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05 01:09
성도의 목적과 소망
1989. 1. 29. 주후
본문: 요한일서 3장 1절∼3절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 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말씀을 읽을 때나 들을 때에 이 껍데기 현상 세계에서 머물지 말고 양심 깊숙이 냉정스럽게 깊이 모든 것을 정확히 생각하면서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여기 모두 박사들이 많이 있는데 이 박사들 그 지식에서는 모릅니다. 그것을 다 헤치고 들어가서 이 말씀만을 전적 믿음으로 우리들이 연구해 나가야 합니다.
왜 그런고 하니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한다 말은 이 세상 모든 지식이 우리를 알지 못한다는 말이요 세상에 모든 사람들이 알지 못한다는 말이요 또 이제까지에 있는 세상에 있는 것들이 아니기 때문에 세상은 보지도 못했고 듣지도 못했고 접하지도 못했고 또 들을 만한 자질이 세상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알려고 할 때에 세상 것을 밑천으로 삼아 가지고는 모릅니다. 세상 것을 자본으로 삼지 말고 세상은 완전히 부인해 버려 버리고 하나님이 계시해 주신 것만 전적 받고 인정하는 것으로만 알게 됩니다.
믿음으로만 알게 되는 것입니다.
1절에 끝까지,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 하는 그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도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라는, 그뭐 하늘님 다 한울님 하느님 이렇게 모두 사람들이 많이 말하고 있지마는 그것은 그들이 무엇인가 이 존재 가운데는 위대한 제일 왕되는 분이 하나 있을 것이라 하는 그것을 하나의 추론하는 것입니다.
물론 힘과 힘은 대결하는 것이고 또 존재와 존재는 대결하는 것이기 때문에 거게는 왕이 있고 통치대로 되는 것이지 같은 힘이 둘이 화합은 될 수 없는 것이 그것이 모든 물리요 논리이기 때문에 그들은 뭐인가 제일 대왕이 있지 않겠느냐 그런 생각하고 말한 것이지 그들은 하나님을 모릅니다.
유교에서도 하나님은 말했지마는 그것도 하나의 범신론의 하나님을 지적해서 말한 것입니다. 이래서 일본 사람들은 하나님을 가리켜서 그렇게 말합니다.
천어중 주신(天於中主神)이라, 이 하늘에는 제일 주인되는 그 신이 있다 해서 아마노미나가노 무시노가미라 이렇게 그들은 말을 합니다, 이런 것으로 그저 무슨 주인공이 있지 않겠느냐 하는 걸 말하는 것이지 하나님은 신구약 성경에 당신이 나는 어떤 존재라고서 우리 사람들에게 알려 주신 그 지식으로만 알지 다른 것으로는 알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데 1절은 끝까지가, 하나님 당신이 역사하셔 가지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됐다,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하는 그 말은 하나님의 자녀라 이렇게 이름을 가지도록 했다는 그런 말 아닙니다. '얻게 하셨는고' 하는 그 말은 하나님의 자녀의 이 실상이 이루어지게 하셨는고? 하나님의 자녀의 실상이 이루어지게 하셨는고 하는 말입니다.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할 수 있고 하나님의 자녀의 실력을 갖춘 그 존재가 되게 하셨는고 하는 그 말입니다. 뭐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 하나님의 자녀라 이라니까 그저 말로 하는 그런 것을 말하고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하는 그 말은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할 수 있는 그 실력 갖춘 존재가 되게 하 셨는고 하는 말입니다.
그다음에 2절은, 지금은 우리에게 계약의 하나님이요 또 아들이요 또 이 계약대로 지금 하나님의 자녀의 완성을 할라고 이렇게 역사를 하고 계시지마는 그 역사하는 것이 지극히 비밀입니다. 왜 비밀로 되는고 하니 비밀로 되는 그 이유는 이 역사가 나타나시면 그 빛으로 모든 존재가 소멸돼 버리고 유지를 못하게 됩니다. 유지를 못하게 되기 때문에 은밀히 역사해서 차차 차차 역사해 가지고서 성화가 되어지는 대로 이제 하나님이 나타나십니다.
그런 거는 비유가 안 되지마는 조그만한 이 계란에서 병아리가 부화돼 나오는 것도 그것이 그 껍지가 처음에는 병아리가 나중에는 보면 병아리가 나올라 할 때는 방해가 되는 것이지마는서도 처음에는 그 껍질 속에서 아주 뭐 노란자 횐자 그걸로 되어 있는 것이 차차 차차 그것이 변화가 돼 가지고 제법 변화가 됐습니다. 돼서 이제는 속에서 삐약 소리를 낼 수 있을 만치 변화가 돼도 그래도 제가 그것을 털치고 나오도록 그만한 실력을 기르기 전에 사람이 그것을 까 내놓으면 그만 죽습니다. 그만 부화가 완전히 안 돼서 그것이 공기 가운데 나오면 죽습니다. 그것이 완전히 이제 부화가 되면은 그다음에는 제가 껍질을 털치고 나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데 우리는 영육으로 된 것이 사람입니다. 영과 육으로 된 것이 사람인데 영은 그것이 근본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었다 하는 그것이 우리의 영입니다. 또 이 심신은 흙으로 지었다 그랬습니다.
짐승도 흙으로 짓고 우리 사람의 육체도 흙으로 짓고 또 영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 영은 이 물질의 것이 아니고 영의 세계에 있는 영물입니다.
영물이기 때문에 그는 물질로 된 것 아니고 마음과 몸은 물질로 된 것이기 때문에 사람은 영육으로 된 것으로서 마치 양서 동물같이 영계도 있을 수 있고 물질계도 있을 수 있도록 이렇게 두 가지로 되어 있는 것이 사람입니다.
이래서, 우리가 세상을 뜰 때에는 영은 하늘나라 가고 육은 심신 둘로 돼 있는 것인데 마음의 요소는 영과 함께 영계에 가고 순전히 고기 덩어리로 되어 있는 이것은 예수님 재림 때까지 기다리다가 재림이 되면 그때에 부활돼 가지고 이제 영계에 가는 것입니다.
이래서, 영은 단번에 이것이 하나님의 완전 자녀가 됐습니다. 영생을 가졌습니다.
다시는 죽지 않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내주하시고 진리가 내주하고 또 예수님의 대속이 안팎에 있어서 이는 아무도 해할 수 없는 자로 그렇게 영생하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 육이라는 것은 법적으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있지마는서도 이것이 실상으로서는 하나님의 자녀의 자격을 가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고 하니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는 영생하는 자녀인데 하나님의 자녀는 어떤 실력으로 되어 있는가 하면은 그 실력이 이 피조물의 실력으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그는 자존자 그 하나님의 요소로 실력이 돼 가지고 있는 것이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래서, 영은 그 실력으로 된 그 실력이 곧 진리로 생명을 삼았고, 성령으로 생명을 삼았고, 또 예수님의 사죄 칭의 화친의 완전 대속으로 생명을 삼았고, 영원히 하나님을 향하여 소망으로 가져 나가는 하나님을 향한 이 소망으로 생명이 돼 가지고 생겨진 것이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인데, 그러니까, 첫째 아담에게서 받은 영육의 육은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이나, 영은 완전히 하나님의 아들이 됐지마는서도 이 육이라 하는 것은 이 영이 받을 때에 하나님의 법적 대속도 받아서 법적과 하나님이 예약적으로 허락하신 이 소망적으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됐지마는서도 실질적으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는 완전자요 영원한 자요 영생하는 자인데 그것은 뭘로 가지고 되는고 하니 진리와 영감과 예수님의 대속과 영원한 소망으로 되어지는 것인데 이것은 육이 받아서 감당치를 못합니다. 육이 이 네 가지를 만나면 육이 녹아져 버립니다.
