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을 밝히는 법

 

1989. 6. 13. 화새벽

 

본문: 마태복음 6장 21절∼23절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우리 구원은 두 가지인 것을 모든 성경이 가르칩니다. 이래서 성경을 크게  나누어서 기본구원에 관한 성구들이 있고 또 건설구원에 관한 성구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구별하지 않고 혼돈해 놓으면 성경의 깨달음은 다 모순같이  보이고 또 전부 해석하기가 어렵습니다. 서로 상충이 돼서 맞지를 아니합니다.

 오늘까지 성경을 보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가운데 기본구원이니 건설구원 곧  행위구원 성화구원 이 두 가지로 나누는 것을 비성경적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것은 어데서 난 폐단인고 하니 성경 깨달음을 귀중히  여기지 아니한 그것이 원인입니다. 우리가 성경 깨달음은 자기가 소유와 몸과  마음과 생명을 투자할 그 길이요 또 영원 무궁한 구원을 이를 그 가르침이요 곧  길이요 이치이기 때문에 이것은 자기의 세상살이 전부보다 가치가 무한히 높고  또 자기의 이 첫째 아담에게 속한 이 모든 것을 다 투자해서 둘째 아담에게 속한  이 구원을 이루어 가는 이런 깨달음을 가지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나따나 가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의 소유 몸 마음 생명 이런 것을 다 투자할 것이니까 이보다 귀한 것인데  그것을 어떻게 '이래도 좋다. 저래도 좋다.' 이렇게 자기가 믿는 교리를 그렇게  정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모든 예수교의 이치를 가르친 것이 이것이  교리입니다. 성경입니다.

 이렇게 해서 이 귀중성을 가지고 성경을 상대해서 자기가 연구한다고 하면  거기에 대해서, 모순된 거기에 대해서 자기는 번민을 가지지 안할 수 없을  것이고, '이래 죽어야 되나 저래 죽어야 되나? 이래 살아야 되나 저래 살아야  되나?' 하는 문제인데, 어떻게 살아야 될 것도 모르고 어떻게 죽어야 될 것도  모르고 어떻게 일생을 매진할 것도 모르니 번민이 안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뭐 그거야 자기가 돈벌이 하는 것 같으면 잘못하면 돈 손해갈 것이기  때문에 그렇지마는 교리나 신조야 그거 뭐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지 그렇게 뭐  사람이 꼭 그것을 하나로 고집하려고 그렇게 할 이유가 뭐 있겠나? 신사적으로  '뭐 그래 너는 그러면 그렇고 저러면 저렇고 이렇지.' 그럴 수가 도무지 없는  것입니다. 양성원 학생들 있겠어, 그럴 수 있겠어? 그러면 가치 있게 여기지  않는 것이지.

 이라면 성경에 '이것은 사람의 행함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행 함은  상관없다.' 이렇게 말한 성구가 있으니 이걸 어떻게 해석할 것이며 '네가 구해야  얻지 구하기 전에는 얻지 못한다.' 이거 영 모순되지 않소? 구하는 것은 행함  아닙니까?  이러니까 이렇게 정 양극으로 반대가 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기본구원과  건설구원으로해서, 행함으로 말미암지 않는다는 것은 이것은 기본구원을 가리킨  말씀이고 '구하라 주실 것이요' 하는 이것은 행위구원 건설구원을 가리켜서  말씀한 것이라 이렇게 구별해야 성경 해석이 되지 그리 안 되고 뭐 성경 해석의  되겠소? 모든 교리와 신조들이 아직까지 일치를 보지 못하고 제각각 다 자기  주관대로 자기 생각대로 이렇게 복잡해지는 것은 교리와 신조의 이 중요성을  아직까지 깨닫지 못하고 또 자기가 이 성경을 써서 자기 구원을 이를라고 하지  않는 데에서 되는 것입니다.

