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한국교회, 그 처음은 민족주의적

  선지자선교회

무교회주의

 

1. 1920~30년대 한국, 한국교회

 

1) 한국교회, 그 처음은 민족주의적이었다.

 

19세기 말,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오던 당시는 여러모로 위기 상황이었습니다. 정치적으로도 민족적 위기감이 고조되어 있었고, 정신적으로도 공황기였으니까요. 유교적 질서가 정치이념으로서도, 도덕적 감화력으로서도 그 기능을 잃은 조선조 말, 대체적 신념체계가 서지 못하던 때였습니다. 이런 시절에 들어온 기독교는 힘 있어 보이는 서양의 정신적 원천으로 보여 졌고, 조선의 갱신을 꿈꾸는 민족주의적 지도자들과 불안한 일반대중에게 충분히 매력적인 종교였습니다. 선교사들의 의도야 어떠하였든 당시 정황상 한국교회는 그 출발이 민족주의적 기독교였습니다. 민족적, 사회적 희망을 기독교에 걸었으니까요. 3.1운동은 교회의 조직력과 한국기독교의 민족주의적 성향의 힘을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주동자급으로 투옥된 19,525명중 3,426명이 기독교인이었다는 데 당시 기독교인이 전체 인구의 1.5%에 불과했음을 감안한다면 놀라운 숫자입니다. (2: 한국, 한국교회, 그리고 무교회)

 

성경적 반증

 

무교회주의는 한국교회의 그 출발이 민족주의적 기독교였다. 3.1운동에서 주동자급으로 투옥된 19,525명중 3,426명이 기독교인이었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무교회주의가 말하는 것과 같이 한국교회의 그 출발이 민족주의적 기독교였는가? 아니다. 무교회주의는 한국교회의 출발이 이러하여 무교회 즉 탈교회가 된 배경이 되었는가? 아니면 이래서 무교회주의가 기독교 민족주의, 기독교 사회주의가 되었는가? 이런 주장은 기독교 민족주의’ ‘기독교 사회주의를 하는 사람들이 주로 말하는 궤변적 핑계이다.

 

물론 그 당시 국가를 위하고 민족을 위하는 사람들이 3.1운동을 하였고, 그 가운데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것이 정답이다. 그런데 한국교회가 그 출발이 처음부터 민족주의적이었다고 하는 것은 오판적 궤변이며 미혹적 궤변이다. 물론 3.1운동에서 기독교민족주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기독교민족주의를 하는 그 사람들에게 한하는 것이지 한국교회 그 출발의 본질이 민족주의는 절대 아닌 것이다.

 

무교회주의자들은 교회가 없음 즉 무()교회이며, 교회에서 나옴 즉 탈()교회이다. 그러면 무교회 즉 탈교회의 실체가 어떤가? 다음의 글은 함석헌, 한국 무교회 2세대의 대표주자-김교신의 바통을 이어서.이다. 여기에 보면 무교회는 오직 기독교가 아닌 기독교민족주의, 기독교사회주의라는 것이 증명된다. 무교회주의자들은 기독교민족주의, 기독교사회주의가 되기 위해서 무교회, 탈교회가 되었는지 묻고 싶다.

 

 

3) 함석헌, 한국 무교회 2세대의 대표주자-김교신의 바통을 이어서.

 

함석헌님이 무교회의 2세대 대표주자라고? 무교회 내에서는 노평구님이 2대 리더로 인정되는 분위기인데 굳이 대선언을 한 함석헌님을 끌여 들여 2세대의 대표주자라고 하는 절 괴씸해 하시는 분들도 있으세요. 노평구님은 우치무라의 제자였던 츠카모토 토라지에게서 10년간 사사받고 귀국하려 <성서연구>1946년부터 1999년까지 500부를 낸 명실공히, 김교신 이래 가장 열정적인 무교회자인 게 맞습니다. 그러나 전 그래도 함석헌... 왜냐구요? 앞으로 무교회의 기본정신, 함석헌의 사상을 논하며 자세히 다루겠지만 무교회 정신을 가장 잘 이어받고 실천한 분이라서 그랬어요.

