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혁주의 입장에서 본 고려파 운동의 역사(2)
선지자선교회

설교: 강구원 목사(2011년 3월 6일 주일)  


교단설립의 명분(名分-도덕상 반드시 지켜야 할 사람 된 행위의 한계, 곧 표면상의 객관적이고 명백한 이유)이 곧 교단의 정체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고려파는 8ㆍ15해방을 맞아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옥고를 치르고 나온 출옥 성도들이 세운 고려신학교로부터 시작된 단체입니다.
고려신학교의 설립 명분은 해방이후 일제 강점기에 훼손된 신앙의 순결과 자유주의 신학의 오염으로부터 바른 신학과 신앙을 되찾아야 한다는 시대적 요청에 따른 것입니다. 따라서 초기 고려파 운동의 교회사적 정당성은 회개운동과 생활의 순결에 따르는 진리운동으로 집약됩니다.

Ⅰ. 초기 고려파 운동

남부총회 안에 경남노회가 있었습니다. 고려신학교는 경남노회에 속해 있었습니다. 당시 서울 수유리에 있는 조선신학교(한국신학대학교 전신)에서 볼 때는 난데없이 부산에 사설 신학교, 이른바 고려신학교가 설립되었습니다. 이 때 '출옥한 무식한 사람들이 저런 일을 하고 있느냐'라고 서울 목사들은 우습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너희는 예배당 놓고 감옥에 갔지만 우리는 일본 사람들로부터 교회를 지켰다'는 것이 신사참배를 한 소위 친일파 목사들의 구차한 변(辯)이었습니다. 그들은 옥사한 성도를 가리켜 개죽음이라고까지 했습니다.

여기에 반대하면서 경남 전체 교회 가운데 80개 교회가 동조한 것이 고려파 탄생의 발단입니다. 마침내 옥중 지도자들은 부산 태종대 일본 군사기지 창고에서 두 달 동안 자숙했습니다. 고려신학교에서는 평양신학교가 폐교된 뒤 만주봉천 신학교에 있던 세계적인 신학자 박형룡 박사를 모셔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남영환 전도사가 모셔오는데 실패하자 송상석 목사가 박형룡 박사를 인천을 거쳐 데리고 오는데 성공했습니다. 이때 한국교회는 과연 박형룡 박사가 어디로 갈 것인가에 초미의 관심이었습니다.

그런데 박형룡 박사는 거침없이 부산에 있는 한상동 목사를 중심한 출옥성도들에 의해 세워진 고려신학교로 왔습니다. 마침내 박형룡 박사는 1947년 10월 14일 고려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했습니다.
문제는 서울 수유리에 있는 조선신학교 학생들에게 박형룡 박사가 고려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했다는 소식은 충격이었습니다. 조선신학교 학생들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 오히려 조선신학교가 이상했습니다.
조선신학교 교수들이 ① 모세오경은 단일 저작이 아니라고 가르쳤습니다. ②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도 있고 사람의 말도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③ 동정녀 탄생은 거짓말이라고 가르치니 이상하다고 생각한 나머지 조선신학교 학생 51명이 1957년 봄에 보따리를 싸가지고 부산으로 내려왔습니다.

초기 고려신학교는 경건회 시간에 우는 학생들 때문에 오후 수업이 안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S.F.C. 출발의 기도입니다. 신학생이 우니 목사가 울고 장로가 울고 집사가 울고 학생들이 울게 되는 도미노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조선신학교 신학생들이 서울에서 오긴 왔는데 적응하기에 힘들었습니다.
이 때 박형룡 박사와 한상동 목사와의 신학교 운영에 대한 의견 차이가 있었습니다. 박형룡 박사는 서울로 신학교를 옮겨서 불을 붙이겠다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러나 한상동 목사는 신학교가 멀다고 안 되는 것은 아니니 서울로 가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박형룡 박사는 당시 매 점심때마다 고구마로 끼니를 떼우는 박윤선 박사에게 "미국의 구제품과 원조를 받아서 신학교를 하자"고 했습니다. "미국 북남장로교 선교부, 호주 선교부, 캐나다 선교부에 원조를 받자"고 했습니다. 한상동 목사는 자유주의 단체에서 오는 돈을 받으면 자유주의 신학으로 오염될 수 있으니 안 된다고 했습니다.
마침내 박형룡 박사는 1948년 4월 고려신학교 교장직을 취임한지 약 6개월 만에 사임했습니다. 그리고 그해 5월 27일 서울로 상경했습니다. 그리고 동년 6월에 남산 밑에 장로회 신학교(사당동 총신대학 전신)를 세웠습니다.