 오늘 봉독한 말씀도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네 보물  있는 데 마음 있다고 보물을 말하고 엉뚱이 같은 마음을 여기에다 말을  했겠습니까? 또 그라고 난 다음에 또 엉뚱이 같은 눈을 말했습니다.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둡고 온 몸만 어두운 게 아니라 천지가 어둡지요. 자기 전부가  어둡다, 온 몸이 어둡다 말은 자기 전부가 어둡다 말이오. 자기 밖에 있는  전체가 다 어둡소. 또 눈이 성하면 팔도 밝고, 손도 밝고 뭐 다리도 밝고, 자기  환경 주위도 환하게 다 밝습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기 때문에 그런데 '그러므로' 해 놓고 '그러므로' '그러므로'  해 놓은 것은 육신의 눈 말을 하고 난 다음에 '그러므로' 하는 것은 그 밑에  하는 말과 연결시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육신의 눈을 말했고 빛을 말했으니까 눈도 보는 것은  빛이요 또 여기에 빛을 말했으니까 눈을, 육신의 눈을 말한 것이 아니요 보물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다고 했으니까 그 마음과 연결시키면 내나 마음의 눈을  말한 것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요 분명한 걸 확실히 잡아야 된다 말이오. 교리가  둘이면 그 사람 행위는 두 가지일 것이요,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될 것이요 행위가  두 가지면 그 사람은 이중의 사람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정확한 완전이 아니요 그거는 창기와 같이 팔방 미인의 그런 인격입니다. 교리를  단일 교리를 가지지 않는 자는 그자는 창기의 인격이요 창기의 신앙이요 창기의  행위입니다. 왜? 자기 교리와 자기 행위는 달라질 수가 없고 자기 교리와 행위와  자기라는 사람이 되어져 가는 것은 다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내가 이 행동 하고도 이거 내가 기계적으로 수단적으로  방편적으로 이 행동 하지 속으로는 이 행동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지만  행동했으면 그것이 벌써 자기가 됐기 때문에 빼내 버리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을  해치는 행동, 다른 사람을 긁어 훼방하는 그런 말을 하고 '남이야 훼방하지만  내야 나를 북돋우지' 남을 훼방한 그 훼방한 그것이 자기가 됐기 때문에 그  훼방은 자기도 훼방합니다. 요 비밀을 자기가 깨달아야 합니다.

 이런데, 그러면 여기에 '보물 있는 곳에는 네 마음도 있다.' '육체의 눈이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하는 그 빛은 네게 있는  빛이니까 뭘 말하겠습니까? 네게 있는 빛이라고 했으니까 자기에게 있는 제일  밝은 것을 말하고 옳은 것을 말하고 제일 깨끗한 것을 말했으니까 '네게 있는  빛이'했으니까 이거는 팔을 말하는 거겠소 발바닥을 말하는 거겠소 낮짜구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겠소? 귀를 말하는 것이요 코를 말하는 것이요 입을 말하는  것이요 뭘 말하는 거겠소? 네게 있는 거 무엇이 빛이 되겠어?  네게 있는 빛은 위에 마음도 말했으니까 마음이라고 할 수가 있고 마음 중에  제일 깨끗하고 옳은 빛이 뭐입니까? 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이것은 양심이  어두우면, 양심은 자기에게는 제일 옳고 바르고 참된 것을 찾는 것이  양심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찾아가는 데는 양심의 인도를 받지 안하면 못  갑니다. 또 양심이 아니면 하나님을 만나지도 못합니다.

 이러니까 여기에는 '아, 이것은 양심을 말한 것이다.'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네게 있는 제일 옳은 양심이, 양심이 어둡다 말은 제일 옳고 바른  마음 그게 그만 절단나 버렸으면 얼마나 그거 자기의 언행심사 현재 과거 미래에  대한 관찰이 얼마나 어두워지겠느냐 하는 말인데 그러면 요것은 양심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다. 그 위에는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둬라. 보물 있는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이라고 나서 그 밑에 어두운 거  밝은 것을 이렇게 말을 했으니까 이는 여기에 우리에게 중요한 우리 빛인 양심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이니 양심이 어둡고 밝아지는 것이 여기에 있다. '양심을  밝게 하는, 양심을 밝게 하는, 양심을 환하게 밝게 하는 양심을 실력 있게 하는  것이 여기에 있구나.' 하는 것을 요것을 깨달아 가져야 될터인데 말해야 지나가  버려.

