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성인신과 상관된 [교리 정립관] 硏究 - (16)
선지자선교회

<서론>

◎ 數에 있어서

수에 있어서 1에서 10까지 있습니다. 그런데 1에서 3까지만 수라고 말할 때 그 주장이 맞지만 數論에 있어서 미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1에서 3까지도 수이지만 또 4에서 10까지의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1에서 3까지만 수라고 주장하는 자는 말하기를 1에서 3까지를 수라고 주장했더니 그것은 '미달이라' 한다면서 어째서 미달이 되느냐고 항변할 것입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은 1에서 3은 수이기 때문에 그것이 수론에 있어서 미달이라 지적하면 이에 흥분되게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여 1에서 3이 수라고 말하면 그 말이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1에서 3만이 수라고 여기고, 그 이상의 수가되는 4에서 10을 말할 때 그 수를 수로 여기지 않는다면 1에서 3만이 수라고 주장하는 그 주장은 미달을 넘어서 오류적 주장이 됩니다. 왜냐 하면 수에는 1에서 3도 있으나 그 위에 4에서 10까지도 있기 때문입니다.

4에서 10을 말하는 사람은 1에서 3이라는 그 수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수를 수라고 그 수론을 같이 하지만, 1에서 3만을 수라고 여기는 것은 수를 아는 지식에 있어서 미달이거나 오류라 지적하는 것입니다.


◎ 바다에 있어서

10미터 바다 속의 세계를 보고 그것을 바다라고 말한다면 그 말이 맞는 말일 수도 있고 또 틀린 말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 하면 바다는 10미터 깊이의 바다 세계도 있지만, 더 깊은 100미터 바다 속의 세계도 있고, 또 1,000미터 바다 속의 세계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래서 10미터 바다 속을 보고 그 세계만을 바다라고 할 때에는 그 지식에 대해서 미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100미터, 1,000미터 바다 속의 세계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10미터 바다 속의 세계를 본 사람은 그 10미터의 바다 속의 세계도 바다이기 때문에 '미달이다' 하는 말에 저항감을 가질 수도 있겠습니다. 왜냐 하면 10미터 바다 속을 본 것은 바다를 본 것이 분명히 맞는데, 그 바다 본 것에 대해서 '미달이라' 했으니 답답하고 환장할 노릇일 것입니다. 자신이 본 것이 분명히 바다라는 세계인데 말입니다.  

그런데 10미터 이상의 바다 속의 세계를 본 사람이 '미달이라'고 말하는 것은 10미터의 바다 세계가 바다가 아니라는 것이 아니라, 10미터 속의 바다 세계도 있지만 그 보다 더 깊고 깊은 바다 세계도 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뿐인 것입니다.


◎ 코끼리에 있어서

눈뜬 당달봉사가 코끼리를 만져보고 이게 코끼리구나 하고 자기가 만져본 부분만을 코끼리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그 봉사가 만져본 부분은 코끼리 다리통 밖에 만져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코끼리 다리통을 말하면서 그것이 마치 코끼리 전부인양 주장한다면, 그 봉사에게 말하기를 그게 아니라 그렇게 알고 있는 것은 코끼리론에 미달이라 말 할 수 있겠습니다. 당신은 코끼리 다리통만 가지고 코끼리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코끼리는 몸통도 있고, 또 머리통도 있다는 것을 말해 줄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그 당달봉사는 뭐라고 하겠습니까? 자기가 당달봉사라서 코끼리 전체로 보지 못하고 손으로 만져본 부분만 알아서 그런 것이라고 자인한다면 별 충돌이 없겠습니다.

그런데 당달봉사가 자기가 안 그 지식에 자존심의 고집을 부려서 다리통 외에 그 이상의 것을 말하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인정 하려들지 않는다고 합시다. 그러면 거기에는 논변 논쟁의 충돌이 있게 마련일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당달봉사의 수가 거의 다수라 할 때는 그들이 만져보고 안 다리통의 그 범위가 코끼리이지 그 이상을 말하는 것은 코끼리론에 대한 이단이라고 몰아붙일 것입니다.  

