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가 201곡

 

1989. 2. 7. 오전교역자회

 

본문: 베드로전서 1장 3절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세상에는 노래가 있고 또 찬양과 찬송이 있습니다. 다른 이종교에서도  찬송이라는 말을 하기는 하지마는 그거는 다 노래입니다. 노래와 찬송의 구별은  뭘로 되는고 하니 절대자이신 그분을 찬송함이 찬송이 되고 그 외에 자기를  기쁘게 하는 그런 것은 전부 노래가 됩니다.

 이 세상에는 찬양 찬송은 하나뿐이요 그 외의 거는 다 노래들입니다. 뭐 다른  이종교에서 저거 교주를 찬양한다 찬송한다 이렇게 많이 들어서 말들은 하지마는  우리가 찬송 찬양과 노래와 그 두 가지를 구별하는 것은 자존자 조물주이신 주재  그분을 찬송함이 있고 그 외에는 뭐 석가모니를 찬송 찬양하든지 마호메트를  하든지 무슨 뭐 공맹을 하든지 뭘 하든지 그것은 다 피조물을 찬양하고 찬송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전부 다 세밀히 말하면 자기를 찬송하는 것이요 자기 주관을  그렇게 칭송하고 또 그렇게 찬송하는 그런 일들입니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에도 성경에 찬양이라는 말도 있고 찬송이라는 말도 있는데  그거 같은 뜻이 아니고 찬양보다도 찬송으로 그렇게 하는 게 좋습니다. 찬송은  상대방을 무한히 높이는 그런 깊은 뜻을 가지고 있고 찬양이라 하는 것은 자기가  상대방을 높이되 그렇게 지존으로 그렇게 높이는 뜻이 아닌 그런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이 찬양입니다.

 이래서 자꾸 악령은 이 찬송 찬양이 다 번역으로 돼 가지고 있지마는 될 수  있는 대로는 찬송을 자꾸 찬양으로 기울이도록 이렇게 하는 것이 마치 성경을  성서라고 그렇게 자꾸 기울이도록 하는 거 한가지입니다. 그러면 성경이나 뭐  성서나 다 같은 뜻이지마는 속은 다릅니다. 이래서 우리는 자기가 할 수 있는  대로 성서라는 말을 이것을 적을 삼다시피 대적하고 성경이라고 그렇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또 자기가 만일 성직을 가져서 목사가 됐다면 목사 위에 박사가 어떤 박사라  할지라도 박사라는 말을 그 말을 목사가 박사라 하면 그거 수치스러운 일인 줄  알고 목사라는 그 직명을 가질라고 애를 쓰고 또 그것을 불러 주는 것을 자기를  존귀히 대접하는 줄 알고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되지, 그만 그래 하면 좀 그는  너무 박대하는 것으로서 또 너무 박대하는 것으로 그렇게 생각을 가지고 했기  때문에 자타가 그러니까 불러 주는 사람도 목사보다 박사가 낫고 저 본인도 다른  사람이 목사라 하는 것보다 박사라 불러 주면 좋아합니다. 그게 실은 속에서  귀신이 들어가 가지고 그렇게 미혹을 받아 그런 것입니다.

 또 목사도 성경에 그 직이 있습니다. 목사보다 하나님의 종이라고 나는 그렇게  말하라고 합니다. 이래서 우리 서부교회 강단에서는 사회자가 나중에 축도를 말할  때에 '목사님이 나오셔서 축도해 주시겠습니다.' 그래 말하는 말 그것을 아주 나는  듣기 언짢게 해 가지고 그것을 고쳐서 이제는 다 '하나님의 종이 나오셔서  축도하시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라고 해서 고쳤습니다.

 왜? 그러면 그것을 얼핏 들으면은 목사는 선생님이고 종은 종이니까 아주  껍데기로 듣는 사람은 목사 하는 것 보다 종이라 하는 것은 하나 모욕같이  이렇게 보이지마는 그런 게 아니고, 왜? 그러면 하나님의 종이니까 목사가 자기를  높이고 싶어서 그와 같이 하느냐?  제가 그래 하는 것은 그저 예수님의 피로 대속한 것이니까 하나님의 종인 줄  이렇게 알고 있지마는 잊어버리고 제가 자주장으로 할 때 많기 때문에  어데서든지 그럴 때라도 하나님의 종이라고 이렇게 다른 사람이 불러 주고 저도  하나님의 종이라는 것을 생각해서 이는 예수님의 대속을 받아 주의 것이요 주의  종이니까 그분에게만 복종하지 자유가 없다는 그런 것을 그럴 때라도 다문  얼마라도 좀 말해 주기를 원하고 그리 돼서 그래 하나님의 종이라고 그렇게  하라고 해서 뭐 기어코라도 강권해 가지고 우리 서부교회 장로는 내가 열 몇  명인가 되는데 그 사회하는 사람들은 한 사람도 목사님이라 그런 소리를 못  씁니다.

