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문


선지자선교회 1985년 4월 5일 금새

 

본문 : 계 3:7-13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사단의 회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않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저희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여게 간추려 가지고 몇 가지만 생각하려고 합니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아무도 능히 닫지 못하리라' 주님이 우리의  신앙의 앞길을 형통케 하시면 아무도 방해할 자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신앙의  앞길을 형통케 하시면 아무도 방해하지 못하는 것을 여게 말씀했습니다.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이 말씀은 주님이 우리의  신앙의 앞길을 형통케 하시면 아무도 방해할 자 없다 하는 이 말씀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하는 이 말씀은 아주 모든 면으로 빈약한 그  힘을 가지고도 하나님 말씀을 지키고 또, 주님의 이름을 배반치 아니했다  그랬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성경 말씀을 지키는 것이 주님 말씀을  지키는 것이요. 또, 주님의 이름을 배반치 않는 것은 주님의 이름이라는 것은  주님의 이력을 말하는 것이니까 주님이 우리를 대속하신 그 대속을 저버리지  않는 것을 가리켜서 주의 이름을 배반치 아니한다 이랬습니다.

 이런데, 여기 특별히 적은 힘 가지고 네가 지켰다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은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과 주의 대속을 입고 벗지 않는 이것은 택한 자면  누구든지 다 할 수 있다 하는 것을 여게 표현합니다. 적은 힘 가지고 지  켰으니까 많은 힘 가지고는 의례히 지킬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주의 말씀과 주의 공로를 배반치 안하고 입고 있는 것과 주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이것은 누구든지 다 택한 자면 다 지킬 수 있다 하는 그것을 여 게다가  특별히 표현하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그 능력이 아주 적은 능력을 가진 사람도  있고 능력을 많이 가진 사람도 있는데 많이 가진 사람이 지 킬 수 있는 일을  어떻게 적게 가진 사람이 지킬 수 있을까? 그것은 여게 적은 힘 가지고 지켰다  말은 많은 힘 가지고는 의례히 지킬 수 있기 때문에 많은 힘 가지고 지키지 안한  것은 말하지 안한 것입니다.

 다른 데 성경을 본다든지 우리 신앙 경험을 통해서 능력이 있는 사람이나 아주  힘이 없는 사람이나 주님이 주시는 이 건설 구원을 이루는 것은 꼭 같습니다. 왜  같은고 하니 능력이 많은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그 많은 힘을 다해야 지킬 수  있는 그런 현실을 주십니다. 또, 아주 보잘 것 없는 적은 힘을 가진 사람에게는  그 적은 힘 가지고도 다하면 지킬 수 있는 고런 현실을 주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현실을 가지고 하나님이 조절하시기 때문에 그의 뭐 선천적이나 후천적으로 가진  능력이 많고 적은 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많으면 많은 것만치 지키기 어려운  현실을 주시고, 또, 적으면 적은 것만치 적어도 지킬 수 있는, 그런 현실을  주셔서 현실을 지키기 어려운 현실. 또, 지키기 쉬운 현실 요 현실로 가지고  조절을 하시니까 자기 선천이 나 후천으로 그 능력 가진 것이 많고 적은 그것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다만 요는 다하는 거기에서만 결정은 되는 것입니다.