 그러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이 양심의 귀중성, 자기에게는 제일 중하고  요긴한 중요성, 양심의 중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그 사람은 기본구원만  택한 자면 얻은 사람이지 건설구원은 될리가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천도  만도 넘는 거짓부리가 가득 찼는데 그 속에 내 구원이 하나가 끼어 있기 때문에  얼마나 찾아야 되고 얼마나 딱 겨눠 가지고 총을 탁 놔야 그것이 맞지  아무나따나 놔 가지고 맞아지지를 않는 것입니다.

 이런데 양심의 이렇게 중요성을 깨닫고 자기가 양심을 기를라고, 양심을 꺾지  안하려고, 양심을 더렵히지 안하려고, 이러니까 하고 싶은 말도 못하고, 왜?  하고 싶은 말 하고 난 다음에 뒤에 고쳐 버리면 되는데. 아니야. 나쁜 말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나면 그게 자기가 됐기 때문에 제 마음으로 그만 '안 하면  되지.' 벗어지지 안해. 그거는 영원히 벗지 못하는 것이오. 자기 행동이 자기  되는 것은 벗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언제 벗느냐? 세상을 떠나 하나님의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갈 때에 그때에 택자들은 벗고, 하나님이 대속으로  벗겨서 '이런 거는 못쓴다' 벗어 버리고 불신자들은 영원히 입고 있는 것입니다.

벗은 그게 뭐입니까? 그게 구원될 것이 벗지 않으면 안 될 그런 것이 된  것입니다. 그거 구원 될 것이, 그거 구원될 것인데 그걸 잘못해 가지고 벗지  안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 된 것입니다.

 이러면 오늘 지금 믿는 사람들에게 그 행동한, 행동을 하면은 정력은, 정력은  투자되어서 행동이 되고 행동은 기능을 조성하는 것인데, 기능을 조성하는  것인데 그 기능이 '범죄한 기능도 지옥 가지 않는다.' 범죄한 기능에 대해서는  말이 안 나왔습니다. '범죄한 사람이' 그래만 말했지. 범죄한 기능 그거는 지옥  갑니다. 아무리 택한 자라도 지옥 갑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육을 구원했지,  대속했지, 영육이 행동한 거기에 대해서 대속한 것은 공심판면으로 대속했지  그리스도면으로는 대속을 안 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선악간에 행함을 따라서 갚음을  받으려 함이라' 근방에 가지도 못하는 것을 이와같이 말하니까 알라고 애를 써도  알까 말까 될까 말까 하는데 이것을 아예 자기 주관 그것을 세우기 위해서  인정도 안 하면 언제 받겠습니까? 언제 가지겠습니까? 가지지 못합니다. 세월은  자꾸 지나갑니다. 참 천 년이 하루같이 지나가 버려요. 일은 안 되고. 이러니까  우리가 이 깨달음을 바로 가질라고 애를 써야 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대속은 공심판을 대속했고 사심판은 대속하지 안했습니다.

공심판에 대속받은 자들이 사심판에서 '네가 받은 대속을 어떻게 보존했으며  어떻게 네가 힘입고 살았느냐?' 하는, '하나님의 대속을 어떻게 입고 살았으며,  어떻게 가치를 평가했으며, 어떻게 귀중히 여겼으며, 어떻게 이 기본구원을 네가  관련을 가지고 행동을 했느냐?' 하는 그것을 심판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심판이라.

 이래서 거기에서는, '예수님이 대속했으면 뭐 대속은 순전 대속인데?'  '선악간에 행함을 따라서 갚음을 받으려 함이라' 이거는 성경 아닙니까?  조부라운 마음 가지고 하면 안 돼. 산을 올라가는 데에 백 메타밖에 못 올라간  사람이 천 메타 올라간 사람의 말하는 것을, 모르면 자꾸 알라고, 한 걸음  올라가 보니까 '나는 부정 했더니마는 십 메타 더 올라가니까 보이는 모든  시야가 달라지는구나. 하, 올라가니까 달라지는구나.' 올라가면 자꾸 알 터인데  아예 자기에게, '이거는 암만 봐도 보이나 봐라. 안 보이는 것을 이거 순 거짓말  아니냐?' '이 사람아. 그거 보이는 것은 네가 백 메타만 더 올라가면 보인다.'  백 메타 더 올라가 보니까 보입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 산에 올라가는 사람이  좀 올라가면 더 보이는 면적이 넓어져요 좁아져요? 그래.

