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난해절 두 종류 그리고 謝恩觀

2007.05.14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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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난해절 두 종류 그리고 謝恩觀
선지자선교회
이름 : 반석     번호 : 191
게시일 : 2006/05/28 (일) PM 06:34:24     조회 : 66  

■ 성경 난해절 두 종류 그리고 謝恩觀


성경에는 두 종류의 난해절이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성경을 잘 알지 못해서 깨닫지 못하므로 인한 난해절이 있고, 또 하나는 성경을 잘 알아서 잘 깨닫는다고 해도 근본적 난해절이 있습니다.

성경을 잘 모르는 자는 성경 전체가 다 난해절이 되겠고, 성경을 조금 아는 자는 성경 전체 중에 난해절이 많겠고, 성경을 많이 아는 자는 성경 전체 중에서 난해절이 적겠습니다.

그런데 성경 전체를 다 아는 자라 할지라도 성경에는 근본적 난해절이 있는데 그 난해절은 성경 기자가 성경을 기록할 때에 난해절이 됨을 성경에 기록하기까지 난해절이 되는 난해절이 있습니다.

이렇게 근본적 난해절이 되는 난해절을 현재 두 성구 정도로 파악하고 있는데 근본적 난해절이 더 있는지는 성경을 더 자세히 살펴보면 그 여부가 확인이 되리라 봅니다.

그러면 부족한 종이 현재까지 파악한 근본적 난해절 성구는 다음과 같습니다.


●(딤전3:16)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히5:11)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


딤전3:16 말씀은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신 도성인신 신인양성일위 되신 예수님에 대해서 이고, 히5:11 말씀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인 멜기세덱에 대해서입니다.

딤전3:16에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하셨고, 히5:11에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 라고 성경 기자가 성경을 기록 할 때 성경에 기록하기까지 이렇게 근본적 난해절이 되는 것을 말씀했습니다.


그러기에 근본적 난해절은 근본적 난해절로 그대로 두고서 다른 성구에서 이 근본적 난해절에 연관 된 구원의 도리를 깨달아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는 구원 도리로 삼으면 되겠습니다. 근본적 난해절은 우리 인간의 유한으로서는 하나님의 무한을 다 해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근본적 난해절 해석은 근본 난해절과 연관 된 성구를 상고하여 거기까지만 해석하여야 하지 성경에 없는 부분까지 유추해석을 하게 되면 억지해석이 되게 되고 그런 결과는 오류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런고로 성경에는 두 종류의 난해절이 있는 것을 알아서 성경을 몰라서 난해절이 된 것은 성경을 알아 감으로 난해절을 하나씩 풀어가야 하겠고, 성경을 알아도 근본적 난해절이 되는 것은 그 난해절과 연관 된 성구를 알아서 연관 성구에서 나타내는 구원의 도리만큼 우리의 구원의 도리로 삼아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가는 구원도리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신앙의 선조들께서 성경을 성경적으로 해석한 것을 우리들이 성경 진리를 아는데 중매쟁이로 또 안내자로 삼아서 성경 진리를 성경적으로 아는데 가르침을 받는 스승을 삼아야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신앙 선조들의 성경적 성경해석이 그 시대에는 그 시대에 만족이 되는 그 시대의 최고의 성경 해석이지만 그 다음 시대는 그 다음 시대에 주시는 성경 진리 해석에 대한 영감을 주시기 때문에 그 영감을 따르는 것이 성경적이라 믿습니다.

이것이 올바른 교회사관이며 올바른 교리사관임을 우리들이 잘 인식하는 바입니다. 기초 신학을 한 목회자라면 그동안 교회사와 교리사 공부를 통하여 기본적으로 아는 초보지식이라 하겠습니다.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신학'이라는 것은 성경을 조명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지 성경이 신학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님도 우리들이 또한 기본적으로 잘 아는 바입니다. 그러한데도 때로는 신학이 성경 위의 위치로 올라앉아 있음도 봅니다.

신앙의 선조들께서 영감을 받아 성경적으로 성경해석을 한 것은 우리들이 성경을 성경적으로 해석하는데 안내자로 받아서 성경을 성경적으로 해석하는데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선조들께서 성경적으로 성경을 해석 한 것에 대하여 절대적으로 대하면 안되고 어디까지나 성경을 성경적으로 해석하는데 성경의 중매쟁이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를 길러주시고 가르쳐주신 백목사님께서도 이런 면을 염려하여 말씀하시기를 백영희목회설교록으로 성경 진리를 아는데 입문하게 되면 백영희목회설교록을 불 태워버리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백영희목회설교록이 성경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 있는데 마치 성경이 백영희목회설교록을 위해서 있는 것처럼 위치가 뒤바뀌게 되면 성경 진리를 깨닫는 깨달음에 오히려 장애물이 되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백영희목사님은 완전자가 아니며 따라서 백영희목회설교록도 완전한 진리가 아닙니다. 단지 이 시대의 하나님의 신실한 종으로서 그 신실하심이 순생이셨고 순교를 감당할 신실이셨습니다. 그래서 백목사님께서는 순교 시까지 성경을 깨닫는데 늘 새로운 변화를 가지셨습니다. 그 새로운 변화라는 것은 주신 영감을 받아서 영감대로 성경을 더 깊이 더 넓게 더 높이 깨달으시는 깨달음이 계셨습니다.  

