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도의 관점에서 본 구약성도의 신앙' 硏究

2007.05.14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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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도의 관점에서 본 구약성도의 신앙' 硏究
선지자선교회

이름 : 반석     번호 : 199
게시일 : 2006/08/11 (금) PM 10:59:29  (수정 2006/08/18 (금) PM 05:15:46)    조회 : 85  

■ '신약성도의 관점에서 본 구약성도의 신앙' 硏究


<서문>

길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완벽하게 닦여지는 것이 아니라 세월이 지남에 따라 차츰 넓혀지고 다져집니다. 이와 같이 이 글은 구약성도의 신앙에 대하여 성경을 상고해 본 글로서 길로 비유하자면 이제 막 첫 삽질을 한 것과 같은 글입니다.

그래서 좀더 성경을 상고하고 연구하여 좀더 완벽한 글이 될 때 발표하려했으나 그렇게 되려면 얼마만큼의 시간이 더 지나야 할지 알 수도 없거니와 또한 더 이상의 보충 보완의 글을 쓴다는 보장도 없는 미약한 종인지라 우선 성경을 깊이 있게 연구하는 분들께 연구제목으로라도 되었으면 하고 이 글을 씁니다.

<본문>

●(창1:29)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마6:31-32)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 죄악의 타락면과 신앙의 신령면

위의 성구는 하나는 구약성경 중의 성구이고, 하나는 신약성경 중의 성구입니다. 이 두 성구를 신약시대 성도인 우리들이 비교를 해 볼 때에 신약성경이 구약성경보다 그 말씀 속의 구원도리를 깨닫기가 더 쉬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구약성경 보다 신약성경이 깨닫기가 더 쉽도록 실상적 구원도리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신약성경 보다 구약성경이 형식적이라서 더 쉽게 깨닫을 수 있도록 기록되어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시대 성도보다 신약시대 성도가 신앙면이나 신령면이 더 앞선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구약성경 창세기로부터 신약성경 계시록까지 쭉 내려오면서 성경을 연구하다보면 그런 것만이 아닌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에덴동산의 타락하기 이전이 신앙면이나 신령면이 제일 앞섰고, 그 다음은 타락이 조금 된 구약 초기가 신앙면이나 신령면이 좀 뒤떨어지고, 그 다음은 타락이 조금 더 된 구약 중기가 좀 더 뒤떨어지고, 그 다음은 타락이 조금 더 많이 된 구약 후기가 신앙면이나 신령면좀 더 많이 뒤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 보다는 예수님까지 십자가에 못박은 신약 초기가 구약시대 보다 더 많이 타락이 되어서 신앙면이나 신령면이 더 많이 뒤떨어지고, 그 보다는 타락이 더 많이 된 신약 중기가 더욱 더 많이 뒤떨어지고, 그 보다는 죄악이 하늘에까지 관영한 신약 말기인 지금이 신앙면이나 신령면이 제일 많이 뒤떨어진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죄가 없는 시대가 신앙면이나 신령면이 제일 앞서고, 그 다음 죄가 조금 있는 시대가 조금 뒤떨어지고, 그 다음 죄가 많은 시대는 많이 뒤떨어지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죄악 타락과 신앙 신령면의 연관성을 말입니다.

○ 시대마다 주신 하나님 말씀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도 각 시대에 따라 말씀도 더하여 주셨습니다. 에덴동산 죄악이 없는 시대에 주신 말씀이 있고, 또 죄악이 조금 있는 시대에 주신 십계명이 있고, 또 죄악이 조금 더 많은 시대에 주신 구약성경 말씀이 있고, 이러다가 죄악이 점점 더 많은 시대에 주신 신약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신 말씀에 있어서 우리들은 구약시대 구약성경보다 신약시대 신약성경이 더 신령면이 많아서 깨닫기가 더 어렵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여기는 이유는 신약성경은 실상적 계시이고 구약성경은 형식적 계시이기 때문에 신약성경이 구약성경 보다 더 신령면이 많다고 여기는데 기인한다고 봅니다.

성경을 부분적으로 보면 그러한 면도 분명히 있습니다만 성경을 전체적으로 보면 우리 신약성도들이 가지는 성경관과는 정반대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구약시대의 성도들보다 신약시대의 성도들이 죄악이 더 많기 때문에 구약시대의 성도들 보다 신약시대의 성도들의 심령이 더 어두워져있고 이로 인하여 신약시대 성도들이 구약시대 성도들 보다 신앙이나 신령면이 더 뒤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18:8)' 하셨습니다.

◎(눅18: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이렇게 신약시대 성도들이 구약시대 성도들보다 신앙이나 신령면이 적다 보니 하나님께서 신약시대 성도들에게 구약시대 성도들에게 주신 구약성경 보다 더 깨닫기 쉬운 신약성경을 주신 것입니다. 신약시대 성도들에게 구약시대 성도들 보다 깨닫기 쉬운 말씀을 주신 것은 신약시대 성도들은 구약시대 성도들보다 죄악이 더 많아 심령이 더 어두워서 신앙이나 신령면이 구약시대 성도들보다 더 뒤떨어졌기 때문에 신약시대에 해당되는 성경을 주셔서 죄악이 하늘에까지 관영한 이 신약시대의 성도들에게 구원도리로 삼게 하신 것입니다.

◎(계18:5) 그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지라

그러나 구약시대 성도들은 신약시대 성도들 보다 죄악의 관영이 적기 때문에, 다른 말로 말하면 구약시대 성도들이 신약시대 성도들보다는 심령이 덜 어둡기 때문에, 구약성경이 우리 신약성도에게는 형식적 계시로 보일지라도 구약시대 성도는 구약성경을 실상적 계시 받아서 구원도리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하나님께서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시대별로 주셨는데, 에덴동산 아담 하와에게는 다스리고 지키며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말씀을 주셨고, 그 이후 모세를 통하여 십계명을 주셨고 또 구약성경과 그 후 신약성경을 주셨습니다.

