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선교보고 (2001년 8월)

2007.05.13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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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선교보고 (2001년 8월)
선지자선교회
이름 : 반석     번호 : 3
게시일 : 2001/12/08 (토) AM 09:58:54  (수정 2006/06/22 (목) AM 07:24:35)    조회 : 114  

■ 중국선교를 위한 보고서 (2001년 8월 18일-27일)

8월 거창 집회를 마치고 첫 주일날 아침에 중국 산동성 ㅇㅇ시의 조선족 ㅇㅇㅇ전도사님으로부터 일주일 후 8월19일부터 한 주간  중국 ㅇㅇ성 ㅇㅇ 지역의 사역자들이 공부하려고 모이니 준비하여 달라고 전화가 왔다. 6월 모임에서  어느 정도 일정이 계획된 것이어서 강의 자료 준비는 어떤 말씀을 전하여야 하는지 출발하는 날 까지 주님께 기도하며 준비를 하였다.

8월 18일 오후 4시에 인천공항에서 출발하여 저녁 8시에 ㅇㅇ성 ㅇㅇ 공항에 도착하니 ㅇㅇㅇ전도사님과 약속 한 대로 중국 한족 "ㅇㅇ 전도사님"이 "ㅇ 선생" 이라는 푯대을 들고, 입국장에 마중을 나와 있었다. 공항 근처에 숙소를 정하여 하루 밤을 자고, 다음날 ㅇㅇ시에서 오기로 한 ㅇㅇㅇ 전도사님과 ㅇㅇ 공항에서 합류하였다,

세 사람은 간단한 식사를 하고 바로 현지로 출발하였는데 현지에 가는 길에 ㅇㅇ성에 하나뿐인 ㅇㅇ신학원이 있어 잠깐 방문하였으나 마침 방학 기간이라 학교 전체를 수리를 하고있었다. (ㅇㅇ신학원은 신학과정이 2년제로서  1학년이 100명, 2학년이 현재 40명이며, 학생 수는 정부의 문화부 종교국에서 관리하고 있다. ㅇㅇ성은 인구가 4,000만 명이 넘어나 신학원은 하나뿐이고 신학생 억제 정책을 쓰고 있다.)

ㅇㅇ은 해발이 1900m 고지인데  차를 타고 2시간 정도 산허리를 둘러서 올라가야 되니까 현지는 해발이 더 높은 곳이 된다. 현지로 올라가는 산골짜기 입구에서 차를 세우니  2명의 청년성도가 반갑게 기다리고 있었는데 1시간 더 산을 올라가야 된다고 하여 부지런히 올라가 보니 산의 정상 부분이었다.

위로는 맑고 푸른 하늘과 아래로는 소 등 짝 같이 둥그런 산들이 나란히 깔려있다. 우리가 도착한 현지는 중국의 소수 민족 중의 하나인 "ㅇ족"인데 인구수는 600만명(통계표에는 중국 인구의 0.6%) 정도이며 다른 민족에 비하여 키가 아주 작았다.

사는 지역은 주로 ㅇㅇ성의 산악지역에 살고 있으며 고유의 언어와 문자를 사용할 수 있어, ㅇ족 문자의 성경과 찬송가가 있었다.

가옥은 흙집이며 내부는 치장이 없어 황량하다. 밤마다 빈대인지 무엇인지 모르지만 물려서 자고 일어나면 온 몸이 울긋불긋하고 간지럽다.

식사는 잡곡이 주식이며 쌀은 남방지역 쌀이라 힘이 없어 펄펄 날아다닌다. 사역자들의 모임임으로 특별한 음식으로 마련한 것이 채소에 돼지고기 조금 들어 간 것인데 이들에게는 설날 아침 밥상이란다. 그래도 음식이 맵고 짜지 않아 삼삼한 편이어서 맛이 괜찮다.

밥을 먹고 밥그릇을 중간 정도 비우면 어느새 밥그릇을 채운다. 나중에는 사양을 해도 거절하지 못할 만큼 권하여 밥그릇을 가슴으로 덮어야 할  만큼 마음이 너무 어질고 선한 민족성품이다.
(선교사가 현지의 음식에 적응이 안되어 선교를 포기하는 경우도 있다.)