 쓰는 사람 더러 있었습니다. 있는 사람들은 그 사람 다 교만한 사람들이요 또 그  사람들은 세상에서 조금 말도 잘하고 똑똑한 사람들이오. 그래 그걸 그래 하지  말고 하나님의 종이라고 그렇게 부르라고 해서 처음에는 비쭉거렸지만  기어코라도 그렇게 실행을 시켜서 지금은 하나님의 종이라고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또 성경 말씀이면 뭐 성경이 성경 말씀이니까 다 된 것 아닙니까? 그래도 저는  성경 말씀이라고 그와 같이 하는 것을 보다 더 좋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자꾸  그렇게 말을 합니다. 나도 거석할 때에 '성서 말씀 성서 몇 장 몇 절' 그래 말하지  않습니다. 그래 그걸 나는 미워 합니다. 나는 그걸 미워합니다. '성서'하는 그걸  미워하고 그보다는 성경 하는 것을 좀 좋아하고 또 성경 말씀 내가 성경 읽는데  그만 되지마는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을 저는 더 좋아합니다.

 왜? 그 이유가 다 그것이 편식이요 편견이라고 할란지 모르지마는 저로서는  어쨌든지 하나님이 좋기 때문에 하나님을 자꾸 이렇게 말해서 들먹여서 우리에게  익혀지고 가까와지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이번에 OOO목사님이 저 OO교회 집회를 했는데 내가 그 집회의 테이프를  OOO목사님에게 보내 달라 해 가지고 내가 테이프를 다는 못 들었고 지금 한 개  듣고 한 개 듣다가서 지금 그만 시간이 없어 그래 거기 걸어 놓고 있습니다.

 걸어 놓고 듣지를 못했는데 거게 보니까 OOO목사님이 아마 집회 간 가운데에  이번 집회가 제일 은혜가 있지 안했는가 싶습니다. 또 자기가 그대로 나가면  OOO교회가 부흥이 됩니다. 그까짓 거 학박사니 뭐이니 무슨 뭐 신학자들 암만  뭐 소리해 봤자 그 생명은 죽지 생명은 살아나지는 않습니다.

 그 요번에 집회 하는 가운데에서 그 제일 자기가 들어낸 게 뭐이냐 하면은 자꾸  하나님, 하나님을 하나님 아버지 뭐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나라 자꾸 이라니까  그게 쉽고 모든 사람이 은혜가 돼지고 이래 돼지는 것이지 거기 딴것은 그거  가지고서 안 됩니다.

 그런데 내가 OOO목사님에게 좀 주의 주는 것은 앞으로 지금 한국 교회가  기독교 사회주의로 자꾸 밀려져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독교 사회주의  기독교 유물주의, 그거야 기독교 유물주의를 말하면 막 좋아서 막 뜁니다. 기독교  사회주의를 말하면 뜁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그런 면도 있지마는 그거 항상 조심해서 기독교 신앙주의  하나님을 따라서 그분에게 따라서 움직이는 그걸 조심하지 안하면 나중에 가서  자꾸 교인들도 듣기 좋아하지 또 하는 사람도 쉽고 힘나지 이라다 보면은 기독교  유물주의 전합니다. 유물주의.

 유물주의라 말은 뭐 물질이 필요하지마는, 물질이 필요하지마는 물질을  하나님보다 앞세울 때는 주의가 되는 것입니다. 또 인본주의도 사람이 있고,  하나님 있고 사람 있지마는 사람을: 하나님보다 앞세우면 주의가 됩니다. 그래서  그런 것을 좀 조심해야 하겠고,  그저 자꾸 이렇게 하나님을 많이 말하면 그분이 좋아하고, 그래 나는 거기  은혜를 받았어. 자꾸 '하나님 아버지' 어제도 보니까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 기도 못 해도 아버지만 그만 한 몇십 번 부르면 그만 거게서 다 아버지가  다 알아서 책임진다.' 그 신앙을 가진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줄 모릅니다.

 내가 여기 O목사님 있지마는 O목사님이 웨스트 민스터 신학교를 졸업하고  여기 나왔을 때에 신앙이 없었습니다. 내가 볼 때 신앙은 깡통입니다. 신앙은  속에 통 비었고 뭐 지식 그런 것만 가지고 있지 없었습니다. 뭐 본인이 알  터인데.

 이랬는데 차차 차차 신앙이 들어와서 이번에 내가 집회한 테이프를 듣고서  이대로 신앙 생활을 해 나가면 앞으로 자꾸 그래 가지고 자꾸 그래 나가면은  내가 죽으면 서부교회 후계자는 저분이 될 거 아닌가? 내가 그렇게까지 내가  생각을 가졌습니다.

 하나님만이가 제일입니다. 이래야지 뭐 딴거 가지고서 두둑거리는 거, 그래서  저는 지금 생각하기를 양성원에 이것을 목회자 양성 성경 학교라 이렇게 하고  싶어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학교 하면은 저급이고 그 보다 고급은 신학이고 신학보다  고급은 신학 대학이고 그것보다 고급은 신학 대학원이고 이게 다 귀신이 내놓은  것이지 그뭐, 배우는 집은 배우는 집이면 됐지 그 인간들이 그래 자꾸 차이를  지워서 그래 만들어 놓은 것이지 그게 근본 뭐 그건 게 아니오.

