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와 자기를 구별

 

1987. 2. 4. 새벽 (수)

 

본문:고린도후서 5장 8절∼10절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이 세상에는 믿는 사람보다 안 믿는 사람의 수가 많습니다. 또 믿는 사람 가운데도 안 믿는 사람과 생활은 꼭 같은 성질과 양식으로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무슨 말인고 하니 모두가 참 자기인 자기의 주격이 되는 영을 죽인 원수는 악령이요 악령의 유혹을 받아 가지고 사람이 악성으로 변질시킴을 받은 그것이 원죄요 악습으로 행동하는 그것이 그 모든 악령 악성의 소행인 것입니다.

이것은 다 참 자기를 죽인 자기 아닌 원수, 가장해 가지고 자기로 나타나고 있는 이 원수, 참 자체의 자기인 주격인 영을 죽인 원수 그것을 다 자기로 인정하고 사는 것이 불신자는 전부고, 한 사람도 없이 다 전부고 믿는 신자 중에도 그런 사람의 수가 뭐 몇이라고 할 수는 없지마는 다대수요 거의 다 그렇다 이렇게 볼 수 있는 숫자입니다.

이렇게 전부 일생 동안 알뜰히 빈틈없이 전심 전력 기울여 가지고 사는 것이 자기를 죽인 원수, 자기 아닌 자기 그놈이 자기인 줄로 이렇게 착각하고 유혹받아 가지고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모든 이종교는 다 이것이 자기인 줄 알고 열심히 자기 생활을 시킵니다. 세상에 철학 쳐놓고 이것이 주격이 되어 있지 않는 게 없고 이종교들도 이것이 주격되어 있지 않는 것이 없고, 모든 불신자들 뭐 전부는 다 이놈이 다 제가 돼 가지고, 자기가 돼 가지고 살고 있고, 또 중생된 사람들도 일생 동안 사는 것이 거의가 다 그놈을 벗지 못하고 그놈으로 살고 있습니다.

뭐 사람이 성경 연구하고 신학 공부하고 설교할 때는 ‘그럴 때야 안 그렇지’ 설교도 일생 동안 그놈이 들어서 설교하고 목회하는 사람도 얼마든지 많이 있습니다.

이렇게 전인류라고 할 만치 원수 자기를 원수인 것을 구별하지 못하고 그것이 자기인 줄 알아서 일생 동안을 열심히 뭐 참 전심 전력 기울여 충성되이 해서 원수 그놈의 종이 돼 가지고 그놈에게 유혹받아 가지고 사는 것이 인생인데,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그 원수를 똑똑히 벗고 진리와 영감과 공로로 중생된 이 영이, 영을 참 자기의 주격으로 자기로 이렇게 찾아 가지고 살기가 얼마나 어렵다는 걸 이걸 생각해야 되는데 거게 대해서 별로이 생각지를 않습니다.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은 그거 소용 없다” 했는데 자기 잃는 것은 참 자기를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중생된 영 자기는 잊어버리고 자기 아닌 자기 그놈이 들어서 자기가 돼 가지고 날뛰고, 빼앗기는 것은 영원히 자기 것 될 수 있는, 예수님의 대속 받은 그것, 자기 것이 될 수 있는, 자기 것이 이미 돼 가지고 있고 자기 것이 법적으로 돼 가지고 있는 것이 실상으로 현실만 통과하면 되는 것인데 그것을 다 된 것을 뺏기는 것을 가리켜서 둘째 사망의 해를 받는다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님 안에 있는 내가 있고 밖에 있는 내가 있기 때문에 나와 나를 구별하지 못하면 이거는 참 뭐 감쪽같이 완전히 일생을 도적맞고 맙니다.

우리가 중생된 나는 어떤 내가 내며 또 중생된 자기라도 어떤 내가 내인가? 과거 이스라엘이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에 자기들이 존경하고 신임하고 선지자로 알고 있는 세례요한이 “이는 세상 죄를 지고 갈 하나님의 어린양이라,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한다, 이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리라.” 이렇게 증거를 했지마는 예수님을 저희 원수로 삼아서 마귀라고, 이는 하나님의 적이라고 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것이 저희들에게는 확실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의라고 확신있게 자신있게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 그들이 저거 마음, 저거 생각, 저거 비판, 저거 평가가 그 자기가 있었는데 그 자기가 누군가? 그 자기가 전부 자기 아닌 자기, 자기를 죽인 자기입니다.

지금도 교파와 교파끼리 자꾸 이렇게 하는 것, 그러면 교파가 통일되자는 것은 이것은 아주 좋은 줄 알지만 통일되는 그것도, 그것도 또 더 그렇습니다. 그 마귀란 놈은 술책을 가지고 이라면 이렇게 유혹을 시키고 저렇게 유혹을 시켜 가지고 하는 것, 마귀의 유혹을 여러분들이 어떻게 유혹시키는가 하는 걸 알라면 톰슨 성경이니 그런 것을 읽어보고 이 세상에 모든 지금 많은 사람들이 따르고 있는 성경 번역도 공동 번역한 거 그런 거 또 성경 이런 성경 저런 성경 많이 난 거 그것을 통틀어 사탄이 그렇게 했다고 하면 틀림 없습니다.