 이렇게 우리의 구원이라는 것은, 이런데 자꾸 자기가 모르고 다른 것이 있으면  따라갈라고 해도 마귀가 가뜩 찼기 때문에 거기 홀켜 가지고 못 가는데, 자기가  올바른 길을 따라가고 배우고 할라 할 때에 이걸 못 가게 하는 것이 적 중에  적인 줄 알아야 됩니다. 원수 중에 원수인 것을 알아야 됩니다. 못 가구로  방해하는 자가 누굽니까? 한번 대답해 봐요. 못 가구로 방해하는 자가 누굽니까?  자기라 자기. 자기를 부인해야 돼. 자기가 뭐이 자기인데? 자기가, 기존 지식이  자기요 선입적 관념이 자기요 처음으로 들어서 배워서 그것을 자기 것을 삼으면  그게 그 지식이 다 자기 것이 됩니다. 그러면 잘 크든지 못 크든지 사람은 자꾸  갈수록이 커 집니다. 커단해지는 것이오. 그러면 멸망할 것으로 커지는 사람도  있고 옳은 것으로 커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기에 19절에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 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그러면 여기에 첫째는 양심의 중요성을 알아서 '양심은 이런 육체의 눈보다  중요하구나. 양심은 모든 행위 전체의 흥망성쇠를 지도하는 것이로구나.'  홍망이라 말은 '이거는 망한다.' 양심이 가르쳐 주고 '이라면 흥한다. 이라면  산다, 이라면 죽는다.' 이것을 총 지도하는 것이기 때문에 얼마나 중요합니까?  양심의 중요성 가치성을 아는 자가 이 양심을 바로 받아 가질라고 하는 것이지,  양심이 뭐이 양심이요? 양심이 어떤 게 양심이요? 공맹을 찾아가는 게  양심입니까? 땅위에 배암의 지식으로서 지절거리고 있는, 천하에 있는 모든  도서실에 있는 서적과 다 일치되는 것이 양심입니까? 거기에 정죄 안 받는 게  양심입니까? 아니오. 양심은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 양심입니다. 양심은  하나님에게 대한 지식과 지혜를 바로 알라고, 그만 하나님 찾아가는 게  양심이라. 하나님 만나는 게 양심이라.

 이러니까 불교인의 양심이, 불교인의 양심이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양심입니까  악심입니까? 악심이라. 양심이 아니라 악심이라. 악의 정의도 조물주 외에  피조물이나 자기나 다 그거 중심하는 것이 악이라는 이 선악의 정의는. 이걸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도 이거, 이거는 초인간적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오늘까지 떠들어도 이걸 발견 못했습니다. 이 선악을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선악, 불교에서 말하는 선악이나 유교에서 말하는 선악이나 모든 철학자들이  말하는 선악이나 그 선악이나 같은 것이지 기독교에서만 말하는 독특한 이  선악은 아니라 그 말이오.

 이랬으니까 양심의 중요성을 알아야 이것을 마련하려고 애를 쓰겠고 마련하려고  애를 쓰는 사람에게 양심 마련하는 이것을 말하면 아주 귀가 똑 뚫히는 게 깜짝  놀라며 달라들지 양심의 중요성을 모르는 사람에게야 '양심이 이래야 양심이  밝아진다, 옳아진다.' 하는 그런 말 이야 그까짓 거 들을 필요가 있어? 돈을  가치로 아는 사람이 '돈 손해간다' 하면 막 정신 바짝 차립니다. 또 돈에  유익하다면 기운을 바짝 냅니다. 가치를 거기 두기 때문에. 양심에다 가치를  두면은 '양심이 흐려진다' 하면 정신을 바짝 내 가지고 손해갈까 싶어서  야단지기고 또 '양심에 유익이 있다' 하면 달라들지 양심의 가치성을 모르고  생각지도 안하는 그자에게 뭐 그런 게 있겠소, 있기를? 양심은 서울에 있던  김현봉 목사님이 양심을 말했습니다. 그랬는데 그 밑에서 양심을 배워서 말하는  사람도, 내가 언제 서울에 청량리 교회, 처음에 교회를 세워 놓고 '이제  노방전도하자' 해 가지고 몇 사람을 소리해서 마이크를 들고 이와 같이 하는데,  그 사람하고 나하고 둘이 했어. 둘이 하는데, 그 사람은 자기가 자기 차례가  돼서 마이크를 주면 하는 것이 내치 양심 말이오. '양심을 씁시다 양심으로  행합시다. 양심을 버리지 맙시다.' 내치 양심 말만 해. 양심 말만 해요.