 그래서 제가 똑똑히는 몰라도 미국에 무디 선생의 성경 학교가 그것이 제일  변질이 안 됐다 이렇게 하는 말을 듣고서 그 어찌 됐는고 좀 알아 볼라고  이랬는데 거게서 뭐 책이 붙여 왔다던가 이래서, 나는 읽어 보지는 안했어. 읽은  사람에게 내가 물어봤어. 물어보니까 그것이 해방 전에는 그대로 나왔다가 해방  후, 해방 후에 확 변질이 돼져 버렸고 또 88 올림픽 후에 많이 변질이 돼졌습니다.

 변질된 것은 거게 있는 인물들이 과거에 그렇게 무디 선생이 말해 놓은 그것은  아주 무가치하고 또 그거는 너무 미개적이고 또 그거는 너무 아주 저급이기  때문에 고급을 해야 되겠고 또 그거 질을 높여야 되겠다 하는 그런 데에서 그런  것들이 다 들어왔다 하는 것을 제가 약간 좀 내가 몇 가지 물어 보니까 말해  주는 데에서 거게서 짐작을 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하면, 이 세상이 뭐 몇 해나 있을란지 모르지마는  인간들이 자꾸 인간적으로 이래 끌고 나가고 이렇게 변질시키는 여기에서 이걸  방어하느냐? 그래서 성경만 공부를 하고, 성경만 공부를 하는데 거게 그래도 뭐  다른 모든 신학들, 조직신학이나 또 무슨 성경신학이나 온갖 그 교리학 교회사  그러면 이런 거는 어짤 건가? 그것들도 가르쳐야 되지 않겠는가?  내 생각은 그런 것은 저 별개로 딴 집을 지어놓고 하든지, 신학 할 사람들은 뭐,  신학 할 사람들은 신학 세워 가지고 신학 하고 신학 대학 하고 신학 대학원 하고  그래 하고, 뭐 천하든지 말든지 성경만 딱 공부해서 어찌 됐든간에 다른 것 다  몰라도 성경만 외우고 성경에 있는 하나님과 성경에 있는 구원 도리만 배워  가지고 이것만 하면 이 사람을 주님이 제일 기뻐하겠다 하는 나는 그것을 보고  있기 때문에 그걸 주장을 합니다.

 뭐 주장하면 저 무식하기 때문에 반지식론자라고 이라면서 조롱을 하지마는  주님은 나를 기뻐서 '야 이놈아, 네가 나를, 내가 너를 기뻐한다. 내가 이 시대에  내가 너를 제일 기뻐한다.' 이렇게 한다는 그걸 확신이 있기 때문에 내딴에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래서, 그러면 성경 공부를 하면 어떻게 할 건가? 그것은 성경에는 스스로의  자백성이 있습니다. 명백성이 있어서, 성경은 그 안에 또 내재적 영감이 있기  때문에 성경만 읽으면 깨달아집니다.

 제가 여기 성경 깨달은 것은 뭐 신학교서 배운 게 아니라. 고려신학교 와 가지고  내가 별로이 배운 것 없습니다. 와 가지고 그저 확신은 얻었지요. '나도 이래  깨달았는데 여기도 보니까 이렇구나'  그래 또 여기 OOO목사님이니 OOO목사님이니 저 뭐 OOO조사님이니  O목사님이니 저 미국에서 세계에 모든 종합 신학 모이는 데인데 거기서 공부한  사람들에게 이래 자꾸 접하는 가운데서 내게는 뭐이 생겼느냐? '그게 그거로구나,  그게 그거로구나.' 이래서 확신을 가졌습니다.

 과거에는 대학 문 앞에를 못 들어간 것은 이 대학에는 무슨 요지통이 있는가  싶어서 겁이 났었는데 막상 대학에 들여가 보니까 그게 그거지 별게 아니라 하는  거 모양으로 이제 좀 확신이 생겨졌습니다.

 그래 또 미국 가서 공부하는 저거들도 뭐 이는 뭘 물으면은 '거기서 어째  가르치더노?' 그 가르친다 하는 그것을 말해 보면은 그와 이래 비교해 볼 때에  우리와 같든지 우리가 뒤떨어진 게 별로이 없다 하는 것을 그것을 보고서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랬는데 그 성경 공부한 것이 아무한테도 배우지 안하고 내대로 성경 읽고  깨달아진 거 그대로 행하고 그런 가운데서 깨달아 가지고 이 교계에 나오니까  전부 이단이라 하요. 전부, 뭐 고신에서 전부, 뭐 박 교장하고 나하고 대립해 전부  이단이라 하요. 이단이라 하니까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데 꼼짝이나 하겠습니까?  이렇지마는 결국은 제가 말한 그대로 다 서고 말았습니다. 그게 뭐 하나 둘이  아니라 여러 수십 가지인데 다 그대로 서고 말았어요. 다 이제는 그들이 다  그렇다고 인정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어 헬라어 원어를 모르면 어떻게 되느냐? 원어 모르는 그런 것도  다른 데서는 그렇지만 신학에 오니까 원어에 대해서 뭐 마찰되는 것이 많이  있었는데 마찰되는 그거 주 몰아댈 때는 내가 꼼짝 못 했지마는 그거 또 성경에  다른 성구을 가지고 이래 조사를 하니까 결국은 성경만 보고 당신만 바라보고  파고들어가 앉았고 당신으로 전부 삼는 그자를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십니다.