 

함석헌의 생애는 한마디로 참을 위한 비폭력 저항이었습니다. 1901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출생, 한의사 함형택과 어머니 김형도 사이의 장남이셨어요. 아버지는 1920년대 말 그 마을에 장로교회와 서양식 학교를 세우실 정도로 개화된 인물로서, 시대적 필요성 읽고 스스로 그리스도인 되셨다 합니다. 어머니는 씨사상의 기본을 심어주신 분이래요. “, 그건 사람 아니냐? 입이야 마찬가지지.” 어릴 적 들었던 그 말이 평생 인간취급 못 받는 씨들을 위한 투쟁에 몸담게 했다구요.

 

숙부 함일형은 맨 처음으로 정신적 스승이 된 분이시라 합니다. 나라사랑과 하나님 사랑이 별개가 아님을 가르쳐주신 분이래요. 한일합방 당시 10세 소년이던 함석헌은 예배당 안에서 하나님을 부르며 통곡하는 숙부를 통해 하나님신앙과 나라사랑이 별개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합니다.

 

이분의 특이한 점은 또래가 다 다니는 서당 대신 서양식 초등학교를 다녔다는 것. 그래서 어린 시절부터 서구/기독교적 세계관에서 학습을 받았습니다. 근본주의적 색깔의 장로교에서 성장한 당시의 자신을 순진한 기독교 소년이라 회고하십니다.

 

1916년 관립인 평양고보에 입학, 31운동 당시 평양지역 삼일운동준비위원장이던 사촌형 석은의 영향으로 본의(?)아니게 운동을 주도하게 되셨다 합니다. 전날 밤새 태극기, 독립선언서 프린트하고 당일은 가두시위 선두에서 뛰면서 평소에 처녀 같던 나에게서 어디서 그 용기가 나왔는지 나도 모른다.”(전집 4: 129)고 하셨지요.

 

독립운동으로 인해 복학이 안 되자 2년간 고향에서 농사생활하며 17세에 황득순님과 결혼하셨어요. 그 후 21세에 사촌형 석규의 권유로 민족운동의 메카, 오산학교에 입학합니다. 남강 이승훈이 세훈 학교로서 민족주의, 인도주의, 기독신앙이 한데 녹아든 정신교육의 본산지로 기억하는 그 오산에서 배운 것은 자유정신, 기독정신, 민족애, 평민정신, ‘스스로함의 원칙이었다 회고하십니다. 안창호, 조만식, 이승훈을 통한 교훈은 속알의 혁명이었다고요. 혁명은 결국 내적 결단으로부터 사회로 확장되어야한다는. 그래서 3.1운동의 중심부에 오산이 있었다고 확신하십니다.

 

그곳에서 다산 유영모님(1890~1981)을 만나셨어요. 동서양, 근현대 사상에 두루 해박하던 그리스도인인 그에게서 톨스토이, 노자를 소개받았죠. 깊은 사제관계는 오히려 해방 후에 이루어졌는데, 함석헌의 후기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분입니다.

 

1923년 동경유학, 곧바로 관동대지진 겪으셨대요. 첫 감옥경험(하룻밤) 이후 감옥 가는 것이 저이의 직업이야.”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님은 인생대학”[감옥을 이리 부르심]을 유난히 많이 다니셨답니다. 일부러 투사적 삶을 살자 해서 그리된 건 아니었다는데... 그저 하나님의 발길에 채어 다니다 보니그리된 거라 하셨어요.

 

1924년 동경사범학교에서 역사, 윤리, 교육 전공하셨어요. 당시 학교의 지배적 분위기는 기독교의 사회개혁적 역량에 회의적인 학생들이 사회주의, 무정부사상에 심취해있던 때였어요. “내 신앙을 버리고 도덕이니 인도주의니 하는 것은 전혀 무시해버리는 사회주의에 들어갈 수는 차마 없었던 시절.”(전집 4: 215)이었다 합니다.

 

이때 김교신의 소개로 우치무라의 성서집회 참여하게 되었죠. 우치무라에게서 배운 것도 둘, 민족애와 하나님 사랑이었대요. 이때부터 50년대까지는 자신을 무교회자라 칭하셨습니다.

 

1928년부터 오산에서 십년 간 역사와 교육, 일반윤리 가르치셨는데, 기독교적 사관에서 한국사를 풀이한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성서조선>에 연재(1934.2·1935.6)하셨죠. 후에 한국지성사의 고전이 된 글이예요. 한국어로 한국역사 가르친 대가로 교사직 박탈당한 이후로는 돌아가실 때까지 일정한 직장을 다니신 적이 없대요.