이러니까 이름으로는 배웠지마는, 그 뒤에 언제 그 사람이 세상을 뜰 때 나한테  어렵다고 해 가지고 좀 돈이 어려우니까 좀 빌려 달라 해. 그래 나는 그거는 그  사람 벌써 안 된 길 걷기 때문에 그거는 실패할 줄 알지마는 내게 그때 있는  것을 똘똘 힘을 기울여 가지고 돈을 빌려 줬어. 빌려 주면서, 그 사람이 뭣을  어떻게 이렇게 처리하기 때문에 '그거 목사님이 말한 그 양심으로 생각하면 그거  어찌 됩니까?' 딱 걸려서 그거는 아닌데도 그래 한다 말이오. 양심을 버리고 난  다음에 실패해요.

 그라고 난 다음에 세상 떴습니다. 뜨고 그거는 그만, 나는 아예 줄 때부터 내가  받을라고 생각지를 안했고. 이런데 우리가 양심을 이거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양심을 기르는 방편이 뭐입니까?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는 것입니다.

보물은 무엇이 보물입니까? 자기의 소유와 몸과 마음과 생명이 자기가 가진 보물  중에는 제일 보물입니다.

 그러면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말은 자기의 모든 보물을 하늘에 투자하라 그  말이오. 하늘에 투자하라 말은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멸망하지 아니할,  시공도 초월하고, 죽을 때도 죽음에서도 멸하지 안하고 하나님의 그리스도 심판  앞에 가 가지고도 걸리지 안하고, 또 천지가 불타는 불심판이 와도 걸리지  안하고, 하나님이 복 주시는 데도 걸리지 안하고 하는 그것이 하늘이라. 그게  하늘. 내가 지금 하나님 앞에서 복을 받을 수 있는 그 받는 복에, 받는 은혜에  받는 영감에 방해되는 것은 땅에 속한 것이고 하늘에 속한 것이 아니라. 이라면  그거 알 수 있을 것이라. 그런데 '네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그라면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면 보물을 하늘에 직접 옮길 수 있습니까? 보물 가지고 자기가  무슨 일을 했으면 그 일이 하늘에 가 있든지 땅에 있든지 있으니까 거기다가  투자하면은 내가 행동, 언행심사의 행동하는데 그 보물을 들여서 투자해  행동하니까 그 행동이 하늘에 가 있을 것의 행동을 투자했으면은 그것이 하늘에  가 있고 땅에 가 있을 것에 투자했으면 땅에 가서 있을 것이라 그거요.

 그러면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는 것이 네 마음을 밝게 만드는 것 이라' 이  말씀이 무슨 말씀입니까? 이 말씀은 네가 소유나 몸이나 마음이나 생명이나  이것을 하늘에 투자하는, 이것을 바로 쓰는 데에 네 양심이 밝아지지 달리는  밝아지는 길이 없다 하는 요것을 지금 말씀해 놨습니다. 이것을 네가 바로  사용하는 데에 그게 무슨 옆에 있는 물건 손으로 거머쥐고 취하듯이 그렇게 되는  줄 알아? 아니야, 이거는. 네게 있는 보물 이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 이것을  어떻게 투자 하느냐? 네게 있는 보물 이것을 투자하는 거기에 따라서 양심은  밝아 진다. 이 방법 외에 다른 방법을 성경에서 말하지 안했어. 다른 데 많이  말해도 장 이 원리에 따라서 지금 말을 했습니다.

