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영인 목사의 ‘예수님 인성의 기능구원은?’ 그 답변에 대한 論評
선지자선교회
(서문)

초대교회사 때는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교리 논쟁이 심했습니다. 그 논쟁을 보면 예수님의 인성만 인정하고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유대교적 사상을 가진 저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신성만 인정하고 예수님의 인성을 부인하는 영지주의적 사상을 가진 저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니케아 회의에서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인정하는 결정을 하였습니다.

아폴리나리우스는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이 어떤 구조로 되어 있나 하는 것을 자세하게 나타내기 위해서 예수님의 신성 곧 로고스가 예수님의 인성의 영혼의 자리를 차지했다고 말함으로서 오히려 이단설을 주장하는 정죄를 받게 되었습니다.

비성경적 오류설을 말하고 또 그 오류설에 대해서 교회는 이단설로 정죄를 했지만 그 시대나 지금 시대나 여전히 인간의 인성구조가 완벽하게 정립되지 못한 관계로 어느 쪽의 오류가 더 크느냐 하는 그 판단이지 양쪽 다 오류는 가지고 있다 하겠습니다. 비성경적 오류설이거나 아니면 성경적 미달설로 말입니다.  

예를 들어 박용규저/ 초대교회사/ 총신대출판사/에 보면 아래와 같이 ‘아폴리나리우스 주의’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폴리나리우스는 신성을 강조한 나머지 인성을 약화시켜 신성이 인성을 흡수했다는 인상을 남겨주었다. 로고스가 인간 예수의 영(human soul)을 대신하였다고 이해함으로 신인(divine-human)으로 그리스도를 이해하기 보다는 인간의 육체를 입고 오신 하나님으로 이해했다. 인간 예수가 로고스를 가졌다는 점에서는 완전한 하나님이시지만, 인간의 지성과 이성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완전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로고스가 인간 예수의 마음을 대신했다고 봄으로써 예수가 완전한 하나님, 완전한 사람이 아니라 신적 지성을 가지고 활동하신 예수에 불과하다고 이해했다.」

여기에 보면 아폴리나리우스는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의 구조를 잘못 말하고 있고, 또 박용규 교수는 인간의 인성구조에 대한 정확한 파악이 미달되어 있습니다. 그러함은 인성 이분설을 근거해서 지정의 마음이 영이라 또 영혼이라 정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폴리나리우스의 주장을 요사이 교리 논쟁의 성격으로 본다면 하나님의 삼위일체론 논쟁 정도 되겠다 싶습니다. 한 측에서는 한 하나님을 강조하기 위해서 양태론을 주장하고 또 한 측에서는 세 격위의 하나님을 강조하기 위해서 삼신론을 주장합니다. 그러면 그 두 측이 다 비성경적 오류설입니다. 그러나 저들을 이 정도로만 가지고 이단이라고 하지 않고 그 오류설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정통교회에 속한 목회자이며 또 신학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만일 이단에 속한 저들이 이 삼위일체론을 성경적으로 가졌다고 해서 그것만 가지고 정통교회라 인정할 수도 없겠습니다.

정통교회에서 하나님의 삼위일체론이나 또 예수님의 기독론에 대해서 현재보다 더 밝히 교리를 발표 하려하다가 오히려 이단설로 정죄 받은 저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발표하는 성격을 분석하면 이단설도 있겠으나 그보다는 성경 깨달음이 미비하여 비성경적 오류설을 가지는 정도가 될 듯싶습니다.

이단의 이단설이라 하면 예수님의 인성을 부인한다든지 또는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한다든지 하면 이는 당연하게 이단설입니다. 이단이라는 것은 예수교가 아니라 하는 말이겠습니다. 물론 사이비 예수교는 두말 할 것도 없겠습니다.    

정통교회의 어떤 목회자나 신학자라 할지라도 성경을 하나의 오류 됨이 없이 완벽하게 발표하는 분은 한 분도 없을 줄 압니다. 그러함은 각 교파도 그렇고 각 신학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이러하여 때에 따라서는 그 점을 이용해서 다수가 소수를 이단으로 매도한 적이 있는 것이 교회사였고, 또 그런 배경에는 거의가 교권 문제가 개입될 때나 또 시기에서 이단으로 몰고 갔음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시대에도 이와 같은 현상이 나타납니다. 정통교회에 속한 우리들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이심을 믿습니다. 즉 예수님의 신성이 인성을 입고 오신 것을 믿습니다. 그러한데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의 구조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논술하라고 하면 그 개념조차 잘 모르는 분들이 계실 것이며, 또한 그에 대한 논술을 한다고 할지라고 대부분은 비성경적 오류설이 되어서 만약 교권 대립이 있는 상태라면 그 상대를 이단설로 몰아가기 십상일 것입니다.

성경을 연구하다보면 보게 하시고 또 그 본 것을 나타내다보면 교리 논쟁이 있게 됩니다. 이런 성격의 논쟁은 대체로 그 시대 교회가 결판을 지어 줄 수 없는데 그 이유는 그 시대 교회로서는 아직 생소한 앞선 교리이기 때입니다. 그리하여 그 교리를 아직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 논쟁을 지켜보게 되고 그러하다가 그 교리에 대해서 점차 연구 검토하는 과정의 세월을 통과하고 난 다음에는 그 성과로 말미암아 그 교리에 대해서 차츰 정확하게 판정을 짓게 됩니다.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에 대해서 지금 현재 대두되고 있는 것은 예수님의 신성에 대해서는 오늘 우리가 일관되는데, 다만 예수님의 인성에 대해서 그 관점이 각각 달라서 상호 논쟁을 펼치고 있습니다. 이런 논쟁은 그 논쟁의 순수한 범위를 벗어나지만 않는다면 성경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선의의 논쟁이기 때문에 좋은 논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상호간 성경을 근거해서 토론을 하고 논리를 전개한다면 그 결과에 있어서 좋은 교리를 정립하는 장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 소망을 가지고 아래의 자료에 대해서 논평을 가져봅니다.

