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공회는 진정한 '칼빈주의' 신앙노선

2007.05.14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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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공회는 진정한 '칼빈주의' 신앙노선
선지자선교회
이름 : 반석     번호 : 161
게시일 : 2005/10/18 (화) PM 05:29:40  (수정 2005/10/27 (목) PM 11:24:06)    조회 : 107  

■ 총공회는 진정한 '칼빈주의' 신앙노선


<서론>


◎ 예수교장로회공회

총공회는 예수님의 대속구원의 터 위에 세워진 교회입니다.(예수교)
총공회는 장로회의 교리신조 기초 위에 세워진 교회입니다.(장로회)
총공회는 사도행전의 예루살렘 공회 위에 세워진 교회입니다.(공회)

그래서 총공회하면 '예수교' '장로회' '공회'입니다.

◎ 예수교장로회한국총공회

'예수교'라고 하면 총공회가 가지는 '구원'을 말하고
'장로회'라고 하면 총공회가 가지는 '교리신조' 면을 말하고
'공회'라고 하면 총공회가 가지는 '행정'의 근간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대속구원의 터 위에 또 장로회 교리신조 기초 위에 또 사도행전의 예루살렘 공회와 같이 개교회주의적 모임을 가진 교회들의 한국지역 총 모임이라 해서 진영의 명칭을 '예수교장로회 한국총공회'라 합니다.

◎ 총공회와 일반 장로회간에 같은 점과 다른 점

총공회가 교계의 일반 장로회와 같은 부분은 구원의 터가 되는 예수교가 같고 또 교리신조의 기초가 되는 장로회와 같습니다.

다른 부분은 행정에서 차이가 나는데 제일 대표적인 것이 공회라는 진영의 이름을 표시한 데에서 알 수 있듯이 일반 장로회와 같이 단체중심의 교단적 모임이 아니라 총공회는 개교회주의적 모임입니다. 그래서 공회의 장은 비상존으로 하고 또 성문헌법 대신 성경을 헌법으로 삼고 있으며 또 공회의 의결은 다수 가결보다 성경의 진리대로 일치 가결을 합니다, 등 이런 행정들이 일반 장로회와 다른 점들입니다.

◎ 일반 장로회에서 총공회를 보는 관점

교계의 일반 장로회와 총공회 간에 같은 점과 다른 점을 총공회 관점에서 말을 했는데 그러면 일반 장로회에서도 총공회를 바라보는 관점이 있을 것으로 봅니다. 그 관점을 짐작해 보면 아마도 다음과 같을 것이라 여겨봅니다.

총공회가 가지는 예수교는 저희 장로회와 같은 것은 틀림이 없고 또 행정은 저희 일반 장로회와 차이가 있다고 하니 그런 줄 알겠는데 교리신조는 저희 장로회와 같이 칼빈주의 교리신조 기초 위에 있다고 하는 것은 잘 납득이 가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얼마 전에 계신대학원 교수로 계시는 서울공회 김목사님의 홈페이지를 방문해 보았더니 '총공회는 칼빈주의 신앙노선인가?' 라는 뜻이 담긴 질문의 글이 게시판에 올려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장로회 일부이나 총공회가 저희 장로회가 가지고 있는 칼빈주의 교리신조와 같은 노선인가? 하고 궁금 내지는 의문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계시다는 것을 이 글로서 직접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한 질문이 장로회 일부 중에서의 총공회를 바라보는 시각이리라 간접적으로 헤아릴 수가 있었습니다.

◎ 질문에 대한 답변 정리의 필요성

그래서 이 질문의 글을 읽고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면 어떻게 답변을 하겠나 하고 머리 속에 그 답변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하기야 이 질문에 세세한 답이 될 수 있는 백영희목회설교록과 주일학교 공과모음이 있어서 이를 안내하면 되겠지만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는 범위가 넓다고 여길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총공회에 속한 교역자로서 언제 누구에게서나 '총공회는 칼빈주의 신앙노선인가?' 라는 질문을 받으면 성경을 근거해서 명쾌히 답할 수 있는 자료를 준비해 두어야 하겠다는 필요성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 총공회 교리의 특별성

'총공회는 칼빈주의 신앙노선인가?'

총공회의 교리신조에 대하여 장로회 일부이나 이렇게 질문하는 까닭은 공회성을 가진 행정면도 있겠지만 그 보다도 교리면에 있어서 일반 장로회가 가지지 않는 '기본구원 건설구원' '삼분설' '중생 된 영은 범죄하지 않는다'는 교리를 가지고 있으니 총공회는 과연 칼빈주의 신앙노선인가? 하고 의문이 생겨서 이 질문을 하게 되었다고 봅니다.

장로회의 칼빈주의 교리를 공부하신 분들이 총공회 교리를 살펴보려고 할 때에 부딪히는 교리가 '기본구원 건설구원' '삼분설' '중생 된 영은 범죄하지 않는다'일 것입니다.

그것은 '기본구원 건설구원'이란 말은 성경에 직접 없는 용어요 또 칼빈주의에도 없는 교리이기 때문에 이 교리를 처음 접하시는 분들은 매우 생소하게 여겨질 것이 당연합니다.

그래도 '삼분설'이라는 말은 교리공부 시간에 접해본 용어이기 때문에 별로 생소하게 여겨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총공회 삼분설은 과거 교회사에서 정죄 받은 삼분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않고 미리 짐작으로 오해를 가지기 마시기를 바랍니다.

'중생 된 영은 범죄하지 않는다'는 교리는 기본구원 건설구원 교리 같이 새로 정립된 교리이기 때문에 생소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래 전에 교계의 목회자 한 분이 이 교리에 대해서 오해하기를 '중생 된 영'을 '중생 된 영혼'이라 오해하여 교계에 와전되게 소개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중생 된 영혼이 범죄하지 않는다'가 아니라 '중생 된 영이 범죄를 하지 않는다' 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칼빈주의 교리를 접하신 분들이 총공회 교리를 접할 때에 그 생소한 교리에 대하여 특별하게 여기고 신앙노선에 까지 연관시켜 보는 것은 얼마든지 그럴 수 있겠다고 이해가 됩니다.

◎ 성경적 교리와 성경을 근거한 교리용어

그래서 총공회 대표적 교리가 되는 '기본구원과 건설구원' '삼분설' '중생 된 영은 범죄하지 않는다'는 교리에 대해서 성경적 교리라는 것과 또 성경을 근거한 교리용어라는 것을 성경을 근거해서 논증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총공회가 칼빈주의 가장 중심에 서서 근본 칼빈주의를 보수 계대한 신앙노선이라는 것임을 수긍하게 될 것입니다.

