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신학(1)

2009.12.06 01:42

김반석 조회 수: 추천:

Ⅰ, 서  론
선지자선교회
                   제 1 과  신  학 (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8:31-32)]

1, 신학의 개관

신학이란 이 용어는 성경에 나오지 않는 말로 원래는 고대 그리이스(희랍) 철학자들이 신들에 대한 이야기 혹은 신(神) 개념에 대한 철학적 논설에 사용한 말이었다. 이것이 기독교 교리를 설명하는 용어로 채택되었다.

신학은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사람에게 계시하셨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이 계시를 사람이 받아들임으로서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인격적 관계가 성립되지만 그 신앙의 내용을 알고자 하는 지성적 욕구는 그 계시를 연구하게 하는데 이것이 신학의 동기가 된다.

신학은 협의적로 생각하면 하나님의 존재와 본질과 역사를 연구한다.
그러나 광의적으로 연구하면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에 관한 모든 문제를 다룬다.

다시 말해 신학의 진정한 대상은 하나님이지만 하나님으로 인하여 창조된 모든 만물도 포함된다.

그리고 신학의 소재(所在)는 하나님의 뜻이 기록된 성경이다.
자연신학의 영역도 있지만 진정한 기독교 신학은 성경에서만 성립된다.

신학이란 하나님의 뜻인 성문화된 성경 자체에 의해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해석되고 반영되고 표상되기 때문에 이로부터 성경뿐만 아니라 교회의 신학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학이란 성경에 무엇을 가감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에 위배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이 신학은 그것이 얼마나 성경적인가에 따라서 평가된다.

A, 교부신학(敎父神學)

여기서 우리가 관찰하고자하는 것은 속사도 교부들로부터 시작하여 삼위일체 논쟁과 기독논쟁에서 전성기를 이룩했다가 로마제국의 붕괴와 함께 쇠퇴하게된 기독교 사상 운동에 관한 것이다.

1) 처음의 단편적인 시대 이후에 최초의 임무는 순교자 저스틴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실제적이고 철학적으로 “변증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헬라와 로마의 세계를 높이 평가함으로서 영지주의(靈知主義)의 위험을 초래하게 되었고,

오리겐의 경우와 같이 놀라운 업적을 이루기는 했지만 “공상적”인 신학을 초래하게 되었다.
이러한 위협을 인식하고 나서 그것에 대해 저항하기 위해서,특히 서방교회에서는 이레니우스와 터툴리안으로서 대표되는 강한 “전통적인” 운동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것은 정경을 받아들이는 것과 연관되었으며 “역사적인” 교회와 사역에 호소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2) 이후의 시대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 곧 삼위일체와 성육신(成肉身) 교리와 같은 위대한 신학적 문제들이 대두되었다.

이러한 신학적 문제들은 오래 동안 논의하는 동안 어떤 점들은 지나치게 강조된 것도 있고 또 어떤 것은 정통 신앙에서 벗어난 것도 있지만, 그 결과는 대체로 니케아 신조나 칼케론 신조 같은 위대한 신앙 고백으로써 정립되었다.

3) 사람에 관한 문제들에 있어서는 펠라기우스의 주장에 대항하기 위해서 원죄와 예정과 같은 강력한 교리가 주장되었고, 교회에 관한 교리는 도나티스트 파의 도전에 대한 응답으로써 이루어 졌다.

이와 동시 성경 자체에 대해서도 본문 연구의 형식으로나, 교리 문답의 형식으로나, 강해적인 주석 형식으로 성경을 직접 다룬 작품들이 상당히 많이 저술되었다. 그리고 간과해서 안 될 사실은 속죄에 대한 관심이 ‘성육신’ 교리와 같은 난해한 교리에 있어서 핵심적인 문제였다는 사실이다.

4) 교부신학은 매우 다양해서 그것은 일반적인 용어로서 평가하기 쉽지가 않다. 주로 이 시대는 성경에 충실했으며, 그렇기 때문에 많은 기본적인 주제들에 대한 이 시대의 성경적인 주장은 우리에게까지 좋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러나 참된 성경적인 이해에 대항하는 헬라 철학의 잘못된 영향을 분명히 감지할 수 있다. 특히 한편에서는 새로운 율법주의에 대한 또 한편에서는 새로운 합리주의에 대한 끊임없는 충동이 있었다.

그런데 이 속에는 성경적 가르침과 실제에 대한 중대한 왜곡이 내포되어 있었으며 후대 교회의 많은 오류들이 잠재되어 있었다.

