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선교보고 (2002년 3월) 첫째 글

2007.05.13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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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선교보고 (2002년 3월) 첫째 글
선지자선교회
이름 : 반석     번호 : 14
게시일 : 2002/03/30 (토) AM 00:03:18  (수정 2006/06/22 (목) AM 07:58:28)    조회 : 135  

■ 중국선교보고 (2002년 3월) 첫째 글

3월 00일 E지역으로 가기 위하여 기차를 탔다. 13시간을 가야 목적지에 도착하는데 딱딱한 침대차로서 상중하(上中下) 세 칸으로 나누어져 있다. 3일전에 미리 예약을 하면 아래층(下層)에서 편하게 갈 수 있는데 중층이나 상층은 좀 불편하다. 그래도 일반 칸을 이용하지 않고 침대칸을 이용한다면 편하게 가는 셈이다. 중국 사람 중에도 침대칸을 이용한다면 경제력이 괜찮은 편에 속한다.

지금 현재 중간층에 앉아 글을 쓸려고 하니 상층에 머리가 닿아 바로 앉을 수가 없어서 비스듬이 뒤로 누워 글을 쓰고 있다. 3월 중순이 지났는데 함박눈이 내려 객차 연결 사이로 눈이 세차게 밀쳐 들어온다.

3주 전, 한국을 떠나오던 날을 시작으로 주님의 인도하심과 안보 하심에 진심으로 감사 드리며 한국의 교회를 위하여 이 글을 쓴다.

이번 3월 사역은 중국 선교에 싹을 피워 주시고 여러 면으로 힘이 되어 주시는  SB교회 김 목사님과 동행을 하였다. 몇 달 전부터 현지 선교사역의 실체를 좀 자세히 알려 드리기 위하여 중국 방문을 요청하였더니 쾌히 승낙하신 것이다.

중국 사역자들을 위하여 몇 주전부터 성경 강의 자료를 기도로 준비하시고 약속 장소인  인천 공항으로 일찍 나오셨다. 김 목사님과 함께 출국 수속을 하려고 줄을 서 있는데 옆줄에서 "중국 가십니까?" 하는 소리가 들려서 돌아보니 선교 사역에 후원하고 있는 옛 중간반 출신 성도이다. 영국에 사업차 출장을 간다는데 마침 이런 장소에서 만나게 된 것을 보면 앞으로 주님의 뜻이 어딘가 계실 것이다.

비행기를 타고 중국 AA공항에 도착하니 오후 4시, 첫 번째 사역지인 BB시로 갈려면 기차를 타고 가야하는데 출발 시간은 저녁 7시 출발 시간을 기다리며 김 목사님과 간단하게 저녁을 먹고 목적지에 도착하니 새벽 2시이다. 마중 나온 사역자들의 안내로 2월에 마련한 지하신학교인 아파트에 가보니 청년 예비 사역자들과 목회를 하고 있는 사역자들과 합하여 30분이 30평 크기의 아파트에서 피곤한 몸을 눕히고 곤히 잠들고 있었다.

동역하는 한국 선교사님에게 그 동안의 동향을 듣고 새벽 3시경에 잠이 들었다.
공부하는 기간이라 새벽 예배를 아침 6시에 드리기 위해서 일어났는데 동행한 김 목사님은 피곤한 기색이 전혀 없으시고 청청하시다.

오전 8시 30분부터 12시까지는 김 목사님이 강의하시고, 오후 2시부터 오후6시까지는 송 목사님이 강의하시고, 저녁 7시30분부터 밤 9시까지는 김 선교사가 강의를 하고, 공부하는 사역자들은 하루동안 은혜를 충만히 받고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을 먹고 김 목사님은 오전 시간을 맡으셔서 강의 준비를 열심히 하고 있는데 방문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예! 들어오세요" 하니까 웬 말쑥한 세련되고 젊은 낯선 사람이 불쑥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현재 공부하는 학생 외에는 일체 출입할 수 없고 외부인이 들어 올 수 없도록 일체의 주의와 조치를 취하여 놓았는데 웬일인가 생각하니 순간적으로 무엇이 잘못되어 가는구나 하고 직감적으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강의 시간 10분전이라 저쪽 방에는 30명의 사역자들이 공부할 준비로 앉아 있고, 우리 방에는 강사 3분이 앉아 있고 김 목사님은 강의 준비하시느라 컴퓨터 자판을 두들기고 계셨으니 누가 보아도 이상한 모임이 아니겠는가?  

방안에 들어와서 이것저것 다 살피고 갔으니 순간적 결론은 공안들이 들어 닥치기 전에 피신하는 것이다. 먼저 김 목사님께 짐을 빨리 가방에 꾸리라고 하고 서둘렀다. 송 목사님도 서둘렀다. 무거운 가방을 들고 엘리베이터도 없는 7층 계단을 뛰어 내려오는데 힘든 줄도 모르게 재빠르게 내려왔다. 비상훈련이 아니라 진짜 비상이다.

1층에 내려오니 입구에 웬 자가용이 서있고 운전사가 우리를 보고타라고 손짓을 한다. 공안기관의 차인가? 하고 살피면서 혹시나 공안들이 오지 않나 두리번거리며 큰길로 뛰어 나와 택시를 잡아타고 일단 행선지를 이리 저리 바꾸면서 달렸다. 미행하는 차는 없는지 뒤를 감시하는 것이 무슨 첩보전을 하는 것 같다. 현지인 사역자들 보다 목사님들의 안전이 우선이다. 벌금이 문제가 아니라 추방되면 선교사역은 끝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뒤따라오던 조선족 사역자들이 말하기를 아파트 아래층으로 내려오니까 그 동네 중국 한족 주민들이 말하기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간다"고 저희들끼리 말하더란다. 우리만 손으로 눈 가리고 아옹이지 동네 사람들은 낯선 사람들이 온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말이다.