없는데, 그것은 다 그래도 유식한 사람들은 ‘무식해서 모든 시야가 좁아서 그렇게 하고 있지 그거 그렇지 않다’ 하는 사람 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 자기 아닌 자기 옛사람 그것이 들어서 그러합니다.

그러면 그것이 다 주님의 원수 대적이 그렇게 하는 것인데 그러면 주님이 왜 그런 걸 막지 않는가? 대적이 하는 것인데 실은 주님이 그 일을 하십니다. 주님이 만들어 내지 안한 이단은 절대 없습니다. 또 주님이 범죄케 하는 죄 외에는 절대 없습니다. 이것이 다 여게도 도달하지 못하고 이것은 지금 모순이라 이렇게 말들을 하고 당장 이런 말 나가면 지금 정죄를 할 것입니다. 정죄할 것이오. 이 설교록에 이래 나가면 당장 정죄를 할 것이나 실은 진리입니다.

제가 고신에 졸업 논문을 쓸 때에 이 죄와 의에 대해서 썼는데 중간쯤, 연구 발표를 하라 해서 제가 강단에 나가서 그 논문을 중간쯤 읽으니까 그 교수가 놀라면서 안 된다고 중단을 시키고 해서 그걸 발표를 다 못 했습니다. 발표를 못 했으나 그 논문 지금도 있습니다. 그대로입니다.

그럴 때에 ‘그러면 죄는 누가 만들어 냈느냐? 죄 만들어 냈으니까 그러면 죄의 원인자가 있고 의의 원인자가 있으니까 원인이 둘이니까 이원론이 아니냐? 그러면 이원론이 맞느냐?’ 또 이원론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한 분이 계셨고 한 분으로 말미암아 됐기 때문에’ 하면서 그걸 아무래도 그것도, 일원론이니까 한 분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나왔지마는 그걸 죄를 하나님이 만들어 냈다 하면은 이 문제가 그러면 심판을 어떻게 하느냐? 심판은 당신이 만들어 내면 당신이 심판 받아야 되지 어떻게 인간을 심판할 수 있느냐? 이런 모든 여건의 문제들 때문에 그것을 해결을 못 하니까 다, 그것을 다 부인하고 그만 그것은 덮어두고 말하지 말아야 된다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다 말할 수 있고 다 통할 수 있고, 일원론이면 일원론을 다 해석을 다 해서 일원론 그것은 논리적으로 딱 들어맞아야 됩니다.

이렇게 세상은 이런 세상이기 때문에 자기와 자기를 구별하기 어렵다 하는 이것을 사람들이 생각해야 되는데 여게 대해서는 생각지를 않습니다. 스가랴에 보면 스룹바벨이 손에다가 다림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했다 이랬어. 다림줄은 내나 이 먹줄 한 가지요. 다림줄은 어데든지 한 군데도 굽어져 있으면 헛일이라. 팽팽하게 댕겨야 됩니다.

이것은 자기 생활을 꼭 줄로 꼭 댕겨서 하나도 거기서 굽어지면 안 되는 것이라.

또 한 진리, 지극히 작은 진리 하나라도 네가 이거는 적은 말이라 해 가지고 멸시하나 사람의 심령을 저울질하시는 이가 다 이런 걸 통찰하고 계신다 이랬어.

그러니까 저울도, 저울이라고 표시하고 다림줄이라는 거는 다림줄은 그것은 제일 밑에서부터 전체 끝까지 쪽 곧아야 됩니다. 또 저울도 그것이 초절은 없습니다.

백 근이면은 백 근짜리에는 반 근은 들어 있습니까 안 들어 있습니까? 백 근짜리에 한 근 들어 있습니까 안 들어 있습니까? 들어 있소 안 들어 있소? 한 근 자, 한 근이 안 들어 있으면 백 근 되는 수가 없어. 한 근이 없으면 백 근은 절대 안 됩니다. 한 근에 한 근을 더 보태면 두 근 되고 두 근에 두 근을 보태면 네 근 되고 자꾸 이래 위에서 초월 초월 초월 이래 올라가 가지고 나중에 어데까지 올라갔던지 올라간 계수를 밑에 빼지 안하고 올라가 가지고 계산해서 발표하는 것이 그것이 저울입니다.

또 다림줄이라 하는 것도 요것도 하나도 뽑지 안하고 거게서, 한 치가 쪽 곧고 두 치가 팽팽하고 세 치가 팽팽하고, 만일 그 다림줄이 백 발이라, 이 발 수로 백 발이라 해도 그거 중간에 한 치만 구부러져 있으면 구부러진 이하는 다림줄 노릇 했지마는 그 이상은 다림줄 노릇 못 했습니다. 이러니까 다림줄이라는 건 밑에 시작에서부터 그 끝까지가 쪽 당겨서 팽팽하게 하나도 들어가고 나온 것이 없이 쪽 곧아야 된다 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담을 쌓은 담 곁에 이래 다림줄을 들고 섰으면서 “네가 뭘 보느냐? 아모스야 네가 뭘 보느냐?” “내가 다림줄을 보나이다.” 말씀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돌담 쌓는 그게 뭐이냐 하면 우리의 성화라 하는 건 뭐이든지 하나 빠지면 안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율법 중에 지극히 적은 것 하나를 뽑고 행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지극히 적다 할 것이요 하나도 뽑지 안하고 다 행하는 자는 크다 하리라” 했습니다.