그러기 때문에 말하기를 소멸하는 불이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서서히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본질과 본성을 갖추어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본질과 본성을 갖추어 가지게 되는데 그 갖춘다는 것이 대번에 그렇게 일조일석에 쉬운 것이 아니고 상당히 시간이 걸립니다. 그 계란도 그저 이십 일이나 넘어 지내야 그것이 부화되는 것처럼 우리들도 이렇게 이 육이 하나님의 자녀로 성화되는 데는 상당히 시간이 걸립니다. 그런데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런 이름을 가졌는데 이 이름가지는 것이 거짓부리 이름이 아니고 하나님이 선포해 놓은 그 약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 이름을 가졌고 또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이 완전한 신적 요소인 이 네 요소로 살아나 가지고 이 네 요소로 된 것, 첫째 아담에게 속한 이 영육은 껍데기요 속에 알맹이는 이 네 가지가 알맹이가 돼 가지고 살아난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이 심신을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라고 한다 이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어 마음과 고기덩어리를 우리를 중생시키신 이 생명이 들어와 가지고 마음의 주격이 되고 몸의 주격이 돼서 이 마음과 몸이 모든 생각하는 것이나 원하는 것이나 또 갖추어 가지고 있는 모든 요소나 그것이 전부이 없어지지 아니할 이 영영한 요소로 속에 알맹이가 되고 이 껍데기 고기덩어리와 마음은 이것은 내나 첫째 아담에게 받은 그 고기덩어리와 마음인데 속에만 이제 완전하고 영영한 것이 내주해 가지고 이 껍데기를 주관하도록 그렇게 차차 성화돼 나가는 것입니다.
이라다가, 이재 속에 있는 알맹이는 다 영생하는 영원하고 불변하고 완전한 것이기 때문에 지능적으로도 완전하고 도덕적으로도 완전하고 하나님의 그 속성적으로도 완전한 속성을 가진 것이 이것이 되어지도록 하기 위해서 지금 노력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래서, 지금은 이런 과정에 있기 때문에 이 성화시키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 그저 천태만상으로, 어떤 것은 조그매 시작된 것, 예를 들면은 그 병아리가 부화될 때에 한 사날 지난 것은 보면은 그게 좀 알이 조금 변질이 됐고 또 며칠 또 지내면 그게 뭐 어름어름하이 계란반 피반 또 좀 며칠 있으면은 차차 변해서 피가 되고 거게는 뭣이 똑 버러지 구더기 모양으로 뭐이 생겨져서 그것이 무슨 형체를 가지고, 아직까지 꿈직이는 데 대해서는 멀었습니다. 한 보름되면 그것이 뭘 보면은 뭣이 꿈틀거리는 거 같기는 같아도 물로 이래 어름어름하이 있다가 한 십팔 일 되면은 제법 그것이 아주 새 새끼 모양으로 조그만하게 그래 가지고 차차 됩니다.
이것 모양으로 우리의 이 심신이 이 진리화되고, 영감화되고, 아주 죄를 이기는 것이 되고, 의를 고수하는 것이 되고, 또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되고, 영생하는 것이 되는 데에는 상당한 시일이 걸립니다. 그런데 이 네 가지 요소는 완전 요소이기 때문에 안 믿는 사람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 마귀가 제일 무서워하는 것은 뭘 무서워하느냐 하면은 이 네 가지 요소를 제일 무서 워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마귀들은 이 네 가지 요소로 된 사람을 제일 무서워합니다. 그만 이 사람이 그 부근에 가면은 그만 그 옛사람으로 되는 것은 발광을 합니다.
이래서 그만 원수가 되고 적이 돼 가지고서 이렇게 대항을 하고 이랍니다.
그래서, 가속도로 우리가 이 성화되는 데에는 이 네 가지 요소가 우리에게 들어오기를 우리가 원합니다. 하나님이 나와 동행하기를 원하고 들어와 계시기를 원하고 또 같이 이렇게 나를 보호해 주시기를 원하고 이라니까 하나님은 사람들이 다 청하고 있습니다. 청하고 또 떠나지 안하고 이래 같이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큰 문제가 있는 것이 무슨 문제가 있느냐 하면은 우리에게는 마음의 요소도 이 몸의 요소고 이것이 전부 정죄받아 가지고서 불의로 된 죄뭉텅이요, 죄뭉텅이요 악의 뭉텅이요 마귀의 뭉텅이기 때문에 이 네 가지가 들어오면 그런 것이 막 녹아버리고 그만 즉사됩니다.
이러기 때문에, 들어오는 데에는 살얼음 디딛듯이 우리에게 조금씩 의를 베풀어서 그것이 선화되면 성화된 그걸 디디고 고 조그매 구석에 와서 앉아서 성화시키다가 그것이 그만 갑자기 마귀의 유혹을 받아서 범죄하게 되면은 거게 있으면 그거 다 죽여 버려야 되기 때문에 빨리 나갑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동행하고자 해도 우리에게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소멸될 요소들로 바꾸어질 때는 하나님은 빨리 나가시게 되고 또 우리가 이제 회개해서 하나님의 이 중생시킨 요소와 같은 것이 되기를 원할 때에는 얼른 들어와 가지고서 같이 계시면서 역사하십니다.
이래서,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들어가서 나는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는데 문 밖에서 두드린다는 그 말은 어데서 두드린다는 말이냐 하면은 우리의 마음 밖에서 우리의 몸 밖에서 두드린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 네 가지, 진리, 영감, 예수님의 대속, 하나님을 향한 영원한 소망 이 네 가지가 합하여서 한 인격입니다. 한 신격입니다. 그 네 가지를 합하여서 하나의 우리의 대속주 예수님이라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진리시요 영감이시요 대속이시요 또 영생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러니까, 이렇게 우리 안에 들어오실라고 애를 쓰시는데 우리가 회개를 하면 들어오고 우리가 또 죄를 지으면 나가고 이렇게 하면서 신강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라 이름만 부르고 있지마는 이름만 부르고 있지마는서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만 가지고 있고 알고 있고 실상은 모르고 아주 실상에서는 거리 먼 그런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리 먼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그 사람의 성화가 적기 때문에 거리 먼 지식을 가지고 있으나마 차차 차차 자라면은 이제 거리가 가깝습니다. 가까와서 진리와 같이 동행할 수 있는 사람 영감과 같이 동행할 수 있는 사람, 예수님의 대속과 동행할 수 있는 사람이 차차 차차 돼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이렇게 이름만 부르고 있는데 오늘은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라는 이름만 가지고 알고 있는 사람도 있고 또 하나님의 자녀라는 그 실상을 조금 알고 차차 차차 알아가는 가운데서 자라가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의 그 내적 요소인 신적 요소인 그 진리와 영감과 예수님의 대속과 하늘나라를 향하는 그 소망 이 네 가지와 동행을 하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네 가지와 동행.
그러니까 그런 사람은 하늘에 소망이 아니면 땅에 소망은 하나도 없습니다. 땅에 소망은 하나도 가지지 않고 하늘에 소망만 가지게 되고 그는 아무와 동행하는 것도 좋지 안하고 하나님과 동행을 해야 재미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서 같이 거처하기 위해서 자기는 한적한 곳을 찾습니다. 마치 주님께서 제자들과 이렇게 분주한 곳을 떠나서 한적한 곳에 가셔 가지고 언제든지 아버지와 교제하고 같이 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도 그런 사람들은 사람과 같이 접하기를 접하면 좋고 그 접하면 그 사람들도 좋아하고 얼마든지 이래 할 일도 많지마는서도 자꾸 하나님과 이 동행하는 것이 더 좋고 다른 것이 거석하면 방해가 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대로는 하나님과 동행을 하고 그런 데에서 시간을 버리지 안할라고 합니다.
