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선교보고 (2004년 10월)

2007.05.13 18:11

선지자 조회 수: 추천:

중국선교보고 (2004년 10월)
선지자선교회
이름 : 반석     번호 : 61
게시일 : 2004/11/02 (화) PM 00:51:40  (수정 2006/06/22 (목) AM 09:49:52)    조회 : 239  

■ 중국선교보고 (2004년 10월)

주은중 교회와 가정에 평안을 빕니다.

주가 맡긴 모든 역사 힘을 다해 마치고 주님 앞에서야 하는데 주님의 일을 한다고는 하나 믿음과 충성이 미약함을 늘 느낍니다. 부족한 종이 주님께서 맡겨주신 일을 지사충성 할 수 있도록 앞서신 여러 선배 교역자님들과 성도님들께서 기도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번 선교보고는 이곳 교회를 방문하다가 느끼는 것 하나와 또 하나는 이곳 교회를 위하여 백영희목회설교록으로 조직신학을 정리하던 중에 깨달은 교리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이곳은 지역마다 중심이 되고 좀 큰 교회다 싶으면 교회 내에 성경 공부반을 만들어서 성경공부를 시키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의 교회도 교회마다 성경공부를 시키고 있는 줄 압니다만 이곳 교회에서 성경공부를 시키는 목적은 판이하게 다릅니다. 한국교회는 성경공부를 시키는 목적이 일반적으로 평신도 양육이 목적이지만 이곳 교회에서는 사역자 양육이 목표입니다. 하기야 한국에는 신학교가 많고 이곳은 신학교가 아주 적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나타난다고 할 수는 있겠습니다.

그럼으로 인해서 또 하나 차이가 나는 것은 대부분 한국의 신학교는 신학의 학문을 가르치는 중심이고 이곳 교회는 성경을 가르치는 중심으로 길러서 신앙으로 복음을 전하는데 사명감이 불타고 있습니다.

한국의 목회자와 목회를 소망하는 청년들은 신학교에 입학하고 졸업을 해야만 교역자가 되는 길인 줄로 고착화되어 있는데 이것은 편벽 된 생각이라 여겨집니다. 또한 신학교에 맡겨서 목회자를 양육하겠다 하는 것도 목회 후보생을 둔 담임하는 목회자로서 안이한 생각이라 여겨집니다.

그래서 목회자 양성이 신학교에 의존함으로 결국은 오늘의 신학교와 같이 세상 제도적으로 치우쳐서 점점 속화가 되어가고 있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 하신 것처럼 믿음의 선조의 신앙을 계대 받아 목회 하는 신령면은 없어져 가고 있는 것이 오늘의 목회자 양성의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목회 후보생이 있는 교회는 담임 목회자가 믿음으로 충성하는 것을 보여주고 또 교리와 신조를 가르치면 그것이 좋은 목회자를 양성하는 방편이라 여겨봅니다. 그것은 자기 자식은 부모가 제일 잘 기르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자식도 담임 목회자가 주님 안의 사랑으로 제일 잘 기를 수 있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신학교가 목회자를 양성하는 중심기관이라고 하나 그 실상의 내막을 보면 전혀 아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실컨 개교회에서 믿음을 길러서 신학교에 보내 놓으면 신학이라는 가마솥에 넣고 삶아 버려서 목회자 양성에 제일 중요한 신앙의 힘을 잃어버리게 만들고 마는 것이 오늘 신학교의 현 주소입니다. 그래서 마치 딸을 애지중지 길러서 난봉꾼에게 시집을 보내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교에 처음 입학 할 때는 목사가 되고  2학년 때는 전도사가 되고 졸업할 즈음이면 평신도가 된다는 말이 결코 우스개 소리가 아니라 그 실상을 잘 대변해 주고 있는 말인 것입니다. 이 말은 선배 목회자들이나 신학생들도 이 말이 그대로 사실임을 모두다 긍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묵인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성경 진리를 말하면 퀘퀘 묵은 것으로 생각하고 성경에 없는 이상한 학설을 말하면 귀를 쫑것 거리고 관심을 가지고 배울 것이 있나하고 달라 듭니다. 그러나 그것에 전력을 기우려봐야 아까운 시간과 힘을 헛된 것에 소모하고 마는 결과를 맺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회 후보생을 신학교에 보낼 때에는 개교회에서 목회자를 양성하는 실력이 부족 할 때에 부득이 보내는 식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를 양성시킬 실력 있는 교회는 구태어 목회 후보생을 신학교에 보낼 필요가 있겠나 하고 여기는 것입니다.