○ 아래는 이상만 이라는 분이 질문을 하셨고, 그에 대한 답변을 이영인 목사님이 하셨고, 그 답변 글에 대한 논평을 김반석 목사가 하였습니다.  



(본문)

>예수님 인성의 기능구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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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이상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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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 3분론으로 볼 때 예수님의 인성을 영+혼+육으로 나눌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기능구원은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예수님은 신성+(영+혼+육) 이렇게 되어 있습니까? 영과 신성은 어떤 관계를 맺으며 어떤 역할을 했습니까? 예수님은 지금 신성+영+혼+부활한 신비한 육으로 되어 있습니까? 이것을 밝히는 성경적 근거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습니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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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이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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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예수님의 인성에 대한 몇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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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예수님의 인성에 대한 몇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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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예수님의 인성도 영, 마음, 몸 셋으로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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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評: 성경에 보면 사람의 인성이 몇 종류가 있는 것을 나타내셨고, 또 사람을 나게 하는 출생도 몇 종류가 있는 것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인성과 출생에 대해서 딱 하나로만 규정짓는 것은 성경 해석에 오류를 가져오는 근원적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이 우리 사람을 대속하려면 그 인성이 우리 사람과 꼭 같은 사람이어야 하니 예수님의 인성에 대해서 우리 사람의 인성과 꼭 같이 취급하는 저들이 있고 또 예수님의 출생에 대해서도 사람의 출생과 꼭 같이 취급하는 저들을 있습니다. 즉 이영인 목사님처럼 예수님의 인성이 우리 사람의 인성과 꼭 같으므로 그 유약성도 꼭 같다 하든지 또 최삼경 목사님처럼 예수님의 인성이 마리아의 피를 통해서 나야 한다든지 하는 저들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사람의 인성이 꼭 같지 않으며 또 출생의 성질도 꼭 같지 않는 것을 말씀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그 역사에 따라서 그에 맞게 인성과 출생의 재창조적 섭리가 뒤따른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성도 꼭 하나로 또 출생도 꼭 하나로 맞추어서 예수님의 인성과 우리 사람의 인성 그 성격과 또 예수님의 출생과 우리 사람의 출생과 그 성질을 논한다고 하면 그 논리가 애초 근원부터 오류가 시작되고 있기 때문에 그 본론에 있어서 성경적 논리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은 불 보듯 뻔히 보이는 사안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사람의 인성 종류

창2:7에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하셨으니, 이 성구는 생령 사람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영이 중생된 믿는 신자에 대한 그 인성의 성격이 어떠한지를 알 수 있는 성구입니다.

창6:3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하셨으니, 이 성구는 육체의 사람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영이 중생되지 못한 믿지 않는 불신자에 대한 그 인성의 성격이 어떠한지를 알 수 있는 성구입니다.

고전15:45-47에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하셨으니, 이 성구는 우리 사람의 인성 구조와 그리고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구조가 어떠한지를 나타낸 성구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땅에서 난 육 있는 자이고, 예수님은 하늘에서 나신 신령한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사람의 출생 종류

창2:7에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하셨으니, 사람을 흙으로 지으셨습니다.

창2:21-23에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하셨으니, 아담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창4:1에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하셨으니, 동침하매 잉태하여 가인을 낳았습니다.  

마1:18에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하셨으니,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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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교리사에 빠짐없이 나오는 이단의 예로 삼위일체를 부인한 이단 '아리우스'가 나오고 바로 그 뒤를 따라 예수님의 인성을 부인한 '아폴로나리스'가 나옵니다. 그가 사람을 영, 혼, 몸 3분으로 보고 일반사람의 영 자리에 예수님은 영을 대신하여 신성 하나님이 계셔서 예수님의 인성은 신성, 혼, 몸으로 나누고 일반 사람은 영, 혼, 몸으로 나누었습니다. 기독교 대표적인 이단이 된 것은 예수님을 일반 사람과 다른 사람으로 보게 되면 대속재물의 자격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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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評: ‘아폴리나리스 주의’를 소개하는데 있어서 그 당시 발표된 그대로 소개가 되어져야 하는데 오늘날 각자가 가진 신학지식에 근거해서 가감되게 소개하는 것을 많이 봅니다. 이 ‘아폴리나리우스 주의’ 뿐만 아니라 ‘니케아 신조’ 등의 초대 교회사에서 발표된 자료들도 그러합니다.

아폴리나리우스의 주장은 예수님의 인성의 영혼의 자리에 신성이 차지했다는 설입니다. 즉 영이 마음이라 마음이 영이라 하는 그 영혼의 자리에 신성이 차지했다는 설이니 곧 예수님의 인성은 육신의 몸만을 말한 것입니다. 이 논리의 배경은 그 당시 가졌던 인성구조 이분설을 근거하여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의 구조를 설명하려다 보니 오류가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이분설: 영(영혼 또는 지정의 마음)과 육(몸)

삼분설: 영과 육(마음+몸)