이래서, 그 후란시스가 그만 나중에 조금 나이가 많아지고 난 다음에는 산에 가서 은둔 생활 하고서 나오지 안해서 그 제자들이 찾아 다니면서 오랫 동안 찾아다니다가서 후란시스를 만났습니다. 만나니까 그 후란시스가 '나는 여게서 내 일을 하겠으니까 너희들이 좀 나를 용납해 두라'고 이래서 암만 나오라 해도 나오지 안하고 거게서 이제 주님하고 같이 동행하는 것이 좋고 주님하고 거게서 기도로 일하고 모든 믿음으로 일하고 기도로 일해도 할 수 있다는 것으로 그래서 암만 나오자 해도 나오지 안했습니다.
안 했는데 그때에 성 클라라라 하는 성녀가 있었는데 그 성녀가 하나님만 바라보는 아주 참 거룩한 성녀였습니다. 그 클라라가 다른 사람과 같이 가 가지고서 후란시스 선생님을 만드신 것은 하나님이 만드셨는데 자기의 구원만 이루도록 하기 위한 게 아니고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하나님이 후란시스 되게 하신 것이니까 어떻게 하나님의 목적인 그것을 버리고 자기 개인의 구원만 이루기 위해서 이렇게 있을 수가 있느냐 하는 데에서 꼼짝을 못 하고 붙들려 나왔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을 좋아하는 사람들 지금도 많이 있습니다. 또 그 사람은 뭐 죄 있는 데는 죽어도 못 삽니다. 사람들이 죄가 없으면 재미가 없어 못 사는 사람도 있지마는서도 죄 있는 데는 못 살고 죄가 있으면 번민스러워서 살지 못하고 죄가 해결이 돼야 되고 또 항상 의와 동거하고 이렇게 의와 동거하는 의로운 것이면 힘이 나지마는서도 의가 없는 데는 힘이 없는 그런 사람, 이것이 다 사람마다 심신의 성화가 각각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아주 어려서 생절이로 되어 있는 것도 있고 십분지 일이 성화된 것도 있고 십분지 오가 성화된 것도 있고 십의 한 구나 성화된 사람도 있고 이렇게 돼서, 보면 손양원 목사님 그런 이들도 성화가 많이 돼 놓으니까 그분들이 비판하는 것이나 평가하는 것이나 소원하는 것이나 희로애락 하는 것은 일반인들이 도무지 이해 못 할 그런 일들을 하고 있는 것은 그들은 신적 요소인 중생시킨 그 요소로 더불어 같은 성질화됐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이래서, 지금은 여러 층어리로 우리가 머물고 있습니다. 같은 자리 있어도 하나님께서 아주 슬기롭게 민첩하게 하셔서 그 사람으로 거리를 백 리 거리를 둬야 될 사람, 십 리 거리 둬야 될 사람, 또 한 오 리 거리 둬야 될 사람, 또 그리 좀 멀리 마주보고 있을 수 있는 사람, 이렇게 하나님께서 서로 관계를 가지기 때문에 껍데기는 보면 꼭 같이 사람 이지마는 속에 주님과의 관계는 멉니다.
그런데, 이제 이라다가 좀 있으면 그가 나타나십니다.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와 같다니? 그와 같다는 것은 누구와 같다는 말입니까? 그와 같다 했는데 그는 누굽니까? 그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는 예수님. 예수님과 같이 된다.
그러면, 예수님과 같이 되는데 예수님은 처음에 예수님이 오실 때에도 와 가지고서 삼십 년 동안 사생활 할 때에는 아주 목수 밑에서 일할 때에 목수의 제일 말단 직원 중에 직원으로서 거게서 수종들고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하나님이십니다.
사람들에게 접하기 쉽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고 그뒤에 이제 부활하시고 난 다음에는 우리와 세상 끝날까지 같이 계시지마는서도 그 사람에게 같이 있어서 그 사람에게 조그마치라도 피해가 될 수 있는 그런 정도로 같이 계시지 안하고 같이 계셔도 만만해서 아무 상관이 없을 만치 그런 정도로 같이 계시게 된 것입니다.
이라다가 사도 요한이가 밧모섬에 가 가지고 주일날 자기 뒤에서 나팔소리 갈은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자기 정반대라 그말이오. 정반대. 돌이켜 보니까 이제 금촛대가 보였고 인자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으시고 발은 빛난 주석 같고 털은 희어서 양털 같고 아주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추는 거와 같이 그렇게 비추어지는 주님으로 나타났습니다. 그 주님을 본 사도 요한이는 그만 보고서 기절을 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주님하고 가장 친근하게 지냈고 또 사도로서 제일 장수한 사람입니다. 이래서 그저 밤낮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만 사모하고 주님과 동행한 사람이니까 뭐 밧모섬에 가도 항상 주님만 생각하다가 주일날 주님을 만났는데 앞에서 만나지 못하고 뒤에서 소리 하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자기와 지금 나타나신 주님은 정반대라 말입니다.
이제까지는 자기가 주님하고 이렇게 동행하는 줄 알았는데 밧모섬에서 보니까 자기는 지금 주님과 정반대자가 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 발견해서 주님 만나고 난 다음에는 그만 기절하기까지 돼 가지고 새로 주님이 위로하시고 안수하심으로써 이제는 주님을 겨우 만나게 되고 두려워 떨면서 상대하게 됐습니다.
이래서, 주님이 좀 있으면 이제 구름타고 오실 때에는, 모든 경건치 안한 사람들과 경건한 사람이 구별이 다 되면 이 모든 것은 다 불로 사뤄서 원소로 돌아가기 위해서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질 터인데 그때에는 부득이 주님이 나타나십니다. 주님이 나타나시면 뭘로 나타나시느냐? 주님이 우리를 살리신 진리로, 영감으로 사죄로 칭의로 화친으로 하나님을 향한 영생의 소망으로 당신이 나타나시는데 이 나타나심이 깨끗하심입니다. 완전히 깨끗하심입니다.
깨끗하심이기 때문에 그 깨끗하심이 나타나니까 깨끗지 못한 것은 전부 다 소멸이 됩니다. 전부 녹아버립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바로, 불심판으로 오신다 하는 것은 주님이 이제 지금은 자꾸 이 피조물과 가루고 가루고 덮고 덮고 이래 가지고서 접촉해도 괜찮을 수 있도록 그런 정도로 이래 접하지마는서도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는 그대로, 실상 그대로, 하나님 그대로 나타나게 되기 때문에 모든 불의한 것들은 소멸하는 불이라 말씀하신 대로 그 모든 것이 소멸되어집니다.
그래서, 이제 주님이 나타나실 그때에는 이런 주님이 나타나실 때인데 우리는 지금 준비하기를 은밀한 가운데 준비하니까 준비하는 걸 모릅니다.
모르지마는서도 성경에 말하기를 두 사람이 한 밭에 일하는데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한다, 또 두 여인이 매를 갈고 있는데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한다. 이렇게 차이 있는, 하나는 멸망이요 하나는 구원인 이건 큰 차이가 있는 이 차이의 역사를 매를 갈면서 하고 있지마는서도 사람 눈에는 안 보인다 그말입니다.
그것이 뭐이냐? 이 네 가지로 화한 것들은 다 멸망에서 벗어나게 되고 화하지 안한 것들은 다 멸망하게 된다 하는 것을 말씀합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만일 그가 이렇게 멸망치 아니할 완전히 주님으로 더불어 화해자지 안하고 화해지지 안한 부분이 있었으면 그때는 데여서 거게는 살이 익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완전히 멸망하지 아니할 그 그리스도로 화해졌기 때문에 불이 근방에 침해를 못 했습니다.