기어코 이기게 해요.

 그래서 OO신학교 오니까 '싹스는 부패성이라' 이래 가지고 내가 해석한 것은  전부 이게 싹스를 몸이라고 해석하다 보니까 나는 그분들은 부패성이라고  해석하는데 나는 몸이라고 해석했으니까 영 반대 아닙니까? 이래 놓으니까  해석이 다 틀려.

 꼼짝 없이, 뭐 손 골에 돼지 몰리듯이 꼼짝을 못 했는데 그래 내가 가만히  기도하면서 이거 내가 이제까지 일한 것이 이거 이거 잘못이다. 그러니 왜  이러나? 그거 또 새로 기도하다 기도하다가 그래 내가 하나 하나님이 가르쳐  주시기를 예수님께서 '마음은 원이로되 육체가 약하도다' 하는 그 성구를 가지고  원어를 물으니까 그거는 요래도 조래도 말할 수 있으니까 그들이 그만 욱대겨  대니까 내가 그만 꼼짝도 못하고 또 몰렸다 말이오.

 또 기도하니까 요한복음 1장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하는데 그 육신 그거는  원어에 뭐꼬?' 그걸 OOO그때 목사가 내가 고려 신학교 다닐 때에 거게 일 년  후배인가, 아마 동기인 갑습니다. 그래 인제 내가 그때는 나를 따라다니고 하기  때문에 내가 제일 좀 가까와서 내가 물었습니다. '그 원어 그게 뭐꼬, 그라면 좀  찾아불 수 있나? 그거 원어를 네가 모르기야 모르지마는 사전을 보고라도 찾아볼  수가 있나?' 이라니까 찾아 봐. 찾아 보는데 '뭐꼬?' 하니까 '싹스입니다.' 이래.

됐다 말이오. 그만하면 됐어, 뭐.

 이래서 '싹스는 부패성이고 쏘마는 몸이라고 이렇게 말하는데 그라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예수님이 그라면 부패성 돼 가지고 와 가지고 우리를 구속했느냐?'  이걸 대 놓으니까, 이걸 내놓으니까 그만, 그때 그만 노가에 다니면서 그만 몇 번  외쳐 버렸다 말이오. 이래 놓으니까 그만 그때 고려신학교에 '싹스는 부패성이라'  하는 것은 완전히 그거 전멸되고 말아 버렸습니다.

 당신만 바라보는 사람을 절대 수치당하지 않게 하십니다. 그분이 뭣 때문에 엿새  동안에 우주를 창조했는데 어떤 자에게 앗기고 어떤 자에게 뭐 사정하고 뭐 이래  하겠어?  그래서 성경 공부하는 데는 지난번에 한 거와 같이, 지난번에는 제가 일주일  동안 하는 데에 야고보서를 공부했습니다. 내가 가르치지도 안했어. 야고보서  공부해라. 야고보서를 외워라. 외우면서 무슨 뜻인지 모르는 것은 적어라. 처음에  적은 거 또 한 두 번 외우고 나니까 이건 다 알 수 있는데 자꾸 외우니까 알고  알고 다 알고 끄트머리 인제 암만 외워도 모르는 것만 간추려 가지고 내놓으라  했습니다. 그 다 내놨어. 내놓은 그것을 내가 전부 내가 아는 대로는 뜻을 다  말해 줬다 말이오 저거도 아멘 하고. 이러니까 지난 학기에 참석한 사람은  야고보서에 대해 가지고서는 환하게 통달이 되다시피 했을 것이라. 다 외우고. 다  외우지 모르는 뜻 다 배웠지 다 알았지.

 이번에는 내가 그랬어. 양성원에 그 교학실장 보고 내가 그전에, 시간이 두  주간인데 뺏겨서 한주간밖에 안 되는데 인제 세 주간 달라. 세 주간. 내가 세  주간 달라 했어. 세 주,간 달라 이래 가지고 이번에는 또 인제 에베소서나  갈라디아서나 이래 가지고 이것을 읽고 외워라. 외우고 그래 모르는 걸 그건 또  간추려라. 그러면 처음에 읽을 때에 모르는 거 줄 쳐놓은 것은 두번째 읽으면  알게 되고 또 읽어서 암만 읽어도 모르는 것은 외우면 알 게 됩니다. 외우면 그  속에서 가르쳐 줘. 그라고 진정 자기가 알고자 하면 주님께서 영감으로 가르쳐  주시오.