우리의 생활은 초절되면 안 됩니다. 내가 그걸 며칠 전에 여기 우리 교회에 대해서 초절 그거 그 염려가 돼서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주장이든지 또 속이든지 뭐 기도하는 것이든지 이래 보면은 그만 초절들이 많아.

여기 기도하는 것 보면은 하나님이 그때 그때 말씀을 주시는 그 말씀도 자기가 새겨 가지고,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니 그 말씀도 그걸 팽팽히 댕겨서 그 말씀에 자기가 다 말씀과 자기와 일치가 되고 그 다음에 또 되면 이래 되는데 이거는 뭐 아무리 말씀을 새 말씀을 이래 증거해도 그거는 상관 없고 주문식, 주문 기도라, 주문 기도.

자기는 어찌 됐든간에 몇 가지 알면 몇 가지 아는 그것만, 아무리 설교에 아주 거게는 딴거 판이한 거 설교해도 그만 설교한 그거는 없어 버리고 한번 아는 것 그뿐입니다.

천주교가 그들이 신앙을 주문 신앙을 가졌습니다. 경문이라 해 가지고 구약에 이스라엘들도 경문 신앙, 천주교도 주문 신앙 이래 가지고 그 성경 가운데 몇 절수 거석해 가지고 그것만 자꾸 익히고 있습니다.

이래서 그 사람은 ‘저 사람은 성경을 알고 있는 거 다른 거는 다 필요 없고 몇 가지라’ 어떤 사람은 지금 한 범위가 댓 가지밖에 안 됩니다. 댓 가지 그것만 가지고 그저 그만 기도하면 그것만 기도합니다. 다 금방 그 시간에 가르친 것 배운 것 하나님이 계시해 주신 거는 다 없애버리고 자기 장 알고 있는 그것만 가지고 자꾸 기도해. 그것만 가지고 자꾸 연습하니까 그거는 숙달됐지마는, 숙달됐지마는 아무리 다른 그 성구가 자기에게 영감으로 계시돼서 왔다 할지라도 그 성구는 다 둬 버리고 그만 그것만 또 재독합니다.

이러니까 그 사람은 어떤 집회에 백 집회 가도 항상 자기 주문 외우는 것 그것뿐이오. 또 아무리 예배에 참석해도 주문 외우는 것 그것뿐이라.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도 있는데 지금 내가 누구라고 말하지는 안하지마는 그런 사람 그거 고쳐야 됩니다. 그것 가지고 되는 것 아니오.

그 사람은 어데서든지 성경을 이 성구를 읽을 때는 거게 대해서 내가 일치되도록 회개도 해야 되겠고 믿음도 가져야 되겠고 또 그 다음 성구를 말하면 그것도, 전부 이거, 신앙은 다림줄 신앙이라야 돼. 신앙은 저울 신앙이라야 돼.

저울 신앙은 밑에서부터 다, 그것은 중심이 뭐이냐 하면은 초월 신앙입니다.

요것보다 요게 낫다 자꾸 초월 신앙이고 이 다림줄 신앙도 그거 다 초월 신앙으로 그거 전체가 다 팽팽해야 됩니다.

돌담을 쌓아 놓고 다림줄 딱 대 보면은 아무리 저 위에다 밑에 하나 툭 튀어 나와도 그거 불합격이라 말이오. 우리가 전체적이어야 되고 또 체계적이어야 되고 이런데 자기 주관 신앙으로 자기 마음에 좋은 거 열 가지면 열 가지 그것만 항상 생각하고 그것만 기도하고 그것만 또 목사도 또 증거하기 쉽다 그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구비해야 되는데, 여게 우리라는 것 그것을 잘 여러분들이 지금 제목만 내 줄 터이니까 돌아가 생각하십시오. 어떨 때는 그거는 참 나는 어떨 때며, 어떨 때에 발표되는 건 참 내며, 어떨 때 발표되는 건 참 내가 아니고 나를 죽인 원수인 나인가? 원수 그놈을 자기라고 생각하면 그놈이야 뭐 그거 그만, 원수를 자기라, 원수란 놈이, 그 심신이 있다가 이거는 자기라 인정만 해 버리면 그뭐 심신 그거 이용해 먹기야 일사천리 아니겠소? 이래 가지고 다 망쳐버리고 맙니다.

그러면 어제 아침엔가 언제 자기에 대해 잠깐 조금 입문을 말하다 말았는데 그것은 말할 시간이 없고 설교를 들으면 아마 가서 읽으면 그게 다 나올 것입니다.

어떨 때 나는 참 나고 어떨 때 나는 나 아닌 원수, 나를 참 나를 죽여 나를 지금, 죽이지야 못하지요. 중생된 영은 죽이지는 못하지마는, 중생된 나는 죽이지는 못하지마는 중생된 영 나는 발로 처박아서 다 파묻어 놨고, 파묻어 놓고 그놈이 주인으로 떡 나서니까 심신 이놈은 주인 왔다고 좋다고 거석해 묘하게 돼서, 다른 사람이 ‘야 너 그거 틀렸다’ 이라면 그만 마구 전력을 기울여 가지고 반대를 합니다.

