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요약

2007.05.31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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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사 요약
선지자선교회


특별부록 : 신구약 중간사

서론 -  교회사 공부에 앞 서


제 1 장 . 초대교회 (초기)
       1. 초대교회의 배경 - 국가적배경및 문화종교적배경,바리새파, 열심당원,
                      사두개파, 엣세네파, 시나고게, 디아스포라, 산헤드린어
       2. 초대교회의 시작
       3. 초대교회의 특징
       4. 로마제국의 박해와 순교자들

제 2 장 . 초대교회 (후기)
       1. 속사도 교부
       2. 니케아 이전 교부 - 변증가,헬라교부,라틴교부
       3. 니케아 이후 교부
       4. 이단연구 - 영지주의, 에비온주의, 말시온파, 신플라톤주의
              참고 - 이방종교 (조로아스터교, 미트라교, 마니교)
       5. 콘스탄틴 대제와 기독교의 공인
       6. 초대교회의 변질과 분파주의

제 3 장 . 로마제국교회
       1. 니케야 회의
       2. 수도원 운동
       3.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
       4. 교황제도 - 이시도리안 교령집
       5. 동서교회분리
       6. 이슬람교

제 4 장 . 중세교회
       1. 기독교의 유럽전파
       2. 샤를레망 대제와 신성로마제국
       3. 교황과 황제 (1)
       4. 교황과 황제 (2)
       5. 교황권의 타락
       6. 십자군
       7. 중세기의 미신신앙
       8. 신약교회 고수주의자들
       9. 중세 교회의 두기둥

제 5 장 . 종교개혁
       1. 종교개혁전의 선구자들
       2. 루터의 종교개혁
       3. 칼빈의 종교개혁
       4. 칼빈주의 VS 알미니안주의
       5. 영국의 개혁
       6. 프랑스와 네델란드의 종교개혁
       7. 재세례파와 예수회

제 6 장 . 근대의 기독교
       1. 청교도 운동, 웨스트민스트회의
       2. 기독교의 미국전파
       3. 경건주의와 모라비아교도
       4. 감리교의 큰 별들 (1)
       5. 감리교의 큰 별들 (2)
       6. 19 세기의 미국교회
       7. 19 세기의 영국교회

제 7 장 . 한국의 기독교
       1. 초기의 선교
       2. 한국교회 급성장과 부흥
       3. 한국교회의 수난
       4. 장로교의 분리
       5. 신흥종교의 난립



참고서적
시드니 휴턴 著    [基督敎 敎會史]          성서교재간행사 [성서백과대사전]
윌리스턴 워커 著  [世界 기독교 교회사]     베이커 著      [신학사전]
정수영 著         [새 敎會史]              삼성출판사     [大 世界의 歷史]
박광성 著         [敎會史]                 정성구 著      [실천신학 개론]
박광성 著         [한국 교회사]            손봉호 著      [사도신경 講解]
모이어 著         [人物中心의 교회사]      신성종 著     [엠마오 성경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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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구약 중간사

●차 례

1. 전 마카비 시대
(1)바사 (Perssian Empire)에 속한 시대
   1)앗수르(Assyrian Empire)의 멸망
   2) 페르샤 제국의 등장과 주변국 멸망
   3)페르샤의 멸망
(2)헬라에 속한 시대 (B.C 330-285년)
(3)애굽에 속국된 시대(B.C285-204년)
(4)수리아에 속국된 시대(B.C 204-168년)

2. 마카비 시대  (B.C 168-63년)

3. 후 마카비 시대 (B.C 63- A.D 70 년)
(1)안티파터
(2)헤 롯
(3)가이샤라 대소동과 예루살렘 함락

참고 - 역대 로마 황제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항상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 중 하나는 유다 멸망 이후부터 예루살렘이 폐허가 되어버린 A.D 70년 상간의 공백기간일 것이다. 즉 바벨론에 멸망을 당했는데, 신약에 와 보니 로마의 식민지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러한 궁금함을 풀고자 중에서 쉽게 간추린 내용을 공부코저 한다. 신구약 중간기인 유다 멸망 년도인 B.C 596년에서 예루살렘 멸망인 A.D 70년까지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 전 마카비 시대
① 바사에 속한 시대 (B.C 536-330년)
② 헬라에 속한 시대 (B.C 330-285년)
③ 애굽에 속한 시대 (B.C 285-245년)
④ 수리아에 속한시대(B.C 204-168년)

2. 마카비 시대  (B.C 168-63년)

3. 후 마카비 시대 (B.C 63- A.D 70 년)






(1)바사 (Perssian Empire)에 속한 시대

1)앗수르(Assyrian Empire)의 멸망

2) 페르샤 제국의 등장과 주변국 멸망
3) 페르샤의 멸망

(2)헬라에 속한 시대 (B.C 330-285년)
(3)애굽에 속국된 시대(B.C285-204년)
(4)수리아에 속국된 시대(B.C 204-168년)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의 유대교 말살 정책에 , 모딘(Modin)의 늙은 제사장 마타디아스(Mattathias)가 그의 다섯 아들과 함께 수리아의 관원을 죽이고 대항함으로써 본격적인 독립운동으로 바뀌었다.  처음에는 계속 실패하였으나 결국은 예루살렘을 해방시켰다. 그리고 마타디아스의 큰 아들 유다스 마카비가 주피터의 우상 숭배로 더럽혀진 성전을 깨끗케 한 후, 이 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매년 11월 25일을 하누카 (빛의 절기)라 하여 지켜오게 되는 것이다. 이 때 부터 이스라엘은 하스몬 (마타디아스의 고조 할아버지)家의 통치시대가 계속되어 그런대로 명맥이나마 독립을 유지 하였던 것이다.

하스몬 가계(家系)
                         마타디아스
                             |
        +--------------+------------+-----------+-----------+
        |              |               |        |
유다스마카비    요나단       시  몬
        |
                          요한 힐카누스
        +----------------+-----------------+
      알렉산더 얀네우스                  아리스토 불루스
         (B.C 102-76)
동생 미망인과 결혼하여 국민의 반감을 삼
        +--------+-------------------+
        |        |
힐카누스2세             아리스토불루스2세 (B.C 66-63)
대제사장                알렉산드라가 죽은 후 형을 물리치고
아내 알렉산드라는 王            왕이 됨.

이렇게 되니, 시몬의 손자 힐카누스 2세는 왕위를 찾기 위하여 당시 시리아에 와 있던 로마 장군 품페이우스에게 당시 에돔 총독인 안디파터 (마태1장의 헤롯 아버지)를 통하여 중재를 의뢰하였다. 이에 품페이우스는 예루살렘을 삼 개월 간 포위 공격하여 아리스토불루스 2셀르 잡아 로마로 데려가고 힐카누스2세 역시 왕이 되질 못하였다. (B.C 63년) 이리하여 마카비 시대는 끝이 나고 로마의 속국시대가 시작되어 헤롯 가문의 통치가 시작되는 것이다.






(1)안티파터
(2)헤 롯
(3)가이샤라 대소동과 예루살렘 함락
참고 - 역대 로마 황제들
Julius Caesar (B.C 46-44) - Augustus : 옥타비아누스(B.C31-A.D14) 예수님탄생 - Tiberius(A.D12-37) 예수님처형 - Caligula (37-41) - Cladius (41-54) - Nero(54-68) 바울처형 - Galba(68-69) - Otho (69) - Vitelius(69) - Vespasian(69-79)예루살렘 멸망 - Titus (78-81) - Domitian(81-96)그리스도인 박해, 사도요한 유배 - Hadrian(117-138) - Antonius Pius(138-161) - Marcus Aulelius(161-180) - ----  Constantine(306-337) - Jullian(361-363)다시 이교신앙회복 - Jovian (363-364) 기독교신앙 재수립 - Theodosius(378-395) 기독교 국교 선언
                        1981년 1월 30일 완성
참고서적
신성종 著  엠마오 성경연구   배제민 著  구약역사개론
오 할레이 著 성서핸드북   삼성출판사  전집 대세계의 역사
             ① 극동의 여명            ② 그리이스, 헬라
             ③ 대로마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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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초대교회(초기)

제 1-1장. 초대교회의 배경

1. 정치적 사회적 배경
초대교회는 유대의 수도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었다. 이때 유대는 로마의 식민지였다. 그리고 당시 유대에는 헬라인, 로마인, 그리고 여러 타민족들도 있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정치적, 사회적 배경을 알 필요가 있다. - 신구약 중간사 참고


(1) 애굽시대 (BC 1600-1200) - 출애굽과 해방
(2) 바벨론 시대 (BC606-536) - 나라의 멸망과 포로
(3) 메대.바사시대 (BC 536-330) - 포로의 석방과 귀환
(4) 헬라시대 (BC 330-167) - 헬라문화와 언어생활
(5) 로마시대 (BC 63-AD 476) - 정치적 예속


2. 문화적 종교적 배경

(1) 회당 (Synagoge)
(2) 디아스포라 (Diaspora)
(3) 공회 (Sanhedrin)
(4) 바리새인들 (PHARISSES)
(5) 열심당원 (Zealots)
(6) 사두개인 (SADDUCEES)
(7) 에세네파 (ESSENEES)


제 1-2장. 초대교회의 시작


(1) 교회의 설립과 조직
(2) 초대교회의 주요교리
(3) 예배
(4) 초대교회의 생활

제1-3장. 초대교회 특징

신약성경 전체에 흐르고 있는 초대교회의 특징은 아주 중요하다. 그것은 신약교회 이후에 생겨진 교회들은 많은 부분에서 왜곡되고 굴절되고 있기 때문이다. 로마교가 아무리 자기들이 교회의 모델이라 하여도 그들은 너무 성경과는 멀리 떨어져 갔고, 오늘날 수많은 개혁교회 역시 성경에서 나타나고 있는 초대교회와는 거리가 있다. 이 같은 전제 하에 영원히 변하지 않는 신약교회의 틀을 살펴보아 오늘을 돌아보고 내일을 조명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하겠다.


(1) 성경만을 최고의 권위로 삼는 교회

① 로마 카톨릭
② 개혁교회
③ 신약교회가 성경만을 최고의 권위로 삼는 실례

(2) 믿는 자의 만민 제사장권의 보장
(3) 독립 개교회 중심의 행정정치
(4) 핍박받는 교회
(5) 선교와 복음이 팽창되는 교회
(6) 형제애로 다져지는 교회
(7) 제자를 양육하는 교회
(8) 종교와 세상으로부터 분리되는 교회



제 1-4 장. 초대교회의 박해와 순교자들

처음 얼마 동안은 로마정부는 기독교를 법적 보호아래에 있던 유대교의 한 분파(分派)로 생각했으나 나중에 다른 것을 알고 혹독한 핍박을 하기 시작하였다. 로마의 정책은 종교의 자유를 부여하여 식민지 족속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신을 예배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한 편 로마 황제를 존경하며 그를 경배해야 되며 로마 제국의 모든 법률을 복종한다는 국가정책에 순응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러질 않았다. 오직 하나님 외에 예배할 수 없었다. 이들은 황제가 제정한 법률을 지켜야 겠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이라야 가능했다. 이래서 이들은 결국 로마 황제와 정부로 하여금 적의를 품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가장 선한 황제들도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였다. 그러나 신전(神殿)에서 제사를 드리거나, 기독교신앙을 포기하면 처벌하지 않았으나 신실한 기독교 신자의 입장에서 볼 때, 이 시련은 순교(殉敎)로 끝날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AD 64-313년까지 길고도 긴 세월 동안 황제들이 계속하여 기독교도들에 대한 핍박을 멈추지 않았던 원인은 무엇인가 ?