그는 고려신학교를 떠나는 고별설교에서 권징보다는 복음전파에 주력하자고 했습니다. 그는 철저한 회개에 기초한 영적 갱신운동을 강조했던 고려신학교 본래의 정신보다는 전국 교회를 수용하는 넓은 신학교육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함으로 고려신학교 본래의 정신과는 사뭇 다른 뉘앙스를 남겼습니다.
지금 와서 볼 때 당시의 한상동 목사는 장소를 옮겨야 했고 박형룡 박사는 미국의 원조를 받자고 한 것이 잘못되었습니다.

그 후 1959년 승동교회당에서 열린 총회에서 교단이 W.C.C.를 영구 탈퇴하기로 결의 했습니다. 1965년 총회에서 W.C.C.나 N.C.C.관계 단체와 관계 및 강단 교류를 할 수 없다고 결의함으로 1959년 총회의 결의를 재확인했습니다.
당시 사당동에 있는 총회신학교와 부산에 있는 고려신학교의 차이는 대답하기 어려운 행정문제였습니다. 신학이 정통이냐, 그러면 행정도 정통으로 하자는 것입니다.
자유주의 신학 계통의 도움은 받지 말자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차이 같지만 큰 것이었습니다.

Ⅱ. 고신대학과 불신법정 송사

고려신학교는 1970년 12월 30일 부로 죽었다는 표현이 적당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문교부령에 의해 고려신학교는 고신대학으로 승격했기 때문입니다.
이때 경남노회 수장격인 송상석 목사와 한상동 목사에 의해 재산권 문제로 법정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송상석 목사는 경남노회 130여 교회와 세상 법정에 가자고 했습니다. 한상동 목사는 130여 교회가 탈퇴하는 것이 아까워서 송상석 목사를 법정에 고소했습니다.

성경 고린도전서 6장 1-11절에는 성도끼리는 불신법정에 고소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고려파는 믿는 형제끼리 불신법정에 송사하지 않는 것이 지금까지 부동의 입장이었는데 이제는 그 벽이 허물어지고 말았습니다.
마침내 고신대학 이사장직을 놓고 민사소송을 넘어 형사 소송에까지 이르렀던 것입니다. 1973년 6월 13일 고려파가 소송문제로 치열한 법정 싸움에 휩쓸리고 있을 무렵 고신대학 교수들에 의해 '신학적으로 본 법의 적용문제'라는 논문이 발표되었습니다. 그 내용은 신학적으로 믿는 형제끼리라도 불신법정에 송사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성경 고린도전서 6장 1-11절을 상황윤리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성경의 영원성, 성경의 불변성, 성경의 독자적 신임성, 성경의 순결성, 성경의 거룩성, 성경의 완전축자영감성, 성경의 무오성, 성경의 사본의 권위성, 성경의 충족성을 파괴시키는 패악(悖惡)입니다.

석원태 목사는 『 고려파가 서 있는 역사적 입장과 소송건 』(1973. 9. 18)이라는 문서를 총회 전에 모든 총대들에게 발송하므로 총대들은 사전 지식을 가지고 총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1973년 9월 20일 제 23회 총회(마산 제일문창교회)에서 『 성도와 성도간의 소송문제에 있어… 관련된 인사는… 유감의 뜻을 표하기로 하고… 이 문제와 노회장 회의가 총회에 보고한 관련 건을 일괄하여 재론하지 않기로 결의 동의한다 』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1974년 9월 19일 제 24회 총회(부산 남교회)에서 23회 총회결의를 교묘히 바꾸었습니다. 『 사회 법정에서의 성도간의 소송 행위가 결과적으로 부덕스러울 수 있으므로 소송을 남용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총회의 입장이다 』라고 수정하자는 동의가 성립되어 가 72표, 부 7표, 기권 1표로 동의가 가결되었습니다.

