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인의 제사와 복음성가

2007.05.14 15:52

반석 조회 수: 추천:

가인의 제사와 복음성가
선지자선교회
이름 : 반석     번호 : 217
게시일 : 2006/12/20 (수) PM 08:35:56  (수정 2006/12/22 (금) AM 02:42:59)    조회 : 43  

■ 가인의 제사와 복음성가


◎(창4:3-4 )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이 하나님께 제사를 안 드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제사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가인이 제사를 드릴 때 제물 없이 제사를 드린 것 아닙니다. 제물을 드렸으나 그 제물은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와 제물을 받지 않으신 것은 가인 제 중심으로 제사를 드렸고 또 제 중심의 제물을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께 찬송을 안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찬송을 드립니다. 그러나 그 찬송은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십니다. 또한 우리가 찬송을 부를 때 열심 없이 드리는 것 아닙니다. 열심히 드렸으나 그 찬송은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십니다.

오늘 우리의 찬송과 열심을 받지 않으시는 것은 찬송이 아니라서 안 받는 것이 아니고, 열심히 아니라서 안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 제 중심으로 찬송을 드렸고 또 인간 제 중심의 열심으로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이유는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제사를 드려야 하는데, 땅의 소산으로 제사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찬송을 받지 않으시는 이유는 우리는 주님의 대속을 입고 찬송을 드려야 하는데, 대속을 벗고 찬송을 드리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활 대속을 입고 살려면 죄와 마귀와 사망의 권세와 싸워 이겨야 합니다. 교회가 전투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복음성가를 들고 전투교회가 될 수 있겠습니까? 복음성가로 죄와 마귀와 사망의 권세를 이길 수 있겠습니까? 죄와 마귀와 사망의 권세와 싸우는 전투교회라면 복음성가를 부를 여유가 없을 것입니다!

또한 전투교회로서 주님의 대속공로의 은혜를 힘입어서 죄와 마귀와 사망의 권세와 싸워 승리했다면 복음성가로는 그 전투에 승리한 찬송이 결코 되지 못할 것임을 분명히 알 것입니다.

전쟁터의 군인과 산보 가는 풍류객이 부르는 노래의 성격은 노래는 다 같은 노래이나 그 성격이 실로 다릅니다. 하나는 풍류이고 하나는 생사를 걸었습니다.

오늘의 교회는 유치신앙이 많다보니 그 유치의 목소리가 큰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지금은 전투교회의 장성한 신앙이 많지를 못합니다.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복음성가를 열납 받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찬송은 찬송이나 대부분이 인간중심의 찬송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제 2의 일제 신사참배나 6,25와 같은 환란이 오면 복음성가를 들고 그 환란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자문자답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언제까지 치마폭에 쌓인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을 대해서야 되겠습니까!

진자리 마른 자리 갈아 눕혀서 또 젖 먹여 밥 먹여 키워 놓으면 자라 가야지, 세살 적에도 철없는 어린아이, 열 살 적에도 철없는 어린아이, 스물 살 적에도 어린아이, 사십 먹어도 철없는 어린아이로 그 자리에서 멈춰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나이를 사십이나 먹어 덩치는 태산 만 한데 나이 값 덩치 값 못하고 늘 세 살 적 때 부르던 엄마 앞에서 짝짝-쿵 만 부르고 있으면 그것이 팔푼이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 팔푼이가 바로 복음성가도 은혜가 넘치는 찬송이라고 떼쓰며 우기는 그 者가 아니고 누구이겠습니까!

물론 신앙의 연조가 어려서 그런 소리를 하면 이해를 하겠지만, 예수 믿어 6개월이 지나고 일년이 지나고 아니 십 년이 지나고 이십 년이 지났는데도 그런 소리를 한다면 참 큰 일입니다.

조선 땅에 복음이 처음 들어와서 성경을 파는 매서인이 쪽 복음성경을 마을에 전해 놓고 6개월이나 일 년 후에 그 마을을 방문을 해보면 그 마을이 완전히 천국만 바라보고 사는 천국이 되어 있었습니다. 오늘 같이 목회자도 없는 심심 산골마을에서 말입니다. 그러면 선교사 목사님을 모시고 교통이 오늘 같지 않은 곳을 산 넘어 강 건너 일주일 보름 걸려 찾아가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조선 우리 한국 땅에 복음이 들어 온지가 벌써 100년이 훨씬 넘었습니다. 교회의 나이가 백발이 세었는데 어린아기 노릇하니 이것이 신앙의 노망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과거나 오늘이나 산보 신앙은 흥을 거리는 복음성가를 애창하다가 환란을 만날 것이요, 전투신앙은 찬송가를 애창하면서 환란을 예비할 것입니다.

복음성가를 선호하고 또 복음성가를 불러도 은혜가 넘친다고 말하는 신앙은 자칭 산보 가는 신앙이라고 자신의 가슴에 그 이름표를 단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또 이름표 밑에 코 수건을 하나 더 붙인 것이나 같겠습니다. 옛날 초등학교 입학식 때는 콧물이 흐르면 닦으라고 코 수건을 하나씩 다 달아 주었습니다.

구약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징책 받고 벌받은 것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다고 징책 받고 벌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되 바로 섬기지 않았다고 징책 받고 벌받았습니다.

구약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징책 받고 벌받은 것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지 않았다고 징책 받고 벌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되 바로 드리지 않았다고 징책 받고 벌받은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징책 받고 벌받은 것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고 징책 받고 벌받은 것이 아니라, 안식일을 바로 지키지 않았다고 징책 받고 벌받은 것입니다.

신약 성도 우리들이 주님께 징책 받고 벌받는 것은 주님을 섬기지 않는다고 징책 받고 벌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섬기되 바로 섬기지 않는다고 징책 받고 벌받는 것입니다.

신약 성도 우리들이 주님께 징책 받고 벌받는 것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지 않는다고 징책 받고 벌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예배를 드리되 바로 드리지 않는다고 징책 받고 벌받는 것입니다.

신약 성도 우리들이 주님께 징책 받고 벌받는 것은 주일을 지키지 않는다고 징책 받고 벌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날 주일을 지키되 바로 지키지 않는다고 징책 받고 벌받는 것입니다.

신약 성도 우리들이 주님께 징책 받고 벌받은 것은 찬송을 드리지 않는다고 징책 받고 벌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찬송을 드리되 바로 드리지 못한다고 징책 받고 벌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았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우리가 아벨의 제사를 드리고 싶지, 가인의 제사를 드리고 싶은 자는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찬송가와 아벨의 제사
복음성가와 가인의 제사

너무 과하게 연관을 시켰다고 여기십니까?
너무 과하게 해석을 했다고 여기십니까?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열납 받으셨습니다.
가인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열납 받지 않으셨습니다.


◎(창4:5)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찬송성이 있는 찬송가를 부릅시다!
복음성가성이 있는 복음성가는 부르지 맙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