◎ 총공회의 대표적 교리와 그 외의 교리들

참고로 덧붙인다면 총공회 대표적 교리로 '기본구원과 건설구원' '삼분설' '중생 된 영은 범죄하지 않는다'는 이 셋 교리로 내세우는 것은 이 셋 교리가 교리사에 처음 발표가 되고 또 난해교리인지라 중복적으로 많이 설명을 하다보니 총공회의 대표적 교리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셋 교리 외에도 총공회의 대표적 교리라고 소개할만한 중요한 교리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믿음론, 사랑론, 대속론,,, 같은 교리들인데 이런 교리들은 교계에서 이미 정립된 교리들입니다만 총공회는 이런 교리들을 성경적으로 더 깊이 더 세밀한 깨달음으로 보완을 하였습니다. 이를 살펴보시려면 백영희목회설교록과 주일학교 공과모음을 상고해 보시면 되겠습니다.

◎ 총공회 대표적 교리 셋

총공회가 가지는 교리 중에 대표적 교리를 말하라고 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말을 다른 말로 바꾸면 '교계가 생소하게 여기는 교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라는 말도 되겠습니다.

첫째로 '기본구원 건설구원'
둘째로 '삼분설'
셋째로 '중생 된 영은 범죄하지 않는다' 입니다.

위의 세 가지 교리 중에서 '기본구원 건설구원'과 '중생 된 영은 범죄 하지 않는다'는 말은 교계에 처음 발표되는 교리요 또 교리용어이기 때문에 생소한 말일 것이고 '삼분설'이라는 말은 과거 교회사에서 '이분설'이니 '삼분설'이니 해서 귀에 익은말이라는 것은 앞에서 언급한바 있습니다.

◎ 교리용어 명칭의 성경적 근거

교리용어는 교리가 정립될 때 자연히 발생하게 됩니다. 깨달은 교리에 대한 소통을 간결하고도 원활하게 전하기 위해서 성경을 근거한 교리용어가 생겨지게 됩니다. '기본구원 건설구원' '삼분설' '중생 된 영은 범죄하지 않는다'는 교리와 그 교리용어도 이와 같습니다.

교리용어라는 것은 아비가 자식이름을 자기 의미대로 짓듯 짓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근거한 교리이기 때문에 그 교리가 가지는 주제적 명칭이나 교리용어 또한 성경을 근거하여 생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총공회 대표적 교리 곧 교계에서 생소하게 여기는 '기본구원과 건설구원' '삼분설' '중생 된 영은 범죄하지 않는다'는 교리와 교리용어도 성경에서 깨달은 교리요 또 성경을 근거한 교리용어입니다.

그러면 그 교리와 교리용어가 성경 어느 말씀에 근거한 교리며 교리용어인지 성경을 근거하여 논증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기본구원' '건설구원' 논하고 다음은 '삼분설' 마지막에 '중생 된 영은 범죄하지 않는다' 순서로 하겠습니다.

그래서 이 논증이 '총공회는 칼빈주의 신앙노선인가?' 하고 궁금과 의문을 가지신 분들에게 총공회 교리신조는 성경적이요 또 성경적이기 때문에 총공회는 근본 칼빈주의를 계대하고 보수하고 있는 신앙노선이라는 것을 확인하는데 하나의 증빙자료가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본론>


■ 기본구원

◎ '기본'의 용어해석

기본구원에서 '기본'이라는 말은 '근본 바탕이 되는 터'를 기본이라 말합니다.

◎ '기본구원'의 용어해석

'기본구원'이라는 말은 '근본바탕이 되는 구원의 터'를 기본구원이라 말합니다.

◎ '기본구원' 용어에 대한 성경적 근거

'근본 바탕이 되는 구원의 터' 곧 기본구원이라는 교리용어가 성경 어디에서 근거하여 발생되었는지 그 근거성구를 찾아보겠습니다.

고전3:10-11에는 우리 구원의 근본 바탕이 되는 구원의 '터는 예수 그리스도' 라 하셨고,

롬3:22에는 근본 구원의 바탕이 되는 구원의 터는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성구에 근거하여 '기본구원'이라는 교리용어가 발생되었습니다.

구원을 이루어 가는 근본 터를 기본구원이라 하고, 택자라면 이 구원을 기본적으로 차별이 없이 받은 것을 한말로 표현하여 기본구원이라 말한 것입니다.

⊙[(고전3:10-11)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롬3: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 '기본구원'의 교리설명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의 대속으로서만 구원되는 구원이 있습니다. 이것은 순전히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 곧 객관 역사로 이루어지는 구원인데 이 구원은 우리 본인들이 알고 난 다음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알기 전에 이 구원이 택자들에게는 다 이루어집니다.

이 구원은 우리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고 영원한 때 전부터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 구원이라 말씀하셨고 또 이 구원은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에 벌써 하나님께서 어떤 자에게 주시기로 작정하시고 그 작정하신 구원을 이루어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래서 이 구원을 가리켜서 순전히 주님의 은혜로 우리 주관은 하나도 상관없이 객관 은혜로 이루어지는 이 구원을 가리켜서 '기본구원'이라 우리들이 말을 합니다.

◑ 영원한 때 전부터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 구원

엡1:4에는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라고 하셨고
딤후1:9에는 '오직 자기(하나님)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라고 하셨고
딛3:5에는 '오직 그(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좇아' 라고 하셨습니다.

◑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

또 엡1;6에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라고 하셨고
딤후1:9에는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라고 하셨고
딛3:5에는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라고 하셨습니다.

◎ '기본구원' 근거 성구

⊙[(엡1:4-7)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딤후1: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딛3: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 건설구원

◎ '건설'의 용어해석

'건설'이라는 말은 집을 세우듯이 이루어 가는 것을 건설이라 말합니다.  

◎ '건설구원'의 용어해석

'건설구원'이라는 말은 집을 세우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우리의 구원을 건설적으로 이루어 가는 것을 건설구원이라 말합니다.

◎ '건설구원' 교리용어에 대한 성경적 근거

예수님의 대속 구원의 터 위에 집을 세우듯이 지어져 가는 구원 곧 '건설구원'이라는 용어가 성경 어디에서 근거하여 발생되었는지 그 근거성구를 찾아보겠습니다.

마7:24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이라고 하셨고,

고전3:13에 '이 터 위에 세우면' 이라고 하셨고.

엡2:22에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라고 하셨고,

유1:20에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며' 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건설구원'이라는 교리용어가 발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건설구원이라는 것은 근본 바탕이 되는 구원의 터 위에 집을 세우는 건축 같이 우리의 구원을 하나씩 둘씩 힘써 건설해나가는 구원이라 해서 '건설구원'이라는 교리용어로 표현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건설구원'이라는 용어는 성경을 근거한 성경적 용어입니다.