에덴동산 아담 하와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창2:15-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이고,

그 이후 모세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십계명으로서 에덴동산 아담 하와에게 주신 말씀보다 더 실상적 계시이며 또 말씀의 분량이 더 많습니다.

그 이후 구약성경 말씀은, 십계명보다 더 실상적 계시이며 또 말씀의 분량이 더 많습니다.

그러다가 신약성경 말씀은, 구약성경 보다 더 실상적 계시이며, 또 실상적 계시의 분량이 더 많습니다.

이렇게 보면 에덴동산에서 아담 하와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십계명보다도 또한 구약성경 보다도 그리고 신약성경 보다도 훨씬 더 구원도리를 깨닫기가 어려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합니다. 그러한 것은 신앙이나 신령면이 약하면 그 만큼 시대별로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에덴동산 아담 하와에게 주신 말씀은 십계명보다도, 또 구약성경 보다도, 신약성경 보다도, 우리 신약성도의 신앙과 신령면에서 볼 때에 구원도리의 신령면이 더 깊다는 것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신약시대에 주신 신약성경은 아담 하와에게 주신 말씀보다도, 십계명 보다도, 구약성경 보다도, 더 실상적 말씀이어서 우리 신약성도들이 더 잘 깨달을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 구약성도의 신앙에 대한 관념을 바꾸어야 함

그러하기에 신약시대 성도 우리들이 구약성도들에 대하여 지금까지 가진 관념을 바꾸어야 합니다. 구약시대 성도들은 신앙생활을 형식적으로 하였고, 신약시대의 성도들은 신앙생활을 실상적으로 하고 있다고 여기는 이러한 오류 된 관념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것은 구약성경이 우리 신약성도들에게는 형식적 계시로 보이지만 구약성도는 그 구약성경으로 하나님을 실상적으로 경외하였고 또 하나님을 실상적으로 경외하려면 얼마든지 잘 경외 할 수 있었습니다.

그와 반대로 신약시대 성도들은 신약성경 곧 실상적 계시로도 하나님을 실상적으로 경외하지 않고 지금과 같이 얼마든지 형식적 외식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시대 성도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형식적 계시로 주셨다고 해서(신약시대 성도가 구약성도와 구약성경에 대한 오류적 관점) 신앙생활까지 형식적 신앙생활을 하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구약성도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은 신약시대 우리들이 볼 때에 형식적 계시이지 그 신앙생활은 실상적이였습니다.

다만 구약시대 성도들에게 형식적 계시(신약시대 성도들의 오류적 관점으로 볼 때)를 주신 것은 신약시대 성도들 보다 덜 속화되고 덜 타락이 되어서 심령이 덜 어두워 있기 때문에 구약성경 형식적 계시로도(신약시대 성들도의 오류적 관점으로 볼 때) 구원도리를 충분히 깨달아 실상적 구원을 부족함이 없이 잘 이루어 갈 수 있었기 때문에 구약시대 성도들에게는 구약성경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시대 성도들이 점점 더 속화가 되고 점점 더 타락이 되어서 심령이 차츰 더 어두워짐으로 인하여 신앙이나 신령면이 약해졌기 때문에 형식적 계시(신약시대 성도들의 오류적 관점으로 볼 때) 곧 구약성경 말씀으로는 구원도리를 밝히 깨달을 수 없음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신약시대는 신약시대 성도들을 위하여 실상적 계시 곧 깨닫기가 쉬운 구원도리로 신약성경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한데 우리들은 이러한 면을 바로 깨닫지 못하여 구약시대에 주신 구약성경이 신약시대에 주신 신약성경 보다 더 깨닫기 쉬운 말씀으로 주셨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시대 성도들보다 신약시대 성도들이 더 신앙이나 신령면이 많다고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신약시대 성도 우리들이 구약성도와 구약성경에 대해서 깨달음을 잘못 가진 이 미달로 인해 이러한 관념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이러한 미달적 관념들을 바꾸어서 구약시대 성도들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요구나 신약시대 성도들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요구나 실상을 요구함에 있어서는 매한가지라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구약시대는 하나님을 섬기는데 형식적 신앙생활을 해도 되었고, 신약시대는 구약시대와 달리 하나님을 섬기는데 실상적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이러한 관념을 이제는 완전히 바꾸어야 하겠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구약과 신약의 차이를 두는 이러한 관념을 완전히 바꾸어야 하겠습니다.

○ 선진들 - 구약시대 성도들

◎(히11: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구약시대 아벨의 신앙은 순교의 신앙이었습니다. 형식적이 아니라 실상적이였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실상적 믿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신약시대에 아무리 순교를 하여도 아벨의 순교를 계대한 순교입니다. 신약시대에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아브라함의 믿음을 계대한 믿음입니다. 더 이상의 순교와 더 이상의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시대의 성도들 곧 믿음의 선진들이 실상적 신앙생활을 하였다는 것을 우리 신약시대 성도들에게 증거 하여 주시는 말씀이 바로 히브리서 11장입니다.