 이래서 학생들 자기네들이 뭐 또 그것도 위증으로 그렇게 하는 것인지는  모르지마는 성경 학교 온 중에 요번 학기가 제일 은혜를 많이 받았고 제일  그렇다고. 그런 것 같애. 왜? 학생들이 완전히 그만 변질이 돼 버렸어.

 그전에 우리 저 OOO목사님 저기 와 계시지마는 OOO목사님 교학실장으로  있을 때에는 이 양성원이라 하는 그게 시장터도 아니고 그거는 유흥장도 아니고  이 세상에서도 제일 아주 모산지배, 제일 말단 그런 인간들만 주 모아 가지고  있는 그런 단체가 됐었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안해요. 그때 졸업한 사람들은 좀  회개해야 돼.

 그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하는 그 말씀이 어데 있습니까? 몇 절이요? 마태  7장 13절입니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인도하는  것은 사망으로 가는 것이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그거는 생명으로 가는 것이라.

그 인도자를 말했는데 좁은 문, 좁은 문 이거 우리가 이거 놓으면 안 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그말은 뭐 좀 자꾸 편벽되게 치우치라 말 아니오. 치우치라 말  아니고 좁은 거는 뭐이냐 하면 성구가 예를 들면은 법령이, 법령이 십계명인데  일계명 지키다가 그다음에는 또 거게서 뭐 꺼꾸로 지키든지 옳게 지키든지  일계명 한 개명만 지키는 것보다는 두 계명 지키는 것이 더 좁아졌고 두 계명  지키는 것보다 세 계명 지키는 것이 좁아졌고 세 계명 지키는 것보다 아홉 계명  지키는 것이 좁혀지고 그라면 열계명이 지키면 다 좁아질 대로 다좁아져서  이상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좁은 문을 말한 것이니까 어짜든지 보다 보다 나은 거보다 옳은 거 자꾸  이것을 거석해야 되지 그러면 보면 저게 자꾸 넓히냐. 자꾸 더 하나님의  말씀에다가 준해 가지고 자꾸 그래 나갈라고 하고 있나 저게 실실 끌어 나가나  저게 지금 하나님을 정말 높이나 하나님을 제 이용물로 이용해 가지고 저를  높이는 하나 이용물로 삼고 있나? 환하게 보입니다. 뭐 집회에 가 가지고 한 시간  들으면 저게 참 절도 강도로구나. 그런데 양의 껍질을 입고 지금 이리가 지금  저라고 있구나, 환하게 보인다 말이오. 안 보이는 게 아니야. 모르는 사람이  모르지.

 그래서 제가 양도천 목사가 그때 한창 세월났을 때인데 서울 OO 교회를 우리  서부교회서 개척했습니다. 개척했는데 그 OO교회에 그때 재가 암만 일꾼을  세울라 해도 일꾼이 없어서 OOO목사님 동생 OOO목사님을 OOO목사님이  세웠었는데 그분이 양도천 목사를 청해 가지고 집회를 해요.

 그래 뭐 그때 벌써, 그분이 거기 들어섰을 때에 그 교회는 나는 내줬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 OOO목사님하고 나하고 이렇게 내치 이래도 교리와  신조적으로는 언제든지 서로 하나가 되지를 안하고 그렇게 인간적으로만 하나  되어서 나갔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을 증거하는데 꼭 내가 나중에 가니까 좀  늦어서 한 사십 분 설교 듣고 난 다음에 나와 가지고. 거기 내가 세웠지 그래도  거기서는 제일, 내가 세웠고 또,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세웠다 말이오. 세웠고 또  거게서 제일 서부교회 있던 사람들이 올라갔기 때문에 권위가 있으니까 나  왔다고 뭐 저절로 모이는데 그래 내가 제직회를 모이라 했습니다.

 제직회 모이라 하니까 모였는데 그래 모인 데에서 말하기를 '내가 보기에는  이이의 증거하는 것이 우리가 깨달은 거와는 다르다. 이러니까 너희들이 들을  때에 아주 조심 있게 듣지 안하면은 그 미혹에 빠진다.' 내가 그것을 그때 선포를  했습니다. 이라니까 OOO목사님도 거게 있다가서 다른 말 안 하고 좀 비위에 좀  맞지 안해서 말하고 있어. 그거 그랬는데 과연 내가 그때 말한 그대로 양도천  목사는 그 열매를 맺고 끝을 마쳤습니다.

 그 뒤에 내가 여기 저 보수동에서 집회한다 해서 '그분이 하마 인간이 많이  변해졌을 터인데 얼마나 변했는고 가 보자 가 보니까 저녁에도 사람 몇 명  모았고 새벽에는 사람 너인가 모았고 우리 서부교회 교인들 데리고 가서 한 이십  명 갔고 이래 가지고 그래 있어요. 보니까 그때는 벌써 배우가 무대에서 날뛰는  배우 노릇도 다 지나가 버렸어. 배우 노릇도 힘이 없어서 못 해요.