Ⅲ. 고려신학교 복교와 반고소(反告訴)운동

경향교회는 제 24회 총회가 결의한 제 33항 성도간의 불신법정 재소 건에 대해서 성경 고린도전서 6장 1-11절에 위배된다는 결정을 하고 행정보류를 선언했습니다(1975. 8. 17. 주일).
반고소측 경기노회가 조직되면서 그와 함께 경기노회에서 고려신학교가 복교를 선언했습니다.
고려신학교 복교의 배경에는 첫째, 23회 총회 시에 발표된 고려신학교 교수 일동의 '신학적으로 본 법의 적용문제'라는 논문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둘째, 1970년 12월 31일부로 개혁주의 신앙의 교역자 양성을 목적으로 하던 옛 고려신학교가 폐교가 되고 일반 지도자 양성을 위한 고신대학이 문교부에 인가되면서부터 발생한 여러 부정과 비리 때문입니다.

셋째, 신학대학을 둘러싼 이권쟁탈에서 비롯된 교단 지도자들과 교수들 사이에서 보여준 성도 간의 법정 소송 등 생활의 불순함에 실망과 분노를 가진 학생들과 목회자들이 옛 고려파의 신앙과 신학으로 돌아가자는 염원에 있었습니다.
반고소 고려파 운동의 교회사적 명분은 첫째, 하나님의 섭리적인 역사입니다. 둘째, 고려파 본래 정신으로의 환원운동입니다. 셋째, 진리파수 및 계승운동입니다. 넷째, 역사적 공의회 운동입니다.

제 23회 총회에서 고소문제는 다시 재론도 하지 않기로 가결했습니다. 그러나 제 24회 총회는 사전에 각본된 부정 총대 다수 확보로 이 결의를 번복하고 성도간의 불신 법정의 타당성을 가결하므로 정당한 총회 결의의 정신을 위배했습니다. 여기에 반고소 총회는 고려파 본래로 되돌아가는(1957. 제7회 총회결의) 역사적 공의회 운동을 재개하게 된 것입니다.
참된 개혁주의 교회는 "지상에서의 공의회는 과오를 범할 수도 있으며, 사실은 과오를 범했습니다."라고 하는 웨스트민스터 조문에 크게 유의하면서 선교 도상(道上)에 공의회(총회)가 범한 과오를 개혁하는 교회사적 소명에 따라 반고소 운동을 일으킨 것입니다.

마침내 1976년 9월 1일 고신 제 26회 총회를 향해 1976년 9월 25일까지 시한부 공개 시정을 촉구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대답을 얻지 못하자 전국적으로 옛 고려파의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서울에서 개교한 고려신학교를 중심으로 불붙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에는 교단과 신학교 이름에는 반고소(反告訴)라는 이름이 언제나 붙어 다녔습니다.

Ⅳ 실패한 역사의 복고운동

1) 근세사의 실패한 역사입니다.
① 병자호란
광해군 15년에 김류, 이서, 아귀, 이괄등 서인일파가 인목대비와 통모하여 광해군 및 집권세력인 대북파를 몰아내고 능양군을 세웠는데 이 사람이 곧 인조입니다. 권좌다툼, 왕권다툼, 당파는 결국 자기 영광을 제일로 삼는 결과적 산물이었습니다.
병자호란은(조선인조 14년, 1636년 12월에 청나라가 침입한 난리)으로 인한 남한산성의 치욕을 생각하면 그 또한 국치입니다.