◎' 건설구원'의 교리설명

예수님의 대속 공로로 기본구원을 얻은 자들이 이 기본구원을 알고 그 다음에는 이 기본구원에 대해서 확실히 믿고 그럼으로 이미 이 기본구원을 받은 자이기 때문에 받은 이 기본구원을 힘입어서 자기가 현실에서 이 기본구원을 벗지 않고 이 기본구원을 입고 살려고 함으로 자기가 기본구원을 힘입은 행위를 하는 것이 건설구원입니다.

'기본구원을 힘입은 행위'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의 대속 공로를 힘입은 행위라는 것인데 곧 사죄, 칭의, 화친, 영생의 부활 소망을 가진 자로 사는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건설구원'이라는 것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집을 세우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우리의 구원을 건설적으로 하나씩 둘씩 이루어 가는 것을 가리켜 건설구원이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렇게 이루어 가는 '건설구원'이 하늘나라에 가서 부활한 자의 영광의 차이가 됩니다.

고전15:39-44에 '육체가 각각 다르고 또 모든 형체의 영광이 각각 다른데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사람 육체와 짐승 육체가 각각 그 영광이 다르고 또 하늘에 있는 태양도 한 형체요 땅에 있는 자그마한 모래알 하나도 한 형체이지만 태양 한 개의 영광과 모래알 한 개의 영광이 얼마나 많은 차이가 있는 것과 같이 부활한 자들의 영광의 차이가 이와 같다는 것을 성경이 밝히 증거하고 잇습니다.

◎ '건설구원' 근거 성구

⊙[(마7:24-27)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고전3:10-15)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엡2:20-22)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유1:20)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고전15:39-44)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건설구원의  '힘써' '더욱 힘써'

그러기에 우리 기독자의 기본구원은 순전히 하나님의 역사이기 때문에 우리는 받기만 받았지 우리가 힘쓸 필요나 염려할 필요가 없고, 부활한 자의 영광이 되는 건설구원은 우리의 노력과 행함이 필요합니다. 이래서 성경에는 '너희들이 힘써' 또 '더욱 힘써' 라는 말씀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엡4:3에는 '힘써 지키라' 라고 하셨고
벧후1:5에는 '더욱 힘써' 라고 하셨고
벧후1:10에는 '형제들아 더욱 힘써' 라고 하셨고
유1:3에는 '힘써 싸우라는' 라고 하셨습니다.

⊙[(엡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벧후1:5)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벧후1:10)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유1:3)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뜻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그러면 '힘써' '더욱 힘써' 라는 힘씀은 어느 정도의 힘씀을 말하느냐하면

막12:30에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라고 하셨고
계2:10에는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라고 하셨습니다.

⊙[(막12: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계2:10)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 기본구원 건설구원은 성경적 교리

그래서 기본구원 건설구원의 교리는 성경적이요 또한 기본구원 건설구원이라는 교리용어도 성경에서 근거한 용어입니다. 그러기에 기본구원과 건설구원에 대한 교리는 우리 구원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교리입니다. 이러한 성경적 교리를 표현하기 위해서 기본구원과 건설구원이라는 교리용어로 말한 것입니다.


■ 삼분설

◎ '삼분설'의 용어해석

'삼분설'이라는 교리용어의 삼분(三分)이라는 말은 셋으로 나눈다는 뜻이고 또 '설'(說)이라는 말은 말씀 '설'입니다. 그래서 '삼분설'이라는 말은 셋으로 나누어서 말한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 이분설과 삼분설 개요

그러면 삼분설 곧 셋으로 나누어 말하는데 무엇을 셋으로 나누어서 말하는가? 그것은 인간의 인성구조를 교계의 대부분은 영과 육으로 해서 '이분설'로 말하는데 이 깨달음에서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서 영과 육 이분(二分)에서 육에 대한 부분을 혼(마음)과 몸으로 해서 영, 혼(마음), 몸으로 삼분설로 말하는 것이 총공회 '삼분설'입니다.

◎ 인성과 인성구조

그러면 교계의 이분설은 잘못된 것이냐? 그것은 아니고 정통 교계가 말하는 영과 육 이분설이 맞으나 삼분설을 말하는 것은, 인간의 인성을 말하면 영질과 물질로 지음을 받아 영질은 영이요 물질은 육으로 해서 맞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인성구조를 말하면 영도 있고 마음도 있고 몸도 있으니 이 세 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이 삼분설입니다.

◎ 두 종류의 삼분설

과거 교회사에서 이단으로 정죄 받은 삼분설은 인간의 인성이 영질, 혼질, 물질로 삼분설을 말함으로서 성경에 배치되어 정죄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총공회가 말하는 삼분설은 교리사에서 정죄 받은 삼분설과는 달리 인간의 인성에 대해서는 교계의 깨달음과 같이 영질과 물질 곧 영과 육 이분설을 동일하게 말하고 다만 인간의 인성구조에서는 영, 혼(마음), 몸으로 삼분(三分)하여 삼분설을 말하는 것입니다.

◎ 교계의 이분설

그 동안 교계에서 가지는 이분설은 인간의 '인성'에서 영질은 영이요 물질은 육을 말함으로서 성경적이었으나 인간의 '인성구조'에서는 영(혼=마음), 몸으로 이분설을 말함으로서 오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영질의 영에 신령한 물질인 혼(마음)을 혼합시키므로 혼(마음)을 영질로 보아버린 오류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구원론에서 배치가 되는 것은 영(靈)은 예수님의 대속 공로로 단번 중생이 되어 범죄하지 않는다고 성경에 말씀하셨으나 자기의 실제 행위에서는 혼(마음)이 범죄(마15:19)하고 있으니 혼(마음)을 영이라고 깨닫는 교리를 가진 교계에서는 무척 혼란 혼돈 서러웠던 것입니다.

그것은 혼(마음)이 중생 된 영이 아니라 신령한 물질로서의 육이기 때문에 범죄를 하는 것인데 혼(마음)을 영이라 또 영을 혼(마음)이라 하여 오류 된 깨달음을 가짐으로 구원론 교리와 인간론 교리에서 상호간 충돌이 오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오류로 혼란이 많았으나 그 동안 교계에서는 난해교리로 취급하여 연구제목을 삼아 지내왔던 것이 인간의 인성구조 교리였습니다.

⊙[(마15:19)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 총공회의 삼분설

이렇게 교계에서는 그 동안 인간의 인성구조에 대한 교리가 명확하게 해결이 되지 못한 체 그대로 지내왔으나 백영희목사님이 교계가 가지는 인간의 인성 이분설 바탕 위에 인간의 인성구조가 삼분설이라는 것을 발표하게 됩니다.

총공회가 가지는 삼분설은 어떤 것인가? 인간의 인성에서 영질은 영이요 물질은 육으로서 교계가 가지는 이분설과 같이하고 다만 인간의 인성구조에서 영은 영으로 단독이 두고 마음은 신령한 물질로서 몸과 함께 육으로 소속을 시키는 삼분설 교리를 새롭게 정립한 것입니다.

