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는 실행의 도

 

1988. 4. 22. 금새벽

 

 본문 : 히브리서 12장 14절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기도와 설교는 다릅니다. 설교는 하나님과 모든 이웃을 향해 가지고서 설교를  합니다. 하나님을 위로 하나님을 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가지고 옆으로  형제들에게 전달합니다. 이것은 세 사람이, 세 인격이 합해 가지고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는 두 인격이 합해 가지고 합니다. 나와 하나님과 단둘이 되어  가지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고것을 알아서 언제든지 하나님만을 상대해서 그래  기도하는 것이 좋습니다. 잘못하면 기도한다는 것이 나중에 다른 사람에게  들으라 봐라 하는 그런 설교가 되기 쉽습니다. 그건 설교로는 아주 원만한  설교가 된다 할지라도 기도는 되지를 않습니다.

 또 ‘기도 하였사옵나이다’하는 것도 그것도 바로 직접 그 시간에 하는 게  아니고 거기에 좀 무슨 과거사로, 현재에 지금 기도하는 게 아니고 과거사를  지금 나타내서 말하는 것이 되는 그런 좀 먼 거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언제든지 기도는 주님하고 단둘이 서로 대화하는 것인 것을 기억하고, 또 이래  기도할 때 ‘당신’ ‘당신’ 이래 하는 것도 좀 거리감을 가져서 외식이라는  것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그 화평과 거룩에 대한 그 중요성, 없어서는 안 될  필요성이 이 두 가지가 없으면 주님을 보지 못한다. 그러면 주님을 못 보면  주님과 우리와의 관계로 이루어질 모든 건설역사는 다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 어제 아침에 말했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이 문서 계시를 읽고, 자기가 그  문서 계시를 읽고 듣고 거기에 대한 지식을 하고 그것을 바로 알고 다른  사람에게 전달합니다.

 그러면 성경에, 주님이 하신 일을 다 기록을 할라고 하면은 기록한 책을 이  세상에 둘라고 해도 세상이 모자란다, 다 두기 어렵다 하는 그 많은 것을, 많은  양을 말씀하신 것은 그것도 성령이 하신 말씀입니다. 요한이가 한 말이 아니고  성령이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거기에도 가감이나  어누리가 있는 것 아닙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말할 때에 혹 많다고 과장하기 쉽지마는 과장이 없습니다.

 그러면, 뭐 예수님께서 하신 것을 다 기록을 할라 하면은 이 신약성경, 또 구약  성경에는 예언적으로 말했고 신약 성경은 현재 된 그 현실적으로 말했고 신약  성경은 현재 된 그 현실적으로 말을 한 것인데 그러면 그 말을 어떻게 무엇이  예수님이 삼십 삼 년 사 개월 동안에 하신 일이 그렇게 복잡해서 그 양이 그렇츰  많을까 혹 그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 양은 무한하다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 것을 우리가 어데서 보느냐 하면은 문서 계시를 자기가, 읽든지 듣든지  하고 자기에게 있는 이성 또 자기에 있는 지성 자기에게 있는 모든 수양 이런 걸  가지고서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고 거기에 대한 연구를 아무리 한다고 해도 그  말씀이 우리에게 실지로 양식이 돼서, 그 말씀이 우리에게 양식이 되고 또  양식이 돼야 우리에, 이건 비유입니다. 양식이 돼야 우리에 피와 살이 됩니다.

 우리의 그 인격의 피와 살이 되고, 인격이 무슨 피와 살이 있느냐 이럴건데  그거 비유입니다. 인격의 피와 살이 되고 또 인격의 피와 살이 되어야 인격이 그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어제 아침에 비유로 말하기를, 사람이 음식을 먹으면 그 음식이 영양이  돼야 비로소 그 몸에 유익이 있는데 음식이 영양되기까지에 그 과정에는 아주  음식이 아주 세분해야, 아주 가늘게 아주 세분이 돼야 비로소 그것이 영양이  된다.

 그러면, 음식이 영양 되는 데에 그 과정과 같이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은  음식과 같은 것인데 그 말씀이 음식이라면은 그 음식이 얼마나 세분이 되어야  얼마나 더 복잡한 과정을 통과해 가지고서 세밀한 과정을 통과해 가지고 깊고  넓고 아주 세밀한 그런 과정을 통과해 가지고, 그런 과정을 통과해 가지고  비로소 인격의 영양이 된다.

 그것은 다만 자기가 그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할라고 하는 거기에서 자기가  깨달아진다.

 그러면, 실행하는 데에서 깨달아지는 그 깨달음을 아주 그 어학에 능통한  사람이 그것을 다 어학으로 언어로 발표할 수 있느냐? 인간의 말로써는 발표할  수가 없다.

