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선교보고 (2004년 11월)

2007.05.13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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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선교보고 (2004년 11월)
선지자선교회
이름 : 반석     번호 : 62
게시일 : 2004/12/09 (목) PM 11:51:30  (수정 2006/06/22 (목) AM 09:51:27)    조회 : 183  

■ 중국선교보고 (2004년 11월)

주님 안에서 각 교회와 가정 위에 평안을 빕니다.

이곳은 이곳 교회를 위하여 동역 하시는 여러 교역자님들과 성도님들의 기도로 주님의 안보 가운데 평안히 지내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이곳 교회와 부족한 종을 위해서 기도하여 주심에 대한 주님의 응답인 것을 믿습니다.

이번 달에도 주님께서 할 일을 하게 해주셨고 또 만나야 할 종들을 만나게 해주셨습니다. 또 이곳 저곳을 다니다가 어려운 상황을 만나게 되면 아직 연약한 종임을 늘 돌아보게도 해주십니다. 그러므로 기도하시는 중에 미약한 종을 위해서 더 많은 기도를 해 주십시오. 기도의 힘으로 이곳 일을 감당하고 있음을 압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달란트는 바른 교리와 신조입니다. 그러므로 이곳 교회에 바른 교리와 신조를 전하여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로 바로 세우는 일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인 것을 믿습니다.

선교보고가 선교지의 소식을 실감 있게 전해야 감동을 받았다는 소리를 듣는데 바른 교리와 신조를 전하는 일에 중심을 두고 가치를 두다보니 부수적으로 일어나는 그 외의 일들은 일상생활로 받아들여져서 특별하게 이곳 소식이라고 전해야 할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않습니다.

또 선교사역 중에 일어나는 일과 주변 소식을 전하면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겠으나 결국은 전쟁터의 종군기자가 총알이 튀고 폭탄이 터지는 충격적인 실황을 뉴스로 전하는 것과 같은 모양으로 나가야 하기 때문에 그런 방향으로 나가는 것을 삼가 하고 있습니다.

선교사는 복음을 전하고 복음 전한 것을 또 전하는 것이 선교사의 본분이라 여기기에 복음을 전함으로 동반되는 이런저런 형편들은 대충 어떠할 것이라 짐작만 하시고 위해서 기도로 동역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이곳 사역 형편이 어떠냐고 물으신다면 그렇게 힘들지도 또 그렇게 쉽지도 않다는 것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서도 이곳 교회를 위하여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주님만 바라보고 동역 하시는 분들이 여기저기 많이 계십니다. 그런 분들과 주님 안에서 교통하는 위로와 기쁨이 있습니다.

대부분은 기도로서 교통하지만 또 서신으로 교통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런 분들 중에 한 분이 선교사에게 보낸 서신은 많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잔잔하게 흐르는 짧은 글이지만 그분이 가지신 묵직하고 깊은 주님관, 사역관, 선교관, 동역관을 교통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를 참으로 경성 시키는 글이 귀한 때에 본받을 글이라 여기고 소개하오니 다 같이 새기시고 은혜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 서신

항상 주안에서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이 선교사님과 가족들에게 항상 같이 동행해 주시기를 간절히 소원하고 기도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일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일에 수종 들고 믿는 것 밖에는 없는데 나중에 우리가 했다고 상을 주시고 칭찬해 주시니 주님 앞에 황송할 따름입니다.

주님의 일에 우리는 수종을 들뿐이고 주님이 우리를 붙들고 이일을 하신다는 것을 바로 아는 것만큼 어떤 크고 어려운 일을 명하셔도 순종으로 할 수 있는 믿음의 자신이 생기리라 믿습니다

저는 주님이 선교사님을 붙들고 일하시는 주님의 선교사역에 저를 동참시켜 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제 힘대로 감사로 기도하고 수종을 들려합니다



이번 달에는 그동안 [총공회조직신학] 곧 [총공회 교리 신조 행정] 곧 [백영희목회설교록 요약집]이 일차 원고 정리를 마쳤습니다. 이제 편집후기를 작성하여 마무리하는 일과 이차적으로 원고를 교정하는 일이 남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시간 편집후기를 작성하여 그 내용을 선교보고에 첨부하려고 합니다. 편집후기를 작성하는 것도 선교사역의 한 부분입니다. 편집 후기도 교리신조를 나타내는 일이기에 의미 있는 중요한 보고라 여깁니다.