B, 스콜라 신학

1)스콜라 신학의 두드러진 특징은 철학과 신학을 고의적으로 종합하려는 시도이다. 여기서 철학은 기초와 같았으며 신학은 그 위에 건축된 건물과 같았다. 만일 아벨라드가 보다 더 합리주의적 운동을 제시했고 안셈은 믿음으로서 배운다는 이성에 대한 보다 더 성경적인 관념을 제시했다면 토마스 아퀴나스는 후대의 신학적 발전들을 지배하고 오늘날에까지도 잠재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는 신학적 표준들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었다고 할 것이다.

2)물론 거기에는 많은 만족할 만한 특징들도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즉 교부들의 전통적인 교리들이 잘 보존되었다. 또한 안셈은 당시에 만족설(滿足說)에 비추어서 속죄의 교리를 우리에게 실제적으로 잘 제시해 주고 있다. 그리고 신학의 자료로서 성경이 (비록 종종 왜곡된 형태로 사용되긴 했지만) 사용되었다. 뿐만 아니라 신학을 연구함에 있어서 질문과 논쟁의 정신에 따라 명목론(名目論)과 같은 특징적인 경향이 발생되었고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종교개혁의 터전을 마련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장점들도 스콜라 신학의 일반적인 오류들을 능가하지는 못했다. 따라서 스콜라 철학은 그에 따르는 비참한 타락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 된다.

C, 개혁 신학

1)개혁 신학은 직접적인 의미에서 성경적 신학이다. 즉 개혁 신학은 철학을 그 기본적인    골격이나 동조자로 생각하지 않는다. 개혁 신학의 일차적인 임무는 성경을 알고 성경을 해설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께 대해서 말하기는 위해서는 하나님께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 적극적인 신학 작업에 앞서 성경 연구가 선행되어야 하고 신학작업은 성경 연구에 의해서 교정되어야 한다. 개혁 신학에 있어서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은 동료나 선구자가 아니다. 개혁 신학에 있어서도 이성(理性)이 사용되기는 하나 그것은 성경에 의해 가르침을 받고 성경적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스콜라 신학의 근본적인 요소들과 교부 신학의 많은 오류들이 근절되었다.

2) 그러나 이것도 개혁 신학이 기독론적인 신학으로서 단지 고대 교회의 기독론쟁을 통해서 결정된 여러 신조들을 받아들임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그리스도가 그 대요이며 중심점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안셈의 만족설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삼위일체와 성육신과 속죄 등, 위대한 교리들에 있어서 추가된 것이란 거의 없다.

그러나 루터와 쯔빙글리와 칼빈과 위대한 종교 개혁자들은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 아버지께로 올 자가 아무도 없다는 사실과 따라서 그리스도는 모든 참된 신학의 시작과 중심과 끝이라는 사실을 모두 깨달았었다.

3) 개혁 신학자들은 개혁 신학이 절대 무오한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즉 개혁 신학자들도 시대적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들도 세부적인 면에 있어서는 견해들이 서로 다르다.

그러나 개혁 신학자들은 참된 성경적 신학을 주장하고, 한편에서는 트렌트 회의에서 결정된 교리들을 반대하며 다른 한편에서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가르침을 반대한다. 모든 신학 사조들 가운데 종교 개혁자들은 방법면에서, 이해면에서, 내용면에서, 지식과 영력의 결합에 있어서 성경에 가장 밀접한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종교 개혁자들에게서 그들의 뛰어난 통찰력과는 별도로 신학의 고유한 업무가 무엇이라는 것과 기록한 말씀에 대한 정밀한 이해를 끊임없이 시정해 나가는 것을 배우게 된다.

D, 현대 신학

1)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주요한 발전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첫째 - 로마교회, 소시니안파, 알미니안파의 공격들에 답하여 개신교의 정통신앙에 대한 자세한 신조들이 작성되었다.

둘째 - 개신교 자체 내에 정통 신앙에서 이탈한 자유주의적 신학이 발생했다. 이 자유주의적 신학은 기독교의 교리를 정통 교회가 이미 사용했다가 배척해 버린 “합리주의”에 의해 재정립하려는 것과 보다 더 근본적으로 강력한 “슐라이에르마허‘의 ”주관적 체험“(칸트의 이성 비판에 대한 대응책으로 도입되었으며 ”경건주의“의 지지를 받았음)에 의해 재정립하려는 것이다.