믿기 시작한 역사는 얼마 되지 않는데 미군이 월남전에 참전하여 전쟁에서 낙오된 장병들이 월남 북쪽 국경 지역이며 산악 지대인 ㅇㅇ성 ㅇ족 마을에 숨어와 도움을 청할 때에 적극적으로 도움을 줌으로서 미국교회의 관심과 후원을 받아 ㅇ족은 다른 민족에 비하여 믿는 자가 많아 마을 전체가 믿음의 가정이 된 곳이 많다고 한다.

ㅇ족은 부족한 외모와 환경과는 달리 신앙은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열심과 순결함을 가져 초대교회가 어떤 교회인지 상상이 된다. 속화되고 변질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다.
통성 기도는 얼마나 간절한지 작은 예배당이 떠날 정도이고, 설교 직전 찬양은 우리처럼 찬양대가 정하여져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주님께 찬양하고 싶으면 강단 앞으로 나와서 찬송을 하는데 밭에서 일하다가 바로 오는 길이어서 흙이 잔뜩 묻어 바지를 무릎까지 올리고 꾸밈없는 모습으로 오늘 하루, 하루와 한 주간의 주님의 구원의 은혜에 대한 진정한 감사를 찬양하였다.

수요일 저녁예배를 인도하고 다음날인 목요일 저녁에도 예배를 보았는데 예배가 끝난 후에 한시간 더 설교를 간청할 정도이다.

(중국교회의 급선무는 주일 성수와 온전한 십일조인데 이 민족(ㅇ족)이, 이 말씀으로 살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셔서 중국의 민족 중에 등불이 되는 민족이 되게 해주신다는 말씀으로 증거 함)

사역자들의 공부 시간과 일정은 화요일 오전 8시부터 12시까지, 오후 2시부터 오후 6시까지 하루 8시간을 금요일까지 정하고, 주님께서 함께 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첫 시간을 시작하였다.

모임의 수는 20명이 넘었는데 사역자 3명과 예비 사역자 20명이다,
산악 지역의 마을이라 세상 학문은 매우 짧았으며 그들의 중등 교육은 우리의 외국 유학보다 더하다.

어느 정도 수준을 생각하고 교재의 어려운 용어를 좀 쉬운 용어로 준비하였으나 직접 전하는 것도 아니고 통역을 통하여 전하려고 하니까 첫 시간 강의에 지칠 정도로 진 액이 다 빠진다.

말씀을 전할 때에 통역하는 자가 깨닫고 변화를 받아서 순간, 순간 전하여야 하기 때문에 가르치는 내용에 대한 믿음과 성령의 충만한 역사가 아니면 안됨을 절실히 느낀다.

"주님이여 도와주소서"
주님의 뜻이 있어 보내주시고 불러주신 주님의 역사를 믿고 간구 함으로, 성령의 감화 역사로 말씀을 전하는 자도 받는 자도 깨달음의 은혜가 점점 풍성하여졌다.

전하는 내용은
교리(조직신학)와
요약한 교회사(교단사 포함)와
기독교와 이종교, 우상숭배, 교회의 예배 의식(설교, 기도, 찬송), 주일성수, 온전한 십일조, 절기, 이단의 특징, 등 사역자가 보완하고 알아야 할 부분들을 전하였다.

(이 ㅇ족 교회가 있기까지의 교회의 근원과 역사를 말하고, 교회의 정의와 본분을 가르치고, 또한 바른 교리를 세우기 위하여 교회사적으로 많은 주의 종들이 순교함으로서 이 교리가 전해짐은, 교리와 함께 순교의 피가 계대 되는 만큼, 지금 받는 교리가 귀하고 큰, 정통 교리임을 깨달아 자기 것으로 삼고 또한 후손들에게 속화되지 않고 변질되지 않는 교리를 전해주는 선조가 되도록 가르침)  

이구동성으로 신학교에서는 배우지도 못한 지식을 배웠다고 기뻐하였으나 지식으로만 받아들이지 않도록 주의를 시키고, 지식적으로 전하지 않고 그 속에 신앙을 중심 하는 것에 초점을 두어 설교법으로 전하는데 주력하였다.