 이러니까, 자기가 설교를 합니다. 설교를 해도 양심을 죽이는 설교도 있고 자기  양심을 살리는 설교도 있습니다. 자기 설교하는 거 설교하면 정력을 투자하는 것  아니요? 몸도 투자하고 소유도 투자하고 마음도 투자하고 자기의 생명도 그거  투자하는 것이라 말이오. 한 시간 설교 했으면 한 시간 생명을 거기에다 투자한  것이라 말이오. 투자한 것인데, 그걸 가지고 '교인들에게 인기나 끌어야  되겠으니 이래 가지고 어쨌든지 교인들에게 인기 끌어야 되겠다. 교인들이 내게  보고 참 감동을 받도록 이래 가지고 해야 되겠다.' 일시에 인간들의 인정이나  인기나 그것만 생각하고, '이 설교가 하나님이 인정 하나 안 하나? 당신이  긍정해 주나 부정해 주나? 당신이 여기에 같이 하나 안 하나?' 그런 것이 다  하늘에 투자하는 것이라 말이오. 그거 없이 하면은 일시 사람에게 인기 끌기  위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안하고 뭐 이런 것 저런 것 주 가뤄 가지고 이렇게  날뛰고 설교하면서 듣는 교인들, 교인들만 생각하지 속에 알맹이 생명인 주님은  생각도 안 하고 그분에게 삐뚤어졌거나 걸렸거나 말았거나 우선 말만 주 대  가지고 거기에 있는 사람들만 설득을 시키고 이해를 시키고 자 기에게  속해지도록 이렇게 하면 되겠다. 이것이 다 보물을 어데다가 쌓아 두는 것이요?  이것이 보물을 어데다가 쌓아 두는 것이요? 이 설교는, 이 설교에는 보물이  들었는데 보물이 투자되는 것인데 이 설교를 그래 하면은 그 사람 설교는 보물을  하늘에 쌓아 뒀소 땅에 쌓아 뒀소? 땅에 쌓아 뒀다 말이요, 땅에 쌓아 뒀어.

 이러니까 양심은 점점 어두워져. 정신차려 들어야 돼. 여기 양성원 학생들이 와  가지고 요 찍해야 와야, 참석해야 뭐 성경 가르치는 시간 그래 해야 성경  저거대로 읽는 것이고 이 새벽기도 참석하고 또 성경 시간에 약간씩 하는데도  그것만 제것을 삼으면 다른 데 가서 세계에 모든 신학 다 하는 것보다 낫습니다.

제게 필요한 것을 다 가지게 될 것이라.

 이래도 이걸 뭐 에사롭게 생각해. 옳은 거 하나 알면, 옳은 것은 하나라면 거기  옳은 것 있고 틀린 것은 억만도 넘습니다. 억만 그걸 막 뒤벼 가지고 다 알고  '이거 틀렸다' 그걸 공부하는 것보다도 옳은 것 하나 알아 놓으면은 그거 아닌  건 다 틀렸다 하면 돼 버렸소. 그렇지 않소? 이것이 중요한 요령입니다. 이 말은  제가 접촉하는 사람 가운데서 이 말 쓰는 사람을 한 사람밖에 못 봤습니다. 한  사람은 고신에 그때 가르치던 오종덕 목사님 그분 한 분이 이 말을 하는 걸  들었습니다. 다른 교수들은 이런 말을 할 줄을 몰라 안 했는지 가치를 느끼지  못해 안 했는지 하는 사람이 나는 못 들었어. 또 이 말 하는 그것을 느낄 만한  정도에 올라가지 못허고. 보면 알아. '저거는 지금. 지금 백 메타 올라가 가지고  그 시야에서 말하고 있다. 저 사람은 지금 천 메타 올라가 가지고 그 시야에서  말하고 있다. 저 사람은 내가 올라가지 못한 지금 그 이상에서 지금 보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따라 올라고 애를 쓰면서 보면은 나중에 가서 그 사람 말한 게  이해 안 됐지마는 올라가 보니까 자꾸 올라갈수록이 이해가 되더라 그거요.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어짜든지 진실돼야 돼요.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하나라도 옳게 알면 이거  알아. 인류 중에 부활을 누가 제일 먼저 알았어? 인류 중에 '부활의 도, 부활의  도리가 있다, 부활하는 일이 있다.' 하는 것을 인류 중에 누가 제일 먼저  알았습니까? 부활에 대한 지식을 누가 제일 먼저 가졌어? 아브라함이 가졌어.

그게 어데서 나왔어? 하나님 말씀을 믿으니까 모순 속에서 그게 나왔어.

 반사 선생님들은 공과를 외우고 실천해서 경험과 체험을 꼭 가질 것. 공과 몇  개 안 돼요. 일 년에 몇 개 안 되니까 어짜든지 외우고 실행 실천해야 됩니다.

