회자이며 총공회장을 역임했던 백영희 목사의 총공회장 영결예배가 수많은 부산시민, 신도, 목회자들의 애도 속에 엄숙히 진행되었다.

지난달 27일 새벽설교도중 괴한이 휘두른 칼에 찔려 단상에서 순교한 백 목사의 순결하고 지조 높았던 신앙의 인생을 되짚어본다.



찌르륵 찌르륵 마치 풀벌레가 가을을 숨가쁘게 알리려는 듯 한 소리였다. 지난 8월 31일 새벽 4시. 낯선 곳, 여염집도 여관도 아닌 교회당에서 청한 잠이라 쉽게 잠들지 못하였다가 피로에 몰려 붙인 눈이었는데 어떤 조그만 소리에 그만 눈을 뜨고 말았다. 사위(四圍)를 보니 부산한 몸놀림으로 수 백명의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다.

새벽기도회의 준비였다. 아무런 말이 들려오지 않았고 다만 기도회의 준비를 알린 찌르륵 찌르륵 소리만이 귓전에 다시 맴돌고 있었다. 5일장으로 치러지는 부산 서부교회 고 백영희(80 예수고 장로회 총공회장) 목사의 영결예배가 있던 날의 새벽은 경건한 새벽기도회의 준비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뜻하지 않았던, 그러나 평소의 소원처럼 강단에서 조용히 쓰러진 백영희 목사.


25세에 회심

28세 때 목회시작

50평생을 목회와 교육으로 말씀의 연구와 실행으로 살아온 그의 삶의 궤적은 25세 때 기독교에 입문하면서부터 일관되게 이어져 온다.

1910년 경남 거창지방의 유교적인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25세 되던 1934년 어느 전도자로부터 복음을 받아들여 28세 때에 목회자의 길로 들어선다. 이미 12살 때 이웃에 살던 고운선 권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라 살라”는 말에 어린 마음에도 그것이 굉장히 충격적인 일로 느껴지고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내면적으로는 항상 기독교 신앙에 대한 동경과 호감이 자리잡고 있었는데 막상 겉으로는 괜히 기독교를 핍박하려는 철부지 심술로 예수 믿는 친구들을 핍박했다고 한다.

그의 나이 25살 되던 때 양조장을 직접 경영하여 재미를 보고 있을 때였는데 친구 집에 놀러갔다가 물건을 사러온 고운서 권사 아들의 인품을 보고 예수의 체취를 충분히 느껴 “기회만 있으면 교회에 나가리라”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그러나 양조업을 하는 자기에겐 직접 전도하는 이가 없었다. 전도인들이 자신의 상점 앞을 자주 지나가면서도 전도를 하지 않자 어느 날 그는 한 전도인을 붙잡고 “ 왜 내겐 전도하지 않소” 하고 물었다고 한다.

평소 믿음을 받아들일 것 같지 않아 전도를 기피했던 그에게서 이런 말이 나오자 전도인은 오늘 저녁에 전도강연이 있으니 함께 가자고 그때서야 비로소 전도의 권유를 했다고 한다. 전도강연의 말을 들은 그는 우리 집에서 직접 열면 어떻겠느냐고 자기의 제안을 제시하자 전도인은 감격, 쾌히 승낙하여 그 날 저녁 그의집 에서 전도강연을 하게 되어 은혜를 서로가 충만히 받고 회심의 날이 되었다.

주님을 영접한 그는 주일이 돌아오기만을 학수고대하여 일주간을 보낸 후 첫 주일을 맞아 교회에 나가 창세기에 관한 장로님의 설교에 평소 갖고있는 많은 의심을 풀었다. 믿은지 불과 나흘만에 술, 담배를 끊고 열 이레만에 양조장을 그만두고 전업을 함으로써 주위를 놀라게 하기 했던 일화를 갖고 있다.


신사참배 단호히 배격

집 주위에 교회가 없는 탓으로 매일 새벽 전 가족을 이끌고 동산에 올라가 새벽기도를 드림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등 놀라운 변화의 생활의 연속이었다. 그의 이런 모습들은 평소 그를 알던 이웃, 친지들에게 놀라움과 함께 많은 감명을 주게되었다.

