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장로교 100주년 역사적 고찰

  선지자선교회

이상규 교수/ 2012.04.13 00:00:00

 

이상규 교수

 

고신대학교 부총장

2012년은 한국에서의 장로교 총회 조직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한국에 장로교회가 소개되고 1912년 총회를 조직한지 한 세기를 뒤돌아보며 한국에서의 장로교회의 역사적 좌표를 점평해 보는 일은 유익한 반성이 될 것이다. 장로교회가 한국에 소개되고 치리회를 구성한지 100년을 맞으면서 한국교회가 수적으로 크게 성장한 점은 인정되나 성장의 배후에는 숱한 분열의 자취로 점철되어 있다.

 

이 글에서는 한국에서의 장로교회의 기원에 대해 검토한 후 지난 100년간의 장로교회의 역사를 고찰한 후 오늘의 한국장로교회가 안고 있는 두 가지 현안인 장로교회의 감독교회화 현상과 교회분열의 문제에 대해 점평하고 이를 통해 한국장로교회 갱신 혹은 쇄신에 대해 기술하고자 한다.

 

1. 한국에서의 장로교회의 형성

 

장로교’(Presbyterianism)를 가장 간단하게 정의하면 장로들에 의해 다스려지는 교회라고 할 수 있다. 칼빈에 의해 발전된 장로교 제도는 교황제나 감독제 혹은 회중제와는 달리 직분상의 평등을 강조하여 계급(계층)구조를 거부하고, 개 교회의 자율과 독립을 강조하되 연합을 중시하는 대의제(代議制)의 성격을 지닌다. 장로교 제도는 성경 원리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장 성경적인 제도비록 장로제라는 용어는 사용되지 않았으나 사도시대 부터 존재했던 제도(15딤전 4:14 )라는 점에서 가장 사도적인 제도교회 정치제도가 대의제 성격을 지닌 제도라는 점에서 가장 민주적인 제도로 일컬어져 왔다.

 

역사적으로 말할 때 스코틀랜드장로교회는 장로교회의 모교회라고 할 수 있다. 제네바에서 칼빈의 가르침을 입었던 낙스는 칼빈에 의해 개진된 개혁신학을 수용하되 스코틀랜드와 인접한 잉글랜드교회(Church of English)감독제와 다르다는 점을 분명히 드러내고자 스코틀랜드에서는 장로제의 교회 곧 장로교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오랜 망명생활을 끝내고 155952일 스코틀랜드로 돌아간 낙스는 1560년 교회개혁을 단행하고 전문 25개조의 <스코틀랜드신앙고백서>를 제정했는데, 이 고백서는 1647<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채택되기까지 장로교회의 대표적인 신앙고백서가 되었다는 점은 널리 알려져 있다. 156112월 낙스는 5명의 목사와 36명의 장로들과 함께 스코틀랜드장로교회 총회를 조직했는데이것이 세계장로교회의 모체가 되었다. 스코틀랜드교회는 신학적으로 개혁신학을 수용했으나 교회정치제도로 장로교제도를 채택하여 장로교회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스코틀랜드 후예들이 미국캐나다호주뉴질랜드로 이주하여 이런 나라에 장로교회가 전파되었고다음 시기 미국호주캐나다장로교회가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여 한국에도 장로교회가 소개된 것이다.

 

한국에서의 장로교회와의 첫 접촉은 1870년대로 알려져 있다.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United Presbyterian Church)1862년부터 중국선교를 시작하였는데1871년 이후로는 윌리암슨(Alexander Williamson)의 지도로 산둥반도를 주 선교지로 정하고 만주에서 활동해 왔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1871년 중국으로 피송된 메킨타이어(John Macintyre1837~1905)1872년 중국에 온 존 로스(John Ross, 1841~1915)였다. 만주지방 선교사였던 이들은 조선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압록강 상류인 린장(臨江)까지 여행한 일이 있으나 조선에 입국할 수는 없었다. 조선에 대한 영적 부담을 느낀 그는 한국인과 접촉하기 위해서 187310월 잉커우를 떠나 가오리먼(高麗門)을 방문한 바 있다. 가오리먼은 남만주 펑황청(圓凰城) 투카라는 곳에 있는 책문(柵門)의 하나로 의주에서 약 120리 되는 곳이었다. 이곳은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지역으로 시장이 열리는 곳이었다. 로스는 조선인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지고 18744월 말에 다시 가오리먼을 방문 했다. 거기서 한국인 이용찬(李應贊)을 만나게 되었고곧 그를 통해 한글을 배우게 된다. 또 이응찬의 도움으로 1875년에는 한국인 김진기(金鎭基), 이성하(李成夏), 백홍준(白鴻俊, 1848~1893) 3사람의 의주청년과 접촉하게 된다. 이것이 한국인으로써 장로교 선교사와의 첫 접촉이었다.

 

앞의 4청년은 1876년 매킨타이어에게 세례를 받으므로 최초의 수세자가 되었다. 곧 이어 인삼 행상인이었던 서상륜(徐相崙)도 선교사와 접촉하여 신자가 되었고1879년 만주 뉴좡(牛莊)에서 존 로스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로부터 4년 후인 1883년에는 서간도의 한인으로서 성경인쇄를 위해 채용되었던 김청송(金靑松) 또한 세례를 받음으로 한국인 장로교 수세자는 6명으로 늘어났다. 이들이 공식적인 한국인 첫 수세자로서 한국어 성경 번역에 기여하게 된다. 한국인 수세자들과 함께 만주와 그 변방 지역을 중심으로 한국인에 의한 신앙공동체가 형성되는데이것이 만주에서의 첫 신앙공동체이자 첫 장로교회였다. 선교사들이 공식적으로 내한하기에 앞서 한국인 스스로가 만주 지방에서 기독교(장로교) 신앙을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한국인들의 자주적 기독교영입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에 갔던 이수정도 장로교 선교사를 통해 개종하고 장로교선교사와의 접촉을 통해 성경 번역에 기여하게 된다. 그가 일본에 도착했을 때는 1882928일이었다. 그는 일본 농정(農政)의 권위자였던 쓰다센(律田仙)을 통해 심적 변화를 경험하고 일본에 간지 3개월 후부터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고, 1883429일 주일에는 동경의 로루게즈쪼(露月町)교회에서 장로교 목사인 야스까와 토오루(安川亨, ?~1908) 목사에게 세례를 받음으로 일본 땅에서 첫 한국인 수세자가 된다. 특히 그는 일본주제 미국북장로교 선교사 녹스(George Knox)의 도움을 받으며 성경연구에 진력하였고또 미국 장로교 목사로서 미국성서공회 총무였던 루미스(Henry Loomis, 1839~1920) 목사의 요청으로 복음서 번역에 참여하게 된다. 루미스는 1872년부터 일본에 체류해 왔는데 요꼬하마 제일장로교회를 설립했고1881년부터는 미국성서공회 총무로 일하고 있었다.

 

교파적을 말한다면 이수정은 장로교인이었다. 탁월한 언어능력의 소유자였던 이수정은 한문성경과 일본어성경을 대조하면서 신약성서 마태전(馬太傳)마가전(馬可傳) 누가전(路加傳) 요한전(約輪傳)그리고 사도행전(使徒行傳) 등을 번역하였고이를 묶어 <현토 한한 신약성서>(懸吐 漢韓 新約 聖書)1884년 요코하마의 대영 및 외국성서공회를 통해 출간한 사실은 잘 알려진 일이다. 이수정은 완전한 한글 성경번역을 시도하여 마가복음을 번역하여 1885<신약 마가젼 복음셔 언ᄒᆞ>라는 이름으로 요꼬하마에서 미국성서공회를 통해 간행한바 있다. 초판 1천부를 인쇄하였는데 그해 4월 언더우드와 아펜젤라가 일본을 경유하여 한국으로 입국할 때 가지고 온 성경이 바로 이 마가복음 번역본이었다.

 

비록 한국인들이 만주와 일본에서 장로교선교사와 접촉하고 세례를 받고 장로교인이 되고 성경번역에 동참하게 되지만한국에서의 장로교회의 조직은 미국 북장로교회의 파송을 받은 알렌의 입국으로 시작된다. 18849월 알렌이 입국하였고이듬해 언더우가가 입국함으로 한국에서 미국북장로교회의 선교가 시작되었다. 이어서 호주빅토리아장로교(1889)미국남장로교(1893)캐나다장로교회(1898)가 선교사를 파송하여 4개 장로교 선교부가 한국에서 사역하였다. 이들은 합의에 따라 선교지를 분담하여 사역하던 중 여러 곳에 교회가 설립되었다. 이미 1883년에는 소래(松川)교회가 설립되었고1887927일에는 서울에서 첫 교회인 새문안교회였다. 곧 남대문교회(1887)승동교회(1893)연동교회(1894) 등 장로교회가 설립되었다. 18936월 평양의 첫 교회인 장대현교회가 설립되었고부산에는 부산진교회(1892)초량교회(1893)가 설립되었다. 그래서 1893년에 19개 교회가1894년에 12개 교회가1895년에 18개 교회가1896년에 25개 교회가1897년에 33개 교회가1898년에 19개 교회가1899년에 19개 교회가 1900년에는 46개 교회가 설립되었다.

 

1907년에는 한국에서의 첫 노회인 독노회’ (獨老會)를 조직하였다. 물론 독노회가 조직되기 이전에 미국북장로교와 호주장로교 간의 협의체인 연합공의회’(1889)미국남장로교가 선교사를 파송한 이후 조직된 선교공의회’(1893)가 있었고이 공의회가 1901년에는 장로교공의회로 개칭되지만 이런 협의체는 노회조직 이전의 예비조직이었다. 1906년에 소집된 장로교공의회는 장로교 노회조직을 결의하고 준비에 착수하여 1907917일 최초의 장로교 노회를 조직하게 된 것이다. 이 노회의 공식명칭은 죠션야소교장로회 로회였으나 하나뿐인 노회였으므로 독노회’(獨老會)라고 불렸다. 회장은 마포삼열(S H Moffett1864~1939)이었고회원은 한국인 장로 36 주한 장로교선교사 33찬성회원 9명 등 도합 78명이었다. 찬성회원이란 당시 대한성서공회기독교서회YMCA 등에 속해 있던 장로교 계통의 목사들을 의미했다.

 

당시 장로교회에 속한 교회는 750(785)개 처, 신자는 75968, 세례교인은 1861명으로 보고되어있다. 또 목사 선교사 49한국인 장로는 47명에 달했다.

 

노회의 조직과 함께 ‘12개 신조를 채택했는데, 이 신조는 성경무오하나님의 주권삼위일체동정녀 탄생인간의 타락그리스도의 속죄성령성례전불가항력적 은혜부활과 심판 등을 포함하는 단순한 문서였다. ‘12개 신조와 함께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Westminster Shorter Catechism)도 교회가 마땅히 가르쳐야 할 문답서로 채택하였다.

 

1907년 노회 조직과 함께 최초로 일곱 목사를 장립했는데이들은 평양의 장로회신학교 제1회 졸업생들인 길선주(40) 방기창(58) 송인서(40) 서경조(58) 양전백(39) 이기풍(40) 한석진(41) 등이었다. 감리교의 경우 1901년에 김기범 김창식을 집사목사로 안수한 바 있으나장로교회는 이 때 첫 목사를 배출하게 된 것이다. 일곱 목사 중 한 사람인 이기풍(李基豊)을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한 일은 한국장로교회의 선교사역의 시작이었다.

 

독노회 하에는 7대리회(代理會)를 두었는데경충대리회(관할 교회수 50교회), 평북대리회(160여개 교회), 평남대리회(90여개 교회), 황해대리회(50여개 교회), 함경대리회(80여개 교회), 전라대리회(130여개 교회), 경상대리회(190 여개 교회) 등이었다. 1911917일 대구 남문교회에서 모인 제5회 노회는 7대리회를 노회로 승격시키고 총회를 조직키로 결의했다. 이 결의에 따라 191292일 평양에서 7노회가 파송한 목사 96(한국인 목사 52선교사 44)장로 125명 등 221명이 모여 조선야소교장로회 총회’(朝鮮耶蘇敎長老會總會)를 조직했는데, 이것이 한국의 전국규모의 장로교 치리회였다.

 

총회에서는 원두우(H G UnderWood)를 총회장으로길선주 목사를 부총회장으로한석진 목사를 서기로방위량 선교사를 회계로 선출했다. 이렇게 하여 장로교의 기구적인 조직을 갖추었다. 이때로부터 해방될 때까지 한국 장로교는 단일 총회 하에 있었다.

 

장로교총회가 조직될 당시 휘하에는 7개 노회가 있었고당회가 조직된 교회 134개처, 미조직교회 1920개처한국인 목사 69외국인(선교사)목사 77장로 225세례교인 538학습교인 26400명이었고총신자수는 127228명에 달했다.

 

2. 한국장로교회의 역사적 고찰

 

1) 미국교회의 영향

 

한국의 장로교회는 신학이나예전신앙고백그리고 기독교적 삶의 방식 등 여러 측면에서 미국장로교회의 결정적인 영향 하에 있었다. 이것은 선교영역에 있어서나 선교사의 수선교활동에 있어서 미국교회의 영향력이 컸기 때문이다. 독일의 선교학자 바르넥(Gustav Warneck)이 지적한 바처럼 피선교지의 교회는 선교국의 영향 하에 있게 되는데한국도 예외일 수 없다. 해방 전까지 내한한 선교사의 총수는 약 1500여명으로 파악되는데그 중 약 70%가 미국 국적의 선교사들이었다. 내한한 장로교 선교사 671명중 76%에 해당하는 513명이 미국 선교사들이었다. 이 이 점만 보더라도 미국교회가 한국교회특히 장로교회에 큰 영향을 주었음을 알 수 있다. 해방 전에 내한한 1500여명의 선교사 중에서 장로교 선교사는 44.5%로서 감리교의 26.3%보다 1.8배 많은 수였다. 이처럼 장로교는 한국의 주도적인 교파였다.

 

해방 전에 내한한 장로교 선교사 671명 중 북장로교가 339명으로 50.5%에 해당하고남장로교가 191명으로 28.5%호주장로교가 78명으로 11.6%캐나다장로교가 80명으로 11.9%에 달한다. 남북장로교를 합한 미국장로교 선교사는 79%에 달한다. 이렇게 볼 때 한국장로교 형성에 있어서 미국장로교회의 인적 영향이 컸음을 알 수 있다.

 

한국장로교회가 미국장로교회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1930년대 이전 한국에서의 장로교회 형성기를 중심으로 말할 때그 의미를 3가지로 지적할 수 있다. 첫째성경에 대한 문자적 강조곧 비블리시즘(Biblicism)이 강조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단순한 성경주의혹은 성경중심주의라고 할 수 있는데성경에 대한 문자적 강조와 윤리적 엄격성을 의미한다. 둘째유럽교회 전통에 비해 신조나 신앙고백그리고 성례전에 대해 상대적으로 무관심했다는 점이다. 미국의 장로교회는 과거 유럽의 개혁교회와는 달리 신앙고백 때문에 로마 가톨릭과 대결하거나 신학적인 토론을 한 경험이 없었다. 성례전의 문제는 종교개혁자들에게 중요한 문제였으나 피선교지였던 미국교회는 이런 문제로 로마교와 대결한 일이 없다. 이런 미국교회적 특성이 한국에도 영향을 주어 신조나 성례전에 대해 심각하게 노구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된다.

 

세 번째 성격은 부흥주의(Revivalism)라고 할 수 있다. 초기 내한 선교사들은 대각성운동 이후 특히 영국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의 결과로 일어난 복음주의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부흥주의는 감성적 측면이 강조되고 개인 전도와 중생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미국교회적 특성들이 한국교회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한국 장로교회는 1901년 장로회신학교의 설립과 함께 신학교육을 시작하게 되지만 미국 선교사들이 신학교육을 주도하였다. 특히 북장로교 선교부가 신학교육을 주도하되1924년 라부열(Stacy L. Robert)가 제2대 교장으로 취임하기 이전까지는 이길함(Graham Lee)소안론(W L Swallen)배위량(W B Baird)곽안련(C A Clark) 등 메코믹 신학교 출신들이 신학교육을 주도 하였다. 적어도 1920년대 말까지의 신학교육은 선교사들의 주도하에 있었다. 한국인에 의한 신학연구 혹은 교회적 영향력은 1930년대 이후 나타난다. 한국인들이 신학교육에 참여하게 되는 것은 1927년 이후인데1927년에 남궁혁(南宮爀1882~1950)1928년에 이성휘(李聖輝1889~1950)가 평양신학교 교수로 참여했고박형룡(朴亨龍1897~1978)1930년부터 교수로 참여하게 된다. 평양신학교 교지 형식으로 발행되었던 신학지남은 1918년 창간되지만 1930년 이전에는 선교사들이 주된 집필진이었다. 이렇게 볼 때 미국 장로교회는 한국장로교 형성기의 신학과 교회생활 일반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2) 초기 선교정책과 교회의 설립

 

초기 장로교 선교사들의 가장 일반적인 선교 방법은 순회(巡廻)전도였다. 순행(巡行)전도라고도 불린 이 전도 방식은 중국내지선교회(China Inland Mission)의 허드슨 테일러에 의해 선호되던 선교방식으로 선교지역을 방문하면서 매서(賣書) 활동을 통해 전도하는 방식이었다. 선교지역 답사를 겸한 순회활동은 한국인과 접촉하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이것은 초기 한국선교의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인식되었다. 이런 결과로 대도시를 중심으로 하되 중소지역으로 기독교가 확산되었다.

 

1890년대 이후 북장로교는 네비우스정책(Nevius plan)을 수용하고 이를 선교정책으로 수용하였는데이 정책은 1799년 창립된 영국교회선교회(CMS) 의 총무였던 헨리 벤(Henry Venn)이 제창했던 토착교회 설립론에 근거한 이론이었다. 흔히 3자 원리(3-S formula)로 불리는 네비우스정책은 자립이론인데한국에서의 경우 이 3자 원리 외에도 성경연구(사경회)를 강조했다. 이 정책이 한국 장로교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1893년에 조직된 선교사들 간의 연합체인 선교사 공의회는 효과적인 선교활동과 인적재정적 낭비를 막기 위해 선교지역 분담정책을 채택했는데보통 예양협정’ (禮讓協定Comity arrangement)으로 불리고 있다. 이 협정 에 따라 미국북장로교는 제령·강계·평양·서울·청주·안동·대구 등 평안도·황해도·경상북도 지역을미국남장로교는 전주·군산·목포·광주·순천 등 전라도와 충청도 일부 지방을캐나다장로교(후에 캐나다 연합교회)는 함경도지방과 간도지방을호주장로교는 부산과 경남 일대를 각각 담당했다. 이 분할정책이 해 지역에서의 교회성장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으나후일 교회분열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주장도 있다.