이분설을 근거하여 아폴리나리우스 설을 소개하는 분들은 아폴리나리우스가 말한 대로 신성이 지정의 영혼의 자리를 차지했다고 함으로서 인성은 몸만을 말하고 있고, 또 삼분설은 근거하여 아폴리나리우스 설을 소개하는 분들은 신성이 영의 자리를 차지하고 인성은 마음과 몸이라고 말함으로서 그 당시 아폴리나리우스가 마치 삼분설에 근거하여 이단설로 정죄 받은 것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이분설에 근거해서 가진 아폴리나리우스의 주장과 그 아폴리나리우스 설을 이단설로 정죄한 교회 또한 이분설을 근거했습니다. 그런데 삼분설을 근거해서 아폴리나리우스 설을 소개하면 본래와는 다르게 소개되고 논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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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후 3분론에 대하여 2분설이 비판할 때는 아폴로나리스의 3분설이 이단이었다는 것을 들고 나옵니다만, 이는 말장난입니다. 아폴로나리스가 이단이 된 것은 3분론 때문에 이단이 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인성을 일반 사람의 인성과 달리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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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評: ‘아폴리나리스가 이단이 된 것은 예수님의 인성을 일반 사람의 인성과 달리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고 말하는데, 아폴리나리스 설은 일단 비성경적 오류설이므로 말할 필요는 없겠고, 성경에서는 예수님의 인성과 일반 사람의 인성에 있어서 그 인성이 같은 점과 다른 점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전15:45-47에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하셨으니, 첫 사람 아담 즉 일반 사람은 육 있는 자요, 마지막 아담 예수님은 신령한 자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육 있는 자와 신령한 자의 차이점이 있다는 것을 성경이 말씀합니다. 다시 말하면 일반 사람의 인성은 신령한 자가 아니고 육 있는 자이며, 예수님의 인성은 육 있는 자이나 신령한 자라 하는 말씀입니다.

○ 첫 사람 아담= 첫 사람

영=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 넣은 산 영
육= 땅에서 나서 흙에 속한 자, 육 있는 자

○마지막 아담= 둘째 사람

신성= 살려주는 영
인성= 하늘에서 나신 자, 신령한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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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예수님의 영이 신성과 인성 사이에서 역할한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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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가 아무리 가까와 한 뜻으로 살고 또 한 사상으로 살아서 한 몸이 되었다 해도 이 땅 위에서는 어디까지나 두 사람이지 한 사람이 된 것은 아닙니다. 한 사람'처럼'이라고 해야 정확하지 한 사람이 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과 육은 존재적으로는 둘이지만 그 둘이 합하여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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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신성과 인성이 비유로 하자면 한 사람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신성 하나님과 인성 사람이 한 분이 되었습니다. 이래서 신인양성일위라고 합니다. 우리 인간은 아무리 하나님과 완전하게 동행한다 해도 신인양성일행이지 일위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일위는 존재적으로 구성적으로 하나라는 말이고 일행이라는 말은 존재적으로는 그 구성이 둘이며 두 존재가 각각 별개라는 말입니다. 행동만 하나로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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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영이 예수님 영과 같이 일위 속의 영이 아니고 일행 속의 영이지만 그 역할과 그 활동은 꼭 예수님의 영과 같습니다. 즉 예수님 인성의 영은 중생된 우리 속의 중생된 영을 살펴보면 됩니다. 더 정확하게 알려면 에덴동산에서 아담의 영의 활동과 같고 더 정확하게 알려면 천국에서 우리 영이 영원히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생각해 보면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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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評: 예수님은 신인양성일위이며 우리 인간은 신인양성일행이라 설명하면서 예수님의 인성의 구조를 영과 마음과 몸으로 말하면, 예수님의 신성과 예수님의 인성의 영이 어떤 모양으로 신성과 인성이 일위가 되는지 성경을 근거한 설명이 있어야 합니다. 만일 이목사님이 말하는 대로 예수님의 인성이 우리 인간의 인성과 꼭 같다면 예수님도 우리 인간과 같이 신성과 인성이 일위가 되는 관계가 되지 못하고 일행이 되는 관계가 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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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에서도 하나님은 영원히 하나님이고 우리는 영원히 피조물이지만 우리가 하나님과 완벽하게 하나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외부에서 보면 모세의 얼굴에 하나님의 광채가 나타나기 때문에 일반인이 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는데 천국의 우리는 지상의 모세보다 더 하나되어 갈 것이니 그 광채가 영원토록 점점 더 강해져서 우리 성도를 만물이 상대할 때 하나님은 아닌데 하나님으로 상대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우리 영이 그 모든 일에 중심입니다. 위로는 하나님, 아래로는 자기 소유인 심신을 묶되 꼭 한 존재처럼 묶을 존재가 바로 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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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평: ‘천국에서도 하나님은 영원히 하나님이고 우리는 영원히 피조물이지만 우리가 하나님과 완벽하게 하나가 된다’고 하는데, 이 표현은 자칫하면 하나님과 우리가 완벽하게 하나 즉 일위적이 된다는 말로 받기 쉽습니다. 이 표현을 바꾼다면 ‘천국에서는 하나님이 우리 성도 안에 완벽하게 거하신다’로 표현해야 성경적 표현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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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지금 예수님은 신성과 인성으로 되었고 그 인성 중 몸은 부활의 신비한 육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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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죄만 없으시고(히4:15) 우리와 꼭같은 사람이었습니다(빌2:7). 성경이 예수님을 사람이라고 했으니 사람이 사람되는데 가져야 할 영 마음 몸은 다 있었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 중에 하나라도 빠지면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 몸이 부활되었으니 시공에 제한을 받지 아니하신 것도 사실입니다. 사람이라야 사람을 대속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사람으로 오신 것입니다(히2:14-5). 지금도 부활한 몸이어서 보이지 않을 뿐이지 우리 중에 함께 계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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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評: ‘예수님은 죄만 없으시고(히4:15) 우리와 꼭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말하는데, 그 말은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 간과하고 있는 것은 예수님의 인성에서 우리와 꼭 같은 사람이라는 것은 강조하고 그 면만 보는데 ‘죄가 없다’ 하는 그 면은 살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꼭 같은 사람이나 죄만 없느니라 하는 말을 좀 더 분석하면 죄 없는 면은 우리와 꼭 같지 않다는 말씀도 됩니다. 그래서 합리적으로 논리하려면 두 면을 조화롭게 나타내어야 합니다. 즉 하나는 우리와 꼭 같은 사람이라는 면과 또 하나는 우리와 꼭 같은 사람이나 죄는 없다는 면을 상호간 조화롭게 논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한쪽으로 치우치는 오류가 발생되지 않습니다.