 발표할 수 없기 때문에 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전하는 것이 말에 있지 않고  성령의 감동에 있기를 원한다 하는 그 말씀은 인간의 방언으로 표시할 그 정도의  것은 그 사람에 인격의 양식이 안 됩니다. 그것이 비로소 성령이 감동시키는  성령의 감동, 문서 의지가 하나님의 문서로 계시해 주시는 문서 계시가 성령  계시로 이렇게 성화되어질 때에 그때에 비로소 자기의 인격의 양식이 될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사람이 자기가 구원을 실지로 이루기 위해서 실행을 하는  가운데에 자기가 깨닫는 것이지 실행하기 전에는 뭐 ‘복잡해도 이보다 더  복잡하겠느냐’ 한 열 가지나 깨달아 가지고. 있었는데 열 면이나 깨달았는데  실지로 실행을 할라고 해 보니까 열 면이 아니고 뭐 생각지도 못한 일들과  형편과 사정들이 가득히 찼습니다. 이래 가지고서, 실컷 자기 딴에는 다 됐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가보니까 미달이 되고 또 이리저리 치우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러니까, 그것을 자기가 발견한 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가르칠라고  전할라고 하니까 어짜든지 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지면 자기의 명예적으로 일등  교수가 될라고 일등 강의를 할라 하는 그런 더러운 썩은 욕심에 붙들리지  안하고, 그런 욕심에 붙들린 자는 벌써 옛사람이 하기 때문에 이 도에는 거리가  멀어서 그 사람은 이 도를 깨달을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고 또 유익을 가질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저 어짜든지 그리스도의 그 심정화돼 가지고서 자기가 어떻게 하든지 그  상대방에게 이 도를 바로 증거해서 알려서 구원 얻게 할려고 이렇게 애를 쓰는  그 마음을 가져도 자기가 그 깨달은 것을 인간의 방언으로 표시를 못 해.

이러니까 같은 말을 자꾸 한다 말이오, 같은 말을.

 같은 말을 자꾸 해도 보면 다 인제, 하나님은 물론 알고 사람들도 또 압니다.

‘자꾸 같은 말을 권위 있는 사람들은 같은 말을 자꾸 하니까 나도 같은 말을  많이 해야 되겠다’ 앵무새 모양으로 아무 뜻 없이 그렇게 닮아 가지고서 그런  원숭이 모양으로 흉내 내느라고 자꾸 그렇게 하는 자도 있고,  그렇게 하는 자도 있는데 그자는 그런 말만 가지고 자꾸 이래 설교 한번 한  것을 두 번하고 두 번 한 걸 세 번 하고 이라면 은혜가 되고 또 그 사람이 깊이  깨달은 사람이고 아주 유력한 설교가라 이렇게 말하니 나도 그래야 되겠 다 자꾸  그라는데 그 사람의 하는 것은 한 번 들으면 두 번 들을 맛이 없고 그만  사람들이 아무런 속에 없는 거 참 그것만, 한 번 증거한 걸 자꾸 고것만  증거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자기가 행할라고 하는 데에서 깨달아짐으로서, 인간이  깨닫게 되는 게 아니고 성령이 와서 깨닫게 해 주시는 그 은밀 의지를 깨달은  그것을 자기가 인간의 방언으로 발표를 할라고 해도 발표가 다 안 되니까,  인간의 방언으로 발표한다는 것이 그저 겨우 그 강령에 흉내나 내지 안 되니까  또 그렇게 발표를 또 하고 증거를 또 하고 또 하는데 이 사람이 증거하는 사람은  자기의 깨달은 것을 증거할라고 하는데 그 증거가 잘 안 된다 그말이오.

 인간의 방언이라 하는 것이 그 허무한 것이오. 인간의 방언이라는 게 아주 뭐  몇 가지 안 됩니다.

 그 원어 아는 사람은 원어를 가지고 자랑하나 원어는 지금 말보다도 고전어라서  옛날 말이 돼서 아주 미개한 말입니다. 아주 미개한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새는 짹 하는 그거 한 마디 가지고 다 하요. 짹 하는 거 한 마디요. 한 마디  가지고 다 하는데 그거 짹 하는 그게 이 말인지 저 말인지 뭐인지 그거는 참  알기가 어려워.

새 말도 아는 사람들은 많이 경험하면 그게 저거는 뭣이 원수가 왔다 말이다.

저거는 사랑하는 말이다. 저거 워 요구하는 말이다. 뭐 요구가 만족돼서 좋아서  지금 기뻐하는 말이다. 그거 이러나 그 소리가 다만 짹짹 하는 거 그뿐이라 짹짹  하는 거. 이거 모양으로 고전어는 그런 것입니다.

 이러니까, 고전어를 가지고서 해석할 때 ‘이렇다’하는데 그 고전어를 어학을  해도 그 사람들이 아직까지 너무 지식이 좁으니까 그래 ‘이 원어는 원어에는  이렇다’ 그랄 때에 엉뚱이 같은 짓을 할 때 더러 있습니다.