 

한국에 왔던 선교사들은 사도시대 이후 전형적인 선교방법인 전도·교육·의료의 3분야에서 활동했는데이 선교방책은 19세기 이래로 아시아·아프리카 등 제 3세계에 유효한 선교방법이었고한국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한국에서 선교했던 거의 모든 선교부는 각종의 학교를 세워 학교교육을 시행하는 한편 시약소(施藥所)의 설치와 진료소병원을 세웠으며 이를 통해 선교운동을 수행하였다. 이 방법은 한국의 복음화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1909년 당시 한국에는 950여개처의 기독교 학교(mission school)가 설립 되었는데이중 장로교계가 605개교로 63.7%에 해당한다. 감리교계 학교는 200개교로 21%에 불과했다. 장로교가 근대교육운동을 주도하였음을 알 수 있다. 통계의 차이가 있지만 1910년 일제가 조선을 병탄할 당시 조선총독부는 전국에 300여개의 기독교 학교3만 명을 헤아리는 학생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한국에서 기독교 학교는교육은 특수한 계층의 일부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이를 위한 공교육(公敎育public education) 개념을 심어주었고교육의 대상은 남자만이 아니라 여성도 교육 받을 권리가 있음을 일깨워 주었다.

 

1913년까지 전국에는 3개처의 진료소를 포함하여 33개의 선교병원이 설립되어 있었는데장로교 병원이 17개 병원으로 52%에 해당했다. 북장로교 선교부는 강계·선천·평양·제령·서울·청주·안동·대구·부산에남장로교는 군산·전주·목포·광주·순천에 병원을 설립하고 의료활동을 했다. 캐나다장로교는 성진 함홍에는 병원을원산과 회령에는 시약소를 두고 있었다. 호주장로교회는 진주에는 병원을통영에는 시약소를 두고 있었다. 그 외에도 장로교는 부산·대구·광주에 나병환자들을 위한 의료시설을 운영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장로교회는 교육과 의료 활동을 주도하며 이 나라의 구습을 개혁하고 신분계급의 타파여권신장, 여성교육··담배·아편금지 등 미신 타파흔례·장례의 개혁 등 건실한 사회 형성에도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3) 교회부흥과 민족주의

 

첫 거주 선교사였던 알레의 입국 이후 첫 십년 동안은 고투의 기간’ (years of struggles)이었으나 1900년대를 경과해 가면서 장로교회는 조직치리회 등 제도와신학예전 등에서 정비가 이루어져 갔다. 특히 주목할 사실은 1894~5년의 청일전쟁을 경험 한 이후 한국교회는 처음으로 수적 성장을 경험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는 서양기술의 수용에 있었다는 사실을 인식한 결과 자강 민족의식이 싹텄고기독교를 통해 서구와의 접촉을 의도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분석된다. 국가적 위기라는 정치적 환경에서 기독교를 수용하여 이를 타계하고자했던 한국인의 집단적 의식을 호주의 역사가 케네스 웰즈(K M Wells)자강 민족주의’(self-reconstruction nationalism)라고 불렀다.

 

한국교회는 1903년 원산을 시작으로 영적각성과 부흥을 경험하게 된다. 감리교의 하디선교사의 회개로부터 시작된 부흥의 불길은 1904에도 반복되었고1906에도 동일한 부흥을 경험했다. 그러다가 19071월에는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대부홍(Great Revival)의 역사로 발전하여 한국교회와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 대부흥은 약 6개월간 전국적으로 전개되었고장로교회는 16000명의 새신자를 얻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07년 대부흥은 1909년에는 백만구령운동’(百萬A救靈運動)으로 발전하였다. 이 당시 부흥을 주도하였던 인물은 하디(Dr. Robert H. Hardie)저다인(J. L. Jerdine) 외에도 그래함 리(Graham Lee)번하이젤(Charles F. Bemheisel)윌리엄 불레어(William Blair)윌리엄 헌트(William Hunt) 등과 한국인 길선주김찬성 등이었다. 이때의 부흥은 교파적으로 볼 때 감리교에서 시원하였지만 장로교회에로 발전된 양상을 보여준다. 이 부흥 역사 기간 중에 한국교회의 고유한 신앙행위인 새벽기도통성기도날연보사경회 운동이 시작되었다.

 

한국에서의 기독교의 수용(受容)은 인접한 중국이나 일본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급성장이었다. 우리나라는 외래종교에 대해 매우 배타적이었으나 기독교의 수용만은 급진적이었다. 이것은 기독교 전래시의 조선의 정치적 상황과 사회적 배경과 깊이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흔히 한국교회 성장을 선교정책설정치사회적 환경론한국인의 종교적 심성론(心性論) 등으로 설명해 왔지만 한국이 일제의 지배하에 있었다는 정치환경에서 유래한 민족주의에 기인한다는 해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아시아아프리카 제국과는 달리 한국은 기독교 국가가 아닌 일본의 식민 통치를 받았다는 사실은 교회성장의 원인을 규명하는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아아제국(亞阿諸國)이 기독교국가의 식민통치를 받았기 때문에 그 나라들의 민족운동은 반() 기독교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300여 년 간 화란의 지배를 받았던 인도네시아였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는 그 반대였다. 인접한 강대국들(일본소련중국 등)의 침략야욕 앞에서 기독교를 통로로 자강의지를 키워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말하자만 한국인은기독교는 외래적인 것이라는 배타적 거부에서 기독교를 통한 근대성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는 환영을 받았고 한국에서의 민족주의는 친기독교적인 성격을 띠게 된 것이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기독교적 민족주의’(Christian nationalism)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김세윤은 이런 특수한 상황을 기독교와 민족주의의 결혼이라고 불렀다.

 

4) 일제하에서의 교회의 수난

 

한국의 장로교회는 일제하에서 가장 큰 수난을 겪으며 생존의 투쟁을 해야만 했다. 일제의 조선 침략은 운양호사건(1875)을 문제 삼아 개항을 강요한 후 점진적으로 추진되었다. 임오군란(1882)청일전쟁(1894)노일전쟁 (1904~5)을 거쳐 일본은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행사하였고불평등조약인 을사조약을 강제로 채결하고(1905)한국을 병탄한 후(1910) 식민통치를 시작 했다. 무단통치를 단행하여 경찰과 헌병대를 일원화하여 헌병경찰제도를 만들어 무력으로 조선인을 통치하였다. 1910년에는 범죄즉결법을 제정하고 한국인의 집회결사언론의 자유를 제한했다. 또 조선사편수회를 만들어 한국사 연구의 일환으로 <조선반도사>(朝鮮半島史)를 편찬하고식민사관에 입각하여 역사를 왜곡하고이를 통해 조선통치를 이념적으로 합리화 하고자했다. 후일에는 한국어의 사용금지창씨개명을 강요하는 등 민족 말살정책을 수립하였다. 수많은 한국인을 지원이란 이름으로 징용하여 전선으로탄광 노동자로 징발하였고초등학생에 지나지 않은 12살 소녀에서 50대 여인에 이르는 수십만의 부녀자들이 성노예로 강제하였다.

 

이 기간의 기독교에 대한 탄압은 심각한 것이었다. 1910년 당시 총독부 자료에 의하면 조선의 교회는 20만의 신도와 1900여개의 집회소가 전국에 산재해 있었으며지도자로서 외국인 선교사 270여명조선인 교직자 2300여명이 있었다. 그밖에 기독교회는 많은 병원과 고아원을 가진 조직이었다. 그것은 신앙이라는 견고한 유대로 결합되어 구미의 선교사들에 의해 세계 여론과 연결되어 있다고 일제는 보고 있었다. 그리고 당시 교회에는 국권민권의 회복을 열망하는 사람들이 많이 모였으므로 태극기가 가장 많이 게양되는 곳은 교회와 기독교인의 집이라고 보고 될 정도로 교회를 민족주의적 색채가 농후한 집단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인식에서 일제의 기독교 정책은 일면 회유일면 탄압이라는 이중적이고도 양면적인 것이었다.

 

특히 일제는 1925년 신사제도의 총본산인 조선신궁을 건립한 이래로 도처에 신사(神社)를 건립하고 일면일신사주의를 강행하였다. 1935년부터 기독교학교에 신사참배를 강요하였고1936년부터는 교회와 교회기관에도 신사참배를 강요하여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일대 수난의 역사를 엮어 갔다. 1936년도 당시 한국 장로교회는 2931개처, 교인 총수는 341700명 에 달했다.

 

신사참배 강요는 소위 국민정신총동원’(國民精神總動員) 운동의 일환이었다. 일제는 전쟁수행을 위해 대륙병참화 정책을 수립하고 내선일체(內鮮一體), 황민화정책(皇民化政策)을 실시했고이 정책의 거점을 신사(神社)에 두었다. 따라서 신사참배 강요는 전쟁정책을 위한 불가피한 요구였다. 신사참배 강요에 저항하여 미국남장로교 선교부는 즉각적인 학교폐쇄를 결정했다. 그래서 광주의 숭일중학수피아여중목포의 영흥중학정명여중순천의 매산학교전주의 신흥학교기전여학교군산의 영명학교 등은 폐교되었다. 호주장로교 선교부도 약간의 이견이 없지 않았으나 절대다수가 신사참배를 반대하였다.

 

다른 선교부도 동일했지만 직접적으로 학교교육에 종사하는 이들이 신사참배 문제에 있어서 비교적 관용적이었다. 그러나 마라연(Ch McLaren) 태매시(M G Tate) 등은 강경한 반대론자였다. 처음에는 원로 선교사였던 매켄지(J N Mackenzie)어떤 명예로운 방법을 강구하라는 충고를 받아들여 신사에 가서 묵도는 하되 참배는 하지 않는다고 했으나19386월 이후 강경하게 돌아서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학교 폐쇄를 선택했다. 미국북장로교 선교부는 이 문제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정리하지 못하고 오랫동안 고심했다. 학교 교육에 가담하는 이들이 신사참배를 수용하더라도 교육을 포기할 수 없다고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원한경(H H Underwood)이었다. 북장로교는 논란 끝에 남장로교의 영향을 받아 결국에는 학교 폐쇄를 결정하게 된다. 서울의 경신학교 정신학교대구의 계성학교 신명학교평양의 숭실학교 숭의학교 재령의 명신학교선천의 신성중학교보성학교강계의 영실학교 등이 죽음을 선택했다. 반면에 캐나다선교부(캐나다연합교회)는 신사참배를 일제가 말하는 국민의례로 수용하여 학교 교육을 계속했다. 평양신학교는 19381학기를 끝으로 자진 폐교를 선택했다.

 

기독교계 학교에서부터 시작된 신사참배 강요는 드디어는 교회와 교회기관으로 확대되었다. 기독교학교에 대한 신사참배 강요가 평안남도 지사 야스다케 타다오(安武直夫)의 부임으로 발화(發火)되었다면교회에 대한 강요는 조선총독 미나미지로(南次郞, 1874~1955)의 부임으로 방화(放火)되었다. 관동군 사령관 출신인 미나미는 15년 전쟁 기간 동안 최전선에서 지휘하고 19368월 제7대 조선총독으로 취임했다. 그는 철저한 군국주의자였다.

 

그는 19377월 중일전쟁(中日戰爭) 이후96일을 애국일로 정하고 일본국기 게양동방요배신사참배를 요구하였고10월에는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를 제정하였고12월에는 천황의 사진을 학교와 기관에 배부하고 경배를 요구했다. 19382월에는 전쟁수행을 위한 특별지원제(징병제)를 제 정하고 3월에는 조선교육령을 개정하여 조선어(한글)사용을 금지시켰다.

 

이와 같은 일련의 강압통치 과정에서 교회에 대한 탄압이 가중되었다. 신사참배 강요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수용하든지 거부해야 하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되었다. 천주교와 감리교, 구세군, 성결교, 안식교, 성공회 등 대부분의 교회들도 일제의 압력에 굴복했다. 끝까지 저항한 교회는 장로교뿐이었다. 장로교는 처음에는 신사참배를 강하게 반대했으나 강요가 심해지자 점점 그 의지가 약화되어 갔다. 193829일에는 전국에서 교세가 가장 큰 평북노회가 탄압과 압력에 굴복하고신사는 국가의식이므로 참배를 허용한다고 결의하였다. 이렇게 되어 19389월 이전까지 당시 23개 노회 중 17개 노회가 일제의 요구에 굴복하였다. 일제의 용의주도한 전략에 따라 장로교도 1938910일 평양 서문밖() 교회에서 206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된 장로교 제27차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국민의례라는 이름으로 불법적으로가결했다.

 

불법적이라고 말하는 것은신사참배안 처리를 사회자 총회장 홍태기 목사가 ’()는 물었으나 ’ ()는 묻지 않는 채 가결을 선포했기 때문이다. 선교사 방위량(W N Blair)과 그의 사위 한부선(Bruce F Hunt) 등의 항의가 있었으나 가결을 번복하지는 못했다. 삼엄한 상황에서 신사참배안에 대한 성명서가 발표되었다.

 

아등은 신사는 종교가 아니오기독교 교리에 위반하지 않는 본의를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하며이에 신사참배를 솔선 여행하고 추히 국민정신 총동원에 참가하여 비상시국 하에서 총후(統後) 황국신민으로 적성(赤誠)을 다하기로 기(). 소화 13910일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 홍택기.”

 

총후라는 말은 어자적으로 총() ()라는 의미인데후방이란 의미였다. 신사는 종교가 아니라 국가의식임으로 전쟁 수행중인 말레시아나 싱가폴 같은 전방이 아니라 후방에 있는 천황의 백성으로써 신사에 적극적으로 참가 한다는 내용이었다. 신사참배가 가결되자 평양기독교친목회 심익현 목사의 즉시 실행 요청에 따라 김길창 부총회장의 인솔로 23명의 총회임원은 평양 신사에 참배하였다. 이것은 장로교회의 굴욕이었다. 한국의 장로교회도 태양신 숭배사상을 수용한 것이다. 이 당시(1938. 6) 한국의 장로교회는 3300여 교회에 달했다.

 

1938년 총회가 일제의 압력에 의해 불법적으로 신사참배를 가결했으나 전국에서 신사참배 반대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신사참배 거부자들은 19407월 이후 일제검거란 이름으로 체포구금 되었다. 신사참배 반대로 2천여 명 이상이 투옥되었고이 중 30여 명이 순교했다. 마지막까지 수감되어 있던 중 해방과 함께 출옥한 인사는 20여명에 달했다. 평양감옥에서 817일 저녁 고흥봉 김화준 방계성 서정환 손명복 오윤선 이기선 이인제 조수옥 주남선 최덕지 한상동 등과 김형락 박신근 안이숙 양대록 이광록 장두휘 채정민 등이 출옥했다. 신사참배반대로 약 150여 교회가 파괴되었고 장로교회는 큰 수난을 감내해야 했다. 1938년 이후 한국교회에는 굴종과 저항이라는 양면적인 역사를 엮어갔다.

 

5) 해방친일청산의 좌절

 

2차 대전의 종식과 함께 우리는 해방을 맞게 되었다. 해방 후 교회에 주어진 가장 중요한 과제는 일제잔재를 청산하고 한국교회를 쇄신하는 일이었다. 이것은 역사의 당위이자 한국교회에 주어진 숙제였다. 국가적으로도 친일파를 제거하고 식민잔재를 청산하는 일은 역사의 당위였다. 그러나 우리 민족과 교회그 어느 쪽도 친일세력을 제거하거나 잠재우지 못함으로서 식민지적 상황은 그 이후의 한국사회와 교회현실에 영속적으로 부정적 영향을 끼쳐왔다. 교회적으로 볼 때 그 부정적인 영향이란 신앙정기를 회복하지 못함으로서 교회쇄신을 이루지 못했고교회 분열의 원인(遠因)이 되었다는 점이다.

 

해방 후 친일인시들은 미군정에 의해 관리로 등용되었고1948년 정부수립 후에도 친일전력의 인사들은 제거되지 못했다. 서중석의 분석에 따르면 19601월말 당시 11명의 국무위원 중 독립운동자 출신은 한 사람도 없었고 모두가 일제 때 군수판사 등 공직자 출신이거나 군 출신이었다고 한다. 그 결과 해방 이후 정치 경제 문화를 주도하는 이른바 파워 엘리트층은 부일 협력자들에 의해 형성되었다. 이런 점에서 김학준은 친일세력이 분단체제의 고정화에 기여했고또 분단체제는 친일세력의 기득권을 보호신장시켜 주는 역할을 수행했다고 진단했다.

 

교회의 상황도 이와 비슷했다. 교회쇄신에 대한 평신도들의 열화 같은 요구가 있었으나 친일적 인사들은 신속한 변신을 통해 교권을 장악하고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했다. 따라서 교회쇄신의 요구는 좌절되었다. 해방 후 친일 혹은 부일 기독교 지도자들을 제거하지 못한 것은 한국교회의 혼란과 분열의 근본적 원인이었고 또 정치권력에 대해서도 정당한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된다.

 

해방 후 장로교회 중심으로 세 지방에서 교회쇄신을 위한 시도가 있었다. 평양 중심의 이북지방에서의 교회쇄신 운동의 중심인물은 출옥 성도인 이기선 목사와 채정민 목사였다. 1945년의 94일 산정현교회에서 평양노회가 임시노회를 개최되었을 때 이들의 주도하에 3일 간 금식기도하며 신사참배의 죄를 회개하는 운동을 시작하였다. 그해 920일 경에는 교회의 지도자 (목사장로)들은 모두 선사에 참배하였으므로 권정(權戀)의 길을 취하여 통회정화(痛悔淨化)한 후 교역에 나아갈 것등 한국교회 쇄신을 위한 기본원칙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 쇄신안은 친일적 인사의 강한 반대에 직면했다.