마치 청자를 잘 굽는 도공이 그 자식에게 기술을 전수하면 일류 도공이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기에 목회자 양성에 일차 책임은 개교회 담임 목회자에게 달려 있는 것이지 신학교에 있는 것이 아님을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여깁니다.

개교회에서 담임 목회자가 목회자를 양육하다가 부족한 부분을 보완시키기 위해 신학교를 보내는 것이라면 그 신학교는 첫째로 신앙을 길러주는 곳이어야 하기 때문에 신학교의 교수는 성경대로 신앙하는 교수를 우선 확보해야 하는 것이 기본일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신학교는 대부분이 신앙과는 전혀 상관없는 학설만 붙들고 있으니 참으로 악령의 기이한 궤술에 파묻힌 미혹의 장이 되어버렸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깨닫는 눈이 열릴 때에 통탄하지 않을 자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신학교를 의지하지 맙시다. 신학교를 믿지 맙시다. 목회는 신학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모신 힘 곧 신앙으로 목회를 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충성하는 것은 개교회 담임 목회자가 얼마든지 가르칠 수 있습니다. 또 성경대로의 교리와 신조는 늘 예배시간에 가르치니 그것이 곧바로 목회자 양성에 필요한 성경공부입니다.

그래서 개교회에서 책임 있게 목회자를 길러서 개척교회를 세웁시다. 초대교회는 오늘과 같은 신학교가 없었습니다. 오늘과 같은 신학과목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그때가 참 교회였습니다. 교회사가 이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신학교의 교회사 교수는 거의 엉터리 교회사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교회사를 잘 안다고 박사 학위를 받았으면 박사 학위 받은 만큼의 실력을 발휘해야 하는데 진정 그 실력을 발휘하는 교회사 박사가 어디에 있습니까? 참 교회사 박사는 있어도 희귀할 것입니다.

진정 교회사 박사로서 신학교 교수라면 먼저 신학교에서부터 교과과정을 초대교회처럼 성경 진리만 가르쳐야 한다고 외쳐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교회사 박사로서 직분을 감당하는 것일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교회사 박사는 신학교에서 어떻게 가르치고 있으며 또 담임하는 교회에서는 어떻게 목양을 하고 있는지요?

교회사 교수가 과거 시대별 교회를 단순히 소개만 하는 역활이라면 아마도 머리 좋은 세상 역사학자들이 교회사는 훨씬 더 잘 가르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사 교수는 시대별 교회 중에 가장 성경대로의 교회가 어느 교회인지 연구하여 지금 속화된 오늘의 교회가 속화되지 않은 교회로 성경대로 되돌아서게 하는 것이 개혁주의를 외치는 교회사 박사다운 박사일 것입니다.

오늘에는 교회사 중에서 초대교회가 가장 성경대로의 교회라는 것은 교회사 박사가 아닌 평신도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시대 교회가 가장 바른 교회인가 하는 것은 이미 정의가 내려졌으니 이 면에 대한 연구는 전혀 할 필요가 없는 것일 것이고 이제는 초대교회대로 교회를 세우는 자를 교회사 박사 학위를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같이 교회를 세워서 목회하고 성경대로 가르치는 분에게 목회 후보생을 맡겨서 양육 시켜야 하겠다는 분명하고 확고한 중심을 가지고 한 두 명이라도 양육하는 것이 진정한 목회자 양성일 것입니다.

지금 이렇게 외람 된 글을 올리는 요지는 목회자 양성기관을 신학교라야만 된다고 생각하여 목회자 양성을 신학교에 완전히 맡기지 말고 개교회가 일차 목회자 양성기관이라는 의식전환이 필요한 때라 여겨져서 의견을 드리는 것입니다.

신학교라는 것이 좀더 적극적으로 실력 있는 목회자를 양성시킬 목적으로 세웠으면 이 중심이 변질되지 않아야 할 터인데 오늘의 신학교는 참 목회자 양성기관이 아님을 직시해야만 할 것입니다.