● 편집후기

1. 총공회 조직신학 탈고

주님 안에서 각 교회와 가정에 평안을 빕니다.

총공회적인 조직신학을 정리하기 시작한지가 만 일년이 넘었습니다. 처음에는 일반 조직신학에 총공회 교리신조를 부분적으로 보충해보려고 시도하였다가 완전 개편이 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총공회 조직신학은 일반 조직신학과 제목의 순서는 비슷하지만 내용에 있어서 교리신조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의 차이점은 아주 큽니다.

이렇게 총공회 조직신학을 정리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 전능의 영감 역사로 이루어진 이적의 역사입니다. 무지 무능한 종은 거저 붙들려 쓰임을 받았을 뿐임을 확실히 압니다.

이제 이적을 보았으니 이적에 머물지 않고 표적으로 붙들어서 진리를 전하는 충성된 종으로 주가 맡긴 모든 역사 힘을 다해 마치게 해달라고 주님께 떨면서 늘 간구하고 있습니다.

조직신학 정리를 시작 할 때는 정리기간을 3년으로 잡았으나 예상보다 일찍 탈고가 되었습니다. 총공회 조직신학 원천 자료는 백목사님께서 발표하신 교리신조를 설교록에서 누락됨이 없이 발췌하려고 최대한 노력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부족한 부분도 있을 줄 압니다. 설교록을 한 권씩 정독하면서 발췌하였다면 더 이상이 좋을 수 없을 것이나 할 일이 산적한 관계로 부득이 검색기능을 활용하는 정도에서 원천자료를 발췌하였다는 점을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나타내어야 할 중요한 교리신조는 대부분 나타내었다는 것에 감사가 넘칩니다.

2. 성경은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

총공회 조직신학을 탈고한 지금 심령 깊숙이 무릎을 꿇고 자복 하는 것은 과연 신구약 육십 육권은 참으로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임을 지정의의 전 인격이 굴복을 하게 됩니다.

이제 진리에 입문하게 해주셨으니 그에 대한 감사와 기쁨이 생기는 동시에 받은 진리만큼 또 진리를 보수하고 계대 하는 책임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에 또 주님께 매달리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주님이여! 진리를 아는데 머물지 않게 하시고 진리를 행하는 자가 되게 하사 진리의 사람이 되게 해주시옵소서.

성경은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이 정확 무오 하다는 것은 원본성경이 정확 무오 하다는 것이 아니라 원본성경의 문자 속에 들어있는 진리가 정확 무오 하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물론 원본성경이 사본성경보다 사본성경이 번역성경 보다 구원의 도리를 나타내는 문자적 표현이 정확합니다. 그러나 원본성경이 정확 무오 하다는 것은 사본성경이나 번역성경 보다 본래 진리를 나타내려고 했던 문자적 정확성에 오류가 없다는 말이지 진리적 정확 무오를 중심해서 나타내는 말은 아닙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꼭 원본성경이 아니더라도 사본성경이나 번역성경으로도 하나님께서 나타내시려는 구원의 도리인 진리를 온전히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정확 무오 하다는 것은 원본성경을 기록한 문자 그 자체가 정확 무오 하다는 것이 아니라 문자 속의 구원의 이치 진리가 정확 무오 하다는 것입니다. 또한 원본성경은 기록한 문자적으로 오류가 없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넓은 의미에서는 원본성경은 정확 무오 하다고 말할 수 있고 좁은 범위에서는 문자적 오류가 없는 원본성경 속에 구원의 도리인 진리가 정확 무오 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원어적 해석과 성경적 해석

성경을 원어로 해석하면 원어적 해석이 되고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면 성경적 해석이 됩니다. 원어라는 것은 성경의 구원의 도리를 나타내기 위한 인간의 방언들 중에 하나입니다.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원본성경이 쓰여졌기 때문에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면에 있어서는 그 용어의 어원이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되어 있기 때문에 영어나 중국어나 한국어보다는 월등히 앞서리라 봅니다.