 

19451114일부터 일주일간 평북노회가 주최한 평북 6노회 교역자 퇴수회가 선천 월곡동(月谷洞)교회에서 회집되었을 때 이기선 목사와 만주 봉천의 박형룡 박사가 강사로 초빙되었다. 이 모임에서 박형룡이 한국교회 쇄신을 위한 다섯 가지 원칙을 발표했을 때 신사참배 가결(1938) 당시 총회장이었던 홍택기 목사 등은 쇄신원칙은 독선적인 주장이라며 강력하게 반대 했다. “옥중에서 고생한 사람이나 교회를 지키기 위해 옥 밖에서 고생한 사람이나 그 고생은 마찬가지였고교회를 버리고 해외로 도피생활을 했거나 혹은 은퇴생활을 한 사람의 수고보다는 교회를 등에 지고 일제의 강요에 어쩔 수 없이 굴복한 사람의 수고가 더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는 논리였다. 그리고 신사참배 회개의 문제는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에서 해결될 성질의 것이라고 주장했다. 박형룡은 교회지도자들의 태도가 구태의연하고 회개의 빛이 없음을 보고 실망한 나머지 봉천으로 돌아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기선 목사 등은 1945920일 발표했던 한국교회 재건원칙을 그대로 실시하는 교회들곧 평양 산정현교회를 위시하여 선천신의주강계 등 평안북도와 황해도 등지의 30여 교회들을 규합하여 별도로 독노회(周老會)를 조직했다. 이 독노회가 혁신복구파(革新復舊派)라고 불렸다. 북한에서의 교회재건과 교회쇄신을 위한 시도는 공산정권의 수립으로 좌절되었고오늘까지 침묵의 교회로 남아 있다.

 

서울에서의 교회재건은 영적쇄신이 아니라 일제하에서 와해된 교회조직을 재건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심지어 장로교의 김관식(金觀植) 김영주(金英珠) 송창근(宋昌根) 목사, 감리교의 변홍규(下鴻圭) 이규갑(李奎甲) 박연서(朴淵瑞) 목사 등은 일제에 의해 조직된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을 유지, 계승하려는 시도까지 있었다. 이 시도가 무산되자 장로교 인사들은 19466월 서울 승동교회에서 대한 예수교장로회 남부총회(南部總會)를 조직하였다. 분단으로 인한 남한교회만의 총회였기에 남부총회라고 이름하였으나 19474총회로 개편되었다. 일제에 의해 해산되었던 조직은 재건했으나 친일적 인사들이 여전히 교권의 중심에 있었다.

 

교회쇄신운동이 적극적으로 일어난 지역은 부산경남지역이었다. 이 지방에서의 교회쇄신운동도 친일인사들의 저항에 직면하여 교회쇄신은 심한 방해를 받았다. 1945918일에는(194255일 장로교총회가 해산됨에 따라 525일 해산되었던 경남노회를 재건하는) 경남재건노회가 조직되었다. 이때 일제하에서 범한 죄과에 대한 자숙안이 상정되었는데이때부터 친일전력의 교권주의자들과 교회쇄신론들이 대립하게 된다. 그러나 교권주의자들이 노회의 영도권을 장악하므로 자숙안은 실행되지 못했다. 이때부터 진정한 쇄신을 주장하는 이들과 교권주의자 간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이런 대립 가운데서 교회의 지지를 받지 못한 김길창권남선 목사 등은 194938일 부산항서교회에서 기존의 경남노회를 이탈하여 별도의 경남노회를 조직하였다. 이것은 경남지방에서 일어난 대수롭지 않는 사건으로 보일지 모르나 이것이 한국장로교회의 분열의 시작이었다. 분명한 사실은 한국 장로교회의 첫 분열은 교권주의자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한 변신과 자구책의 결과였다는 점이다.

 

6) 1950년대의 교회장로교회의 분열

 

1950년대 한국사회는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혼란기였다. 해방 후 5년이 경과했으나 그 이전 시대의 민족문제와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열강들의 대립은 1950년대 한국의 정치 사회적 상황에 여전히 영향을 주고 있었다. 해방 후 남북한 간의 첨예한 대립과 이 시대의 냉전체제는 한반도에 민족상잔의 전쟁을 발발케 하였고이 전화(戰禍)는 민족의 고난과 아픔의 실체였다.

 

이 시대의 교회는 한국의 정치적 상황에 크게 영향을 받고 있었다. 그 시기의 교회는 교회와 국가 간의 관계에 대한 균형 잡힌 이해가 부족했다. 예언자적 기능을 상실하였고 국가권력에 대한 교회의 바른 관계를 정립하지 못했다. 북한에서의 공한정권의 수립남북 간의 이념적 대결그리고 6.25전쟁의 결과로 남한에서는 반공 이데올로기가 강화 되었다. 공산주의에 대한 불신과 거부는 상대적으로 자본주의에 대한 과신을 안겨주어 자본주의의 문제를 정당하게 비판하지 못했다.

 

이런 와중에서도 신사참배 문제신학적 문제교권적 대립 혹은 교회 지도자 간의 갈등으로 장로교회의 분열을 초래했다. 신사참배 행위에 대한 회개와 자숙을 주창한 주남선과 한상동 목사는 1946년 부산에서 과거 평양신학교의 정신을 계승하는 고려신학교를 설립했다. 이들은 고려신학교를 교회쇄신운동의 신학적 거점으로 삼았다. 그러나 부일 협력자들곧 신사참배 요구를 수용했던 이들의 방해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교회 쇄신론자들은 1951년 총회로부터 축출됨으로써 한국장로교회의 분열을 가져왔다. 총회로 부터 축출된 이약신(李約信) 주남선(朱南善) 한상동(韓尙東) 등은 1952년 별도의 치리회를 구성했는데 이것이 한국장로교회의 첫 분열인 고신교회의 출발이었다. 고신교회()1.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반대와 개혁주의 신학의 확립 2. 신사참배 반대와 저항 정신의 계승 3. 교회쇄신을 통한 생활의 순결을 그 이념으로 제시했다.

 

신학적 문제로 총회로부터 제명된 김재준(金在俊) 목사는 1953년 경기노회 중심의 지지자들을 규합하여 기독교장로회’(기장)로 분립하였다. 이것이 한국장로교회의 제2차 분열이었다. 보수적인 한상동과 진보적인 김재준의 양 극단이 제거되어 평화가 올 것으로 기대했으나 한국장로교회는 1959년 다시 분열했다. 표면적으로는 신학교 건축 기금 3천만환 사기사건, WCC 문제, 경기노회 총대권 문제 등으로 언급되고 있지만, 박형룡과 한경직 간의 대립으로 총회는 승동측과 연동측으로 분열되었다. 이것이 제3차 분열이었다. 장로교회는 1912년 총회를 구성한 이래 단일 교회로 남아 있었으나 1952년 이후 3차례의 분열을 통해 4개 교단으로 분열되었다. 분열의 중심에는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4사람의 지도자 곧 한상동(1901~1976)김재준(1901~1987)박형룡(1897~1978)한경직(1902~2000) 목사가 좌정하고 있었다.

 

분열된 장로교회의 합동을 위한 시도도 없지 않았다. 1959년 장로교회가 승동과 연동측으로 분열되자고신측과 승동측은 교단 합동을 위한 대화를 시작했다. 19609월 양 교단은 해 교단의 인준 하에 통합을 위한 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약 3개월간의 대화 끝에 19601213일 합동총회가 개최되었다. 고신과 승동측은 합동교단으로 통합된 것이다. 합동을 기념하여 출판된 찬송가가 새 찬송가였다. 고신과 승동측은 합동이라는 이름으로 통합되었으나 불과 3년이 못되어 고신은 환원을 선언하고 합동측으로부터 재 분리되었다. 1959년 분리된 합동측과 연동측도 1962년과 1968년 재통합을 시도했으나 이 또한 무위로 끝났다. 결과적으로 한국장로교회는 4개 교단으로 분리되어 고신교단은 고려신학교(고신대학교)합동교단은 총회신학교(총신대학교)통합은 장로회신학교(장로회신학대학)기장은 조선신학교(한신대학교)를 중심으로 각각 신학교육을 시행하며 목회자를 양성하고 있다.

 

7) 1960~70년대의 교회

 

1960년대 한국교회는 정치현실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하게 된다. 그 계기가 된 사건이 1960년의 4.19혁명이었다. 학생혁명은 우리 사회의 민주의식 혹은 정치의식의 발전일 뿐만 아니라 교회의 사회참여와 그 대응에 있어서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한국교회는 이승만 재임 중에는 맹목적인 지지를 보냈으나 4.19 이후 기독교계는 정치현실을 보다 객관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19615.16군사 쿠테타 발생 10일 후 한국교회협의회’(NCC)는 박정희 장군을 비롯한 군사쿠데티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즉 쿠데타는 부정과 부패뿐만 아니라 공산주의 침략으로부터 국가를 건지기 위한 불가피 한 조치였으며 한국민은 군사정부에 협조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쿠데타가 일어난 지 35일 만인 621일에는 한경직과 김활란은 한국교회를 대표하여 미국을 방문하고 군사정부를 지지해 줄 것을 요청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런 경험을 통해 교회는 사회현실에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조망하기 시작한다.

 

이때까지는 보수나 진보의 구분선이 분명치 않았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의 출현과 함께 정치권력에 대한 교회의 입장은 신학적 성향에 따라 선명하게 구분되기 시작했고신학적 성향에 따라 정치권력에 대한 상반된 견해가 대두되었다. 즉 보수적 성향의 교회나 그 지도자는 개인구원을 강조하고정교분리에 근거하여 정치적인 문제나 사회구조의 문제에 대해서 비교적 무관심했다. 그러나 진보적 교회는 사회구조의 개혁 및 변혁을 우선시하고 정치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고 행동하기 시작했다. 결국 1960년대부터 보수와 진보 양측은 정치권력과의 관계 혹은 태도에 대한 분명한 차이를 노정하기 시작했다. 교회와 국가 간의 관계에 대한 신학의 양극화 현상은 그 이후의 역사에서 더욱 분명해졌다. 특히 1970년대 이후 보수와 진보의 경계선이 보다 분명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1960년대 한국교회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교회성장이었다. ‘성장이라는 단어는 이 시대의 제왕이었고교회성장은 이 시대의 제일의적(第一義的) 과제였다. 이것은 박정희 정부의 경제정책과 무관하지 않다. 1961년 군사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 정권은 경제성장을 국가지표로 삼았다. 이것은 군사혁명의 당위성을 꾀하는 명분확보로 제시되었고국민들의 입장에서는 기근과 굶주림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생존의지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경제성장곧 성장지상주의(成長至上主義)는 국민적 소망과 정권적 의지그리고 현실적 힘을 가진 살아 있는 가치체계였다. 그 결과 우리나라 경제가 크게 발전했다. 1966년과 1970년 사이의 개발도상국으로 분류된 59개 국가 중에서 우리나라는 경제성장률 제1수출신장률 제1그리고 제조업 고용증가율 제2위를 차지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교회는 성장지상주의 이데올로기에 매몰되어 갔다. 성장은 교회의 최고의 가치이자 최고선(最高善)이었다. 결과적으로 1970년대 교회의 양적성장 추구가 이 시대 교회의 뚜렷한 특정이 되어 1907년 대부홍 이래 가장 큰 성장을 이루었다. 해방 당시의 기독교신자는 약 35만 명으로 추산되고 이로부터 10년 후인 1955년에는 60만 명에 지나지 않았으나1965년에는 약 120만 명으로 성장하였고1975년에는 약 350만 명으로 급증하였다. 1970년대를 마감하는 1979년 기독교신자는 약 700만 명으로 집계되었다. 그래서 1960년대 이후는 매 10년마다 200% 성장하였고1970년대 후반에는 매일 6개씩의 교회가 설립된 것으로 보고되었다. 수적으로 말하면 1970년에는 매년 60만 명씩 증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통계만 보더라도 1970년대의 한국교회의 가장 중요한 관심은 교회성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국교회의 성장 운동에 영향을 준 것은 정부의 경제성장제일주의만이 아니라 미국 풀러신학교의 교회성장학파(Church Growth School)의 영향이나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조용기 목사의 목회방식도 적지 않는 영향을 끼쳤다.

 

성장이 최고의 가치였기 때문에 신학적 일관성이나 신학적 순전성은 별 의미를 갖지 못했다. 성장 그 자체가 문제시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성장제일주의는 성장 이외의 다른 가치들을 무시하거나 부수적인 것으로 취급한다는 점이다. 그 결과 성장 아닌 것, 곧 정당한 치리의와 거룩성결이웃사랑 등 윤리적 가치들은 무시되거나 경시되었다. 이 시기 성장 지향적 목회는 인간의 물질적 풍요에 대한 욕망을 신앙이란 이름으로 정당화하거나현세적 축복지향의 기복주의가 풍미했다. 결과적으로 이 시대의 교회는 순례자적 이상을 상실했다.

 

1970년대 장로교회가 크게 성장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시기 교회 분열 또한 심각했다. 1970년대 중반 고신교단과 합동교단에서의 내분은 교회분열로 나타났고장로교회는 교권과 지연학연이 결합되어 분열을 거듭했다. 그 결과 전국적으로 300여개에 달하는 비인가(무인가) 신학교가 설립되었다. 신학교의 설립은 필연적으로 교단의 설립 혹은 교회의 분리를 초래했다. 1970년대 이후 생성된 교단으로는 개혁 광주측개혁 서울개혁 안양개혁 국제개혁 총연예장 총회합동 개혁합동 정통합동 중앙합동 복음합동 총회합신측선목대신호헌 등이다.

 

1970년대 한국교회는 인권운동과 민주화운동을 또 다른 형태의 교회적 과제로 인식했다. 이 시기에 보수적 교회가 교회성장에 관심을 기울인 반면 진보적 교회는 인권운동과 민주화운동을 선교적 과제로 인식했다.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의 출현과 함께 한국교회에는 두 가지 형태의 교회 운동이 일어났는데하나는 사회현실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반면 교회성장을 우선적 과제로 추구하는 운동이었고다른 하나는 사회구조의 개혁 및 변혁을 앞세우는 사회참여 운동이었다. 대체적으로 말해서 전자는 사회구조와의 싸움보다는 개인의 구원문제를 앞세우는 보수주의 교회가 그 중심에 있었다. 그래서 1960년대 이후 한국장로교회는 보수측과 진보측 간의 분명한 차이를 보여주었다.

 

8) 1980년대의 교회

 

1961년 군사혁명을 통해 권력을 잡은 박정희 정권은 영구집권을 위한 의도로 19721017일 계엄령을 선포하여 헌정을 중단시키고 모든 정치활동을 중지시켰다. 국회가 해산된 상태에서 비상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쳐 소위 유신헌법이 공포되었고 형식적인 국민투표에 의해서 이 법은 확정되었다(1972. 11. 21). 대통령의 중엄제한이 철폐된 이 헌법은 대통령에게 무소불위의 절대적 권한을 부여하고 있었다. 박정희는 19721223일 통일주체 국민회의에 의해 대통령에 선출되어 절대 권력을 행사했으나 19791026일 김재규에 의해 피살됨으로서 70년대의 암울한 역사를 마감하게 되었다.

 

한국교회는 이런 정치적 변혁을 경험하면서 국가와 교회에 대한 바른 관계가 무엇인가를 깨닫기 시작했고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헤아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부터 교회의 사회참여는 더욱 확대되었고1980년대는 민주화 운동의 연장선상에서 통일에 대한 교회의 관심이 확대되었다. 1980년대 전반기까지 한국교회의 대사회적 관심사가 민주화였다면1980년대 후반에 와서 민족문제에 대한 교회의 가장 큰 관심사는 통일문제였다. 따라서 통일문제는 교회가 감당해야 하는 중요한 과제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진보적 교회가 주도한 통일논의는 민족주의적 관심에서 전개되었고 북한 인권에 대한 무관심 등으로 보수적 교회의 지지를 얻지 못했으나 민간차원에서의 통일운동을 주도한 점은 부인 할 수 없다.

 

1980년대는 한국교회의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다. 1984년을 전후하여 한국교회는 자성과 반성의 계기로 삼았고그 동안 한국교회가 지나치게 수적성장에 치중하였고사회현실에 대한 정당한 관심이나 교회의 사명에 충실하지 못했음을 반성하게 된다. 이때를 전후하여 일상의 삶 속에서 신앙적 성숙을 도모하는 말씀 묵상운동(QT)제자훈련기독교문화운동교회의 사회봉사에 대한 관심이 일어났고특히 선교에 대한 새로운 관심은 이 시대의 주목할 만한 진전이었다. 1970년대 중반까지 한국교회가 파송한 선교사는 교포목회자를 포함하여 불과 20여명에 불과했다. 이 점은 한국교회가 해외선교에 대해 얼마나 무관심했던가를 보여준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교회의 선교적 사명을 인식하기 시작했고선교는 거 교회적 관심사로 대두 되었다. 한국교회에서 선교운동에 연향을 준 이는 1968년 동서선교연구원을 설립했던 조동진 목사였다. 그는 1980년대 이후 선교신학을 가르쳤던 전호진 박사와 함께 한국교회의 선교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1990말 당시 한국의 20여 교단과 30여 선교단체는 790명의 선교사들을 해외에 파송했다. 그러나 2007년에는 173개국에 16600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여 미국 다음으로 가장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는 선교 대국이 되었다. 현재(201112월 기준) 한국교회는 23322명의 선교사를 파송한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한국교회의 급성장은 서구기독교회의 주목을 받아왔으나 1980년대 후반을 거쳐 가면서 성장 둔화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점은 어느 한 가지 요인으로 설명할 수 없는 복합적인 요인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요인은 삶의 환경의 변화였다. 한국인의 삶의 환경은 1980년대 후반에 와서는 급격한 변화를 보여주었다. 해방이후의 혼란6.25동란 이후의 가난함과 무질서 그리고 계속되던 전쟁의 위협이런 사회적 불안 요인들은 1980년대를 거쳐 가면서 자연스럽게 해소되었다. 역대정권에 의해 정권적 차원에서 이용되던 안보 이데올로기는 1980년대 후반부터는 그 위력이 크게 감소되었고김영삼 정부 이후는 국제적인 냉전체제의 종식과 함께 전쟁에 대한 위기감은 상당히 격감되었다.

 

1970년대부터 서서히 나타나던 경제성장과 삶의 환경 개선은 1980년대를 거쳐 가면서 상당한 변화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해방이전에는 한국인의 약 80%가 농업에 종사했으나 지금은 농어촌 인구는 15% 미만이다. 말하자면 급격한 도시화 현상 혹은 도시집중현상이 초래되었고보다 안정된 삶을 누리게 되었다.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1985년 당시 1인당 GNP2242불에 지나지 않았으나1993년에는 7513불로 세계 150여 국가 중 30위 안에 들게 되었다. 1990년대에 후반에는 1만불을 넘어섰고2005년에는 17422불로 세계 33위였다. 이와 같은 안정된 생활은 종교적 세속화 현상을 초래하였다. 이전에는 고난과 가난의 와중에서 믿음 안에서 안식을 누렸고 그 믿음은 험악한 세월을 이기는 정신적 무기였다. 그러나 사회적 삶의 변화로 신앙은 본령(本領)에서 주변(周邊)의 부가물로 밀려나고 있다.