지금 순교하신 지가 햇수로 만 17년인데 아직 생존 하셨더라면 백영희목회설교록에 없는 새로운 성경적 깨달음의 말씀이 더 많이 보충이 되셨을 터이고 또한 백영희목회설교록에 있는 말씀 중에서도 더 많이 보완하신 말씀이 또한 더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것은 백영희목회설교록을 일일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백목사님께서 그런 말씀을 종종 하셨기 때문에 우리들이 그런 면을 잘 알 줄 알기에 생략을 하겠습니다.

사도들께 임한 영감이나 칼빈께 임한 영감이나 백목사님께 임한 영감이나 그 영감은 다 같은 하나님의 감동입니다. 또 이 시대에 있어서도 받은 영감이라면 다 같은 하나님의 감동입니다. 누구에게 임한 영감은 하나님의 영감이고 누구에게 임한 영감은 하나님의 영감이 아니고가 아닙니다.

또 시대마다의 영감은 다르지 않고 다 같은 하나님의 영감입니다. 영감은 시간과 공간의 차이에 따라서 영감의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영감 받는 자에 따라서 영감이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주신 영감을 각자가 감당하는 차이일 뿐 인줄 압니다.

그러므로 주신 영감에 얼마나 죽도록 충성했느냐가 각자에게 대한 상급의 기준이지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느냐가 상급의 기준이 아님을 백목사님을 통해 성경을 배워서 너무나 잘 아는 우리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맡기신 달란트 분량이 차이가 있을 뿐이라는 것을 우리들이 배워서 잘 아는 바인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은 누구에게 주신 영감은 영감이고 누구에게 주신 영감은 영감이 아닌 것이 아님을 말씀드리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영감이냐 영감이 아니냐 하는 잣대의 저울은 성경적이냐 성경적이 아니냐 하는 것으로 판정을 지워야 할 문제라고 봅니다.

이 시대에 주신 영감의 영감적 것인 백영희목회설교록을 지난 시대에 주신 영감의 영감적 것인 기독교 강요라는 잣대의 저울에 달아서 영감적이냐 영감적이지 않느냐 또 성경적이냐 성경적이지 않느냐 하는 것으로 판정을 한다면 판정을 짓는 잣대의 저울관에 대단한 오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석고화하여 백영희의 백영희목회설교록을 판단하는 분들에게 이런 공식을 제시하여 오해에 대한 이해를 촉구 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공식은 이치적 원리이기 때문에 어디에는 해당이 되고 어디에는 해당이 안 되고가 아니겠습니다.

그렇기에 이런 일이 있으면 불가침의 예외가 없이 이 이치적 원리를 적용을 시켜야 이치적 사람, 진리적 사람, 진실적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이 시대 우리들에게도 역사 하시는 영감은 신앙의 선조들께 역사 하신 그 영감입니다. 그래서 이 시대에 받은 영감대로 나타내면 신앙의 선조들께서 나타내신 것과 같은 영감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다 같은 성경적인 것입니다.

다만 외부에 나타난 표현이 신앙 선조들의 표현 그대로가 아니라 새로운 변화가 있게 됩니다. 그 변화라는 것은 변질이 아니라 더욱 성경적으로 깊고 넓고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오늘의 영감적 표현이 신앙 선조들의 표현보다 상급이라는 것이 절대 아니겠습니다. 같은 영감으로 받은 표현이기에 같은 영감의 표현일 뿐입니다.

그런데 오늘에 받은 영감의 표현이 선조들의 영감적 표현을 침범했다고 무례라고 말한다면 신앙 선조들의 받은 영감보다도 영감을 받아 표현한 그 표현에 더 비중을 두는 오류로 말미암은 오해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일례를 들면 백목사님께서 나타내신 영감적 성경 해석에 대하여 이미 신앙 선조들께서 나타내신 성경해석과 비교하여 그대로가 아니라고 일부 교회가 이단 운운하였고 또 이단 운운하는 것이 단순히 성경적 해석이냐 비성경적 해석이냐 하는 면을 떠나서 자기나 자기 교단의 유익을 쫓아서 고립시키려는 악심에서 이렇게 판단하였다는 것을 오늘의 우리들이 잘 아는 바입니다.

