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정치-③ 공회교회의 '공회정치' 硏究

2007.05.14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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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정치-③ 공회교회의 '공회정치' 硏究
선지자선교회
이름 : 반석     번호 : 218
게시일 : 2006/12/23 (토) PM 10:20:39  (수정 2006/12/26 (화) AM 00:00:37)    조회 : 41  

■ 교회정치-③ 공회교회의 '공회정치' 硏究


교회는 장로정치를 해야 성경적입니다. 장로는 다스리는 직으로서 그리스도직 중에 왕직입니다. 그렇다고 오늘의 장로교회와 같은 장로정치를 해야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의 장로교회의 장로정치는 본래의 성경적 장로정치에서 부분적으로 이탈 된 부분이 있습니다.

성경적 다스리는 장로정치는 사도시대 초대교회의 공회정치였습니다. 그래서 그 공회정치 가운데는 다스리는 장로정치가 들어 있습니다.

장로정치라고 하면 다스리는 정치입니다. 그렇다고 '장로정치' 이렇게 말하면 오늘 장로교회의 장로정치 그대로를 떠올리면 안됩니다. 그것은 성경에서 말씀하는 다스리는 정치 곧 장로직분의 정치가 있고, 또 오늘에 장로교회가 가진 노회와 총회를 통하여 지교회를 다스리는 장로정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장로정치라고 할 때에는 두 종류의 장로정치가 있다는 것에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적 장로정치 즉 공회정치와 오늘의 장로교회의 장로정치가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 글의 초두에 '교회는 장로정치를 해야 성경적입니다.' 하는 말은, 성경에서 말씀하는 그리스도직의 왕직의 다스리는 장로정치를 말합니다. 그러기에 '장로정치'의 성경적 정의를 바로 알아야 하겠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성경적 교회정치는 다스리는 장로정치입니다.

다스림이 없는 교회는 정상적인 교회가 아니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왕직이 없는 곳이 어떻게 교회가 되겠습니까? 고전1:2에 '하나님의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를 교회라 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사도시대 초대교회의 교회정치는 공회정치였으며 그 공회정치는 다스리는 정치였습니다. 예루살렘공회에는 장로직분이 분명히 들어있습니다. 그러나 오늘과 같은 장로정치는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또 오늘과 같은 장로정치가 전혀 아닌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늘의 장로정치는 예루살렘공회와 같은 공회정치를 외형적으로는 많이 닮아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성이 많이 변질되었습니다.

장로교회의 장로정치는 침례교회의 회중정치 보다 외형적으로는 보다 더 성경적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근본적으로 다스림을 받고 또 다스림이 있는 것이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회중정치보다 장로정치가 다스림을 받고 또 다스림이 있는 정치이기 때문에 외형적 면에서는 회중정치 보다 장로정치가 성경적입니다. 그러나 다스리는 것이 하나님께 다스림을 받아서 그 다스림으로 다스리는 것이 없으면 그 폐해는 회중정치 보다 크겠습니다. 왜냐하면 회중정치는 다스림의 계급이 없고 또 독립교회이기 때문에 강제나 간섭을 받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불의의 교권에 강제나 간섭을 받지 않기 위해서 회중정치로 독립교회로 나서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불의의 교권에 강제나 간섭을 받지 않기 위해서 회중정치로 나서다 보니 치우쳐서 그 다음 순서로 독립교회로 신앙사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회중정치 독립교회 신앙사상이 불의의 교권에 강제나 간섭을 받지 않고 나갈 수 있기 때문에 아주 성경적인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회중정치는 독립교회를 낳았기 때문에 공회정치의 개교회와는 아주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회중정치의 독립교회라는 것은 개교회가 독립성을 가졌다는 것이고, 공회정치의 공회교회는 그 개교회가 지체성을 가졌다는 말입니다.

개교회와 개교회가 각각으로 세워져 간다는 것이 회중정치의 독립교회이고, 개교회와 개교회가 공회를 가져서 세워져 간다는 것이 공회정치의 공회교회입니다.

침례교회는 회중정치를 하기 때문에 자연히 독립교회가 되는 배경이 깔려져있습니다.

그러므로 회중정치 독립교회로 나가는 침례교회는 교회의 다스리는 왕직 곧 장로직이 무엇인지를 미쳐 성경적으로 깊이 깨닫지 못한 미달을 가지므로 인해서 한쪽으로 치우쳤습니다.