이것은 교계가 가지는 영질은 영이요 물질은 육이라는 인간의 인성에 대한 이분설 교리에 대하여 배치되는 교리가 아니라 더욱 더 성경적으로 보완하기 위하여 삼분설 교리를 정립한 것입니다. 그래서 교계가 가지는 인성구조 교리에 있어서 혼(마음)이 영이라 또 영이 혼(마음)이라 하는 교리에 대해서는 성경적으로 수정 보완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삼분설 하면 교리사에서 인간의 인성을 영질, 혼질, 육질로 구분하여 정죄 받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총공회가 가지는 삼분설 또한 과거 비성경적 삼분설과 같은 삼분설인 줄 지레 짐작을 하고 오해를 한 분도 있었습니다.

백영희목사님이 정립한 삼분설은 일부 교계가 가지는 교리와 같이 인간의 인성에 있어서 영질은 영, 육질은 육으로 동일한 교리를 가집니다. 그러나 차이를 가지는 것은 인간의 인성구조에 있어서 혼(마음)을 영이라 또 영을 혼(마음)이라 보는 일부 교계와 달리 혼(마음)을 신령한 물질로서 몸과 함께 육에 속한 것으로 교리를 정립하였습니다.  

◎ 이분설은 삼분설이 정립되기 이전까지는 보편적 교회의 정통교리

교계가 가지는 이분설은 이 교리를 깨달았을 당시에는 가장 성경적으로 앞선 깨달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분설 교리에 더하여 삼분설 교리가 더욱 성경적으로 새롭게 정립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삼분설이 정립된 지금 이분설과 삼분설을 비교해보면 이분설은 성경에 한 면은 맞고 한 면은 맞지 않는 미달의 오류가 있는 이분설이라는 것을 부인 할 수 없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을 교리사에서 보면 비성경적이라고 정죄 할 수 없는 것은 보편적 정통교회가 그 당시로서는 이분설 깨달음이 가장 성경적으로 앞선 교리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삼분설이 전체 성경에 잘 합치되는 성경적 교리이기 때문에 이분설은 이제 접고 삼분설 교리로 갈아야 합니다.

◎ '인성'과 '인성구조'의 구별관

그러기에 지금은 인간의 인성과 인간의 인성구조를 동일하게 보는 이분설 교리에서 인성은 이분설로 인성구조는 삼분설로 구분한 성경적 교리가 새롭게 정립되어 졌으니 이제는 이분설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의 인성이 무엇이며 또 인간의 인성구조가 무엇인가를 구분해서보는 구별관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그에 따라 인간의 인성에서 요구하는 답이 있을 것이고 또 인간의 인성구조에서 요구하는 답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인성과 인성구조를 달리 보는 눈이 뜨이게 되면 자연히 인성은 영질과 물질로 나누어 이분설을 말하게 될 것이고, 인성구조는 영, 혼(마음), 몸으로 삼분설을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일부 교계에서는 인간의 인성과 인간의 인성구조에 대해서 구분하여 보지 못하고 하나로 보기 때문에 인간의 인성에서 영질은 영으로 물질은 육으로 깨달음을 가지고 또 인간의 인성구조에서도 영={혼(마음)}과 육(몸)으로 이분설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구원의 도리는 대체로 영, 혼(마음), 몸으로 삼분(三分)으로 말씀하고 있으니 이는 참으로 난해절이요 참으로 난해교리로 취급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는 인간이 지음 받은 요소의 성질면에서는 영질과 물질로서 이분(二分)이요, 지음 받은 인성 곧 영질 물질이 가지는 구조면에서는 영과 혼(마음)과 몸으로 삼분으로 구별해서 취급하지 못한 연고였던 것입니다.

◎ 이분설이 가진 문제점

이래서 이분설만 가지는 것은 인간의 인성구조면에 까지도 영질과 물질로 상대해야 하는 오류가 생겨나게 되어 인간의 인성구조를 성경적으로 깨닫는 데에 한계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성경에는 영, 혼(마음), 몸을 분명하고도 명확하게 구분해서 말씀하셨으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모순 속에 부득이 연구 숙제로 삼고 지금껏 지내온 것이 교계의 인성구조 교리였습니다.

영, 혼(마음), 몸의 존재가 어디 있습니까! 영, 혼(마음), 몸은 자기 자체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체를 살펴보면 영의 활동이 있고 또 마음의 활동이 있고 또 몸의 활동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영안이 어두우면 영이 있다가 말하기를 이것이 영이야 영! 아무리 외쳐도 들리지 않고 또 마음이 있다가 이것이 마음이야 마음! 아무리 외쳐도 육안으로 보이지 않으니 너는 영이야 영! 이렇게 상대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오류는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면 다 영체로 보는 견해에서 발생 된 오류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영에 대한 말씀이 있고 또 혼(마음)에 대한 말씀이 있는데 일부 교계에서는 혼(마음)에 대한 말씀이나 영에 대한 말씀이나 같은 말씀으로 상대해 버리니 이분설은 전체 성경에 많은 난해절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분설을 가지더라도 실질적으로 이루어 가는 구원의 행위에서는 영, 혼(마음), 몸이 제각각 활동하고 있으니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많은 번민과 연구로 진리적 교리를 세우려고 오늘까지 많은 신학자들이 노력을 하지만 인간의 인성 중에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것은 다 영체로서 영이요 육안으로 보이는 것은 다 물체로서 육으로 보기 때문에 혼(마음)을 영으로 보는 이상 논리가 충돌되어 성경적 교리가 정립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 마음은 육이라는 것을 증거라는 성구

혼(마음)은 육안으로 보이지 않으나 신령한 물질로서 육입니다. 고후3:3에는 '육의 심비(心碑)'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마음(혼)이 육이라는 것을 성경이 분명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고후3:3)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

◎ 마음은 신령한 물질

요사이는 과학이 발달되어 마음에 속한 정신을 물질이라는 기계 장비로 측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은 영체이기 때문에 물질로서는 절대 상대할 수 없습니다. 다만 영은 신령한 물질인 마음만이 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신령한 물질인 마음이 영과 접할 수 있는 도리를 많이 나타내고 있는데 그 표현을 '영혼'이라 '심령'이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교계가 '영혼'을 영이라 '심령'도 영이라 이렇게 여기는 것은 인성구조에 대해서 전체적으로 깨닫지 못하고 부분적으로 깨닫는 미달에서 생기는 오류로 인함입니다.

또 신령한 물질인 마음이 우리 몸(육신)과 접한다는 것은 우리가 너무나 잘 인식하는 것이기에 설명을 생략합니다. 그래서 신령한 물질인 마음은 위로는 영과 관계하고 아래는 몸과 관계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마10:28에는 '몸은 죽여도 영혼'이라 하셨고
골2:5에는 육신으로는 떠나 있으나 심령으로는'라고 하셨고
약2:26에는 '영혼 없는 몸이'라고 하셨습니다.