적은 힘을 받은 사람도 그 힘 다하면 주님의 말씀도 지킬 수 있고 또, 주님의  대속의 공로를 벗지 않고 입고 살 수 있고, 또, 많은 힘을 가진 사람도 뭐 적은  힘 가지고 지키니까 나는 많은 그 실력을 가졌으니까 내야 그 힘 적게 써도 될  것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지마는서도 선천적으로 후천적으로 많은 힘을 주님이  주신 자에게는 또, 많은 힘 그것 다해야 지키는 고런 현실을 주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비유에 닷 냥중 가지고 열 냥중 만든 사람이나 두 냥중 가지고  넉 냥중 만든 사람이나 대우도 칭찬도 영접도 꼭 같은 영접과 대우와 칭찬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누구든지 건설구원을 이루는데에는 뭐 무식해도  상관없고 유식해도 상관없고 신체가 건강해도 상관없고 병신이라도 상관없고 또,  모든 지능이 뛰어나도 상관없고 아주 못난 그런 저능자라도 상관없다. 왜?  그렇게 선천적으로 후천적으로 그것을 많게 적게 해 주신 분이 주님이시요. 또,  주실 때도 그렇게 주셨고, 또, 이 두 가지를 지키는데에도 주님께서 아야 많이  준 자에게는 많이 준 거 그거 다 해야 지키도록 고렇게 조절하시고 적게 준  자에게는 적게 준 거 고것만 다하면 또, 지킬 수 있도록 고렇게 현실을 가지고  어렵고 쉽게 조절하시기 때문에 다하는 자는 다 이길수 있고 아무리 능력이 많은  자라도 다하지 않는 자는 이 건설구원은 이루지 못 한다 그것을 여게서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세상에서 모든 면에 부한 자나 가난한 자가 그렇게 구원  이루는데는 꼭 같은데, 위험한 것은 부한 자는 교만하기 쉽고, 또, 게을하기  쉽기 때문에 이루기가 어려우니까 오히려 가난한 자가 믿음의 부요를 받았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가난한 자가 복 있다. 가난한 자가 믿음의 부요를 받았다.

부자들은 믿음의 부요함을 받은 사람들이 드물다 그렇게 말씀 했습니다.

 그러니, 여게서 다하지 안하면 안 된다. 그러면 다한 자에게는 하나님이 열린  문을 주신다. 다한 자에게는 하나님이 열린 문을 주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열린  문 주면 아무도 닫을 자 없다. 그러면 여게까지 보면은 우리의 가진 것을 다하면  아무도 방해할 자 없다. 가진 것만 다하면 건설구원은 아주 완전히 이루어 가질  수가 있다 하는 것을 여게서 볼 수 있습니다.

 또. 그러고 그 다음에 이름이라는 그런 건 다 내버려 두고, 10절에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이 시험의 때를 이기게  한다. 천하의 모든 사람들에게 임하여서 시험하는 때라. 그러면. 천하에 있는  구속 받은 성도들이라고 하면 옛날 성도나 지금 성도나 꼭 같이 그 성도들의 그  신앙 준비가 합격이라 낙제라 하는 그 최종 시험은 다 있다는 것입니다. 시험에  낙제했다, 합격됐다 하는 그 최종 시험은 당하지 않는 사람이 하나도 없고 최종  시험은 꼭 같이 다 당한다 그 말입니다. 천하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시험할  때라. 그러면 자기 신앙생활을 몇 해를 했든지 네 신앙생활이 합격이라  불합격이라, 또, 너는 백 점이라, 너는 오십 점이라 너는 십 점이라, 너는  하나도 안 맞은 영점이라 그렇게 하나님께서 그에게 최종 시험의 그 신앙 행위를  결정하는 그 시험의 때가 있다 그 말을 여게 말씀합니다.

 그런고로, 시험의 때가 있는데 이 시험의 때는 어떤 거 가지고 이길 수가  있느냐? '네가 내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이 지킨다는 것은 현실에서만 자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 말씀을 지키는 것은 현실 외에 지킬 수가 있습니까?  현실 외에는 지킬 수가 없습니다. 과거에도 못 지킵니다. 미래에도 못 지킵니다.