(1) 핍박의 원인
● 무신론으로 인정받았다.
● 사회생활의 부조화가 나쁜 여론을 조성했다.
● 자신과 돈에 무관심하였다.
● 가정에 충실하고 자기 부정의 미덕이 용납되지 않았다.
● 무지와 오해

(2) 대표적인 박해



□ 참 고 : 순교자들

□ 참고: 카타콤 (CATACOMB)

(3) 핍박의 결과

1) 좋은 결과
● 순교를 두려워 하지 않는 신앙유발
● 교회의 팽창
● 교회의 정화
● 교리(敎理)의 형성

2) 나쁜 결과
● 기독교를 변증하려다 세상 철학이 도입되었다.
● 교회의 의식이 성례화 되어갔다.
● 지도자의 손실
● 지나친 성직자 존중제도
● 금욕주의

□ 참고 : 예루살렘 멸망

(1) 멸망 이전의 상태
● 예수님께서 친히 예루살렘의 함락을 예언하셨다. (마 23:37-39)
● 로마 관리들이 부패할 대로 부패하였다. (행 24:26)
● 대제사장의 타락 (행 4:6)
   당시 대제사장은 로마 정부에 충성하는 자들에게 로마 정부가 임명하였다.
   따라서 당시 종교계의 타락이 얼마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 인민들의 폭동
   행 5:36에 나오는 '드다'의 폭동
   행 5:37에 나오는 '갈릴리 유다'의 난
   행 21:38의 난을 일으켜 4천의 자객을 거느리고 광야를 가던 애굽인

(2) 직접적인 원인  
● 가이사랴의 소란
● 수리아 총독의 개입
● Titus 장군의 예루살렘 함락

(3) 함락의 결과
함락의 결과로 엄청난 결과들이 뒤따랐다.
● 인명피해가 100만명 이상이 참살 당하고 10만명 이상이 포로가 되었다.
● 예루살렘의 성벽은 다윗왕 때 수축되어 전래해오는 것이 3면이 다 파괴되고
   유일하게 서쪽 벽 하나만 남게된다. 이 벽을 [통곡의 벽]이라 한다.
● 예루살렘이 정치, 종교의 힘을 상실하게 된다.
   교회도 母 교회의 기능을 상실하고 안디옥 교회가 크게 부상한다.




제2장. 초대교회(후기)

신약교회가 맨 처음 시작된 곳은 예루살렘교회였다. 그 다음에 예루살렘이 멸망한 후로는 안디옥교회가 중심지가 되었고, 그 다음으로 교회의 중심지는 알렉산드리아가 된다. 여기서 구약성경이 헬라어로 번역(BC 150년경 70인역)되기도 한다. 그리고 로마교회가 또 교회의 중심지가 되어 중세교회까지 지속한다. 이렇게 기독교가 전 세계로 확산되어 나갈 때 이들 교회의 지도자들이 누구였는가 ? 그들이 바로 '교부'(Church Father)들이었다. 교부란 사도들 뒤를 이어 교회 건설과 교리 발달에 크게 활약하여 후세에 중요한 영향력을 남긴 사람들을 말한다. 이들 교부들은 시대에 따라서 사도적교부(속사도교부), 니케아회의 이전교부, 니케아회의 이후의 교부로 나눈다.



제 2-1장. 사도적교부 (속사도교부)

이들을 속사도교부 ( 續使徒敎父 : Apostoic Fathers ) 또는 사도적 교부라고 부르는 것은, 저들이 사도들과 교분이 있었던 교부라는 뜻이다.  또 이들이 교부들 중에 가장 오래된 교부라는 뜻이다. 속사도들은 거의 사도들로부터 직접 기독교신앙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은 훌륭한 초대교회의 지도자들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외부의 무서운 세력으로  부터 교회를 지키기 위하여 그들의 수족(手足)이 짤리우고, 생명을 잃어가면서 교회를 지켰던 사람들이었다.  이들 [속사도교부]들의 피흘림 후에 [교부]들이 출현하게 되었다.


1. 로마의 클레멘트 (AD 92-101, Clement of Rome)
2. 익나티우스 (Ignatius)
3. 폴리갑 (Polcarp, AD 69-155)
4. 헬마스 (Hermas AD 97-140)
5. 바나바 (Barnabas AD 70-130)


제 2-2장. 니케아 이전의 교부들


1. 변증가(辨證家)
교회에 대한 조직적이고 세계적인 박해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계속 발전해졌다. 그런데 교회를 핍박하는 주체는 로마의 황제들이었고, 또 시민들의 여론을 조성하는 이들은 철학가나 이교도들이었다. 이같은 공격에 맞서 기독교를 이론적으로 변호하고 반격하는 사람들을 변증가라 한다.  변증가는 두 가지로 나타났다. 하나는 변증의 글을 써서 황제나 고위 관리에게 바침으로 기독교를 좀 더 자세히 알고 오해가 풀리기를 바라는 동기에서 쓴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독교 사상을 비방하는 이교도와 철학자들에게 기독교를 이교철학과 비교함으로써 기독교의 우월성을 증명하려는 글이었다.

(1) 져스틴 (Justinus AD 114-165)
(2) 오리겐 - 헬라교부에서 논함.


2. 헬라 교부

변증가의 시대가 끝나고 신학을 건설하는 시대가 접어든다. 이 무렵에는 지역과 언어의 차이로 헬라 교부들, 라틴 교부들로 분리된다. 헬라 교부는 두 파로 나뉘어 진다.

●소 아시아파 - 사도 요한의 뒤를 이은 사람들로 성경주의를 표방하며 사색이나
              철학보다는 성경대로의 단순한 신앙을 강조한다.
              대표자로는 이레니우스와 히폴리투스 등이 있다.

●알렉산드리아파 - 헬라의 영향을 많이 받아 고전(古典)과 철학을 이용하여 신학을
                 연구하려 했다. 대표자로는,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와 오리겐
                 등이 있다.
소 아시아파

1. 이레네우스 (Irenaeus AD 115-202)

알렉산드리아파

1. 클레멘트 (Flavius Clement)

□ 알렉산드리아 학파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하여 활동한 기독교 지도자들을 이름이다. 알렉산드리아는 BC 332년 알렉산더 대제에 의해 설립된 도시로서 600년 이상 고대 로마 제국의 제 2 도성으로 군림했다. 무역과 학문의 도시였기에 많은 헬라인들과 유대인들이 모여 들었고 학문의 도시답게 이 도시의 도서관은 로마제국에서 가장 유명하였다. 이 도시에서 그 유명한 70인역 구약 성경이 번역되었다. AD 3세기 경에 신플라톤주의 (Neo Platonism)도 여기서 발흥하였고, 유명한 영지주의자 바실리데스(Basilides)가 여기서 가르쳤다. 유대주의, 플라톤주의, 헬라철학, 동방의 신비스런 종교들도 여기로 모여들었고, 기독교 역시 AD 185년경 스토아 철학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판테누스(Pantenus) 지도 아래 교리학교가 설립되었고, 그의 제자인 그 유명한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Flavius Clement)때에 와서 더욱 더 체계가 서게 된다.

●알렉산드리아의 종교발전은 서방교회와 달랐다. 서방교회는 영지주의와의 투쟁으로 인하여 철학에 대한 강한 불신감이 조성되어서, 터툴리안 같은 교부는 철학과 기독교 사이에서는 어떤 연관도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래서 서방교회는 영지주의와 투쟁을 겪으면서 더욱 더 하나님의 말씀과 사도의 교훈에 의지하는 보수주의로 나아갔고, 더불어 조직도 공고히 해 나갔으나, 알렉산드리아는 그러질 못했다. 알렉산드리아의 교부들은 알렉산드리아에 들어와 있는 철학을 교육받았으며 그들의 영향을 받으며 살 뿐 아니라 그들을 그리스도의 신앙으로 이끌려고 하였다. 그러다보니 기독교는 당시에 가장 우수했던 철학체계인 플라톤주의와 스토아 철학을 결합해서 철학과 기독교가 거의 혼합되었다 할 만큼 친밀한 유대관계로 되어 있었다. 결과로 여기서 기독교 영지주의가 발생하였다.


2.오리겐 (Origen AD 185-254)

1) 생애
2) 그의 학문과 신학
3) 그의 주요 신학 내용
● 한 하나님을 믿었다.  구약과 신약의 동일하신 하나님.

● 예수 그리스도는 만물보다 먼저 성부에서 태어나 인간이 되셨다. 그리스도의 위치
   는 제 2의 하나님이나 피조물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신플라톤주의 철학의 체
   계 안에서 Nous(정신,사상)으로 이해를 하였다. 여기서 만물은 창조되었고 그는
   피조물 중에 최상위의 존재이다.

● 성령에 대하여서는 교회의 전통에 얽매여 인정을 하였으나 그의 사상 세계 안에서
   별 비중을 두질 않았다. "성령은 그 명예나 권위에 있어서 성부, 성자와 동일한
   존재이다."

● 부활과 내세의 상급을 믿었다.

● 인간의 자유의지를 믿었다.

● 악마와 천사존재를 믿었다.

● 세상은 유한하고 결국 죄악으로 망한다.

●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여졌다.

● 그의 우주관은 다분히 플라톤적이었다. 눈에 보이는 현상세계와 그뒤 정신세계가
   있는데 정신세계가 실제 세계이다.

● 구원은 Logos(말씀)가 인간이 되시고, 죄 지은 일이 없는 인간의 영혼이 순수한
   육체와 결합으로 이루어졌으나, 부활후 승천시에 그리스도의 인성이 하나님의
   신성의 영광으로 흡수되었고, 그후 인간을 완전히 벗어나 신이 되셨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도 그의 가르침을 따르고 행할 때 되어진다. 그래서 구원은 그리
   스도의 제자는 죽을 때, 악인은 지옥에 가나 나중에 구원을 받는다. 심지어 마귀
   와 인간전체가 다 구원을 받는다.

●영혼 선재설을 믿었다.


4) 그의 영향력
●그의 사상, 그의 신학체계는 동방교회에 깊은 영향력을 미쳤다. 그는 기독교를 변호하고 그리스도인의 윤리를 높이는데 공로를 세웠지만, 유감스럽게도 신앙과 지식과를 혼동하여 유식한 그리스도인은 보통 믿음만 가진 그리스도인보다 높은 자리에 있다는 사상을 남겨놓고 말았다. 그리하여 이 풍조가 알렉산드리아 사상계를 지배하였다.  또 그의 성경해석법은 히브리 원어, 헬라어, 그리고 다른 번역판을 대조하는 방식이었다. 그는 식음도 전폐하며 정력적으로 책을 썼지만, 그런데 문자 한 글자 한 글자에서 신령한 뜻을 찾는 우화적 해석방법은 성경전체에 흐르고 있는 맥락을 놓치고 만 경향이 있어, 특정한 부분에서 그의 과도한 집착이 성경 전체를 잃고 좁은 골짜기에서 평생을 방황한 그런 면도 있다.

●그는 많은 부분에서 성경과는 다른 다분히 플라톤적인 그의 사상은 결국 정통파에서 이단으로 간주되기까지 하였다. A.D 399년 알렉산드리아 종교회의에서,  AD 544년 유스티안 황제 때,  AD 553년 제 5차 공의회에서 그는 각각 이단으로 판정받았다. 그가 죽은 후에도 그의 영향을 받은 수많은 사람들이 나타났다. 특히 그가 죽은 후 50여년이 지나서  그 유명한 니케아 종교회를 있게 만든 알렉산드리아의 아리우스(Arius)와 콘스탄틴 황제와 절친한 관계를 가졌던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오 등 수 많은 사람들이 그의 철학적 사조에 입각한 성경해석 및 對 그리스도관을 가지고 신앙세계에 큰 물의를 일으켰다.