일제 말기 교회조차도 신사참배를 당연시하고 있을 무렵 단호히 이를 거부, 많은 곤욕을 치루었으나 주님의 보호로 극단의 위험에서도 보호를 받았으며 그가 시무 하던 교회의 교인 어느 한 사람도 신사참배에 가담치 않음으로 신앙의 절개를 보여주었다.

해방 이후 거창 지역을 중심으로 4개 교회를 한꺼번에 개척하기도 한 그는 복음만을 위해 모든 힘을 집중 시켜 나갔다. 교역자가 절대 부족했던 시절이었고, 무급으로 일해야 했던 어려운 때였지만 그의 마음속의 타오르는 복음에의 정열은 어떤 고난조차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이겨나갈 수 있는 것으로 이미 변화되어 있었다.

그러던 중 출옥 성도중 한사람이 주남선 목사(그는 주 목사를 퍽 존경해서 주 목사가 물려준 성경을 특히 애용할 정도였다)의 권유로 유급전도사가 되었다. 고신대학 신학부에서 공부하여 고신교단으로부터 안수를 받았던 것이다.


세계최대의 유년주일학교


그가 38년 3개월 동안 시무한 서부교회는 1948년 손이원 목사 (손양원 목사의 동생)가 주축이 되어 설립한 교회이다. 이후 김창인 목사(서울 충현교회 원로목사)가 잠시 맡고 있다가 1951년 백 목사가 부임해 오늘에 이르고 있는 교회로 비교적 부산지역에서도 큰 규모에 속하는 이 교회는 출석하는 어린이 수에 있어서는 세계적인 규모의 교회이다. 서울의 순복음중앙교회 주일학교보다 훨씬 많은 어린이가 이 교회에 출석하고 있다.

전국 수 많은 교회의 교육 관계자들이 끊임없이 찾아드는 이 교회는 89년 현재 장년부는 약 4천명, 중간반으로 불리우는 중고등학생들이 약 2천여명 유년주일학교가 7천여명이나 된다.

어린이부의 재적 인원은 3만여명. 여름 성경학교나 겨울 성경학교 때는 평균 1만 2천명 내지 1만 3천명이 모인다. 1951년 백영희 목사 부임당시의 장년 40여명 주일학교 70여명에 견주면 백배의 증가율이다.

서부교회는 여타 교회와 좀 특이한 교육방식과 조직을 갖고 있는데 첫 번째 특징이 학년별 구성을 하지 않고 있는 점이다. 1학년부터 6학년까지 심지어 미취학 아동까지 함께 모아 가르치고 있다.

학급을 나누는 것은 인원과 어린이를 전도했던 사람들로 함께 묶어 가르친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한 교사가 전도한 아이들은 성별, 학년에 관계없이 그 교사가 맡아 가르치는데 학급당 50명 정도로 그 수를 나누어 정한다. 이 인원이 넘치면 3~4명씩 배치되어 있는 보조반사가 맡아서 가르치게 된다.

학년과 지능이 다른 아이들에게 함께 가르친다는 것이 불가능하리라 여기는 사람들이 있지만 세상학문과 하나님 학문이 다르듯, 장년들이 학력, 연령, 지능이 달라도 서로 함께 은혜를 받듯 어린이들도 마찬가지라는게 서부교회의 일관된 생각이며 경험의 결과였다.

어린이들의 예배 또한 어른의 그것과 별도로 다르지 않다. 어른들이 즐겨 부르는 찬송가를 어린이들도 즐겨 부르고 있고 따로 준비된 어린이용 공과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백 목사가 어른들에게 했던 지난 주의 설교를 쉽게 풀어 엮은 프린트물로 공부하지만 어린이들은 잘 따라 오고 있다.

어린이들을 위한 프로그램들 즉 율동이나 동화 같은 것이 없이 성경을 암송하는 등 교사 와 학생이 함께 문답방식으로 해나가는 교육방식을 택하고 있지만 아이들이 무척 즐거워하고 있다.

교사들의 헌신과 노력은 주일학교 성장 비결 중의 가장 큰 이유로 꼽을 수 있다. 반사들은 첫째 신앙, 둘째 기도, 셋째 심방을 그들의 본질적인 지침으로 꼽고있을 만큼 뜨거운 신앙을 그 바탕으로 삼고 있다.

백 목사가 항상 강조했던 반사지침으로는 어린이가 오는 것은 반사자신의 신앙이 있어야 하는 것이고 교회로 인도하는 어린이를 위해 날마다 한 차례 반드시 기도할 것이며, 토요일과 주일 심방을 어떤 일이 있더라도 빠뜨리지 말 것 등이라고 한다.