현재에서만 지킵니다. 현재에 지킨 것이 현재에 지킨 것이 또, 새로운 현재가  오면 오늘 지킨 것은 이제 지나가서 과거가 돼서 어제 가 되겠지요. 그러면 어제  날도 주님의 말씀을 지킨 어제 날이라 하는 것은 어제 날은 뭐 어제 날에 지킨  거 아니라 오늘이라는 그 현실에서 지킨 것이 과거가 되어지는 것이지 그 과거가  따로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현실에 실패하면 모두가 실패입니다. 그러면 현실에  오늘 현실에 실패해서 실패했으면 얼마 조그매만 지나가면 그만 어제 실패한  사람입니다. 또, 오늘 또, 현재를 실패했으면 또, 좀 지나가면 또, 어제 실패한  날입니다. 그러면 어제도 실패한 사람. 아래도 실패한 사람. 그 전전날도 실패한  사람, 그 전전전날도 실패한 사람. 이러니까 우리의 승리와 실패 이것은 현실에  매였다 하는 요것을 우리에게 못박아 줍니다.

 천하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이렇게 하든지 저렇게 하든지 한 그  신앙생활에 그 최종 검사가 있고 최종 판정이 있다. 판정이 있는데 그 판정되는  그 판정에 내가 시험의 때를 면케 한다 말은 시험을 안 당하게 한다는 말이  아니고 시험에 통과하게 하겠다 그 말입니다. 시험에 통과하게 하겠다, 그러면  시험에 통과하면 그 사람은 백 점으로 통과한 사람, 그 사람은 백 점 미만의  그러면 구십 구 점이라도 백 점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시험에  떨어졌습니다. 구십 구 점은 맞았지마는서도 한 점이 떨어졌다 말이오. 그  사람은 시험에 한 점 떨어진 사람, 저 사람은 시험에 열 점 떨어진 사람. 저  사람은 시험에 스물 점 떨어진 사람, 저 사람은 시험에 구십 구절 떨어진 사람,  저 사람은 시험에 백 점 다 떨어진 사람, 어쨌든지 시험의 때를 면케 한다 말은  시험에 통과하게 한다 그 말인데, 시험에 통과하게 한다 말은 백 점 맞아  가지고서 만 점으로 통과하게 한다 그 말씀입니다.

 그러면, 만 점으로 통과하게 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내 인내의 말을  지키는데에 거게 있다. 그러면. 주님의 인내의 말씀을 언제 지킬 수 있는가?  현실에 지킬 수 있습니다. 현실 외에는 지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요  현실에 요 현실에 주님의 피공로를 요 현실에 벗나 입나? 요 현실에 주님의  말씀을 지키나 안 지키나?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주님의 피공로를 입고  사는 것이요 주님의 피공로를 입고 사는 사람은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요 두 가지는 한 가지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내 인내의 말을 지켰다 요  말씀으로만 표시를 했습니다.

 그런고로. 오늘 아침에 증거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그 현실을 닥친 요 현실,  요 현실에서 요 현실에서 주님의 대속의 공로를 벗으면 나는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패전자 됩니다. 내가 요 현실에서 주님의 말씀을 어기면 나는 하나님의  심판에서 걸리고 면하지 못합니다.

 그 시험을, 시험의 때를 면한다 말은 시험에 걸리지 않는다 그 말이오. 이 말이  지금 말이 꺼꾸로 말이 돼 놨어. 시험에 걸리지 않는다. 시험에 걸렸다 그 말은  모두 다 시험에 합격되면 걸렸다 이라는데, 여기 내가 하는 말은 정반대요.

시험은 마치 이 망과 같이 딱 이래 얽어놨는데 이 얽어놨는데 이 망에 만일 이  구멍이 백인데 백에 다 통과해야 될 건데 아혼 아홉 개는 들어가 통과해  버렸지마는서도 한 개는 딱 걸려 가지고 있다 말이오. 통과 못 했어. 이와  마찬가지로 시험의 때를 면케 한다 그 말은 시험을 안 본다 말이 아니고 그  시험이 너에게는 시험 되지 안했다. 시험에 다 통과했다 그 말입니다. 시험을  다. 시험이라 하는 건 방해물인데 방해물을 다 통과해 건너갔다. 시험에 걸렸다  하는 그 말은 그 말은 틀린 말이고 시험에 걸렸다고 하는 그 말은 그거 틀린  말이라. 시험이라 하는 것은 모두 장애물입니다. 장애물 그 걸 시험이라 하는데,  장애물에 걸렸으면 그거는 낙제라 그 말이오. 그런데 시험에 걸렸다 이렇게 모두  다 말하는데. 시험에 합격이라 말은 할 수 있지 마는 걸렸다 말은 그 좀 잘못된  말이라.