노아가 흥수 때에 홍수 물이 노아에게 밀고 들어오지를 못해서 다 방어가 돼 가지고서 살았던 것은 홍수 때에 그 홍수를 들어오지 못 하도록 방어한 것이 뭐이 방어했는가? 노아 때에 노아 홍수가 뱃속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방어한 것은 다른 것은 아무것도 방어하지 못했고 주님의 말씀을 순종한 그 순종이 다 방어했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하나의 상징 계시로 우리에게 예고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 끝에 보면은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명하는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다 준행 했기 때문에 그게 안 들어왔지 준행하지 안한 것이 있으면 그 틈으로 들어왔을 것입니다.
인제 이와 같이 앞으로 불심판으로 이렇게 오는데 이 심판에서 모든 불로 멸망할 그 멸망의 불이 들어오는데 멸망의 불을 막는 것은 다른 것은 막을 수가 없고 주님의 말씀대로 한 그것이 막습니다. 막는다는 말은 주님의 말씀화된 것은 그것은 불에 타지를 아니합니다. 이러니까, 이 불에 탄 것과 타지 안하는 것이 있는데 그러면 불에 타지 안하는 것은 이것은, 타지 안한 것은 다 갑니다.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다 갑니다. 타지 안하는 것은 다 가는데 어떤 사람은 영과 심신의 형체만 가고 그 속에 기능은 다 불타서 못 가는 사람 있고 어떤 사람은 영과 육과 심신의 기능까지가 다 가는 사람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은 지금 이 준비를 하는 것이 우리들의 지금 하는 일입니다.
이래서 앞으로, 여기 이런 말씀 큰 무서운 말씀입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와 같을 줄 안다 말은 주님과 같다 말입니다.
그러면 주님과 같다 말은 아무나따나 해도 주님과 갈은 게 아니라 오늘 지금 우리가 주님과 같이 되는 것을 오늘에 우리가 마련해야 됩니다.
이래서, 그 2절까지는 이제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들이 어떤 자격을 갖춰 가지고서 하나님의 자녀로 그 즉위를 할 것이며 무궁세계에서 등장을 할 것인가 하는 그것을 여게서 말씀을 해 놨고 3절은 그러면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데에 같이 되는 그 방편은 어떠하냐 하는 그것을 가리켜서 여게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같이 자기를 깨끗게 해야 된다 이랬습니다. 그 방편은 깨끗게 하는 것입니다.
깨끗게 한다는 그 말은, 깨끗게 한다는 말은 어떻게 된다는 말입니까? 깨끗게 한다는 말은 어떻게 된다는 말인지 많이 그동안에 가르쳤는데 깨끗게 된다는 말은 뭐와 같이 된다는 말인데 뭐와 같이 몇 가지와 같이 된다는 말입니까,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이소. 예, 이 네 가지와 같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 네 가지.
네 가지가 뭐이냐? 하나는 진리요 하나는 영감이요 하나는 예수님의 세 가지 대속이요 하나는 하나님을 향한 영원한 소망인 영생입니다. 이것으로서 이 되어지는 것이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못하면 깨끗해진다 하니까 무슨 사람은 조부라운 생각으로 도덕적으로 거석해 가지고 무슨 도덕면이 깨끗해지면 깨끗해지는가 이렇게 말하는데 도덕면 그런 것은 물론 그렇지만 그런 것은 한 일부분입니다. 하나의 피상이요 껍데기요.
그 본질과 본소가 지식이 그와 같이 돼야 되고 행위가 돼야 되고 사람이 그와 같이 돼야 되는데 이제 뭐이냐? 깨끗해지는 것은 그 사람의 지식은 전부 진리라.
그 사람의 마음은 영감이라. 그 사람의 생각도 영감이라. 그 사람의 모든 취미도 영감이라. 이러니까 진리대로 영감대로 된 그것이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가 깨끗해지는 그런 일을 지금 하고 있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깨끗해지는 것을 하고 있는데 깨끗해지는 그것이 사람들에게 보여지면 이 자리도 우리는 모르지마는서도 어떤 깨끗한 한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의 깨끗한 것이 만일 그대로 나타난다고 하면 여게 있는 지금 몇천 명 되는 사람이 바짝 녹아질란지 모릅니다 바짝 녹아질란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의 그 깨끗한 사람의 깨끗이 만일 그대로 실상 그대로 여게 나타난다고 하면 그 깨끗함에 모든 더러운 것들이 다 녹아져서 하나도 없어질란지도 모릅니다. 그만한 그런 깨끗한 사람도 이 가운데 있을란지 우리가 모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왜 지금 감추어 놓고 있는가? 오늘은 성화의 단계이기 때문에 그게 나타나면 다 소멸되는고로 나타나지 못하도록, 그렇기 때문에 주님이 부활하신 것도 신인양성일위로 부활하셨지마는서도 부활하신 당신이 우리가 눈에 보이지 않는 분으로 자꾸 이와같이 역사하시고 또 가끔 가다가 나타나도 다메섹에 갈 때에 사도 바울에게 그때에 나타나셨는데 아주 사도 바울은 강퍅하고 교만하고 담대한 사람이기 때문에 당신이 잠깐 나타나서 말씀하셨는데에 사도 바울은 눈이 멀어 버렸지 완전히 그는 확 뒤벼져 버리고 말았었습니다.
이래서, 그래 지금은 이 준비를 하고 있는 기간인데 준비는 무슨 준비하고 었는가? 깨끗한 준비를 하고 있다. 깨끗하다 하는 요 말을, 깨끗하다는 요 말이 무슨 말인고 하니 완전이다 하는 그말입니다. 주의 깨끗하심같이 자기를 깨끗게 하느니라, 주님의 완전하심과 같이 자기를 완전케 하느니라.
그러면 자기의 지식도 완전하고, 판단도 완전하고, 평가도 완전하고, 계획도 완전하고, 소원도 완전하고, 모든 속성도 완전하고, 희로애락도 완전하고, 그러면 뭣이든지 더러운 것이 하나도 없는 깨끗한 것만을 좋아하고 깨끗한 것으로 채워진 그것을 가리켜서 깨끗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잘못하면 주의 깨끗하심 같이 자기를 깨끗게 한다 하면은 자기 뭐 도적질 하는 거나 회개하고 음행하는 거나 회개하고 거짓말 하는 거나 회개하고 이런 거 몇가지 하면 되는 줄 알지마는서도 이 깨끗은 그런 것 안 하는 그것도 좋지마는 그까짓 거는 아무것도 아니라. 암만 안 해도, 도적질 안 해도 아주 새카맣게 더러운 것 있습니다. 또 뭐 음행 안 해도 아주 추접하고 더러운 것 꽉 더러운 것 뭉텅이로 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니까 어짜든지 진리로 안 되는 거는 더럽습니다. 진리로, 참된 이치, 진리로, 또 성신의 감화로 안 된 것은 안 된다 그거요.