히4:15에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하는 말씀을, 고전15:45-47에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하는 말씀과 상관지어 그 도리를 해석해보면, 히4;15의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느니라’ 하는 말씀은 고전15:45-47의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육 있는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으니 신령한 자이니라’ 하는 말씀과 같은 도리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빌2:7-8에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하는 말씀 또한 고전15:45-47 말씀을 연관지어 상고해보면 사람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신 예수의 인성이 어떤 인성인지 이해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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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28:20에서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신 것은 고향 떠난 아들에게 아버지가 마음으로 함께 있겠다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이미 시공을 초월한 신령한 인체가 되었기 때문에 마음과 함께 움직이고 그 마음 역시 영과 함께 움직이니 부활한 예수님은 우리가 보지 못할 뿐이지 우리 중에 그 육체로 함께 하고 있습니다. 하늘나라로 가셨기 때문에 땅에는 없고 천국에 가면 뵙는다는 것은 어린 신앙이 자기 수준에서 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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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한 몸으로 하늘나라로 가신 것은 이 땅 위에서 모든 대속을 끝마쳤기 때문에 이제 하나님의 위치 하나님 아버지의 모든 권세를 대행할 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렇게 된 예수님의 거주지는 천국에 있을 수도 있고 이 땅 위에 순회할 수도 있고 한꺼번에 우주와 영계에 충만히 거할 수도 있습니다. 공간적 제한은 이미 없어졌습니다.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겠다는 것은 비유로 해석하면 안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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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評: ‘지금도 부활한 몸이어서 보이지 않을 뿐이지 우리 중에 함께 계십니다.’ 라고 말하면서 마28:20에서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신 성구를 근거로 들었는데, 이 성구는 부활한 몸으로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는 그 도리를 나타내신 말씀이 아닙니다. 즉 롬8:9에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하셨으니, 하나님의 영 곧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속에 거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의 인성의 부활한 몸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한다면 예수님의 부활한 몸이 우리 속에 거하는 내적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 곧 그리스도의 영 곧 예수의 영 곧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삼위일체 세 격위를 가지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마28:20에서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는 말씀에 대해서, 성령으로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하는 도리로 받아야 세 격위의 하나님을 그 역사에 따라 각각 바르게 나타낸 표현이 되겠습니다.


>
>2.예수님 인성을 기능구원이라는 점에서 살펴보려면, 영의 연약성을 함께 살피면 됩니다.
>
>
>2.예수님 인성의 기능구원
>
>(1)범위면에서 본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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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구원의 좁은 뜻만 아는 분들의 오해가 클 것 같습니다.
>
>구원의 성격을 일반 신학 상식으로만 아는 분들은 예수님 인성의 기능구원이라는 표현을 접하게 되면 예수님도 죄를 짓고 구원을 받은 것이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는 구원의 의미를 좁게만 사용해 왔기 때문인데 일반 신학은 구원론의 일부만 알고 있으니 이런 편협된 단점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그 편협된 범위만으로 기준을 삼아 백목사님의 폭넓은 구원론을 성급히 정죄할까 염려되어 미리 구원론에 해당되는 넓은 범위를 설명하겠습니다.
>
>②구원이란 지옥갈 죄인이 천국가는 좁은 면과, 천국에서 영원히 자라가는 적극적인 면이 있습니다.
>
>좁은 의미로 구원이란 죄로 지옥가게 된 사람이 대속으로 천국 가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넓은 의미로 구원이란 불완전한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온전하고 거룩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되는 전 과정을 말합니다. 현 교회의 의식은 천국 들어가는 것만으로 우리의 영원은 전부인 줄 알지만 이는 하나님과 천국의 관계를 잘 모르는 어린 신앙에서 보는 오해입니다. 세상에 살던 사람이 천국으로 올라가는 것은 활동 무대의 변경일 뿐입니다. 활동 무대라는 의미에서 이 세상은 임시 준비하는 곳이며, 천국은 본 무대가 됩니다. 우리가 영원히 활동할 우리의 본 무대인 천국에서 우리가 할 일은 영원히 하나님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한이기 때문에 그 끝이 없습니다. 영원한 천국이 영원하다는 것은 단순히 천국은 세상처럼 한번 불타버리고 없어지는 곳이 아니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영원히 닮아 가는 우리의 영원한 활동 무대라는 것입니다.