◎ 아벨

(히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 에녹

(히11: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 노아

(히11: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 아브라함

(히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 사라

(히11: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

◎ 이삭

(히11:20)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 야곱

(히11:21)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 요셉

(히11:22)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해골을 위하여 명하였으며

◎ 모세

(히11:23)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

◎ 저희 -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

(히11:29) 믿음으로 저희가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 기생 라합

(히11:31)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

◎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및 선지자들

(히11:32)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및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 저희 - 구약시대 성도들

(히11:33)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 여자들 - 구약시대 성도들

(히11:35)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 어떤 이들 - 구약시대 성도들

(히11:36-37)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 허다한 증인 - 허다한 구약시대 성도들

(히12: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이러한 구약시대 성도들의 신앙을 궁구 해 볼 때에 신약시대 성도 된 우리들이 그동안 구약시대 성도들 보다 더 신령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줄 알았던 이러한 오류 되고 미달 된 관념을 이제는 바꾸어야 하겠습니다. 부분적으로나 전체적으로 보더라도 신약성도들이 구약성도들 보다 신앙생활을 더 형식적으로 하고 있고 또 구약성도들 보다 신령면이 더 적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계시면

그러나 실은 구약시대 구약성경은 형식적 계시(신약시대 성도의 오류적 관점)라서 깨닫기가 어렵습니다. 신약시대 신약성경은 실상적 계시라서 깨닫기가 쉽습니다. 구약성경이 형식적이라는 것은 신앙생활을 형식적으로 해라고 형식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구약성도를 통해서 신약성도는 신앙생활을 하는데 '거울(고전10:6)'로 삼아라하는 것 그 면을 말하기 위해서 형식적 계시라 말하는 것입니다.

◎(고전10:6)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그런데 우리들은 그동안 정반대로 여겨 왔습니다. 구약성경 말씀은 형식적 계시라서 신령면이 적어 깨닫기가 쉽고, 신약성경 말씀은 실상적 계시라서 신령면이 많으므로 깨닫기가 어렵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우리들이 이렇게 여기는 것과는 정반대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구약시대의 구약성경은 형식적 계시라서 말씀을 깨닫기가 더 어려운 말씀이고, 신약시대의 신약성경은 실상적 계시라서 말씀을 깨닫기가 오히려 더 쉽다는 것입니다.

그러한데도 신약성경이 깨닫기가 더 어렵다고 여기는 것은 신약성경이 구약성경과 연결이 되어 있는데도 구약성경은 구약성경대로 별도로 상대하고, 신약성경은 신약성경대로 별도로 상대하기 때문에 신약성경이 깨닫기 어려운 말씀으로 보여져서 그렇게 여기게 된 것입니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별도로 대하면 왜! 신약성경 말씀이 깨닫기가 어려운 말씀으로 보이는가? 하면 신약성경에서 나타내는 구원도리는 대부분 구약성경에서 이미 구원도리로 다 나타낸 구원도리이기 때문에 신약성경에 와서는 구약성경에서 나타낸 구원도리를 생략하고 말씀 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신약성경만 가지고는 신약성경에서 나타낸 구원도리를 깨닫기가 어렵기 때문에 신약성경이 구약성경보다 신령면이 많다 하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는 신약성경으로만 가지고는 해석할 수 없는 말씀들이 많습니다. 이를 신령면이 많아서 그렇다고 여기는데, 그것은 구약성경에서 이미 구원도리를 말씀한 것이기 때문에 생략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에 문자적으로나 또 구원도리적으로나 이해 할 수 없고 또 깨달을 수 없는 말씀이 나오면 상징적 계시 또 난해절로 받아서 어렵게 여기는데 이는 구약성경을 깊이 있게 상고하지 못한 연고입니다.

그러다 보니 그 말씀이나 단어를 원어에 근거하여 해석을 하게 되는데 그러면 성경을 원어적으로 해석하는 것이지 성경을 성경적으로 해석한 것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럴 때는 구약성경에서 그 말씀과 그 단어가 어떤 구원도리를 나타내려고 할 때 쓰여졌는지를 연구해서 구약성경에서 말씀하신 깨달음을 그대로 사전을 삼아 해석하면 상징적 말씀이라 또 난해절이라 여겨지지 않고 성경적으로 밝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신, 구약성경관을 가지지 않고 신약성경으로만 신약성경을 깨달으려고 하면 깨닫기가 심히 어렵거나 또 깨닫는다 할지라도 그 구원도리에 대한 근거를 구약성경에서 명확하게 제시받지 못하기 때문에 그 깨달음이 억지해석이 되거나 오류해석이 되거나 미달해석이 되는 것은 필연 하게 됩니다. 더구나 원어에 근거한 성경해석이라면 문자적 해석에 머물므로 성경적 해석과는 거리가 더욱 먼 것이 됩니다.

그런고로 신약시대 성도들인 우리로서는 신약성경이 구약성경 보다도 깨닫기가 쉬운 말씀인데 오히려 신약성경이 구약성경 보다 깨닫기가 더 어려운 말씀으로 받고 있는 것은 구약성경을 신약성경을 깨닫는데 대한 근본 바탕으로 여기지 못한 연유로 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은 구약성경에서 이미 나타낸 구원도리를 더 실상적으로 쉽게 풀어놓은 말씀으로서 신약성경이 구약성경 보다 깨닫기가 더 쉬운 말씀이 되겠습니다.

하나 예를 든다면 구약성경 성막에 대한 구원도리는 신약성도 곧 교회 된 우리 성도들의 신앙인격에 대한 구원도리입니다. 그래서 신약성도 우리들이 성막에 대한 구원도리는 형식적 계시라서 깨닫기가 쉬운 말씀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신약성경에서 어떠한 신앙인격을 가져야 되는지를 실상적 계시로 주신 신약성경이 오히려 구원도리로 깨닫기가 더 쉬운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 서두에 제시한 두 성구는 신약성도 된 우리들로서는 신약성경 보다 구약성경이 더 구원도리를 깨닫기가 어렵다는 것을 대비하기 위해서 대표적 예를 삼기 위해서 제시한 성구입니다.

○ 창1:29 식물과 마6:33-34 의식주

그러면 이 두 성구를 가지고 구약성경의 구원도리가 깨닫기 어려운지 신약성경의 구원도리가 깨닫기 어려운지 한번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구약성경 창1:29에서 '식물'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라는 구원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에 나게 하셨으면 우리가 먹을 식물은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믿음을 확실히 가지라고 주신 구원도리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지으신 피조물 사람들에게 '식물(구약 창1:29)'을 주시는 일을 하십니다. 그래서 사람이 할 일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식물을 먹고, '(구약 창1:28)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고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는 일'을 하는 것이 사람이 할 일 곧 사람의 위치와 직분입니다.