 

이런 변화를 보여주는 지표가 자동차의 급격한 보급이었다.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승용차의 보급은 1985년 이후 급격히 증가 되었다. 1985년의 경우 556700대에 지나지 않았으나1986년에는 664천대1987년에는 844천대1988년에는 1118천대1989년에는 15586001990년에는 2075천대로 각각 늘어났다. 1991년에는 273만대1992년에는 346만대로 중가 되었고, 인구 100명당 보유수가 8대로 나타났다. 승용차만이 아니라 상용차까지 합치면 1992년의 경우 자동차 보유수는 523만대이고 100명당 자동차 보유수는 12명으로 나타나 있다. 한국의 자동차 보유수는 세계 160개국 중에서 60번째에 해당된다. 그런데 1993년에는 427만대로 늘어났고 상용차까지 합치면 627만대이다. 1994년의 경우 인구 100명당 자동차 보유수는 16.7대로 늘어났다. 자동차의 급격한 보급은 한국인의 생활양식에 급격한 변화를 주었고 이것은 여가문화의 변화와 함께 교회 출석률을 급격히 저하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제는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즐기느냐가 문제로 인식 되고 있다.

 

물론 기존교회와 지도자들의 영적도덕적윤리적 권위의 상실이단이나 유사기독교의 활동이 가져온 부정적 영향 등도 교회성장 둔화현상에 영향을 끼친 요인들이다. 특히 1992년의 시한부 종말론자들의 광신적인 활동과 그 주장의 허구성몰이성적 행태들이 가져온 역기능 또한 복음전도 활동에 부정적 영향을 주었던 요인이었다.

 

여성안수 문제는 1980년대 이후 장로교회의 중요한 관심사였다. 이것은 비단 한국교회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미국 북장로교회(PCUSA)1930년에 여장로직을 허용하였고1955년 총회에서는 여목사 제도를 승인한 바 있고북장로교회에 비해 다소 보수적이었던 미국 남장로교회(PCUS)1964년에 여성안수를 허락하였는데1978년에는 여목사 사라 모즐리(Sara B. Moseley)가 총회장이 되기도 했다. 위의 두 교회는 1983년 통합하여 지금은 미합중국장로교회가 되었고 여성안수는 자연스런 일이 되었다. 그런데 이런 교회들만이 아니라 미국의 기독교개혁교회(CRC)는 지난 30여 년간 이 문제로 심각한 토론이 있었고이로 인한 내분까지 겪었다.

 

여성 사관을 당연시해왔던 구세군(1908)을 제외하고 볼 때한국에서 여성안수를 가장 먼저 결정한 교회는 감리교였다. 한국감리교회는 이미 1933년부터 여성안수곧 여성 목사와 장로가 허용되었다. 기독교장로회는 1957년에 여장로 제도를1974년부터는 여목사 제도를 채택했다. 미국남장로교회가 여성목사를 안수하기 4년 전의 일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극단적인 보수주의 혹은 근본주의적인 재건파 교회가 1954년부터 여성안수를 허락했다는 점이다. 이들은 신학적 근거에서 여성안수를 허용했다기보다는 재건파의 지도자인 최덕지 씨를 위해 여자성직을 허용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일로 재건교회는 여권파와 반여권파로 분열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고신 등 보수적 장로교회는 여전히 여성안수를 반대하고 있다. 그러나 1990년대 통합교회()는 여성안수 문제를 전향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하였다. 1989년에 모였던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74회 총회에서는 여성안수 찬성표가 반대보다 2표가 앞서는 이변이 일어났으나 4표가 부족하여 과반선을 넘지 못해 부결되었다. 그러나 1994년 제 79회 총회에서는 총 투표자 1321명중찬성 701반대 612기권 8표로89표 차이로 여성안수를 허용하는 헌의안이 채택되었고1996년부터 여장로와 여목사를 두게 되었다. 이로서 통합측은 한국의 감리교와 기독교장로회에 이어 여성안수를 허용하는 교단이 되었다.

 

1980년대 이후의 한국교회는 밖으로부터의 도전과 내부적 혼란을 극복해야 하는 이중적 난제를 안고 있었다. 단군전건립운동에 맞선 건립반대운동이단과 사이비 유사기독교의 출현신학교의 난립과 교회 분열교회의 사회적 신뢰의 상실 등은 교회가 해결해야 할 숙제였다. 이런 와중에서도 적극적인 선교운동대사회 봉사활동북한동포에 대한 관심과 물적지원통일운동에의 동참교회연합운동 등이 이 시대의 중요한 활동이었다. 오늘 한국 교회가 안고 있는 가장 중요한 과제는 사회적 신뢰를 회복하고 교회가 이 사회 앞에서 도덕적 윤리적 계도자의 위치에서 한국사회 변화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교회가 기독교 신앙 본래 의 정체성을 회복해야 한다. 어떤 시대든지 기독교의 세속화는 본래적 가치로부터의 후퇴나 이탈이었다. 성경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은 이 땅에서는 나그네로 시는 것이다. ‘나그네성()’의 상실은 교회의 속화를 초래하였다. 한 때 막스주의자였던 폴란드 출신의 사회철학자 레젝 콜라롭스키(Leszek Kolakowski)는 오늘의 서구사회의 세속화는 기독교가 너무 쉽게 그 고유한 가치를 포기해 버린 결과라고 지적했다.

 

3. 한국장로교회의 오늘과 내일: 반성과 평가

 

앞에서 지적했지만 지난 100년간의 한국 장로교회사를 뒤돌아 볼 때 해결해야 할 몇 가지 과제가 있다. 대사회 정책의 수립이단에 대한 대처그리고 무인가 신학교의 난립과 무자격 목사의 양산에 대한 대처신학의 발전교회연합 운동통일에 대한 대비기독교적 가치의 구현 등 실로 많은 난제가 있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오늘의 장로교회가 안고 있는 2가지 문제교권주의와 교회구조의 계급화교회분열과 연합에 대해 검토하고 이를 통해 향후 장로교회가 나아갈 바를 점평해 보고자 한다.

 

1) 장로교제도와 교권주의

 

장로교회가 어떤 정치제도를 취하는가에 대해서는 여기서 다시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앞에서 지적했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장로교는중세적 계층구조를 반대하는 성격과 교회의 자율과 독립을 강조하는 이중적 성격이 있다. 로마 가톨릭의 중세적 계층구조를 부정하는 가장 안이한 방식은 회중교회와 같은 개 교회주의를 택하던가아니면 교직제도 자체를 부정하는 소위 자유교회(free church)를 지향하는 것이다. 그러나 장로교회는 제도적으로 이런 양 극단을 지양한다. 즉 교회의 계층화를 반대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개 교회주의나 자유교회적 경향을 지지하지도 않는다.

 

이것이 장로교의 역사와 전통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의 장로교회는 앞의 양 극단의 형태가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 천주교와 같은 교회구조의 계층화와 교권이 행사되고 있는가 하면그 반대적 경향곧 개교회적 경향도 심화되고 있다. 특히 한국의 장로교회가 감독교회화 되고 있다는 지적이 높다. 뿐만 아니라 노회총회가 권력화 되어 교권을 행사하는가 하면 정치집단화 되어 자기 집단의 이익을 추구하고 있다. 한국교회 일각에서 나타나는 개교회적 경향은 따지고 보면 교회 구조의 계급화과도한 교권 행사 혹은 교회 조직에서의 정치집단화에 대한 반동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교회의 계급적인 구조는 본질적으로 신약교회 원리에서 어긋난다. 초기 기독교회에서 직분자들은 서로를 함께 종 된 자”(1:7)함께 군사 된 자”(2:25)같은 장로”(벧전 5:1)혹은 동역자”(2:254:31:24)라고 불렀다. 이 시대교회는 계급적인 구조가 없었으나 2세기를 거쳐 가면서 교회구조의 변질과 함께 교회는 계층화되고 감독정치가 자리 잡게 되었다. 바로 이런 사실 때문에 회중교회는 계층구조를 반대하고교회연합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다. 교회연합을 강조하다보면 교회조직이 계급구조로 변질될 위험이 있고계급구조화 될 때 교권이 행사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 다. 그래서 회중교회는 개체 교회의 자율과 평등을 절대적 가치로 수용하는 개 교회주의를 지향했다.

 

그런데 장로교회는 장로와 장로교회와 교회간의 평등을 강조하며또 감독정치의 계급적인 구조를 반대하면서도모든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점에서 연합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 장로교회는 감독제도를 반대하는 점에서는 회중교회와 동일하지만연합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회중교회와 다르다. 장로교회는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서 모든 지체들이 누리는 평등성(equality), 직분자들을 통해서 운영되는 자율성(autonomy), 교회 대표를 통해서 실시되는 연합성(unity)을 기본 정신으로 하고 있다. 즉 장로교회는 평등과 자율을 강조하면서도 연합을 반대하는 회중주의와 다르며연합을 강조하지만 평등과 자율을 거부하는 감독정치도 반대한다.

 

그런데 한국에 장로교회가 소개되고 교회가 수적으로 성장하게 되자 교회가 점차 교권화 되고 장로(목사)와 장로(목사) 간의 평등교회와 교회간의 평동의식이 희박해지고 계층화되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점은 장로교회 제도에서 오는 내적원인과 한국의 문화현실에서 오는 외적요인이 동시에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내적원인이란 말은 장로교회가 감독교회 정치에 대한 반발로 나왔지만장로교회는 제도적으로 감독교회화 혹은 교권의 권력화가 될 소지가 있다는 점이다. 외적 원인이란 한국이 처한 유가적(儒家的) 문화 토양에서 교회구조의 계급화가 일어날 소지가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이런 영향에서 1920년부터 장로교회에는 교회 정치 혹은 교권이 행사되기 시작했는데 그 일예가 서북지방과 비서북지방의 대립이었다. 흔히 서북(西北)지방으로 불리는 황해도와 평안도지역에서 교회성장은 타 지역을 완전히 앞지르기 시작한다. 1905년의 경우 서북지방의 신자 수는 18300명으로 전국의 23300명의 80%를 점했다. 교회당의 경우 서북지방은 298개처로써 전국 298개처의 85%를 점했다. 1910년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나타나는데 이때의 교세는평북 7901평남 10842황해 4740경기충청 2975 경상 5726전라 및 제주 5509명이었다. 이 통계를 보면 서북지방으로 불리는 황해도와 평안도지방의 신자 수는 23483명으로 경기충청의 2975 명보다 8배 앞선다. 서북지역 이외의 기독교 인구를 다 합해도(14210) 서북지역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 이런 비율은 그 이후에도 계속 유지된다. 이런 서북지방의 압도적 성장 때문에 그 세력을 무시할 수 없게 되었고이 지역을 중심으로 한 세력화가 교권의 행사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런 갈등은 1940년대까지 계속되어 서북과 비서북이북과 이남 사이에 긴장과 대립이 형성되었다. 말하자면 이미 장로교회는 부정적 의미의 교회정치 혹은 교권이 행사되고 있었던 것이다.

 

1950년대의 장로교회의 분열은 신학적 혹은 신앙고백적 동기라기보다는 정치적 성격이 깊다는 점은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1953년의 기장의 분열이 그러했고1959년 합동과 통합의 분열이 그러했다. 일반적으로 승동과 연동측으로의 분열은 박형룡의 3천만환 사건WCC가입 문제경기노회 총대 건의 문제로 논의되고 있지만, 따지고 보면 박형룡과 한경직을 둘러싼 두 인맥 구성에서 야기된 대립이 상당한 영향을 끼쳤음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물론 이 분열에 신학적 요인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박형룡한경직을 두 축으로 한 파당적 대결로 발전한 것 또한 사실이었다.

 

장로교회에서 교권과 교회정치는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고그 이후 의 한국장로교회의 도덕적윤리적 균형 감각을 상실하게 만들었다. 교권의 행사는 유교적 권위주의에 힘입어 권력화 되고 집단화 되었다. 이제는 교회 분열이라는 죄의 심각성에 대해서도 무감각해지기 시작했다. 그 분명한 증거가 1970년대 초에 전개된 합동과 고신교단에서의 분열이었다. 1970년대 합동교단은 교회정치문제로 깊은 수렁에 빠졌고1978년의 합동보수(후에 개혁측)1980년의 합신측의 분열 등 수다한 분열을 경험하게 된다.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교회 분열이 아니라 분열에 이르게 한 교권과 교회정치의 폐단이 심화되었다는 점이다. 이 점은 동일한 시기 고신의 경우에서도 동일했다. 어떤 경우든 신학적윤리적 명분을 내세우지만 그 배후에는 지연이나 인맥노회를 배경으로 한 교권대립이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이런 유형의 교권 대립이나 교단 내의 정치활동은 과거에 비해 더욱 심화 된 것이 오늘의 현실이자 우리 장로교회가 극복하고 해소해야 할 과제가 아 닐 수 없다. 우리는 장로교 전통의 교회정치 원리를 존중하되 한국교회 현실에서의 문제점을 개선할 수 있는 보완적 제도를 연구해야 할 것이다. 한국장로교회의 감독교회화 현상을 직시하고파벌이나 부당한 교회 정치운동을 잠재우게 될 때 교회로서의 권위를 회복하고 신뢰받는 교회를 세워갈 수 있을 것이다.

 

2) 교회성장과 분열연합을 위한 시도

 

한국 장로교회는 피선교지에서 유래가 없는 급성장한 교회이지만 동시에 과도하게 분열된 교회로 알려져 있다. 지난 100년의 역사는 성장의 역사인 동시의 분열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교회는 성장하면서 분열하고 분열하면서 성장해왔다. 거듭된 분열을 거쳐 현재는 약 250여개 교단으로 나누어져 있다. 지난날의 분열의 원인이 무엇이며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를 이야기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 아니다. 1950년대와 그 이후 상황에서 나름대로 분리해야만 할 이유가 있었겠지만 지금에 와서 그 잘잘못을 따지는 일은 연합을 추구해야 할 오늘의 현실에서 적절치 못하다. 단지 분열을 당연시하고칼빈이 그토록 강조했던 연합에 대해 무관심했던 점을 반성하는 것으로 족할 것이다. 오늘 우리는 분열된 장로교회의 현실을 사실상의 현실(the reality of de facto)로 받아들이고 연합과 일치를 모색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데 교회연합은 어느 시대나 용이하지 않았고분열은 쉬우나 연합은 더욱 어렵다는 점을 지난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 한국 장로교회는 분열된 가운데서도 연합을 시도한 여러 사례들이 있다. 1960년에는 고신과 승동이 연합하여 합동교단을 조직했으나 3년이 못되어 재 분리되었고1962년과 1968년에는 합동과 통합 간의 연합을 위한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성공적이지 못했다. 한국기독교 100주년이 되는 1984년을 기점으로 지난날의 분열에 대한 진지한 반성이 일기 시작했고1990년대에 와서 한국장로교협의회가 구성되고 장로교회들 간의 연합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또 이를 위해 장로교 7개교단 중견목회자들을 중심으로 젊은 목회자협의회가 조직된 일도 있다. 1997년에는 범 합동교단에 속하는 9개의 보수교단이 선 합동, 후 협상이라는 기치 하에서 통합을 논의한 바 있다. 이때도 교단통합이 성사되지는 못했으나 교회연합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다는 점을 암시한다. 20059월에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교단과 개혁교단이 분열된 지 26년 만에 재 합동했다. 그러나 완전한 합동은 되지 못했다. 그러나 연합을 위한 추구는 권장할만한 가치였다.

 

우리는 몇 가지 근거곧 연합은 성경의 명령이라는 점(17:11, 4:2~6)에서연합은 복음중언과 기독교적 가치 실현에 있어서 효과적이라는 점연합은 개혁교회 전통에서 항상 강조되어 왔다는 점그리고 교회연합은 한국교회 쇄신을 위해서도 필요하다는 점에 대해서는 공감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교단간의 완전한 통합은 매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이런 한국의 여러 상황을 고려할 때 이종윤 박사가 제시하는 일 교단 다 체제방식의 연합이 성경적 타당성과 교회사적 실례현실적 가능성을 보여 주는 이상적인 형태로 보인다. 이종윤 박사는 한국장로교회는 하나 될 수 있나라는 논문에서 그리스도께서 여러 갈래로 찢어지지 않는 이상두 개 나 세 개의 교회가 있을 수 없다”(IV.1.2)는 칼빈의 교회관에 근거하여 교회연합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일 교단 다 체제하나(1)의 한국 장로교회()에 속한 서로 다른 교단(체제)’를 제안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일 교단 다 체제는 하나의 교단으로 일원화하되현재 교단이 지니는 각 교단의 특성을 인정하고 치리회의 다양성을 인정해 주는 제도를 의미한다. 그러나 대 국가 사회문제통일문제선교사의 교육 파송 관리신학 교육 문제 등은 일 교단 체제하에 운영한다는 방식이다. 이런 방식은 호주장로교회의 경우와 비교될 수 있다. 호주의 경우 전국 규모의 호주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 of AustraliaPCA)는 매 3년마다 총회를 개최하여 범 교회적인 의안을 처리하지만 실제적인 주요 사안은 각주별로 조직된 주 총회가 독자적으로 처리하고 있다. 그래서 하나의 장로교라는 우산 아래 있으나 각 주별로 교회행정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있다. 바로 이런 체제를 이종윤 박사는 일 교단 다 체제라고 부르고 있다.

 

그는 일 교단 다 체제 방식은 초대교회 때곧 기독교 형성 초기부터 있었던 제도라는 점에서 결코 새로운 제안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 실예가 고린도교회인데고린도교회는 하나의 교회였으나 그 안에는 바울파아볼로파베드로파 등 서로 다른 계파가 있었다. 이것은 고린도교회는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하나의 신앙 토대 위에 아볼로’, ‘바울’, ‘게바(베드로)’의 서로 다른 신앙표현 곧 서로 다른 신학이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즉 초기 기독교 신앙이 정립되기 시작할 때부터 기독교는 한 분 예수를 구주로 믿는 신앙안에서 다양한 신학을 가진 서로 다른 교회공동체(체제)를 형성하였던 것이다.

