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지에 메세지 한 통

2013.09.13 00:28

김반석 조회 수: 추천:

■ 선교지에 메세지 한 통
선지자선교회
오늘 밤 조금 전 휴대폰에 문자 메시지가 한 통 왔습니다.

09/12 10:29 PM
박광현 목사님께서
금일 12일 20:38분에
소천하셨습니다.
길병원 장레식장 201호,
발인은 14일 토요일
부평화장터입니다.

인천 성암교회 박광현 목사님이 소천 하셨답니다. 작년 인천기독교보수교단총연합회 임원회에서 처음 만나 뵈었습니다. 박광현 목사님은 이단사이비연구를 오래 전부터 하신 분입니다. 한국교계 이단연구가로는 1세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때 만났을 당시 하신 말씀이 지금도 귀에 선합니다. “눈에 보이니 안 할 수도 없지요” 이단사이비가 눈에 보이고 또한 이단사이비를 반증할 성경적 교리도 눈에 보이니 이단사이비 연구와 반증사역을 할 수 밖에 없다는 함축적 말씀이셨습니다. 또한 이단연구가에 대한 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는 위로적 말씀이셨습니다.

1년 전 아주 건강하셨고, 집필하신 책자도 몇 권 보내주셨고, 불과 몇 달 전 메일도 주셨는데 이렇게 선교지에서 소천 소식을 받습니다.

선교지에 있는 관계로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하여 박 목사님의 설교집 중에 한 편을 찾아 읽으면서 목사님의 목회와 신앙을 떠올려봅니다.

● 성경적인 복에 대한 이해 (박광현 목사)

시 1:1-6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사람들은 복을 좋아한다. 모두가 복 받는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 복은 잘되는 것이다. 잘되기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복을 가장 많이 강조하는 곳이 종교계이다. 특히 기독교를 복의 종교라고 부른다. 이를 증명하듯이 성경에는 복에 대한 말씀들이 너무나 많이 나온다.
우리는 찬송가를 부를때도 '복의 근원 강림하사...' 하면서 찬송하기를 좋아한다.
우리는 흔히 전도 할 때도 '예수믿고 복 받으라'고 한다. 그때 받으라는 복은 무엇인가? 복이라는 단어를 성경에서 찾아보니 119절에 130 여번 이상 사용되었다. 성경도 이만큼 인간들에게 관심이 많은 복에 대해서 많이 언급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동양에서는 오복(五福)을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수(壽), 부(富), 귀(貴)-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이다. 1. 오래오래 장수하는 것이 복이고 2. 재산을 많이 모아 가지는 것이 복이고 3. 존귀하게 되고 건강한 것이 복이고 4. 좋은 평판을 듣는 덕있는 것이 복이며 5. 죽을 때에는 객사하지 않고 자기 집에서 자녀들이 임종을 지켜보는 중에 잘 죽는 것이 복이라는 것이다. 물론 잘 되어서 잘 살다가 잘 죽는것이 복이 아니라고 할 사람은 없다.

서양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에게 복이란 이 이상은 없다. 인간의 육신이 살아가는 동안 그의 일생이 잘 되는 것이 복이라는 것이다. 모든 종교들이 그것을 지향하고 있고, 인간의 모든 노력 또한 그 복을 향하여서 달려가고 있다.

그러면 과연 성경은 인간이 원하는 그 복을 약속하고 있을까?

성경에서 최고로 복을 많이 받았다고 말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아브라함, 욥, 요셉, 다윗 등등일 것이다. 여러분도 그들처럼 그러한 복을 받는 인물이 되고 싶은가?
그럼 먼저 성경에서 복 있는 사람이라고 시작하는 시편 1편의 다윗의 복 있는 자에 대한 정의를 들어보자.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좆지 아니하며, 오만한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며 그 법대로 사는 자"라고 말한다.
복 있는 자를 병 없는 자라는 구절은 없다. 아들 낳거나 많이 낳는 것도 아니다. 안 죽는 것이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어떤 이는 신명기나 민수기에 보니 복을 말하기를 자손을 많이 낳고 집안이 부해지는 것을 말한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거부가 되었고, 요셉은 국무총리가 되었다.
욥도 더 큰 부자가 되었고 다윗도 왕이 되어 영화를 누렸다.
그럼 복 받은 자가 다 이렇게 되는 것 아닌가? 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한 사람씩 찾아가며 그 문제를 풀어 보고자한다.
먼저 아브라함에 대하여 창세기 12장 2절에 보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너에게 복을 주어 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으로 부르셨기에 우리는 먼저 복의 근원인 아브라함이 받은 복을 보면 복이 무엇인가를 조금은 알게 될 것이다.