 

학교 근처에서 과수원하며 학생들에게 신앙과 민족애 심어주다가, 계우회 사건으로 1년간 옥살이, 성서조선 사건으로 또다시 1년간 옥살이, 출옥 후 고향에서 농사짓다, “어깨에 똥통을 매고 밭에 거름을 주다가해방을 맞이하셨다나요.

 

이북임시정부에서 엉겁결에 문교부장으로 추대되었는데, 신의주학생의거가 나는 바람에 책임자로서 또 감옥행~ 거기서 참 한심해서 이리 물었었대요. “조국이 해방되었는데도 나는 왜 아직도 감옥에 있나?” 민족주의자, 기독교도 숙청하는 분위기 속에서 자유 찾아 1947년 남하하셨습니다.

 

맞이한 남쪽 상황은 한마디로 얼빠진상태(현재는 친미요 과거 친일이던 민족혼 없는 지도자들)였대요.

 

이 꼴을 보며 제일 먼서 성서모임을 여셨습니다. 대학생 위주로 캠퍼스에서 그리고 일반인을 위해서는 YMCA에서. 종교적 가르침으로 한국인의 도덕의식을 회복해보려는 노력이었죠. 후에 말씀모임이라는 이름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남북분단 후 남한에서 엉겁결에 무교회 대표자가 되셨대요. “김은 해방 전 백열이틀 두고 가고 정상훈, 유석동은 무교회에 있지 않고, 양인성은 이북에서 오지 않았고 남은 것은 송형[송두용]과 나, 송형은 연배아래라고 사양하고.” (전집 3: 137) 그래서...

 

군부독재시절 <사상계>를 통해 한국사회 전반에 대한 신랄한 비판적 메시지를 전한 예언자셨습니다. “한국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1956)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1958) “516을 어떻게 볼까?” (1961)는 전국적인 관심을 끈 대표적 글들입니다.

 

1957~1973년 천안에 씨농장을 실험하신 적도 있어요. 농사와 종교와 교육이 한데 어우러진 공동체를 해보고 싶으셨다는데, 새벽 여섯 시 기상, 아침 기도와 성서연구, 농사일, 시사, 역사적 강연 등을 하던 그런 곳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생각하는 평민들을 길러내는 공동체이고 싶으셨던 거지요. 그러나 실제적으로 주도세력은 지식층과 학생이었습니다.

 

1970년부터 개인 월간지 <의 소리>를 내셨는데, 성서연구, 사회정치적 분석과 비평, 타종교에 관한 논문도 게재하던 잡지입니다. 두 가지 목적에서 시작하셨대요. 한국인 평민들의 정신적 개혁을 촉구하고, 저항의 유기적 공동체 형성을 위해서. 정기구독자 1000여 명 정도의 작은 잡지였지만 독재정권에 위기감을 주기에 충분한 저력을 가졌던 잡지였습니다. 폐간, 검열, 재간 등을 반복하다 1980년 제5공으로 넘어가던 시기 폐간되었습니다.

 

독재시절 민주화 투쟁과 자본주의부조리를 고발하는 각종 연대모임의 최일선에서 투쟁하신 실천적 지식인의 상징적 인물이셨으나, 1980년 광주민주화 운동 이후, 저항운동의 폭력화에 반대하며 끝까지 비폭력을 주장하다 지지세력을 상당수 잃으셨죠. 종교적 믿음에 근거한 평화주의적 저항가로 살다가 198924일 돌아가셨습니다. 이 땅에서 꼭 32천 백 오일 사시고.

 

김교신과 함석헌, 한국무교회의 바통을 전해주고 전해받았다는 이 둘의 삶에서 공통분모를 찾으면 대략 한국무교회의 그림이 그려지는 거겠죠? 초월신앙, 역사적 참여, 개인잡지 발행, 세상에 위기감을 조성할 만한 민족혼과 참여적 신앙, 정치적 기득권세력의 탄압, 제도교회에 대한 비판... 이게 무교회? 글쎄요.

 

한국그리스도인으로서 이제-여기를 바르게살기.” 이는 김교신과 함석헌이 삶으로 보여준 무교회자들의 공동목표인 셈입니다. (2: 한국, 한국교회, 그리고 무교회)

 

 

 

- 2017. 9. 16 선지자문서선교회 김반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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