목공소에 좋은 재목(材木)이 서투른 목수를 만나면 이리 자르고 저리 자르다가 결국 땔감이 되는 것처럼 신학교에서도 좋은 목회 후보생들이 성경 진리는 뒷전이고 신학을 앞세우는 교수를 만나 땔감이 되고 있지는 않는지 매우 근심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대로 양성시켜야 합니다. 학설을 가르칠 것이 아니라 성경대로 신앙하는 믿음을 가르치는 것이 참 목회자 양성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목회자 양성이 꼭 출석을 부르고 회비를 내고 리포트를 쓰고 논문을 내어 학위를 받아야 목사가 되는 순서는 세상의 교육제도를 본받아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본래는 목회자가 목회자를 양성하였습니다. 그래서 목회자라는 이름은 교회를 세워서 교회를 양육하는 자라는 말이기에 목회에는 목회자 양성도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과 같은 신학교의 목회자 양성과정은 속화의 결정체를 보여주는 격이 되어서 주님의 재림의 날이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지만 과거 천주교에서 개혁할 때처럼 이 다음에 오늘의 속회된 교회가 개혁이 되면 천주교를 기독교가 아니라고 정죄 하는 것처럼 이 다음의 개혁교회들이 오늘 이 시대의 교회를 기독교가 아니었다고 꼭 같이 정죄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단의 신학교가 성경 진리 중심으로 가르치지 않고 신학 중심으로 가르치면 굳이 목회 후보생들을 신학교에 보낼 필요가 있겠습니까? 좋은 신앙을 가진 청년들을 버리게 할 뿐입니다. 그래서 이 시대에 전체 개혁은 못해도 자기가 앉은자리는 개혁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는 것이 목회자입니다. 성경대로 하고 성경대로 전한다고 해서 주는 이름이 목회자입니다. 그 이름에 걸맞게 주님께서 맡겨주신 역사를 바로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중세 천주교 시대에 신부들이 하나같이 면죄부에 팔린 것을 보면 어떻게 해서 잘못된 인도를 하나같이 속회되어 따라 갈 수 있을까하고 의문을 가질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오늘의 교회도 그 당시 보다 더 속화되면 속회되었지 덜하지 않습니다. 모양이 다르고 색깔만 다를 뿐 교회성이 없는 것은 동일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시대에 아니 자기가 담임한 교회에서라도 성경대로 개혁하지 못하면 중세시대 타락한 천주교의 신부와 꼭 같이 비판 정죄 받는 목회자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좋은 목적으로 신학교가 세워져 있다면 목회 후보생을 맡길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전적 신학교에 맡기지 말고 일차 목회자 양성은 개교회 담임 목회자가 책임을 지고 가르치고 부족한 부분만 보완하기 위해서 잠시 신학교에 보내는 것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신학교에 보내서 신앙이 자라 가는 것이 보이면 믿고 맡길 것이지만 배운다고는 하나 신앙이 떨어지는 것이 보이면 지체 없이 중단을 하고 신학교 배척운동, 교수 배척운동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목회자 양성을 위해서 신학교에 보냈는데 신학은 배웠다고 하나 오히려 신앙이 떨어지면 신앙을 신학과 바꿔 먹은 것이 되는 셈이니 금 덩어리를 엿가락하고 바꿔먹은 것과 비교가 되겠습니까? 그런데도 그 수지타산을 계산하지 않고 있으니 다들 제 정신이 아니라 해도 별 할말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학교가 성경주의로 바로 서 있지 않는다면 개교회에서 목회자를 양성한다는 각오의 자세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원어로 해석하지 맙시다.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원어는 성경의 문자적 해득에 도움을 줄 뿐입니다. 한글이나 영어 역시 성경의 문자적 해득에 도움을 줄뿐 더 이상이 아닌 것처럼 원어도 이와 마찬가지 성질의 것입니다. 예전에 고신에서도 원어를 배우는 본과생 보다 원어를 배우지 않는 별과생들이 목회를 더 힘있게 잘했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던 중에 이곳 교회가 개교회 별로 성경 공부반을 만들어 사역자 양성시켜 개척교회를 세우는 것을 볼 때에 눈여겨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개교회에서 양성되는 사역자는 속화된 신학교에서 배우는 신신학에 물들지 않고 성경대로 목회를 하는 것을 볼 수 있어서 이곳 교회의 형편을 소개 할 겸 졸견을 올리오니 어린 자의 독백이라 여기시고 너그러이 받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또 하나 올리는 말씀은  백목사님께서 이미 발표한 교리를 우리가 미쳐 나타내 보이지 못한 것을 이번에 백영희목회설교록으로 조직신학을 정리하는 작업을 하면서 발견하였기에 소개하고자합니다. 이 교리를 발췌하면서 참으로 백목사님의 깊은 교리신조에 또 한번 감탄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첫 번째 소개할 교리는 1987, 6, 20 토 새벽 설교입니다.
설교 중에 다음과 같은 교리가 있습니다.