 그 원어가 그러면 너는 원어에 어느 학자가 원어에 해석한 어느 학자의 사전을  네가 봤느냐 어느 학자의 사전을 보고 네가 말하느냐? 너는 김이라는 학자의  사전만 보고서 원어를 다 그래 하지만 또 박이라는 학자의 원어도 있고 또 뭐  여러 수십 명, 수십 명이 아니라 뭐 수백 명이라 할 만치 그 원어 학자가 각각  자기가 깨달은 게. 다르기 때문에 이 사전 보면 이런 해석 저런 사전 보면 저런  해석 저러니까 이러기 때문에 네가 어느 사전 보고서 깨달아 가지고서 그 성경  도리를 알라 하는 것은 틀렸다.

 성경은, 성경에 대해 성경 문서 성경을 그저 열심히 읽고 실행을 하려고 애를  쓰는 가운데에서 거기에서 자기 경험과 체험에서 성령이 깨닫게 해 주는 그  깨달음을 가질라고 애를 써야 되지 네가 암만 공부해봤자 그거는 인간에게  배우는 것뿐이기 때문에 인간에게 배워서는 안된다.

 그 성령이, 내가 전하는 것이 사람 말에 있지 안하고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에  있기를 원한다는 것은 성령이 오셔 가지고서 자기는 껍데기 이 표현만 하는, 데  표현을 통하여 성령이 역사하셔서 은밀 역사하셔 가지고서 거기에 필요한 모든  것을 듣는 자에게 깨닫게 하시고,   또, 듣는 자가 성령의 감동으로 깨닫는 그것만 다가 아니라 깨달아 가지고서  깨달으면 행하고 싶은 마음이 되고 행하고 싶은 마음이 돼가지고서 그 사람이  행할라고 할 때에는 행하고 싶을 때와 그 행해보고 난 다음에 비교해 보면  상상도 못 할 만치 그렇게 참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많이 있고 느끼지 못한  일들이 많이 있고 그런 가운데서 비로소 사람은 변화되고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이 하는 거, 또 행함도, 여기 기도하면은 언제든지 주문 기도로서  무슨 설교를 하든지 그만 설교하면 예를 들면은 노아에게 대해서나 아브라함에  대해서나 뭐 엘리야에 대해서나 고 몇 가지 그 사람 알고 있는 주문 기도  그것처럼 그것만 가지고 그만 내서 그만 고함을 지릅니다.

 고함을 지르면 다른 사람들은 그날 아침에 배운 말씀 이 말씀에 대한 면을 지금  내가 정리를 안 했고 설교 안 했기 때문에 그 면에 문제가 많이 있는데 그면.

설교를 새겨 가면서 기도할라고 하니까 다른 아는 말 그 말 가지고 그 사람 뭐  달통이 돼서 그거뿐이니까 자꾸 좔좔좔이라니까 그리 그 안 끌려가 가지고 암만  그걸 물리치고자 할라 해도 안되는 그런 수가 많다 말이오.

 그런 주문 기도 하는 사람은 암만 해 봤자 그 사람은 구원 못 이룹니다. 안  됩니다. 우리의 구원이라 하는 거는 원만하고 구비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기가 실행할라 하는 거기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예측도 못했던 것이  구 이치가 많이 구비돼 있고 고 순서가, 생해 보니까 고 순서가 거기 들었고 고  순서가 거기 들었고 고런 게 들었으니까 자기가 깨닫고서? 참 이래야 되는데  자기에 회개할 것도 생기고 소망할 것도 생기고,  그래 인제 그라고 난 다음에 자기가 깨달아져서 그 깨달은 것을 말로 할라  하니까 속에는 많이 깨달았지만 뭐 속담에 꿀 먹은 벙어리라고서, 그래 꿀을  먹고 참 맛이 달지마는 벙어리가 그거 발표할라 해야 발표할 수가 없다 말이오.

그거 모양으로 자기의 경험하고 체험한 것을 발표를 못 해.

 그러니까, 그것을 자꾸 다른 사람이 알게 할라 하니까 같은 말이라. 꼭 같은  말이면서 알게 할라 하니까 성령이 와서 역사하니까 그 설교는 한번 들어도 좋고  또 한 번 더 들으니까 더 은혜가 되고 두 번 들으니까 더 은혜가 되고,   어떤 목사는 내가 말 듣기를 삼 년이 됐는데 삼 년 내내 설교해야 한 설교만  하고 이라니까, 우리 목사님이 은혜는 어쩐지 되기는 되는데 만날 한 설교만  자꾸 하고 있으니까 다른 설교는 하지 못하니 이 목사를 갈아야 되겠다고서.

 그래 다 갈기로 작정하고서 ‘이제 목사님 여기 천상 사면을 해 주십시오.

우리가 좀 목사님을 좀 갈아서 모셔야 되겠습니다.’ 그라니까 그라면  그라라고서  그라면, 이제 마지막 설교를 하는데 ‘마지막 설교할 때에는 이제는 한번  갈판이니까 인제 쫓겨 갈 판이니까 무슨 다른 설교를 할 것이다.’ 내나 그 설교  합니다. 내나 그 설교 해,   그 설교 하면서 말하기를 ‘너희들이 말씀을 듣고 지식으로만 가져 교만만  돼지지 구원을 이루는 실행을 하지 안하기 때문에 내가 다른 설교 할 수가 없다.