 우리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거, 보다, 보다 옳은 거, 보다 더 바른 거, 보다 더  성경적으로, 자꾸 이것을 기도하고 자꾸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되지 제가 무슨 큰  위대한 인물같이 뭐 거기서 관대 관용 또 모든 또 이렇게 여러가지 화평 이뭐  이래 가지고 자꾸 넓은 길 하고 어북 그렇게 한다 하지마는 나중에 가서  비참해집니다. 뭐 지금 교회들이 다 그거 아닙니까? 이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이것을 잊어 버리면 안 될 겁니다.

 지금 한국에서는 뭣이 문제가 돼 있느냐? 그 사람들은 꿈도 안 꿉니다. 지금  기독교 사회주의가 이 한국 교회서는 제일 일호적으로 우리에게 어려움이 됩니다.

그까짓 거기독교 사회주의, 기독교 도덕주의는 얼마나 좋습니까? 그 사람이  도덕주의라 말은 인인, 사람들에게 나타내는 덕 있는 거, 덕 그걸 하나님과  자기와의 관계점 그점보다도 더 앞세우면 그 기독교 도덕주의입니다. 저 사람이  기독교 도덕주의라 하는 것을 환하게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새벽에 말에 대해서 내가 그걸 좀 말했지마는 그 사람은 사람만, 사람에게  대해서 이해시켜서 그 사람에게 납득만 되도록만 그것만 생각을 해서 그렇지  이게 이라면 이거 장차 이게 어찌 되나? 이게, 진리라 해도 그게 또 착각되기  쉽고, 진리에서 하나님이 인정해야 되고, 하나님이 인정하는 데서도 하나님이  기뻐하셔야 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데도 기뻐하면 다 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대해서 인계를 맡아 주느냐 안 주느냐 그거요. 우리는 오늘 떠날지  모르지 않습니까? 제가 서부교회를 맡아 가지고 있지마는 오늘 지금 해가  넘어가기 전에 당신이 나를 부르면은 나는 떠날 거라 말이오. 떠나면 내가 하던  일을 당신이 얼른 인계를 맡아 주셔야 되는 것이지 당신께서 인계맡지 안하면 뭐  하겠습니까?  '다 이루었다' 하는 그 말은 아버지가 인계맡았기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삼 일 만에 부활하셔 봤자 사십 일 후에 승천하시고 이랬는데  그 일을 누가 하시느냐? 그 일을 하나님이 인계를 맡았기 때문에 오늘까지 이  일을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찬송에 대해서 우리가 많이 이런데, 찬송과 노래 두가지로 구별을  하면 좋습니다. 그런데 그 찬양이란 말보다도 찬송이라는 말을 쓰는 것이 더  좋습니다. 찬양보다 찬송은 그것은 상대방인 하나님을 더 높이는 그런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이 찬송이요, 찬양은 하나님을 높이지마는 그보다도 낮춰서 자기와  동등에서 조금 높이는 것이고, 찬송은 우러러보면서 찬송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찬송이라 하는 것은 첫째 하나님의 크심을 내가 찬송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크심을. 하나님의 완전성이든지 영원성이든지 불변성이든지  하나님의 사랑이든지, 하나님의 그 모든 완전이라면 지능도 다 들어갔는데 그  하나님의 크심, 크심을 내가 우러러보면서 찬송하는 것이오. 찬송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지 인간들 기쁘게 하는 것 아닙니다. 찬송이 노래가 되면 마귀  역사가 되고 맙니다.

 하나님의 크심을 내가 찬송하고 그다음에는 그 크신 하나님이 나를 긍휼히  여겨서 그 크신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는 그 면을 내가 감사하면서  찬송하는 것입니다.

 셋째로는 그분의 크심이 내게 와 가지고 모든 것을 은혜로 베풀어 주셔 가지고,  주실 뿐만 아니라 직접 오셔 가지고 나를 만들어서 나를 나 되게, 나로 하여금  당신 영광의 찬미가 되어지도록 이렇게 나를 만들어 주시는 거게 대해서 당신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찬송이, 찬송의 뜻이 몇 가지입니까? 세 가지입니다.

 그다음에는 나를 보고 찬송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만들어서 나를 사죄, 칭의,  화친을 주셔 가지고 이렇게 아주 못쓸 더러운 걸 이렇게 흠과 점이 없는 하나님  영광의 찬미가 되게 했다 하나님이 자기를 만들어 놓은 만들어진 자기를 보고  자기 만드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넷째입니다.

 그라고 난 다음에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당신이 모든 예정 창조하신  이것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그 찬송은 하나님이 이렇게 하셨기에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요 그다음에 하나님의 섭리를 찬송하는 것이오.