[공심판과 사심판을 구별할 줄을 알아야 되고, 공심판 대속과 사심판 구속을 구별할 줄 알아야 되고, 이래서 대속과 구속을 말합니다. 대속이란 말이 있고 구속이란 말이 있는데 대속을 받은 자가 대속을 뿌럭지로 근거로 토대로 종자로 삼아 가지고 이제 구속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것을 마귀란 놈이 혼돈 시켜서, 기본구원 건설구원을 마구 혼돈 시켜서 ‘이것을 뭣 때문에 이 구원을 쪼개고 나누느냐?’ 이렇게 말합니다. 또 ‘사람이 뭣 때문에 또 심판을 쪼개서 말하느냐?']

이 설교말씀에 부족한 종이지만 보충하여 주해를 해 보았습니다.
주해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  대속과 구속

공심판과 사심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공심판 '대속'과 사심판 '구속'을 구별할 줄 알아야 됩니다.

이래서 '대속'과 '구속'을 구별해서 말합니다.
'대속'이란 말이 있고 '구속'이란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대속'을 받은 자가 대속을 뿌리로, 근거로, 토대로, 종자로 삼아서 '구속'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주님께는
사활이 우리들에게 대한 대속이 되셔서 '사활대속'이 되시고

우리에게는
주님의 사활 대속으로 말미암은 구원이기 때문에 '사활구속'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공심판에서는
주님의 사활 대속이 우리에게 '기본구원'이 되고

그리스도의 사심판에서는
주님의 사활대속의 공로를 힘입음으로 이루어진 사활구속이 우리에게 '건설구원'이 됩니다.

그러므로
기본구원은 공심판을 통과하게 되고
건설구원은 사심판을 통과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기본구원인 '사활대속'으로 공심판을 통과하게 되고
건설구원인 '사활구속'으로 사심판을 통과하게 됩니다.

그래서
공심판 '대속'과 사심판 '구속'이라고 합니다.


◎ '대속'에 관한 성구

[(고후5: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 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구속'에 관한 성구

[(고후5:15)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그래서 신구약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과 구속을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대속이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대형, 대행, 대화친, 대부활 하신 것을 말하고

구속이라 하는 것은
대속을 실질적으로 우리가 입어서 그 대속의 공로의 혜택을 실상으로 우리가 가져 누리도록 하는 역사가 구속 역사입니다.

구속 역사는 '성령과 물과 피가 역사 한다'고 하셨습니다.
성령과 진리와 주님의 피 공로가 역사를 합니다.

그런고로 신구약 성경은 예수님의 대속과 구속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1987. 7. 24. 금 저녁예배 설교입니다.
설교 중에 다음과 같은 교리가 있었습니다.

[불심판이 어떤 심판인가? 이 불심판은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해서 간수해 뒀다”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른다. 그러면 하나님은 소멸하시는 불이라, 또 진리는 소멸하는 불이라, 영감도 소멸하는 불이라, 하나님이, 하나님과 진리와 영감은 하나입니다.]

이 설교 말씀에 부족한 종이지만 보충하여 주해를 해 보았습니다.
주해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 사랑의 하나님과 심판

<서론>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본론>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은 죄를 멸하고 사망을 멸하고 마귀를 멸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능력은 죄를 멸하고 사망을 멸하고 마귀를 멸하는 능력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되어 오시기까지 하셔서 죄를 멸하고 사망을 멸하고 마귀를 멸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사죄와 칭의와 화친의 공로를 베푸셨습니다.
우리를 죄와 사망과 마귀에게서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죄, 사망, 마귀를 멸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죄, 사망, 마귀를 멸하시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에서도 죄, 사망, 마귀를 멸하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사랑의 능력으로 심판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이 죄에 속한 것, 사망에게 속한 것, 마귀에게 속한 것을 심판합니다.

지금 구원의 때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그러나 심판의 때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어느 때나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없으면 우리의 구원이 없습니다.
심판이 없으면 죄, 사망, 마귀가 멸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속도 하나님의 사랑이요 심판도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근거>

●[(벧후3:7)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하시는 말씀은
지금 구원의 때에 진리의 말씀이 심판 때에 심판하는 진리의 말씀과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요일5:7)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이 말씀은 성령과 진리는 하나라는 말씀입니다.
영감과 진리는 하나라는 말씀입니다.