이 설교밖에는 하고 갈 수밖에 없다. 너희들이 실행을 하면은 내가 딴 설교를  내가 평생 가르쳐도 새 설교를 가르칠 수 있는데 너희들이 행하지 안하기 때문에  이것도 모르니 자꾸 지식적으로 알아 가지고서 교만해질 터이기 때문에 내가  설교를 안 한다.’ 그렇게 말하더라고.

 어짠지 장 그 설교만 하기는 하는데 그래 모두 말하기를 한 설교 또 하고 또  하고 이래 가지고 단체를 모아 가지고 하나가 뭐 있어, 운동을 해 가지고 하니까  그렇다 그렇다 이래 가지고서 그만 전체가 다 그런 사람 돼 가지고 배척이  됐는데 고게 마귀라. 고 운동하는 게 마귀라. 그 운동 하는 게 그 교회에 말  잘하고 지식 있고 똑똑하고 배짱 있고 활동성 있고 사교성 있고 운동성 있고 돈  많고 권세 많고 그 자라 말이오. 그자가, 그래 성경에 야고보서에 말하기를 이  부자는 너희들을 재판소에 송사한, 다 그렇게 하지 안했느냐 이렇게 말씀했어.

 그래 가지고 그걸 실행을 할라 하니까, 실행을 할라 하니 거기에서 깨달아지는  게 있는데 그 깨달은 거 말해야 실행 안 하니까 그래, 이거 그런데 그 목사를 삼  년이나 모셨으면 벌써 배척을 당했을터인데 그 뭣인지 이상하게 은혜는 뭐  있는데 교회는 좀 조그매씩 돼나가고 은혜는 있는데 설교는 만날 그 설교만 해.

그런 말 내가 들었어요. 마지막에 갈 때도 그 설교 하고 가더라고서.

 그라면서 나중에 붙드니까 ‘나는 여기에는 이 교회는 나는 고거 하나 밖에는  해 줄 수가 없기 때문에 더 있을 필요도 없고 이제 나는 또  다른 교회 가 가지고서 잘 듣는 교회 가서 순종하는 교회 가서 하겠다’ 그래  다른 데 가 가지고 그라니까 얼마 동안 하더니만 또 다른 설교 하고 이래 가지고  그 교회가 크게 부흥이 됐는데 아주 그 참 특수한 교역자로서 특수 교역을 했다  그런 말 들었어.

 이러니까, 자꾸 그 자기 하는 사람도 한 번 설교하고 나니까 ‘두 번 하면 이거  사람들이 안 듣겠고’ 두 번 가르칠 게 뭐 있어야지? 다 가르쳤으니까. 다  가르쳤으니까 가르칠 게 없으니.

 가르쳐도 또 가르칠 게 있고 자꾸 못 알아들으니까 이 학생을 데리고서 기역자  하나를 가르치는데 그걸 못 알아들으니까 외우라 해도 외우지도 못하지  ‘기역’하면 그 다음에는 모릅니다. 또 모르니까 그 알도록까지 자꾸  외우도록까지 가르쳐야 되겠다 그말이오.

 그러니까, 그러기에 깨달음을 어제 아침에 내가 비유하기를 마치식물을 그 밤을  알밤을 먹었으면 알밤 그거 먹어 가지고서 그것이 알밤이 영양이 되는 데에는  얼마나 자잔하게 그것이 빠사지면 되느냐? 그러면, 채 이름이 뭐 백반도 있고 백  이십 반도 있고 백 사십 반도 있고 아주 이백 사십 반도 있는데 그거는 뭐 아주  뭐 여기 나오는 거는 보통 그것이 가늘다 해도 한 백 사십 반 더 이상 안 돼요.

그렇게 자잔하게 갈아지고 그렇게만 그렇게 세밀히만 세분되어지면, 나눌 분자,  세분되어지면 영양이 되느냐? 안 돼. 이거는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는 형언할  수 없는 그렇게 아주 가늘게 그것이 세분이 되어져야 비로소 영양이 된다  그말이오. 영양이 돼.

 그와 마찬가지로,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은 이것은 하나 음식과 비유컨대  마찬가지인데 이 말씀을 자기가 실행을 할라고 하는 가운데에서 거기서  깨달아지고 실행을 할라 하는 데에서 깨달아지고 깨달아져 그렇게 세밀히  깨달아져 가지고서 뭐 사람이 형언할 수 없을 만치 세밀히 깨달아져서 깨달아진  사람이 그 사람이 뭐 사도라도 그럴 것이고 아무라도 그럴 것이고 깨달아진 것을  말 할라 해도 말로 인간의 말로는 도무지 표현을 할 수가 백분의 일도 표현할  수가 없는 그런 복잡한 세밀한 깨달음을 통해 가지고서 그 사람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런데, 성경 말씀을 조금만 분석해 가지고 하면은 어떤 사람 말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을 막 도마 위에다 놓고 난도질을 해서 탁 쪼개고 쪼개고 이래  가지고 난도질을 그래 하는데 그라면 뭐이 됩니까? 성경 말씀만 쭉 이래 하면은  성령이 오셔 가지고서 그 사람에게 가르쳐서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  사람이 그런 목회를 하기 때문에 마지막에는,  뭐 저 OOO 목사님 주석을 그분이 다 출판하고 한 참 열심 있는 그런 분인데  새일 교파로 갔다고 무슨 교파로 갔다가서 많이 돌아다녔습니다. 그라면서 그때  언제 새일교파 가고 난 다음에는 이참 뭐 현저히 유익이 있다고 말은 하기  때문에 내가 그 사람에게 대해서 ‘나는 거기 안 간다. 네가 그거 큰 유혹에  들었기 때문에 회개하고 돌아와야 되지 거기 있으면 멸망 받는다.’ 이랬더니만  그 뒤에 말 들으니까 돌아와도 부끄러워 지금 나한테 오지도 안합니다.