마지막 시간에는 백 목사님 설교 "메모" 중에 목회에 관련된 부분만 발췌하고 정리한 교재로 목회자가 어떻게 걸어가야 할 것을 전하고 강의를 끝맺었다.

꼭 다시 방문하여 줄 것을 간청하는 그 들에게 젖먹이에게 젖을 다물리지 못하고 떠나는 어머니의 심정임을 말하고,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쭈 리 짜이 지엔 (주님 안에서 다시 만나자)하고 작별하였다. 장년들은 마을 밖까지 청년들은 산아래 차 타는 곳까지 배웅을 해 주었다.

돌아오는 길에 ㅇㅇ신학원를 방문하여 원장님을 뵈었는데 연세가 80세이나 아직 기력이 있으시다.

한 시간이 넘게 담소하는 가운데에 산악지역에 사는 어느 곳은 먹는 것은 말 할 것도 없고 의복이 없어서 헐벗고 이불이 없어서 덮지를 못하여 추위에 떨고 있다고 말씀하시고 십일조를 하지 않아 복을 받지 못한다고 하시면서 중국교회의 사정을 한국교회에 많이 알려 달라고 부탁하셨다,

또한 ㅇㅇ신학교가 하나님의 주권이 아니면 지금 까지 유지하지 못함을 강조하실 때에 이런 신앙지도자가 계시니까 중국교회가 보존되는구나 생각하면서 한편으로는 중국 공산주의의 박해와 문화 혁명시기의 박해를 얼마나 힘들게 감당하셨을까, 노구의 잔잔한 신앙과 인품에서, 우리가 그러한 현실 역사를 만났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돌아보게 한다.

운남성 기독교 양회(삼자회, 기협회= 기독교 정치기관) 회장으로서와 ㅇㅇ신학교(목회자 양성기관) 원장으로서의 직무에 심적 괴리감도 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ㅇㅇㅇ전도사님은 ㅇㅇ시로 떠나고, 남아있는 한족 "ㅇㅇ" 전도사님은 "란주시"에 가야하는데 기차로 3일 밤낮으로 가야한단다. 비행기로는 두 세시간이면 갈 수 있는데 갈 때에도 힘들게 가야하는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다. 그러나 남아있는 돈은 얼마 되지 않으니 가는 기차비(300위안)만 드릴 수밖에 없다.

떠나는 날 아침, 몇 단어의 중국어와 손짓 몸짓으로 "ㅇㅇ"전도사님과 같이 눈을 뜨고 주님께 기도한다,  중국교회를 위하여 다시 만날 수 있게 하여주옵소서 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중국교회에 대한 할 일을 생각해본다.
첫째로 중국교회의 사역자들이 가르칠 교재가 부족하니 우리 공회가 가진 자료를 번역하는 것이 급선무이며,

둘째는 이 자료를 현지 사역자에게 현지마다 가서 직접 배포하는 것과
셋째로 이 자료를 활용하여 사역자를 가르치면 일파 만파의 구원의 열매를 거둘 것이다.

이 일은 남의 나라의 일이 아니다. 남의 교회의 일도 아니다.
주님 나라의 일이요, 우리 교회의 일이다.
주님 안에서 한 형제라고 가르치는 교역자가 할 일이요,
주님 안에서 한 형제임을 믿는 성도들이 할 일인 것이다.

많은 사람을 옳은 대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다니엘서 12장3절)고 하신 말씀과 함께 주님이여 주님께서 사람을 통하여 일하시는데 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복 받을 자가 누구이오니까. 주님이여 저희들을 긍휼히 여겨 주소서 하는 기도가 저절로 나온다

금번 선교에 동역하고 기도와 연보로 후원하여 주신 교역자님들과 여러 교회 성도님들께 감사 드리며 우리 주님의 은혜가  더욱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기도 드립니다.