이 구원도리와 같은 말씀을 신약성도 우리들에게 주셨으니 '(신약 마6:31-32)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와 '(신약 마6:33-34)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 신약시대 성도들은 이렇게 알기 쉬운 구원도리를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평생 수고하는 중심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염려로 살고 있습니다.

사람의 의식주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책임지십니다. 그러기에 창조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따로 있고 피조물 우리 사람들이 할 일이 따로 있습니다. 그런데 창조주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우리 사람이 하려고 달라더니 염려가 나오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우리 사람이 하려고 하는 것이 곧 바로 죄입니다. 이 구원도리를 알려주시기 위해서 구약시대에는 '구약성경 창1:29' 말씀을 주셨고, 신약시대에는 '신약성경 마6:31-32' 말씀을 주셨습니다.

창세기1:29에 해당되는 그 시대의 성도는 이 말씀을 주셨기 때문에 식물 곧 의식주는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는 것으로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식물을 보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신약성도들에게는 마6:31-32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신약성도가 의식주에 대해서는 이 말씀으로 구원도리를 깨달아서 식물 곧 의식주는 하나님께서 전적 책임져 주시는 것으로 깨달을 수 있습니다.

'(신약 마6:31-32)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하는 실상적 계시로 알기 쉬운 구원도리를 주셨습니다. 그러한데도 의식주를 제가 책임지고 제가 마련하려고 힘쓰고 애쓰지 하나님께 맡기지 않는 것이 신약성도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신약성도가 이 두 성구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면 구약성경이 신약성경 보다 깨닫기가 어려운 구원도리라는 것을 알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구약성도와 신약성도 중에 어느 시대의 성도가 신앙이나 신령면이 앞선다고 볼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에 구약시대 성도가 신약시대 성도들 보다 성경 구원도리를 깨닫는 신령면이 앞섰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합니다. 그것은 구약성경 창1:29 말씀이 신약성경 마6:31-32 말씀 보다 구원도리를 깨닫기가 어려운 말씀이라는 것을 신약성도 우리들이 두 성구를 비교해 볼 때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구약성경이 신약성경 보다 깨닫기 어려운 말씀인데도 구약시대 성도들에게 구약성경을 주신 것은, 구약시대 성도가 신약시대 성도들보다 죄악이 적기 때문에 그 시대에 해당되는 구약성경을 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죄악이 적으면 적은 만큼 신앙이나 신령면이 보다 앞서서 영안이 보다 밝기 때문입니다.

위의 두 성구 중에서 우리의 의식주에 대한 구원도리를 깨닫는 데에 어느 말씀이 더 어렵게 보이십니까? 두 성구는 글의 외형은 다르나 그 이면은 같은 구원도리가 들어 있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두 성구를 자세히 상고해 보면 마6:31-32 말씀은 창1:29 말씀을 좀 더 알기 쉽게 풀어놓은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겠습니다.

이 두 성구에서 창1:29 말씀은 신약시대 우리들에게 신령면의 영감을 주시지 않으면 구원 도리를 깨닫기가 어려운 말씀입니다. 그러나 마6:31-32 말씀은 구원도리를 바로 알 수 있는 말씀입니다. 마6:31-32 말씀은 신령적인 해석이 없어도 쉽게 알 수 있는 말씀입니다. 그렇기에 구약성경 보다 신약성경이 깨닫기가 쉽게 기록 된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신약성도의 관점에서 볼 때), 그 반대로 신약성경 보다 구약성경이 깨닫기가 더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구약 형식계시(신약성도의 관점에서 볼 때)를 가지고 실상을 이루어 가는 구약성도와 실상계시를 가지고 실상을 이루어 가는 신약성도

그러하기에 구약성도들이 신약성도들보다 영안이 더 밝고 신령면 또한 더 깊다고 보는 것입니다. 역으로는 신약성도들은 구약성도들 보다 영안이 더 어둡고 신령면이 더 약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데도 신약시대 성도인 우리들은 그동안 정반대의 관념을 가졌었습니다. 신약시대 성도들이 구약시대 성도들 보다 신앙이나 신령면이 더 앞선 것으로 말입니다.

외형적으로 보면 신약시대 성도들에게 주신 말씀이 실상적 계시이기 때문에 구약시대 성도들 보다 실상적이며 신령적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구약성도들에게 주신 말씀이 신약성도를 위한 거울로 주신 면의 형식적 계시도 포함이 되기 때문에 구약성도가 신약성도 보다 말씀이나 신앙생활이 형식적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구약성도가 신약성도들에게는 형식적 구원도리로 보여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구약성도들을 이방에게서 구원하시는 그 역사를 통해서 신약시대 성도가 마귀와 세상에게서 구원받는 형식의 구원도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외형 속에 내면을 보면 그 형식 속에 실상의 구원을 이루어 가게 하신 것이 구약성도들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역사이고, 구약의 형식 계시(형식 내면에는 구원의 실상이 있음)와 신약의 실상적 계시를 가지고 실상을 이루어 가게 하신 것이 또한 신약성도들이라는 것입니다.

깨닫기 어려운 말씀을 가지고 구원을 이루어 가야 하는 구약성도(신약시대 성도들이 구약성도와 구약성경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와 깨닫기 쉬운 말씀을 가지고 구원을 이루어 가는 신약성도(신약시대 성도들이 신약성도와 신약성경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입니다.

○ 구약성도들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 경외나 신약성도들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 경외나 그 요구하시는 중량은 꼭 같습니다.

구약성도들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 경외나 신약성도들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 경외나 그 요구하시는 중량은 꼭 같습니다. 하나님과의 인격교제의 깊이는 신약시대 성도들에게나 구약시대 성도들에게나 그 깊이는 시대에 상관없이 꼭 같습니다.