 이러니까, 실행이라야 압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미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믿는다면 순종하는 것 아닙니까? 이미 예수님에게 순종하는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세가 내 말에 거하면’ 하는 구 말은 이제 그 말씀을  거하면 하는 것은 행하면 그 말씀대로 살면 그 사이오, ‘참 내 제자가 되고’  그라면 행하는 데서 성화된다 말이오. ‘참 내 제자가 되고 또 진리를 알지니’  성화된 것만치 진리를 아는 게 따로 알게 된다. 그러기 때문에, 기독자의 구원은  실행의 도입니다. 실행 가운데서 깨달아지지 그렇지 않으면 안 돼요.

 그 사람 말 들어보면 앵무새 말과 달라. 제가 고려신학교 다닐 때에 그때 저  어떤 사람을 하나, 지금 내가 얘기를 안 합니다. 어떤 사람 O씨라 하는 사람인데  그 사람을 데려다가서 강의를 맡겼는데 그때에 조직신학에 무슨 한 특강이던가  한 번 하는데 아주 잘해요. 막 좔좔 외우고 있어요. 하는데 그거는 걸려서  양식은 하나도 안 돼. 자기가 깨달은 속에 영감은 하나도 없어. 영감 하나도  없는데 그 사람이 돌아다니며 지금까지 살아 있으며 다니는데도 항상 그 사람은  신신학이요 그런 데에서 진리는 깨닫지 못합니다.

 이 발명가들이 발명을 할 때에 그것을 자기가 처음에는 다른 사람의 서적도  보고 이런 거 해 가지고서 논리적으로 앉아 연구합니다. 논리적으로 이렇고  저렇고 논리적 연구를 쫙 써놓고 논리 연구만 써가지고서 그것을 세간에  발표하는 자는 거짓말쟁이요. 그거 다 사람을 미혹시키는 것이오.

 논리 연구를 하고 난 다음에 그 다음에는 실행을 합니다. 그 실지로 실험을 해.

실험해 보니까 자기의 논리는 꼭 요라면 백프로 맞는데 실험해 보니까 이거는  백프로 틀렸다 그거요.

 그러니까, 실험하는 가운데에서 거기에서 이제 실지로 된 그것을 보고서 그래  하는 사람은 성공을 하고 그렇지 안하고 논리만 가지고 하는 자는 평생 해 봤자  거짓말만 실컷하고 나중에 가서 실지로 그대로 해보니까 안 맞는다 그말이오.

그러면 논리만 한 자와 실험해 가지고서 그 결과를 나타내 가지고 한 사람과  달라.

 또, 자기가 실험해 가지고 하는 그것은 꼭 실험해 가지고 그 사람이 말한 대로  문서 기록한 대로 해도 안 돼. 고대로 해도 안 되는 그 속세 비밀의 인간의  방언으로 발표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거야.

 범사가 다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앞집 사람이 장사해, 가지고 부자가  됩니다. 부자가 됐으니까, 저 사람은 부자가 됐는데 저는 장사만하면 실패를  당합니다.

 이러니까, 이제는 그 부모에게 가 말하기를 ‘내가 요번에는 실패를 안하고  우리 앞집에 돈벌이 잘하는 아주 사업 성공한 사람이 있으니까 그 사람 내가  하는 대로 꼭 한 번 할터이니까 자본을 대 주십시오.’ 자본을 대 줬다 말이오.

 대 주니까 ‘보자’ 어짜든지 그 사람만 따라 합니다. 그 사람 일어나는 시간에  일어나고 자는 시간에 자고 또 팔 때에 말하는 대로 팔고 고 사람하는 거 뭐 꼭  고 사람의 행동 전부 녹음되고 촬영된 거와 같이 그렇게 딱 했다 말이오. 그런데  안 돼.

 여러분들, 장사하는 것도 그것도 인간의 육안으로 보고 인간의 감정으로 느끼고  또 인간의 말로서 표현하고 하는 그까짓 거는 껍데기요. 그 속에 인간의 말로  표현 못 하고 인간의 감정으로 느끼지 못하고 자기가 실지로 할라고 하는 데에서  느껴지는, 그 속에 은밀 이치가 있다 말이오.