그러면 자기를 살릴라 하는 자는 원수로 삼고 자기를 죽이는 자는 자기 편이라고 좋아하고 하는 것이 이게 뭐 마귀가 이거, 죽인 그놈이 온 천하 인류를 다 사로잡고 이용해 먹고 있는 그놈이 얼마나 능숙하며 얼마나 민첩하며 얼마나 권위 있습니까? 이러기 때문에 모든 인류가 다 그놈에게 지금까지도 멸망을 받고 있는데 나는 무슨 사람이라고 그것을 예사로 이래도 저절로 이렇게 피와 성령과 진리로 중생된 영생하는 자기라고, 하루 종일 스물네 시간 가운데 영생하는 자기는 파묻어 버렸고, 있기는 있지마는, 있기는 있지마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라” 이 심신 이놈이 척, 예를 들면은 비유컨데 어떤 참 좋은 가정에 어린아이를 어떤 놈이 납치를 해 가지고 유괴를 해 가지고 차에다 집어 태워 가지고 이래 가니까 이놈이 태여 가면서 막 울고 불고 하지마는 울고 불고 해도 다른 사람이 다 모른다 그말이오.

울고 불고 이래 가는데 암만 가기 싫어서 지금 잡혀 간다 싶어서, 죽으러 간다 싶어서 막 울고 불지마는 태여 가지고 가 버리면 가 버리지 뭐 소용 있어야지? 이러니까 마귀 이놈이, 자기 아닌 자기 이놈이 심신을 딱 꼬와 놓으면, 심신만 꼬와 놓으면 중생된 영은 심신 속에 들어 있지 않습니까? 중생된 영은 이 심신이 자동차와 같애요, 비유컨대는. 자동차와 같은데 중생된 영은 그 속에 들었기 때문에 이놈이 운전을 말이지, 심신은 차와 같고 운전은 옛사람 그놈이 운전을 해 가지고 달아나니까 이 중생된 영은 실려 가면서 막 괴롭고 탄식을 하지마는 소용이 없어. 이래 가지고 끌려 실려간다 말이오. 그러니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 내가 원하는 거는 하지 안하고 원치 안하는 거는 하고 있다. 내 지체 속에 다른 것이 들어서 나를 원치 안하는 데로 끌고 간다.” 이랬다 말이오.

그러니까 언제의 나는 참 내며, 믿을 수 있고 따라갈 수 있는 내며, 언제 나는 참 내가 아니라 나를 죽이는 원수인 나인가 이것을 구별하지 못하면 소용 없습니다.

이러니까 간단하게 말해서 참 나는 무슨 나인가? 참 나는, 중생된 영은 뭘로 중생됐는가? 예수님의 이 대속으로만 중생됐어. 대속으로만 중생됐기 때문에 중생된 자의 속에 지식도 이 대속뿐이요, 주장도 대속뿐이요, 힘도 대속뿐이요, 소망도 대속뿐이요, 소욕도 대속뿐입니다.

이 대속으로, 대속을 이렇게 발휘하는, 대속을 이렇게 나타내는 나는 참 나요 대속 속에서 역사해 가지고 대속이 능동으로 역사해서 내가 거게 피동될 때에 그 나는 내입니다. 거게 피동될 때는 내라.

이러니까 이것을 가리켜서, 예를 들면은 이 등을 일곱 가지 색깔로 등을 만들었는데 이 일곱 가지 색깔로 등을 만들었는데 이 등이 그대로 있을 때는 밤이 되면은 새까맣습니다. 그럴 것 아니겠습니까? 새까맣지마는 거기다 속에 불을 딱 켜 버리면은 일곱 가지 색깔로 만들었으면 지금 일곱 가지 색깔로 빛이 비추어 나온다 말이오.

그거 ‘여기 푸른 불 켰구나. 여기는 붉은 불 켰구나.’ 불은 하나인데 그것이 일곱 가지 색으로 발휘되는 거와 마찬가지로 이렇게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이 일곱 가지인데 주님과 연결돼서 주님이 자기 안에 주인이 돼 가지고 역사하시는 이것이 일곱 가지 색깔로 나타나니 그것이 세상의 빛입니다.

진리로 나타나고, 영감으로 나타나고, 죄를 이기는 자유로 나타나고, 마귀를 이기는 자유로 나타나고, 사망을 이기는 자유로 나타나고, 하나님의 전지의 입법을 다 완전히 된 공심판을 통과한 이 완전이라는, 모든 존재에 대해서 다 자유와 환영으로 나타납니다. 모든 존재에 대해서 자유해.

하나님이 입법한 것은, 요새 모두 말하기를 바이러스 균인가 그 균이 제일 작다 하는데 바이러스 균 그 균에게도 자유할 수 있는 그 법을 정해 놓은 것이 하나님의 법이라. 그러면 이 법에 대해서 다 통과한 거는 바이러스 균도 대립이 안 되고 바이러스 균도 다 제게 좋기 때문에 환영해. 하나님의 법은 그게 자유법이라.

모든 존재가 다 이렇게 다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제 법대로 살면 다 하나가 되고 좋아하는 것인데 이게 다 전부 다 모순되고 적이 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모든 사망이 돼 가지고 있는 것이라.

그걸 약간 좀 말해서, 그러면 하늘나라는, 재독 들어보니까 그게 나오데요.