여러분 중에 누가 아브라함이 받은 육신적인 복을 이야기 해 보라. 아브람의 생애는 우리가 잘 알다시피 복의 근원으로 부름을 받았기에 자식을 아주 많이 낳았다는 말이 없다. 그가 아주 건강하여 무병장수 했다는 말도 성경엔 없다. 그는 우리가 알고 있을 정도로 거부가 아니다. 창세기 15장 1절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하기를 그에게 상급을 주는데 그 상급은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즉 하나님 자신이 상급이요, 복이라고 말씀하신다.

성경에서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이라 말할 때 그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조상으로 부름을 받았기에 복의 근원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그의 믿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며 그의 재물, 건강, 기적을 말한 적은 없다. 그 증거로 성경 곳곳에서는 아브라함의 믿음과 같은 우리의 믿음으로 우리도 복에 거한다는 말이다.

* 갈 3:9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기를 '너의 씨로 말미암아 세상이 복을 얻으리라'고 하셨는데 그 복은 절대로 우리가 알고 있는 육체적인 잘됨을 말하지 않는다.
아브라함이 그럼 육체적으로 망했느냐? 그렇지는 않다. 때때로 육체적으로 물질적으로 잘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것이 복이라는 것이 아니라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그런 가시적인 것으로 확인케 하셨다. 그래서 민수기나 신명기이 복이라고 우리가 흔히 말하는 것들도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의 가시적인 표현인 것이다. 그 가시적 표현 자체가 복은 아니다.

성경에서 복을 무척 좋아했던 한 사람이 있다. 그는 야곱이다.
야곱은 자신의 형인 에서의 장자권을 뺏어 가지고서라도 하나님의 복을 받으려고 했던 자이다. 그는 하나님의 복을 받기 위해서 온갖 비굴한 짓을 다한다. 하나님의 복이 거부가 되고 자식을 많이 낳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이삭에게 축복을 받아 내었으며 곧 그는 자신이 그러한 사람이 될 줄 알았다.
의지의 사람 야곱은 삼촌 라반의 집에서 세상 사람들이 복이라고 하는 모든 것을 스스로 쟁취하여 낸다.
그의 아내 라헬은 삼촌 라반의 가신 즉, 그 가정에 복을 내려주는 드라빔까지 훔쳐서 도망가고 야곱은 그것을 즐기듯이 눈감아 준다.
그는 많은 소떼와 양떼를 지닌 거부가 되었고 아들 자식만 열이나 넘게 낳은 사람이 되었다. 그는 한마디로 부자 즉, 복 받은 자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모든 것을 잃는 지경이 되었고 얍복강가에서 하나님의 사자에게 다시 축복을 받고 그의 인생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시작된다.
그의 말년은 어떠한가? 그는 그의 사랑하는 자식을 잃는 자가 되었고 그는 흉년으로 먹을 것이 없어 약속의 땅도 버리고 애굽으로 내려와야 하는 거지가 된 것이다. 아들이 열둘이 있어도 기쁨이 없었다
그는 후일에 거지가 되다시피 하여 애굽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는 애굽에 내려와서 자신은 거지가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바로왕에게 축복을 빈다.
복이 있는 자가 축복을 비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나 복이 없는 자가 축복을 빈다는 것은 도리어 이상한 일이다.
야곱은 바로에게 말하기를 나의 130년 세월은 우리 조상에 비해서 너무나 험악한 세월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그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기에 바로에게 복을 비는 자가 된 것이다.
야곱은 그가 복의 사람이 되기 위해 무척 힘썼으나 그렇게 되지 못했고, 하나님의 사자에게 축복을 받은 후에도 그는 도리어 더 부유해진 것이 아니라 더욱 험악한 세월을 보내는 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사자로부터 축복 받은 사람으로 바로를 축복하는데(창세기47:7) 그는 그의 조상보다 더욱더 하나님을 알고 이해하는 자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남을 축복할 만큼 떳떳했다.
그가 바로를 축복할 때 과연 돈을 더 해 달라고 했겠는가? 병이 없게 해 달라고 했겠는가? 하나님을 알게 해 달라고 하지 않았겠는가?