그러면 오늘에 있어서 백목사님의 대표적 성경해석이 되는 '기본구원 건설구원' '삼분설(백영희 삼분설)' '중생 된 영은 범죄하지 않는다'가 이 시대에 주신 영감으로 인한 성경적 해석이라는 것을 밝혀진 이 시점에서 본다면 이를 비성경적이라고 판단한 그 자나 또 그 교단이 오히려 비성경적이기에 오히려 이단이라는 이름을 도리어 받아 가지게 되게 되겠습니다.

그러나 이러함을 앞서서 가는 자는 굳이 그렇게 불목을 가지는 판단을 하지 않고 그렇게 여기는 판단에 대하여 '미숙'이라 여길 뿐이지 비성경적 이단이라고 정죄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기존 성경적 교리신조에 보다 보완 보충이 되는 영감적 성경 해석을 나타내게 되면 기존 성경적 교리신조를 가진 자나 교단이 이단이라 정죄하여 박해를 하였고 더하여 목숨까지 빼앗아 갔던 것이 지난 교회사와 교리사일진데 이러한 현상이 그 시대만 특별히 있었던 것이 아니라 시대마다 늘 그러한 과정을 통과하고서 그 시대를 감당하는 교리신조가 세워졌던 것임을 아는 우리들입니다.

그러하기에 오늘에 영감으로 주신 성경적 성경해석에 대해서도 교회사와 교리사에서 발생되었던 그것과 같이 박해의 곤고가 따르는 것은 매한가지라는 것을 아는 것이 또한 우리들입니다.


이러한 영감을 주심에 따라 나타낸 성경해석에 대하여 오류 된 자의 자리에 앉지 않으려면 기존 신앙의 선조들께서 나타내신 성경해석에 석고화로 매여서 비교판단하지 말고 성경말씀에 비교하여 성경적이냐 성경적이 아니냐로 비교판단을 하여야 오판하는 오해의 치우침이 없겠습니다.

그리고 영감을 받아 나타낸 성경적 성경해석에 대하여 비영감적 비성경적이라고 판단이 될 때에는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비평을 해야지 성경을 근거하지 않고 비평을 하게 되면 그로 말미암아 영감적 성경적 해석이 비영감적 비성경적 해석으로 오도하게 되어 자타에게 많은 구원의 손해를 입히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이에 대한 책임은 누가 져야하겠는지 한번 정도 깊게 생각하면서 비난 비평을 해야 되지 않겠나 싶습니다.


그러므로 신앙 선조들께서 영감을 받아 나타낸 성경적 해석에 대하여 절대 불변의 권위를 부여한다면 이는 크게 잘못된 관을 가지게 된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렇다고 신앙 선조들께서 영감을 받아 나타낸 성경적 해석에 대해서 이 시대에 영감을 받아서 나타내는 성경적 해석이 그 보다 깊이 그 보다 높게 그 보다 넓게 나타내내어진다 할지라도 그 권위를 무시하거나 성경적 깨달음을 부정해서는 또한 절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까닭은 둥치에서 자라 나온 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그 가지는 둥치에서 자라 나온 것이지 가지 스스로 독자적으로 자라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앙 선조들의 영감적 성경적 성경해석이 있기 때문에 그 둥치의 영양을 받아 먹고 자란 연결에서 나온 또 하나의 가지인 것일 뿐입니다.

그러하다면 둥치에서 자라 나온 가지에 대하여 둥치에 대한 무례를 범했다고 말한다면 자람이나 결실 함이 없어야 정상적 식물이라 말하는 것과 같은 말이 되기 때문에 오히려 무식 무례의 말을 한다고 보겠습니다.

생명이 있는 것은 자꾸 자라야 하고 또 자라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자람이 없는 것은 죽은 것이기 때문에 자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람이 없는 것은 곧 죽은 것이라 단정을 지어도 틀림이 없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생명을 가져서 생명성이 있는지 없는지 판별을 하여야 하겠습니다. 줄기에서 싹이 나와야 하고 뿌리에서 가지가 나서 결실 함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러한데 줄기에서 싹이 나고 뿌리에서 가지가 나서 결실 하는 것을 사은의 기관에 대한 배신이라고 판단을 한다면 이는 생명적이 되지를 못하고 그 반대로 사망적이 되고 말겠습니다.

그러하기에 오늘에 영감을 받아 나타내는 성경적 성경해석을 성경의 잣대로 저울질하지 않고 신앙 선조들께서 성경 해석한 그것으로 잣대를 삼아 성경적이냐 비성경적이냐로 저울질의 기준을 삼는다면 임에 세워진 교리신조를 보수한다는 측면에서 본다면 대단히 귀한 일이지만 그 기준이 결코 영감적이고 성경적이 되지 못하다 하는 것입니다.