 우리는 앞으로 천하 사람이 다 시험을 하나님 앞에서 시험을 받을 터인데,  하나님 앞에서 심판 받는다 그 말이오.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을 터인데 그  심판 받는 고 심판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내 현실에 있다. 현실에서 주님의  대속의 공로를 입고 벗지 않는 거 그것이 뭐이냐? 그것이 주의 말씀을 지키고  어기지 않는 것입니다. 어기지 않고 지키는 것. 그러면 요 우리가 요 현실에서  주의 말씀 지킨다는 거, 주의 말씀 지키는 거, 또 주님의 대속의 공로를 입는  거, 고만 주의 말씀 지키면 대속의 공로 입은 것이요 대속의 공로를 입으면  주님의 말씀 지킨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지켜야 대속의 공로를 입지 대속의  공로를 입을려면 주의 말씀을 지키지 이러니까 둘이 아니라 하나 말이라. 내 말,  주님의 말씀만 요 현실에서 지키면 됩니다. 요 현실에서 주의 말씀을 내가  지키면 앞으로 하나님이 시험하시는 그 시험에 다 통과가 되고 현실에 지키지  못하면 그 시험에 그만 떨어져 버립니다. 그만 거게 걸려서 그거는 못  들어갑니다. 들어가지 못한다 말이오.

 우리 이 심신의 기능이, 예를 들면 백이든지 천이든지 있는데 이것이 현실에서  말씀을 지키면 고 기능은 그만 하나님의 심판을 통과해 가지고서 무궁세계로  들어가 버립니다. 그거는 영생합니다. 그러나 내가 요 현실에서 말씀을 지키지  못하게 되면 못한 고 현실에 소속한 내 심신의 기능의 요소는 그만 고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고 딱 걸려 버립니다. 딱 걸려 버리면 고거는 그만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영 유황불 구렁텅이를 가야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이 둘째  사망이라.

그러기에. 우리가 요 현실. 내가 닥친 요 현실에 말씀을 지키지 못하는 요것이  하나님의 심판에 걸리는 것이요, 요 때에 내가 지키면 하나님의 심판을 통과하는  것이라.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요 현실을 만났을 때에 요 현실에 하나님 말씀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통과하는 것이고 지키지 못하면 하나님의 심판에  걸린다는 요거 통과하면 고거는 영생이 됐고 살았고 영원히 살았고 영생이 됐고  요 지키지 못하면 심판에 걸려서 영원히 멸망이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요 현실에서 말씀을 지킴으로 영생이 됐고 말씀을  지키지 못함으로 영원히 멸망이 됐기 때문에 요 영원한 사망이냐 영생이냐  요것이 우리 현실에 해당된 하나님의 말씀 지키고 안 지키는 요것이 결정이 되기  때문에 요것을 알면 누가 어떻게 뭐 좋은 일이라도 어떻게 재미있는 일이라도  어떻게 그 원하는 것이라도 어떻게 두려운 것이라도 고 말씀 어겨 가지고서  자기가 영원히 멸망이라 하는 것은 받지 안할 것이지마는서도 현실에 말씀을  지키면 영생이고 어기면 영원한 멸망이라 하는 요것을 고게 요 현실에 영생과  멸망이라는 영생과 멸망이라는 요것을 고 현실에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에 따라서 한테 다 딱 들어 붙여 놓지 안하고 요걸 떼어놔 버리기  때문에 그만 그때 사람이 잊어버리고 실패하는 것입니다. 요거 현실에 내가  말씀을 지키면 영생, 또, 어기면 영원한 사망. 그러면 요 현실에 말씀 지키는  것이 고게 영생이요 고 어기는 것이 고것이 사망이라. 영원한 둘째 사망이라.