하나님의 사람 요셉을 성경은 표현하기를 형통한 자라고 한다.(창 39:2,3,23)
그러나 우리가 그가 당한 일을 보면 형들에게 버림받아 노예로 팔려 온 것을 보고 형통하게 되었다고 하고 또는 그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힘을 보고 형통케 했다고 한다. 이상한 일이다.
성경은 그것을 형통이라고 한다. 그것은 화라고 하지 않고 오히려 성경은 복으로 취급하고 있다는 말이다. 왜 그에게 그것이 형통이고 복인가?
그의 그 험난한 길을 통하여 그는 점점 하나님을 뜻을 향하여 나아가고 그 뜻을 알아가게 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복의 사람 욥을 통하여 우리는 이 문제를 풀어보자.

성경에 등장하는 욥은 우리가 부러우리 만큼 육신 적인 복을 받은 사람이다. 그의 재산은 어마어마했다. 그는 시험 후에도 그 소유와 재산이 배나 되어 모든 신앙인 들이 그를 부러워한다. 그는 자녀까지 다 보상받았다.
이런 본문을 보고 역시 하나님은 시험을 잘 이기는 자를 버리지 않고 끝내는 더 큰복으로 갚아주신다고 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욥기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결론이 더 큰복을 받으려면 인내하면서 신앙생활 잘하라는 것일까?
과연 욥이 받은 육신적인 복만 가지고 복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여러분이 만약 신앙생활을 잘하면 지금 자식을 다 죽이고 배나 더 준다고 하면 그럴 테니 배나 더 달라고 할 수 있습니까?

욥이 시련을 통해서 참으로 복된 자가 되었으나 그 복됨은 소유의 많아짐과 건강함이 아니다.
그는 고백하기를 욥기42: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환난과 시련을 통해 욥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은 더 큰 재물이 아니라 욥의 고백처럼 주를 더욱 가까이 알게 됨이다. 그것으로 욥은 기뻐하고 있다.
환난 전에 욥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 귀로만 들었던 정도였다면 이제 환난 후에는 눈으로 확실히 보는 상태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후로 얻은 재물은 여호와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신다는 가시적인 증거로 주신 것에 불과한 것이다.
예전에는 라디오 방송만 들었는데 얼마나 궁금했습니까? 그러나 이제는 텔레비젼을 보는 것과 같이 하나님과 가까워졌다는 것이다. 이것이 복인 것이다.
우리는 가나안 땅을 약속의 땅, 축복의 땅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불러내실 때 그렇게 말씀하셨고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그렇게 약속하다.
거기에서 너희에게 복을 줄 것이라고. 과연 아브라함도 기대했었고 이스라엘 백성도 기대하고 들어갔다. 그러나 창12장에 보니 거기는 기근이 있는 땅이었고 그것도 상당히 나쁜 땅이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자기가 바랬던 축복이 아닌지라 가나안을 버리고 애굽으로 내려와 버린다.
이스라엘 백성들 또한 그 땅에서 놀고 먹으며 건강하고 오래 살지 못했다.
그 땅은 여호와 하나님을 찾지 않으면 못사는 땅이었다. 그러나 그 땅에서 약속을 믿고 여호와 하나님을 구하면 그가 역사하는 땅이기도 했다.
축복의 땅이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을 찾는 것이다.
구약에서 마지막으로 다윗을 우리는 복된 인물로 안다. 그러나 알고 보면 다윗은 육신적인 복을 누리다가 죽은 인물로 평가할 수 없다.
그는 왕이 되었으나 곧 바로 왕위에 앉지 못하고 많은 세월을 이방 땅으로 피해 다니면서 돌아다닌 방랑자였다.
그는 왕이 되어서도 자신의 아들들로부터 배반을 당했고 늘 울었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성경에서 복된 자의 정의를 내리니 악인의 꾀를 좇지 않는 자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며 즐거워하는 자가 복된 자라고 할 수 있을만한 인물이 되었다.