⊙[(마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골2:5) 이는 내가 육신으로는 떠나 있으나 심령으로는 너희와 함께 있어 너희의 규모와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 믿음의 굳은 것을 기쁘게 봄이라]

⊙[(약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 총공회의 이분설관과 삼분설

총공회는 인간의 인성에서는 영질은 영으로 물질은 육으로 해서 이분설을 가집니다. 그러나 인간의 인성구조에서는 영, 혼(마음), 몸으로 삼분설을 가집니다.

그러나 교계의 대부분은 인간의 인성에 있어서 영질은 영, 물질은 육으로 이분설을 가지고 있고 인간의 인성구조에 있어서도 인성을 취급하듯이 꼭 같이 이분설을 가지고 있어서 혼(마음)을 영이라 또 영을 혼(마음)이라 하여 영혼과 몸으로 해서 이분설을 가지는데 이것은 깨달음의 미달로서 오류입니다.

이렇게 교계는 이분설 하나만 가짐으로 성경에 많은 난해절과 충돌이 있고 총공회는 이분설과 삼분설을 성경 성구에 맞추어 가짐으로 난해절이나 충돌에서 벗어났습니다. 그 이유는 언급한대로 인간의 인성과 인간의 인성구조를 구분하지 않고 하나로 교리를 적용하는 것과 인성과 인성구조를 성구에 따라 구분하여 교리를 둘로 적용하는 그 차이에서 오는 결과였습니다.

'인간의 인성'이라는 것은 인간의 요소가 어떤 성질을 가졌느냐? 입니다.
그러면 영질 물질로 답하면 됩니다.

'인간의 인성구조'라는 것은 인간의 요소가 영질과 물질로 되어있는데 그 영질과 물질이 어떤 구조를 가졌느냐? 입니다.
영, 혼(마음), 몸으로 답하면 됩니다.

그래서 영은 영질에 속했고 육은 혼(마음)과 몸 합해서 물질에 속했다고 까지 말하면 매우 세밀하고도 정확한 성경적 답이 됩니다.

◎ 총공회의 인성과 인성구조 등식

◑ 인성

영질 = 영
물질 = 육

인성에 있어서는 이분설입니다.

◑ 인성구조

영 = 영질
혼(마음) = 신령한 물질
몸(육신) = 물질

인성구조에 있어서는 삼분설입니다.

인간의 인성 성질은 영은 영질, 육은 마음과 몸을 물질로 해서 이분설
인간의 인성구조를 보면 영, 혼(마음), 몸으로 해서 삼분설

이렇게 인성구조에서 삼분설을 가지면 필연적으로 영은 단번 중생으로 인하여 중생 된 영은 범죄하지 않는다는 성경적 교리가 밝혀지게 됩니다.


◎ 교계의 인성과 인성구조 등식

◑ 인성

영질 = 영
물질 = 육

인성에 있어서 이분설입니다.
성경에 잘 합치됩니다.

◑ 인성구조

영혼[영={혼(마음)}] = 영질
몸(육신) = 물질

인성구조에 있어서도 이분설입니다.
성경에 미달로서 오류입니다.

인성구조에서 혼(마음)을 영으로 여기고 영을 혼(마음)으로 여겨 오류를 가짐,
그러므로 영과 혼(마음)이 인성구조에서는 제 위치를 바로 가지지 못함,

고후3:3에는 '육의 심비(心碑)'라 하셨으니 마음이 영이 아니고 육이라는 것을 성경이 증거. 그러므로 마음(혼)을 영이라 하면 안되고 육에 속하도록 해야 함.
몸 또한 육이니 마음과 몸이 합해서 육.
그래서 이제는 인성구조에서는 성경에 합치되는 삼분설 교리를 가져야 됨.

⊙[(고후3:3)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

성경에서는 영은 단번 중생이 되었기 때문에 영에 대한 구원의 도리는 많이 필요하지 않아서 영에 대한 말씀은 아주 적음. 그와 반면에 마음(혼)에 대한 말씀이 대부분인 것은 마음(혼)과 몸이 성화구원 즉 건설구원을 이루어 가야 하기 때문에 심신 구원에 중심이 되어 있는 마음(혼)에 대한 말씀이 거의 전부라 할 수 있음.

그러기에 마음에 대한 구원도리와 영에 대한 구원도리를 혼합하여 대하게 되니 실행적 행실과 교리적 논리와는 많은 마찰로 인하여 성경에 난해절 난해교리를 많이 가지게 되는 것임.

그러므로 인간의 인성구조 교리에 있어서는 아직도 대부분의 교회가 성경에 합치되는 교리를 정립하지 못하고 있음.

◎ 영과 마음이 별도인 것을 증거 하는 성구

⊙[(고전14:14-15)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

⊙[(겔18:31) 너희는 범한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할지어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

⊙ [(겔21:7) 그들이 네게 묻기를 네가 어찌하여 탄식하느냐 하거든 대답하기를 소문을 인함이라 재앙이 오나니 각 마음이 녹으며 모든 손이 약하여지며 각 영이 쇠하며 모든 무릎이 물과 같이 약하리라 보라 재앙이 오나니 정녕 이루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라]

⊙[(시51:10 )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 인성의 이분설에 대한 성경 근거

창2:7에 흙으로(물질)
창2:7에 생령이(영질)

⊙[(창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 인성구조의 삼분설에 대한 성경 근거

히4:12에는 '혼과 영과 및 관절과' 라고 하셨고
살전5:23에는 '영과 혼과 몸이' 라고 하셨고
겔36:26에는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라고 하셨습니다.

⊙[(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살전5: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겔36: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 성경전체 구원의 도리는 삼분설

인간의 인성에 대해서는 교계나 총공회가 이분설 교리를 동일하게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성구조에 있어서 교계는 이분설을 가지고 있고 총공회는 삼분설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래서 인간의 인성에서는 교계나 총공회나 다 같이 성경적이나 인간의 인성구조에 있어서는 교계는 이분설을 가지고 총공회는 삼분설을 가지기 때문에 교계는 미달적 오류가 있고 총공회는 성경적입니다. 그러기에 이제는 교계가 인간의 인성과 인간의 인성구조를 구별해서 교리를 가지므로 인성구조의 교리에 있어서도 성경적이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분설에 관련된 성구는 극히 적고 삼분설에 관련된 성구가 대부분입니다. 그것은 구원을 이루는 도리가 인격성을 가진 영, 혼(마음), 몸에 해당되는 것이지 무인격성인 영질 물질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삼분설 중심으로 구원도리를 주셨습니다.