하늘나라도 전부 다 제 좋아하는 것들만 있고 또 전부 저를 사랑해 주기를 원하는 것만 있고 또 제 중심으로 제게로 다 집중하라 하는 것만 다 있고, 세상도 다 그렇습니다. 세상은 그래서 사망인데 하늘나라는 그래서 영생이 됩니까? 왜 그렇습니까? 왜 그렇소? 재독 들었지요? 하늘나라는 다 이타주의로 사는 줄로 이래 알면 헛일이오. 이타주의가 아니오.

이타주의는 세상에 모든 마귀들이 도덕론을 통해 가지고 그런 소리를 하고 있고 또 이종교를 통해서 그와 같이 하고 있지 하늘나라는 그런 게 아니라. 이타주의 아니오. 이기주의입니다. 이기주의요. 이기주의인데 영생이오.

세상은 이타주의도 멸망이요 이기주의도 멸망이요 다 멸망입니다. 그거 왜 그렇습니까? 그 열쇠는 어데 있소? 왜 그렇습니까? 재독 들었지? 저 뭐 ○조사인가 어데고? 밀양 어데 있노? 금산 그래. 한번 대답해 봐. 그래 그것이 원죄 때문에 그렇습니다.

세상은 자기 중심이 열 존재가 있으면은 열 개고 억만 존재가 있으면 억만 개입니다. 전부 자기 중심인데 하늘나라는 중심이 하나뿐입니다. 하나님 중심 하나뿐이라. 전부 하나님화됐기 때문에 자기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 사랑하는 것이요 자기 기뻐하고 원하는 것이 하나님 기뻐하고 원하는 것이요 하나라 그말이요, 하나. 하늘나라는 하나라. 하나님 중심 하나로 하나됐어. 이것도 이것만 하면 박사 뭐 세계를 막 발 아래 밟을 수 있는 박사 학위까지 받을 수 있어.

그러면 하늘나라는 언제든지 다른 사람 좋게 하는 게 좋은 줄 알아도 아니오.

자기 좋게 하는 게 하늘나라라. 중생된 우리 영은, 중생된 영은 그라면 하나님만 좋게 하는가? 중생된 영은 자기 좋은 게 하나님 좋은 거요, 하나님 좋은 게 자기 좋은 거요, 자기 소원이 하나님 소원이요, 자기 기쁨이 하나님 기쁨이요 하나님 기쁨이 자기 기쁨이라 그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하늘나라는 단일성의 나라라 하는 이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됩니다.

이런데, 그러니까 간단하게 말하면 내 속에 나는 어떤 나인가? 나는 이것은 ‘내 마음이라’ 이 세상에서는, 하늘나라는 그렇지만 이 세상에서는 ‘내 마음이라, 내 생각이라.’ 이거 다 옛사람이요 원수입니다.

나는 어떤 나냐? 우리 나는 지금 제한돼 있는 나입니다. 무슨 나냐? 나는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을 받은 나만 나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을 받은 나만 나고 예수님의 대속 안에 있는 나만 나지 예수님의 대속 밖에 있는 나는 옛사람 나요.

그러기 때문에 나와 나를 구별할라 하면, 간단하게 말해서 나와 나를 구별할라 할 때에 예수님의 대속, ‘이 내가 보자, 이 내가 예수님의 대속 안에 있는 내가 예수님의 대속 밖에 있는 내가?’ 그러면 예수님의 대속 안에 있는 내면은 예수님의 대속 안에 것이 제 주장이요, 제 소원이요, 제 성질이요, 제 계획이요, 예수님의 대속과 관계, 예수님의 대속 밖에 있는 것은 노아 홍수 배 밖에 있는 거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대속 밖에 있는 그 내가 있는데 온 천하에는 예수님의 대속 밖에 있는 나라.

대속 밖에 있는 내지마는 거게는 전부 그게 뭐입니까? 예수님의 대속 밖에 있는 자기, 예수님의 대속을 잊어버리고 지금 나 나 내 주장 내 욕심 내 뜻 꽉 찼는데 그게 뭐입니까? 그게 이름이 뭐이요? 그거 이름이 뭐입니까? 예? 큰 소리로 해 봐요, 그래야 바르지. 옛사람. 옛사람이 몇 가지로 됐습니까?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이소. 이거라. 항상 이걸로 살아. 일생 동안 예수 믿어도 이걸로 살아. 이걸로 살지 새사람은 잊어버려 버리고 못 찾아.

천하를 잊어버린 것보다도 참 자기 잊어버린 것이 더 손해라. 천하를 얻기 전에 참 중생된 자기가 주격이 되고, 그러면 주격이 되면 중생된 자기가 주격이 되면, 중생된 영이 주격된 것은 누가 주격되는 것입니까? 누가 주격되는 것이요? “성령이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해 준다” 그러면 중생된 영은 언제든지 성령으로 더불어지, “성령이 우리 영으로 더불어” “성령이 우리 영으로 더불어” 성령이 주체가 돼 가지고, 우리 영이 그 다음에는 주체가 돼 가지고 이래 하는 것이 이것이 우리 생활입니다.

그것이 몇 절입니까? 로마 8장 몇 절에 있소? 16절에 있답니다. 있는데, 이런 절수는 중요한데 이거는 다 모순되기 때문에, 모순되기 때문에 사람들이 다 건드리지를 안하고 있다 말이오. 중요한 건 전부 난해절이라 해 가지고 건드리지 안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절수는 난해절이라 해 가지고 건드리지를 안하고 있어요.