하루 삼십 분 기도 자기와 자기에게 속한 것의 미래를 위해서 삼십 분 기도 이거  안 하면 앞으로 환란 닥칠 때에 아무도 이길 자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거 팔년째  지금 계속 기도하고 있고 광고한 것은, 매일 광고한 것은 아마 약 삼 년 됐을  것입니다. 얼마나 귀중한 시간인지 모릅니다. 보물을 내가 어디다가 쌓아  두는지? 보물을 어디다가 투자하는지? 나이가 허여이 늙도록 해 봤자 보물은  전부 땅에 쌓아 뒀는데 땅에 쌓아 둔다고 쌓아 둬집니까? 없어지고 비참해지지.

 보물을 땅에 쌓아 두라 하늘에 쌓아 두라 이 말에도 우리가 얼마나 기막힐  말이요, 얼마나 어려운 말이요, 얼마나 우리에게 단속을 하시는 말씀이요,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말씀이요, 우리가 얼마나 전력을 기울이도록 우리에게  깨우치는 말씀입니까?  그만 어짜든지, 양성원에 그만 나가면 달라. 양성원에 한 달 동안 있으면 조금  뭐 달라졌다가 그만 내나 한 서더 달 있다가 오면은 내나 그 꼴이라 달라진 것  다 없애 버리고 그냥 와. 그거 전부 다 제잘난 재미로 사는 통에 그래요.

배우십시오. 자꾸 회개를 합시다.

 


선지자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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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법전과 주해서 · 성경과 백영희목회설교록 김반석 2020.05.30
공지 백영희목사님의 ‘목회설교록’에 관한 교훈 모음집 선지자 2019.12.18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자료 1,2,3차 통계표 [3] 김반석 2015.12.20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1] 선지자 2015.10.19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출간 백영희목회연구소 선지자 2015.10.16
2476 양심과 양심을 구별고린도전서 13장 1절-8절/ 870517주후 선지자 2015.12.06
2475 양심대로 사는 생활/ 잠언 4장 20절-27절/ 881031월새 선지자 2015.12.06
2474 양심생활/ 사도행전 24장 15절-16절/ 870517주전 선지자 2015.12.06
2473 양심생활과 신앙생활/ 베드로전서 3장 21절-22절/ 850612수새 선지자 2015.12.06
2472 양심-성령-옥토/ 마태복음 13장 3절-9절/ 830721목새 선지자 2015.12.06
2471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 사도행전 24장 15절-16절/ 870503주새 선지자 2015.12.06
2470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 사도행전 24장 15절-16절/ 870426주새 선지자 2015.12.06
2469 양심에 거리낌 없기를 힘쓰노라/ 사도행전 24장 15절-16절/ 870422수야 선지자 2015.12.06
2468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 사도행전 24장 15절-16절/ 1987년 제 5공과 선지자 2015.12.06
2467 양심을 밝히는 법/ 마태복음 6장 19절-23절/ 890614수새 선지자 2015.12.06
» 양심을 밝히는 법/ 마태복음 6장 21절∼23절/ 890613화새 선지자 2015.12.06
2465 양심을 써 자기 진리를 찾아라/ 사도행전 12장 1절-10절/ 880401금새 선지자 2015.12.06
2464 양심을 써야 하나님을 찾아 갈수 있다/ 베드로후서 3장 8절-13절/ 881030주후 선지자 2015.12.06
2463 양심의 인도에서 영감의 인도로/ 베드로전서 3장 21절-22절/ 850607금새 선지자 2015.12.06
2462 양심의 화인/ 딤모데전서 4장 1절-5절/ 830829월새 선지자 2015.12.06
2461 양심의 화인을 맞지 아니하려면/ 디모데전서 4장 1절-5절/ 860321금야 선지자 2015.12.06
2460 양심의 힘/ 창세기 4장 1절-7절/ 820104월새 선지자 2015.12.06
2459 양심자유-진리자유-영감자유/ 갈라디아서 5장 1절-6절/ 881022토새 선지자 2015.12.06
2458 양을 기를 때 기억할 것/ 요한복음 21장 15절-22절/ 880309수새 선지자 2015.12.06
2457 양을 위하여/ 요한복음 10장 11절-15절/ 810126월새 선지자 2015.1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