 그러면. 요 현실에서 말씀 지키는 것이 영생, 어기는 것이 사망, 요것이 요것이  고 현실에서 내가 사망하느냐 영생하느냐? 사망이냐 영생이냐? 요것인 것을  우리가 기억하고서 우리는 요게다가 죽을힘을 다 쓰지 요렇게 생각하고 죽을  힘을 다 쓰는 사람은 아무리 연약한 힘이라도 다 통과합니다. 이러기 때문에,  나는 뭐 무식하다, 나는 또, 본야 선천적으로 둔하다 어리석다, 미련하다, 또,  아무 신체의 건강이 없다. 그런 것 아무 핑계 못 합니다. 뭐 건강이 아무리  없어서 누운뱅이라도 상관없고, 또, 아무리 천하에 제일 장사의 힘을 가진  사람이라도 뭐 더 유익할거 없고, 아무리 천하에 제일 많은 학문을 가진  사람이라도 더 좋을 것 없고, 천하에 제일 무식한 사람이라도 뭐 모지랄 것 없고  이러니까 자기가 선천적으로냐 후천적으로 신체적으로나 지능적으로나  총명적으로나 그런 거 많고 적고 이것이 건설구원 이루는데는 조금도 상관이  없다 하는 요것을 확정 지웁시다.

 모든 성경이 다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두 냥중 가진 사람은 암만 해봤자  넉 냥중 밖에 안 되는데 닷 냥중 받은 사람은 가만히 놀고 있어도 닷 냥중  아닙니까? 그렇지마는 닷 냥중짜리는 열 냥중을 만들어야 되고 두 냥중짜리는 넛  냥중을 만들어야 되는데 넉 냥중 만든 사람도 칭찬하고 환영하고 주님이 상을  주었고 닷 냥중 되는 그 사람도 만알 아홉 냥 봤으면 그 사람 떨어졌다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신앙생활에는 자기에게 선천적으로 후천적으로 받은 은혜의  많고 적은 것이 상관없고 다하는데 요 있다. 다하는데 요 구원은 승리 실패가  있다. 다하면 승리하고 백분지 구십 구 했으면 백분지 일은 실패했고 백분지 오  했으면 백분지 구십 오는 실패했고 이러니까 꼭 자기 고 적은 거 상관없고  다하는 요것이 표준이기 때문에 다한 데에서 다한 데에서 얼마가 빠졌느냐  얼마가 빠졌느냐 고것 가지고서 구원은 결정된다 하는 요것을 우리가 명심해서  가져야 되겠고, 이러니까 우리는 뭐 낙망할 거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아이구, 그 다른 사람은 그렇게 승리하기가 쉽고  회개하기가 쉬운데 다른 사람은 회개하기가 척척 쉬운데 나같이 회개하기가  어려운 사람이 없다고. 나는 회개를 암만 할라 해도 안 된다고서. 저 사람은  회개하기가 쉬운데 나는 회개하기가 어렵다 그게 망령된 소리입니다. 회개하기가  어려운 사람 없고 쉬운 사람 없습니다. 꼭 다하면 되지 다 안 하면 안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무것이는 뭐 유식하니까 쉽지마는서도 나같은 거는 글자 한  자, 한글 한 자도 모르니까 그게 상관없습니다.