셋째 - 모든 형태의 자유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성경과 신학에 대한 비상한 관심이다. 이러한 자유주의는 여러 가지 근원에서 비롯되고 여러 가지 사도들이 병합되어 있으며 “볼트만”에서와 같이 역전(逆轉)의 위험성도 내포하고있으나 “바르트”나 다른 사람들에 있어서는 언제나 성공적이지는 않을 지라도 성경과 개혁 신학에 근거하여 신학을 순수하게 재정립하려는 것이기도 하다.

2) 우리에게는 한편에서는 위협적인 로마 카톨릭의 신학으로부터 다른 한편에서는 완고한 자유주의에 이르기까지 많은 적대 세력들이 있다. 그러나 희망적인 요인들도 있다. 즉 이 시대의 신학적 기류와 에큐메니칼적인 열띤 토의와 참된 신학에 대한 열망과 무엇보다도 성경 자체에 대한 강렬하고 효과적인 연구가 그것이다.

이처럼 신학적 투쟁은 바야흐로 율법주의(의식주의)나 합리주의에 의해 왜곡되지 않은 참된 신학을 위한 응전장(應戰場)으로 변해가고 있다. 만일 우리가 서로 가르치고 배워서 좀더 순수하게 성경적이고,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께 대해서 생각하고 말한다면 이 신학적 투쟁에서 승리하지 못할 하등의 이유가 없을 것이다.

E, 성경 신학

1) 성경 신학의 발단은 다양하다. 성경 신학의 공헌적인 요소들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1세기경부터의 실험적인 시작들에서 카텔의 위대한 신학사전과 같은 가치 있는 저작들을 낳고 있는 상세하고도 방대한 탐색에 이르기까지 어휘연구에 대한 진취적 집중이다.

카텔의 사전은 실제로 직접적인 형식과 주석과 해설이다. 그것은 해석을 전혀 별도로 문제하고 있으면서도 성경의 숱한 주요 단어와 구절들에 대해 비춰주는 그것의 적극적인 조명은 모든 형태의 성경 신학에 위대하고 계속적인 도움을 주고 있다.

2) 한편 성경에 대한 우리의 지식에 대부분을 이루는 비성경적인 가설들을 폭로해 온 것은 하나의 명백한 소득이다. 신학에 있어 참으로 성경적이기 위해서는 우리는 성경을 기록된 그대로 받아 들여야 하며 성경 자체의 말씀에 따라 받아들여야만 한다. 우리는 사태를 자체의 근저와 입장에 따라, 보고 연구하며 진술해야만 한다.

우리는 성경을 억지로 성질이 다른 철학적인 체계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성경 자체의 해결 방법을 채택하고 우리의 신학을 성경 자체가 제시하는 본보기와 일치되게 구축함으로서 진정으로 역사적이어야 한다.

3) 이적과 같은 문제에 관한 성경적인 견해를 받아들이기를 몹시 주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예를 들어 그리스도께서 동정녀에 나셨다는 것과 그의 무덤이 비어 있었다는 성경 말씀을 실제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우리는 성경 신학을 진정으로 지속시킬 수 없을 것이다. 사실에 대해 말하는 과학 세계와 성육신과 부활에 대해 말하는 신학 세계간에 어떤 공통영역을 찾으려는 것은 헛된 일이다.

비록 말씀이 육신이 되었고 부활이 육신의 부활을 의미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구원사역은 역사(歷史) 안에서의 사역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점에서 유물주의적인 이해와 성경적인 이해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이렇게 주장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선택에 대한 거부 반응이 가장 실망할 만한 것 중 하나이다.

그리고 바로 약대를 삼키는 자들이 도리어 사소한 것에 대해서는 부단히 구애를 받는 것 같다.

4) 우리의 사고와 행동을 혁신시킬 수 있는 진정한 성경 신학에의 길이 있을까? 그것은 다음과 같은 방향에 있는 것 같다. 모든 신학자는 지속적이며 집중적인 작업에 참여해야만 한다.

신학자들은 실제로 우리 앞에 있는 그대로의 성경과 그것의 가르침에 대한 연구에 있어 다같이 협력해야만 한다. 또한 모든 신학자는 역사 신학의 연구에 있어서도 협력해야만 한다. 모든 신학자는 접근법과 다루는 법, 견해와 내용, 그리고 실제로 성경에 있는 것에 의한 공식화에 있어 자신들의 선입관에 대해 면밀히 조사하여 정정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한다. 비록 기록되어 있는 그대로의 가르침이 때로는 생소하고 난해하게 보인다 하더라도 모든 신학자는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