총공회가 삼분설을 말한다고 해서 교계가 가지는 인성 이분설 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교계가 인성과 인성구조에 대하여 구분하지 않고 하나로 이분설을 가지는 것에는 삼분설이 성경적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삼분설을 강조하다보니 총공회는 삼분설만 말하는 것 같이 보이나 인성 이분설과 인성구조 삼분설을 동시에 가집니다.

그러나 쌀가마니에 뉘가 몇 개 있어도 쌀가마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성경에 이분설에 해당되는 도리는 극히 적고 삼분설에 해당되는 도리는 극히 많기 때문에 인간의 인성구조에 있어서 삼분설로 말하는 것이 성경 전체 구원도리에 잘 합치됩니다.


■ 중생 된 영은 범죄 하지 않는다.

◎ '중생 된 영은 범죄 하지 않는다'의 용어해설

'중생 된 영은 범죄하지 않는다'는 말은 말 그대로 중생 된 영은 범죄 하지 않는다는 말이 되기에 별도의 설명을 하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 '중생 된 영은 범죄 하지 않는다'는 교리를 대할 때 유의 할 점

'중생 된 영은 범죄하지 않는다'는 교리를 대할 때 유의할 점은 '중생 된 영혼은 범죄하지 않는다'는 말과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유의할 부분을 다시 말하면 '중생 된 영'과 '중생 된 영혼'과 차이점입니다.

하나는 단수(單數) '영'이고 하나는 복수(複數) '영혼'입니다. '중생 된 영'은 범죄하지 않으나 '중생 된 영혼'은 범죄 합니다. 왜냐하면 '영혼'이라는 것은 영만도 아니요 혼만도 아닌 중생 된 성도의 영과 혼(마음)을 합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생 된 영은 범죄하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중생 된 '영'은 범죄하지 않는다는 말씀이 명확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중생 된 '영혼'이 범죄하지 않는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그런데 '중생 된 영혼은 범죄하지 않는다'는 말이 왜 나왔느냐? 그것은 백영희목사님이 '중생 된 영이 범죄하지 않는다'는 교리 발표 초기에 어느 교단의 목회자 분이 '중생 된 영혼이 범죄하지 않는다' 다는 말로 오해 되게 받아서 교계에 와전되게 알렸습니다. 그래서 총공회에서는 '영'과 '영혼'을 구별하지 못하고 비판하는 그 잘못에 대하여 부당함을 말하므로 그 목회자는 교계에 잘못을 인정하는 사과문을 발표하였습니다.

◎ '중생 된 영은 범죄하지 않는다'에 대한 교계의 평가

교계에 성경을 좀 깊이 대하는 목회자 분들이나 신학교수 분들 중에는 '중생 된 영이 범죄하지 않는다'는 교리에 대해서 교리발표 초기부터 성경적 교리라는 것을 같이 인식하였습니다. 그런 분들 중에는 고신에서 나와 계신 교단을 세우신 이병규목사님도 그런 분들 중에 한 분입니다. 또 박윤선 목사님도 처음에는 이 교리에 대하여 연구 제목으로 가지셨으나 나중에는 이 교리가 성경적 교리라는 것을 인정하였습니다.

◎ '중생 된 영은 범죄하지 않는다'의 교리설명

인간이 범죄 함으로 영육이 사망했는데 영은 하나님의 생기와 끊어짐으로 그 즉시 죽었고 심신은 시간이 지나므로 말라지게 됩니다. 나무가 뿌리에서 끊어지면 그 즉시 생명은 끊어졌으나 끊어진 둥치와 가지와 잎은 시간이 지나므로 서서히 말라죽는 이치와 같습니다. 나무가 뿌리에서 끊길 때 이미 그 나무는 죽은 것을 알 수 있음과 같이 우리 심신도 영이 죽을 때 이미 같이 죽었습니다.

영은 그 속성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단일체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연결이 끊길 때 단번에 죽었고, 육은 심신의 여러 복합체로 되어 있기 때문에 죽은 것이 서서히 마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죽은 인간이 주님의 사활 대속 공로로 죄 사함을 받아 중생 하게 되었으니 영은 단번에 중생이요, 심신으로 된 육은 중복 중생이니 곧 성화라 하는 것입니다.

영은 단번에 거듭났기 때문에 중생 된 영은 다시는 비정상의 삐뚤어진 변질이 없습니다. 중생 된 영은 둘째 아담의 이차 창조로 변동되지 않는 영으로 재창조되었습니다. 신적 요소인 피와 성령과 진리로 완전 중생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중생 된 영은 범죄하지 않습니다.

◎ '중생 된 영'에 대한 근거 성구

요일5:18에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라고 하셨고

요일3:9에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라고 하셨고

롬8:23에는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 라고 하셨고

롬7:22-23에는 '내 속 사람' 이라고 하셨습니다.

◎ '중생 된 영은 범죄하지 않는다'에 대한 근거 성구

⊙[(요일5:18)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요일3:9)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롬8:23)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롬7:22-23)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히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딛3: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 중생 된 영이 하는 일

중생 된 영이 하는 일을 성경에 분명히 말씀해 주시기를 [(롬8:16)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믿는 것은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역사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영으로 인하여 자기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중생 된 영의 역사는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성령으로 더불어 자기의 심신에게 증거 하는 역사를 하는 것이 중생 된 영이 하는 일입니다. 심신이 죄 가운데 있을 때라도 중생 된 영은 성령과 더불어 심신에게 회개를 재촉하는 역사를 하는 것이 중생 된 영이 하는 일입니다.


<결론>


◎ 총공회 교리신조에 대한 교계의 평가

교계가 생소하게 여기는 총공회 대표적 교리 셋을 성경을 근거해서 논증해보았습니다. 이렇게 총공회 교리가 기존 칼빈교리를 더 보완한 성경적 교리라는 것을 교단 차원에서 그 권위를 인정하는 곳도 있고 또 교단 차원은 아니지만 개인 신학자나 목회자 분들 중에서도 어느 교파 어느 교단을 막론하고 많은 분들이 백영희목사님이 정립하신 총공회 교리에 대하여 그 권위를 인정하며 그 신조가 깊음에 감탄을 하고 있습니다.