●[(요일5:8)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의 대속과 영감과 진리는 하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대속이 하나님의 사랑이라면 영감과 진리도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이 죄, 사망, 마귀를 멸하는 역사를 하셨으니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영감도 죄, 사망, 마귀를 멸하는 역사를 하시니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진리도 죄, 사망, 마귀를 멸하는 역사를 하니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벧후3:7에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른다'고 하셨습니다.
진리가 불사른다는 말씀입니다.

요일5:8에 '피와 성령과 진리'는 하나라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피와 영감과 진리의 능력이 심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곧 하나님의 사랑이 심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대속도 예수님의 심판도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결론>

하나님께서는 죄, 사망, 마귀를 멸하기 위해서 친히 사람되셔서 우리를 대속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 사망, 마귀를 멸하기 위해서 재림하셔서 심판하십니다.
이것이 또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은 죄, 사망, 마귀를 멸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완전 대속의 구원 역사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완전 구원의 심판 역사를 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심으로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대속의 구원 역사와 심판의 구원 역사를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대속 역사와 하나님의 심판 역사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단일성의 하나님이심으로 대속도 심판도 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초림으로 대속 역사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으로 심판 역사를 하십니다.

그러므로 대속도 심판도 하나님의 구원역사입니다.

대속에서도 죄와 사망과 마귀를 멸했습니다.
심판에서도 죄와 사망과 마귀를 멸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대속 공로를 입어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심판으로 죄, 사망, 마귀를 멸하신 것이 우리의 영원한 구원입니다.

이렇게 삼위일체 하나님의 모든 역사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역사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하나님과 연결되면 생명의 구원이 됩니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과 끊어지면 사망의 멸망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심판이 하나님의 사랑인 것을 아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대속이 하나님의 사랑인 것은 아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대속은 원하고 심판은 없기를 원하는 자는 하나님을 모르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모른 자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모르는 자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의 구원은 죄, 사망, 마귀를 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배치되지 않으려면 죄, 사망, 마귀를 멸해야합니다.
그래야 대속이 우리의 구원되고 심판이 우리에게 와도 구원으로 통과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어느 때나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도 언제나 어느 때나 죄, 사망, 마귀를 멸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첨부>

●[(엡1:3-6)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영원 자존하신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목적, 예정, 창조, 섭리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목적, 예정, 창조, 섭리 안에 들어 있는 예수님의 대속과 심판은 사랑입니다.

이 다음 천국에서는 예수님의 대속 역사에 아무도 원망 불평할 자 없습니다.
예수님의 심판 역사에도 원망 불평할 자 아무도 없습니다.

천국은 사랑의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피와 영감과 진리의 역사가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만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피와 영감과 진리대로 된 것만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죄, 사망, 마귀가 없는 곳입니다.
천국은 생명 되는 영생만 있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의 은혜를 감사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의 은혜를 세세토록 찬송과 영광을 돌리는 곳이 천국입니다.


●(계16:4-7) 셋째가 그 대접을 강과 물 근원에 쏟으매 피가 되더라 *내가 들으니 물을 차지한 천사가 가로되 전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거룩하신 이여 이렇게 심판하시니 의로우시도다 *저희가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흘렸으므로 저희로 피를 마시게 하신 것이 합당하니이다 하더라 *또 내가 들으니 제단이 말하기를 그러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심판하시는 것이 참되시고 의로우시도다 하더라

하나님의 심판이 참되고 의롭다고 하셨습니다. 참이라는 것은 진실인데 구별하여 참된 것 하나를 찾은 것이 참이요 진실입니다. 의는 옳고 바른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꼭 심판을 하시는 것이 옳고 바르다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심판은 사랑의 심판이요 참된 심판이요 의로운 심판입니다.



선교보고를 작성할 때마다 이곳 소식을 좀 세세하게 전해야겠다고 작심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글을 쓰다보면 매번 처음 의도와는 달리 다른 글을 쓰게 됩니다. 주신대로 적고 주신대로 올리는 것이 순종이라 믿습니다.

온 세상을 다 내편을 만들어도 하나님께서 내편이 안되면 망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성경입니다. 이 성경을 가르치는 자가 목회자입니다. 이 성경을 배우는 자가 성도들입니다.

[(사49:23) 열왕은 네 양부가 되며 왕비들은 네 유모가 될 것이며 그들이 얼굴을 땅에 대고 네게 절하고 네 발의 티끌을 핥을 것이니 네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나를 바라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 의지하여 부족한 종이 선교보고를 올립니다.
2004년 10월 31일 중국에서 김반석 선교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