 은밀 이치 그것은 뭐이냐? 자기가 사람이 돼 가는 가운데서 그게 차차차 돼지는  거라.

 그러니까, 그뭐 경험을 많이 한 사람들은 다 아요. 저 사람 와서 돈달라 하면은  그 사람 떡 몇 마디만 들어보면 ‘아이구, 이거는 외식자이기 때문에 얼마나  망할지 모르니 이 사람 돈 대줬다가는 내가 있는 재산 다 줘봤자 성공할란지  모르기 때문에 아예 거절해야 되겠다. 안준다 합니다. 돈 없다 이랍니다. 돈이  있는데,  그 다음 사람을 돈 주면 ‘왜 나는 없다 하더니만?’ ‘너는 돈 가지고가서  실패하고 당할 사람이기 때문에 너 줄 돈은 없어. 너 줄 돈은 없어도 뒤에 온  사람 이 사람 줄 돈은 있어.’ 담대히 그래 말해요. 너줄 돈은 없어. 없다는 건  너 줄 돈은 없다 말이오. ‘왜 돈이 없어, 없기를? 너 줄 돈이 없지 왜 돈이  없어? 나 쓸 돈도 있고 사업에 성공할 사람 자본 대 줄 돈도 있지만 너 줄 돈은  없어.’ 그 박하게 말합니다. 그 잘난 사람은 그렇게 박하게 말해요.

 그라면, 그 막 막 욕을 얻어먹고 그러니까 그런 것이 다 뭐이냐 하면은 선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라. 자기가 그렇게 뭐 아주 그 사람에게 원수가 되어지고  이래도 자기 양심으로서는 그 사람에게 옳은 지도를 하고 바른 말을 해 줘야  되지 안 해 줄 수가 없다는 고런 사람 그 사람이다 인격자요. 그 사람이 세상을  지배하고 지도하는 사람인데 그런 사람은 다 양을 가진 것만치 미움받아 가지고  죽어  그러기에, 선지자들이 다 죽임 받았는데 죽이고 난 다음에 그 자손들은 뒤에  자꾸 세월이 지나가면 모든 은밀히 발표되는 것이라 말이오. 그라고 난 다음에는  비석 만들고 다 또 그 무덤을 수축하고 그랬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러니까, 여러분들이 예수 믿는 데는 듣고 깨닫는 그거야 되지 실행해서 하는  거야 되지, 실행도 말이요 여러 면이 있어. 기독교 도덕주의, 그 도덕주의도  있고 정치주의도 있고 또 뭐 유물주의도 있고 또 윤리주의도 있고 혈육주의도  있고 정실주의도 있고 별게 꽉 찼어.

 그 사람이 예수를 열심히 믿어도 정실주의를 초월하지 못하면 그거는 항상  한다는 것이 정실밖에는 못 가지고 맙니다.

 어짜든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하는 이것이 아브라함 신앙에 제일  일호다 이것을 말하는데 그걸 떠나지 못해. 그거 떠나라 한다고서 ‘정치 행정이  틀렸다. 교훈은 좋지만 행정은 틀렸다.’ 교훈은 좋다 말은 입에 다니까 입에는  단거 그것만 보고서 말했지 제가 소화할라면 ‘배에는 쓰다’ 하는 것을 그것을  그걸 실행할라 하면, 소화는 실행하는게 소화인데 실행할라 하면은 심히  어려움이 온다 그거요.

 그러니까, 그 사람은 보면 그만 알아서 저 사람은 기독교 도덕주의다. 도덕을,  도덕주의라면 뭐 기독교에나 종교마다 도덕이 없는 데 있습니까? 도덕이  있지마는 저 사람은 무엇보다도 신앙보다도 도덕위주다.

 기독교는 신앙주의요. 신앙주의라 말은 하나님 한 분을 따라서 피동되는 그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러면 기독교는 뭐이요? 기독교는 독재주의요 민주주의요?  민주주의? 독재주의야, 이걸 뻔뻔하게 내놓고 기독교는 민주주의지 독재주의가  아니라 하는 그 사람들이 알고 깨달은 것이 저 껍데기에 있기 때문에.

 기독교는 독재주의입니다. 독재주의라 말은 한 주의에 따라서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세계 사람이 다 기독교 독재주의요. 독재주의라는 것은 인간 어떤  사람에게 거기 따라서 움직일 자가 있겠소? 인간은 완전자가 없어. 완전자에게  따라 움직여야 그거 그 주의가 완전하고 실패가 없지. 한 분, 자존하신 한 분,  유일하신 한 분, 한 분이신 그 분의 뜻에 따라서 움직이는 것이 그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기독교 독재주의라, 그 사람은. 그는  가족들이 그렇게 많이 말했지마는 가족들 의사에 딿지 안했어. 하나님한 분의  뜻을 따라 가지고서 뭐 죽어도 살아도 거기에 따라 했고, 롯은 뭐 했어? 롯은  뭐입니까? 독재주의요 민주주의요? 민주주의라. 아내 말도 들어야 되고 종들  말도 들어야 되고 딸들 말도 들어야 되고  다 여러 사람 말 들어서 종합해 가지고서 그래 하기 때문에 민주주의에는  종다수 가결이 있습니다. 다수가결이 있어. 다수가결이 있어. 우리 총공회는  다수가결을 거부하고 말았어. 다수가결이 아니라. 종다수 가결이 아니고  신앙주의라.