뭐 시간이 없어서, 자기와 자기를 구별하지 안하면 헛일입니다. 그런데 간단하게 지금 연구하는 제목으로만 말해 줍니다. “우리가” 하는 이 우리는 중생된 영을 말합니다. “성령의 처음 익은 우리까지도”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그거 누굽니까? 그거 중생된 영이오. “우리까지도” 그거는 내가 없어요. 우리 다 하나지. 여기 우리는 중생된 영이 우리요 영육이 다 하나가 된 그 사람들은 다 우리요. 그건 둘이 아니라.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담대하다는 것은, 담대하는 거는 뭐입니까? 뭐 사자 앞에 담대하요 공산주의 앞에 담대하요? 이 담대하다는 것은 세상에 소망을 가졌기 때문에 사람들이 다 비굴해지는데 이 담대하다 말은 땅의 것은 하나도 소망하지 안하고 하늘에 소망을 가졌기 때문에 땅의 것 그까짓 거 오든지 가든지 거게 대해서야 상관없다 그말이오. 이 사람이 돼야 돼.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이니라” 그러면 몸을 떠나는 것은 몸은 우리가 두고 가니까, 몸을 두고 가니까 두고 나서 그러면 영과 혼이 갑니다. 영과 혼이 가 가지고 낙원에 가 가지고 주님하고 사는 거, 낙원에 가 주님하고 사는 것이 이 세상에 사는 것보다 훨씬 더 평가적으로 취미적으로 좋아야 된다 그말이오.

어떤 사람은 지금도 말이요, 어떤 사람은, 제가 어떤 책을 보니까 어떤 참 높은 산에 히말리야 산에 그 산에 가 가지고 굴에 보니까 그 사람도 산을 좋아해서 찾아다녀 보니까 뭣이 굴에 하얀, 터래기가 하얀 짐승이 한 마리 있는데 그 못 보던 짐승이라 무슨 짐승이고 이래 보니까 그래 가서 이래 자세히 보니까 사람이더래요. 그래 가니까 ‘네가 어찌 여게를 왔느냐?’ 이래서, ‘네가 여기 올 것을 내가 생각해 알았다. 어찌 왔느냐?’ 그 보니까 사람이라.

그래 ‘누굽니까?’ 이라니까 자기는 기도하러 온 사람인데 기도하다 그래 거기서 그만 아무것도 없고 자꾸 기도하니까 뭐 먹는 거는 풀뿌리니 풀이니 이런 거 먹고 이랬는데 그만 짐승같이 털이 나 그래요. 그분에게 가 가지고 성경을 가르쳐 주는데 뭘 말하는데 하도 거석해서 성경을 그분에 게 모르는 난해절을 전부 거기 가서 다 배워 가지고 다 해결했어. 해결했는데 그래 가지고 내나 또 나가서 거석하고, 나와 가지고 또 가다가 답답한 일이 있어서 찾아가니까 벌써 얼마가 지냈든지 죽어서 거게 그 자리에 해골이 소복하게 있더래요. 산다싱전에 보니까 그래 가지고 있어요. 그런 사람들이 뭣 때문에 세상을 두고 그랬겠습니까? 후란시스도 후란시스 그분이 동굴에 들어가 가지고 그만 나오지 안하고 거기서 뭐 먹을 것도 아무것도 없는데 거기 있기를 원하고 이래서 제자들이 가 가지고 ‘이 시간 하나님이 당신 만든 것은 당신 위해 당신 만든 게 아니고 모든 하나님의 택한 자를 위해서 당신을 만들어 놨는데 당신이 여게서 이래 있으면은 하나님의 사명은 다 거역하는 것이고 당신으로 인해서 구원 얻을 사람은 어떻게 구원 얻겠느냐?’ 이래 가지고 하는 통에 후란시스가 나왔습니다.

그런 분들이 뭣 때문에? 그런 분들이 아무것도, 돈보다도 인간보다도 뭣보다도 주님이 제일 좋기 때문에 주님이 좋아서 거기서 그런 것이고 세상이 싫어서, 염세주의가 아니오. 세상이 싫어 그런 게 아니고 주님이 좋으니까, 더 좋은 것 찾아가는 것 아닙니까? 우리도 재미도 재미 있는 게 있어도 제일 재미 있는 걸 찾아가는 것은 정한 이치 아니요? 그거는 생의 본능이라 말이오.

이러니까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이게 우리가 돼야 되겠다 그말이오. 그러니까 땅위에 있는 이 모든 어떤 좋은 재미 모든 것보다도 우리 몸에 있을 때는 주와 좀 멀어져 따로 있는 것인 줄 알기 때문에 어서 영과 이 마음 둘만 가면 돼. 이 몸은 우주에 있을 때에 몸이 필요하지 물질계 없으면 필요 없어.

영과 혼, 영과 혼이 죽을 때 하늘나라로 간다고 하지 안했습니까? 영과 혼은 그대로 가요. 가 가지고 낙원에 가 가지고 주님 만나 가지고 사는 것이 그것이 이 세상에 있는 것보다 좋은 평가적으로 자기 본능적으로 좋아져야 되는 것이 이게 구원이라 그말이요, 좋아져야 되는 것이. 이렇지 안하면은 담대할 수가 없어.