구약의 모든 가시적인 복의 형태는 하나님의 함께 하심의 한 표현이다.
우리가 알듯이 이사야, 예레미야, 하박국, 요나, 말라기 등등 주의 선지자들이 인간적으로는 불행했다. 그렇게 큰 영광을 누리지 못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따르므로 세상에서 따돌림받는 인생이 되는 것을 즐거워했다.


무엇이 복인가? 이제 신약을 들어가기 전에 여러분에게 묻고 싶다.
우리가 잘 아는 산상수훈은 복으로 시작하고 있다. 그렇다. 예수님은 인간이 가장 좋아하는 복의 실체를 그의 산상설교 첫 부분에서 밝히고 계시다. 무엇이 복인가? 심령이 가난한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를 복된 자라고 한다. 복이 있으라. 심령이 가난한자여 천국이 너희의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이 정의하는 복된 자이다.
예수님을 따르던 모든 민중들 그들의 관심은 복이었다. 로마에서 해방되는 것을 복으로 알았다.
그리고 먹고 입을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복으로 알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러한 복을 가져다줄 인물을 고대했으니 그가 곧 메시야이다. 사람들은 예수께서 그 문제를 해결해줄 자신들의 육체적인 복을 만들어줄 메시아로 알았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시고 말하시기를 요한복음 6장 나는 너희에게 이런 육신적 문제를 해결해 주러 오신 분이 아니라고 하셨다.
그 분이 그것을 주러 오신 분이라면 그분부터 배부르게 사셔야 했다. 그러나 그는 말하시기를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하셨고 그는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했다. 이 말은 그분이 풍성하게 채워주시겠다는 말이 아니라 그것은 너희들의 관심사가 아니라는 말이다.

예수를 믿어 부자가 되고 건강하게 된다면 또 잘되기만 한다면 예수께서 우리에게 그것을 주시기 위하여 오셨다면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은 바로 그렇게 성취된 삶을 살아야 옳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을 아무리 보아도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 믿어 부자가 되었다든지 형통하게 되었다는 말은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그들의 삶이나 메시지 어떤 부분을 보아도 그것을 조금이라도 이야기하는 부분은 없다. 초대교회는 너무나도 가난했었다. 그들은 예수를 믿음으로 핍박을 받아야 했고 예수를 믿음으로 고난의 길을 가야만했다.

다른 사람은 다 아니어도 사도바울은 잘되어야만 한다. 그는 예수의 믿음대로 산 대표적인 예가 아닌가? 그러나 그의 일생에 있어 그러한 복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도리어 예수를 믿어 가족들에게 버림을 받았고 그는 예수를 믿어 죽을 위기를 수없이 넘겼다. 그가 죄수로 잡혀 베스도의 심문을 받을 때에 남긴 유명한 말이 있다.
이미 바울을 잘 알고 있던 아그립바왕과 신임총독 베스도 앞에선 바울이 자신을 변명해보라고 그들이 말했을 때 그는 예수의 부활을 증거했다. 그러자 베스도와 아그립바는 말했다.
"니 꼴을 보고 우리보고 그런 소리를 하라고 네가 학문이 많다더니 미쳤구나"라고 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미친것이 아니라 나는 바른 소리를 한다고 했다.

사실 바울은 예수 때문에 모든 것을 잃은 몸 병든 몸 자식 없는 몸 미친놈이라는 소리를 듣는 몸이 되었다. 그런데 그는 그런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도리어 내가 미친것이 아니고 나는 제 정신이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을 불쌍하게 생각지 않는다. 도리어 왕의 옷을 입고 세상의 권세와 복을 한 몸에 누리고 있는 그들을 불쌍하게 생각한다. 그는 말하기를 왕이여 제가 이렇게 묶인 것 이외에 당신이 제발 나처럼 되면 좋겠다고 말한다. 자신처럼 모두가 이런 복을 누리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우리는 모두 아그립바왕이나 베스도처럼 되는 것이 복이라고 말하지만 바울은 예수를 믿어 도리어 핍박받는 것이 복이라고 한다. 바울은 또 말하기를 빌립보에 보내는 편지 제3장에서 말하기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것이 가장 복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것에 비해 세상의 지식과 자신이 이전에 가졌던 명예와 부는 배설물과 같다고 한다. 그는 예수그리스도에게 날마다 나아감을 기뻐한다고 한다. 이것은 보통사람이 보기에 미친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시길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가 복 있는 자 라고 했다. 그는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할 것이니 하늘에서 그의 상이 크다고 하는 것이다.