회향녀 혹은 환향녀 말이 나온 전국의 강을 회절강으로 명명했던 수치스런 역사가 있었습니다. 봉림대군(효종)에 의해 북벌정책을 써보았으나 실패하고 명나라에 이어 청나라에 조종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으로 인해 오늘날 중국이 고구려나 고려, 이씨 조선을 중국의 한 자치국으로 규정하면서 수많은 전쟁을 한갓 내란으로 간주해 버렸습니다. 이러한 실패한 역사는 오늘날 엄청난 사건을 야기하고 있습니다.
② 일제 강점기 역사입니다.
첫째, 민족자주주의 둘째, 일제 청산으로 복고해야 합니다.
③ 6ㆍ25 동란입니다.
첫째, 민주주의 실현, 둘째, 조국선진화, 셋째, 남북평화 통일로 복고되어야 합니다.
역사 청산은 시기를 놓치면 복잡한 문제들이 생깁니다. 프랑스의 경우 나치 정부에 협조한 비시정부의 수반 페탱원수를 사형, 중국도 청나라 말에 일본에 부역한 자들을 처단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르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남북 분단과 6ㆍ25 동란과 조국 근대화 사업으로 이어지는 급변하는 시대적 물결이 친일파 청산을 허락하지 아니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적 역사를 교훈으로 삼는데서 멈추어야 합니다.

2) 고려파의 실패한 역사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1-11절을 상황 윤리적으로 해석한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성경은 성도 간의 고소사건에 대하여
① 결코 합당치 않다고 가르쳤습니다(고전 6:1).
② 어떤 경우의 논쟁이든지 그것을 교회 안에서 해결함이 좋다고 가르쳤습니다(고전 6:1-3).
③ 불신 세상 법정에 송사는 신자로서 부끄러운 일이라고 했습니다(고전 6:4-6).
④ 그런 불의한 자는 기독신자들 가운데서 없어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고전 6:7-11).

신구약 성경은 일괄해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신구약 성경은 그 어떤 평이한 성경이라도 한 구절 한 구절이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성경마다 장마다 절마다 상호성(相互性)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성경은 절대무오(絶對無誤)합니다.
따라서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하나님의 절대적 가치를 견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린도서를 기록할 당시의 상황과 지금이 다르다는 것은 괴변에 불과합니다.

성도 간에 불신법정 고소는 문제될 것이 없다고 주장하므로 성경의 영원성, 성경의 순결성, 성경의 사본의 권위성, 성경의 충족성, 성경의 무오성, 성경의 거룩성, 성경의 불변성, 성경의 독자적 신임성, 성경의 완전축자영감성을 파괴시켰습니다.
우리는 이 일을 바로잡아 보겠다고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회개하고 번복할 것을 수없이 요구했습니다. 지금도 고신측은 여러 노회에서 믿는 형제끼리 불신법정 송사를 할 수 없도록 결의해 달라는 헌의가 총회에 상정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빈번히 부득이한 경우에 불신법정 송사를 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도 고소, 고발 사건이 법원에서 진행 중에 있기 때문입니다.
타 교단과 우리 교단의 차이는 수직적 차이입니다. 수평적 차이가 아닙니다. 그것은 성경적 차이요 본질적인 차이입니다. ① 우리가 맡은 개혁주의 신앙과 ② 우리의 신앙 전통은 반드시 수직적 차이입니다.

온정주의자들은 우리의 역사를 두고 싸움과 반목의 역사이지 복음의 역사가 아니하고 비판합니다. 그러나 저들은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역사는 창과 방패의 역사입니다. 즉 공격과 방어의 역사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본래의 것을 빼앗기지 않기 위한 방어 수단으로서의 흘린 땀과 피의 흔적입니다. 그 다음은 빼앗긴 본래의 것을 다시 찾기 위해 목숨을 불사한 공격 수단으로서의 상흔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일이 끝난 다음에야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뜻은 고소를 번복하는데 있지 않고 반고소 단체를 따로 세우는데 있었습니다.
1970년 12월 30일 문교부 정책에 의해 고려신학교를 고신대학으로 인가했습니다. 이렇게 되니 자연스럽게 옛 고려신학교는 역사상에 없어졌습니다. 우리는 고려파 본래의 환원이라는 명분을 세웠는데 하나님께서는 고려파와 함께 옛 고려신학교 이름까지 주셨습니다.

고려파의 실패한 역사는 우리가 다시 번복을 하고 합친다고 복고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될 수도 없고 그렇게 하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수많은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옛 고려파의 실패한 역사는 옛 고려파의 정체성을 다시 찾아서 우리가 속해 있는 고려파를 부흥시키는데 있습니다. 이것은 실패할 수 없는 영예로운 길입니다. 축복의 길입니다. 영광의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