2001년 8월 28일  부족한 종 삼가 올립니다.  

 

 

 다음은

     2001년 8월 선교 사역에 대한 사진자료입니다.

베트남과 국경지역에 있는 중국00성의 소수민족인 M족 마을입니다.
사람들이 해발 2,200m 위에 살고 있어 마을 아래로 산들이 둥글둥글 깔려 있습니다
8월이면 무더운 여름인데 높은 산간 지역이라 낮에는 선선하고 밤이 되면 좀 추웠습니다.

집들은 흙벽돌로 쌓았고 지붕은 시멘트 기와로 덮은 집도 있지만 통나무에 억새풀을 올린 집도 있답니다.

아낙들도 쉴새없이 밭일을 하였으며 주로 감자와 옥수수를 심어 경작하였는데 한국에서는 비싼 감자가 이 곳에는 돼지
사료로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감자를 쿵더쿵 쿵더쿵 디딜방아에 찧는 모습이 우리나라의 옛 모습이 생각나 정겹습니다.

돼지는 몇 십년 전에 우리나라의 토종 돼지와 같이 키가 짤뚝 하였습니다.
아이들은 신발도 신지 않고 다녔는데 외국인이 왔다고 신기하였는지 졸졸 따라 다녔습니다.

황토 벽에 검은 시멘트를 발라 칠판 대용으로 사용하여
글을 써 놓은 것이 있어서 무었을 적어 놓았나 보니 마을 살림살이에 대한
수입과 지출 내용을 마을 사람들이 궁금하지 않도록 일자별로 자세히
게시판에 공개하여 놓았습니다.


집 근처에 묘지가 주로 있었는데 돌로 울타리를 치고 있었으며 세운 비석은 좀 특이하였습니다.

교회 예배당은 제일 높은 지역의 마을에 자리 잡았는데 밤 예배 때에는 산 오솔길을 따라 등을 켜고 올라오는 것을 보면
정말로 반딧불이 반짝 반짝 날아 오르는 것과 같아 보였습니다.

사진으로 보는 예배당에 성도는 200여 명이 모인답니다.
예배당 안에 찬송하는 모습이 보이네요.
찬송하는 외모의 모양과는 정 반대로 찬양은 상상하기 힘들정도로
천사들의 소리와 같았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예배시간에 말씀 증거를 한 시간하고 나니 바로 이어서 한 시간 더 말씀을
증거하여 달라고 간청을 합니다. 이런경우를 보셨습니까?


M족 사역자들에게 조선족 사역자를 통하여 통역하며 강의를 하였는데
어떤 사역자는 중국 한족어로,어떤 사역자는 중국 표준어인 한(漢)족 말을
배우지 않아 자기 소수 민족어로 필기를 하였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도,말씀을 듣는 자도 성령의 충만이 넘쳐서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세 사람이 나란히 섰습니다.
왼쪽 남자분은 중국 한족 전도사님인데 이번 사역을 위하여 '란주'라는
지역에서 기차를 72시간을 타고 힘들게 왔습니다. 이 사역자는 주로 산악지역
소수민족만을 위하여 전도하는데 회교도를 믿는 민족에게 전도하다가
총으로 위협도 받고,개들에게 물게하여 도망치다가 깊은 웅덩이에 빠지기도
하는 등, 위험을 수없이 받았지만 죽도록 충성하는 진실된 종이었습니다.

오른쪽의 여자 분은 M족의 사역자 전도사님입니다.
산골짜기 산 속 마을에서 도시로 내려가 삼자신학교에서 공부한 유학파였습니다.
신학교에서 배우지 않은 말씀이라 하면서 강의하는 시간 내내 열심히 필기하였습니다.
한주간을 공부하고 떠날 때에 주님 안에서 다시 만나자고 하였는데 벌써 일년이 지나옵니다.

산 위의 마을에서.
외부와 고립된 채 말씀에 갈급한 그들을 위하여 주님이 늘 함께 하여 주시기를 기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