>
>③천국이라는 영계를 하나님과 비교하여 생각할 때 우리는 인식을 새롭게 바꾸어야 합니다.
>
>이런 점에서 사후의 천국에 대한 교리는 현재까지 교리사에서 거의 살펴보지 못한 분야이며 앞으로 백영희 교리세계에서 그 끝없는 세계를 밝혀나갈 주 분야 중 하나가 될 것입니다. 여기서는 우선 영계에 대한 인식을 일부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는 점만 분명히 해 둡니다. 천국 안에 계신 하나님만 생각할 정도로 천국의 범위를 크게 잡아서 하나님까지도 그 안에 거주하고 그 천국 밖의 범위는 생각지 않은 것이 현재까지 나아간 교리 한계입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시기 때문에 영계보다 더 좁은 우주에도 계실 수 있는 것처럼 영계에 계시는 것도 그 영계 범위은 영계보다 무한히 크신 분이며 영계는 하나님을 기준으로 표현한다면 무한히 작은 한 피조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천국이 영원하고 무한한 곳이라 할 때는 그 기준이 오늘 세상을 기준으로 본 것이며 더 작은 우리를 기준으로 본 것입니다.
>
>④구원의 의미는 불완전한 피조물이 완전자 하나님과 같이 '온전함에 이르는 영원'입니다.
>
>그렇다면 타락과 대속이라는 과정은 하나님이 목적을 정한 이후 예정 창조 타락 구원 심판 영원 영계의 무한한 전체 속에 한 토막일 뿐입니다. 타락과 대속의 그 과정만으로 우선 죄지어 지옥갈 우리에게는 다급한 '구원'이었으니 이는 좁은 의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혼자 계시던 자존에서 목적을 세우시고 그 목적을 따라 우리를 예택하고 영계를 만들어 영원토록 이 불완전 피조물이 완전자 하나님을 향하여 가도록 만든 전부는 적극적인 의미이며 넓은 의미의 진정한 구원입니다.
>
>(2)예수님의 인성의 기능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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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질문하신 내용에 집중하겠습니다. 예수님에게 구원이라는 말이 해당 될 수 있느냐 입니다.
>
>타락한 인간이 대속받아 천국 갈 수 있게 된 것을 구원이라고 정의한다면 예수님은 구원자이지 구원받은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신인양성일위이시니 예수님의 인성도 구원할 구원자이지 구원받을 분이 아닙니다. 따라서 좁은 의미로 구원을 본다면 천부당 만부당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질문하신 분의 신앙은 예수님이 죄를 지어 구원받게 되는 과정에 그 인성의 기능은 어찌 되느냐는 차원으로 질문하실 수준이 아닙니다. 죄가 없으심을 너무도 당연히 아는 것을 전제로 할 때, 우리 인간에게 평생 문제가 되는 것은 기능구원인데 예수님도 인성을 가지셨으니 우리와 같은 인성이라고 한다면 죄는 없지만 인성인 이상 인성에 적용되는 기능 문제는 어찌 되느냐는 것입니다.
>
>예수님은 죄가 없다는 단정을 쉽게 전제한다면 타락과 대속이라는 좁은 의미의 구원에는 전혀 해당이 없고 그렇다면 그런 차원의 기능구원은 예수님에게 해당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넓은 의미의 구원, 즉 타락 이전의 에덴동산 아담이 보다 불완전한 상태에서 보다 더 완전한 상태로 발전이 있었고 또 세상이 끝나고 영원한 세계가 시작되는 영계에서도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을 향해 점점 가까이 나아갈 것이니 죄없는 상태에서도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면을 구원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그 구원이 한 인간 단위로 이루어지는데 실은 그 속에는 심신의 요소가 수많은 개체로 되어 그 한 요소가 각기 자기에게 해당되는 현실에서 말씀을 따라 하나님과 동행할 때 그 동행으로 인하여 그 해당되는 요소가 성화되는 것이니 이런 의미의 기능구원은 예수님에게 당연히 해당됩니다.
>
>다만 성화라는 의미도 죄로 더러워진 것이 의로 깨끗해진다는 성화는 예수님에게 해당되지 않고 연약한 것이 더 온전해지고 강해진다는 의미의 성화는 적용될 수 있습니다. 깨끗의 정의 중 하나는 하나님의 완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인성도 우리와 같은 인성이니 예수님의 심신도 수많은 요소로 된 복합체이고 그 복합체는 각 현실을 따라 그 요소별로 활동하며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기능은 넓은 의미의 구원에 있어 모든 단계를 완전히 밟아 자라갔습니다. 우리의 기능구원과 다른 점은 우리의 기능은 죽었던 것이 살아날 수 있는 기회이고 따라서 좁은 범위의 구원에 우선 해당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경우는 원죄가 없기 때문에 넓은 범위의 구원이라는 의미로 기능구원이 해당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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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評: ‘성화라는 의미도 죄로 더러워진 것이 의로 깨끗해진다는 성화는 예수님에게 해당되지 않고 연약한 것이 더 온전해지고 강해진다는 의미의 성화는 적용될 수 있습니다.’ 라고 말하는데, 이 표현은 성경에 근거 없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인성에서 대속면의 우리 인간과 같은 인성면 만을 강조하는 그 치우침에서 예수님의 인성에 대해서 넓은 범위의 성화성을 말하는데 이는 성경에 없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은 완전, 무한, 단번의 대속이지 우리를 대속하셔 놓고 또 그 인성이 또 성화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성경에 없는 개인적 추론설일 뿐입니다.    