이러한 사조의 신학흐름은 오늘까지 여러 모양으로 그 맥을 이어오고 있다.유감스럽게도 '여호와의 증인'들의 교리도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오리겐의 인격에 있어서는 파랄은 말하기를 "초대 교회사에 있어서 오리겐처럼 고상하고 탁월한 인물은 없었다. 그처럼 교회를 위하여 헌신적으로 봉사하고 어릴 때 부터 늙기까지 꾸준히 활동하고 또한 조금도 책잡힐 일을 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는 수 많은 사람들에게 감화를 끼쳤다.


□ 참고 - 켈수스와 오리겐의 격론
켈수스(Clesus)는 2세기 후반의 가장 흉악한 철학자이다. 플라톤의 철학에 능하고, 스토익학파의 기질을 가진 자였는데, 기독교를 대항하기 위하여 [참 말씀]이라는 책을 썼는데, 이 책의 내용은 전적으로 기독교를 비방한 것이었는데, 이에 대하여 오리겐이 공박하였다.

●켈수스는 복음의 단순성에 대하여 비판하기를
"기독교에 있어서 가장 선하고 참되다고 하는 것은 플라톤이나 그 밖의 어떤 헬라 철학자들이 이미 말했던 것이다. 오히려 그들이 더 우수하였다."

●오리겐 - "복음의 단순성은 하나님이 모든 민족에게 베푸시는 긍휼의 사신으로서 가장 적합하다. 플라톤의 화려한 문장은 소수의 사람에게 유익을 주었을 뿐이지만, 보다 단순한 문체로 쓰여진 책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기 때문이다."

●켈수스 - 기독교는 [믿음]에다 탁월한 지위를 둔다고 비난하였다. 그저 모든 면에서 이유를 묻지말고 믿어라, 질문을 바라지 말고 믿어라 한다고 비난하였다.

●오리겐 - 기독교는 질문을 등한시하거나 참된 진리를 멸시하지 않는다. 기독교에 있어서 믿음을 중요시하는 것은 그원리에 적당한 탁월성을 돌리는 것 뿐이다라고 하였다. 모든 사람이 철학을 연구할 수 있었으면 좋겠지만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철학을 연구할 재능도 여가도 가지지 못한다고 하였다. 이런 사람들이 철학을 몰라도 믿음으로 죄에서 의로 전환된다는 것은 확실히 좋은 일이라고 하였다.

● 기타 - 성육신 반대



3. 라틴 교부

1. 터툴리안 (Tertullianus AD 150-220)

●기독교와 철학을 분명히 차별하였다.
●원죄의 교리를 가짐
●삼위일체 교리의 창시자
●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바른 구분

결론 : 우리는 속사도, 변증가, 교부들의 생애와 사상을 살펴보았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을 것은 이들이 생명을 걸고 복음과 교회를 잘 지켰다. 그러나 이들의 세대에 와서는 조금씩 교회가 변질되고 지도자들이 성경을 떠나서 자기의 주장과 잘못된 가르침도 있었다는 것이다.  

● 핍박이 가져온 결과가 컸다.
황제들이 조직력과 권력의 힘으로 교회를 핍박하니 지도자들은 우선 자기에게 닥친 현실문제 수습에 급급하다 보니 성경의 뜻보다는 부년 상황 적응에 임기응변이 나오게 되었다. 그래서 주님이 전해준 의식을 기피하려는 사람을 놓치지 않으려고 의식 자체가 큰 힘이 있는 것처럼 성례전 신학을 만들게 되었다.  또 지도자들이 계속 희생되다 보니 지도력의 결핍문제를 해결하려다 보니 정도이상의 성직자 존중제도등이 그것이다.

● 교부들 시대에는 아직 신약성경이 정경으로 완성되어 있지 않고 구약만 존재하였으므로 성경의 원리대로 따르지 못하는 한계점이 있었다. (신약성경의 정경화는 AD 397년 완성

● 초기 교부들의 작품들도 크게 영향을 끼쳤다.
즉 Hermas가 중간지대인 연옥개념을 말한 것이나 Origen의 우화적 해석등은 성경에 없는 주장인데도 저들이 지도자였다는 것 때문에 그 영향이 컸다.

●철학이 교회 안에 자리 잡게 되었다. 기독교를 세인들에게 변증하기 위해 세인들이 아는 철학을 인용하다 보니 성경은 멀어지고 철학이 교회에 자리잡게 되는 오류를 범하게 되었다.

● 각종 파벌들의 난립으로 불필요한 힘을 낭비케 만들고 진리수호보다는 곁길에 정력을 낭비하게 되었다.



제2-3장. 니케아 이후의 교부


1.동방교부

1) 가이샤라의 유세비오(260-339)

팔레스틴에서 출생. 315년에 가이샤라의 감독이 됨.
저서 - 교회사, 콘스탄틴 대제전(大帝傳), 복음의 준비, 복음의 증명 등

2) 아다나시어스 (Athanasius 328-373)
3) 크리소스톰 (Chrysostom) 345-407


2. 서방교부

1) 암부로시어스 (Ambrosius)

● 서방제일의 성직자. 독일에서 출생. 374년 북부 이태리의 지방장관이 되나, 곧 재산과 권력을 포기하고 신학을 공부하여 밀라노의 감독이 되었다.

● 성품은 온화하나 대적자에게는 단호하였음. 그리스도인인 데오도시우스
(Theodosius)황제가 데살로니가인 7,000명을 학살하였을때, 성찬식 참여에서 쫒아냄. 나중에 황제가 죄를 회개하고 8개월 후에 성찬에 참여시킨 확실한 신앙의 지도자.

● 니케야 신앙에 철저히 서서, 추호도 아리우스파와 타협을 않했다.
로마제국의 몰락에서 오는 충격 속에서 교회가 힘차게 살아남는데 없어서는 안 될 당대 최고의 인물이었다. 어거스틴에게 세례를 주었다.  397년에 사망하였다.


제 2-4장. 초대교회 이단연구


1.영지주의(Gnosticism)

영지주의 교리

1) 이원론 사상
2) 유출설
3) 가현설(假顯設)
4) 구원

□ 참고 - 사도신경(使徒信經)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예배 시간에 신앙고백으로 사용하는 사도신경은 초대교회의 귀한 신앙유산이다.   사도신경은 증거나 설명을 곁들이지 않고, 간단하고 적극적인 믿음의 확신으로 이루어져 있다.  구성은 주로 세례식에서 관례적으로 행하여져 온 삼위일체(三位一體)의 순서에 따라 성부(聖父), 성자(聖子), 성령(聖靈)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사도신경은 이름과는 달리 사도(使徒)들에게서 유래(由來)된 것은 아니다.  물론 사도들에게서 유래되었다는 전설도 있다. (그 전설에 의하면 사도신경의 열 두 마디는, 12 사도들이 각 한 마디씩 말한 것을 베드로가 모아서 로마로 가져 간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2. 에비온주의 (Ebionism)
3. 말시온파 (Marcionism)
4. 네오 플라톤주의 (Neo Platonism)

□ 참고 - 플라톤의 사상

5. 조로아스트교(Zoroaster)
6. 미트라교(Mithra)
7. 마니교 (Manicheism)
(1) 교조 : 마니 (Mani) 216 - 277년
(2) 교리 (敎理)
(3) 조직

□ 참고 -  이원론(二元論)


제2-5장. 콘스탄틴 대제와 기독교공인


1.콘스탄틴 대제 (大帝)

2. 콘스탄틴이 기독교에 끼친 공헌
3. 기독교 공인
4. 그 후의 변화


제2-6장. 초대교회의 변질과 분파주의


1. 신약교회가 타락하게 되는 원인

① 혹독한 박해 때문이었다.
② 이교사상과 철학의 영향이 컸다.
③ 의식의 남용이 교회를 부패시켰다.
④ 교회 행정상의 난맥이 교회를 부패시켰다.
⑤ 교회와 국가의 연합이 교회의 부패를 가져왔다.


2. 분파주의자들
 
(1) 몬타너스파 (Montanists)

1) 몬타너스(Montanus)

2) 몬타너스파의 주장
① 정 통
② 이적의 은사를 지나치게 강조
③ 주의 영인 성령을 받은 자는 다 똑같은 제사장이다.
④ 사죄의 권한은 교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 있다.
⑤ 임박한 주님의 재림을 믿었다.
⑥ 금욕주의
⑦ 신앙생활의 근본에 대하여는,

3) 몬타너스파의 영향

4) 몬타너스파에 대한 평가
① 비판적인 시각
② 긍정적 시각


(2) 노바티안파 (Novatians)

1) 노바티안의 기원

2) 노바티안의 주장
① 코넬리우스 주장
② 노바티아누스의 주장

3) 노바티안의 영향

(3) 도나터스파 (Donatists)

1) 도나티스트의 기원

2) 도나티스트의 주장
① 교회와 국가의 분리
② 신자의 생활에 관한 문제



제3장. 로마제국교회


제 3-1 장. 니케야 회의


1.제 1 차 니케야 회의 (Nicaia)

(1) 소집자 : 콘스탄틴황제
(2) 시기 : 325년 5-6월
(3) 장소 : 콘스탄티노플
(4) 방법 : 각 감독은 장로 2명 수행원 3명 대동
(5) 동기 : ① 부활절 지키는 문제 - 동방은 유월절, 서방은 주일중시
              결론은 춘분지나고(3/21)만월(滿月)지나고 그 후 오는 주일
           ② 아리어스 학설로 인하여 교회가 분열위기를 맞음.


(6) 아리어스 학설 논쟁
① 아리어스는 리비아사람으로 알렉산드리아의 장로. 성경해석에 통달한
   일류학자였음. 열정적이고 금욕적인 생활로 인하여 추종자가 많았다.

② 그의 학설 - 그리스도는 피조물이다. 신성(神性)이 없다.
               따라서 하나님이 아니다.

③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인 알렉산더에게 반박. 이에 동방의 많은 교회들에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아리어스의 학설이 유포됨.  교회가 일대혼란에 빠짐.

(7) 회원의 파벌
① 아리어스 파 - 소수
② 알렉산더 파 - 소수
③ 중립파 - 가이사라의 유세비오 (다수)

(8) 결과 - 아리어스의 성경해석이 잘못됨을 확인.
           예수님의 신성(神性)확인. 니케아 신경 반포. 아아리어스 추방
그후 교회의 문제가 있을시 마다 세계기독교대회가 개최 (8차까지:879년)

니케야 회의

아리우스

회의 결과
회의에 참석한 사람은 세 종류의 서로 다른 주장을 하였다.
① 알렉산드리아 교회파의 감독 약 20명중 수석책임자는 알렉산더 감독이고
   수행자 대표는 아다나시어스였다.
② 아리우스파 감독 약 20명 중 수석 책임자는 니코메디아의 감독 유세비우스
   수행자 대표는 아리우스였다.
③ 거의 대다수였던 중간파 중 수석 책임자는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로 유명한
   역사가였고, 어용신학자로 혹평받던 자였다.

개회날 콘스탄틴 황제가 개회사를 하였고, 진행은 호시우스와 유세비우스가 하였다. 먼저 아리우스파에 속하는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가 18인의 감독과 함께 기초한 그들의 주장을 제출하였다. 그 내용은 '그리스도는 피조물로서 다만 최고의 존재일 뿐 영원성은 없다.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그 본질이 비슷할 뿐(Homo ousios = like substance) 본질이 동일한 것(Homo ousin = like substance)은 아니다'고 하였다.