이렇겠지만 실상은 당달봉사가 코끼리 다리통만 가지고 코끼리라고 주장하는 것은 코끼리론에 있어서 그 지식은 미달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코끼리 다리통도 그게 코끼리는 코끼리이나 그 다리통만 가지고 코끼리라고 주장한다면 그 주장은 미달이며 또 그 정도가 지나치면 오류로 이어질 수도 있겠습니다.

'미달이라'는 말은 당달봉사가 말하는 그 다리통이 코끼리가 아니라는 것이 아니라, 코끼리는 분명히 맞는데 몸통도 머리통도 더 광범위하게 있다는 그 진리의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론>

초대교회사에서부터 현대교회사에 까지 예수님의 인성이 되는 육신은 본질상 우리 사람의 육신과 같다는 것이 정통교리입니다. 이를 부인하는 보편 정통교회는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의 육신이 죄만 없을 뿐만 아니라 또 우리 육신과 그 육신이 본질상 다르다고 주장한다면 그 즉시 기독론에 오류를 가진 이단교회가 되어 버릴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성이 죄만 없지 우리의 인성과 같다는 것은 정통교회의 가지는 기본교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인성이 죄만 없지 우리의 인성과 같다는 그 교리에 딱 한계를 지우고 더 이상 나아가지 않는다면 기독론에 있어서 미달이라 하는 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마치 1에서 3만을 수라고 여기고 그 이상 4에서 10을 말할 때 그 말은 틀린 이단의 말이라고 한다면, 1에서 3만을 수라고 주장할 때는 그 말이 미달적이나, 4에서 10은 수가 아니라고 이단 취급할 때에는 1에서 3만이 수라고 말하는 것은 그때부터는 그 주장은 미달과 함께 오류가 되어 버립니다.  

1에서 3만이 수라고 주장하는 것이 미달이며 또 더하여 오류라고 말하는 것은 1에서 3이 수라고 말하는 그 수론 자체가 틀린 것이 아니라, 1에서 3만이 수라고 말하는 그것이 미달이며 오류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기독론 대해서 초대교회사로부터 현대교회사에 이르기까지 보편적 정통교회가 이제까지 정립한 교리는 성경적입니다. 그러나 현재 그 정도 범위의 교리를 가지고 더 이상이 없는 기독론이라고 딱 못을 박아 버린다면 그 교리는 미달이며 오류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예수님의 인성에 대한 교리에 대해서 딤전3:16에는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인성에 대한 교리는 현재 정통 보편적 교회가 깨닫고 있는 현재 정도보다는 훨씬 더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의 교리가 무한히 더 내포되어 있는 기독론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인성이 되는 육신이 죄만 없을 뿐 우리의 육신과 같은 육신이라는 것을 부인할 자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죄만 없을 뿐 우리와 같은 육신은 육신이나 우리의 육신은 신인일행적이고, 예수님의 육신은 신인일위적인 육신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런 면 등등으로 예수님의 인성에 대한 교리를 좀 더 깊이 들어가게 되면 현재까지의 기독론, 거기까지 만을 예수님의 인성에 대한 교리이고, 더 깊은 교리를 발표할 때 그 기독론은 이단적이라고 단정한다면, 수에 있어서 1에서 3만이 수라, 또 바다 속 10미터 세계만이 바다라, 또 코끼리 다리통만이 코끼리라 하는 주장과 같은 논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딤전3:16에는 예수님의 인성에 대해서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하셨습니다. 이렇게「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하시므로, 우리가 현재적으로 알고 있는 기독론, 그 이상의 큰 경건의 비밀이 있다는 것을 전제한 말씀입니다.  

또 히5;11에'멜기세덱에 관하여도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 하셨습니다. 이렇게 당달봉사 같은 우리에게 멜기세덱에 대해서 본대로 다 말하면 다 이해하고 다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래서 예수님 곧 '그가 육신으로 나타난바' 되신 여기에,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단순하게 '죄만 없으실 뿐 우리의 육신과 같다'라고만 간단히 말하는 이 정도에 그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정도로만 말하는 것은 기독론의 초보적이며 그래서 또한 신학자와 목회자가 알아야 할 기독론에 있어서는 미달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론에 있어서 현재적 보다 더 이상이 되는 깊이의 교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보편 정통교회가 기독론에 있어서 예수님의 육신은 죄만 없으실 뿐 우리 사람의 육신과 같다는 교리에 대해서 성경적 교리로 다들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는 성경적 교리이기 때문에 이를 부인하거나 이를 배척할 자 없습니다. 보편 정통교회의 초신자라 할지라도 이 기독론 정도는 기본적으로 알고 있고 또 그대로 인정하는 교리입니다. 그래야 대속론에 있어서 상치가 되지 않고 또 그래야만 우리가 실상의 대속이 입혀지기 때문입니다.