>
>②눅2:40, 52 말씀들이 명백하게 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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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2:40,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눅2:52,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성구는 예수님의 인성의 성장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인성은 그 인체의 발생이 모태에서부터 시작하여 아기를 거쳐 장성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속하러 오실 때 그 인체를 아담처럼 바로 완성품인 성인으로 만들지 않고 태 속에서 발생시켜 아기와 소년 그리고 청년 장년으로 나아가게 했다는 것은 예수님 인성은 기능의 발달 기능의 숙달 기능의 발전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몸과 마음이 동일하게 그러했습니다.
>
>
●논평: ‘예수님 인성은 기능의 발달 기능의 숙달 기능의 발전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몸과 마음이 동일하게 그러했습니다.’ 라고 말하는데, 그러면 예수님의 신성이 언제부터 예수님의 그 발전하는 심신의 인성과 신인양성성일위가 되었다는 말인지 반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고전15:45-47에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하는 말씀을 상고해서 예수님의 인성과 우리 사람의 인성에 대해서 상호 대비하여 보는 정관을 먼저 가지는 것이 급선무라 하겠습니다.


>
>이런 과정을 밟으신 것은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심으로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가 죽을 죄값을 대신 죽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가 인생으로 나면서부터 죽는 순간까지 전 과정을 전부 대행하였습니다. 히4:14,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성구는 특별히 '체휼'을 말씀하셨는데 이는 우리 택자들의 모든 형편을 전부 다 겪으셨다는 것이며,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라는 말씀은 그의 인성은 죄를 지을 수 있는 연약한 피조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자기 속의 신성에게 완전히 붙들려 그 모든 시험을 우리와 같은 조건에서 통과하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대속주가 되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대속의 절정을 대표적으로 상징한 것이며 예수님의 대속은 인성을 입은 순간부터 부활 영원 후까지입니다. 부활 후 다시 가진 인성도 우리가 중생과 부활 후 영원히 누릴 상태를 미리 대신 마련한 것이니 이 역시 대속의 큰 범위에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
>
●논평: ‘히4:14에서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라는 말씀은 그의 인성은 죄를 지을 수 있는 연약한 피조물이었다는 것입니다.’ 라고 말하는데, 이는 치우친 해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고전15:45-47을 근거해서 해석해보면 예수님의 인성은 우리를 대속하는 육 있는 자이나 신령한 자라 하는 말씀으로서 예수님의 인성에 대한 연약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대속성의 인성을 말하는 성구입니다. 이를 근거하는 성구는 사9:6에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하셨으니, 예수님의 인성은 신성과 일위가 되어서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평강의 왕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인성이 죄를 지을 수 있는 연약한 피조물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한 성격의 표현은 성경에 없는 것으로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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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연약성도 죄이니, 중생된 영이 범죄치 않는다는 것은 틀렸다는 지적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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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연약한 것도 결국은 명령에 미달이니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중생된 영의 범죄 문제가 제기됩니다.
>
>백목사님은 중생된 영이 심신의 성화를 건설해 나가는 과정에서 영이 연약하여 심신을 장악하지 못하고 심신이 죄를 짓는 것을 막지 못하는 경우 이를 영의 병이라고 했습니다. 영 자체가 죄를 짓는 것은 아니지만 심신이 죄를 짓지 못하도록 장악하고 지도해야 하는데 영이 장성하지 못하여 심신의 범죄를 막지 못했다면 이는 영의 유약이니 이 땅 위에서 우리가 애쓰는 것은 심신은 심신대로 기능구원으로 성화되어야 하는 면이 있듯이 영은 영대로 장성하여 자기 심신을 붙들고 죽는 데라도 끌고 들어갈 수 있는 영이 되도록 정성해져야 한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
>
●논평: 백목사님께서 중생 된 영이 심신을 장악하지 못하는 그 영의 유약성에 대한 말씀은, 영이 심신에 대한 역할론 보다는 영이 심신에 대한 주격적 책임론을 말하는 성격이라 여깁니다.


>
>그러나 이 문제는 죄론에서 연약하여 미달된 것도 죄에 포함되는 문제가 제기됩니다. 죄라는 것은 삐뚤어진 것입니다. 삐뚤어진 것은 방향이 틀려도 삐뚤어진 것이고 또 명령에 미달되어도 삐뚤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정확하게 명중되지 않은 것은 전부가 죄인데 중생된 영이 유약함으로 자기 심신을 붙들지 못한 것은 죄가 영 자체의 죄가 되는 것이 아닌가 라는 문제입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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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예수님 인성의 연약성에서 영의 연약성 문제가 함께 해결됩니다.
>
>예수님은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고 했습니다. 죄론에서 죄의 범위를 정하는데 이 성구는 항상 인용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욕하고 남을 때리는 것은 죄라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평범한 기존 지식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 도덕의 기준에서 본 죄이지 성경이 말하는 죄는 아닙니다. 예수님이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하며 또 채찍을 들고 성전에서 사람을 폭행하였는데 그는 죄는 없으시니라고 하였으니 폭행도 죄되는 폭행과 의가 되는 폭행이 있고 욕도 죄되는 욕이 있으며 또한 의가 되는 욕이 있다고 확정할 수 있습니다.
>
>여기서는 영의 연약성이 죄가 아니냐라는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점점 자라가고 강하여져가고 지혜로워져 갔다고 했는데 이는 완전을 기준으로 본다면 미달이며 연약이니 곧 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죄를 짓도록 시험은 다 받았으나 죄 짓지 않고 그 모든 과정을 통과했다고 히4:15에서 말씀했으니 예수님의 성장 과정은 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
>③범죄 이전 아담과 부활 이후 우리의 진보과정은 또한 연약함이 무조건 죄가 아니라는 것을 가르칩니다.
>
>선악과를 따먹기 이전의 아담은 그 육체는 성인으로 지어졌지만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기간이 더할수록 하나님과 점점 더 가까워지며 더 실력이 자라가고 있었습니다. 또한 천국에 간 우리는 성장을 멈추고 놀고만 먹는 누리는 생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게 됩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3가지는 항상 있을 것이라고 했는데 소망이란 이루지 못한 바를 말하며 나아갈 목표와 현재 위치와 차이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 상태가 영원히 있을 것이라고 고전 13:13이 말씀했고, 그 소망을 점점 이루어 가게 하는 방법은 믿음이니 믿음은 이 지상에서 지옥갈 우리가 천국가는데 까지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천국간 이후의 영원한 생활에서도 항상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순종의 방편으로 영원히 소망을 이루어가는 것이 하늘나라인데 순종하는 사람에게 소망이 이루어지도록 은혜를 베푸시는 면을 가르쳐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대가 없이 주는 것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이 소망이 믿음으로 이루어지고 이 과정은 영원히 무한히 계속되는 것입니다.
>
>
●논평: 고전13:13에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하는 말씀이 가르치는 주된 도리는 다음과 같이 깨닫습니다.

‘믿음’은 갈2:16에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하셨으므로, 예수님의 대속공로를 힘입어서 죄 없는 자, 의로운 자, 하나님과 화친하는 자로 사는 그 믿음을 말씀합니다.

‘소망’은 요일3:2-3에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하셨으므로,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깨끗하여서 그와 같은 자 되는 그 소망을 말씀합니다. 즉 주님이 죄와 마귀와 사망의 권세를 이긴 것같이 우리도 죄와 마귀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는 자가 되는 그 소망을 말합니다.

‘사랑’은 요일4:16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하셨으므로, 하나님과의 동행하는 그 사랑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피 공로를 힘입는 믿음과 죄와 마귀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는 소망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하는 말씀입니다.  