□ 참고 : 아다나시어스 (Athanasius)

□ 참고 : 니케아 (Nicaea) 신경 (주후 325년 : 318교부들의 신경)

2. 니케야시대(313년 - 590년)의 대체적인 신앙적 모습

① 그리스도의 그림과 동상숭배 - 회당과 각 가정
② 성자숭배(聖者崇拜) - 순교자묘소에 모여 예배,
                        묘소에 성전건축 (성 베드로성당)

③ 유물예배(遺物禮拜)- 의복, 형기구가 고가(高價)에 매매됨.(병 낫는다고)

④ 성모숭배(聖母崇拜) - 영구처녀설 주장

⑤ 천사숭배(天使崇拜)

⑥ 예배는 설교보다 의식을 치중. 의식이 기독교의 권위를 더 해주는 것이 아님

⑦ 성탄절 - 12월 25일 지키는 것으로 확정
          기원은 로마의 12월에 삼대절기가 있는 것과 융합

        * Satunalia : 12-24일 지킴
        * Sigillia  : 어린이에게 인형선물을 줌
        * Barumaria : 동지제


제 3-2 장. 수도원 운동


1. 안토니 (Anthony)
2. 기둥성자 시므온 (Symeon)
3. 베네딕트 (Benedict)


제 3-3 장. 어거스틴과 페라기우스


1. 페라기우스 논쟁
동방교회가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냐, 피조물이냐로 논쟁할 때, 서방교회는 죄와 구원문제를 논하였다.

(1) 페라기우스 (Pelagius)
(2) 어거스틴 (Aurelius Augustinus)

2. 어거스틴의 출현

(1) 어거스틴의 회개
① 그의 출생
② 마니교인 시절
③ 신 플라톤 철학도의 생활
④ 밀라노에서의 갈등의 생활
⑤ 탕자의 회개

(2) 어거스틴의 사역
① 힙포의 감독
② 마니교를 반박하는 초기 저술활동
③ 도나티스트에 대항하는 각종 논문
④ 어거스틴의 참회록 이는 하나님께 대한 기도문 형식으로 쓰여진 영적 자서전이다.
⑤ 하나님의 도성 (The  City of God) 이 작품은 413년에 시작하여 426년에 완성되었다.
⑥ 삼위일체론 어거스틴 때 와서 완전하고 온전한 신론으로 귀결된다.


3. 어거스틴과 페라기우스의 논쟁

(1) 페라기우스의 주장
(2) 어거스틴의 주장


□ 어거스틴과 페라기우스의 차이점

(3) 어거스틴과 페라기우스의 차이점



이렇게 두 사람의 견해는 완전히 달랐다.  페라기우스는 자기의 주장을 관철할려고 하였으나 어거스틴과의 논쟁 후로는 그의 주장이 계속설 자리를 찾지 못하고 말았다. 그래서 431년 에베소대회에서는 페라기우스 주장이 이단으로 판정을 받고 만다.



□ 참고 : 반 페라기우스설
반 페라기우스설은 서방의 중심 수도원을 건설한 '파우스투스'라는 감독이 주장하였다. 그는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모든 인간이 죄인이 되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그러나 신의 은혜에 대한 인간은 자기 의사대로 거부할 수도 있고 수용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주장도 529년에 같이 거부되었다.


□ 참고 : 어거스틴에 관한 평

① 긍정적인 면에서 그는 삼위일체를 비롯한 몇 가지 신학적 결론은 과거 교부들의 모호함을 종식시킨 큰 공헌을 하였다.

② 그는 중세기 전체를 통하여 그 어느 누구보다도 자주 인용됨으로 인해서 카톨릭 교회의 위대한 박사가 되었음은 물론이고, 16세기 개혁자들조차도 그의 이상을 뛰어넘지 못하였다.

③ 어거스틴의 신학은 헬라의 신 플라톤 철학에 영향을 입은 바가 크다.

④ 그는 교회관에 있어서 실수를 하였다. 그것은 보이는 교회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 신령한 하늘나라의 소망에 등한시 되었다.




제3-4장. 교황제도-이시도리안 교령집

(1) 로마 카톨릭의 주장
(2) 성경에 의한 증명

1. 레오1세 (440-461년재위)-자칭 45대
2. 그레고리1세 (일명, 大고레고리 Gregory I 590-604)
(1) 그레고리의 배경
(2) 그레고리의 활동
(3) 그레고리의 공적


제3-5장. 동서교회분리(東西敎會分離)


1. 일반적 원인
2. 직접적 원인


□ 콘스탄티노플의 대감독 익나티우스




제 3-6 장. 이슬람교(모하멛교)

이슬람이란 무엇인가 ?
이슬람이란 아랍어로 '복종, 순종, 귀의'등의 뜻을 의미한다. 따라서 저들은 자기들의 신인 알라에게 절대 복종하고 순종하는 것을 뜻한다. 이슬람이란 말은 SILM('시름'이라고 발음)과 ISLAMA라는 어원에서 왔다. 이 말의 의미는 항복한다는 뜻으로 '자기의 주장을 알라에게 맡긴다' 또는 '자신을 신의 의사에 맡긴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자신들을 이슬람교로 부르고, 모하메트교라고 불리우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 왜냐면 이슬람교는 알라신을 신봉하는 종교이지, 예언자 모하메트를 신봉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슬람교도가 되는 절차는 간단하다. 저들은 2명 이상의 기성 이슬람 신자 앞에서 아랍어로 된 '가리마'라는 일종의 선서만 하면 이슬람 신자가 된다.

(1) 기원
모하메드(Mohammed)가 개교한 종교로 처음에는 아랍인의 인민종교의 혁신에 있었으나 나중에 세계를 정복하는 종교수립을 계획함. 이를 위해 검을 사용함.

(2) 모하메드 (Mohammed)
(3) 교리 (敎理)
(4) 도덕(道德)
(5) 경전(經典)
코란. 코란은 114장으로 모하메드의 언행록(言行錄)이며, 23년간 하늘에서 자기에게  들려준 계시들로 이루어졌다고 주장.  종교, 정치, 만사의 원리를 정하는 무상(無上)의 권위를 가지고 있다. 코란은 모하멛의 사후, 20년이 지나, 제자인 아부베이커(Abubeker)와 서기 자이드(Zaid)가 집성하였다.

코란이라는 그들의 경전 21:107에는, 신약성경에서 보혜사가 오신다고 했는데 그 보혜사가 곧 마호메트라는 것이다. 코란이란 말은 reading(독서)라는 뜻이다. 전체 114장 6,225절로 되어있다. 코란은 마호메트가 히라 산 위에서 천사 가브리엘을 통하여 계시받은 내용들을 한 데 묶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마호메트 자신은 글을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가 죽은 후 편집이 되었다.


(6) 포교 (布敎)

(7) 모하멛교의 분열
① 원인  - 교리투쟁과 세력다툼
② 분파 - Sunnites - 온건파, 정통파 95 % (수니파)
          Shites   - 강경파          5 % (시아파)
          sufiism  - 신비적종파, 극소수

이슬람에 대한 비판
① 코란에는 사랑의 하나님에 대한 개념적이 내용이 없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
   르지도 않을 뿐더러 모든 것을 정복하도록 하는 군사적 종교이다.
② 성경을 부정하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란 것도 부정한다.
③ 그리스도의 사역을 부정한다.
④ 구속의 개념이 없고 구원에 관한 설명이 없다.
⑤ 천국을 말하나 모조리 쾌락적인 곳이다.
⑥ 기도를 하긴 하나 가슴에서 우러난 기도가 아닌, 제도적 관습적인 기도이다.
⑦ 죄가 무엇인가, 그 개념이 명확하지 않다.
⑧ 일부 다처주의의 교리는 음란한 종교성을 말한다.
⑨ 기독교, 유대교를 원수 종교로 간주하여 강한 분노를 유발시킨다.
⑩ 기독교의 교리를 모방하여 자기들 멋대로 조정해서 재사용한다.
한국에도 1982년 9월에 이슬람대학이 완공되었다.




제 4 장. 중세교회(中世敎會)


제4-1장. 기독교의 유럽전파

1. 개관(槪觀)
기독교가 언제 남부 영국(Southern Britain)에 처음으로 전파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로마제국의 군인들이 A.D 60-410년 어간에 영국에 주둔하고 있은 그 때에 전도 받은 것 같다.


2. 아일랜드, 스코들랜드, 웨일즈의 기독교 전파

(1) 아일랜드
아일랜드의 전도는 아일랜드의 사도로 불리우는 패드릭(Patrick:396-403)으로 시작된다. 그는 스코틀랜드 신자 가정에서 태어나 30세 부터 아일랜드 사람에게 복음 을 전하였다.  일반 민중과 귀족들의 신망이 두터웠고, 각처에 수도원을 섭립하였다.

(2) 스코틀랜드
콜롬바(Columba : 521-597) 등이 전도하였다.

(3) 웨일즈
웨일즈의 기독교 전파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 그러나 601년에 사망한 데이비드(David)에 의한 선교라고 본다.


3. 외래민족 - 앵글, 주트, 색슨족의 전도
외래 민족인 앵글족, 주트족, 색슨족 등이 5세기 경에 브리튼을 침입하여 그 대부분을 점령하였을 때 브리튼 사람들은 서부 웨일즈로 피신하였으나 이들은 결코 정복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  그래서 앵글랜드 (Angle-land)는 다른 경로를 통하여 되어졌다. 베네딕트파 수도승인 어거스틴(성 어거스틴이 아님)과 수행원 40여명이 597년 교황 그레고리1세에 의해 파송이 되었다. 이들 40명은 에델버트(Ethelbert)가 왕으로 있던 캔트(Kent)에 처음 발을 디뎠다. 이들은 큰 환영을 받았고, 켄트베리는 그리스도인들의 중심지가 되었고, 교황 그레고리는 어거스틴을 영국의 감독으로 임명하였다.

1. 프랑스 전도
(1) 전도자들
(2) 공헌한 왕 (프랑크왕)

2. 화란의 전도
화란의 사도로 불리우는 윌리부로드(Willibrord)로 말미암았다. 658년 영국 노덤브리아에서 태어나서, 20세에 아일랜드에 가서 대학입학하여 교육을 받고, 31세에 선교사들을 대동하고 유럽으로 건너갔다. 주로 네델란드, 덴마아크 지역에서 선교를 하였다.


3. 독일의 전도
[독일의 사도]로 불리우는 보니페이스(Boniface : 680-754) 역시 영국에서 태어났다.  716년에 윌리브로드와 합류하여 선교하다가 후에 독일 지역으로 가서 전도하였다.  20년에 걸쳐 10만명에게 세례를 주고 75세에 순교하였다.


제4-2장. 샤를레망 대제와 신성 로마제국

1. 샤를레망 대제(大帝)

(1) 왕위 계승과 대관식
(2) 그의 이상

□ 참고 : 어거스틴의 [神의 都城]

2. 신성(神聖)로마제국

(1) 대제국의 분활
(2) 신성로마제국건설


제4-3장. 교황과 황제(1)

1. 개관(槪觀)
2. 당시의 교회의 모습
3. 그레고리 7세

(1) 그의 생애
(2) 그의 업적

□ 참고 : Simony
사도행전 8장에 나오는 돈으로 성령을 사려했던 마술사 시몬의 이름에서 비롯된 말로서 교회의 직분을 돈으로 사고 파는 것을 말한다. 당시에는 글을 쓰지도 읽지도 못하는 교회의 지도자들이 있었다. 그것은 직분에 걸 맞는 준비가 전혀 없이 돈을 주고 그 직분을 샀기 때문이다.


