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다운 기자 김신규 기자

2010.01.23 01:31

김반석 조회 수: 추천:


선지자선교회
■ 기자다운 기자 김신규 기자


기사다운 기사를 보았다.
글다운 글을 보았다.

그 기사는 신문에 실려 있다.
그 글은 ‘기자수첩’란에 있다.

기자다운 기자를 보았다.
기개가 있는 기자를 보았다.

외모는 평범하다.
정신은 아름답다.
  
펜에 힘이 있다.
글에 생명이 있다.

성경적이다.
신앙적이다.

교회를 세우는 기사이다.
교회를 지키는 글이다.

하나님이 붙들고 쓰신다.
하나님의 종이다.

나팔을 불고 있다.
파수꾼이다.

어찌 고독하지 않겠는가!
어찌 핍박이 없겠는가!

이러함은 성경적이지 않다!
저러함은 신앙적이지 않다!

아닌 것은 아니다!
틀린 것은 틀리다!

감동되는 기사를 쓰고 싶을 것이다.
감화 주는 글을 쓰고 싶을 것이다.

교회가 타락되었으니
교회가 속화되었으니

안타까운 심정일 것이다.
속 타는 마음일 것이다.

기자다운 기자여 힘을 내시라!
세우신 분은 전능의 하나님이시니!

(선지자선교회 김반석)


○아래는 김신규 기자의 글입니다. 여러 글 중에서 세편을 소개합니다.


● 흔들리는 방주교회

노아시대 세상은 죄악이 관영해 하나님께서 홍수를 통해 세상을 심판하실 것을 결심하셨다. 그리고 당대의 의인인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 것을 명하셨다. 결국 홍수심판에서 노아와 그 가족 8명만 구원을 받았다. 이들 노아의 가족들-노아의 아내, 세 아들과 며느리들-은 노아처럼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의인이라고는 볼 수 없다. 함의 아버지에 대한 실수만 보더라도 그렇다. 더더구나 노아의 아내와 며느리들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어떠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이들은 홍수심판에서 구원을 받았다. 방주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방주는 교회를 상징한다는 것이 올바른 성경적 해석이다. 방주에 들어와야지 구원을 받았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교회로 들어와야지 구원이 있다. 그런데 방주는 물에 떠 있는 배다. 배는 물결에 흔들릴 수밖에 없다. 배가 흔들린다고 배를 떠나서는 바다에서 살 수가 없다. 배가 거친 물살에 흔들려도 배안에 있어야 안전하다. 또한 배는 바다 물결에 흔들리는 것이 당연하다. 배는 물살을 타면서 흔들리기도 하고 풍랑을 만나면 심하게 요동치기도 한다. 배가 풍랑에 가라앉는 것은 거친 물살이 배안으로 넘치거나 배가 깨어져 구멍이 생겨 밖의 물살이 안으로 스며들어와서 이다. 결코 배안에 있는 물로 인해 가라앉는 것은 아니다. 결국 교회가 흔들리는 것은 교회 내부의 문제로 인해서라기보다는 교회 외부의 교회 흔들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교회는 풍랑을 만나 요동치고 있는 방주와 같은 형국이다. 안티기독교 무리들의 공격이 그러하며, SBS방송의 ‘신의 길 인간의 길’ 프로그램을 통한 기독교의 진리를 왜곡하는 모습이 그러하다.
그러나 언제나 교회는 흔들리는 위기는 있었을지언정 침몰하지는 않았다. 심지어 교회가 전멸되다시피 하고 신앙의 자유가 억압받는 북한에서조차도 교회는 없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지하교회와 성도들이 지금도 눈물의 기도를 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지금 심하게 요동치고 있지만 결코 침몰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한국교회와 성도들은 더욱 눈물의 기도를 필요로 한다. 결코 밖으로부터의 폄훼 세력에 휩쓸려서는 안된다. 또한 한국교회는 더 이상 이들의 조롱거리가 되지 않도록 우리 자신들의 모습을 돌아보아야 한다. 사회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는지를 말이다.