생명이 있는 곳은 자람이 있습니다.
생명이 없는 곳은 자람이 없습니다.

백영희목회설교록 그대로가 아니라고 비성경적이라 판단하는 것은 잣대 적용에서 문제가 있음을 인식하여서 성경으로 잣대를 삼는 적용의 전환이 필요하다 하겠습니다.

그래서 백영희목회설교록 그대로가 아니라 할지라도 백목사님의 교훈을 받아 자라 나온 제자가 나타내는 성경해석이 성경적이면 백영희목회설교록 둥치에서 자라 나온 가지라 여겨야 하겠습니다.

백목사님께서 기르시고 가르치신 제자라 한다면 이제 차차 자람의 장성함이 있어야 받은 은혜에 사은하는 것이라 여깁니다. 이런데 이 자람의 장성함을 백영희목회설교록을 대항하고 침범하는 무례로 여긴다면 참으로 오판의 오류라 하겠습니다.


그러면 이제 다시 이 글의 제목이 되는 주제로 돌아가겠습니다. 성경은 두 종류의 난해절이 있습니다. 성경을 잘 알지 못해서 가지는 난해절이 있고 성경을 잘 안다고 하더라도 근본적인 난해절이 있습니다. 이는 성경 말씀이 난해절이라고 성경 기자가 성경을 기록할 때부터 난해절이라는 것을 나타내었습니다.

살렘 왕 멜기세덱이 누구이신지 성경을 기록한 사도들이 알고 또 시대마다 영안이 특별히 밝은 신앙의 선조들은 그 구원의 도리를 알지만은 그대로 발표하면 오히려 그 구원의 도리를 감당하지 못하여 생기는 면도 있겠지만 발표하는 자가 유한한 인간이기에 무한한 것을 나타내기에는 감당하지 못하는 면 또한 있기 때문에 그 면을 가리켜 말하기를 ●히5:11에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 하셨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도성인신 하심에 대하여 ●딤전3:16에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하셨습니다.


살렘 왕 멜기세덱에 대해서나 예수님의 도성인신 하심에 대해서나 이는 해석하기 어렵고 또 경건의 비밀이 있다고 성경에서 명백히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인간의 유한이 하나님의 무한을 다 알지 못하는 오묘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자람에 따른 분량만큼 차츰 알아져 가는 구원의 도리라 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근본적 난해절이 되는 두 성구에 대하여 초대교회에서 가지는 깨달음이 있겠고, 중세교회가 가지는 깨달음이 있겠고, 개혁교회가 가지는 깨달음이 있겠고, 지금 현대교회에서 가지는 깨달음이 있겠습니다.

이렇게 시대마다 깨닫는 깨달음이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 두 근본적 난해절은 어느 시대에서도 완결로 깨달아지는 구원의 도리가 아니겠습니다. 이 근본적 난해절이 되는 두 성구에 대한 깨달음은 영원토록 자라감의 성화 속에 맡겨야할 구원의 도리라 하겠습니다.

그러한데 이 근본적 두 성구의 난해절을 성경에 근거하고서도 근본적 난해절이 되는데 이 근본적 난해절을 성경에 근거하지 않고 신앙선조들께서 성경을 깨달아 나타낸 것에 근거하여 석고화 고착화시키는 것은 이 두 성구에서 나타내는 구원도리에 정면 배치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수정하여야 됨이 성경적이라 하겠습니다.

신앙의 선조들께서 시대마다 받은 영감으로 나타낸 성경적 성경 해석을 신앙의 후손과 제자 된 우리들은 성경 다음의 것으로 잘 받아서 잘 보수 잘 계대 하여야 하겠습니다.

또한 신앙의 선조들께서 시대마다 받은 영감으로 나타낸 성경적 성경 해석을 둥치의 영양으로 잘 받아서 가지로 뻗는 자라감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교리신조적으로 자라감이 있어야 신앙의 선조와 스승께 사은하는 것이 되는 것이지 신앙의 선조와 스승께서 기르시고 가르치신 그 시점에서의 자람과 그 성장에서 머문다면 이는 오히려 걱정을 끼치는 것이 되어 사은은 고사하고 근심거리가 되고만다 하겠습니다.

그러기에 사은하는 觀도 세상 도덕 윤리적 觀이 아니라 성경적 觀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주시는 영감을 받아 감당하는 것이 성경적이고 사은적이지 영감과 성경 이외에 매이는 것은 결코 영감적 성경적이 아님을 우리들이 알아야하겠습니다.

이렇게 성경의 난해절 두 종류에 대해서 살펴보는 것과 함께 그와 관련 발생되는 신앙 선조와 스승께 대한 사은관에 대해서 성경적 正觀을 우리 모두 가지기를 바라면서 부족한 글이나마 써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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