제 4-4 장. 교황과 황제 (2)

1. 하인리히(Henry)4세 VS 그레고리7세 충돌

(1) 문제의 발단
(2) 전개
① 헨리4세는 교황의 반대파와 결탁
② 교황은 황제를 파문하고 로마로 소환
③ 황제는 불복하고 교황 폐위를 선언 (1076년)
④ 교황은 황제를 출교, 폐위 선언.
   황제의  신하에게도 [성사수여금지령]내림

□ 참고 - 성사수여금지령

(2) 카놋사(Canossa)의 굴욕
(3) 하인리히 4세의 복수

2. 알렉산더 3세 VS 프레드릭 2세의 싸움
3. 교황 인노센트 3세 VS 영국 존왕


제3-6장. 십자군(十字軍)

1. 원인
① 유럽의 그리스도인들이 성지(聖地)로 여기는 예루살렘을 회교도가 점령하고
   (A.D 1071년) 그곳을 순례하는 기독교도에게 모하메드교도가 될 것을 강요하고
   기독교를 학대, 약탈하므로.
② 당시 황제인 우르반2세가 "십자가를 위한 전쟁"을 역설한 후, 십자군을 조직함.
③ 십자군의 싸움에 종사하는 사람은 그들의 죄가 용서된다는 약속이 주어짐.
④ 몇 주일 지나지 않아서 기독교 세계가 십자군의 열기로 들끓음. 왕, 왕자, 귀족,
   기사, 지주, 심지어 부녀자, 아이까지.


십자군 전쟁은 유럽 전 국가들이 호응하여 신흥세력인 아랍인을 저지하려고 일어난 세계적인 전쟁이다. 이 십자군 전쟁에 전 유럽이 공동으로 같은 보조를 취할 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일까? 정치적으로 볼 때 십자군 전쟁이 발발한 11세기 유럽 각 나라들은 봉건주의로 대표되는 몇몇 왕국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형태는 나라라고 하지만 완전한 국가 형태로 조직된 것이 아니고 큰 가문의 제후였던 봉주들이 크게 부각되고 있었다. 국가가 이루어지면 사유재산은 어떻게 관리를 해야 하느냐라는 문제들이 있었다.

2. 경과(經過)

(1) 제1차 원정 (1096-1099년)

(2) 제2차 원정 (1147-1149년)
(3) 재3차 원정 (1189-1192년)
(4) 제 5차 어린이 십자가 운동 (1212-1221년)
(5) 그후 6-8차 까지 2세기에 걸쳐서 진행되어 약 500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3. 십자가 운동의 실패의 원인

① 십자가 운동이 실패로 끝난 원인은, 그 운동이 전체적인 신앙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미신과 감상주의에 근거한 것이었다.
② 십자군은 중견이 될 만한 교황에게 군사적 통솔권이 없었다.
③ 출전한 왕과 기사들 간에 서로 전쟁 목적이나 이해가 일치되지 못하였다
④ 최초의 목적인 종교열기는 식고 동방의 재물을 약탈고져 하는 불순한 동기가
   목적이 되었다.


4. 결과
유럽제국의 단결을 고취. 기독교국의 의식고취, 상공업의 발달로 봉건제도가 무너짐.

(1) 긍정적 요소
(2) 부정적 요소

제4-7장. 중세기의 미신신앙
1. 천사예배
2. 성모예배
① 초기 3세기까지
② 니케아 회의에서부터 (325년) 서로마제국 멸망기(476년) 까지
③ 중세기 (1500년까지)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부르기 시작하는 탈선은 계속해서 더 많은 변질과 탈선을 가져온다. 이같은 움직임은 동서방교회가 다 마찬가지이다. 주상 성자로 알려진 시므온은 "거룩한 어머니 마리아여 기도를 받아 주소서"라고 마리아에게 기도를 하였다.  여하튼 동방교회의 여러 교회들이 마리아에 대한 숭배로 나아간다. 이렇게 마리아에 대한 숭배는 점진적으로 발전을 거듭한다. 그래서 초기에는 마리아 경배를 엄하게 금지하고 이단으로 다스리던 것을 후대에는 마리아에 대한 예배가 공식 교리로 굳어진다. 그리하여 마리아에 대한 여러 의식들이 생겨난다.

A. 성모 마리아 동정녀 봉헌 축일 : 11월 21일
B. 성모 마리아 탄생제 : 9월 8일
C. 성모 마리아 정혼 축일 : 1월 23일 - 요셉과 결혼 기념일
D. 마리아 성심 축일 : 8월 22일 - 순결한 마음을 기념하는 일
E. 성모의 원죄 없으신 잉태 축제- 9월 9일
F. 마리아의 승천설 : 마리아가 지상생활을 마친 후에 그가 죽지 않고 산 채로
                     하늘로 영광 중에 승천했다고 하는 교리.
이리하여  마리아의 숭배는 걷잡을 수 없는 결론에 도달하여 이제 로마 카톨릭에서는 마리아 예배가 공식화되고 말았다.


3. 성자들 예배
로마 카톨릭교회와 동방교회에서는 다 함께 성인들을 예배하는 것이 하나의 전통적 교리로 전래되어 오고 있다. 그러면 과연 신앙의 위대한 성인들을 공경하고 예배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

① 신약성경에서의 가르침
② 교회 역사 속에서의 발전
③ 현재의 동방교회
4. 성화, 성물예배
5. 성례전 중 미신신앙

세례 / 견진 / 성체 미사  / 신품 / 고백 / 결혼  / 종부




제5장. 종교개혁 (宗敎改革)


제 5-1 장. 종교개혁 전의 선구자들

자연계에서도 동이 트기 전이 가장 어두운 것처럼, 교회의 역사에서도 종교개혁전이 가장 어두웠었다. 겉은 풍성하였으나 형식 뿐이었다.  설교는 소리나는 구리였고, 대부분의 사제들은 세상쾌락 쪽으로 기울었고, 백성은 무지와 미신에 사로 잡혀 있었다.   굶주린 영혼들에게 먹여 줄 양식은 없었다. 성경 부터 없었다. 잘못된 가르침과 성인숭배,형상숭배, 유물숭배 등의 각종 쓸데없는 의식만이 가득했다. 이런 암흑의 세계는 곧 종교개혁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었다. 그 종교개혁을 가져오는 선구자들이 있었으니, 종교개혁 이전의 개혁자들이라고 할 때 그 폭은 대단히 넓다고 할 수 있다. 신비주의 운동으로 개혁에 공헌한 토마스 아 캠피스나 엑카르트 등이 있고, 로마교회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준 왈도파, 알비파들도 있다. 그러나 교리적으로 로마교회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 개혁자는 위클리프, 후스, 그리고 사보나로라 등이 있다.

1. 존 위클립 (John Wycliffe) 1324-1384

(1) 생애
(2) 그의 신학
2. 요한 후스 (John Huss) 1369-1415
3.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Girolamo Savonarola) 1452-1498
4. 왈도파

(1) 유래
(2) 활동

(1) 왈도파의 기원
(2) 현재의 왈도파
(3) 왈도파의 주장과 사상
(4) 왈도파의 영향


제5-2장.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1. 그의 생애 (1483-1546)
2. 실제 투쟁

① 면죄부(免罪符) 판매를 반대하여 설교로 공격함

② 위텐베르그 교회 정문에 95개조의 항의서를 붙임
   ( 1517년 10월 31일 : 종교개혁기념일)

③ 2주 만에 전 유럽으로 파급됨

④ 지지자 - 멜랑톤

⑤ 1521년 삭소니아 제후의 도움으로 바르트부르크 산성에서 은거하며 신약성경번역

3. 개혁원리
① 이신득의(以神得義)- 믿음으로 구원얻는다. 선행이 아니다.

② 만민제사장(萬民祭司長)- 신자는 누구나 바로 하나님을 대할 수 있다.

③ 오직 성경으로 - 전통과 교황교서를 배격


제5-3장. 존 칼빈의 종교개혁


1. 그의 생애 (1509-1564)

① 1507년 7월 10일 프랑스 노욘에서 출생
② 부친은 법율가며 감독서기, 모친은 경건한 신앙인
③ 교육 - 14세 때 프랑스로 유학 신학과 법학공부
④ 올네안 대학교수로 있으면서 헬라성경과 독일 개혁저서를 연구함
⑤ 1533년 복음주의 연설을 기초하다 박해를 받아, 스위스의 바젤로 피난함
   여기서 [기독교강요]을 저술
⑥ 제네바에서 개혁을 하면서 종생을 바침 (1564년 5월 24일 55세 일기)

2. 제네바에서 그의 활동

① 파렐(Farel)의 요청으로 제네바로 가서 개혁에 종사함
② 그의 지위는 제네바의 평의회의 목사의원이자 성경해석자로
   특별지위를 가짐
③ 파렐과 함께 신정일치(神政一致)의 이상도시 건설을 주장하여
   풍속개량 및 규율엄정에 힘씀
④ 시민들이 견디지를 못하여 반항이 일어나 칼빈과 파렐은 국외로 추방됨
⑤ 스트라스버그에 피난하여 3년간 칼빈주석을 작성
⑥ 1541년 다시 제네바의 초청으로 23년간 개혁에 성공함
⑦ 대학을 설립하고 학장이 됨

3. 유럽에서의 칼빈의 세력
① 프랑스 - 휴거노파
② 영 국  - 청교도
③ 스코틀란드 - 죤 낙스
⑤ 네델란드, 독일의 프리드리히 3세 등


4. 칼빈주의 발전이유
① 신학이 통일적이기에
② 교회기치가 선명하여 세계 각국에 적용되기 쉬움
③ 기독교 생활훈련에 중점을 둠
④ 훌륭한 후계자 [베자]가 있었음


5. 칼빈의 신학
① 하나님의 주권, 섭리 주장
② 예정설
③ 속죄설 - 죄의 벌할 필요를 인정, 형벌대수설
④ 성찬 - 기념설을 주장. 영적은혜에 치중
⑤ 칼빈주의 5대강령
   a. 인간의 전적타락
   b. 무조건 선택
   c. 제한속죄
   d. 불가항력적인 은혜
   e. 성도의 절대보호


♠ 참고 -  칼빈의 설교
기독교는 처음부터 설교를 중시(重視)하는 종교이다.  예수님을 비롯하여 사도 바울이나, 베드로, 그리고 초대 교부들이 그러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카톨릭의 부패와 함께 없어져 버렸으나,  종교개혁을 통하여 다시 회복되었다. 종교개혁자들의 설교는 언제나 성경이 기초가 되었다.  세상윤리, 사회개혁, 문자적 비평 등의 설교는 아무리 아름다운 것이라 할 지라도 우리에게 하나님의 비밀을 알려주지 못하고 영혼의 갈증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설교자로서 칼빈의 활동은 스트라스버그(Strasburg)에서의 3년간(1538-1541년)과 다시 제네바(Geneva)에서 약 20년간이었다.  칼빈의 설교는 속기사인 프랑스 사람 Denis Raguenier이 속기한 1549-1560년 11월 3일 까지의 설교가 남아있다.  더러는 빠진 것도 있지만 약 2,000편의 설교가 문서화되어 있다.