그런데 구약시대 성도들은 신약시대 성도들보다 더 깨닫기 어려운 형식적 계시(신약성도들이 구약성경을 대한 미달적 관점)의 말씀으로 실상의 구원을 이루어가야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시대의 성도들이 신약시대의 성도들보다 신앙이나 신령면이 앞섰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약성도들이 신약성도들보다 죄악이 덜하고, 속화가 덜하고, 타락이 덜합니다. 그러나 신약성도들은 구약성도들보다 죄악이 더 많고, 속화가 더 많고, 타락이 더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약성도들의 신앙이나 신령면이 구약성도들 보다 적은 것은 이치적이라 하겠습니다.

○ 이 글에서 나타내려는 면은 두 가지

그래서 이 글에서 조명하려고 논설하는 면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신약시대 우리 성도들이 신, 구약성경을 대할 때 신약성경 보다 구약성경이 보다 더 구원도리를 깨닫기가 어려운 말씀이라는 것과 또 하나는 그러하기에 구약시대 성도가 신약시대 성도들보다 신앙이나 신령면이 더 앞선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은 구원도리를 깨닫기 어려운 구약성경 곧 형식적 계시의 말씀을 깨달으려면 신약성경의 실상적 계시의 말씀을 깨닫는 것보다 더 신령면이 깊어야 감당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구약시대에는 구약성도들이 감당할 할 수 있는 구약성경을 주셨고, 신약시대에는 신약성도들이 감당 할 수 있는 신약성경을 주셨습니다. 이러하기에 구약시대 성도들이 신약시대 성도들보다 신앙이나 신령면이 앞섰다는 것은 이러한 면을 상고해 볼 때 충분히 분석할 수 있어서 증명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제까지 이와 정반대로 여기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구약성경이 형식적 계시라서 깨닫기 쉽고, 신약성경은 실상적 계시라서 신령면이 많아 깨닫기 어렵다고 말입니다. 또 구약시대 성도가 신약시대 성도에 비해서 신앙이나 신령면이 적고, 신약시대 성도가 구약시대 성도 보다 신앙이나 신령면이 더 깊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관념을 바꾸어야 할 것으로 깨닫습니다. 그것은 이 두 성구로 상고해 보아서 어느 정도 증명이 됨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또 이 두 성구 외에 전체 구약성경과 전체 신약성경을 상호간 같은 구원도리가 있는 성구를 비교해 보아서 과연 구약성경이 신약성경 보다 구원도리를 깨닫기가 더 어려운 말씀인지와, 또 구약시대 성도가 신약시대 성도들보다 신앙이나 신령면이 더 앞서는지를 깊이 한번 연구해 보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시대 말기에 있는 현재의 우리들이 아벨의 신앙과 아브라함의 믿음과 그 외 구약성도들이 얼마나 실상적으로 깊은 신앙생활을 하였나 하는 것을 구약성경을 보고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신약시대 성도들이 구약시대 성도들 보다 신앙이나 신령면이 더 앞선다는 오류 된 관념을 버려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그리고 구약성도와 신약성도에 대한 바른 정관을 가지시기를 바라는 뜻에서 비록 이에 대한 깨달음이 물꼬를 터는 시발에 불과한 글이지만 연구 주제를 삼으시기를 바라면서 이렇게 논제적 글을 발표합니다.

그래서 우리 신약성도들이, 구약성도들은 구약성경에 기록된 표본적 믿음의 선진들 몇 분 외에는 다 형식적 신앙생활이어서, 실상적 깊은 신앙의 신령면에 대해서는 배우고 본받을 면이 별로 없다는 관념을 이제는 새롭게 바꾸어야 하겠습니다. 아벨의 순교와 아브라함의 믿음과 그 외 구약시대 믿음의 선진들의 실상적 깊은 신앙을 신약시대 성도들이 깊이 상고하는 연구가 필요하다고 깨닫는 것입니다.  

○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바다를 건널 때

◎(고전10:1-2)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바다를 건널 때 모세는 앞장서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뒤를 우르르 따라간 것으로만 여기기 쉽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깊은 구원도리가 있는 것을 깊게 연구하지 못한 것이 신약성도 된 우리입니다. 그래서 구약 이스라엘의 출애굽 인도를 신약시대 성도인 우리들에게 대한 형식적 계시로만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출애굽에서 더 이상의 깊은 구원도리가 있다는 것을 밝히 알려주시는 말씀이 고전10:1-2입니다.

고전10:1-2 말씀대로 홍해를 건널 때, 하나님만 바라보고 홍해를 건너가느냐? 아니면 넘치는 바닷물이 두려워서 건너가지 않느냐? 하는 신앙의 실상적 걸음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사는 실상의 세례가 홍해바다를 건너는 가운데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신약성도 우리들이 바라보는 구약성경의 형식계시 속에는 이러한 실상의 신앙걸음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좀 세속적 표현이지지만 구약성도들의 신앙과 신령면을 신약성도 우리들이 깔보아서는 안되겠습니다. 구약성도들이 가진 신앙과 신령면의 정도를 신약성도들인 우리가 바로 파악하지 못해서 그렇지 신앙과 신령면이 우리들보다 앞섰으면 앞섰지 뒤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 성도들은 신약시대 성도 우리들보다 죄악이 적은 시대이기에 심령이 덜 어두워서 신앙과 신령면이 앞섰다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 신약성도가 생각하기를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주신 구약성경의 구원도리가 형식적 계시뿐이냐? 형식계시 속에 구약성도에게 실상적 신앙생활을 하는 실상적 계시가 포함되느냐? 하는 깨달음의 차이가 날뿐입니다.

○ 구약시대 성도들의 신앙과 신령면을 재연구, 재인식, 재조명의 필요성

그래서 구약시대 성도들의 신앙과 신령면을 구약성경을 가지고 재연구, 재인식, 재조명, 할 필요성을 아주 많이 가져야겠다는 깨달음을 가집니다. 그래서 그 재연구, 재인식, 재조명을 할 수 있도록 보충으로 주신 신약성경을 가지고 구약성경과 연결하여 깊이 상고해야 됨을 깨닫습니다.