이러기 때문에 지금은 깨끗게 할 단계라, 단계인데 깨끗게 하는 것을 이것을, 지금 깨끗게 하는 것을 이것을 지금 깨끗게 하는 것을 내가 잠깐 말을 해 줘야 될란지?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이뭐 한정 없는데, 이 너무 깊고 넓어서 한정 없는데 이걸 지금 모두 다 묻어 놓고 인간들이 다 사욕을 가지고서, 좀 이것을 진리를 깨달을라코 하는 학자들은 그만 자기가 왕노릇하고 자기가 좀 명예나 영광이나 지위나, 사욕을 가지고서 이 사욕 성공을 달성하려는 데에서 다 눈이 어두워 가지고서 진리가 가루어져 가지고 있습니다. 완전히 신구약 성경이 진리가 가루어져 가지고 있어. 조금 뭣한 사람들은 그만 그것 때문에 그만 헛일되고 만다 그거요. 이러니까 이걸 말해 줘야 될란지? 자기를 깨끗게 하는 데에 대해서 그만 잠깐만 뭐 시간이 다 돼 가니까.
여러분들이 자꾸 듣고 새벽으로 나오고 이래 해야 되겠는데 실은 뭐 좀 할 수 있으면 집회 같은 것도 그만 한 몇 달을 계속해서 하면은 조금 배워지고 알아질 수가 있을 터인데 이거 뭐 찍해야 며칠 하니까 이제 세상에 꽉 붙은 걸 그걸 이렇게 들어내 가지고 하나님 진리로 가르치려니까 나흘만 지내가도 그만 구역질이 나고 나흘만 지내가고 막 불이 붙는데, 불이 붙어서 그만 딴 데 지금 볼일 있고 뭐 있고 막 이 욕심들이 막 들어 쑤시는데 그걸 강제로 붙들어 놓고 열흘만 있어 놨으면 막 죽을라 할 겁니다. 이러니까 안 된다 그거요.
그러니까, 할 수 없어 서서히 그 상대방의 정도에 따라서 이렇게 모든 성화 역사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렇게 유하게 하십니다. 이러나 아무 때 만나도 만나기는 만납니다. 아무 때 만나도 주님 구름타고 오시면 그때는 뭐 그런 것 없이, 이제 지금은 자비의 하나님이시지만 그때는 다 공정한 정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무서운 심판의 하나님으로 나타나 가지고 절단나. 그러면 그때에 안 믿는 사람 이 모든 것은 다 그때에 전부 오시는 것을 보고서 두려워 떨면서 땅에 이제 애곡이 가득 찼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깨끗게 하는 데에는, 요 자세히 들으면 여러분들이 요 속에 알맹이를 알 것이고 깨끗게 하는 것은 뭘로 깨끗게 하느냐 하면은 그러면 우리가 물로 씻어서 깨끗해야 됩니까 우리가 깨끗게 된, 깨끗게 된 거는 깨끗지 안한 것은 뭐이며 깨끗하게 된 거는 무엇입니까? 깨끗지 못한 것은 이것은 모든 죄요, 모든 죄 삐뚤어진 것. 불법으로 돼 있는 것, 깨끗해진 거는 뭐입니까? 깨끗해진 거는 우리가 속에 진리가 하나 있으면 하나 깨끗하고 백 있으면 백 깨끗하고 천 있으면 천 깨끗하고 깨끗한 거는 진리로 깨끗해진 것이고 영감으로 깨끗해진 것입니다. 영감이 그러면 영감이 내게 영감이 하나 있으면 열이 있으면 천이 있으면 만이 있으면, 또 내게 죄를 이기는 능력이 하나 있으면 둘 있으면 열 있으면 만 있으면 또 의를 건설하는 능력이 하나 있으면 둘 있으면 열 있으면 그거, 또 하나님과 동행하는 능력이 내게 얼마가 있든지 있으면 그거, 또 하늘에 소망 영생하는 소망이 내게 하나 생겼든지 둘 생겼든지 하면은 그거, 이런 것으로 우리가 깨끗해져야 되고 이것으로 장성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깨끗해지고 장성해지는데, 요게 여러분들이 알란가 몰라요. 지금 말을 해 주면 될란지? 이 교역자들이 와서 있으면, 교역자들도 참 둔해. 여기 와 있으면. 보자 조사들, 보면 OOO조사가 좀 말귀를 잘 알아듣는데. OOO조사 어데 있어, 손 들어 봐.
그라면 잘 알아 봐. 요거 알면 좀 될 건데.
요 깨끗해지는데 우리가 깨끗해지는 것은 이 네 가지로 우리가 깨끗해집니다.
그러면 네 가지로 우리가 깨끗해지는데 뭐이 깨끗해지느냐 하면은 우리 이 심신이 요 네 가지로 깨끗해집니다.
네 가지로 깨끗해지는데 요 네 가지로 깨끗해지면은 요 네 가지가 어데서 오는 것인가? 이 네 가지가 어데서 오는 것인가? 이 네 가지가 내 몸 밖에 주위 환경에서 이 네 가지가 옵니다, 환경에서. 다른 사람을 통해서도 오고 또 성경을 보니까 성경에서도 오고 이 네 가지가 옵니다.
그 올 때는 어떤 게 오느냐 하면은 자기가 현실을 만났을 때에 그 현실에 거기에 요 네 가지가 들어 있습니다. 네 가지가 진리도 들어 있고 영감도 들었고 언제든지 들어 있어요. 요 네 가지가 안 들어 있을 때가 없습니다. 요 네 가지가 다 들어 있습니다.
네 가지가 서로, 논리적으로 말하니까 네 가지지 실은 이 네 가지가 합하여 하나입니다. 진리면 영감이요 영감이면 진리요. 진리와 영감이면 죄를 이기는 것이요 진리요 영감이면 의를 능히 건설할 수 있는 것이요 의와 진리와 영감이면 그는 하나님과 내나 동행하는 것입니다.
이런데, 자기에게, 자기가 현실을 만났을 때에 그때에 자기가 신구약 성경 말씀을 생각하면서, 성경을 읽는 것은, 성경 읽는 것은 성경 암만 읽고 외워도 그게 우리 구원되는 것 아닙니다. 성경을 뭣 때문에 읽느냐? 현실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는 데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 성경을 보고서 하나님의 뜻을 찾았습니다. 진리를 찾았습니다.
그러면 진리를 찾았었는데 그 진리를 내 진리를 만들면 그 진리로 인해서 하나 만들었으니까 내가 그만치 커지는 것인데 그 진리를 내 것으로 만들라고, 그 진리면 또 영감과도 같이 있는데. 진리만 있고 영감 같이 안 있는 것도 있지마는서도 대개 진리 있으면 영감이 같이 있습니다.
옛날 바리새 교인들은 진리는 행하는데 영감은 같이 없었기 때문에 그 진리가 저희들을 멸망을 시켰지 구원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 양심 쓰지 안하는 신앙 행위는 그거는 영감은 같이 하지 않습니다. 그 외식으로 사람 속일라고 하는 것이니까 다른 사람 속지 안하고 자기가 자기 속이는 것밖에는 안 된다 그말이오.
이제, 하나님의 뜻인 고것을 자기가 깨달아질 때에 그때에 어떻게 하느냐? 행합니다. 행하면 그때 거게서 생할라고 할 때 다른 것들은 행하지 못하게 하고 달리 행하라고 뭐 친구도 달리 행하라고, 아내도 달리 행하라고, 남편도 달리 행하라고 뭐 모든 사람이 그 현실에서 하나님의 뜻인 그대로 행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게 많이 있지마는서도 그때 하나님의 뜻대로 그대로 행해 버리면은 거게 해당된 진리는 자기 것이 돼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4장에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나 먹을 양식이 있으니 너희들이 모르는 나 먹는 양식은 뭐이 나 먹는 양식인고 하니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는 것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그 현실에, 행하는 것 언제 행할 수 있습니까? 사람이 현실 밖에서 행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자기가 진리대로 행하는 것을 현실 밖에서 행할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저 우리 O장로님? 하나님의 진리 현실 밖에 행할 수 없습니까? 녜, 없습니다. 현실에서만 똑 행하지 딴 데는 행하지를 못해요.