그러나 성경은 문자로 나타나는 성문계시가 있고 성문계시 안에 구원의 도리 진리계시가 있고 진리계시 안에 진리와 함께 역사 하는 영감계시가 들어 있습니다.

성문계시를 해석하는 데에는 원어로 해석하는 것이 다른 방언으로 해석하는 것보다는 앞설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성문계시 안에 진리계시와 진리계시 안에 영감계시는 절대 해석할 수 없습니다. 진리계시는 진리로 해석해야되고 영감계시는 진리의 사람이 영감을 받아야만 해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을 원어로 해석하려는 것은 성경해석의 초보단계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가 속화되어 진리의 사람이 없고 영감의 사람이 없다보니 호랑이 없는 곳에 토끼가 왕 노릇 한다는 말처럼 성경을 원어로 해석만 해도 권위 있는 성경학자로 대우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원어로 해석한다는 것은 성경의 문자적 해석일 뿐이지 성경 속에 진리를 해석하는 것과 진리 속에 영감을 나타내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기 때문에 원어로 성경을 해석하는 일에 제일 권위를 두는 이러한 미혹은 받아서도 안되겠고 주어서도 안되겠습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해야합니다. 성경진리는 성경진리로 해석해야합니다. 성경 진리 속의 은밀의지는 영감을 받아야 나타낼 수 있습니다.

4. 성경 성경적 사전

성경을 원어적 해석과 성경적 해석의 차이점을 비교하기 위해서 부족한 종이지만 성경진리를 아는 범위 내에서와 또 영감을 받은 범위 내에서 성경에 구원의 도리를 나타낼 때 사용한 용어들을 해석해 보려고 합니다.

이렇게 성경적으로 용어를 해석한다해서 그 이름을 [성경 성경적 사전]이라 이름을 붙여서 현재 정리하고 있는 중입니다. [성경 성경적 사전]을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모두 정리가 완료되면 [총공회 조직신학]에 부록으로 첨부할 예정입니다.

5. 일반 조직신학과 총공회 조직신학의 차이

총공회 조직신학과 일반 조직신학과의 차이를 한 말로 말하라면 원어적 해석과 성경적 해석의 차이라고 하겠습니다.

총공회 교리신조가 세계최고의 교리신조라는 것이 이제 객관성을 가지게 된 것은 총공회 교리신조가 조직신학 순서로 체계적으로 정리가 되었기에 누구든지 일반 조직신학과 비교해 보시면 명확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일반 조직신학은 원어적 해석의 학문중심이고 총공회 조직신학은 성경적 해석의 진리 중심이라는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6. 생명력 있는 조직신학

인간의 골격이 튼실하게 보여도 피가 흐르지 않으면 생명력이 없는 것과 같이 조직신학을 공부하면서 교리만 배우고 신조를 배우지 않는 것은 지식만 배우는 것이 되고 신앙은 배우지 못하기 때문에 죽은 믿음만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반 조직신학과는 달리 총공회 조직신학에는 교리를 배울 때 신조도 같이 배울 수 있도록 교훈중심으로 정리를 하였습니다. 교리 지식을 배우면서 그에 따른 신조 신앙이 자랄 수 있도록 하는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7. 성경 진리중심의 목회자 양성

신학이라는 것은 성경을 조명하기 위하여 있는 것인데 지금은 신학이 주체가 되고 성경은 신학을 보조하는 위치에 내려놓았습니다. 완전히 주객전도 변질 속화가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신학교는 원어위주 신학위주를 배제하고 성경위주 진리위주의 목회자 양성으로 돌아서야 하겠습니다.