 이것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인데 우리의 기쁜 것은 하나님 그분을 높임으로써  그 높임의 은택으로서 내가 존귀해지고 그분의 온전함을 인해서 내가 거석하고  그러면 내 온전을, 내 온전을, 내가 온전합니다. 시편에 보면은 '나는 흠과 점이  없습니다. 당신이 살펴 보십시오. 흠과 점이 있는가? 조그매라도 부족함이  있는가?' 그것이 하나님 찬양이라. 뭐이냐?  그것은 시편에 대해서 주석가들이 그 주석해 놓은 것을 보면은 기본구원과  건설구원을 분리하지 안하고 보니까 나중에 가서 뭐이 되는가 하면은 '이것은 참  안 믿을 때 요량하면 그렇다는 것이고 사람 쳐 놓고는 그렇다는 것이고'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 보시기에 완전합니다 완전한 것은 당신의 사죄, 칭의, 화친의  대속으로써 우리 영이 완전해진 것입니다. 영이 흠과 점이 있습니까? 이러니까  그게 하나님 찬양이라 말이오.

 그러면 하나님으로 인해서 자기가 자기 된 것을 보고 하나님에게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찬송입니다. 또 당신이 나를 위해서 이 모든 예정과 창조 또 당신이  보존과 섭리 이를 찬양하는 것이 있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찬송은 이 외에 딴것은  없습니다.

 이래서, 그러면 찬송 목적이 뭐이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이요, 그를 영화롭게  하고 그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요 하늘에 계진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는 그것도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도록 하나님께 해 달라는 것인데,  이렇게 자신을 이렁게 하나님께서 은혜로 이렇게 예수 믿는 자기 만들어 준 데  대해서 하나님을 감사하고 찬송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으로써 자기가 기뻐지고 하나님을 존귀케 함으로써  자기가 존귀해지고 하나님이 전능하심으로서 그 전능 가지고 내 전능이 돼지지  제까짓 게 뭐라고 그뭐 어데서 뭐이 됩니까? 만날 해도 여러분들 귀에 아직 안  들어갑니다. 이 복음을 알면 이 복음을 떠날 리는 절대 없습니다. 알면. 설교해도  몰라요.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설교록을 보고 '이런 말을 했는가?' 이랬는데 일 년 지나고  나니까 좀 낫다고 와 가지고 본 사람 있어. 내가 송도에 가 가지고 OOO목사님  시무하는 OO교회 가서 일주일 동안 집회를 했는데 그분들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한 마디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보니까 한 마디도 못 알아들어. '못  알아들어도 이 말씀은 속에 너거 속에 역사한다' 내가 이랬어. '너거 속에  역사하니까 언젠가 알 때가 있을 것이다'  그 뒤에 환도해 가지고 사 년 후에 나를 OOO교회 강사로 청해서. '내가 뭐  거기 가서 하겠는가? 내가 OO 갔어도 은혜를 받지도 못하고 그랬는데 뭐 내가  가겠는가?' 이라니까 하, 와 달라고. '그때는 우리가 몰랐는데 여게서 김현봉  목사님한테 삼 년을 따라다니고 보니까 그때 목사님이 가르친 것이 내나 우리가  지금 배운 거와 꼭 같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청한 것이라' 하며 그 모두 서울에  있는 김현봉 목사님 밑에 따라다니는 교역자들이 뭉쳐 가지고 그렇게 저를  청했습디다.

 청해서 제가 갔었습니다. 가 가지고 그때는 가니까 말을 알아들어요. 알아들어  가지고 저거끼리 말하기를 뭐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나는 방 요래 영창이 있는데  '이제 우리가 한국에서 제일 일등 가는 지도자 두 분을 만났다. 만났기 때문에  우리가 이 복음을 어짜든지 우리가 전국에 이렇게 퍼쳐서 이 복음으로써 우리  나라를 구원해야 되겠다' 하는 그걸 저거들이 뭐 OOO목사니 뭐 그건 분들 모두  모아 가지고 그렇게 하는 말 들었어요.

 들었는데, 그 뒤에 어찌돼서 그것이 이렇게 갈라지게 됐느냐? OOO목사님이  한번 집회 인도하고 제가 한번 집회 인도하고 인도하는 데에 그 뒤에 보니까  서로 시기심이 있어요. 시기심이 있어 가지고 누가 김현봉 목사님의 바로  후계자가 되나 안 되나 그런 거. 마귀란 놈이 공연히 작용해 가지고 모든  교역자들이 모이는데 교역자들이 누구를 더 따르나 덜 따르나, 누구에게 더  은혜를 더 받나 덜 받나, 누구를 더 존대하나 덜하나? 이 마귀란 놈의 작용에  들어 가지고 그게 되고 말았다 말이오.

 그래 내가 그때에 마지막 집회를 하고 '이제 OOO목사님은 서울서 이 복음을  전해라. 나는 부산에서 복음을 전하겠다. 자기도 깨닫고 또 하나님이 깨닫게 해  주시는 거 있는데 이리 돼지면 서로 나중에 가서 서로 마귀 놀음만 하고 시기나  하고 분쟁이나 하고 하기 때문에 안 되니까 그래 하자.' 그 뒤에는 오라 해도 내가  다시는 안 갔었습니다.