>
>그렇다면 타락 이전과 구원 이후, 특히 지상 생활이 끝난 이후 영원한 나라에서도 계속될 이 발전과 성장은 항상 미달이라는 상태를 전제로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미달이라고 할 수 있는 연약함도 죄가 되는 경우도 있고 연약함이 죄가 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는 것은 예수님의 연약성과 영원한 천국에서의 연약성을 생각할 때 구별해야 함은 분명합니다.
>
>④연약성이 죄가 되는 경우는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때 순종에 미달된 것입니다.
>
>예수님의 인성이 12세 되던 기록이 눅2:41에 나옵니다. 이때 아버지께서 십자가로 예수님을 인도하셨는데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는 데 이르지 않았으면 이 연약은 죄가 됩니다. 그러나 12세 때에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도 나서지 아니하였으며 그 나이에는 성전에 있으라는 하나님 아버지의 명령을 따라 육의 부모와 3일간을 떨어져 혼자 성전에 있었습니다. 예수님 12세에는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라는 단계로 아버지를 따를 때이니 그 나이에 예수님의 완전 순종은 성전에 있는 것이었으며 또한 나사렛에 이르러서는 육의 부모를 순종하여 받드시는 일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명령하셨으니 그 명령에 추호도 모자람이나 연약함이 없이 명중으로 순종했습니다.
>
>따라서 십자가 죽음의 순간을 기준으로 한다면 12세 때 있었던 2가지 일들이 전부 미달이며 연약함이 되겠지만 예수님 인성의 12세 때 그를 인도하시던 하나님은 십자가로 예수님의 인성을 데려가지 않았으니 십자가 기준에서 12세 예수님의 인성을 목표 미달로 정죄하는 것은 성경을 잘못 아는 것이며 성경이 말하는 죄의 범위가 연약성도 포함한다 할 때 연약성과는 다른 연약성이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영의 연약성도 그 영이 중생이 되었으면 영이 심신에 대하여 가질 모든 책임은 이미 대속으로 해결이 되었고 이제 다시는 사망이 없고 죄가 상관없게 된 영은 그 영에게 성령이 요구하는 바는 항상 순종을 하고 나가지만 예수님 12세 때 예수님의 지혜와 육의 키가 장성한 때와 비교할 때 연약했듯이 영도 영을 인도하여 데려가는 그 순간순간에는 성령과 순간도 떨어지지 않고 동행하며 순종하고 나가고 있으므로 이 면에 있어 영은 죄와 전혀 상관없는 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
>
●논평: ‘따라서 십자가 죽음의 순간을 기준으로 한다면 12세 때 있었던 2가지 일들이 전부 미달이며 연약함이 되겠지만’ 하고 말하는데, 이 말은 개인적 추론설입니다. 성경 사9:6에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하셨습니다.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주신바 된 그 때부터 신성과 인성이 일위가 되셔서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평강의 왕이라 칭하셨습니다.

또한 이목사님은 ‘예수님 12세 때 예수님의 지혜와 육의 키가 장성한 때와 비교할 때 연약했듯이 영도 영을 인도하여 데려가는 그 순간순간에는 성령과 순간도 떨어지지 않고 동행하며’ 하는 그 ‘동행’을 말하는데, 그러면 예수님의 신성과 예수님의 인성이 일위가 되지 못하고 우리 사람과 같이 일행의 동행이라는 말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 표현은 잘못된 오류입니다.

골2:9에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하셨으니, 예수님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 곧 인성에 거하시고 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의 인성은 신성과 동행이 아니라 일위로 충만히 거하고 계십니다.


>
>심신의 경우는 영과 달라서 중생된 사람의 심신이 담배를 끊으라고 때를 주셨는데도 그 담배를 그 순간에 끊지 못했다면 이 연약은 죄의 연약이 됩니다. 그러나 성령이 영에게 영의 심신에게 담배를 끊도록 촉구를 하라 했으면 영은 성실히 촉구를 했고 촉구를 했으나 아직 영이 심신을 장악할 때가 되지 못했으므로 그 결과는 심신이 담배를 끊지 못했으나 그것으로 영의 연약성을 정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단계에서는 영이 아직도 심신을 장악하지 못하는 연약한 상태인데 그 연약한 상태에서도 성령이 명령하는 데 따라 영이 노력은 틀림없이 했을 것이니 영은 순종함으로 의의 영으로 그 현실을 통과했고 결과적으로 담배를 끊지 못한 것은 심신이 자기가 할 일을 순종치 아니했으므로 끊지 못한 것입니다. 영의 탄식은 빨리 장성한 단계로 나아가 자기 심신의 악습을 제어하는 데 있습니다.
>
>즉, 믿음으로 행하지 아니한 것이 죄라는 의미는 하나님과 연결되어 그 뜻대로 다 따라 가지 않은 것은 죄이니 하나님 인도에 못 미친 것은 죄가 되지만, 영의 연약성과 예수님의 연약성은 그 당시 당시 인도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인도를 모자람 없이 따라갔으니 그것은 믿음으로 행한 의가 되는 것이고, 순종을 했지만 아직까지 때가 아니므로 하나님께서 결과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도록 한 것은 하나님이 인도하는 과정으로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 권한에 두셨으니 우리의 알 바가 아니라는 것이 행1:7입니다. 때와 기한이 되지 않아서 결과적으로 아직도 미진한 것은 죄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
>⑤마24:36의 그 날과 그 때를 예수님이 모르는 것은 전지에 부족한 것이지만 죄가 아닙니다.
>
>그날과 그시는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알려주지 않으셔서 모르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도 예수님의 지식이 전지라는 면에는 미달되는 것이고 따라서 예수님의 인성이 그날과 그시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것은 무지이지만 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영은 성령이 알려주는 대로 다 알아 나가는 존재이니 중생된 영은 이 면에서는 죄가 없습니다만 중생된 영 역시 성령이 가르쳐 주지 않아서 모르는 것은 무지의 죄로 또는 지식의 연약성이라 하여 죄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
>
●논평: ‘예수님의 인성이 그날과 그 시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것은 무지이지만 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라고 말하는데, 이 또한 오류적 발언입니다. 마24:36 말씀에서 그 아들은 신인양성일위 되신 예수님을 말하는 것이지, 예수님의 인성에 한해서 그 날과 그 때를 모른다는 말씀은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마24:36을 예수님의 인성에 대한 전지면의 미달에 대한 말씀으로 연관을 짓는데, 그 연관과 해석이 다 오류입니다. 성경에는 그 아들 즉 신인양성일위 되신 주님이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평강의 왕이라 말씀하셨는데, 전지면에 미달이라 말하는 것은 비록 인성에 한하여 한말이지만은 이런 표현은 우리를 대속하는 그 완전대속, 무한대속, 단번대속에 배치되는 표현입니다.