◎ 칼빈주의관에 대한 오류 된 인식을 가진 칼빈주의

그런데 칼빈주의를 말하는 분들 중에서는 아직도 '총공회는 칼빈주의 신앙노선인가?' 하고 의문을 가지시거나 부정하시는 분들이 계시니 이런 분들은 칼빈주의는 칼빈주의로되 칼빈주의가 무엇인지 그 근본 성격을 잘 알지 못하고 칼빈주의를 말하시는 분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런 것이 칼빈주의와 칼빈교리를 분명히 분별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칼빈주의나 칼빈교리를 하나로 여겨서 500년 전 칼빈교리 그대로라야 칼빈주의라는 잘못된 인식을 가지신 분이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칼빈주의에서 칼빈교리가 나왔는데 칼빈교리 그대로라야 칼빈주의라고 오류 되게 여기는 것은 칼빈주의가 담고 있는 그 말의 근본 성격이 무엇인지를 바로 정의하지 못한 연고라 봅니다. 그래서 총공회와 같은 진정한 칼빈주의를 칼빈주의로 보지 못하고 오히려 오판하는 자리에 서게 되는 것이 이런 이유에 기인한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바라던 메시야가 오셨는데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지금은 오류 된 칼빈주의가 진정한 칼빈주의를 오류 되게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류라는 것은 수정만 하면 그 허물을 벗을 수 있기 되기 때문에 오류 된 칼빈주의는 먼저 칼빈주의관의 정의를 바로 가지면 되겠습니다. 그래서 칼빈주의관의 안목을 바로 가지실 수 있도록 칼빈주의가 무엇인지 그 근본적 성격을 총론적으로 간략하게 정의해보도록 하겠습니다.

◎ 칼빈주의

칼빈주의라는 것은 성경을 성경적으로 깨닫고 성경적으로 신앙하는 주의를 칼빈주의라 말합니다.

◎ 개혁주의

개혁주의라는 것은 중세 천주교의 비성경적에서 성경적으로 나가자는 주의를 개혁주의라 말합니다.

그래서 칼빈주의 하면 개혁주의이고 개혁주의 하면 칼빈주의입니다.

◎ 칼빈교리와 백영희교리

그러면 칼빈교리는 칼빈이 깨달은 교리 곧 성경을 성경적으로 깨달은 교리를 칼빈교리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칼빈교리라 하면 기독교강요가 되겠고 또 칼빈주의의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이 칼빈주의를 계대한 교리신조가 되겠습니다.

그래서 칼빈시대는 칼빈의 기독교강요가 있었고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이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사오백년이 지난 지금은 백영희목사님이 성경을 성경적으로 깨닫고 성경적을 신앙하는 칼빈주의를 계대 하여 교리를 세웠으니 백영희목회설교록입니다. 그래서 이 교리의 근거를 밝히기 위해서 총공회의 교리를 백영희목사님이 세운 교리라 말하는데 이 말을 줄이면 백영희교리 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백영희교리는 또 성경을 성경적으로 깨달아 성경적으로 신앙하는 칼빈주의에서 나왔으니 칼빈주의라는 말과 같이 백영희주의라 말해도 그 말의 성격을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칼빈주의라는 말이나 백영희주의라는 말에서 칼빈이나 백영희라는 이름은 다만 명사적(名詞的) 표현이지 사람 자체를 앞세우려는 뜻은 전혀 없다는 것을 다들 인식할 줄 믿습니다. 신앙 선조들이 세워놓은 교리의 근거를 말하려다보니 칼빈을 말하지 않을 수 없고 또 백영희를 말하지 않을 수 없어서 칼빈의 이름을 붙이고 또 백영희 이름을 붙이는 것입니다.

◎ 백영희주의는 개혁주의

백영희주의는 이 시대에 있어서 성경을 성경적으로 깨닫고 성경적으로 신앙하는 주의를 말하니 곧 칼빈주의라 말과 그 뜻이 같습니다. 오늘의 백영희주의는 개혁주의로서 현대교회의 비성경적 속화에서 성경적으로 신앙하자는 주의를 가졌습니다. 그래서 백영희주의는 이 시대의 개혁주의이고 이 시대의 개혁주의 하면 백영희주의입니다.

그러므로 칼빈주의와 백영희주의는 그 주의(主義)가 같습니다. 칼빈주의도 개혁주의이고 백영희주의도 개혁주의입니다. 백영희주의는 칼빈주의의 개혁주의를 그대로 계대했습니다.

(물론 세계교회가 넓어서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칼빈주의 또 총공회가 말하는 백영희주의 같은 개혁주의 교회들이 곳곳에서 그 시대와 그 지역을 감당할 줄 압니다.)

◎ 칼빈주의 기독교강요와 백영희주의 백영희목회설교록

칼빈주의라고 하면 그 교리신조가 되는 기독교강요가 있고 또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백영희주의라고 그 교리 신조가 되는 백영희목회설교록이 있습니다. 칼빈주의에서 백영희주의가 나왔기 때문에 백영희목회설교록을 기독교강요와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에다 비추어 보면 진리적으로 배치되는 교리신조가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기독교강요와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이 나타낸 교리신조 보다 이 시대를 감당할 교리신조로서 성경적으로 더욱 세밀하고 더욱 깊이 있게 보완하였을 뿐입니다. 요사이 말로 하면 기존의 것을 업그레이드 했다하면 잘 이해가 되겠습니다.

백영희목회설교록이 이렇게 이 시대를 감당할 교리신조로 세워진 것은 신앙 선조들이 세워놓은 기독교강요와 웨스터민스터신앙고백이 기초가 되어 세워진 것이 틀림없습니다. 칼빈의 기독교강요와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도 피와 성령과 진리로 세워졌고 백영희의 목회설교록도 피와 성령과 진리로 세워졌습니다. 그러기에 총공회 교리신조 어디에도 기독교강요와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에 반하는 교리신조가 없습니다. 다 같이 피와 성령과 진리적입니다.

◎ 백영희의 칼빈관

백영희목사님의 칼빈관입니다.

『제가 좀 전에도 칼빈 선생이 여기에 대해서 말한 것을 잠깐 거튼거튼 읽어 봤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시대가 늦었습니다. 그러나 사오백 년 전에 그렇게 깨달았다는 것은 그거는 참 위대한 일이요 그런 분들이 그렇게 깨달아 가지고 가르쳐서 그 가르침을 받아 가지고 사람들이 또 그대로 살고 연구해서 우리 시대에 와 가지고는 아주 정확한 가르침이 우리에게 왔으니까 우리는 행복 된 사람들이요 또 우리 선배로서 이전 시대에 미개한 때에 하나님의 도리를 밝히 깨달아서, 부족하지만 바로 깨달아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그런 모든 믿음의 선배들에게 우리는 감사하는 그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1986, 5, 4 주일 오전 설교

◎ 속화된 칼빈주의는 근본 칼빈주의로 회복해야 함

칼빈주의라고 하면 기독교강요와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이 가지는 성경적 깨달음(교리)과 성경적으로 깨달은 대로 믿는(신조) 신앙노선을 칼빈주의라 합니다. 또 칼빈주의는 중세 천주교의 비성경적에서 성경적으로 나가는 신앙이기에 개혁주의라 이름을 또 가졌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일부 칼빈주의들이 성경대로 깨달아 성경대로 신앙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고 또한 속화의 비성경적 신앙에서 성경적으로 회복하는 신앙과는 거리가 멀고 다만 기독교강요와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이 말하는 그 교리 그대로라야 칼빈주의 보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성경에 비추어서도 속화요 저들이 가지는 칼빈주의 사상에 비추어서도 속화입니다.