회중정치는 독립교회적 개교회주의입니다.
공회정치는 공회교회적 개교회주의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지체입니다. 각 부분이 따로 떨어져 독립할 수 없습니다. 이 지체와 저 지체는 한 지체입니다. 한 몸입니다.

개혁교회 시대의 장로교회 장로정치는 개교회를 한 지체로 여기고 공회정치를 하려고 힘을 썼습니다. 그래서 장로를 세워 당회를 운영하였습니다. 비록 지금의 장로교회 장로정치는 공회정치성이 변질되었습니다만.

그런데 침례교회의 회중정치는 불의의 교권에 침해를 받지 않으려고 독립교회로 나서다보니 이제는 거의 공회정치성이 배제된 독립교회주의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렇기에 오늘에 있어서, 장로교회의 장로정치는 오늘에 된 그만큼의 치우침의 고장이 생겼고, 침례교회의 회중정치 또한 오늘에 된 그만큼의 치우침의 고장이 생겼습니다.

이런 치우침의 고장들이 있기 때문에 공회교회의 공회정치는 개교회가 예루살렘공회 대로 공회로 모여서 '의논'하고 '의결하고 '집행'하는 공회정치를 향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공회에서 의논 의결한 것이 교회의 최고의 권위를 가집니다.

공회정치에서 개교회가 모여 하나님의 뜻을 쫓아 '의논' '의결' '집행'을 하는 공회에서는 명문헌법이 없고 오직 성경을 헌법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리고 공회의 의결은 다수가결이 아니고 진리전원일치로 통과하게 됩니다. 참석한 모든 공회인이 '可' 할지라도 그 중 한 공회인이 '不'하면 그 의결은 통과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전원일치' 결의가 공회의 결의이며, '하나님의 뜻에 전원일치'결의대로 교회를 다스리는 집행 또한 공회의 집행입니다. 이렇게 집행 곧 다스린다고 개교회에 대하여 그 집행을 강제하지 않는 것이 또한 공회정치입니다. 권고할 뿐입니다.

개교회의 교인들에게도 말씀대로 살 것을 강제하지 않지 않습니까? 기도와 권면으로 신앙이 자라기를 오래 참습니다. 이와 같이 공회의 집행도 개교회의 교인에 대한 면과 같습니다.

그런데 천주교의 교황정치는 어떠합니까? 다스림의 강제성이 교회뿐 아니라 세상까지 범위 안에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감리교회의 감독정치는 어떠합니까? 감독이 교회를 다스리며 또 강제성이 있습니다. 또한 장로교회의 장로정치는 어떻습니까? 노회와 총회에서 가진 힘만큼 강제성이 있습니다.

그러면 침례교회의 회중정치는 어떻습니까? 이렇게 교회정치가 상급기관이 있어서 강제적으로 다스림이 있으니 아예 상급기관을 두지 않고 다스림 없는 정치를 하자고 해서 회중정치를 가지며 또 그로 인해서 독립교회로 나갑니다.

상급기관을 두지 않기 때문에 다스림을 받지도 또 다스리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정치가 아주 좋아 보이는데 한편으로는 교회의 그리스도직 중에 왕직을 벗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교회정치를 성경적으로 보완하면서 성경적으로 나가는 교회정치를 하기 위해서 예루살렘공회 정치를 향해서 나아가는 공회교회의 정치가 바로 공회정치입니다.

성경적 다스림이 있는 교회정치가 공회정치라 했습니다. 공회정치에서 목사와 장로가 교인을 다스리는 정치를 해야 하는데, 지금은 모든 교회들에서 장로직의 인식 변질이 있기 때문에 장로직 곧 다스리는 직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장로직을 받습니다. 그래서 장로직은 목사직과 대등하게 여겨서 목사에게 다스림을 잘 받지 않고, 그와 반대로 교인들에게는 다스리기만 하려고 합니다. 장로직의 변질입니다.

그래서 공회교회는 장로를 세우나 목사와 장로로 구성된 당회를 가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과 하나님의 종에게 잘 다스림 받고 또 속한 구역식구를 잘 다스리는 권찰이 참 성경적 장로직분을 감당하고 있기 때문에, 교회의 성경적 참 장로성을 가진 직분은 그나마 권찰이라 여기고 '권찰회'를 '당회' 대신 개교회의 모든 운영에 있어서 '의논' '의결''집행'을 합니다.

그래서 권찰회 안에는 목사, 장로, 집사와 그 외 권찰직의 직분을 가졌으면 권찰회원이 됩니다. 그러므로 공회교회가 가지는 권찰회는 개교회 범위 안에서 가지는 하나의 공회정치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