 하나님의 뜻을 바로 찾아 가지고 그 뜻을 따라서 모든 사람에게 말해서 ‘이게  하나님의 뜻이 아니냐’ 이래 하나님의 뜻에만 순종하지 인간의 다수에 순종하지  않는 것이 우리 총공회가 처음에 출발할 새발표하고 오늘도 그와 같이 하고 있는  거라.

 이러니까, 여러분들 벌써 시간이 됐는데 이거 참 말이오. 모르지. 아는 사람은,  실행하는 사람은 그렇게 할 필요가 없어. 성경에는 명백성이 있습니다. 성경  자체 속에 내재 영감이 있기 때문에, 내재 영감이 있기 때문에 성경 보고 자기가  읽으면서 실행하는 사람은 저절로 깨달아져, 자기가 성경 읽고 실행하는  가운데서 깨달아지고 하는 그 사람의 깨달음을 천하 사람이 당하지를 못해요.

실행하는 사람 외에는 하나도 모르고 당하지도 못해요.

 이런데, 이게 아니고 자꾸 이 사람이 말한 그 말 또 듣고 연구해가지고 또  말하고 또 말해 가지고 자꾸 그 말 하니까 나중에 가서는 정반대 돌아가고 만다  말이오.

 우리가 기독교 언제 한 번 야외 예배 볼 때 가 가지고서 그거 했어. 쭉 한 줄로  쭉 두 줄로 늘어 세워 놓고서 요게다 귀에다 대고서 얘기하면서 무슨 말 똑  간단한 말이라. 간단한 말인데 무엇이 뭐 ‘계란은 소새끼다’ ‘계란은  소새끼다’ 계란은 소새끼다 하는 그걸 요 전달해라. ‘계란은 소새끼다’ 요거  ‘계란은 개새끼다’ 요거 딱 요래 귀에 대고, 말하지 마라. 귀에만 대고  말해라.

 요랬는데 나중에 가서 저게 가 보면 엉뚱한 소리 아주 엉뚱한 소리만 나와  버려. 엉뚱한 소리가 나가 버리고 만다 말이오. 그래 인간의 말 전달이라 하는  건 그런 거라. 전달은 그래.

 이거 모양으로 이 학자가 이래 하니까 또 학자 말 그 말 듣고 또 연구해 가지고  또 그라고 또 그라고 또 그라고 하니까 나중에 가서는 기독교의 정반대인  신신학이니 이단이니 이런 것들이 다,  제딴에는 ‘이거 아무 학자가 했다’ 이 말 들으면 안 들으니까 떡 원어한번  영어를 한 번 턱 해 놓고서, 영어를 한 마디 턱 해 놓고서 ‘이거 어떤 학자가  이랬다’ 또 독일어 한 마디 떡 해 놓고 또 이래 말하고 이래 가지고 사람들을  유혹을 시킵니다. 저도 죽고 남 죽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제는 양성원에 박사가 필요가 없어. 없고, 왜? 박사는 있지만  박사들 필요 없다는 건 그 사람 쫓아낼라 하는 게 아니고 어찌 됐든간에 그 박사  위주인데 박사 위주가 아니야. 이제는 성경을 가르쳐.

가르치는데, 그래 모든 학자들 세상에 학자가 이런 학자가 이래 말한다 저래  말한다 학자들이 말한 거 학자의 말을 공부하는 것이 좋던가 이제 바로 하나님이  말씀하신 성경을 공부하는 게 좋던가? 성경을 공부하는 것보다도 학자들  공부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 번 들어 봐. 성경 말씀 공부하니까  좋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들어봐. 어떤 사람은 이 들어 볼까 뭐 이라는데 어떤  사람은 막 이란다, 또, 인제 그런데 내가 엊저녁에 교학실장은 없는데 OO목사님  에게 내가 말했어. 지난번에 성경 공부한 노트 다 요번에 바치고 가요. 그라면  제가 대개 좀 훑어보고 이라겠고, 또 하나 더, 여러분들이 그 무기명으로, 이름  기록하지 말코 무기명으로 다 그거 좀 투표를 해 놔요.

 투표하는 것은, 이번에 그 성경 가르치는 사람이 몇 분이지? 다섯 분? 네 분?  네 분이라? 네 분 가르쳤으면 네 분 가르친 가운데에 두 분만 택해요. ‘누구가  성경 가르치면 좋겠다.’ 또 이다음에 또 딴 분이 가르칠 거라. 가르쳐서 누가  성경 가르치면 좋겠다. 자기가 경험해가지고 그런 사람 있으면 그 천거하는 대로  그분들을 가르쳐서 성경을 가르치도록 시킬거야.