마24:36에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하는 말씀은,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알려주지 않으니 마24:44에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는 말씀입니다. 삼위 하나님의 그 격위의 직분에 대한 말씀이지 예수님의 신성은 알고 예수님의 인성은 모르고 하는 그 도리를 나타내는 말씀은 아니라고 봅니다./ 예수님의 신인양성일위 라는 교리가 가지는 용어와 도리는, 예수님의 신성이 가진 전능이 인성에게 충만히 일위적으로 거한다는 함축의 표현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
>그러나 성령이 알려 주시려고 우리 마음 문을 두드리고 있는데도 심신이 외면하여 몰랐고 또 무지한 상태가 된 것이 심신의 무지입니다. 이렇게 미달되고 연약하게 된 것은 죄가 됩니다. 이미 하나님의 인도가 그 단계를 넘어서고 있는데도 그 단계를 그냥 지나치거나 해서 모르고 있는 것은 죄가 됩니다.
>
>(4)편협된 교리관에서 오해가 없도록, 구원의 범위를 기준으로 다시 한번 조심할 구원의 두 범위
>
>좁은 의미의 구원은 타락한 인생이 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만 준비할 수 있고 죽음으로 구원여부는 끝나게 됩니다. 넓은 의미의 구원은 타락 이전에도 또 대속 이후에도 해당되는 적극적인 것입니다. 타락 전 에덴동산에서도 아담은 하나님을 향하여 점점 더 나아가고 있었고 또 우리가 세상을 끝마치고 천국에 가서도 영원히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전진이 있으니 이 전체를 포함하게 됩니다.
>
>
●논평: 이목사님은 ‘타락 전 에덴동산에서도 아담은 하나님을 향하여 점점 더 나아가고 있었고’ 라고 말하는데, 그러면 하나님을 향하여 점점 더 나아가고 있었으면 선악과를 태초 그 처음보다 점점 더 안 먹는 자로 장성되어야 될 터인데 그렇지 못하고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그러므로 에덴동산의 아담을 예로 드는 것도 개인적 추론설일 뿐입니다. 다시 말하면 비성경적 오류설입니다.  


>
>세상에서만 구원의 기회가 있다는 것은 기본구원적으로는 안 믿는 사람이 믿는 사람으로 되는 기회는 세상뿐이며 건설구원적으로는 기능이 종류별로 성화되는 것은 세상뿐이라는 뜻입니다. 일단 죽고나면 구원의 기회가 없다는 것은 지옥간 사람이 지옥간 이후에도 천국으로 옮겨지는 경우는 없다는 뜻입니다. 세상에서만 구원의 기회가 있다는 말은 믿는 사람이 천국에서는 하나님을 향해 자라가는 것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
>천국에는 변동이 없다는 말은 천국에 간 성도가 다시 지옥으로 가는 멸망의 변동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라가는 성장, 하나님을 향한 실력의 향상은 천국에서 비로소 본격적으로 시작합니다. 기본구원적으로 말하면 세상은 천국으로 갈 사람을 불신자로부터 분류하여 결정하는 기간이고 건설구원적으로 말하면 세상은 천국 갈 사람이 천국에 가져갈 자기 소유 자기 기능 자기 실력을 분류하여 결정하는 기간입니다.
>
>
●논평: ‘자라가는 성장, 하나님을 향한 실력의 향상은 천국에서 비로소 본격적으로 시작합니다.’ 라고 말하는데, 이 표현 또한 성경에는 명확하게 말씀한 성구는 없는 것으로 압니다. 엡1:23에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하신대로, 지상의 그 천국 그림자가 되는 교회를 상고하건데 하늘나라의 성도는 주 하나님의 충만이 거하는 그 충만 자체입니다./ 계22:5에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하셨으니, 그리스도와 더불어 세세토록 왕 노릇하는 하늘나라의 성도들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근거한 성경적 표현이 아니면 문제 되는 표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성경에서 나타난 도리 그 범위 안에서만 나타내어야지 그 범위를 넘어서면 치우치는 추론설이 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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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안식교의 '2300주야설' 논평 김반석 2011.07.25
29 필리핀 장 목사의 유아세례 김반석 2011.06.25
28 이영인목사와 여러분들께 청원 김반석 2011.04.22
27 인간 영의 기원에서 유전설, 선재설, 창조설에 대한 논평 김반석 2011.04.22
26 성경연구를 위해서 (인간 영의 기원과 관련된 글) 김반석 2011.04.16
25 [re] 사람의 인성구조 연구 - 2011.12.보완 김반석 2011.05.01
24 송종섭 목사의 ‘인간 영의 기원’에 대한 논평 - (3월28일,자료추가에 따른 논평추가) [1] 김반석 2011.03.26
23 이영인 목사의 주권욱 학위논문 평가에 대한 논평 김반석 2011.03.10
22 주권욱의 학위논문에서 ‘이근영의 성신관’ 論評 김반석 2011.03.01
21 주권욱의 학위논문에서 ‘아들의 생명’ 論評 김반석 2011.03.01
20 주권욱의 학위논문에서 ‘백영희와 관련된 부분’ 논평 김반석 2011.02.25
19 이영인 목사와 김반석 목사의 교리논쟁 김반석 2011.02.18
18 백영희의 기본구원과 건설구원에 대한 論評 김반석 2011.01.30
17 성경 단어집 편찬에 대한 논평 - 2011.1.24 첨부 김반석 2011.01.23
16 창조과학회에 대한 論評 김반석 2010.12.21
15 교역자 신임투표와 영어 설교에 대한 論評 김반석 2010.1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