오늘 아침에 그거는 완전히 해결을 지웁시다. 자기의 모든 면에 부족하거나 제일  인간 중에 아주 모지라는 사람이나 인간 중에 제일 상등된 사람이나 상등된  사람이라고 우쭐하면 저는 속습니다. 아무리 제일 못난 사람이라도 낙망하면  그것도 속습니다. 아무리 모자라도 아무리 잘나도 상관없어. 그거는 행한 대로  갚는데, 하나님께서 그 자본을 주신 분이 자본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요 현실을  만들어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자본 많이 준 자에게 많은 자본 다해야  되도록 고 현실을 만들어 주시고 자본 적게 준 자에게는 작은 자본 고거라도  다만 하면 통과하도록 현실을 만들어 줬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 그거요.

 그런고로 요것을 기억하여 우리의 죽느냐 사느냐? 앞으로 지금 공산주의의  독침이 오고 뭐 공산주의에게 고문과 고형이 오고 하는데 고문과 고형 이기고  지는 그거는 고문과 고형 그거는 시험의 때인데 그거는 시험인데 그 시험은,  요게 보면 말이요 시험의 때를 내가 면케 한다 했는데, 시험은 시험은 제가  이기지 못합니다. 시험의 때를 내가 면케 한다 그 말은 시험은 주님이 이겨  주신다 말이오. 시험은 주님이 이겨 주시는데. 우리 생활에는 시험 당하는 고  시험이 있고 또, 시럼 준비의 때가 있고 요 기회가 있습니다. 준비는 내가  준비하면 되고 시험은 내가 이기지 못해. 하나님이 이기게 해 주셔야 돼.

하나님이 이기게 해 주지 안하면 안 돼. 그러니까 준비 내가 하는데 따라서  당신이 그 시험을 이기게 해 주시기 때문에 내 시험 준비하는 요 현실에 고만  영원 장래가 결정되어 있다.

 그러기 때문에, 독침 앞에서 내가 승리하는 것도 요 현실, 오늘 요 현실 요게  달렸다. 또, 내가 공산주의의 고문 고형을 당할 때에 고문 고형을 이기려면 내가  의지가 있어야 되고 뭐 훌륭한 결심을 해야 되고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고문  고형을 이기는 것도 내가 요 현실에서 말씀 지키면 고문 고형을 이길 수 있고  현실에서 말씀 지키지 안하면 제가 아무리 강한 의지자라도 아무리 독하고 모진  사람이라도 아무 소용이 없어. 나는 독하기 때문에 그때 고운 고형할 때 견딜  수가 있지 않겠느냐? 나는 의지가 강하기 때문에 견딜 수가 있지 않겠느냐? 나는  좀 간이 커서 담대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때 이길 수가 있지 않겠느냐? 그거 다  소용없는 말입니다. 꼭 앞으로 독침 앞에서나 장기간의 고문 고형 앞에서나 또,  여러 가지 마귀의 온갖 시험 앞에서나 모든 시험을 통과하는 것은 내가 요  현실의 말씀 지킬 수 있을 때에 내가 지킬 수 있을 때에 내가 고 말씀 지키면  됩니다.

 사람이 지킬 수 있는 그건데 다 예사로 여겨 가지고 안 지키며 못 지키는  것이지. 지킬라면 못 지키지 않을 건데 지킨다는 그것을 힘만 쓰면 지키는데  예사롭게 생각해 가지고 장난삼아 안 지킵니다. 장난삼아 안 지키지 자기가  참으로 지킬라고 힘을 쓰면은 못 지킬 시험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게 다  준비요. 자기가 지킬라고 하면 못 지킬 사람도 하나도 없이 다 지킬 수 있는  고게 시험입니다. 시험 준비요. 자기가 지킬라면 지킬 수 있고 그걸 예사롭게  여겨서 버리기 때문에 못 지키지 누구든지 지킬라면 다 지킬 수 있는 고것이  시험의 준비입니다. 그러면 고 준비 잘 해 놓으면 사람이 지킬래야 지킬 수 없는  참 하나님이 시험하는 때, 하나님이 저울로 다는 때. 천하 모든 사람들이 다  시험 받는 때, 결정지우는 때 그때는 하나님이 면케 한다, 그때는 하나님이 다  통과케 해 주신다. 시험을 이 기게 하신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앞으로 고문과 고형이나 또, 앞으로 인간이 다 과거에도  6,25 때도 그 일본 정권 아래에 있는 일본 나라나 조선 나라에 믿는 사람들이  그렇츰 많았지마는서도 그 시험을 닥칠 때에 그 시험을 이긴 사람이 많지를  못했습니다. 많지를 못했어. 많지 못하고 그때 다 낙제 돼 버렸어. 낙제됐는데  그 뒤에 또, 시작했지. 시작했지마는서도 그때 낙제되고 나니까 낙제인 줄도  모르지마는서도 가보면 그때는 낙제됐기 때문에 그 때까지 끝을 맺은 구원은 다  결정돼져 버렸고 그 후에 또, 지금 있는데 앞으로 또, 그런 시험이 있을 거라  말이오.