그 현실에서 하나님의 뜻인 그 진리를 요게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의 뜻이다 아무리 자기가 외우고 뭐 외우고 또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의 뜻이다 막 강조를 하고 외우고 해도 그 현실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해야 비로소 그 진리는 자기 것 되지 행하지 안하면 그 진리는 자기 진리 안 되고 만다 말이오. 이랬는데 그만 그 현실에서 행하기는 달리 행해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알기는 알았지만 행하지 안했다 말어오. 그라면 자기의 것이 되지를 안했습니다.
그랬는데, 그러면 그 진리는, 하나님의 뜻인 그 진리는 어데서 왔습니까? 그 진리는 어데서 왔습니까? 그 진리가 어데서 왔지요? 신앙 선배가 야 네가 여게서는 이렇게 해야 된다고 신앙 선배가 가르쳐 줘서 하나님의 뜻인 진리를 깨달을 때도 있고, 깨달을 때도 있고, 또 자기가 성경 말씀을 생각하니까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지는 때도 있고, 그러면, 그 진리가 자기 신앙 선배에게서 왔든지 그리 안 하면 성경책에서 왔든지 그래 왔습니다. 와서 자기가 단행을 했습니다. 하면은 그 진리가 자기 진리가 되기 때문에 그 진리로 자기가 그만치 이제 부요해졌습니다. 하나 더 차지하니까. 하나 더 차지하니까 부요하지 안합니까? 그러면 진리도 조금 더 부요해졌고 영감도 좀 더 부요해졌고 또 하나님과 동행도 좀 더 부요해졌고 예수님의 피의 대속도 좀 부요해졌다 그말이오. 부요해졌어요.
부요해졌는데 그러면 그 진리가 신앙 선배의 지도에서 왔고 그 진리 하나님의 뜻이 성경에서 왔고 했는데 그외에는 또 다른 데서 어데서 왔느냐, 그 두 군데서만 왔습니까? 딴 데 어데서 왔습니까? 그 진리가 어데서 왔지요? 그 진리, 요것만 알진대는 요것만 알면 그만 다 파악된 거라, 요것만 알면.
그 진리가 자기 몸 밖에 신앙 선배의 지도에서 왔습니다. 또 자기가 신구약 성경을 자꾸 이렇게 궁구하니까 하나님 뜻을 바로 알아 가지고서 거게서 찾아 가지고 왔습니다. 그런데 그 진리는, 그 진리는 거게서 왔는데 그 진리는 그 두 군데서 온 진리니까 그거는 자기 것이 아니고 남에게 있는 그 진리를 자기가 취해 가지고서 자기의 진리를 삼은 것이 되겠습니다. 알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것이 아니고 그 진리가 자기 것입니다. 그 진리가 자기 것. 요걸 알아야 됩니다. 그 진리가 자기 것인데 자기 것이라니? 자기 진리라니? 자기를 중생시킨 진리입니다. 중생시킨 진리가 지금 영에게 충만해 가지고 있어서 영에서 지금 이 심신으로 이래 주사 주듯이 심신으로 밀고 들어와 가지고 이와같이 할라고 하는데 그 진리가 이 심신을 뚫고 들어갈라고 해도 이 심신이 문을 열지 안하니까 이제 현실에서 지금 요 진리가 자기 피와 살이 되고서 자기의 힘이 되는데 요 생명이 더 충만해서, 힘이 되는 것인데 이것을 줄라고 해도 마다고 하니까 이제 저 어떤 신앙 선배가 와 가지고서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줍니다.
그러면 그 뜻은, 그 뜻은 무슨 뜻이 그렇게 신앙 선배의 입으로 나한테 지도해 주고 있습니까? 그것이, 요거 알라고 말한 거라. 그것이 나를 중생시킨 그 진리가 저 다른 데, 믿는 사람에게 가 가지고서 그 사람을 통해서 지금 영접하라 하고서 운동을 하는 것입니다. 실은 나를 중생 시킨 그 진리가 지금 역사하는 운동이 거게 퍼져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또 성경을 보고서 깨달았습니다. 성경을 보고 깨달았으면 그 깨달은 진리가 뭐입니까? 깨달은 그 진리가 이제 내나 나를 중생케 한 그 진리가 성경을 통해서 나에게로 옵니다. 요것을 좀 알아야 되는데 요거 말이 좀 알아듣기는 어렵지.
이래서,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은 내가 성경보고 싶으니까 성경 보는 줄 알지마는서도 나를 중생시킨 하나님께서 이 중생시킨 진리와 영감이 내 속에 들어올라고, 몇 가지가 합해서 하나라 했습니까? 네 가지가 합해서 하나인데 곧 하나 누구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알겠습니까? 하나님이시요 사람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분이 말하기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말씀했습니다.
그 진리인데 그 진리가 나를 성경 보도록 하기 위해 가지고서 내 속에서 역사하다가 또 내 마음 속에 와서 역사를 하다가 다른 사람을 통해서 역사를 하다가 또 이제는 자기에게 그냥 안 되니까 큰 환난을 닥쳐 가지고서 해 가지고 또 역사하다가 이렇게 나를 성경을 읽도록 하기 위해서 나를 중생시킨 이 네 가지의 이 생명이 역사를 얼마나 하느냐? 우주에 충만하게 운동해 가지고 역사해서 비로소 내가 성경을 보게 된다 그말이오. 알겠습니까? 성경을 보게 되는 거. 그러나 이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그걸 예사로 압니다.
성경을 보게 되고 성경을 볼 때에 거게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아, 진리가 이렇구나. 이럴 때는 이래야 되는구나 저럴 때는 저래야 되는구나. 하는 그 진리를 깨닫게 하는 것이 뭐이냐? 나를 중생시킨 생명이 속에서 역사해 가지고 알려 줍니다.
알려 주고 이래야 된다 저래야 된다 알고 나니까 하나님이 재빨리 또 현실을 그래 만들어 가지고 그 현실을 만들어서 그 진리를 자기가 단행할 수 있는 그런 현실을 만들어 주니까 그때 '성경이 이렇게 이렇게 하라 하더라 했으니까 요때는 요렇게 해야 되겠다' 요라면 졸졸 될 터인데, 그럴 때 옆에 있는 요 간교한 놈이 악령, 악성, 악습이라는, 자기 중심이라는 요놈이 방해하기 때문에 '성경에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은 뜻인데 요럴 때는 그렇게 해야 되는데' 이라면서도 요 악령, 악성, 악습인 자기 중심의 모든 욕심 더러운 것 이런 게 들어 이래 가지고서 그 하나님의 뜻을 단행하지 못하게 하고 다른 것을 행하게 되면은 그만 하나님은 쫓겨나갑니다. 빨리 쫓겨나가.
있으면 다 죽이기 때문에.
쫓겨나가 버리고 다시 자기가 그 다음 현실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 가지고서 요와 같이 할라 할 때에 옆에서는 그저 그 하나님의 뜻대로 단행하라고 애를 쓰는데, 단행하라고 애를 쓰는데 그거는 몸 밖에서도 여러 면으로 여러 다방면으로 역사합니다. 내 몸안에서도 이런 요소 저런 요소로 다방면으로 역사를 합니다. 역사를 해가지고서 내가 그것을 단행을 하면, 단행을 하면 벌써 그 진리로 나는 자라졌고 커졌습니다.