한시도 주님이 지켜주시지 않으시면 할 수 없는 사역이다. 이런 일을 만나고 보니 그동안 얼마나 주님의 보호 아래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이번 공부하는 장소는 노출이 되었으니 이제 부득이 그 장소에서는 모일 수 없고 하여 다른 장소를 구하면 공부하는 일시를 연락을 하겠다고 하고 사역자인 학생들을 각자 자기 교회로 돌려보냈다. 한 주간 공부하러 왔다가 하루 공부하고 떠나는 것이 전쟁통에 피난하는 것과 꼭 같았다.

그래도 모두 다 안전함을 주님께 감사 드리고, 이런 현실을 주신 분은 주님이시니 각자에게 깨닫게 해주시는 뜻이 있을 것이니 무엇인지 찾자고 하였다.

그 지역에서는 안전상의 문제와 거처할 장소도 없음으로 다음 강의 지역인 CC지역으로 가야 했다. 타고 갈 차편을 알아보니 시간이 지나서 버스 밖에 없는데 12시 출발이란다. 우선 잠시 피신한 그 지역의 전도사님 집에서 점심을 부지런히 먹고 버스에 올라 가보니 청년 예비 사역자 10명이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한 시간 전에 떠났는데 우리 보다 먼저 버스에 타고 있었다.

버스가 출발하여 달리다가 비포장 도로를 달리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산적이 나올만한 산길로, 산길로 달린다. 가다가 잠깐 산 속에 버스가 멈추면 제각기 급한 볼일을 보는데 화장실이 따로 없으니 남자는 좀 괜찮은 편인데 여자들은 어쩔 줄 몰라 우왕좌왕이다.

동행한 조선족 여 전도사님은 많은 사역지를 다니다 보니 이런 일에는 백전노장이라 말하기를 "김 사장님!(목사님, 선교사님을 밖에 나와서 부르는 호칭) 저는 차 앞에 바짝 붙어서 볼일을 보았습니다" 하고 자랑스럽게 요령을 말한다.

우리 청년 예비 사역자들도 차에서 내릴 때 우리를 한번 쳐다보고 무언의 요구를 한다.
차에 오를 때 또 한번 쳐다보고 무언의 애원을 한다. "한 달을 학수고대하고 기다렸는데 하루만 공부하고 돌아가니 너무나 말씀이 아쉽습니다" 하는 갈급한 마음이 그대로 전달되어 온다.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자유가 있으면 버스 뒤편에서 말씀을 전하여야겠는데 중국 땅이라 전할 수도 없고 하여 마음이 매우 안타깝다, 주여! 저들의 갈급한 심령을 어떻게 해야 좋겠습니까? 하고 주님께 여쭈어 본다. 주님의 음성이 들려오기를 "지금 가려고 하는 지역에 데려 가서 가르치면 되지 않느냐" 하신다.

그래서 동행한 조선족 사역자에게 의논하였더니 장소는 어떻게 만들어 보겠다고 한다. 우리가 가는 지역의 중간에서 내려야 할 학생들을 내리지 않게 하고 다 데리고 갔다.

목적지에 도착하니 밤 8시이다. 수요일 저녁이라 예배를 드리고 다음날 아침부터 오전에는 김 목사님이 오후에는 김 반석 선교사가 저녁시간은 송 목사님이 강의하며 금요일 저녁까지 가르쳤다.

그냥 빈손으로 돌아 갈 줄 알았는데 은혜를 듬뿍 받은 학생들은 생기가 돌고 받은 말씀으로 신앙생활을 하기로 작정하고 기쁨으로 돌아갔다. 이렇게 인도하신 주님께 감사의 찬송과 기도를 드렸다.

김 목사님은 담임 맡은 교회가 있어서 주일 예배를 인도해야 함으로 토요일 비행기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CC지역에서 AA시까지 가려면 12시간을 혼자서 밤새 기차를 타고 가야하며 또 역에 내려서 택시를 타고 공항까지 가야하는데 초행길이라 걱정이 된다.

그러나 첫 방문한 중국의 사역 일정에서도 몇 년 중국에 계신 것같이 노련하고 실력 있는 김 목사님을 우리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현지 조선족 전도사님과 같이 기차 안에까지 좌석을 잡아드리고 배웅을 하였다.

담임하시는 교회의 목회도 바쁘신데 중국 선교에 지극히 큰 관심으로 동역하시고 현장을 이해하기 위하여 동행하여 주심으로 주님의 종의 자세에 모범을 보이시니 우리에게 큰 공부가 되었다. 이번 사역에는 보통 경험하지 못하는 안전에 급박한 사건과 여러 지역을 경유하고 접하게 되어 다른 분들이 여러 번 와서 보아야 할 현장을 한번만에 다 본 셈이 되었다.

이렇게 묵묵히 많은 사역을 하시지만 한국의 교회와 성도들은 속속들이 알 수 없으니 주님 외에 누가 아시고 위로해 주시겠나 생각하니 김 목사님께 대한 감사와 존경하는 마음이 솟구쳤으며 열차가 떠날 때에는 코끝이 시큰거렸다.

다음날 토요일 오후 3시경 김 목사님으로부터 한국에 잘 도착하였다고 전화가 왔다. 무거운 짐도 있어 힘들게 가셨을 터인데 전혀 힘든 기색이 없으시다.

주여! 감사합니다.
"뜻이 있어 중국 선교의 현장에 귀한 종을 보내주셨으니 주님의 일을 위하여 큰 역사 있게 하여 주옵시고 영육으로 강건케 하여 주옵소서"하고 간절히 기도를 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