이래서 신약시대 성도 된 우리가 구약시대 성도들이 가진 실제 신앙의 정도가 얼마나 깊고 신령적이었는지 그 관념을 새롭게 정립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이제껏 구약성도에 대한 신앙과 신령면의 정관에 대해서 미달에 그친 것을 이제는 바로 깨달아 바로 잡고 바로 나타내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 신약시대 성도들이 구약시대 성도들 보다 더 형식적이고 더 외식적이며 더 방탕하고 더 속화되고 더 타락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서 구약시대 믿음의 선진들의 실상적 신앙과 신령면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물론 구약성도 전체 對 신약성도 전체 對에 대한 신앙과 신령면을 말합니다.

○ 아래는 구약시대 구약성경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구약성도들에게 형식과 외식의 신앙을 원치 않으셨음을 밝히 알 수 있습니다. 신약성도 우리들에게와 마찬가지로 실상과 진실의 신앙을 원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하는 말씀입니다.

◎(잠15:8)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

◎(잠21:3) 의와 공평을 행하는 것은 제사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

◎(전5:1) 너는 하나님의 전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제사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저희는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

◎(사1:10-15)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사66:3)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고 어린 양으로 제사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으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하는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

◎(렘5:1-2)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 *그들이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할지라도 실상은 거짓 맹세니라

◎(렘5:31)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그 결국에는 너희가 어찌 하려느냐

◎(렘6:20) 시바에서 유향과 원방에서 향품을 내게로 가져옴은 어찜이요 나는 그들의 번제를 받지 아니하며 그들의 희생을 달게 여기지 않노라

◎(호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욜2:13)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암5:21-27) 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래 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지로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희생과 소제물을 내게 드렸느냐 *너희가 너희 왕 식굿과 너희 우상 기윤 곧 너희가 너희를 위하여 만들어서 신으로 삼은 별 형상을 지고 가리라 *내가 너희를 다메섹 밖으로 사로잡혀 가게 하리라 이는 만군의 하나님이라 일컫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미6:6-9)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여호와께서 성읍을 향하여 외쳐 부르시나니 완전한 지혜는 주의 이름을 경외함이니라 너희는 매를 순히 받고 그것을 정하신 자를 순종할지니라

◎(슥7:4-6)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온 땅의 백성과 제사장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칠십 년 동안 오월과 칠월에 금식하고 애통하였거니와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너희의 먹으며 마심이 전혀 자기를 위하여 먹으며 자기를 위하여 마심이 아니냐

◎(말1:6-14)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주의 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함을 인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기를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 *그러나 너희는 말하기를 여호와의 상은 더러웠고 그 위에 있는 실과 곧 식물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하여 내 이름을 더럽히는도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폐스러운고 하며 코웃음하고 토색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여호와의 말이니라 *떼 가운데 수컷이 있거늘 그 서원하는 일에 흠 있는 것으로 사기하여 내게 드리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니 나는 큰 임금이요 내 이름은 열방 중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 지금 신약시대에 성경을 기록한다면 위의 구약성구 보다 더 경책의 말씀을 기록

위의 성구가 형식적 외식 신앙생활을 하는 구약성도들에게만 해당되는 하나님의 말씀이라 여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지금 이 신약시대에 하나님의 선지자가 있다면 형식과 외식을 넘어서 이제는 형식과 외식조차도 하지 않고 믿는다 하나 불신 신앙생활을 하는 타락한 이 시대 성도들에게 대한 경책의 말씀은 이 보다 더 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기에 이 시대가 지나가고 이 다음 시대 성도들이 현재 이 시대 성도들에게 대한 경책의 말씀을 본다면 이 시대의 신앙과 신령면에 대해서 어떻게 여기겠습니까? 구약성경의 이사야 선지자와 예레미야 선지자가 구약성도들에게 경책한 말씀보다 이 시대에 선지자가 이 시대에 성도들에게 경책한 말씀은 얼마나 더 진노하는 하나님의 경책의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그렇기에 한 면만 보아서는 안 되겠고 그 이면과 저면 이 시대와 저 시대 그리고 또한 다음 시대도 헤아려 보아야 하겠습니다.

○ 결론을 맺으려고 합니다.  

위의 본문 서두의 두 성구로 상고해 볼 때 구약성경이 신약성경보다 구원도리를 깨닫기가 어렵습니다. 그렇기에 또한 구약성도가 신약성도 보다 신앙과 신령면이 앞섭니다. 그러므로 신약성도들의 관점에서 볼 때에 구약성경이 형시적 계시이지, 구약성도들에게는 구약성경이 실상적 계시입니다.

또한 구약성경은 신약성경을 깨닫는데 근본 바탕이 됩니다. 구약성경을 밝히 깨달으면 신약성경에서 난해절이 안 생깁니다. 신구약 성경을 모두 밝히 깨달으면 구약성경에서나 신약성경에서 난해절이 안 생깁니다. 또 상징적 계시가 없음을 알게 됩니다. 상징적 계시라고 여기는 것은 신구약 성경을 깊이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나타나는 반응입니다. 그렇기에 성경에는 난해절도 없고 상징적 계시도 없습니다. 성경에 난해절이 보이고 상징적 계시가 보이는 것은 아직도 그만큼 성경을 깊이 밝게 깨닫지 못했다는 증표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은 구약성경의 구원도리를 밝히 깨닫도록 실상적으로 풀어놓은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위의 글과 연관한 갈3:24-25 상고

◎(갈3:24-25)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 계명적 성격면을 가리켜서 '율법'

신약성경 보다 구약성경이 우리 신약성도로서는 구원도리를 깨닫기 더 어려운 말씀이고 또 신약성도보다 구약성도가 신앙면과 신령면이 더 앞선다고 말하면 갈3:24-25에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하는 성구와 배치되는 말이라 여기기 쉽겠습니다.