 

이종윤 박사는 일 교단 다 체제 방식은 신학적 전거가 있을 뿐만 아니라 장로교 교회관에 부합한다고 보고 있다. 특히 이점을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25장을 근거로 설명하고 있다. 칼빈 또한 교회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교리 는 신앙 안에서의 일치(die Einheit im Glauben)를 저해하지 않는 다”(N.l.27)고 말하는데칼빈은 각 교파가 삼위일체 하나님예수 그리스도의 양성론을 수용하고 고백하면각 교파의 독특한 교리해석의 다양성은 일단 인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종윤 박사는 한국장로교회는 사도신경아타나시우스신경칼세돈 신경그리고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같은 신앙을 고백하는 이미 하나의 장로교단이라고 말하고 겸손히 회개하고 신행일치를 통해 정체성올 회복할 때 일 교단 다 체제의 장로교 연합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한다.

 

장로교 100주년을 기념하는 오늘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분열을 통회하고 상처를 치유하고 연합을 추구하는 일일 것이다. 이미 한국장로교총연합회(한장총)2009년 칼빈의 출생일인 710일을 장로교의 날로 선정토록 한 바 있고그해 710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연합과 일치를 주제로 제1회 장로교의 날 행사를 가진 바 있다. 이런 행사도 일 교단 다 체제를 지향하는 연합이었다. 특히 2010710일 제2회 장로교의 날 행사에 서 한장총 대표회장이 공식적으로 일 교단 다 체제 방식의 연합안을 제시하였고임원회는 이를 추진할 특별위원회 조직을 청원하여 총회에서 통과한 바 있다. 이런 점에서 동일한 신앙고백을 공유하는 장로교회가 연합하여 일단 일 교단을 이루고잠정적으로 체제의 다양성을 인정하되 점진적인 조직의 연합과 통일을 추구해가면 분열의 상처를 치유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연합은 오늘의 장로교회가 추구해야 할 우선적인 과제일 것이다. 이런 연합이 이루어진다면 21세기 한국교회 종교개혁이 될 것이다.

 

금년은 한국에서 장로교 총회가 조직된 지 100주년이 된다. 지난 100년을 뒤돌아 보며 한국장로교회가 걸어온 100년의 발자취를 검토하는 일은 내일의 한국교회를 위한 필요한 작업일 것이다. 이 글은 한국장로교회 100년에 대한 역사적 검토1)에 이어 지난 100년의 장로교회의 역사를 신학으로 검토하되, 특히 개혁신학의 입장에서 검토해 보고자 한다.

 

이 글에서는 한국에서의 장로교회의 기원에 대해 기술한 후 신학의 발전을 몇 시기로 나누어 고찰하고자 한다. 흔히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은 청교도적 개혁주의혹은 개혁주의적 정통주의라고 일컬어져 왔다. 이 신학이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한국에 소개된 이 신학이 어떤 발전의 과정을 거쳐 왔는가에 대해 주목하고자 한다.

 

이 글에서 사용된 개혁교회, 개혁신앙, 혹은 개혁주의라는 용어는 16세기 종교개혁을 통해 확립되어 스위스, 화란 스코틀랜드의 개혁파교회 혹은 장로교회를 통해 전수되어 19세기와 20세기 초 미국과 화란교회 신학자들에 의해 보다 정교하게 석명된 신학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고자 한다.2) 이 글에서는 개혁주의와 칼빈주의는 동의어로 보아 상호 교차적으로 사용하였음을 밝혀둔다.

 

1) 필자는 지난 47일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소집된 장로교신학회에서 한국장로교 100주년, 역사적 고찰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장로교회를 역사적으로 조망한 바 있다.

 

2) 개혁교회 혹은 개혁신학에 대해서는 상이한 견해가 있다. 예컨대, John H. Leith는 개혁 신학을 종교개혁 전통을 계승하는 개신교신학으로 이해하여 튜레틴과 하지로 이어지는 미국장로교적 전통과, 신정통주의 입장에 서 있는 윌리엄 브라운(Willian A. Brown, 1865-1943), 그리고 바르트나 니버까지도 포함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John Leith, Introduction to the Reformed Tradition (John Knox Press, 1978), 126-129.

 

1. 한국에서의 장로교회의 기원

 

한국과 장로교회와의 접촉은 1870년대 만주에서 시작되었고 1876년에는 이응찬, 김진기, 이성하, 백홍준 등이 세례 받음으로 첫 장로교 신자가 된다. 곧 서상륜과 김청송이 세례를 받음으로 1883년에는 세례 받은 한국인 장로교 신자는 6명으로 증가된다. 이들의 협력으로 만주와 그 변방 지역에 한국인에 의한 신앙공동체가 형성되는데, 이것이 만주에서의 첫 신앙공동체이자 첫 장로교회였다. 또 일본에서 이수정(李樹廷)은 장로교 선교사를 통해 개종하고 일본의 장로교 목사인 야스까와 토오루(安川亨, ?-1908), 미국북장로교 선교사 녹스(George Knox)와 루미스(Henry Loomis, 1839-1920)와의 접촉을 통해 성경 번역에 기여하게 된다. 이수정은 일본에 유학 온 한국학생들과 교포들에게 전도하여 1882년 말까지 20여명의 신자를 얻었고, 1884년 초에는 도쿄에 최초의 한국인 교회를 설립하게 된다. 교파적으로 말하면 이는 장로교회였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장로교회의 조직은 미국 북장로교회의 파송을 받은 알렌의 입국으로 시작된다. 18849월 알렌의 입국에 이어 이듬해 언더우가가 입국함으로 한국에서 미국북장로교회의 선교가 시작되었다. 이어서 호주빅토리아장로교(1889), 미국남장로교(1893), 캐나다장로교회(1898)가 선교사를 파송하여 4개 장로교 선교부가 한국에서 사역하였다. 이들은 합의에 따라 선교지를 분담하여 사역하던 중 입교자들이 증가하여 여러 곳에 교회가 설립되었다.3)

 

한국에서 장로교 총회가 조직되기까지 몇 가지 과정을 밟아왔는데, 첫 조직은 1889년의 연합공의회였다. 이 회는 당시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했던 미북장로교와 호주장로교 선교부 간의 협의체였다. 그러나 호주선교사 데이비스의 죽음으로 곧 폐지되었다. 그러다가 미국남장로교가 한국선교에 동참하게 되자 1893년에는 선교사공의회가 조직되었다. 이것은 미국 남·북장로교와 호주장로교 선교부 간의 협의체로서 전국교회를 치리하는 상회(上會) 역할을 했다. 19019월에는 선교사와 한국인 대표가 참여하는 조선예수교장로교공의회로 개칭되었다. 이때 회원은 선교사 25, 한국인 장로 3, 조사 6명이었고, 회장은 북장로교회의 스왈론(William Swallen)이었다. 이 장로교공의회는 영어사용위원회(English session)와 한국어사용위원회(Korean session)를 두었다. 장로교공의회는 1901년 중요한 결정을 했는데, 노회설립 방침 의정위원(議定委員) 및 장로교헌법번역위원을 선정하였고, 평양에 신학교를 설립하기로 했다. 신학교 설립건은 마펫(S. Moffett)을 교장으로 위촉하고 그에게 신학교육을 일임했다.

 

한국 전역에 교회가 설립되자 호주와 캐나다장로교 선교부는 즉각적인 노회 설립을 주장한바 있으나 미국남북장로교회는 한국인 목사를 배출하지 못한 상태에서 선교사들만으로 노회 조직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아 반대했다. 그러나 여러 지역에 신자수가 증가하고 다수의 교회가 설립되자 노회조직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된다. 그래서 1906년에 소집된 장로교공의회는 노회조직을 결의하여, 1907917일에는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최초의 노회가 조직되었다. 이 노회가 죠션야소교장로회 노회인데, 이 노회를 보통 독노회’(獨老會)라고 부른다. 회장은 마포삼열(S. H. Moffett, 1864-1939), 부노회장은 방기창(邦基昌, 1851-1911), 서기는 한석진(韓錫晋), 부서기는 송인서, 회개는 이길함(Graham Lee) 목사가 선임되었다. 회원은 한국인 장로 36, 주한 장로교선교사 33, 찬성회원 9명 등 도합 78명이었다. 찬성회원이란 당시 대한성서공회, 기독교서회, YMCA 등에 속해 있던 장로교 계통의 목사들을 의미했다. 노회의 조직과 함께 ‘12개 신조를 신경(信經, Confession of the Faith)으로 채택했는데, 그 내용은 성경무오, 하나님의 주권, 삼위일체, 동정녀 탄생, 인간의 타락, 그리스도의 속죄, 성령, 성례전, 불가항력적 은혜, 부활과 심판 등의 교리를 포함하고 있었다. 이 신경은 인도장로교회가 채택한 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12개 신조와 함께 웨스트민스터 소신앙문답서’(Westminster Shorter Catechism)도 교회가 마땅히 가르쳐야 할 문답서로 채택하였다. 이 노회에서는 처음으로 한국인 목사 7(길선주 방기창 송인서 서경조 양전백 이기풍 한석진)을 배출했다. 당시 한국장로교회에는 785개 처의 교회, 75,968명의 신자, 18,061명의 세례교인이 있었던 것으로 보고되어 있다. 또 목사선교사는 49, 한국인 장로는 47명에 달했다.

 

2회 독로회(1908) 당시 한국인 노회원은 59, 선교사는 30명이었다. 3회 독로회(1909)에는 한국인 회원 85, 선교사 회원 33명이었는데, 이 해에는 다시 8명의 목사를 장립하였다. 5(1911) 독로회는 대구 남문교회에서 개최되었는데, 이 때 독로회 휘하의 7대리회(代理會)를 노회로 승격시키고 총회를 조직하기로 결의하였다. 이 결의에 따라 19111015일 전주성밖교회에서 목사 20, 장로 25명이 모여 전라노회를, 그해 124일 새문안교회에서는 목사 12, 장로 21명이 모여 경충(京忠)노회를 조직했다. 191216일 부산진교회에서는 목사18, 장로 18명이 모여 경상노회를, 128일 평양신학교에서는 목사 28, 장로 96명이 모여 남평안노회를, 215일 선천북교회에서는 목사 26, 장로 15명으로 북평안노회를, 220일 원산 상리교회에서는 목사 14, 장로 16명이 모여 함경노회를 조직함으로서 7개 노회 조직이 완료되었다.

 

191291일 평양 경창문(京昌門) 안에 있는 여성경학원(女聖經學院)에서는 7노회가 파송한 목사 96(한국인 목사 52, 선교사 44), 장로 125, 도합 221명이 모여 장로교 총회를 조직하였다. 이 총회를 죠선야소교 장로회총회’(朝鮮耶蘇敎長老會總會)라고 불렸다. 이날 총회는 이눌서(W D Reynolds) 목사의 사회로 히브리서 10장을 본문으로 장자회(長子會)’라는 제목으로 설교한 후 성찬식을 거행함으로 개회되었다. 이튿날(92) 회의는 평양 서문밖의 신학교로 옮겨 속개하여 임원을 선출했다. 회장에는 언더우드, 부회장 길선주, 서기 한석진, 부서기 김필수, 회계 방위량(William Blair), 부회계 김석창 씨가 각각 선임되었다. 이때로부터 해방될 때까지 한국장로교는 하나의 총회로 남아 있었다.

 

총회가 조직될 당시 장로교회에는, 7개 노회, 134개처의 조직교회, 1,920개처의 미조직교회가 있었고, 한국인 목사 69, 외국인(선교사)목사 77, 장로는 225명에 달했다. 또 세례교인 53,008, 학습교인 26,400, 총신자수는 127,228명에 달했다. 치리회 조직에 있어서 장로교는 감리교 보다 훨씬 앞섰다. 감리교는 1930년에야 비로서 조선감리교란 이름으로 교단조직을 갖추게 되기 때문이다.

 

3) 한국에서 기독교(장로교)를 받아드렸던 초기 개종자들은 일부의 개화 지향적인 엘리트 계층 외에는 하층민이 다수를 점했다. 한국의 천주교의 경우는 양반중심의 공동체로 출발하였으나 조상제사 금지와 신해박해(1791)를 거치면서 차츰 중인층 중심으로 이동하기 시작한다. 조광 교수에 의하면 1784년부터 1791년에 이르는 기간동안 활동했던 권일신을 비롯한 12명의 지도층 인사 가운데 3분지2에 해당하는 이들이 양반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1791년부터 1801년 사이에 활동했던 38명의 지도층 인사들 중 중인계급이 21명으로 55%에 달했으나 양반은 9명으로 24%에 지나지 않았다(조광, “가톨리시즘과 한국문화와의 만남사목107). 양반중심의 구성이 점차 중인계급으로 이동해 갔음을 알 수 있다. 기독교의 경우는 천주교와는 달리 기독교 신앙은 중산층과 하층민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런 점은 선교정책에서도 암시되고 있다. ‘장로교선교공의회1893년에 모인 첫 회합에서 네비우스 정책에 기초한 10가지 선교정책을 채택했는데, 이 문서는 한국에서의 기독교의 전수통로(transmission)에 대한 선교사들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 중심 사상은 제1항에서 명시하듯이 "상류층보다 하류층을 일차적인 전도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었다. 그 구체적인 사례가 모든 종교서적은 한글로 출판한다는 점이었다. 언더우드를 비롯한 초기 선교사들도 양반층보다는 전도가 비교적 용이한 중,하층민에 우선권을 두었다[김인수,한국기독교회의 역사(장로회신학대학 출판부,1998), 223]. 이것은 당시의 보편화된 유가적(儒家的) 가치 체계에서 불가피한 모색이었을 것이다. 기독교 복음에 대해서 상류층보다는 중, 하층민이 보다 적극적인 수용자였는 사실은 막스 웨버(Max Weber, 1864-1920)에 의해 연구된 바 있다. 이 점은 한국에서도 동일했다.

 

2. 초기 한국장로교회의 신학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을 시대적으로 구분할 때 1920년대까지의 기간을 초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까지의 한국 신학은 선교사들의 신학이었고, 선교사들이 신학교육과 연구와 집필 등 신학활동을 주도했다. 한국장로교회의 첫 신학교육기관인 평양신학교는 1901년 시작되지만 신학교육은 선교사들이 주도하였다. 첫 한국인 교수인 남궁혁南宮爀, 1882-1950) 박사가 교수로 취임한 때는 1927년이었다. 1928년에 이성휘(李聖輝, 1889-1950)가 교수로 참여했고, 박형룡(朴亨龍, 1897-1978)1930년부터 교수로 참여하게 된다. 송창근, 김재준이 귀국했을 때는 1933년이었다. 그래서 한국인들에 의한 구체적인 신학 논구는 1930년대부터 시작된다. 이런 점에서 1920년대까지의 신학을 초기 장로교회의 신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초기 한국교회의 신학이란 주로 선교사들의 신학을 말한다.

 

평양신학교 교지 형식으로 발행되었던 신학지남1918년 창간되지만, 창간 때부터 1920년까지는 왕길지(Gelson Engel) 선교사가, 1921년부터 1927년까지는 배위량(W M Baird)선교사가 편집인으로 일했다. 한국인 남궁혁이 편집인으로 활동하게 된 때는 1928년이었다. 1930년 이전까지는 선교사들이 주된 집필진이었다. 이처럼 선교사들이 한국의 신학교육과 신학 논구를 주도하였으므로 초기 한국교회의 신학이란 바로 선교사들의 신학을 의미했다. 이런 점에서 초기 한국 교회의 신학은 한국신학’(Korean theology)이라기보다는 한국에서의 신학’(Theology in Korea)이었을 뿐이다.

 

당시 평양신학교는 주한 네 장로교 선교부 연합으로 운영되지만 사실은 미국북장로교 선교부가 신학교육을 주도하였다. 북장로교 선교사 중에서도 1924년 라부열(Stacy L. Robert)이 제2대 교장으로 취임하기 이전까지는 이길함(Graham Lee), 소안론(W L Swallen), 배위량(W B Baird), 곽안련(C A Clark) 등 메코믹신학교 출신들이 신학교육을 주도하였다.4) 해방 전까지 내한한 약 1,500여명의 선교사 가운데 약 70%가 미국 국적의 선교사들이었고,5) 내한한 장로교 선교사 671명중 76%에 해당하는 513명이 미국 선교사들이었다.6) 이 점만 보더라도 미국장로교회가 한국교회, 특히 한국장로교회에 큰 영향을 끼첬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초기 한국교회를 주도했던 선교사들의 신학은 어떻했는가? 이 점에 대해서는 상이한 평가가 있어왔다. 초기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에 대해, ‘보수주의 신학,’ ‘철저한 근본주의,’ ‘정통적 복음주의,’ 혹은 경건주의적 복음주의,’ ‘청교도 개혁주의 정통신학,’7)등 다양한 용어가 사용되었다. 신복윤는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전통은 유럽의 칼빈주의와 영미의 청교도 사상이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에 구현된 신학이라고 보아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을 청교도적 개혁주의 신학이라고 평가했다.8) 비록 한국교회 초기 신학에 대해 근본주의, 정통주의, 경건주의, 청교도주의, 그리고 복음주의 등의 용어를 사용했지만 공통적인 특징은 자유주의 신학을 배격하는 보수적 신학이었다는 점이다.