 그러니까. 고문과 고형의 시험이라든지 또, 공산주의의 독침의 시험이라든지  또, 여러 가지 위협을 주고 뭐 탄압을 하고 표범 같고 곰 같고 사자 같은 그런  맹수가 와 가지고서 그래 말했어. 맹수 같은 그런 위협의 시험이 있을 때 그  시험을 이시는 거, 또, 고문과 고형의 그 참 고문 고형 그걸 이기기가 어려  워요. 아픈 거 말이지오. 나는 아픈 걸 못 이겨요. 아픈 걸 못 이겨서 앞으로  고문과 고형하면 어찌 될까 이런데 내가 왜정 때에 이긴 시험은 보면은 이기기는  잘 이겼는데 다른 사람 뭐 감옥에 가 두드려 맞고 이랬는데 나는 두드려 맞지도  안하고 큰소리만 뻥뻥하고 이래도 한번 맞지도 안하고 그거 다 시험 이겼는데  이제 앞으로는 맞는 시험이 올런지 모르는데 맞는 시험 오면 이거 어떨고? 아픈  걸 견디지를 못해요. 이런데 이거 어찌 되노? 이런데 그 고문과 고형에서 고형의  시험에 통과할 자가 누구냐? 또. 그런 모든 미혹이 많은 미혹 시험에 통과할  자가 누구냐? 이런 협박, 저런 협박이 있는데 그 협박에서 통과할 자가 누구냐?  독침 앞에서 통과할 자가 누구냐? 장기간 사람을 시달리게 죽이는 장기간의  고문과 고형 시험에서 통과할 자가 누구냐? 그 시험의 통과는 시험의 통과는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힘만 쓰면 아무리 약한 자든지 강한 자든지 자기가 힘만  쓰면 다 지킬 수 있는 고거 지키는 거기에서 준비가 되는 것이지 다른 데서  준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가 이길 수 없는 시험. 하나님 말씀을 지킬 수 없는 그  어려운 때 그건 시험인데, 지킬 수 없는 그 때에 자기가 지킬라고 애쓰지 말고,  또, 견디지 못할 때 견딜라고 애쓰지 말고 견디지 못할 때에 견딜라고 애써 봤자  못 견딥니다. 또, 하나님 말씀을 지키지 못할 때에 지킬 라고 애써 봐야 못  지킵니다. 이러니까 그만 지킬 수 있을 때에 지킬 수 있을 때에 자기가 힘을 써  가지고 그걸 예사롭게 여기지 말고 지킬 수 있을 때에 힘을 써 가지고 다 지키면  나중에 내가 지킬 수 없을 때에 다 지켜 주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것만 빠지지 안하고 다 하면 당신이 우리 힘으로 할 수 없는 것  그만 당신이 다해 주십니다.