제5-4장. 칼빈주의 VS 알미니안주의

1. 알미니안 (Arminius)
① 알미니우스라고 불리우는 야곱 헤르만은 1560년 암스테르담에서 출생함
② 제네바에 유학하고 1588년 암스테르담 목사가 됨
③ 학식과 웅변이 뛰어나고 성품이 온화함
④ 1603년 라이덴 대학의 신학교수가 됨.  1609년 사망
⑤ 인간의 행위에 의한 구원을 설파함.
⑥ 그는 1609년에 사망하였으나, 그의 추종자들로 인하여 네델란드의
   신교에서는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간에 큰 충돌이 일어났다.






2.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의 다른점



3. 돌트(Dort)회의

① 1618년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의 상이점(相異點)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종교회의를 돌트에서 개최함.
② 1618년 11월 13일 - 1619년 5월 9일의 9개월에 걸쳐서
   145회의 회의를 함
③ 회의 도중 알미니안 파가 회의 결정을 불복결의하여 축출함
④ 문서로 토론함
⑤ 5월 6일 칼빈주의 신조공포.
   결의 : 하나님의 선택은 멸망할 자 중에 구원얻을 자를 선택함
⑥ 300여명의 알미니안주의 자들이 공직 박탈의 처분을 받고 국외로
  추방을 당했다.
그러나 가슴을 뜨겁게하는 그의 경건은 영국에 큰 영향을 미쳐서 후에 존 훼슬리(John Wesley)의 감리교로 이어졌다.



제5-5장. 영국의 개혁(改革)


1. 헨리(Henry)8세  1509-1547
① 죽을 때까지 개혁신앙의 원수로 지냈다.
   교황 레오10세(LeoX)로 부터 [신앙의 수호자]라는 칭호까지 받았다.
② 그의 이혼사건으로 인하여 교황과 사이가 벌어짐.

♠ 참고 : 이혼사건
헨리8세는 죽은 동생 아더(Ather)의  부인인 카타리나(Catherine)와 결혼 을 을 억지를 부려 교황의 승락을 받아 하였으나, 15년 후에 아들이 없다고 트집을 부려, 이 결혼이 무효임을 선언해 달라고 교황에게 요청하였으나 당시의 교황인 클레멘트 7세는 거절함.

② 후에 궁녀 앤 보렌(An Boleyn)과 결혼(엘리자베스1세 여왕의 生母)
   교황은 이것을 반대함
③ 교황과 단절, 신교도인 캔트베리 대주교인 토마스 크랜머(Thomas Cranmer)
  의 승인을 받아 결혼함.영국국교 창설.교회수장령(敎會首長令)발포함 (1535년)


2. 에드와드6세
① 헨리8세 셋째 왕후 쟌 스모울(Jane Seymour)의 출생으로
   9세에 즉위하여 7년간 재위함. 개신교도인 크램머가 섭정함.
② 대륙으로부터 개혁파들을 받아들임.  칼빈과 자주 연락함
③ 교회 내의 우상제거


3. 메리여왕 즉위
① 모후인 앤 보렌의 결혼이 불법화된 후 사생아 취급받아 20년 규중생활을
   하다  1553년 37세의 나이로 즉위
② 즉위 즉시 로마교에 복귀함
③ 수많은 신교도를 죽임. 300여명 화형시킴. 크램머도 화형으로 순교
   개신교도들은 유럽으로 피신함.
                 "우리는 오늘 하나님의 은혜로
                   영국에서 결코 꺼지지 않는
                양초가 되어 불타게 될 것입니다."

④ 민심을 잃은 후, 1558년 실의의 일생을 마침


4. 엘리자베스 여왕
① 1558년 26세로 즉위하여 46년간 재위, 결혼않음.
② 정치를 잘 하였으나, 신구교 양교도를 철저히 탄압하고, 영국 국교회에의
   복종을 강요함.
③ 교회수장령을 국회에서 통과시킴 (1559년)
④ 이때에 청교도 운동이 일어남
5. 죤 낙스(John Knox)의 스코틀랜드의 개혁


제5-6장. 프랑스와 네델란드의 종교개혁

1. 프랑스의 위그노

(1) 프랑스의 환경
(2) 바돌로매 대학살과 낭트칙령
2. 네델란드의 종교개혁


제5-7장. 재세례파와 예수회


1. 재세례파

(1) 기원
스위스 취리히에서 시작된 운동이다.  쯔윙글리의 성경관이 지나치게 보수적이라고 생각한 그레벨, 만즈,후프마이어등이 결성하여서 1525년 부터 행동을 취하였다.


(2) 조직
(3)결과
(4) 그들의 신앙


2. 예수회

(1) 개관
① 1534년 스페인 사람 익나티우스 로욜라 (Ignatius Loyola)가 창설한
  카톨릭 단체이다.
② 주된 목적은 개신교를 완전히 박멸하는데 있었다.
③ 오직 교황에 대하여서만 책임을 지고 다른 모든 법들에 대하여서는
   제재를 받지 않았다.
④ 귀족 자제들의 교육을 통하여 침투한 그들의 영향력은 거대한 것이었다.
⑤ 예수회의 가장 악명높은 원리는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카톨릭 교회에 유익이 된다면 살인도 서슴치 않았다. 개신교를 위하여 낭트칙령을
   반포한 앙리4세가 이들의 손에 의하여 암살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닌 것이다.


(2) 예수회의 금지와 부활
① 예수회의 타락
㉠ 유명한 지도자가 나오질 않았으며
㉡ 부(富)을 탐내어 안일을 구하였으며
㉢ 각종 음모들이 드러나 약점이 노출되었으며
㉣ 중국에서 돌아온 선교사들이  중국 풍속 습관에 영합하여 기독교
   본질을 망각하는 행동이 나타남

② 로마교 제국에서 추방됨
㉠ 파라과이에서 토인을 훈련시켜 스페인과 포루투갈에게 저항한 사건이
   일어났음
㉡ 포루투갈 국왕 요셉 1세를 암살할려는 음모가 예수회의 계획으로 몰림
㉢ 1759년 포르투갈과 그 영지에서 추방되고 재산은 몰수됨
㉣ 프랑스와 스페인에서도 같은 결과가 나타남
㉤ 1773년 교황 클레멘트 14세는 예수수회의 금지를 명함

③ 1814년 교황 비오7세가 다시 예수회의 재건을 허락함.
   지금은 무서운 세력으로 자라고 있음.


제6장. 근대의 기독교


제6-1장. 청교도운동, 웨스트민스트회의

1.청교도 운동

(1)청교도의 생성
엘리자벳 영왕이 즉위하니 대륙으로 피난갔던 개혁교도 800여명이 영국으로 돌아왔다. 이들은 제네바풍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로서 로마교 개혁하려 하기 때문에 이들을 청교도라고 하였다. 엘리자벳 여왕은 종교통일령으로 이들을 핍박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성경적 근거가 없는 예배는 하나님의 위엄에 대한 모독으로 생각하였으며 성경으로 증명할 수 없는 복장과 의식에 대하여도 반대하였다.


(2)지도자와 학자들
● 토마스 카트라잇 (Thomas Cartright) 1535-1603
신학교수로 박학 웅변에 능하였으며 성경에 합한 정치는 장로정치라고 주장하였다.

● 존 번연 (Bunyan John) 1628-1688

● 밀턴 (Milton John) 1608-1674


□ 엘리자베드 치세하의 영국 청교도
17세기에 들어와서 영국에서 청교도 운동으로 시작된 것은 엘리자베드 여왕의 치세 때이다. 청교도 신앙은 영국 국교회 안에서 급속히 대단히 막강한 세력이 되었다. 엘리자베드의 교회 정책은 두 개의 의회 법령에 근거한 것이었는데, 그것은 여왕을 영국 국교회의 최고 통치자로 선언하는 [수장령](Act of Supremacy)과 [통일령](Act of Uniformity)이다.  이 통일령에 의하여 다른 기도서를 사용하는 것은 위법이고, 주일이나 성일(聖日)에 교회 의식에 한 번 불참하면 1실링씩의 벌금을 물게 하였는데, 이는 노동자의 일주일 임금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2.웨스트민스트 회의 (1643. 7. 1)
(1) 회의 동기
● 찰스 1세가 즉위하여 왕권신수설을 강조하고 알미니안파를 우대하며 칼빈파에
   동정적인 국회를 탄압하여 국회를 소집치 않음.

● 세금과 종교적인 문제로 반항하는 스코틀랜드와 전쟁하기 위하여 1640년
   국회를 소집하니 칼빈파에 동정적인 하원에서 비협조적으로 나옴.

● 의회는 감독정치를 폐지하고 웨스트민스트 신학 시회의를 소집하여 영국의
   교리와 신조와 정치, 의식을 새로 제정코자 함.
● 회원 :  목사 121명  귀족 18명  하원의원 20명
● 결의 :  신앙고백서 (1648년 통과)  대,소요리문답 (1647년 통과)  예배 모범서

□ 초기 스튜어트 왕조하의 청교도 신앙

□ 후기 스튜어트 왕조하의 영국의 청교도 신앙

(2) 국왕과 전쟁

제 6-2 장 . 기독교의 미국전파

1. 청교도의 피난과 식민지 건설

● 종교의 핍박을 피하여 시작됨.
● 1620년 180톤 범선 메이 플라워 호를 타고 120여명의 청교도들이
   뉴 잉글랜드에 도착함. 지도자 - 존 로빈슨 등
● 1630년 살렘(Salem)에 900여명의 청교도들이 찰스 1세의 국교신봉정책이  더 강경
   해 짐으로 청교도들의 정치적, 종교적 픽박을 피해 옴.
● 1640년까지 약 2만 여명의 청교도들이 이민 옴.


2. 대학건설

1636년 Harbard
1700년 Yale
1746년 Prinston, Columbia
1754년 Brawn

1636년 매사추세츠의 캠브리지에 하바드 대학이 세워지면서 매우 중대한 발전이 있었다. 하바드 대학은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교육기관으로 그 이름은 영국인 죤 하바드 (Havard :1607-1638)의 이름을 기념하여 붙인 것이다. 하바드는 1638년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슬하에 자녀가 없었으므로 재산의 절반과 장서 320권을 자기의 이름으로 세워지는 대학에 기증하였다.


3. 초기 기독교 지도자

● 요나단 에드워드 (Johnatan Edward)
칼빈신학의 교조 - 예일대학 교수, 프린스턴대 총장

● 죠지 훳필드 (George Whitefield)
영국의 부흥사, 1740년 미국에 이주 활동

* 감리교의 큰 별들을 참고하라.


제 6-3 장. 경건파와 모라비아 교도


1. 경건주의

(1)경건주의 (Pietism)
독일에서 부흥한 루터교는 스콜라적 엄격한 교리적 해석을 전헤로 하여 누구나가 다 여기에 순종할 것을 요구하고 성례에 참가할 것을 요청하면서 이것이 마치 기독교 생활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기에 이르고 있었다. 이들은 평신도의 소임이 수동적인데 끝나도록 만들고 있었다.  경건주의는 이러한 스콜라적 경향에서 나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경험과 감정의 중요성을 고려하고 평신도들 역시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건설해 나가는데 적극적인 관여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2)중심적인 인물

● 쉬패너(Philipp Jakob Spener) 1635-1705
1666년 프랑크푸르트 교회의 목사가 된 그는 당시 교회의 고갈된 심령생활에 환멸을 느끼고 개혁을 기도하였으나 교권을 잡은 사람들의 압력때문에 할 수 없이 같은 마음을 품은 몇 사람과 그의 집에 모여 성경과 기도, 설교를 위한 소집단의 종교모임을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경건주의의 시작이다.