이런데 예수님의 육신이 죄만 없으실 뿐 우리의 육신과 같다고 말할 때, 그 정도로만 가지고도 우리가 개적으로 이룰 구원에 있어서는 큰 부족이 없습니다 또 교리적으로 이해하는데도 큰 불편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조직신학을 다루는 신학자와 또 조직신학을 연구하는 목회자라면 그 수준의 정도에 머물러서는 안되겠습니다. 이래서 예수님의 인성이 죄만 없을 뿐 우리의 육신과 본질상 꼭 같지만 그 이상이 되는 구속 역사상에 있어서는 어찌되느냐 하는 면을 상고해 보자는 것입니다.

마치 1에서 3이 수이고, 10미터 바다 속도 바다이고, 코끼리 다리통도 코끼리이나, 우리가 현재 논하려는 것은 그 이상이 없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부분을 성경에서 상고하며 연구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래서 예수님의 인성의 육신이 우리 사람의 육신과 죄만 없을 뿐 본질상 같다고 할 때에 육신의 본질은 우리 육신의 본질과 같기 때문에 이의를 제기할 것이 조금도 없고, 다만 그 본질상 같다는 여기에서 하나 혼동을 가지는 있는 것은, 그 역사상에 있어서도 우리 육신의 인성과 같다고 여기는 점입니다.


<결론>

이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하나 질문을 가져보는 것은, 만일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하시지 않고, 우리 사람 중에 원죄와 본죄가 없는 사람이 있어서 신성이 그 사람의 육신을 입었다고 가정해 볼 때, 과연 그 사람의 유한 된 육신의 성질로서 신성 하나님의 무한 완전과 일위가 되어서 우주적 구속역사를 온전히 이룰 수 있겠는가? 하는 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인성이 죄만 없을 뿐 우리의 육신과 꼭 같은데, 무한 완전의 신성이 유한 된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으시니, 그 육신이 무한 완전의 신성과 일위가 되어지는 무한 완전성의 육신으로 변해졌는지?

아니면, 예수님의 인성이 성령으로 잉태하여 마리아를 통하여 나시므로, 그 육신적으로는 우리의 육신과 같으나, 그 역사상 있어서는 무한 완전의 신성과 일위적으로 역사 할 수 있는 무한 완전성의 육신인지?


<성구>

마16:14에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마16:15에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16:16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요1:14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롬8:3에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빌2:7-8에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딤전3:16에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골2:9에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참고>

1. ◎ (눅3:23)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의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이상은 헬리요

'사람들의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하신 말씀이 무엇을 말씀하려는 말씀인지를 깊이 상고해 보아야 합니다.  


2. ◎ (사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예수님의 신성만에 대한 말씀이 아니고 예수님 곧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말씀입니다. 도성인신 하신 신인양성일위 되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심에 대한 말씀입니다.


3. ◎ (막13:32)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사9:6에는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하셨고, 또 막13:32에는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 하셨습니다. 그러면 '전능하신 자'가 또 '그 날과 그 때를 모른다'고 하셨으니, 딤전3:16에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하신 말씀을 적용시켜 볼 수 있겠습니다.

막13:32 말씀을 단편적으로 해석해 본다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났고,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나왔고(고전1:30), 또 우리는 아래서 났고 예수님은 위에서 났으며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예수님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다(요8:23)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막13:32 말씀은 예수님의 육신이 우리 인간의 육신과 같아서 지식의 한계가 있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날과 그 때는 아는 것은 아버지께로부터 아들에게로 나오는 그 근원적 순서를 말씀하시는 것이라 깨달아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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