8. 칼빈주의와 백영희주의

칼빈주의라고 하면 개혁주의를 말합니다.
개혁주의라고 말함은 성경주의를 말함입니다.
중세 천주교가 비성경적으로 타락되어 나갈 때에 성경적으로 나가자는 주의였습니다.

백영희주의라고 말함은 개혁주의를 말합니다.
현대의 교회가 비성경적으로 속화되어 나갈 때에 성경적으로 나가자는 주의입니다.

사도주의도 개혁주의입니다.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세인들이 비성경적 율법주의로 나갈 때에 성경적 은혜주의로 나가자는 주의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아벨주의
아브라함주의
엘리야주의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시대마다 그 시대를 감당할 선지자가 있었고 교리 신조가 있었습니다.
사도시대에는 사도신경이 있었고
칼빈시대는 기독교강요가 있었으며
오늘의 백영희시대에는 백영희목회설교록이 있습니다.

사도신경은 초대교회 시대의 최고 교리와 신조이었습니다.
기독교강요는 개혁교회 시대의 최고의 교리와 신조이었습니다.
백영희목회설교록은 현대교회 시대의 최고의 교리와 신조입니다.

기독교 강요나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과 백영희목회설교록을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분량이 방대하여 비교하기 번거러우시면 요약집이 되는 총공회 조직신학과 비교해 보시기바랍니다.

우리들이 교리사는 다룰 때에 교리면 보다 신조면을 더 깊이 있고 중요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사도신경이 담고 있는 교리의 분량은 16절 용지 한 장도 안 되는 분량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교회사를 보면 그 시대에 신앙을 지키기 위해 많은 순교자가 있었는데 그것은 사도들이 사도신경을 그대로 신앙하고 그대로 전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일제 신사참배나 6,25  환란 때에 순교자는 손가락 꼽을 정도였습니다. 오늘 신앙박해가 닥친다면 우리가 어떤 자리에 설 수 있을지 참 두렵습니다.

현대교회는 교리 홍수시대입니다. 신앙박해로 환란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무분별한 교리에 파묻혀 죽어가고 있습니다. 또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은 사도들과 비교도 안될 만큼 많은 교리를 알고 있으나 신조 없이 학문적 지식으로 전하기 때문에 신앙을 지킬 힘이 없는 것입니다. 신앙 없는 나무에서 신앙의 열매가 맺어질 리가 만무한 것입니다. 말세가 되어 갈수록 교리는 발전하나 신조는 퇴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사도신경에서 기독교 강요와 웨스터민스트 신앙고백으로 또 백영희목회설교록으로 나아오게 하셨습니다. 시대마다 그 시대를 감당 할 수 있는 교리와 신조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교리 지식만으로는 신앙을 지킬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신조를 교리와 함께 붙들어야 하겠습니다. 신앙를 지키고 살 때의 믿음이 신조이며 믿음으로 살 때의 깨달음이 교리입니다.

사도들의 신앙승리가 교리와 신조로 나타났으니 사도신경입니다.
칼빈의 신앙승리가 교리와 신조로 나타났으니 기독교강요입니다.
백영희의 신앙승리가 교리와 신조로 나타났으니 백영희목회설교록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들이 신앙승리를 하려면 교리만 붙들어서는 안 되고 신조도 병행해서 붙들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칼빈주의의 신조인 개혁주의는 보수 계대 해야 한다고 강조할 수 있어도 '기독교 강요'의 교리를 오늘에까지 그것만 붙들고 있어야 정통교리 정통교단이라고는 강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교리는 시대에 따라 그 시대를 감당할 교리로 자라가야 하고 신조는 시대에 상관없이 보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현대교회 시대에서도 기독교 강요나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이 이 시대의 최고의 교리신조라고 주장한다면 마치 소달구지 길을 고속도로 보다 낫다고 하는 것과 같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백영희목회설교록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보다 교리신조가 앞서고 칼빈의 기독교 강요가 사도신경보다 교리신조가 앞선다 하더라도 각각 그 시대의 최고가 되는 개혁주의 신앙노선이었습니다. 진리를 보수한 순생 순교의 신앙노선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붙들고 쓰신 그 시대의 선지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백영희설교록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보다 앞선다고 할 수 없고 기독교강요가 사도신경보다 앞선다고 할 수 없습니다.