 

1920년대 이전에 내한하였던 선교사들의 신학은 대체적으로 보수적이며 복음적이었고, 전통적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WCF)에 준하는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신봉하는 자들이었다.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 총무였던 브라운(A. J. Brown)의 논평은 이 점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그는 1911년 이전의 주한 선교사들의 신학은 청교도적인 보수주의 신학이었다고 평가했다.9) 이점은 1890년에 내한한 마포삼열(Samuel A. Moffett, 1864-1939)의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그는 1909년 첫 25년간(1884-1909)의 한국선교를 회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선교부와 교회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투철한 신념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로부터 구원받는다는 복음의 메시지를 믿는 열성적인 복음정신으로 특징 지워질 수 있다.”10) 그로부터 다시 25년이 지난 1934년 마포삼열은 다시 이렇게 말했다. “오늘 어떤 신 신학자들은 나를 너무 보수적이라고 비난한다. ... 근래에 신 신학이니, 신 복음이니 하는 말을 하며 다니는 사람이 있는 모양인데 우리는 그러한 인물을 삼가야 한다. 조선에 있는 선교사들이 다 죽는다든지, 혹은 귀국하든지 조선교회 형제여 40년 전에 전파한 그 복음을 그대로 전하자.” 한국에서 활동했던 특출한 선교사였던 마포삼열의 이 두 가지 진술은 한국교회의 초기 신학이 보수주의 혹은 복음주의적이었음을 증거하고 있다. 동시에 1930년대 이후 한국교회에는 새로운 신학운동이 일어나고 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신복윤는 “1885년 미북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의 내한 이래 1938년까지의 한국교회는 매우 강한 개혁주의적 입장을 견지했다고 평했지만, 당시 선교사들의 신학을 강한 개혁주의적 입장으로 보기에는 여러 가지로 미흡하다. 왜냐하면 칼빈주의나 개혁주의라는 용어 자체가 1930년대 이전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실제로 박윤선은 평양신학교의 신학을 언급하면서 자신은 재학 중에 개혁주의 혹은 칼빈주의라는 말을 거의 들어보지 못했다고 했다. 그가 재학한 기간이 1930년대였음을 고려해 볼 때 1920년대는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장로교의 대표적인 신학잡지인 신학지남에서 칼빈신학이 처음 논구된 것은 1934년 남궁혁, 이눌서에 의해서였고, ‘칼빈주의에 관한 논설이 처음 게재된 때는 1937년 함일돈(Froyd Hamilton) 선교사에 의해서였다. 함일돈은 이 글에서 칼빈주의라는 신학체계의 초보를 소개하고 있을 뿐이다.11) 박형룡 박사가 로라인 뵈트너(L. Boethner)Reformed View of Predestination칼빈주의 예정론이란 제목으로 역간한 때는 1937년이었다. 이 책이 칼빈주의 신학에 관한 최초의 번역서였다.12) 비록 박형룡이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에 대해 말하면서 웨스트민스터표준에 구현된 영미장로교회의 청교도 개혁주의 신학이 한국에 전래되고 성장했다.”라고 말하고 있지만,13) 이것은 1976년의 진술로서 후대의 해석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초기 한국교회의 신학을 헤아려 볼 수 있는 단서는 1907년 독노회 조직 때 채택된 교리 표준이다. 독노회는 ‘12개 신조를 채택했는데, 이 신조는 영국의 장로교회가 작성한 것으로 1904년 인도장로교회가 채택했던 동일한 신조를 단지 서문만 고쳐 그대로 채택했다. 이 신조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 유일신 하나님과 그 성품,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사역, 인간의 창조, 인간의 타락, 그리스도의 속죄사역, 성령의 역사, 선택과 수양, 성례, 신자의 의무, 최후 심판 등 12가지 기본교리가 간명하게 언급되어 있다. 선교사들은 한국교회의 독자적인 신앙고백서를 제정하려고 시도하지 않고 인도 장로교회가 채택한 동일한 고백을 갖게 함으로서 피선교국의 장로교회 간의 복음주의적 연대를 의도한 것으로 보인다. 선교사들이 개혁주의나 개혁주의적인 장로교 전통을 세우고자 했다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고집했을 것이다. 미국장로교회는 불과 4년 전인 1903년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수정 채택했으나 이 고백서를 한국장로교회에 소개하지 않았다. 단지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와 대요리문답은 성경을 밝히 해설한 책으로 인정한 것인즉 우리 교회와 신학교에서 마땅히 가르칠 것이라고 했을 뿐 교회의 공고백으로 채택하지는 않았다. 사실 이 때에는 웨스트민스터 교리표준서가 한국어로 번역도 되지 않았을 때였으므로 이 진술마저도 선언적 의미만 지닌다.

 

백낙준은 12개 신조가 철저한 칼빈주의적 경향(strong calvinistic trend)을 지닌 것이라고 했다.14) 간하배(Harvie Conn)는 이를 평가 없이 인용하고 있으나,15) 12개 신조는 칼빈주의적 이라고 할 수 있지만 칼빈주의적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12개 신조는 단지 기독교의 기본 교리를 말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런 점에서 12개 신조는 개혁신앙의 특색도 없지 않으나 근본주의와 정통주의, 보수주의와 복음주의적인 성격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12개 신조가 기본교리를 말하는 단문으로 되어 있어 불가피한 결과라고 할 수 있지만, 김영재의 지적처럼 사실은 개혁주의적 내용이 희석화 되어 있다.16) 12개 신조에는 칼빈주의에서 중요하게 취급되지만 복음주의자들에 의해 공격을 받았던 이중예정에 관한 고백이 없고17) 무엇보다도 근본주의와 구별되는 문화적 소명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이런 점을 고려해 볼 때 12개 신조는 철저한 칼빈주의적고백으로 규정할 수 없고 자유주의가 아닌 한 수용할 수 있는 기본교리를 표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해 볼 때 초기 한국교회 신학전통을 개혁주의로 간주하기에는 여러 가지로 미흡하다. 간하배가 말한 바처럼 한국에 소개된 초기 장로교회의 신학을 보수적이고 복음적인 기독교”18) 라고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할 것이다. 이점은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부가 1905년 교파교회를 고집하지 않고 연합하여 하나의 교회, 조선 그리스도의 교회를 조직하자고 합의했던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즉 장로교 선교사들은 한국장로교가 반드시 엄격한 개혁주의 신학을 견지해야 한다고 고집하지 않았던 것이다.

 

한국인들은 초기 선교사들의 보수적인 신학을 보다 극단적으로 수용하여 근본주의적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었다. 김양선에 의하면 길선주(1869-1935)는 선교사들 보다 더 극단적인 보수주의였다고 지적했다.19) 극단적인 보수지향적 신앙이해는 자유주의 신학을 비판하고 거부하는 데는 철저했으나 개혁주의 전통과는 다른 근본주의나, 경건주의, 혹은 세대주의 신학에 대해서는 관용적이었다. 이런 신학이 성경의 권위, 축자영감설을 지지한다는 이유때문이었다. 그 결과 세상과 문화에 대해 분리주의적 입장을 보여주었다. 다시 말하면 초기 한국교회의 신학은 보수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근본주의적이고 세대주의적인 성격을 띄게 된 것이다. 이런 경향은 그 이후 시대에도 동일했다.

 

세대주의적인 성격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경우가 종말론인데, 한국 장로교회 지도자들은 대체적으로 전천년설을 신봉했다. 일제하의 신사참배 강요라는 독특한 현실에서 전천년설(前千年說)을 받아드린 것으로 보인다. 이 전천년설은 상당한 정도로 세대주의 신학으로 채색된 것이었다.20) 무천년설은 어거스틴으로부터 시작되어 개혁주의 신학전통에서 다수 의견이었고, 바빙크를 비롯한 대부분의 화란 개혁신학자들도 무천년설을 지지했다. 웨스트민스터신학교나 칼빈신학교 교수들 사이에도 무천년설이 지배적이지만, 박형룡이나 박윤선까지도 전천년설을 따랐다.21)

 

한국장로교회에 스며든 세대주의적 경향성을 지적한 인물은 간하배, 한부선(Bruce F. Hunt), 신복윤, 김영재 등인데, 간하배는 서구로부터 선교사들을 통해 온건한 형태의 세대주의가 유입되었다.”고 지적했다. 일반적으로 한국에 소개된 세대주의는 초기형태의 세대주의였다.22) 세대주의 신학의 영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경우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개념과 단순한 성경해석법이었다.23) 그 결과 모든 예언적 약속에 대한 문자적 해석과 문자적 성취라는 세대주의적 원리가 개혁주의적 이해가 결여된 초기 한국교회에 쉬 수용될 수 있었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것은 세대주의 신학이 가져온 부정적인 결과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신복윤는 한국장로교회는 처음부터 세대주의의 영향을 받아왔는데, “세대주의가 곧 역사적 장로교인 것처럼 혼동하고, 세대주의와 개혁주의의 차이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영향을 받았다”24)고 지적했다. 이렇게 볼 때 초기 한국교회의 신학은 개혁주의적인 특징이 있지만 보수주의 신학 혹은 넓은 의미의 복음주의적 신학이라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4) 박용규,한국기독교회사,1(생명의 말씀사, 2004), 471.

 

5) 김승태, 박혜진 편, 내한 선교사 총람(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4) 참고,

 

6) Sang Gyoo Lee, To Korea with Love: Australian Presbyterian Mission Work in Korea, 1889-1941 (Th. D. Dissertation, Australian College of Theology, 1996), 325.

 

7) 박아론는 한국교회 신학적 전통을 보수주의’(신학지남, 1976년 가을호, 권두언), ‘청교도 개혁주의 정통신학’(보수신학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1985, 195)이라고 불렀다. ‘청교도 개혁주의 정통신학이란 좌로는 성경영감을 부인하는 인본주의적 자유주의에 치우치지 않고, 우로는 방언, 신유, 묵시, 예언 등을 일삼는 기도원적 은사주의에 치우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생활의 경건이라는 두 바퀴를 가지고 성경 66권의 궤도를 굴러가는 신학이라고 정의했다.

 

8) 신복윤, “한국개혁주의 신학의 어제와 오늘과 내일,” 신학정론101(1992. 3), 115.

 

9) A. J. Brown, The Mastery of the Far East (Scribners, 1919), 540. 아더 브라운은 이렇게 말했다. “개국 이후 첫 25년간 내한한 선교사는 전형적인 푸리탄형의 선교사였다. 이들은 1세기전 그들의 조상들이 뉴 잉글랜드에서처럼 안식일을 지켰으며 땐스, 술이나 담배, 그리고 카드놀이에 기독교 신자들이 빠져서는 안 될 죄라고 보았다. 신학과 성경 비평에 대해서는 그들은 철저히 보수적이었으며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전천년설을 아주 중요한 진리로 생각했다. 고등비평과 자유주의 신학은 위험한 이단으로 간주했다. 미국과 대영제국의 대부분의 복음주의 교회에 있어서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는 평화롭게 공존하고 협력하고 있으나, 한국에서 현대적 견해’(the modern view)를 가진 소수의 인사들은 험난한 길을 걸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특히 장로교선교부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Harvie M. Conn, "Studies in the Theology of the Korean Presbyterian Church," Westminster Theological Journal, Vol. 29, No. 1 (November, 1966), 26-27에서 중인.

 

10) Harvie M. Conn, 27.

 

11) 함일돈, “칼빈주의,” 신학지남194, 5(1937), 19-23 참고.

 

12) 이상규, 한국에서의 칼빈연구(개혁주의신행협회, 1985), 18.

 

13) 박형룡,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 신학지남43(1976, 가을), 11.

 

14) 백낙준, 한국개신교사(연세대학교출판부, 1973), 409. George Paik, The History of Protestant Missions in Korea, 1832-1910 (Yonsei University Press, 1980), 389.

 

15) Harvie M. Conn, 31.

 

16) 김영재, 교회와 신앙고백, 209-211.

 

17) 김영재, 한국교회사(개혁주의신행협회, 1993), 148.

 

18) Harvie M. Conn, 26, 31. 이 점에 대해서는 김영재, 김명혁도 의견을 같이 한다. 김영재, 142.

 

19) 김양선, 한국기독교해방십년사, 176-177.

 

20) 김영재, 한국교회사, 153.

 

21) 박형룡, 박형룡저작전집, VII, 278. 차영배는 박형룡과 박윤선이 미국 개혁주의 신학교에서 무천년설이 지배적임에도 불구하고 전천년설을 주장한 것은 한국적 단순성으로 볼 수도 있지만, 맹목적인 추종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해야 한다고 했다. 차영배, “헤르만 바빙크의 개혁신학과 한국신학,” 개혁신학, 한국교회, 한국신학(도서출판 대학촌, 1991), 75.

 

22) H. Conn, 51-52.

 

23) H. Conn, 52.

 

24) 신복윤, 136.

3. 1930년대의 상황과 진보적 신학의 대두

 

1930년대 한국장로교회에는 두 가지 변화가 나타나는데, 첫째는 한국인들에 대한 신학논구가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감리교의 경우는 이보다 앞서지만 1930년대부터 한국인의 신학 활동이 구체화 되었고, 연구와 집필, 신학교육에도 참여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한국인에 의한 주체적 신학연구의 시작이자 선교사 중심의 신학으로부터의 독립이기도 했다. 그래서 유동식은 1930년대(1929-1939)한국신학의 정초기라고 불렀다.25) 한국인에 의한 신학 연구와 저술의 첫 결실은 1929년에 출판된 백낙준의 한국개신교사(The History of the Protestant Missions in Korea, 1832-1910)였다. 박형룡의 기독교 근대 신학난제선평이 출판된 때는 1935년이었다. 감리교의 경우, 정경옥의 기독교신학개론이 출판된 때는 4년 뒤인 1939년이었다. 1930년대 장로교의 남궁혁, 이성휘, 백낙준, 박형룡, 송창근, 채필근, 김재준, 윤인구 등이 1930년대 신학자로 활동하게 된다.

 

두 번째 변화는 이전의 신학과는 다른 새로운 신학운동, 다른 전통이 대두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그 이후에도 보수주의 신학이 한국교회 신학의 주류를 형성하지만 1930년대부터 보수주의 아성이 공격받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1930년을 전후하여 한국교회에는 어떤 신학적 변화가 있었는가? 이 변화는 3가지로 정리될 수 있는데, 첫째는 진보적 신학의 대두였다. 신비주의 운동과 일본 무교회사상의 유입 또한 이 시대의 신학적 변화였다.

 

신비주의 운동은 1920년대의 경제적 시련과 일제의 정치적 압제 하에서 현실을 초극하려는 탈 역사적 신앙의 내면화 현상이 빚은 결과였다. 역사 현실이 암담하면 암담할수록 현실 도피적 주관주의나 신비주의가 창궐한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1930년대 한국교회에는 신비주의만이 아니라 신비적 열광주의, 거짓 계시운동(僞經運動)이 일어났다. 신비주의적 종파운동이나 위경운동의 대두는 한국교회의 신학적 미성숙을 반영했다. 당시 한국교회는 서양기독교전통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고, 주관적 신령주의의 폐해를 성찰할 수 있는 신학적 소양이 부족했다. 이것이 입신, 접신, 예언, 분별없는 방언 등 신령주의적 현상이 일어날 수 있는 토양이었다.한국선교연감(The Korean Mission Year Book for 1932)은 당시 한국교회의 상황에 깊은 우려를 표명한 바 있다.26)

 

1930년대에 대두한 무교회주의(無敎會主義)는 일본과의 지리적 근접성 때문에 용이하게 수용되었다.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였으므로 일본의 토착적 기독교인 무교회주의와의 접촉은 용이했다. 한국어 신학서적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현실에서 무교회주의 인사들의 저술이나 성경주석은 간단없이 수용되었다. 그래서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를 비롯한 쯔가모토 토라지(塚本虎二), 구로사키 코우키치(黑崎辛吉), 난바라 시게루(南原繫), 야나이하라 타다오(失內原 忠雄), 이토 유우시(伊藤祐之), 마사이께 메구무(政池仁), 모리모토 케이조(森本慶三), 스즈키 수케요시(鈴木弼美), 후지사와 타케요시(藤澤武義) 등의 작품이 널리 전파되었다. 심지어는 주기철 목사도 쯔가모토의 주기도문에 관한 연구인 硏究를 토대로 주기도문을 강해했을 정도였고,27) 손양원 목사도 무교회주의자들의 서적을 탐독하였다. 손양원은 이들의 저술을 기초로 성경공부를 지도하여 경남노회에서 논란을 빗은 일도 있었다.28) 한국에 무교회주의를 전파한 대표적인 인물은 김교신(金敎臣, 1901-1945)이었다. 그는 다른 다섯 동료들과 함께 19277성서조선(聖書朝鮮)을 창간하고 무교회 신앙을 전파했다.

 

1930년대 상황에 있어서 이 글에서 특히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신학의 변화, 곧 진보신학의 대두였다.29) 진보적 신학 운동은 한국교회의 신학적 자유를 선언하면서 서양 선교사들이 이식해 준 신학으로부터의 단절을 주장했다. 따라서 보수주의 신학과의 대립은 불가피했다. 이 점은 선교사 중심의 신학에서 한국인에 의한 신학적 논구가 시작되었음을 의미했다.

 

보수신학과 성격을 달리하는 신학적인 문제들이 1930년 이전에도 대두된 바 있다. 이를테면 1916년 황해도에서 김장호(金壯鎬)목사가 성경해석상의 문제로 물의를 일으킨 일이 있었고,30) 1925년에는 선교사 게일(Gale, 奇一)이 의역본(意譯本) 성경이 문제시 된 일도 있었다. 1926년에는 소위 서고도 사건이 있었다. 캐나다연합교회 선교사인 서고도(William Scott)는 함흥에서 개최된 사경회에서 성서비평학을 용납했기 때문에 당시 한국인 목회자들과 논쟁한 일이 있었다. 그가 성경에는 역사적, 지리적 오류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성경 무오설에 도전했을 때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김관식, 조희염 등은 이에 동조했다. 함흥지역이 캐나다 연합교회의 선교구역이었기 때문에 타 지역에 비해 진보적 성향이 강했다.

 

그러나 미국 북장로교의 영향 하에 있는 지역에서는 1930년 이전까지는 이런 문제가 제기되지 않았다. 말하자면 이때까지만 해도 진보적 신학 운동이란 부분적이며 지역적이었다. 그러나 캐나다연합교회의 선교지역인 함경도를 중심한 자유주의적인 경향은 1930년대 중반 이후 전국적인 문제로 대두된 것이다.31)

 

1930년 중반기 이후 한국교회 신학에 영향을 준 것은 미국교회의 신학적 논쟁과 그 여파라고 할 수 있다. 미국 프린스톤신학교는 1812년 설립된 이래 100여년 간 북장로교회 뿐만 아니라, 미국 전역에 있어서 유일한 보수주의 신학교였으나 1929년 교수진이 개편되어 점차 보수주의 신학에서 이탈하였다. 이렇게 되자 메이첸(J. G. Machen, 1881-1937)을 비롯한 보수주의 신학자들은 프린스톤을 떠나 필라델피아에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설립했다. 이것은 브릭스(Briggs) 사건이나 오번선언(Auburn Affirration, 1924) 등에 연류된 미국교회의 신학적 변화를 반영한 것이었다. 1930년 이후의 한국교회의 자유주의 신학적 기류는 주로 미국교회의 영향 하에서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32)

 

성경관의 변화는 신학적 변화를 보여주는 가장 분명한 증표인데, 1930년대에 와서 성경관의 변화가 뚜렷이 나타났다. 완전 영감설(完全靈感說)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고, 성경 비평학이 도입되었다. 서울 남대문교회 김영주(金英珠) 목사는 모세의 창세기 기록설을 부인했고(1934), 함북의 성진중앙교회 김춘배(金春培) 목사는 고린도전서 1433-34절의 해석과 관련하여 여권(女權) 문제를 제기하였다(1934). 또 아빙돈 단권성경주석사건(1935)을 중심으로 신학적 견해차가 분명하게 노정되었다.