세상에 생명 아끼는 사람은 생명에 위험하면 걱정되고, 물질에 소망 가진 사람은 물질에 위험하면 염려되고 이러나 온 세상에 소망이 하나도 없고 하늘나라에 “네가 만일 그리스도로 다시 살리움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하늘의 소망만, 하늘의 소망만 있으면은 땅에는 소망 없고 소망이 전부 하늘에 있으니까 가고 싶기도 거게 가고 싶을 것이고 또 자기가 취미적으로도 주님 만나는 것이 온 세상에 전부 다하고 만나는 것보다 더 좋으면 자연히 그 사람될 것 아니라? 그러니까, 우리가 세상에서 담대할 수 있는 이것이 되는 것이 그게 뭐이냐 하면 준비고 또 차라리 떠나 주님하고 같이 있는 것을 원하는 요것이 성화니 요게 돼져야 된다 말이오.

그러면 뭐할라고 세상에 있느냐? “거하는 것이라 그런즉” 그 해석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세상에 있든지 떠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그러면 세상에 있기는 뭐할라고 있느냐? 세상에 재미 있어 있는 게 아니고, 낙원에 가 가지고 주님하고 같이 사는 그것보다 세상이 재미 있어 그런 게 아니고, 좋아 그런 게 아니고, 평안해 그런 게 아니고, 다만 세상에 있는 이유 목적은 하나뿐이라 그말이오. 뭐이냐? 그 이유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것 때문에, 그것 때문에 그거는, 여게 있기를, 영원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지마는 지금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하나님을 닮는 것이고 하나님과 꼭 같이 되어지는 것이고 하늘나라는 기쁘시게 한 것이 하늘나라 가서는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정반대 된 이질의 것이 하나님과 동질되는 것은 이 세상에서만 할 수 있지 세상 떠나면 할 수가 없어. 이것 때문에 있기 싫은 세상을 있는 거라. 세상에 있고 싶어 있는 게 아니라.

세상이 괴로와서 죽고 싶은 것도 잘못, 괴롭기는 괴롭지마는 세상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주님 닮는 이 일 하는 것이 세상에서만 할 수 있기 때문에 떠나지 안하고 세상에 있는 것이라 말이오.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그러면 또 “이는” 그러면 기쁘시게 해서 뭐 할라고? “이는” 기쁘시게 하는 그 이유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그리스도의 심판대, 그러면 우리 대속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공심판은 예수님이 다 대속으로 다 통과시켰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공심판에는 다 통과된 사람이고 그리스도의 심판이라는 거는 사심판인데 이제 여게는 지옥 가고 천국 가는 게 아니고 여게는 예수님의 대속을 줬으니까 예수님의 대속을 네가 얼마나 평가했으며 얼마나 입고 있었으며 얼마나 배척을 했으며, 이제 대속을 입었는데 대속을 입은 것을 제가 버렸으면 그거 제것이 아니니까 버리고 입은 그것을 이제 심사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심판이라.

그러면 그리스도의 일곱 가지 대속을 준 일곱 가지 대속을 네가 얼마나 입었으며 어데서 입었으며 양이나 질이나 그걸 가지고 ‘얼마나 입었느냐?’ 그것을 심사하는 것이 그리스도 심판입니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각각 선악간에, 그 선악인데 선악은 뭐요? 선은 뭐입니까? 선은 뭐이요? 선은 하나님 중심. 악은? 자기 중심이라면 틀려요. 피조물 중심.

그러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뭐이 기쁘시게 하느냐 하면은 하나님 중심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게 되고 피조물 중심은 하나님을 노엽게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번 공과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다 영생이고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것은 다 영원한 멸망이라 하는 것을 공과에 기록됐습니다.

이러니까, 이렇게 땅위에 뭐할라고 있느냐? 땅위에 있는 것은 이 지저분한 것이 가득히 섞여 있는 여게서 하나님 중심 마련이 되어지지 하늘나라 가서는 하나님 중심을 누리기나 하고 있지 거기 마련은 안 돼. 땅위에서 다 자기 중심돼 있는 것을 땅위에서 청산해서 버려 버리고 하나님 중심으로 바꿔야 되지, 사망에 속한 것을 생명으로 바꾸는 것이 땅에서만 바꾸지 하늘나라서는 바꾸지 못해. 바꾼 것만 가지고 가요.

하늘나라 갈 때 바꾼 것만 가지고 가기 때문에 거기서는 바꾼 것만 가지고 많이 바꿨으면 많이 누리고 적게 바꿨으면 적게 누리고 그것이 하늘나라의 영광의 존비귀천 되는 것인데 그것만 있는 것이지 바꾸는 거는 하지 못해. 그것 때문에 땅위에 있는 거라.

이걸 할라면 네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서 어짜든지 심판에서 좋은 보응을 받도록 하자, “선악간에 행함을 따라서 갚음을 받으려 함이라” 좋은 갚음을 좋은 대우를 받도록 하자 해도 좋은 대우를 받도록 할라 하면은 뭣이 있어야 됩니까? 뭐 있어야 돼요? 저 ○조사? ○○교회? 그 위에 해 놓지 안했어? 뭣이 있어야 돼? 아니야. 그거 자꾸 그래 덩더꿍이로 성경을 그래 가지고 자꾸 그라는 건 만날 주문 성경이고 장 아는 자기 주관대로지, 성경이 그리 안 하면 성경 몇 절만 하면 되지, 천주교는 몇 절만 했어요. 하면 되지 온 육십육 권 도리 요걸 줄리가 없어. 하나도 빠지면 안 돼. 다림줄이라, 다림줄. 또 다림줄이고 또 저울이라.