 이런데, 우리가 할 수 있는 그것을 왜 안 하느냐? 할 수 있는 그걸 하면 되는데  할 수 있는 그것을 예사로 여겨서 안 하고 장난삼아 여겨서 안하고 저는 놀면서  취미 삼아 안하고 이렇게 한다 말이오. 우리가 그 무슨 참 할라면 할 수 있는데,  할 수 있는 것을 자기가 너무 예사롭게 여기고 힘을 들이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못 지켜진다 그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내가 현실을 당할 때에 요 뭣을 시험을  이길라 하니까 고 시험 이긴다는 것이 그 이기려면 이기는데 취미삼아 장난삼아  또, 그까짓 거 조그만한 뭐 돈 욕심 직위 욕심 아무것도 아닌데 그런 거  예사로운 거 또, 습성으로 습관 때문에 습관대로 이래 하는 거 그것이 자꾸 모여  가지고서 나중에 시험에 낙제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악령이 우리에게 적이요. 또, 악성이 적인데 또, 악습이  적이오. 악령 악성 악습이 적인데 악성이라 하는 것은 자기중심이라 말이요,  악령이라 말하는 거는 사탄을 말하는 것, 악습이라는 것은 자기의 버릇이라  말입니다. 요 세 가지 적인데 요 세 가지 적 가운데에 요 세 가지 적 가운데에  사람들이 어느 원수에게 제일 많이 떨어집니까? 어느 원수에게 제일 많이  떨어지는지 내가 물을 때 한번 대답해 보십시오. 그러면 사탄의 사탄에게  떨어지는 것이 많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들어 보십시오. 안 들어. 그러면  자기중심에 그 시험에 떨어지는 사람이 많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들어 보십시오.

또, 자기의 버릇에 자기 버르쟁이 자기 구습. 악습. 자기 버릇에 시험에  떨어지는 사람이 많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들어 보십시오. 이거 중심이 많고 이게  좀 적은데, 아니요 마지막이오, 네? 마지막. 자기 버릇, 자기 버릇 고것에게,  자기 버릇 습성인데 자기 습성 고것에게 떨어지는, 뭐 습성 어제 하던 거 오늘  하고 요 습성 요놈에게 미혹 받는 것이 고게 약하기는 제일 약한 건데 고놈에게  미혹 받아 가지고 시험에 떨어지는 것이 제일 많습니다.

 이래서, 그때 그 OOO 목사님이 거창 와서 도사경회 할 때에 그때 그렇게  물었습니다. 자, 과수원에 사과나무를 사과나무를 강도가 거두를 가지고서  벱니까? 또, 도적이 와 가지고서 이런 무슨 낫으로나 뭐 찍어서 없애 버립니까?  도적이 거두 가지고 벱니까, 낫으로 와서 벱니까, 소스락 벌거지가 과수원에  사과나무를 벱니까? 뭐이 벱니까 이래 묻습디다. 뭐이 됩니까? 어? 소스락 벌레,  소스락 벌레 그-놈이 들어서 과수원에 있는 과수나무 과수원에 있는 능금  사과나무는 전부 다 그 소스락 벌레 그놈이 다 베어 내 버리지 딴 게 베어 내  버리는 거 없어. 그 놈이 다 베어 냈어. 이 비유를 하면서, 말하기를 소스락 죄,  여러 분들이 큰 죄는 큰 죄 그놈이 상하는 줄 알아도 그게 아니고 소스락 죄.

제가 그 죄를 예사롭게 여기는 고 죄, 예사롭게 여기는 고 죄가 들어서 우리를  다 망칩니다. 하는 고 말을 합디다.

 그러면, 예사로 여기는 소스락 벌거지, 소스락 죄. 부스러기 죄. 소스락 죄,  조그만한 소스락 죄 그놈이 들어서 우리를 다 망치는데 소스락 죄는 어데서  나옵니까? 사탄에서 나옵니까? 그 악성에서 나옵니까? 악습에서 나 습니까?  악습에서 나옵니다. 이거는 악습에서 나옵니다. 악습 그놈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릅니다. 악습 그 놈이. 그러기 때문에, 요 현실을 우리는 죽느냐 사느냐 하는  것은 현실에 결정 됩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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