1천여명의 반사 중에는 고등학생부터 7순 노인에 이를 만큼 다양한 계층을 이루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서부교회가 세계 최대의 어린이 교회로 성장한데에는 백목사의 의도적인 교회운영과 뒷받침, 그리고 교사들의 노고와 기도가 원동력이었음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백목사의 목회방향은 어린이 선교에 그 중심이 담겨있다. 어린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주님의 말씀을 철저히 따르기 위함이었고 어린 생명에게 전도의 씨앗을 뿌려야 겠다는 믿음에서였다.

백 목사는 종종 주일학생은 새 기계, 중고등학생은 중고 기계, 장년은 고물 기계, 사기도 쉽고 잘 돌아가는 새 기계를 구입해야 성공하는 것처럼 주일학교의 부흥은 곧 교회의 부흥과 이어진다 라고 말했다.

서부교회에서는 주일학교 반사되는 것을 큰 영광으로 알고 맡게 되면 최선을 다하는 것이 전통처럼 내려오고 있다. 부산 지역에 설립된 30여개의 주일학교 분교는 그 지역아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아직 교세가 약한 총공회의 지교회 확장으로 키워나갈 계획을 가지고 있다.


개교회의 보수적 교단

백목사 자신이 총공회장으로 있던 예수교 장로회 총공회는 어떤 교단인가를 알아보자. 기독교 대연감 453쪽에 있는 내용으로 말하면 좋을 것 같다. 총공회 교리에 관한 소개는 이렇게 되어 있다.

1. 신구약성경은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앙과 생활에 대하여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으로 믿는다.

2. 사도신경을 믿으며 전통적인 초대교회신조인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조를 정통교리로 받는다.

3.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및 대소요리문답서를 성경과 사도신경의 가르침을 가장 잘 나타낸 교리로 인정한다.

조직은 총공회를 상부기관으로 5개의 상설위원회(행정, 교훈, 목회, 경제, 개척위원회)를 두고있으며 88년 현재 전국에 105개의 교회가 있다고 소개하고 산하기관 및 협력기관으로 성경공부를 위한 연경회와 총공회 신학대학격인 4년 과정의 목회자양성원을 두고 있고 백영희 목사 목회설교록 및 목회자료 출간을 위한 목회연구소를 두고 있다.

1987년 4월 25일 발행한 예수교 장로회 총공회의 교단 현황이라는 자료를 보면 교단 본부가 있는 곳은 부산직할시 서구 동대신동 1가 382번지 서부교회에 두고 있음을 알리고 교단 창설배경을 이렇게 적고 있다.

본교단은 전통적인 조선 예수교 장로회에 뿌리를 두고, 특히 호주선교 영역이었던 경남지방 교회의 신앙에 근거를 두고 있다.

본 교단의 지도목사인 백영희 목사는 대한 예수교 장로회 고려신학교를 졸업하고 부산 서부교회에서 목회하던 중, 고신 교단이 예배당 소송과 유엔군 철수 반대 성명서 발표 등 비성경적, 비신앙적 행위에 가담하는 것을 보고 강력히 반대하다가 1959년 상회 불복종으로 제명되었다.

그 후 경기 보류 노회(고신)에 가입 청원하였으나 보류노회가 I.C.C.C에 가입함으로 가입 철회하고 독립교회로 남아 있다가 1966년 예수교 장로회 총공회로 조직되었다. 고 설명한다.

1966년 5월 26일 서부교회에서 백영희 목사를 중심으로 10여명의 교역자로 시작했는데 86년 현재 전국 총공회 교회 수는 109개 교역자수는 목사 66명 전도사 41명이고 교인수는 125,313명으로 되어있다.

서부교회에서 양성한 반사들이 목회자가 됨으로써 89년 현재 전국 120여명의 교역자가 활동한다. 1957년이래 매년 2회씩 백영희 목사가 직접 인도하는 거창, 대구의 산상집회에는 2만 5천여명이 참석하고 있는 경남지역의 가장 큰 집회이며 교파를 초월해 많은 신도들이 참석해 오고 있다. 80고령에도 불구 새벽기도 및 주일학교 반사공부까지 주 평균 11회 이상 설교해온 정력적인 설교가로 현재 172권의 목회설교록을 남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