사탄이 우리를 유혹하는 것이 있다. 우리는 그것에 너무나 쉽게 유혹을 당한다. 우리의 관심의 전부가 그것인지도 모른다. 아담이 사탄의 말을 듣고 보니 선악과가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탐스럽게 보였다고 한다. 먹음직-이것은 곧 예수께서 그의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 사탄이 시험했던 첫번째 시험이었다. 돌이 떡이 배부르게 먹으라. 육체적 만족을 말한다. 그리고 보암직했다고 한다. 사탄은 예수를 성전의 꼭대기에 올려다 놓고 뛰어 내리면 많은 사람들이 환호하고 따를 것이라고 했다. 명예와 인기를 말한다. 그리고 탐스럽게 보였다. 사탄은 예수께 자기에게 절하면 세상의 모든 권세를 준다고 했다. 바로 이 먹음직 보암직 탐스럽게 함의 유혹으로 사탄은 예수께 똑같이 다가와서 속삭였다. 인간이 가장 원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것이 잘되면 복 받은 인생이다.

요한 사도는 성도에게 이렇게 권면한다.

요일2:16에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오늘날 성도 또한 먹음직-육체의 정욕, 보암직-안목의 정욕, 탐스럽게함-이생의 자랑의 유혹을 동일하게 당하고 있다. 육체의 정욕을 안목의 정욕을 이생의 자랑을 누리면 그것이 복이라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말하기를 이것은 세상을 좇아서 온다고 한다. 이 부분이 잘되는 것이 절대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복이 아니다.

요한 계시록에 교회들이 나온다. 일곱 교회 중에 부자인 교회가 있었다. 그 교회는 라오디게아 교회였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할 정도이다. 우리의 눈으로 보기에 그들은 복 받은 교회다. 모든 교회가 부러워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교회는 주께서 책망하신 불쌍한 교회이다.
그들의 부요함이 눈을 막았고 그들의 귀를 막았던 것이다. 그 부요함은 절대로 복이 아니다.

일곱 교회 중에 참으로 가난한 교회가 있었다. 그 교회는 환난과 궁핍이 있는 교회였다. 주께서는 그 교회를 칭찬했다. 환난과 궁핍으로 인하여 그들은 죽도록 충성하는 교회가 된 것이다. 그들의 가난은 참으로 하나님의 축복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부자교회 부자신자 육신적인 복을 받는 것이 아니다. 가난하고 병들었다고 해서 주님이 버리신 것도 아니다. 주님을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가 복된 것이다.

과연 성경이 말하는 복이란 무엇인가? 산상수훈에서 말하는 심령이 가난한자. 온유한 자. 애통하는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의 사람인데 이 땅에는 그런 사람이 없다. 팔복에 말하는 복된 자는 예수님 자신이다. 성경이 말하는 복은 예수님을 아는 것이며 그 예수를 인하여 하나님께 나아감이다. 그 예수를 인하여 핍박을 당함이다. 그 예수의 뒤를 따름이다. 예수 외에는 어떤 복도 없다. 예수를 위하여 세상을 버리면 버릴 수록 복이다. 어떤 사람은 이 세상에서 신앙 생활하여 고생하면 천국에서 상급이 많아지고 면류관을 많이 받는다고 한다. 그러나 천국에서 차등이 있을까? 정말로 복된 사람은 예수를 만나기 위하여 천국에 가고 싶어하지 더 많이 받고 싶어서 천국에 가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여러분은 천국에서 면류관을 몇 개 받을 것 같은가? 제가 천국을 보고 온 어떤 사람의 책을 보았는데 천국에 가면 면류관을 쓴 사람들이 있는데 거기에 면류관을 쓰고 누가 높은가 누가 더 많이 받았나 면류관 쓰고 제고 또 면류관 따먹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면류관을 쓴 사람들이 주의 보좌를 향해 면류관을 벗어 던지면서 영광과 존귀를 받으실 분은 바로 당신입니다라고 하면서 찬송을 하더란다.(계4:10,11) 천국은 참복을 누리는 장소이다. 그 복은 에덴보다 더 좋은 예루살렘 때문이 아니라 그 안에 계신 예수와 하나님의 사랑 안에 영원히 거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이 땅에서는 아니라도 천국에 가서는 복을 반드시 준다고 하는데 그 복이 바로 예수와 함께 영원히 거함이 복인 것이다.