이래서, 내가 이 알아듣기가 좀 어려울 거라 하는 그말은 뭐이냐 하면은 이제 우리가 현실에서 단행하는 깨달은 그 진리 그 진리가 우슨 진리냐? 깨달아서 요게는 요래 해야 되겠다, 요 현실에는 꼭 요 진리대로 해야 될세, 요 현실에는 요 감화대로 해야 될세, 요 현실에서는 요 죄를 이겨야 되겠네, 요 현실에서는 요 의를 행해야 되겠네, 요 현실에서는 요렇게 하나님과 동행해야 되겠네, 요렇게 하는 것이 요게 하늘나라에 영원히 저축되는 이 소망의 성공이 되겠네, 요렇게 우리 속에서 지금 생각이 나지고 이렇게 역사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됩니다.
깨닫게 되면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는 것이 그 뜻이,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는 그 뜻이 곧 그 뜻이 남의 뜻입니까 나를 중생시킨 뜻입니까? 나를 중생시킨 뜻이라는 것을 지금 내가 말할라고 하고 있습니다. 나를 중생시킨 뜻이라.
그러면 그 뜻이 활동을 하기를 어떻게 활동하고 있습니까? 그 뜻이 다른 사람을 통해서도 활동을 하고 성경을 통해서도 활동을 하고 모든 만물을 볼 때에 그 만물을 통해서도, 내가 그 만물을 보니까 갑자기 생각이 납니다. 만물을 통해서도 활동을 하고 내가 가다가서 툭 태여서 엎어져 가지고 이망을 뚝 깼습니다. 이마 깨는 것 가지고도 이제 활동을 하고 여러 수많은 그 직면으로 측면으로 다방면으로 이렇게 역사해 가지고서 그래 가지고 영접하면 내가 영이 중생된 구비한 이 네 가지 요소가 내 심신도 그 요소로 힘이 있어 가지고서 내 마음의 힘은 네 가지 힘, 몸의 힘도 네 가지 힘, 이 힘이 아니면 딴거는 가치 아던 건 줄 알고 버리고,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 네 가지 힘이 아니면 몸의 힘도 아닌 걸로 압니다. 자기 몸으로서 이 세 가지를 행할 때에 죽어도 좋다! 뭐 세계가 다 달라들어 봐라! 한다! 이렇지마는서도 요대로외 것이 아니라면은 아무리 응원이 많이 있어도 '그까짓 거 소용 없다. 언제 무너질란지 소용 없다.' 그러기 때문에 요 힘이 아닌 것은 힘으로 여기지 안하고 요 힘만을 자기 힘으로 삼아 가지고서 노리고 사는 것이 요것이 새사람이 사는 생활인 것입니다.
이래서, 고거 새사람이 먹고 자라는 것은, 우리가 살아난 것은 뭐, 우리가 살아난 것은, 살아났다 하는 건 생명인데 생명이라 말은 힘이라 말입니다 여러분들 지금 여게 독수리가 공중에 풀풀 납니다. 그 나는 것이 날개 힘입니까 생명 힘입니까? 생명의 힘이오. 생명 떨어지면 독수리도 툭 떨어져. 그만 썩어져서 그만 개미가 와서 파먹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우리에게 생명된 이 생명은 몇 가지가 합해 가지고 우리의 생명입니까? 네 가지가 합해 가지고, 우리의 생명입니다. 이 네 가지가 합해서 우리에게 하나의 그 인격 존재로 와 가지고서 우리 각 요소에서 역사하고 있는 그것이 뭐이냐? 하나님의 형상이요 우리의 원형입니다. 우리는 그에 따른 그 모형으로 우리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생명을 분석하면은 이 네 가지가 우리의 생명인데 네 가지가 합해서 하나입니다. 네 가지가 합해서 하나이니 네 가지가 한해서 하나인데 하나가 뭐입니까? 뭐 하나가 됐습니까? 콩 하나가 됐소 뭐 매주덩어리 하나가 됐소? 네 가지 합해서 하나의 생명이 됐는데 네 가지가 합해서 하나의 생명이 된 것은 그것은 뭐입니까? O집사? 뭐라 하노? 크게 해 봐. 맞은 거 같애. 그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고함 좀 질러. 그래 좀 알구로 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그러기 때문에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말씀했습니다.
이러니까, 이 네 가지가 합하여서 우리의 생명이신데 이분은 곧 예수님이시오.
예수님은 우리 안에 계셔서 그러면 예수님이 나 전체를 주관하십니다. 그러면 내 지혜는 예수님의 지혜요 내 능력은 예수님의 능력이요 이런데 그분이 우리 안에 계시는데 어찌 됩니까? 우리 안에 계시는데 아주 콩알만하게 조그만하게 계시면서 우리에게 전지 전능 완전 영감 영생 이렇게 이 모든 주권 이런 것으로서 계시는데 주먹 덩이만해 가지고 우리 속에 계시면 우리 속에 계시면 좋겠습니까 콩 내끼만하면서 이런 모든 완전 영원 불변의 것으로서 이 요소로 계시면 좋겠습니까? 주먹덩이만한 덩어리로 가지고 계시는 게 좋다는 사람, 콩내끼만한 덩어리로 가지고 계시는 게 좋다는 사람, 콩내끼만한 덩어리로 계시는 게 좋다는 사람, 이제 큰 덩어리로 계시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보십시오. 큰 덩어리로, 큰 덩어리로, 커다란 덩어리로. 그러면 거게는 저런 사람들은 그 속에 메주 덩어리만하게 들어 가지고 있으면 좋겠구만. 그래 놨으면 죽는다, 죽어. 그 속에 메주덩어리만한 게 들어 있으면 어쩔 거라? 자, 콩내끼만하게 계시면 좋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봐. 콩내끼고 먼지만한 것도 없이 진리, 영감, 예수님의 대속, 하늘의 영원한 소망 먼지만한 형체도 없이 그 생명과 능력으로만 와서 계시면 좋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봐요. 이래 계셔. 이래 계시는 주님이십니다.
이러니까, 이제 우리가 이 능력으로 자라가는 것은 이것을 우리가 깨닫고, 그러기 때문에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양식이 나에게 있으니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는 것과 그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니라 그 양식을 그래 말씀했고 또 너희들이 썩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지 말고 영원토록 썩지 않을 양식을 위해서 일하라 이거는 내가 너희들에게 줄 것이니라 그 무슨 말입니까? 그거는 내 피와 살은 참된 양식이요 참된 음료로다 말씀은 예수님의 대속을 가리켜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라고 또 그다음에 우리가 어떻게 그러면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말씀하신 것은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우리의 양식이라 그말이오. 이 양식은 고기덩어리 양식입니까 우리의 새사람의 양식입니까? 새사람 양식이라. 하나님의 형상인 하나님의 아들의 양식이라.
하나님의 아들의 양식.
그래서, 우리는 이 양식을 계속해서 먹으면은 어찌 되느냐? 주님으로 인하여 살리라. 이 양식을 먹으니까 그 힘은 뭐 힘이 됩니까? 뭘 먹었어요? 진리를 먹었지. 진리의 힘이 되니까 움직이는 건 진리의 움직임을 할 수 있는 것이지.
그러니까 주님으로 인하여 살 수밖에 없는 것이지.
그런데 제일 초두에 3장 1절에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아버지께서' 이제 아버지는 언제부터 아버지냐 하면은 우리가 벌써 중생돼 가지고 지금 아버지를 압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지금 아요.