● 프랑케 (August Hermann Francke) 1663-1727
1687년 라이프지히 대학 강사때 학생들과 성경 연구때 성령의 신비로운 경험을 함. 쉬패너와 몇 달 지내는 동안 경건주의 신앙을 받아들임. 할레 대학의 교수로 지내며 목회까지 함. 고아원 빈고아동을 위한 위탁학교등을 세움. 모든 일을 무일푼으로 시작하여 다만 하나님의 은총만을 기도로써 간구하여 이룩함. 뛰어난 인품으로 그의 신앙은 경건주의 신앙의 한 표본이 됨.

♠ 참고 : 경건주의의 본거지 - 할레 대학
유명한 점은 독특한 선교열에 있다. 프로테스탄트가 아직 선교사명에 눈을 뜨지 못하고 있을 때 이 사명을 경건주의가 감당하였다. 18세기에 60여명의 외국 선교사들이 할레대학 출신자들이었다.

♠ 경건주의의 영향
독일,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까지 파급되었다. 대중들의 종교적 기상을 순수와 경건으로 일깨워 청순한 국민생활의 진흥에 큰 공헌을 남겼다. 선교의 질적인 향상, 목회자의 영적능력 향상, 청년들에 대한 기독교 훈련의 실천, 평신도의 교회 생활 참여 등 경건주의가 끼친 영향은 실로 크다.

2. 모라비아 교도

경건주의가 불러 일으킨 결과로 진젠드로프 백작의 모라비아 형제단
(Moravian Brethren)을 말한다.

1) 진젠돌프 백작(1700-1760)
1700년 출생하였다. 쉬패너와 막연한 친구로서 어릴 때 경건한 할머니 캐더린에게 양육을 받았다. 할레에 있는 경건주의의 거두 프랑케가 세운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10-17세) 그의 신앙은 경건주의의 신앙이 됨. 보헤미아(Bohemia)의 후스(Huss)교회가 30년 전쟁이후 박해와 피해를 받아 모라비아에서 숨어 살다가 1722년경 독일의 작센지방으로 피신하였다. 진젠돌프는 이들에게 촌락을 만들어 안주하게 하였다.


제 6-4 장. 감리교의 큰 별들 (1)

1. 당시의 영국모습

17세기 말부터 영국 교회나 분리주의자들의 교회에 참식하기 시작한 영적 고갈은 심각하였다. 합리주의가 모든 종교 사상가들을 좌우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라야 기껏 하나님의 재가를 받은 도덕 체계로 밖에는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2. 웨슬레 형제의 Holy Club
3.죠지 휫필드 (Whitedfield) 1714-1770


제 6-5 장. 감리교의 큰 별들 (2)

4. 웨슬레 형제의 회심
5. 감리교회의 성립과정
6. 감리교의 특징
● 웨슬리는 "Society Tickets"란 것을 창안해 냈다. 이것은 성도들의 신앙의 진실성을 보증한다는 의미와 신앙에서 떨어져 나간 이들을 걸너내는 방안으로 고안된 제도였으나 오래 적용하는 과정에서 커다란 실효를 보았다.

● "속"(Class)라는 것이다.
● 존 웨슬레의 사역은 끝이 없었다.
● 신학은 알미니안의 입장에 서서 칼빈주의를 적대하였다.
● 존 웨슬리는 1791년 3월 2일 런던에서 마지막까지 복음의 기사로 싸우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가 영국의 중류나 하류의 종교적 조건을 혁신시킨 공헌과 미국에 끼친 영향은 길이 기억될 것이다.

● 영국 국교회에 찬송가를 도입한 것이다. 종교개혁 시기부터 18세기 까지는 운문으로 번역한 시편을 노래하였는데 이것은 청교도의 전통이며 칼빈으로 유래된 습관이었다. 그러나 아이작 와츠(Isaac Watts)는 시편위주의 찬송가는 신약의 부분이 결여되었다고 보완을 주장하며 수 많은 찬송가를 지었고 찰스 웨슬레 역시 많은 찬송가를 지어 현대적인  찬송가를 보급하였다.

제 6-6 장 19세기의 미국의 기독교

1. 19세기의 부흥
2. 다양한 이단발생
● 1792년 스웨텐의 이단 임마누엘 스웨덴보그 (Emanuel Swedenborg)의 추종자들이 [새예루살렘 교회]를 세움. 삼위일체부인, 속죄, 복음의 전반적 메세지 부인.

● 몰몬교 발생 - 1820년 죠셉 스미스 (Joseph Smith)
● 안식교 - 1830년 윌리엄 밀러 (William Miller)라는 농부로부터 시작.
            1843년 그리스도의 재림과 세상의 멸망을 예언.
            그후 엘렌 화이트여사가 창시.
● 크리스챤 사이언스 (Christian Scientists)
● 여호와의 증인


3. 주일학교의 큰 부흥
주일학교는 지역 교회의 필수적인 하나의 기관이 됨.


4. 19세기 위대한 신학자와 전도자 배출
● 신학자 : 찰스 핫지 (Charles Hodge)와 그의 아들
            알렉산더 핫지(A.A.Hodge)가 조직신학의 기초를 세움.

● 전도자 : 드와이트 무디 (Dwight Moody)
            보스턴과 시카고에서 점원 출신. 중년부터 생키(Sankey)와 함께
            전도여행을 하여 대 부흥을 일으킴. Gospel Song 도입.


5. 세계각지로 선교
1890년 미국인구 62,622,000명중 57,000.000명이 그리스도인이었고, 복음 사역자는 111,000명이었으며 143개 교파와 단체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19세기를 마감하면서 미국의 교회는 많은 일꾼들을 세계로 보내었다. 열심 있고 활동력 있는 남녀가 동원되었다. 부강해진 나라의 성도로서 세계적인 선교기관에 많은 액수의 돈을 지원하였다.



제7장. 한국교회사


제 7-1 장. 초기의 선교

1. 초기의 선교

(1) 토마스 목사의 전도와 순교
① 1840년 영국 웨일즈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1863년 목사되어 중국에 선교사로 옴.
② 상해에서 천주교도 金子平을 만나 조선의 사정을 듣고 전도결심.
③ 1865년 9월 중국인 어선을 타고 옹진방면 순회, 백령도에서 두 달 전도
④ 샤만호 내한 때 전도차 편승하여 목 잘림의 순교당함 (1866.9.2 27세)

(2) 로쓰목사의 고려문 전도
① 스코틀랜드의 목사로서 친구인 토마스목사의 순교지인 한국과 가까운
   우장에서 활동. 고구려 古都인 즙안현에서 전도.
② 돌아오는 길에 조선인이 많이 사는 고려문에서 전도.
③ 네 명의 청년 믿음 - 백홍준, 이성하, 이응찬, 김진기
④ 백홍준 - 최초로 세례를 받음(언더우드에게) 초대조사, 후일 장로.


(3) 최초의 교회 - 소래교회
① 서경조, 서상륜 형제가 우장에서 백홍준 통해 예수 믿은 후
② 의주에 와서 10명이 예배 드림.
③ 황해도 소래에 교회를 세움.


2. 초기 선교사들의 활동

(1) 알렌의 내한
① 1858년 미국 오하이오주 출생의 의사. 선교사로 중국에 옴.
② 1884년 상해에서 조선으로 옴.
③ 1884년 12월 갑신정변 때 근위대장 민영익의 중상을 3개월만에 완치시킴.
④ 국왕의 시의가 되고 참판벼슬을 받음.
⑤ 1885년 2월 광혜원 개설
⑥ 1901년 주한 미국 대사가 됨


(2) 최초의 선교사
언더우드(장로교)와 아펜셀러(감리교)가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에
인천에 도착함.

● 언더우드
1859년 영국 런던태생, 1884년 미국에서 신학졸업 후 1885년 인천에 옴.
알렌의 병원에서 병자구호. 1887년 새문안교회 설립. 1901년 경신학교세움.
Y.M.C.A를 통하여 고등교육 (연세대전신) 1916년 별세. 그의 아들, 손자에 걸쳐 계속하여 한국에서 선교하고 있음.

● 아펜셀러
1858년 미국 루터교 가정에서 출생. 1902년 목포에서 성경번역위원회 참석차 배 편으로 가다 사고로 소천. 딸이 이화대학, 배재학당 등 세우며 전도.



3. 교회의 부흥

(1) 선교의 견인차 - 네비어스 선교정책
네비어스는 중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였는데, 한국에 초정되어 와서 그의 선교정책을 강의하였는데 이것이 한국선교의 정책으로 채택되었다. (1893년)

① 선교사 각자의 광범위한 순회전도
② 자립전도 - 한 사람을 전도하였으면 그 사람을 성경교사가 되게 한다
③ 자립운영 - 모든 신자들을 선교사를 의지하게 말고 교회의 운영과 기구조직을
            감당할 수 있는 범위에서 감당케 하여 자립하는 교회가 되도록 한다
④ 자립전도 - 모든 교회건축시 조선인 그들 자신의 힘으로 건축하도록 한다
⑤ 체계적인 성경연구
⑥ 성경교훈에 따라 엄격한 생활적용과 권징
⑦ 성경번역 진행과 보급에 노력 (유료판매)

(2) 초기 전도의 삼대 방법
① 문서 전도
② 의료전도 - 광혜원, 세브란스병원, 나병원 등 수 십개의 교회세움
③ 교육전도 - 배재, 경신, 이화, 정신, 숭실, 계성 등 수 십개 학교세움


(3) 조선 독노회 창설
① 1907년 9월 17일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최초의 목사 7명 - 서경조, 길선주, 이기풍, 양전백, 한석진, 송인서, 방기창
  제주도 선교사 파송




제 7-2 장. 한국교회의 부흥운동

1. 평양 부흥회

① 1907년  1월 6일 장대현교회에서 10일간 계속
② 낮에는 성경공부, 밤에는 부흥회
③ 1.14 방위량목사, 이길함목사 인도시 성령이 강하게 임함
   회개와 통성기도소리가 폭포수소리 같음. 새벽 2시까지 계속
④ 이 성령의 불길이 전국 각처로 퍼짐.


2. 한국인 부흥사의 활동

(1) 김익두 목사
황해도 신천출생. 청년시 불량배. 일자 무식군.
목사가 된후 전국 각지에 다니며 부흥회 인도. 신유로 부흥일으킴.
교향에서 새벽기도 드리다 공산군 총에 맞아 순교.


(2) 길선주 목사
① 1869년 평남 안주에서 출생
② 29세 때 예수믿고 1901년 장대현 교회의 장로가 됨. 1907년 목사
③ 1927년 순회전도로 나섬.
④ 구약 300독, 신약 1,000독,  계시록 10,000 讀을 한 성경박사
   신학은 보수적, 계시록 강해는 탁월함.
⑤ 40년 목회생활 중 설교 10,070회, 설교들은 사람 약 500만명
   60여개의 교회를 세움.


3. 불건전한 신비주의

(1)황국주
황해도 출신으로 백일기도를 통하여 특별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함. 자신의 목은 잘리우고 예수의 목이 붙었으며 머리도 피도 마음도 다 예수化 되었기에 자기를 예수라고 하였다. 소문듣고 예수의 化身을 볼려고 수많은 인파가 전국에서 모여들었다. 피가름실시, 남여혼숙을 하였다.