그러나 갈3:24-25의 말씀에서 '율법'이라는 것은 성경의 율법적 성격을 말씀하는 것이지 구약성경 자체를 '율법'이라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구약성경이나 신약성경을 율법적으로 대하는 성격을 가리켜서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신구약 성경을 계명적으로 지키는 성격면을 가리켜서 율법이라 했고 '몽학선생'이라 한 것인데, 그 몽학선생이 나타내려는 뜻은 계명 지키는 것으로만 가지고는 그리스도에게로 인도 받기에 명확한 인도자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3:24-25에 '율법이 몽학선생이 되어' 하는 이 율법은 구약성경 그 자체가 율법이어서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구약성경이나 신약성경도 계명으로만 지키는데 그쳐서 율법으로만 상대해서는 그리스도에게로 인도 받는 걸음에 명확하게 인도함을 받지 못하는 몽학선생에 머물고 만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런고로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하는 그 율법은 계명 지키는 것에만 머무는 그 면을 율법이라 하신 것이지 구약성경 자체를 율법이라 하신 것이 아닙니다.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만이 구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 계명을 지키는 율법이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계명을 지키는 율법이 없으면 몽학선생 조차도 없어서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함을 받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계명을 지키는 것 곧 율법을 지키면 이제 그 계명을 지키는 그 자체가 믿음에 나아 갈 수 있게 되기에 계명을 지킴으로 믿음에 나아간 그 믿음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 신약성경은 구원도리를 더욱 밝혀 주신 말씀

그래서 갈3:24-25에서 밝히 알려주시는 면과 같이 구약시대 성도들은 구약성경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야 했었지만, 신약시대 성도들은 신약성경 갈3:24-25에서 밝히 말씀하여 주신대로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하신 이 말씀으로 인하여 율법 對 몽학선생,  그리고 몽학선생 對 믿음, 그리고 믿음 對 그리스도, 라는 관계의 구원도리를 쉽게 밝히 알 수 있도록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신약시대 성도들이 신구약 성경으로 구원도리를 깨달을 수 있는 것이 구약시대 성도들이 구약성경으로 구원도리를 깨닫는 것보다 그 만큼 깨닫기가 상대적으로 쉽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또한 구약성경은 신약성경 보다 깨닫기 어려운 말씀이라는 것입니다.(신약성도의 관점에서 볼 때) 그래서 상대적으로 구약성도들이 신약성도들보다 신앙이나 신령면이 앞서야 만이 구약성경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에 구약성도들이 신약성도들 보다 신앙이나 신령면이 더 깊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하는 성구 중 하나가 갈3:24-25입니다.

그렇다 해도 구약시대 때 구약성도가 구약성경을 보고 구원도리를 깨닫는 정도나 신약시대 때 신약성도가 신약성경을 보고 구원도리를 깨닫는 그 정도는 같습니다.

또한 신약시대 성도가 구약성경만을 본다면 신약성경으로 구원도리를 깨닫는 것보다 깨닫기가 더 어렵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구약시대 성도가 만일 신약성경만을 본다면 구약성경으로 구원도리를 깨닫는 것 보다 더 쉽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신약시대 성도가 구약성경을 보고 그 형식적 계시(신약시대 성도의 관점에서 볼 때)에 나타난 구원도리를 쉽게 깨달을 수 있는 것은, 구약성경을 밝히 알 수 있도록 조명한 신약성경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성경과 구약성경을 연관 시켜서 상고하면 구약성경이 깨닫기 쉽게 기록된 성경으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신약성경이 없고 구약성경만으로 신약시대 성도들에게 구원도리로 삼아라 한다면 구원도리를 잘 깨달을 수 없어서 구원의 걸음을 잘 걸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이러 함을 증명하는 것이 있으니 유대교인들은 신약성경을 부인하고 구약성경만으로 이 신약시대를 대하고 있습니다. 이러다 보니 구약성도들보다 심령이 어두워져 있는 신약성도들로서는 자연히 구약성경에 대한 구원도리를 깨달을 수 없기 때문에 구원을 실상적으로 이루어 가는 믿음을 가지지 못하여 그리스도에게 인도 받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갈3:24-25에서 말씀하시는 것같이 계명을 지키나 믿음에 이르지 못하는 율법에서 그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함을 받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일2:22에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말씀하셨습니다.

신약성도인 우리들도 계명을 지키되 율법으로만 상대하여 계명을 지키는 데만 그치면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함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를 '적그리스도'라 하셨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에게로 바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미혹과 오류에 대한 위험성을 교훈으로 말씀하신것이 '적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적그리스도의 요소가 있는지는 살필 곳은 이방 세상이 아니라 율법을 가진 우리 성도들입니다. 그러므로 갈3:24-25말씀이나 요일2:22 말씀은 같은 구원도리가 있는 말씀입니다.

그렇기에 계명을 지키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함을 받는 믿음에 이르는 계명 지킴이 있고, 계명을 지키되 계명 지키는 데만 그쳐서 율법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계명 지키는 것이 믿음에 이르지 못하고 율법만 지키는 것에 머물면 적그리스도가 되기에 심히 경계하여야 하고, 계명을 지키는 것이 믿음에 이르는 과정에 있어서 몽학선생이 되었다면 계명을 지키는 그 지킴의 순서를 바로 가졌다 하겠습니다. '몽학선생'이라는 것은 계명을 지키는 그것이 믿음을 가지는 과정으로 삼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계명을 지켜야 믿음에 이르고, 믿음에 이르러야 그 믿음이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여 주게 되는 것입니다.