하나님 아버지를 우리가 지금 아는데 이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라 이렇게 이제 우리 자신이 인정을 하고 또, 우리 자신이 인정을 하고 또 누가 인정하요? 하나님의 공심판에서 인정을 하고 지옥에서 인정하고 천국에 인정하고 모든 하늘의 것과 땅의 것과, 피조물들이 다 인정을 하고 하는 이것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보라' '보라'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됐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되기까지에 과정을 지금 말해서 뭐라고 말합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까지, 자녀로 이렇게 나타나서 자녀의 자격을 가지고 실력을 가지고 어데서든지 자녀로서 손색이 없는 모든 피조물들에게 상대할 때에 하나님의 자녀로 당당히 상대할 수 있는 이런 의무와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 이런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까지에 그 과정을 가리켜서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되게 하는 데에는 뭘로 가지고 자녀되게 했다 했어? 예? 뭘로 가지고 자녀되게 했어?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그라면 아버지께서 뭣을 줘 가지고서 하나님의 자녀되게 했다 했소? 사랑 줘 가지고서 자녀되게 하셨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이 사랑을 줬다. 이 사랑을 줬는데 에베소 3장 18 절로 19절에 보면은 인간의 지식을 초월한 하나님의 사랑이라, 그러기 때문에 그 넓이와 깊이와 높이와 길이를 너희들이 측량 못 한다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면 이 사랑은, 이 사랑의 깊이는 어데까지 깊습니까? 몇 길이나 깊습니까? 깊이는 깊이는 저 파묻혀 있는 그 깊이를 말하는 것이니 과거를 말하는 것이고 또 높이는 앞으로 수만 길 높이를 말하는 것이고 또 넓이는 이 퍼져나가는 것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고 길이는 영원 무궁토록 나갈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깊이는 어덴가? 깊이는 영원 자존하신 하나님으로서 하나님의 성부 성자 성령이 있는데 자존하신 하나님은 완전하신 하나님인데 이 하나님으로, 하나님으로 그리스도라는 그 하나님이십니다. 한 하나님인데 이 하나님이 그리스도라, 이 하나님이 말씀이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말씀과 그리스도가 이 한 하나님이시요 영원 자존하신 하나님이신데 그때 그리스도는 뭐이냐? 그리스도는 일할라 하는 그 직책을 말했는테 하나님의 제사장 선지 왕 이것을 만드는, 이것을 감당할 수 있는 차를 만들기 위한 그 계획적으로 이 일을 책임지고 나선 하나님이 그리스도십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는 곧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분인데 이 그리스도슨 언제부터 그리스도가 되셨는가? 영원 전 만물 하나도 창조하지 아니하고 예정도 하나도 하기 전 영원 전 하나님만이 홀로 자존해 계시는 그때에 그리스도로 계셨습니다. 그때 그리스도요 그때 말씀이십니다. 그때 그리스도로 계시고 그 말씀이 비로소 나서서 만물을 창조했고 이제 또 그리스도가 이제 사람되어서 우리에게 오셨으니 신인양성 일위이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면, 이 사랑이 얼마나 깊습니까? 또 이 사랑이 얼마나 높습니까? 영원 무궁토록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을 다 하나님 앞에 상속받아 가지고 그것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 충만케 하는 이 직책을 가지도록, 영원히 이 직책을 가지도록, 그 직책이 뭐인데? 제사장직, 제사장이라 하는 것은 창조주와 피조물 그 사이를 화합 붙여 가지고서 완전한 해결을 지우는 것이 이게 제사장입니다.
그러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피조물 그 사이를 조화 붙이는 것으로서, 선지자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충만은 언제든지 진리로 주는데 그 진리를 받은 자가 행하면 하나님 충만이 제것이 된다 말이오. 하나님의 충만을 운반해 주는 것이 선지자요.
또 하나님의 충만을 받아 가지고서 살면서 영원 무궁토록 평안하게 하는 이것이 왕의 직책입니다. 이것이 모든 통치로 단일 통치로 바로 되게 하는 거, 이거 얼마나 크고 큰지 이는 참 말할 수 없어.
그러면,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을 주셨는데 그 주신 사랑이 뭐입니까?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오. 또 성자가 우리에게 주신 사랑이오. 또 성령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이오. 그러면 성부는 뭐이냐? 성부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하는 것은 삼위일체의 이 사랑의 하나님을 우리에게 주사하는 것입니다. 이거는 몰라요, 이거는. 세상이 암만 가르쳐도 몰라요. 저거들의 논법으로나 저거들의 무슨 입법을 가지고 서는 모르는 거라. 그러기 때문에 세상이 알지 못한다. 이는 하나님을 모르고 우리도 모른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다만 하나님의 자녀가 됐다. 어떻게 됐느냐? 하나님의 무한하신 그 사랑을 우리에게 줘 가지고서 그 사랑으로 인해서 우리가 됐다.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안 줬으면 안 돼요.
또 하나님께서 그 사랑의 넓이가 얼마나 넓은가? 모든 예정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 이 사랑을 달성시키기 위해서 모든 걸 예정했어. 창조도 그거라.
이러니까 우주와 영계에 가득 찬 것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십니다.
이러니까 이 세상이 모른다 그말이오.
그러나 앞으로는 참 모양 볼 것을 인함이라. 이제 주님이 나타나시게 되면은 그때는 이제 하나님이 얼마나 크심도 알고 또 우리가 얼마나 큰 것도 알고 또 우리의 권위가 얼마나 큰 것도 알고 또 책임과 의무가 얼마나 큰 것도 알고 이거 뭐, 그러기 때문에 이걸 깨달은 자는 땅의 것을 소망으로 가지지를 안합니다. 이거 하나님의 말씀이오. 하나님 말씀 여게는 어누리가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이라. 이 말씀을 듣고 난 다음에 다른 해석을 해 봐요. 딴 해석을 할 수가 없어요. 모든 성경이 다 증거하기 때문에.
이러니까, 이 진리를 묻어 놓고 다 깨닫지 못한 것은 뭐이냐? 사욕으로 가지고서 어찌 됐든간에 하나님에게 제가 이용을 당할라고 하지 안하고 하나님을 이용을 해 먹을라 하기 때문에 전부 이것이 악이기 때문에 이 도리를 깨닫지를 못하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완전히 주님의 것이 완전히 되는 것이 주님이 완전히 내 주님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래서 바꾼다 이렇게 말했어, 바꾼다. 나는 주님의 것 되고 주님은 내것 되고, 이러기 때문에 예수님의 대속을 받은 사람은 자기나 자기 소유나 몸이나 생명이나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요 주님의 완전 대속의 완전은 나의 것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여러분들이 뭐 처음 들어 잘 모르지마는 이제 재독을 수십 번 들으면 혹 그런 가운데서 좀 비추어서 알아질 수가 있고 자기를 완전히 부인하고 나서면 성신의 감동이 오면은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알게 되는 것은 자기가 말씀을 들은 대로 단행을 하게 되면은 차차 알아지고 들어가요. 단행하게 되면은 자꾸 마음이 맑아지고 밝아져서, 그러기 때문에 어짜든지 하나님 말씀을 읽는 것과 재독하는 데에 힘을 써 가지고서 자신이 변화가 돼야 됩니다. 자신이 변화가 돼야 기도도 나오지 변화 안 된 거는, 어떤 사람은 기도하다가 뭐 죽었어요. 내가 누굴요? 오늘인가 어제인가 내가 들었는데. 기도를 뭐 사십, 오늘 낮에 들었어. 사십 일 기도 할라 하다가 사흘 빠주고 서른이레 기도하고 그만 그래 가지고서 뭐 배가 부었다 하더나 어찌 돼 가지고서 이래 거석하는데 그런 것도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하지 안하면 안 됩니다.
기도는 뭐이 기도냐? 자기하고 하나님하고 바꾸는 게 기도요. 자기의 모든 더러운 거 완전히 더러운 것을 하나님께 맡겨 버리고 하나님 완전한 것으로서 자기 것을 만들어 바꾸어 가지는 것이 이것이 기도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