교리라는 것은 성경에 나타낸 구원의 도리를 깨닫는 것인데 사오백년 전에 깨달은 칼빈교리  그대로 가져야 칼빈주의이지 아무리 칼빈주의적으로 성경을 성경적으로 깊이 있고 세밀하게 깨달은 교리라 할지라도 칼빈교리에 그대로가 아니면 칼빈주의에 이탈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그것이 과연 성경적인지 또한 근본 칼빈주의적인지 돌아볼 일입니다. 그러기에 근본 칼빈주의를 회복해야 합니다.

◎ 시대마다 그 시대를 감당할 교리신조가 있음

성경에 보면 시대마다 선지자를 세우고 시대마다 그 시대를 감당할 교리를 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도 구약시대의 성경과 신약시대의 성경을 주셨으니 구약은 구약적이요 신약은 신약적이었습니다.

하물며 성경에서 깨달은 교리를 사오백년 전의 교리와 지금의 교리와 같아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온당한 논리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물론 사오백년 전의 교리나 지금의 교리나 구원도리를 나타내는 진리 면에서는 성경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겠습니다.

이렇게 일부 칼빈주의 노선에 섰다는 분들이 칼빈의 기독교강요와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이 나타내는 교리 그대로를 보수해야 칼빈주의로 인정을 하지 그 범위를 벗어나면 성경을 성경적으로 아무리 깊이 있게 깨달았다 할지라도 칼빈주의가 아니라고 비판을 한다면 이는 근본 칼빈주의의 기본을 모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칼빈주의라고 하면서 진정한 칼빈주의가 나아가는 길에 가로막는 일을 한다면 이는 참으로 모순의 오류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칼빈주의라는 것은 성경을 성경적으로 깨닫고 성경적으로 신앙하는 주의입니다.
개혁주의는 비성경적 속화에서 성경적 신앙으로 돌아서자는 것이 개혁주의입니다.

그러기에 칼빈주의 보수라는 것은 기독교강요를 그대로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을 그대로 보관만 하는 것이 보수가 아니라 기독교강요와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을 기초로 하여 더욱 성경적 교리신조로 깊이 있게 깨닫는 성장이 있어야 진정한 칼빈주의 보수 계대라 하겠습니다.

그러한데도 칼빈주의를 보수 계대 한다고 하면서 사오백년이 지난 오늘에도 칼빈교리 그대로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 그대로 보관적으로 보수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 보수는 보관이 아니라 낡아지는 것이기 때문에 진정한 보수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칼빈주의는 성경적이요, 성경적인 것은 진리적이요, 진리적인 것은 생명적이요, 생명적인 것은 자람의 성장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성장을 비판한다면 이는 분명히 생명적 역사에 반하는 비성경적 비칼빈적입니다.

◎ 퇴행적 칼빈주의와 성장적 칼빈주의

그러기에 칼빈주의도 퇴행적 속화의 칼빈주의가 있고 성장적 진정한 칼빈주의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기독교강요나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보다 더 깊고 더 세밀한 칼빈주의적 교리가 있는데도 기독교강요와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에 머무는 것은 마치 신약교회가 구약성경에만 매이는 것과 마찬가지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를 감당할  백영희교리가 있는데 사오백년 전 칼빈교리만 그대로 붙들고 있는 것은 칼빈주의는 칼빈주의로되 퇴행적 칼빈주의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시대에는 칼빈교리 바탕 위에서 칼빈주의적으로 더욱 성경을 깊이 있게 세밀하게 깨달은 백영희교리가 있으니 이는 분명 성장적 칼빈주의입니다.

이 시대에 칼빈주의들이 기독교강요나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을 터를 삼아 더 깊고 더 높고 더 넓은 교리신조를 세우지 못하고 기존의 그 교리 그대로 붙들고 있는 것은 이 말세를 감당할 성장적 교리신조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그 상태는 퇴행적 칼빈주의입니다.

이 시대의 교계가 아무리 캄캄하게 속화되었다 할지라도 한편으로는 근본 칼빈주의 바탕에 서서 교리신조가 성경적으로 더 깊어있게 더 세밀하게 나아가는 성장적 칼빈주의들도 곳곳에 있음을 믿습니다.

왕상19:14-18에 보면 엘리야가 말하기를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왕상19:14)] 할 때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왕상19:18)] 하셨습니다.

그래서 총공회는 이 시대의 칼빈주의 중에서 가장 성장적 칼빈주의 중심에 서있다고 감히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그에 대한 증명은 총공회 교리신조가 되는 백영희목회설교록을 보시면 충분히 확인이 되겠습니다.

이렇게 총공회 신앙노선은 칼빈주의를 둥치로 삼아서 자라 나온 새 둥치가 총공회 신앙노선입니다. 다른 둥치에서 자란 나온 총공회 신앙노선이 아닌 것입니다. 이렇게 둥치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발생된 교리가 구원론에서 '기본구원과 건설구원', 인간론에서 '삼분론' '중생 된 영은 범죄하지 않는다'는 칼빈주의적 교리가 세워진 것입니다.

성경에 달란트 비유가 있습니다. 달란트를 받았으면 땅에 묻을 것이 아니라 장사를 해서 이를 남겨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 성경입니다.

그러기에 칼빈주의적이냐? 이 잣대로 총공회는 칼빈주의 신앙노선인가? 로 평가해야지,
칼빈교리대로냐? 하는 이 잣대로 총공회는 칼빈주의 신앙노선인가? 하고
질문하는 것은 칼빈주의관에 오류입니다.

그래서' 총공회는 칼빈주의 신앙노선인가?' 하는 질문에
'당신은 칼빈주의관을 바로 가지고 계십니까?' 라고 반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 총공회는 진정한 칼빈주의 신앙노선

'총공회는 칼빈주의 신앙노선인가? '

대단히 의미 있는 질문으로 받았습니다. 그래서 총공회 교역자로서 총공회의 정체성을 다시 한번 다져보고 또 이런 질문을 받으면 답변할 수 있는 자료가 되게 하기 위해서 이 글을 정리해보았습니다. 부족한 종의 부족한 글이지만 총공회 내외에 분들이 총공회 대표적 교리 셋으로 가지는 생소함에서의 궁금과 의문을 말끔히 씻어버리고 성령으로 교통하는 진정한 이 시대의 칼빈주의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총공회는 칼빈주의 신앙노선인가?'

언제 어디서든지 담대히 답할 수 있습니다.
'총공회는 진정한 칼빈주의 신앙노선입니다!' 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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