 

1934년에 모였던 장로교 제23회 총회에서는 보수주의와 자유주의와의 대립이 분명히 노정되었다. 이것은 한국에서의 진보적 신학의 실재를 알리는 첫 신호였다. 이때 문제가 된 사건은 창세기 저자 문제와 교회에서의 여성의 위치에 관한 것이었다. 김양선은 1934년 장로교 제23회 총회에 제소된 창세기 저자문제와 여권문제를 가리켜 전 교회가 문제 삼은 성경의 고등비평과 자유주의 신학에 의한 최초의 사건이라고 평가했다.33)

 

창세기 저자문제는 김영주의 모세의 창세기 저작 부인에 대한 강병주(姜炳周) 목사의 문의에서 비롯된 사건으로서, 이 문제는 결국 본문비평의 문제였다. 강병주의 제소에 대해 총회는 평양신학교 교장 라부열(Stacy L. Roberts)을 위원장으로, 박형룡을 서기로 연구위원회를 구성했는데, 총회는 다음과 같은 조사보고서를 채택하였다.

 

창세기가 모세의 저작이 아니라고 하는 반대론은 근대의 파괴적 성경 비평가들이 주장하는 이론인바 그들은 과연 창세기의 모세 저작을 부인하는데 멎지않고, 오경전부를 모세의 저작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모세시대로부터 여러 세기 후대 어떤 인물들이 기록한 위조문서로 돌립니다. 또 그들은 오경뿐 아니라, 구약의 다른 여러 책과 신약 여러 책을 후대인의 위조문서도 인정하며 그 기록의 내용에 신화의 고담과 미신과 허설과 각종 오류가 있다고 지적하여 냄으로써 성경 대부분의 파괴를 도모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조선 장로교회 안에서 창세기를 모세의 저작이 아니라고 가르치는 목사들은 창세기만이 아니라 오경 전부 내지 신구약 성경 대부분의 파괴를 도모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중략) 따라서 성경의 권위와 그리스도의 권위도 무시하며 능욕하는 사람이니 ,구약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니 신앙과 본문에 대하여 정확 무오한 유일한 법칙이니라’(조선 예수교 장로회 신조 21)고 믿고 가르치는 우리 장로교회는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우리 교회 제1조를 위반하는 자이므로, 우리 교회의 교역자됨을 거절함이 가합니다.34)

 

김영주 목사는 이 보고서를 받아드리고, 자신이 주장을 취소함으로 일단락되었지만 초기 한국교회 신학적 전통은 새로운 도전 앞에 직면하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1934년 장로교 제23회 총회에서 제기된 김춘배의 교회에의 여성의 위치에 관한 문제 또한 본문비평의 문제였다. 김춘배는 <기독신보>(基督申報) 977호에 장로교 총회에 올리는 말씀이란 제목의 글 여권문제(女權問題)’라는 항에서 여자는 조용하라. 여자는 가르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오천년 전의 일개 지방교회의 교훈과 풍습이요 만고불변의 진리는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고린도전서 14:33-34까지의 성경해석에 관한 문제였다. 김춘배 목사의 주장은 성경의 권위와 한계를 시사하는 것이었고 교회 안에서의 여권 신장을 의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총회는 연구위원을 선정하여 앞서 말한 창세기 저작권 문제와 더불어 이 문제를 연구 보고 케 했는데, 1935년 제24회 총회에서 다음과 같은 요지의 내용을 발표되었다.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와 디모데전서에서 여자의 교회의 교권을 불허한 말씀은 2천년전의 한 지방교회의 교훈과 풍습을 의미한 것이 아니라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 바울은 34절 하반에 너희 율법에 이른 것과 같이 복종할 것이요하여 여자에게 교권을 불허하는 규율의 성경적 근거를 지시하였으니 그것은 창세기 16절에 여자는 남자의 주관한 바 되리라 한 말씀이 여자의 종속적 지위를 의미하는 말씀임을 개설함이었습니다. 이렇게 여자는 남자에게 복종하기로 성경에 이미 명령되었으니, 남자를 포함하는 교회 위에 교권을 가지지 못할 것은 불문가지입니다. ... 성경의 파괴적 비평을 가르치는 교역자들과 성경을 시대사조에 맞도록 자유롭게 해석하는 교역자들은 우리 교회 교역계에서 제외하기 위하여, 총회는 각 노회에 명령하여 교역자의 시취문답(試取問答)을 엄밀히 하여 조금이라도 파괴적 비평이나 자유주의적 해석방법의 감화를 받은 자는 임직을 거절케 할 것이오며, 이미 임직을 받은 교역자가 그런 교훈을 하거든 노회는 그 교역자를 권징조례 642, 43조에 의하여 처리케 할 것입니다.35)

 

24회 총회는 이 보고를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김춘배 목사는 총회의 대세에 뜻을 굽혀, “성경을 해석함이 아니었고만약 그 문구가 성경의 권위와 신성을 파괴하고 교회의 피해가 급()할 염려가 있다면 책임의 중대함을 감하고 취소하기를 주저치 않는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함으로 이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아빙돈단권성경주석(Abigdon Bible Commentary)도 마찬가지 결과를 가져왔다. 1935년 총회에서는 당시 감리교의 유형기의 편집으로 번역 간행된 아빙돈 단권주석은 1930년 미국 감리교 출판사인 아빙돈사가 발간했던 것으로 미국, 영국, 카나다, 호주 등의 성경학자 66인이 공동집필한 것이었는데 한국감리교회가 희년기념으로 1934년에 출판한 것이었다. 이 주석의 한역자들은 대부분 감리교인들이었으나 장로교인 중에도 채필근, 김현근, 문재린, 김명선, 한경직, 윤인구, 김재준, 송창근 등의 목사들이 번역에 참가하였다. 이 주석은 성경의 역사적 비평을 수용한 진보적 주석이었으므로 장로교 목사가 번역에 참여했다는 사실만으로 문제시 된 것이다.36)

 

길선주 목사는 그 주석이 자유주의 신학자들에 의해 집필된 것임을 지적하고 번역에 참여한 장로교 목사들에게 엄중한 책임규명을 하므로 후일의 경계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진보적 신학은 추호도 용납할 수 없다는 태도였다. 그래서 1935년 제24회 장로교 총회에서 이 문제를 제소하였고, 총회는 길선주 목사의 주장을 받아들여 다음과 같이 결의했다.

 

신생사 발행 성경주역에 대해서는 그것이 우리 장로교회의 교리에 위배되는 점이 많으므로 장로교회로서는 구매치 않을 것이며 동 주석을 집필한 본 장로교 교역자에게는 소관 교회로 하여금 사실을 심사케 한 후 그들로 하여금 집필의 시말을 기관지를 통하여 표명케 할 것이다.

 

채필근 목사는 집필의 과오를 사과하였으나, 송창근, 김재준, 한경식 등은 신학의 자유를 억압하려는 총회의 독단에 응할 수 없다 하여 사과하지 않았다. 이것은 조선예수교 장로회의 신학을 이끌고 있던 박형룡의 신학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후에 극히 형식적인 3인 연서의 성명서37)를 신학지남에 발표하므로 일단락 되었다. 이런 신학적 대립의 과정에서 박형룡은 보수주의 신학의 대변자로, 김재준은 진보신학의 중심인물로 각인되기 시작했고, 양자 간의 대립은 그 이후 계속되었다.

 

이상과 같은 장로교 총회 차원에서 제기된 문제들은 성경관의 문제였다고 볼 수 있다. 성경의 절대적 권위와 완전 영감설은 한국장로교회가 서 있는 양보할 수 없는 기초였다. 문제는 이런 신학적 토론의 과정에서 한국교회의 보수주의는 보다 방어적 성격을 뛴 근본주의적 특성을 지니게 된 것이다. 1930년대 이후 점차 대두되던 이런 신학운동은 총회 차원의 결정이나 사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 후에도 계속 발전되어 장로교 안에는 자연히 보수와 진보의 경계선이 뚜렷해졌다.

 

25) 유동식, 한국 신학의 광맥, 133.

26) 신비주의적 종파운동에 대해 다음과 같은 우려를 표명했다. “현재 한국교회에는 자신들이야 말로 참 예언자라 자처하는 남녀의 해괴한 일군(一群)이 있다. 교회가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를 식별하는 슬기가 없어 비통할 따름이다. 영화(靈化)운동이 진행되고 있지만, 지적인 신앙보다는 파타티시즘에 기우는 경향이 너무 많다. 어떤 이는 자신을 그리스도라 칭하고 한 여인은 자신이 새 주라 주장한다. 우리는 열광적 신앙에 빠지지 않도록 지적(知的) 신앙을 함양하지 않으면 안 된다.”

 

27) 쯔가모토 트라지(1885. 8. 2-1973. 9. 9)는 무교회파의 전도자이자 신약성경 연구가였다. 후쿠오까현에서 출생한 그는 슈유관 제일고등학교를 거쳐 동경제국대학 법과에 재학 중인 1909년 우찌무라 간조에게 사사했다. 농상무성에서 근무한 바 있으나, 1919년부터는 오직 성서 연구에 전념하였고, 1939년에는 우찌무라로부터 독립해 독자적인 집회를 시작했다. 1932년에는 성서지식사를 창립했고, 1940년에는 성서 지식을 창간하여 1973년까지 발행했다. 그의 18권의 저작 전집이 남아 있다. 주기철은 종교교육통신3(1931. 1. 31)에서 제14(1932. 2. 25)까지 12회에 걸쳐 쯔가모토 트라지의 주기도문 강해를 주 대본으로 하여 한국 현실에 맞게 소개한 바 있다.

 

28) 이상규, “해방 후 손양원의 생애와 활동,” 한국기독교와 역사35(2011. 9), 223,

 

29) 이때의 신학을 흔히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말하지만 그 주장이나 학맥(學脈)으로 보면 종래의 보수적 해석과 입장을 달리했을 뿐이며, 굳이 말한다면 신정통주의 신학에 가깝다. 이 신학을 보수적 신학에 대한 상대적 개념으로 보아 이 글에서는 진보적 신학으로 기술하였다.

 

30) 김장호(金庄鎬, 1881-?)는 평양신학교 제7(1914) 졸업생으로 황해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캐나다 선교사의 영향으로 자유주의적 견해를 가진 그는 공개적으로 성경의 기적을 부인하였다. 그는 출애굽기의 홍해를 건넌 사건(渡江)을 기적으로 믿지 않았다. 그는 홍해 도강을 밀물과 썰물의 예로 설명하면서 간만의 차를 이용한 도강이라고 해석하여 초자연적 이적을 부인했다. 또 오병이어(五餠二魚) 사건은 기적이 아니라고 보았다. 한 소년이 예수님께 오병이어를 드리는 것을 보고 각자 준비해 온 도시락을 먹었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한국교회에서 처음으로 자유주의적으로 성경을 해석했던 그는 1918년 제명되었다.

 

31) 1930년대 한국에서 제기된 신학을 흔히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말하지만 내용이나 학맥(學脈)으로 보면 신정통주의 신학에 가깝다. 이때의 신학은 1930년대 이전의 보수적 신학에 대한 상대적 도전이었으므로 차라리 진보적 신학이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한 표현일 것이다.

 

32) 하비 콘는 1930년대 이후의 자유주의 신학의 유입요인을 다음의 4가지로 설명한 바 있다. 1. 캐나다 연합교회 선교부를 중심으로 자유주의적 선교사인 서고도(W. Scott), 프레지어(Frazier) 등의 영향, 2. 미국 북장로교회의 신학적 변화와 자유주의 신학적 영향, 3. 일제의 조선통치 기간 중의 일본을 통한 바르트(K. Barth), 부른너(E. Brunner) 등의 자유주의 사상의 유입, 4. 초기 선교사들의 선교지역 분할정책의 조정으로 일부 지역이 자유주의 신학의 성역화가 된 점이 그것이다.

 

33) 김양선, 178.

 

34) 김양선, 180-181.

 

35) 김양선, 184.

 

36) 이 주석에 대해 박형룡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동서(同書)는 성경을 파괴적 고등비평의 원리에 의해서 해석하였으며 계시의 역사를 종교진화론의 선입견을 가지고 고찰하였다. 그러므로 성경 제권의 전통적 작가와 연계를 의문 혹은 부인하며 도처에서 후인의 가필을 지적하고 경험에 의하였다는 것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성경에 기재되어 있는 이적의 다수는 부인하거나 혹은 자연론의 원리로 해석하여 그 허황함을 지적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처녀탄생을 부인하고 그의 신성을 의문하였으며 그의 지적은 제한되어 있어 구약 어떤 책들의 저자와 역사적 사실에 대하여 그릇된 교훈을 하셨다는 것, 그의 메시야 의식은 가이샤라 빌립보에서의 신학임에도 불구하고 십자가는 본래 중심에서 나오는 통회의 방법으로, 그리하여 사죄를 얻게 하는 재료로만 여겼던 것(도덕적 감화의 속죄론)이라는 것을 역설하였다. 예수의 육체적 부활을 부인하고 육체적 부활의 관념은 유대인의 묵시문학에 의하여 최초로 소개되었다는 것, 천국은 유형한 것이 아니요, 개인의 선한 생활과 사회의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할 뿐이라는 것을 주장하였다. 이 밖에도 정통교리에 반대하는 자유사상의 진술을 얼마든지 거기서 찾아낼 수 있다.”

 

37) 성명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우리는 전체 편집에는 전혀 간여한 바 없습니다. 2. 우리가 쓴 글의 내용에는 아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3. 이 책의 출판이 교계에 파문을 일으키게 된데 대하여 유감의 뜻을 표합니다.

4. 조선신학교의 설립과 진보신학

 

한국에서의 진보신학의 중심 인물은 김재준이었다. 김재준은 김익두 목사의 감화로 입신하였고, 일본 아오야마 가꾸인(靑山學園) 신학부에서 3년간(1925-1928) 유학하고 도미하여 핏츠버그에 있는 웨스턴신학교(Western Seminary)에서 3년간(1929-1932), 그리고 프린스톤에서 일년간 연구한 후 1933년에 귀국하였다. 남궁혁은 그를 평양신학교 교수로 추천했으나 그의 신학사상을 문제시 한 박형룡의 반대로 교수로 채용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1930년대의 대부분을 평양 숭인고등학교(1933-36)와 간도 용정의 은진중학교(1936-39) 성경교사로 일했다. 그러나 그는 편집인이었던 남궁혁의 배려로 신학지남을 통해 자신의 신학을 피력하기 시작하였다. 즉 그는 1933년 귀국 후부터 1935년 신학적인 문제로 더 이상 신학지남에 글을 쓸 수 없게 될 때까지 8편의 논문을 기고하였다.38) 이런 기고문을 통해서 김재준은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천명해 나갔고 역사비평학적 입장을 드러냈다. 특히 문제가 된 것은 신학지남19341월호에 쓴 이사야의 임마누엘 예언 연구였다. 김재준은 이 글에서 이사야가 예언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말의 처녀젊은 여자로 고쳐 읽었다. 또 이것이 사실에 가깝고 본문에 가까운 내용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거기서 표적을 꼭 이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고 지적하여 성경에 있는 초자연적 성격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김재준의 이러한 해석은 당시 교회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었다.

 

이때 편집위원으로 있던 박형룡은 편집인 남궁혁에게 사표를 제출함으로 항의하였고, 김재준은 19355월호를 끝으로 신학지남에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게 되었다. 박형룡이 볼 때 김재준은 성경의 축자영감설을 부인하고, 성경의 역사적, 과학적 오류를 주장는 자유주의 신학이었다. 이런 입장은 장로교 전통과 신학적 정통을 무시할 뿐만 아니라 그것과 대결하여 싸우려는 철저한 자유주의 신학자였다.

 

김재준과 박형룡의 대립는 시작에 불과했다. 신학적 대립은 캐나다연합교회 선교구역이었던 함경도 지방에서 보다 뚜렷했다. 곧 해외에서 신학을 연구한 이들이 귀국하면서 다른 전통이 힘을 얻기 시작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나온 경고가 마포삼열의 충언이었다.39)

 

1930년대 말 한국장로교의 신학적 판도는 크게 변화되고 있었다. 이 변화의 한가지 요인이 신사참배 강요였다. 교회에 대한 탄압은 가중되었고 교회에서의 구약설교를 금지시키는가 하면 성경과 찬송 일부의 삭제를 명하기도 했다. 장로교회의 신사참배 거부로 보수주의 신학의 보루였던 평양신학교는 19381학기를 끝으로 사실상 폐교되었다. 1918년 창간된 이래 22년간 장로교회의 신학을 주도해 오던 신학지남19408월호를 끝으로 폐간되었다. 보수주의 신학의 연구와 변증은 제한을 받게 되었고, 그 영향은 해방 후까지 계속되었다. 박형룡을 비롯한 보수주의 지도자들이 투옥되거나 해외로 망명했고, 주한 선교사들은 1941년 강제 출국하였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은 보수주의 신학의 약화를 초래했다. 보수주의 신학은 침묵을 강요당했다. 이런 신학적 공백상태에서 자유주의 신학은 지경을 넓혀갈 수 있었다. 결국 보수주의 신학은 급속도로 위축되었고, 교회의 주도권은 자유주의자의 손에 넘어갔다. 김양선은 보수주의는 붕괴되고 지금까지 저들의 손에 있던 교회의 지도권은 일본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다고 평가했다.40)

 

이런 상황에서 조선신학교(朝鮮神學校)가 개교했다. 19404, 김재준, 송창근(宋昌根), 윤인구(尹仁駒) 등이 서울 승동교회에서 새로운 신학교육을 시작한 것이다. 이미 존재했던 평양의 장로교신학교가 폐교되는 상황에서 새로운 신학교가 설립될 수 있었다는 것은 그 중심 인사들이 일제의 정책에 순응적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말하자면 조선신학교는 처음부터 일제와의 협력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태생적 성격을 지니게 된 것이다. 김재준은 선교사 집권 시대는 끝났다고 주장하고, 신학과 신학교육의 자주를 내세웠는데, 이것은 세계교회로부터의 한국교회를 이탈시키고자 했던 일제의 정책과 일치하고 있었다. 김재준은 평양신학교의 교육이념과 전통을 전적으로 개혁할 것을 말하면서, “조선교회의 건설적인 실제면을 고려에 넣는 신학을 강조했는데,41) 이것은 한국교회의 기존의 신학전통으로부터의 이탈을 의미했다. 이 조선신학교는 1940년대 보수주의 신학의 폐허 위에서 자유주의 신학의 기반을 다져갔고, 해방 후 1946611일부터 14일까지 서울 승동교회에서 회집한 남부총회에 의해 장로교 직영신학교육기관으로 승인되었다.42)

 

정리하면 해방된 상황에서 장로교회의 신학교육기관은 1940년에 설립된 조선신학교 뿐이었고, 이 신학교는 선교사와의 독립, 신학적 자유를 주장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 곧 타협주의적인 자유주의자들에게 한국교회의 미래를 맡길 수 없다는 확신에서 19469월 고려신학교가 설립되었다. 고려신학교는 자유주의를 반대하는 개혁주의 신학의 확립을 신학교 설립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인식하고 있었다.