 저 먼저께 수요일 날 밤에 저 O조사님이 설교 했는데 구원의 열여섯 가지  설교했지? 구원의 열여섯 가지를 그전에도 했지마는 OOO목사님이 와서  공부시켰다 했지? 안 그랬는가? 그랬지? 아마 그때도 좀 배웠을 것이고. 구원의  열여섯 가지 이걸 뭐 보배인 줄 알고 그렇게 말하는데 고거 하나만 바로  깨달아도, 바로 깨달아도 탈선 못 해요.

 엉뚱한 짓 못 해요. 불에 들어가면 타 죽는 줄 알고야 누가 불에 들어갈 사람이  누가 있어? 없어. 진리를 알면 안 행할 수가 없습니다. 알면 행해요. 몰라  그렇지  이러니까, 오늘 아침에 이거 뭐, 가서 인제 여러분들이 오늘 뭐 그라면 내일  아침에 있나요? 오늘 금요일이지? 금요일이니까 내일 아침까지는 있나? 내일  아침까지 아침 설교를 들을 수 있어?   그러면, 내일 아침에 내가 물을 터이니까 ‘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러면 서로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 몇몇 사람으로 더불어  이와같이 화평하는 것과 모든 사람으로 화평할라 하면 거기에서 무슨 역사가  일어나며 모든 사람으로 화평하는 것보다도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하면  어떤가?  더불어라 말은 나만 거기에서 일방적으로 화평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도 나에게  화평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지도록 하는 것이 그게 더불어입니다.

 모든 사람, 그 일방적이 아니고 ‘모든 사람’ ‘더불어’ 그런 가운데서 뭐이  죽어지는가? 그게 아니고는 구원이 이루어질 수가 없는, 그 뭐이 죽어지는가  거기 대해 좀 깊이 좀 생각해 가지고 와요. 내가 물어 볼 터이니까. 그래 가지고  뭐 하나만 물어봐서 그만 알면 그만 됐어. 그거면, 그거 하나면.

 그러기에, 내가 여기 전도사 내가 인허할 때에는 그 사람 설교에 그뭐  모자라지만 한 마디 들어보고 요거는 희망이 있다 해서 하는 것이오. 그거  뭐이냐? 그 사람의 진실을 보는 것이고 깨달음을 보는 거라. 그러면 그 사람  성공 그만 돼요.

 그래 이 뭣 위산에 가 있는 O 무슨 목사라 하는 그 사람, 군에 갔다 왔는데  그뭐 공부도 그래 하지도 안하고 하니까 뭣이 그 사람이 전도사가 돼? 아무도,  그 사람 얘기하니까 모두 비쭉거렸다 말이오. 그렇지만 그 사람 나는 설교하는  거 한 가지 보고서 됐다 하고서 그래 인물이 없으니까 택했는데 그거 일등  목회자라. 가는 곳마다 성공이라.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말씀을 듣고 자기가 참 이 하나님 말씀인 줄 알고  자기가 실행하는 그 가운데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지, 이 말씀을 제가 이 세상  자기 팔아먹을 무슨 상품 모양으로 그렇게 지식으로만 가지고 날뛰는 그 자는 제  꾀에 제가 빠져서 다 속고 맙니다.

 그러기에, 지식으로 탁 속아. 그 글씨 놓은 걸 보면 지식으로 다 속았어. 오늘  뭐 그대로 뭐 탈선돼서 제 맘대로 하기 시작하면 나중에 우습도 안한 것을  만들어 내고 말 거야.

그래서, 내가 어떤 사람 여기 O집사라 하는 사람 자기가 책을 쓰겠다고 해  가지고 책을 써 가지고 왔는데 그래 하도 기가 차서 뭐, 책 쓰기를 좋아하니까.

이 사람이 와 가지고, 내가 데려다가 놓고 첫 페이지를 ‘너 이 말을 했는데 이  말에 대해서 이런 심판이 있나 없나?’ ‘그런 심판이 있겠습니다.’ ‘그러면  너 이 심판 생각하고 했어? 이 책임지고 했어?’ 전부 일 페이지만 해도, 그  사람 하는 게 전부 자기 심판해 가지고 자기 망쳐 정죄해서, 자기 망하고 다른  이 망할 그걸 그저 명예심에서, 아무것이 책 몇 권 썼다 하는 그 명예심에서  하고 있으니까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그 사람 지금 예수 믿어요 안 믿어요? 믿기는 ale지? OOO. 권사님 알고 있지  안해요? 믿기는 믿지. 아마 지금도 책을 썼는지 몰라요. 그래 내가 못 쓰게  했어요. 한 페이지도 옳게 안 내려가고 그걸 모르고, 말이라 하는 것은 말을 말  굴레라 했어. 말을 말 굴레라 했어. 말이 제맘대로 가요 말 굴레 따라가요?  굴레와 고삐 따라가요 말이, 말망아지 말이오. 제맘대로 가요? 굴레와 고삐  따라가. 말은 굴레와 고삐 한가지라. 자기가 해 놓은 말대로 그대로 자기가  걸어가게 되는 것이라,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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