강 상류가 있기에 강 하류가 있고 강 상류의 물이 흘려 내려오기 때문에 강 하류의 강폭이 넓은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강 상류의 폭에는 충족한 물의 양이라 할지라도 그 물의 양으로는 강 하류의 넓은 강폭을 다 채울 수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도신경이나 기독교강요나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이 초대교회, 개혁교회에서 각각 최고의 교리이지만 현대교회 시대인 지금은 최고의 교리신조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백영희목회설교록의 구원론 하나만 보더라도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이나 기독교 강요에서의 구원론 보다 깊이와 높이와 넓이가 다르다는 것을 연구해보면 누구든지 한 눈에 알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백영희설교록이 현 시대에는 최고의 교리신조라 할지라도 언제 까지나 최고라고 주장할 수 없는 것은 시대마다 주님께서 그 시대를 감당할 종을 세우시고 교리신조를 나타내신다는 것을 지나간 교회사를 통하여 잘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중요한 것은 우리들이 교리 연구에만 치우치지 말고 신조 연구를 동시에 하여야 하겠습니다. 교리라는 싹이 날 때에 그 뿌리가 되는 신조는 어떠했는지 그것을 연구해서 그 신조 신앙을 우리 것으로 삼는데 주력해야 참신학자 참 목회자가 되겠습니다.

껍질 속에 알맹이가 있음 같이 교리는 껍질이며 신조는 알맹이입니다. 보이는 교리 속에 보이지 않는 신조가 있음을 알고 그 신조를 더 중요하고 가치 있게 여겨야 하겠습니다.

사도바울
마틴루터
죤 칼빈
다 기록할 수 없지만 시대마다 주님이 세우신 선지자의 이름입니다.

깃발의 이름은 달라도 외치는 소리는 꼭 같았습니다.
개혁주의! 성경주의! 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사도주의는 칼빈주의를 낳고
칼빈주의는 오늘의 백영희주의를 낳았습니다.


8. 삼위일체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

죄와 허물로 가득한 죄인을 주님의 보혈로 씻어 주시사 종으로 세우시고 강권적 유기적 영감을 쉬임 없이 주셔서 그 인도하심 따라 쓰임을 받다가보니 성경적 조직신학이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붙들고 쓰시던 순생 순교의 종을 더 영화롭고 복되게 하시기 위한 역사 중에 하나임을 믿습니다. 또한 순생 순교의 종에게 역사 하신 영감의 갑절을 저희들에게도 주시기를 간구한 기도를 들으시고 불쌍히 여기사 긍휼의 은혜를 입혀주신 것을 확실히 믿습니다.

무딘 입으로는 그 은혜에 대한 감사를 그대로 표현 할 길이 없어 에베소서 1장 말씀을 의지하여 우리를 구원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께 세세 무궁토록 찬송과 영광을 돌립니다.

[(엡1: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엡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엡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엡1: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엡1: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엡1:8)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엡1: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엡1: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엡1:11)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엡1:12)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엡1: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엡1:14)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엡1:15) 이를 인하여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엡1:16) 너희를 인하여 감사하기를 마지 아니하고 내가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하노라]

[(엡1: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엡1:18)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엡1:19)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엡1:20)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엡1:21)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엡1:22)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엡1: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이 말씀 의지하여 부족한 종이 편집후기와 함께 선교보고를 올립니다.
중국에서  김반석 선교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