“우리가” 첫째 우리가 돼. “우리가 온전히“ “우리가 담대하여” 여기 “온전히 우리가” 거게는 안 됐는데 “담대하여” 돼 있는데 거게 없습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담대한 사람 돼야 돼요, 담대한 사람. 우리가 담대한 사람이 돼야 되지 항상 소망이 땅에 있으면서는 그 일이 절대 되는 것 아닙니다.

“그리스도로 다시 살리움 받았으면 위에 것을 생각하고 땅에 것을 생각지 말라” 했어.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소원이 있어.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이니라” 또 이게 돼야 돼. 이게 돼 가지고 그게 되는 것이지, 기초를 하고 기둥을 만들어야 위에 들보가 들어가는 것이지 기초도 안 만들고 기둥도 없는데 들보가 올라갑니까, 어데? “거하는 것이라 그런즉 우리가 거하든지 떠나든지” 이게 되고 나면은 “그런즉 우리가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게 우리의 생활이라 말이오, 우리 생활.

그 생활인데 목표는 뭐이냐? “이는” 뭣 때문에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을 이것을 우리가 우리 생활 삼고 있는냐? “이는 다 반드시” 하나도 빠짐없어.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이것도 우리가 다 드러난다 말이오.

하나도 빠지지 못해.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이것이 영원한 하늘나라에 사는 생활이요 누리고 있는 것이요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 순서가 돼야 되지 땅에 소망을 가지고 항상, 언제 그거 학생이 말해. ‘예수 믿는 사람이 보니까 여게 ○○교회는여게 그 학생이 있는지 몰라.○○교회는 말씀대로 이래 가르침대로 살아 가지고 제일 소원 성취를 이루어지고 이래 되는데 이 서부교회는 그런 소원 성취가 이루어지지 안하니 어째 그렇습니까?’ 이래서 내가 ‘야, 그래도 여게서도 이루어지는 사람도 있고 안 이루어지는 사람도 있고 이런데 너는 안 이루어졌는갑다. 그런데 혹 이루는 걸 봐도 네 눈에 안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라며 내가 골로새 3장 1절을 말했어. ‘네가 그리스도로 다시 살리움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했다. 네가 어데 소망을 가지고 있노? 네가 땅에 소망 가지면 암만 해도 그거는 항상 온 천하 것을 소망을 가지고 성공을 해서 온 천하에 제일 부자가 돼도 땅에 소망 그거는 하늘나라 가는 거는 아니다, 그것은.’ 내가 또 베드로도 말해줬어. 베드로가 고기 잡으니까 좋아했나, 고기 잡으러 갔던 자가 고기가 잡히니까 좋아할 터인데 좋아했나 어쨌노?’ ‘버리고 그만 가버렸습니다.’ ‘그래, 땅의 것을 그렇게 해서 예수님 말씀대로 순종해서 이루어지는 그 사실을 알고 나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면 더 좋은 것 아주 참 억억억만 배도 더 되는, 세상 것 억억억만 배도 더 되는 그런 좋은 것이 있는데 그걸 버려 버리고 오늘 떠나면 그만인 나그네 세상에서 두고 갈 그런 데에 욕심이나 소망이 있을 리가 있나?’ 내가 요것을 말해 주고 그만 바빠서 그래 추워서 그만 내가 올라가 버리고 말았어요.

이러니까 이제 우리가 요렇게, 신앙 생활을 차각차각 해야 됩니다. 오늘 아침에 내가 다림줄을 말했고, “스룹바벨이 그 손에 다림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여호와가 기뻐하셨다” “기뻐하리라” 했어, “기뻐하리라” 그러니까 사람이 모든 것을 성경 말씀 쪽 그래 지극히 적은 것 한 절수도 빼지 안하고 요것을 팽팽히 당겨야 요게 다림줄이 되는 것이지 어데 자, 열 발 다림줄에다 한 치가 굽어져 있습니다. 한 치가 굽어져 있어. 한 치가 착 접쳐 가지고 있어. 그러면 그 다림줄이 다림줄 노릇을 할 수 있겠소 없겠소? 저 ○조사 한번 대답해 봐.

열 발 다림줄인데 그까짓 거 한 치 굽어 가지고 있는데, 한치가 요 탁 꼬꾸라졌어.

한 치가 요게 착 굽혀 가지고 있어. 한 치 굽혀 가지고 있으면 그걸 다림줄 노릇 할 수 있어요 없어요? 없어. 한 치 그거 꼬부라져 가지고 있으면 그게 어디로 꼬부라는지는 그 나머지기는 몰라. 그러니까 팽팽히 당겨서 거기서 꼬부라지는 게 하나도 없어야 비로소 그 다림줄 노릇을 할 수가 있다 그거요.

스룹바벨은 그것을 보고 있기 때문에 기뻐했어. 스룹바벨이 손에 다림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한다 이랬어.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어찌됐든지 하늘나라는 허영과 허욕 가지고는 안 됩니다. 하늘나라는 그러면 재료도 진실이요 방법도 진실이요 열매도 진실입니다. 진실 떠나면 기독교 구원은 다 진공입니다. 헛일입니다.

하루 삼십 분 기도 이거 놓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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