(2)이용도
① 1901년 황해도 금천군 출생. 몸은 허약하였으나 성격은 다정다감함.
② 삼일운동에 가담. 1933년 33세 때 폐병으로 세상을 떠남.
③ 신앙은 온 몸을 바쳐 주님위해 헌신한 사람임. 주님께 미친 사람이라하여
   "聖狂"이라는 는 별명을 얻음.
④ 기도를 하면 침식을 전폐하고 몇 날이 가는지도 모르고 기도함.
⑤ 설교는 2-6시간 정도하며 격식에 매이지 않음.
   설교의 내용은 사랑, 위로도 있으나 부정, 불의, 미지근한 신앙,
   세속화된 교역자들에게는 맹렬히 공격함.

⑥ 잘못
그가 예수를 사랑하고 온 몸 던져 헌신한 것은 모든 사람이 인정하였지만 그 자신을 고난당한 예수님과 동일시 한 것이라든지, 예수와 사랑의 융합을 통하여 혈연적 결연(피가름)을 한다고 믿은 것 등은 잘못된 것이었다.

⑦ 1933년 장로교에서 이단으로 단죄함.


제 6-3장. 한국교회의 수난


1.신사참배(神社參拜)

(1)신사참배 가결
① 일본은 신도(神道)를 통하여 국민정신 통일과 군력증진을 꾀함.
②  1계명에 위배되기에 기독교 지도자들이 반대함.
③  1937년 기독교 학교들이 폐교 당함. 선교사들이 쫒겨가고,
    1941년 선교사 42명이 투옥됨.
④ 1938년 조선장로교 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는 죄가 아님을 결의
   회장 - 홍택기 목사   부회장 - 김길창 목사
⑤ 방위량, 한부선 선교사 발언못하고 축출당함.
⑥ 교회 지도자 70여명 구속. 20여명이 6-7년의 감옥생활 후 해방으로 출옥
   이들을 출옥성도라 한다. - 한상동, 주남선, 손양원, 이기선, 이인재목사 등


(2)신사참배에 반대한 지도자들

●주기철 목사
1897년 경남 창원출생. 1926년 평양신학교 졸업. 초량교회, 마산문창교회, 평양산정현교회 시무. 목회는 설교중심의 목회, 잘못이 있으면 가차없이 책망하였으며 불의를 보고 못참는 성격. 1938년 구속 7년 옥고후 평양감옥에서 순교.

●최봉석(최권능) 목사
1869년 평양출생. 1913년 평양신학교 5회 졸업.  밤에는 기도 낮에는 "예수천당"을 외치며 전도. 전도않는 목사는 벙어리 목사라고 함. 1939년  신사참배거부로 투옥. 6년 동안 감옥생활. 1944. 3. 1 - 4. 10까지 40일 금식기도후 병원에서 별세. 75세.

●손양원 목사
1902년 경남 함안 출생. 1938년 평양신학교 졸업. 나환자교회인 여수 애양원교회 시무. 언행일치의 목사. 1940년 구속후 5년간 옥고를 치루고 해방으로 석방. 여순반란 사건 때 두 아들이 순교. 1950. 9. 28 공산군에서 순교당함.

●박관준 장로
1875년 평북 영변에서 출생. 30세에 예수를 믿고 의학공부하여 의사가 되어 구제와 전도에 힘씀. 총독에게 신사참배의 부당성 경고. 일본 국회에 진정서를 투척. 1941년 평양 감옥에 구속. 1945년 1월 1일 부터 70일간 금식 기도후 별세.

●주남선 목사
"살아있는 순교자"라고 부름. 1888년 경남 거창출생. 1919년 거창교회 장로. 1930년 평양신학교 졸업. 거창읍 교회에서 목사로 22년간 시무. 신사참배로 7년간 옥고를 치룸. 1946년 고려신학교(現 고신대학)설립. 1951년 64세로 별세.

●한상동 목사
부산태생. 1937년 평양신학교 졸업. 초량교회, 마산문창교회, 평양산정현 교회, 부산삼일교회 시무. 신사참배반대로 1940년 구속. 해방후 출옥. 주님선 목사와 고려신학교(現 고신대학)설립. 고려파 설립.


♠ 참고 : 신도(神道)
일본국민과 황족은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직계자손이며 특히 천황은 현인신(顯人神)이어서 일본 천황은 세계를 지배해야 한다고 주장. 신사(神社)를 세우고 온 국민으로 하여금 경배를 강요하였다. 역대 천황과 왕후의 혼령과 무사들의 영혼을 섬기도록 함.



2. 해방후 북한 교회

① 38선 이북에 소련과 북한 공산정부는 종교말살정책을 펼침.
   헌법에 [종교자유]가 있음과 동시에 "반대할 자유"도 있다고 함.
② 1946. 11. 3 총선을 주일에 실시.
③ 김일성 외숙 강양욱 목사를 통하여 기독교연맹 결성 (어용단체)
④ 목사, 장로에게 2-3명의 노동당원을 배치하여 위협과 설득.
⑤ 6.25 직전 예비검속과 학살.
⑥ 9.28 수복시 대량학살.







제 6-4 장. 장로교의 분리

1. 고려파의 분리

(1)분리
①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옥고를 치룬 옥중성도들이 교회의 정화(淨化)를 건의
   신사참배에 가담한 목사, 장로는 2개월간 자숙후 시무투표를 통하여 진퇴
   결정토록.
② 이 제안이 노회와 총회에서거부됨.
③ 1946. 9. 20 고려신학교 설립(現 고신대학).
   한상동, 주남선, 박윤선 목사 등 주축. 교장 - 박형룡 박사
④ 1948년 경남노회에서 고려신학교에 학생추천을 않을 것을 결의.
   한상동 목사 노회 탈퇴선언. 68개 교회가 동조. 노회가 사과.
⑤ 1948년 경남노회가 고려신학교 인정을 취소.
   1949년 35차 총회에서 고려신학교 거부.
   고려신학교측 인사 총회참석못하게 함.
⑥ 이에 고려신학교 측 옥중성도를 중심으로 총노회(경남법통노회)조직.
   고려파 출발.- 한상동, 주남선, 손양원, 이인재, 오종덕 목사등  주축.


♠ 참고 : 경남법통노회의 선포문

1.선포문
① 우리는 총회를 사랑한다.
   우리는 총회를 향하여 충고, 경고, 항의로 반성과 시정을 요구하였다.
   이는 총회가 싫다든지 미워서가 아니라 장중의 보옥과 같이 사랑하기
   때문이다.

② 총회의 강경한 태도
   반성과 시정요구에 격분과 증오감으로 반답하고, 주종의 순서를 모르고
   옥석의 분간을 못하고 오히려 우리를 이교파적이라고 하여 분리단안을
   내림.

③ 여호와의 지시를 기다려 행동함.
   우리는 앞날의 서광을 전망하고 은인자중 하였다.
   신학사상과 신학노선에 따라 교회 행정이 갈라지게 되었음.

2. 조직취지
   현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는 본 장로회 정신을 떠나서 이교파적으로 흐름으
   로 이를 바로 잡아 참된 예수교 장로회를 계승키 위하여 총노회를 조직한다.


3. 조직
① 총회장 - 이약신 목사
② 부회장 - 한상동 목사
③ 서 기  - 홍순학 목사
④ 회록서기 - 오병세


2. 기독교 장로회의 분리
① 자유주의 신학의 기수인 김재준목사가 조선신학교 설립(現 한신대학)하여
   성경유오설과 신신학을 가르침. 축자영감설부인, 모세오경저작 부인 등
② 이에 1952년 4월 37회 총회에서 김재준교수를 면직시킴.
③ 여기에 경기노회는 총회에 시정을 요구
④ 1953년 6월 10일 한신대 강당에서 분리 총회


3. 합동과 통합의 분리

(1)원인
① W.C.C.문제
   박형룡박사는 W.C.C가 용공(容共)이며 신신학(新神學)이며
   에큐메니칼 운동이라고 비난하고 탈퇴를 주장.
② 경기노회의 총대 문제

(2)분리
① 44회 총회가 1959. 9. 24 대전중앙교회에서 열림.
   4일간 공전(空轉)하며 개회도 못하고 깨짐.
② 연동총회 (統合) 9. 29 연동에서 속개. W.C.C와 관계 현상유지
③ 승동총회 (合同) W.C.C 탈퇴. 에큐메니칼 반대



제 6-5 장. 신흥종교의 난립


1.원인
사회적 혼란과 전몰장병유족, 전쟁후 미망인, 고아, 이산가족, 실업자 증가, 경제적 불안, 정치적 혼란 가중에다 교회 분열 까지 겹쳐서 신자들에게 '말세가 되었으니 잘 믿어야 겠다'는 움직임이 일어났고, 교회가 세속화되는 경향이 있으니 금욕생활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2. 신흥종교의 주장
① 현실교회 비판 - 기성교회는 썩었고 타락했기에 은혜받을 수 없다
② 독선주의 - 전도관은 "신앙촌에 입주하는 144,000명만 구원받을 수 있다"하여
              많은 사람들이 재산을 팔아 다투어 입주함.
③ 교주숭배 - 통일교의 문선명은 재림주로 무죄성을 주장.
              전도관의 박태선은 동방의 의인, 감람나무, 영모(靈母)로 불리움.
④ 신비체험을 지나치게 주장
⑤ 샤마니즘 - 신흥종교는 샤마니즘을 핵으로 한 온갖 민간신앙과 혼합된 교리를
              가지고 있다.
⑥ 재림사상 - 재림이 임박했다고 시한부 종말론을 강조
⑦ 선민사상 - 한국에 재림예수가 온다. 한국은 새이스라엘이다
⑧ 기 타


3. 신흥종교의 종류요약

(1)용문산 기도원
① 설립자 : 나운몽
   1914년 평북출생, 일본 와세다대 전문부 중퇴. 1947년 용문산에 와 [애향숙]
  을 재건. 6.25 당시 신비체험을 하였다고 함. 기도원 설립후 전국 각지에 집회

② 주장 - "공자, 석가도 神이 보내신 동방의 선지자이다. 복음이 전파되기 전
          사람은 유교나 불교를 통해서도 구원을 받았다. 진리는 形에 있지
          않고 質에 있으니 진리이면 유교나 불교나 기독교나 하나가 된다."
③기도단 조직 - 1960년. 한 사람이 두 사람 위해 기도하고 그 두 사람이
       또 각각 두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제도, 기하급수적으로 확대가 됨.
④ 교회는 이단으로 정죄. 41회 장로회 총회시 박태선, 나운몽, 노광공 등

(2)통일교
① 창설자 : 문선명
② 1920년 평북 정주출생, 와세다대학 전기부 중퇴. 1946년 신비주의 운동을 함.
   1949년 간음혐의로 수감. 3번 결혼.
③ 1954년 유효원의 도움으로 통일교 창설
④ 기본교리 - 원리강론
   포교대상 - 기성 교회에 불만가진 지식층 젊은 사람들


(3)전도관
① 창설자 : 박태선
② 1915년 평북 영변출생. 동경공업학교졸업. 남대문교회 장로 역임.
③ 부흥운동 - 1955. 3. 26 부터 10일간 남산 천막집회시 헌금으로 금반지 만석
              되가 나옴. 헌금은 부지기수. 목사 100여명이 안수기도 받음.
              전국을 누비며 대중집회를 가짐.
④ 칼빈의 예정설 부인, 살인자라고 욕함.
   기성교회는 마귀의 전당이니 구원이 없다고 함.
⑤ 천년왕국으로 신앙촌 세움
   제 1 신앙촌 - 1957년 소사 (100만평 규모)
   제 2 신앙촌 - 1962년 덕소 (50만평 규모)
   제 3 신앙촌 - 경남 기장 (100만평 규모)
⑥ 주장 - 자신이 감람나무, 동방의인, 생명수, 피가름 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