 

38) 발표한 논문을 연대순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1933: 욥기에 현한 영혼불멸(153), 전기로 본 예레미야의 내면생활(15:5), 아모스의 생애와 예언(15:6), 1934: 이사야의 임마누엘예언 연구(16:1), 실존의 탐구(16:5), 1935: 뿍맨운동과 그 비판(17:1),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연구(17:1), 위대한 종결-예레미야의 최후(17:3).

39) 그는 이렇게 경고했다. “근래에 신신학(新神學)이니 신복음이니 하는 말을 하며 다니는 사람이 있는 모양인데, 우리는 그러한 인물을 삼가야 합니다. 조선에 있는 선교사들이 다 죽는다든지, 혹은 귀국한다든지, 혹은 선교사업을 최소한도로 축소한다든지 할지라도 조선교회 형제여, 40년 전에 전파한 그 복음을 그대로 전합시다. 나와 한석진(韓石晋) 목사가 13도에 두루 다니며 전파하던 그 복음, 양전백(梁甸伯)목사가 선천(宣川)에 전하던 그 복음은 저들의 지혜로 한 것이 아니었고, 오직 성신의 감동을 받아 전한 것이었으니 앞으로는 그것을 조금도 변경치 말고 받은 그대로 전합시다.”

 

40) 김양선, 192. 김양선는 자유주의 신학을 변질된 신학사상이라고 불렀다.

 

41) 김양선, 194.

 

42) 이때의 결의문은 다음과 같다. “조선신학교를 총회가 직영키로 하고 대학령에 의한 신학교로 하기로 함.” 이 결의문은 총회록에는 기록되지 않았다. 총회회의록11(1946-1956)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n.d.), 1-6참고. 1946611-14일 개최된 남부총회에서는 전주서문교회 배은희 목사를 총회장으로 선출했고, 장로교 제27차 총회에서 가결했던 신사참배 결의안을 취소하고, 총회회수를 32회로 하기로 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194355일 해산되었는데, 이제 다시 재건된 것이다.

 

5. 고려신학교의 설립과 개혁주의 신학

 

고려신학교의 설립은 한국교회에서의 개혁주의 신학의 확립과 계승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해방 후 설립된 최초의 장로교신학 교육기관으로서 고려신학교는 평양신학교의 교육이념을 계승하고, 개혁주의 신학의 확립을 통해 한국교회를 쇄신하고자 했다.43)

 

고려신학교의 설립자인 한상동과 주남선은 비록 투옥되어 있었으나 해방을 예견하고 한국교회의 재건과 쇄신을 위해 신학교의 설립을 의도했는데, 이것은 그의 신학입교(神學立敎) 의지였다. 고려신학교의 설립자는 일제하의 경험을 통해 자유주의는 그 시대의 요구에 타협적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해방된 조국에서 이들에게 한국교회의 미래를 맡길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이런 시급성 때문에 이들은 교사, 도서, 교수가 준비되지 못한 가운데서 1946920일 고려신학교를 설립하게 된 것이다.

 

초기 교수로 초빙된 대표적인 인물은 박형룡(朴亨龍, 1897-1978)과 박윤선(朴允善, 1906-1988)이었다. 박형룡은 만주에서 귀국하여 19471014일 부산 중앙교회당에서 고려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했으나 불과 6개월이 못되 19484월 고려신학교 교장직을 사임하고 한상동과의 결별하였다. 그는 곧 상경하여 장로회 신학교를 설립했다. 따라서 그는 고려신학교에 직접적인 영향은 주지 못했다.

 

그러나 1946년 고려신학교의 개교와 함께 교수로 일했던 박윤선은 고려신학교에 현저한 영향을 끼쳤다. 실제로 고려신학교의 신학은 바로 박윤선의 신학이었다. 고려신학교 교수로 임명된 박윤선는 고려신학교를 모체로 개혁주의 신학을 확립하고자 했다. 그는 우리의 신앙노선에서 자신이 지향하는 신학 노선을 이렇게 정리했다.

 

첫째로 이 노선는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서와 및 그 대소요리문답을 교리로 하고 또한 그 예배 모범과 권징조례를 순수히 지킨다. 둘째로 일제말기의 흐리워졌던 오점을 밝히 회개하여 청산함이 절대로 필요한 줄 알고 실행한 것이다. 셋째로 신학에 있어서 타협주의는 배척하고 순수히 칼빈주의 신학을 보수한다. 따라서 성경의 권위를 사도적 전통으로 가지지 않는 현대주의 신학이나 신정통주의를 반대한다.44)

 

고려신학교는 교회정치에 있어서는 장로교 전통을, 생활에 있어서는 성화적 삶을, 신학에 있어서는 칼빈주의 곧 개혁주의 신학을 추구한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박윤선은 철저한 개혁주의 신학자였고, 개혁주의 신학의 확립을 고려신학교 교육의 이념으로 삼았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개혁파의 신앙노선을 따른다. 그것이 우리의 주장이다. 따라서 우리의 신학이 칼빈주의 신학을 주장함에 손색이 없어야 한다. 신학은 여러 가지가 있다. 즉 자유주의, 발트주의, 알미니안주의. 우리는 위의 모든 신학을 반대한다. 우리는 복음주의이란 이름으로 나오는 중간주의 신학도 좋게 보지 않는다. 우리는 성경을 바로 깨달은 성경주의라고 할 수 있는 칼빈주의 신학을 강력히 파수한다.”45)

 

박윤선은 고려신학교를 통해 개혁주의 신학을 추구하고 이를 교육하고 파수하는 것을 신학적 이상으로 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특히 개혁주의를 복음주의와도 엄격히 구별하고 있다.

 

소위 복음주의라는 간판 밑에서 정통신학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명확하게 개혁파신학을 깨닫지 못한 관계로 계약신학을 강력히 주장하지 않는 자들이 많다. 이들을 복음주의자들이라고 말한다. 이들은 알미니안주의를 주장하지 않으나 계약신학도 그리 고조하지는 않는다. 이들은 타협주의의 성격을 가지고 실상 진정한 열매있는 개혁주의 신앙은 안 가진다.46)

 

박윤선은 이런 신학입장에서 고려신학교를 통해 개혁주의 신학을 정립하고 광포하고자 했다. 그는 고려신학교에 재직하는 14년 동안 고려신학교가 발간했던 파숫군218편의 논문(논설)을 발표했는데, 이는 연 15.6편을 발표한 샘이다. 그가 고려신학교에서 일한 기간은 고신 신학의 전성기였으며, 그의 생애에서 가장 열정적인 학구의 기간이었다. 그는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을 지닌 학자이자, 냉철한 이성과 뜨거운 가슴을 지닌 학자였다. 그를 통해 한국교회에 개혁주의 신학을 보급한 것이다. 말하자면 박윤선은 한국에서의 개혁주의 신학의 재확립과 계승을 위해 헌신했다. 간하배의 지적은 사실이다. “고려신학교는 교회 내에 보수주의 사상을 심어줄 터전”47)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보다 분명히 말하면 개혁주의 신학을 유지, 계승, 발전시키는 묘판의 역할을 했다.

 

43) 이 점은 고려신학교 설립자인 주남선과 한상동의 대한 예수교 장로회 성도들 앞에 드림이라는 제목의 소책자에 잘 드러나 있다.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니 신앙과 본분에 대하여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임을 믿고 그대로 가르치며 도 장로교 원본 신조서인 웨스터민스터 신조게요서의 교리대로 교리와 신학을 가르치고 또 지키게 하여 교리와 및 생활을 순결하게 할 목사 양성을 이념과 목적으로 하고 현하 한국교계에 거대 신학자인 박윤선 목사를 교장으로 추대하고 ... 칼빈적 개혁파의 사상 그대로 생활하도록 노력하여 왔고, 앞으로 더 일층 노력하려고 하는 바입니다. 주남선, 한상동,” 대한 예수교 장로회 성도들앞에 드림(출판 및 연대 미상), 1-2.

 

44) 박윤선, 우리의 신앙노선(파수군사, 1954), 10-11.

 

45) 박윤선, 우리의 신앙노선(고려신학교 학우회, n.d.), 2.

 

46) 박윤선, 4.

 

47) Harvie M. Conn, "Studies in the Theology of the Korean Presbyterian Church," Part IV

 

Westminster Theological Journal, Vol. 30, No. 2 (May, 1968), 136.

6. 박윤선과 개혁주의 신학의 확산

 

박윤선이 고려신학교를 떠난 일은 개혁주의 신학의 확산이라는 점에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1946년부터 1960년까지 14년간 고려신학교 교수 혹은 교장으로 봉사했던 박윤선은 1960년부터 63년까지는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에서 동산교회를 설립하고 목회자로 활동했다. 1963년부터 1980년까지 17년간 총회신학교(총신대학교) 교수로 봉사했다. 이 기간 동안 개혁주의 신학은 합동교단으로 확산되었고, 한국에서의 개혁주의 신학의 확산에 기여하게 된다. 198010월 말 박윤선은 총신대학 대학원장직을 사임하고 그해 11월 합동신학교를 설립하여 원장 혹은 교수로 봉사하게 된다. 이때부터 1988630일 세상을 떠나기까지 합동신학교(합동신학대학원 대학교) 명예교장으로 개혁주의 신학을 교수했다. 결국 해방이후 1960년대까지는 고려신학교에서, 1960년대 이후에는 총회신학교에서 1980년 이후에는 합동신학교에서 직접적으로 개혁주의 신학과 삶의 이상을 교수하며 실천했다. 그의 영향 하에 개혁주의 신학과 그 학맥(學脈)은 고신대학교, 총신대학교, 합동신학교와 그 주변으로 계승된 것이다.

 

실제로 한국에서 개혁주의 신학의 정초를 놓은 인물은 박윤선이었다. 그는 한국의 대표적인 주경신학자로서 그의 영향력은 박형룡 보다 앞선다. 박형룡의 교의신학은 사변적 난해성 때문에 대중적 수용도가 낮았다. 그러나 주경신학자였던 박윤선의 저작들, 특히 성경주석은 일반 목회자들에게 광범위하게 읽혀졌다. 한국목회자들의 서제에서 가장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책이 박윤선의 주석임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박윤선은 그의 방대한 저술과 30여년간의 신학교육과 목회적 활동을 통해 개혁주의 신학을 공표하고 가르치고 대중화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박형룡의 교의신학은 선언적 의미가 컸지만 박윤선의 성경주석은 목회적 터전에 쉬 용해되고 착근할 수 있었다.

 

그는 고려신학교에 재직하고 있던 19531048세의 나이로 화란 자유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비록 체류한 기간은 불과 6개월 정도에 지나지 않지만 화란의 개혁신학을 직접 접하게 된다. 박형룡은 미국의 구 프린스톤 신학을 한국장로교회의 전통으로 보수하고 파지하려는 입장이었으나, 박윤선은 화란의 개혁주의 신학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그는 구 프린스톤 신학에서 웨스트민스터신학교로 이어지는 미국 장로교 전통의 개혁주의 신학과, 19세기 화란에서 석명된 개혁주의 신학, 이 두 흐름을 적절히 종합하여 한국교회 현실에 착근하게 했다.

 

박윤선은 일생동안 개혁주의 신학의 확립을 위해 일관된 생애를 살았는데, 한국교회를 위한 그의 중요한 봉사가 주석 집필이었다. 그의 주석 집필은 1938년부터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40년간의 노고 끝에 신구약 66권의 주석을 완성하고 1979109일 총신대학교 강당에서 성경주석 완간 감사예배를 드린바 있다. 그의 주석은 분량으로 보면 구약은 총 7,347, 신약은 총 4,255쪽에 달해 신구약 주석은 총 11,602족에 달하며 매년 약 240쪽의 주석을 집필한 샘이다.48) 그의 성경 주석에는 41편의 소논문이 특주(特註) 혹은 참고자료로 포함되어 있고, 1,053편의 설교가 포함되어 있어 시골의 전도사로부터 도시의 신학자들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읽혀졌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그의 영향력은 박형룡을 능가하며, 한국교회 전반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는 지칠줄 모르는 학자였다. 그는 주석이나 설교, 단행본 외에도 고신의 파숫군218, 총신의 신학지남40, 합신의 신학정론12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박윤선은 조직신학자는 아니었으나 조직신학과 역사신학에도 박식하였고, 그의 성경주석에는 일본을 비롯한 동양권의 신학자와 하지, 워필드, 메이첸 등 미국신학자들은 물론, 잔 메이어(Jahn Meter), 델리취(Delitzsch) 등 독일 신학자들과 아브라함 카이퍼, 비빙크, 보스, 리델보스, 스킬더 등 화란의 신학자들의 신학을 동시에 소개하였다. 그는 개혁주의 신학을 석명하고 이를 구체화하였을 뿐 만 아니라 개혁주의 신학 위에서 신정통주의나 자유주의 신학을 비판했다. 그의 첫 신학논문은 바르트 신학을 비판한 것이었다.49) 그는 성경의 절대적 권위, 하나님의 주권,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했다. 그의 신학논구는 양면적이었다. 한편으로는 개혁주의가 아닌 신학을 비판했고, 다른 한 편으로는 개혁주의 신학을 천착하고자 했다.

 

박윤선는 옛 평양신학교의 한계를 극복한 개혁주의 신학자였다. 하비 콘은 박윤선은 근본주의 차원을 넘어서길 원했다고 함으로서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개혁주의 신학자 였음을 지적했다.

 

박윤선은 과거 평양신학교가 너무나 제한된 분야에만 집중한 나머지 일반은총의 여러 분야들을 인식하지 못하는 교회가 세워질 것을 염려했다. 그는 단순한 근본주의의 차원을 넘어서길 원했다. 즉 한국교회가 칼빈주의라는 보다 원시적인 안목(the larger perspectives of Calvin)에서 바라보고 또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길 원했다. 개혁신앙에서 동료였던 박형룡과는 달리 박윤선는 조직신학 연구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신약연구를 통해서도 이런 목적을 이루고자 노력하였다.50)

 

그가 말한 칼빈주의에 대한 원시적인 관점이란 삶의 체계로서 칼빈주의, 곧 개혁주의적 세계관을 의미했다. 그는 단순한 이론이나 지식을 가르치는 개혁주의자가 아니라 그는 개혁주의적인 삶을 몸으로 체달(體達)했던 신학자였다. 그는 경신애학(敬神愛學)의 삶을 살았다. 그를 통해 한국장로교회에 개혁신학을 확산한 것은 그의 가장 큰 기여라고 할 수 있다.

 

8. 맺는 말: 남은 과제들

 

이상에서 우리는 한국장로교 총회 설립100주년을 기념하면서 지난 100년의 역사를 신학적 측면에서 고찰하였다. 이제 우리의 관심은 한국장로교회가 개혁주의 신학과 그 전통을 어떻게 계승하며 한국교회 전반에 착근케 할 수 있는 가를 고찰해야 할 것이다.

 

우선 우리는 개혁주의 신학을 보다 분명하게 석명할 수 있어야 하고, 이를 다음 세대에 계승할 수 있게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자유주의 신학이나 신정통주의 신학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신학적 경계선을 획정하고 비판도 해왔다. 그러나 근본주의, 보수주의, 복음주의, 세대주의, 신비주의, 경건주의 혹은 오순절 운동과의 경계선이나 그 신학적 차이에 대해서는 선명하게 석명하지 못한 측면이 있다. 우리가 개혁주의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세대주의 혹은 근본주의적인 신학에 안주해 오지 않았는가를 성찰해야 할 것이다. 한국의 복수적인 장로교회가 개혁주의를 표방하지만 사실은 근본주의, 세대주의 혹은 경건주의적인 요소들이 혼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개혁주의를 표방하면서도 일반은총이나 문화소명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었던 점 또한 반성해야할 것이다. 개혁주의 교회 간의 연합을 추구하는 일도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라고 할 수 있다. 교회사에서 우리는 교회의 순결(purity)과 연합(unity) 사이의 진자(振子)를 목격해 왔다. 순결을 지나치게 요구할 때 연합이 깨지고, 연합을 우선시 할 때 순결이 훼손될 수 있다. 교리적 순결과 정통을 강조하되 연합의 필요성을 강조했던 칼빈의 가르침을 따라 한국 장로교회도 연합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51) 한국장로교 100년의 신학을 고찰해 볼 때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과제는 외국신학의 소개나 번역의 한계를 극복하고 신학적 자립을 이루는 일일 것이다.

 

48) 권성수, “박윤선박사의 성경해석학,” 「『신학정론72(1989), 217.

49) 박윤선, “칼 바르트의 성경관에 대한 비평,” 신학지남19377월호. 그는 이 논문에서 바르트의 성경관은 예수와 사도들의 성경관과 다른,” “비 기도교적인 것이며, 바르트의 신학은 신임할 수 없는 신학이라고 지적했다. 이어서 예수와 바울, 베드로의 성경에 대한 견해를 소개하고, 폴리갑, 어거스틴, 칼빈, 루더포드, 찰스 하지 등의 견해를 인용하며 성경의 무오와 성경의 권위를 변호했다. 이런 그의 입장은 1950년대까지 계속된다. 이 논문의 대의는 그가 19501월 고려신학교 교장으로 재작할 때 고려신학교 학우회 이름을 출판된 정통신학에서 본 빨트와 부른너의 위기 신학에서 재 진술되었다. 박윤선은 바르트의 성경관을 비평한 논문을 발표한 후 두 달이 지난 후에 발간된 신학지남19379월호에는 바르트의 계시관을 비평한, “칼 발트의 계시관에 대한 비평을 발표하였다. 바르트 신학에 대한 비판은 그 후에도 계속되었다. 이상규, 한국교회 역사와 신학(생명의 양식, 2007), 250-251.

 

50) Harvie M. Conn, "Studies in the Theology of the Korean Presbyterian Church," Part IV

 

Westminster Theological Journal, Vol. 30, No. 2 (May, 1968), 138.

 

51) 칼빈이 교회연합을 강조하였기에 Willem Nijenhuis는 칼빈을 Calvinus Oecumenicus, 연합운동가 칼빈이라고 불렀다. Willem Nijenhuis, Calvinus Oecumenicus (The Hague, 19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