그와 반대로 계명 지키는 것이 믿음에 이르지 못하고 계명만 지키는 것만이 되면 율법에 머무르는 것이 되어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같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복음을 방해하는 적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신구약 성경으로 믿음을 가져서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함을 받지 못하면 자신이 율법에 머무는 데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방해하는 적그리스도가 됩니다.

갈3:24-25에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하는 말씀을 근거해서 구약성경을 율법이라 여기고 또한 구약성경을 실상성과 거리가 먼 몽학선생으로만 여길까 하여 갈3:24-25을 상고해 보았습니다.

○ 신약성경도 계명 지키는 것에만 머물면 율법

이렇게 신구약 성경 말씀을 계명 지키는 것에만 머물고 믿음에 이르지 못하면 신약성경도 율법이 되는 것입니다. 또 신구약 성경 말씀을 지키는 것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한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구약 성경 말씀은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계명으로 지키는 것에만 그쳐서는 안 됩니다. 계명을 지키는 것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함을 받을 수 있는 믿음에 이르는 계명 지킴이 되어져야 합니다.

이 글은 구약성도들의 신앙과 신령면이 신약성도 된 우리가 여기는 것같이 형식적이나 형식적이지만은 않고, 율법적이나 율법적이지만은 않고, 육체적이나 육체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을 조명하기 위한 글입니다. 그러나 이 글은 현재적 깨달음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메모하는 차원의 글입니다.

그러기에 이 글의 중심만 받으시고 진리적 문장적 논술이 부족한 점은 각자가 가지신 실력으로 보충, 보완, 수정으로 채우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글은 구약성경 對 신약성경에 대해서와 그리고 구약성도와 신약성도 간에 신앙과 신령면에 대해서, 재연구, 재인식하는 논제가 되기를 바라는 글입니다. 그 이상의 깊은 차원의 구원도리는 각자가 신구약 성경을 진실 되이 상고하므로 깨달아서 그 깨달은 높은 구원도리를 우리들에게 또 발표하여 주시면 되겠습니다.

<후기>

이 글의 내용이 완벽도로 볼 때는 내용이 매우 미진합니다. 그렇지만 구약성도에 대한 신앙을 연구하는 논제면에서는 운을 떼는 것과 같습니다.

이 글은 원고가 벌써 작성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발표를 미루어 왔는데 그것은 글의 내용이 아직은 발표할 시기가 되지 않았다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근간에 건강이 좀 좋지 못하므로 인해 마음을 고쳐 막은 것은 지금이라도 주님께서 부르시면 가야 하므로 깨닫게 해주셔서 기록한 것을 제 때에 발표하지 못한다면 이는 맡긴 일에 제 할 일을 다하지 못한 불충이라 여겨져서 이 글을 발표합니다.

그러기에 영안이 밝고 신령한 분들께서 이 글을 연구 주제를 삼아 이 글보다 더 영감적이고 더 진리적인 글로 발표하여 주신다면 부족한 종은 주신 달란트를 감당했다 여겨져서 평안을 가질 수 있겠습니다.

우리 공회 신앙노선은 '영감주의' '진리주의'라는 것을 우리 모두 잘 인식하고 있는 바입니다. 그래서 이 글은 '영감주의' '진리주의' 신앙노선 명제 아래에서 발표를 합니다. 이렇게 '영감주의' '진리주의'를 말하는 것은 이 글 중에는 믿음의 선진들께 배운 성경해석과는 좀 차이가 있는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믿음의 선진들께 배운 성경해석과는 '영감주의' '진리주의' 신조는 같고, '영감주의' '진리주의'에서 깨달아 나타내는 교리의 표현은 모양이 좀 다른데 이는 믿음의 선진들이 나타낸 교리신조가 둥치라면 부족한 종의 글은 그 둥치에서 자라 나온 가지이기 때문에 모양은 다르나 그 속에 속성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글은 믿음의 선진들께로부터 배워 자라 나온 그 자람의 글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이러함을 '영감주의' '진리주의'라는 넓은 범위의 시각으로 보지 않고, 믿음의 선진들과 스승께로부터 지금껏 배운 지식과 부딪히니 교리신조의 충돌로 여기므로 인해서 받은 은혜에 배은으로 여기는 분들도 계시겠다 하는 우려를 가집니다.

그러나 '영감주의' '진리주의'라는 공회 신앙노선을 걷는 우리들이라면 믿음의 선진들과 스승께 배운 만큼 또 자라야하는 것이 받은 은혜에 대한 사은이라 믿습니다. 비록 믿음의 선진들과 스승께서 가르치신 것과 좀 차이가 난다 할지라도 영감주의냐? 윤리주의냐? 하는 잣대를 가질 때에 '영감주의는 신본주의'가 되겠고 '윤리주의는 인본주의'가 되겠습니다.

그렇기에 받은 은혜에 대한 배은이 아니라, 받은 은혜에 대한 사은이라 여겨서 이러한 우려가 있지만은 감히 이 글을 발표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글을 발표할 때는 맡은 바를 다하려는 것뿐이지 새로운 교리를 깨달았다고 자랑삼아 발표하는 그런 망령은 일체 없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이렇게 발표하는 글이 오히려 이미 믿음의 선조들께서 정립된 교리와 마찰되는 면이 있기 때문에, 일면 그 마찰을 생각하지 않으면 이러한 글을 발표할 수 조차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주셨기 때문에 받아서 기록하고 또 발표를 합니다.

부디 믿음의 선조와 스승께서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신 구원의 도리에 대한 자람의 보충 보완이라는 시각으로 보아주시면 우리 모두의 구원에 분명히 유익이 있겠습니다. 그래서 '신약성도의 관점에서 본 구약성도의 신앙' 라는 이 글로 인해서 신약성도의 신앙도 재정립되는 기회가 삼아지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글은 구약성도에 대한 신앙의 내면적 신령면을 논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구약성도에 대한 신앙의 외면적 신령면을 말하는 각도와는 다르다는 것을 염두에 두시고 오해하여 받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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