이 땅에서 우리가 기도하는 까닭은 이 땅에서 무엇을 해결함을 받는 복을 받으려고 함이 아니다. 기도해서 무엇을 받는 것 이 복이 아니라 기도하는 인간이 됨이 복이다. 구제하라는 까닭 전도하라는 까닭은 전도해서 상을 받으라는 것이 아니라 전도하는 인간이 되는 것 자체가 복인 것이다.

우리가 예배드리는 것은 예배해서 복을 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예배드리는 인간이 된 자체가 복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을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복을 누리는 것이고 기도하는 자체가 복이고 봉사하는 자체가 복이고 전도하는 자체가 복이지 무언가를 받기 위해서 하는 일이 전혀 아니다. 그것 자체가 기쁨인 것이다. 예수를 아는 사람은 다른 복을 원하지 않는다. 예수만이 복임을 알아 그 안에 거하려고 애쓴다. 그리고 한시라도 그분을 만나려한다. 예수 등쳐서 다른 세상을 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너무나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 예수를 위해서 무엇을 해서 다른 어떤 복을 받으려는 노림수가 성도마다 보인다. 그래서 봉사하고 헌금 내고 그래서 예배드리고 찬송하는 아주 유치한 분위기가 넘친다. 정말 복이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교인들이 들끓기 때문이다. 모두다 예수를 위해 무엇을 하려고 한다.(doing) 예수처럼 살려고 하는 자는 없다.(being) 세상에서도 복 받아 머리가 되어 사람들을 누르고 천국에 가서도 최고로 높은 자리에 면류관을 쓰기 위해 의지의 한국인이 되어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것이 한국교회이다. 이것은 교회가 아니다. 욕심의 전시장일 뿐이다. 참된 복은 예수를 얻기 위하여 자신을 버림이다. 마치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우리를 얻기 위하여 자신을 버림같이 .... 말이다. 죄인이라고 하는 자가 무슨 복을 달라고 할 자격이 있는가? 오로지 날 죽여주고 하나님께서 원하는 인간으로 만들어달라는 말 이외에 무슨 할말이 있는가? 그것이 참복인데....

결문

많은 종교들이 복 받으러 오라고 모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모두가 이러 저리 바삐 찾아다닌다. 여러분은 어떤 복을 원하고 있는가? 왜 교회에 오는가? 하나님 앞에 와서 운 적이 있다면 무엇 때문이며 교회에 와서 기뻐하고 간증한 적이 있다면 무엇 때문인가?
좋은 회사에 취직됨을 기도하고 있지 않은가? 혹 좋은 대학에 붙지 못해서 좋은 가정환경이 없어서 나는 불행한자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러나 세상이 구하는 모든 복을 팔아서 예수를 산다면 그는 참으로 복된 자이다. 세상에서 미친 자로 놀림을 받아도 예수의 뜻을 위해 살아간다면 그는 행복한 인생이다. 아브라함이 그 복에 참예했고 야곱의 삶이 그랬고 요셉도 욥도 다윗도 하나같이 하나님을 위해서 고난받았던 인생이다. 세상사람들은 모두가 넓고 평탄한 길이 복된 길이라고 거기로 몰려들지만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좁은 길이 복된 길인 것이다.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자신이 사는 것이 복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죽음으로 주님이 사는 것이 복된 것이다. 세상의 것들을 구하지 말자. 참복을 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