(김신규 기자)


● 무신론자 교수

최근 한국창조과학회 대전지부에서 창조과학전시관과 관련된 문제로 기도를 요청한 메일이 발송됐다. 내용은 2002년도에 창조과학전시관(도룡동 새누리교회 터)을 이전하게 되면서 천안대(현 백석대), 혜천대, 한남대 등에 유치의사를 타진했고, 여러 가지 여건을 고려하여 한남대로 이전을 확정하고 협약식을 맺었다는 것. 그러나 곧 이전할 것으로 알고(한남대는 초기에 전시관 건물 신축을 위해 얼마간 연기를 요청) 임시로 카이스트교회의 협력을 얻어 카이스트로 전시관을 옮겼는데, 차일피일 미뤄지는 과정을 겪으면서 2008년 5월 최종적으로 한남대로부터 이전계획을 철회한다는 구두 통보를 받고 모든 이전계획이 어긋났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과정에서 작년 여름 초입에 한신대의 김 모교수가 작성한 글이다. 창조과학회 대전지부에 따르면 김교수는 신학과가 기본이 되는 기독교 대학의 교수이면서도 “국립대학인 카이스트에 창조과학전시관이 있고, 종교교육을 시키고 있는 것은 불법이라는 것과 교육청에서 초·중·고 교사들을 대상으로 창조과학의 방법론으로 진화론에 반하는 창조론을 교육시키는 것은 종교교육”이라는 내용의 글을 비판적인 시각에서 작성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대전지부 관계자는 한신대 김교수가 한겨례신문에 자신은 무신론에 가까운 불가지론자라고 밝혔다고 이메일에서 언급했다.
불가지론(不可知-論)이란 ‘인간은 신을 인식할 수 없다는 종교적 인식론’이라고 한다. 유신론과 무신론을 모두 배격한다는 이 이론을 받아들이는 그는 자신을 ‘무신론에 가까운 사람’이라고 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고 기독교의 진리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기독교 선교를 목적으로 하는 대학교에서 가르치는 교수 본인은 정작 무신론자라는 말이다. 물론 완전한 무신론자는 아니라는 김교수의 애매한 이 해명(?)은 오히려 ‘나는 무신론자’라고 말하는 것으로 여겨질 뿐이다.
일반대학에 창조과학전시관이 있다는 것을 두고 종교교육 운운하는 김교수의 자세는 오히려 그가 진화론 옹호자 같은 오해를 불러오게끔 한다. 하나님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교수가 기독교대학에서 인재를 양성한다는 사실이 서글프고 아쉽다.

(김신규 기자)


● ‘찬양’으로 둔갑한 ‘가요’ - 김신규 기자

시기가 한참 지난 일을 거론하는 것은 불필요한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진리와 올바른 예배문화에 대한 것이라면 시기가 지났더라도 지적해야 한다.
작년 12월8일 여의도 63빌딩 국제회의장에서 개최된 한기총 주관 한국교회의 밤 행사에서 있었던 일이다. 이날 1부 예배시간에 한기총 합창단은 찬양순서에 가요인 ‘사랑으로’(이주호 작사·곡)를 불렀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한기총의 한국교회의 밤 예배시간에서 한기총 합창단은 찬양시간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가 아닌 일반 가요를 부른 것이다. 찬양은 기독교 신구교를 막론하고 예배에서 중요한 분야로 인식되고 있다. 때문에 찬양대의 찬양을 함부로 여겨서는 안된다. 물론 ‘사랑으로’란 곡은 신실한 크리스천 가수가 만든 곡으로 가사의 내용이 거의 대부분 세속적 사랑타령에만 머무는 일반 가요보다 건전하다. 또 그 안에 기독교적 가치관이 내포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랑으로’는 직접 하나님을 찬양하는 곡이 아니다. 따라서 예배의 중요한 순서를 담당하는 찬양대의 찬양순서에 불려질 수는 없다.
그런데 한기총 여성합창단은 찬양이라고 명시된 예배순서에 가요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불렀다. 백번 양보해서 기존 찬양곡을 부른 다음에 ‘사랑으로’를 불렀더라면 그다지 문제를 삼고 싶을 마음은 없다. 그런데 이들은 단 한곡을 부르면서 찬양곡이 아닌 가요를 ‘찬양’이라는 이름하에 열창한 것이다. 도대체 이들이 예배의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찬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기나 한지 의문이다. 찬양과 일반 노래를 구별하지 않고 단지 가사만 좋다고 찬양이라는 이름하에 부르는 것은 이들 단원들이 기본적인 신앙훈련도 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고 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차라리 당시 ‘사랑으로’를 부를 때 찬양이라고 하지 않고 ‘축하송’이라고 했다면 또 다른 문제다.
한기총은 복음주의 신학과 신앙을 정체성으로 하는 연합기구인데 이러한 단체의 산하기구 관계자들의 이러한 신앙훈련이 되어 있지 않는 모습을 무엇으로 설명해야 하나? 물론 거대한 기관이 세세한 것까지 일일이 신경 쓰지 못하는 것은 충분히 공감한다. 하지만 실무진에서라도 사전에 검토과정을 거치면서 이 같은 오류는 바로 잡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예배에서 하나님께 드려질 찬양이 무엇인지에 대한 교육을 한기총 합창단은 다시 받아야 할 것이다.

(김신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