 찬송은 이게 찬송이오. 그러기에 세상 노래는 어떤 것이 세상 노래인가? 세상  노래는, 세상 노래는 자기 주관이라 하는 것이 주인이 돼 가지고 노래하는 것인데  모든 피조물을 보고, 자기는 주인공이 되고 모든 피조물을 보고 자기가 거게서  감상하면서 그러니까 그것을 보고 느끼는 대로 자기를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 노래는 다 자기를 기쁘게 하는 노래요.

 노래로서 기쁘게 하는 노래니까 그걸 분류한다면 이 모든 노래 이것은 다 인간  자기네들 중심인데도 자기들의 희극적인, 희극적인 요소를 흥분시키는 거  비극적인 요소를 흥분시키는 거 또 자기의 모든 정서 감정 움직여서 그러니까  관상, 관상이라 말은 그거 좀 일반 쓰는 말이 아닌데 관상이라 말은 볼 관(觀)자  생각 상(想)자, 보는 것을 감상하는 거 이것이 세상 노래요.

 자기 비극 희극 또 감상 자기외 그 모든 마움의 여러가지 요소가 있는데 요소를,  마음의 요소 또 감정 신경 이런 것들을 자꾸 자극시켜 가지고 자기를 기쁘게  하려는 것이 그것이 세상 모든 노래들인 것입니다.

 이래서 기쁘게 하는 것도 이 원줄기에 하면은 맛이 없으니까 그 신경 중에도  말초 신경이요, 또 감정 중에도 한 치우친 한 일부적인 감정이요 이런 것을 자꾸  충격 주면은 거게는 자극이 맛이 있고 재미가 있기 때문에 이래 가지고 이래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자꾸 그래 하다가 보니까 그것도 재미 없으니까,  왜? 자꾸 유행가라고 알지요, 유행가? 자꾸 그 유행가는 자꾸 시대에 따라서 또  이거는 맛이 없으니까 또 새로 하고 새로 하고 자꾸 이래서 유행으로 자꾸 이래  나가 가지고 하는 것이 순전히 자기 기쁘게 하는 것이요 또 자기 주관대로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창조를 상대해 가지고 자기가 지금 평가하고 거게 대해서  이제 소리내는 것이요.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찬송하는 데에는 제일 문제가 뭐이냐? 적이 뭐이냐?  자기가 적입니다. 그러면 장 악이오. 자기 중심 자기 위주. 이러니까 자기 기쁘게  하는 것인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인지?  찬양이란 것은 하나님의 그 지극히 큰 위대하심, 그 위대하심의 그 무한하신  크심이 내개 접해서 나에게 그 은혜를 베푸신다. 그분이 내게 와 가지고 나를  지금 착수해서 착공해 가지고 나를 나 되게 지금 성화시키는 거, 그분이 이래  가지고 내가 만들어진, 그분이 나를 만들어 놓은 것 보니까 이거 하도 좋아서  나를 찬양하는 것이 나를 만든 당신을 찬양하는 거, 또 그분이 나 만들기 위해서  모든 걸 예정하시고 창조하신 그걸 또 찬양하고 또 그분이 모든 것을 보존하시고  섭리해 가지고 하시는 거, 순전히 그분과 그분의 역사와 그분의 은혜를 내가 감사  찬송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것이 찬송이기 때문에 이거는 우리가 기뻐도 당신을 기쁘게 함으로  인해서, 당신으로 안해서 기쁜 것이지 당신 빼놓고 우리 주관에서 기쁜 거나  그거는 완전히 적입니다.

 이런데 요새 찬송하는 것을 보면은 가사보다도 곡. 왜 그러냐?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보다도 자기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이 찬송에 대해서 좀  기술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면은 그 사람은 하나님이 어떤 분임을 찬양하며 어떤  면을 찬양한다는 그런 것은 가지지 안하고 어짜든지 유흥적이요 또 유행적이라.

 이러니까 하나님을, 지금 우리가 이백일 곡을 택했는데 이백일 곡 그것만 하면은  하나님이 성경에 나타난 온갖 요소를 얼마든지 찬송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은 뭐 하나님의 그 대속을 찬양하면은, 대속을 찬양하는 노래면 그  대속을 찬양하는 건 자꾸 대속을 찬양하는 것이지 대속 찬양하는 그만해도 자꾸  찬양하면 되어지는 것이지 대속 찬양을 이런 방편 저런 방편 써 가지고 해서  하는 거게는 잘못하면은 자기 취미가 들어가고 자기 기쁨이 들어가고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에 잡것이 들어와서 병들기 쉽지 그게 더 도수가 높아질  것이 아니라 그거요.

 이래서 보니까 자꾸 찬송을 처음에 우리가 생각지 못한 것을 은혜받은 사람이  영감받아 가지고 작가를 했고 또 곡은 다른 사람이 했다 할지라도 또 가사를  만들어서 이래 해 놨는데 그게 만일 성경에 틀렸으면 우리가 고칠 그런 책임이  있고 또 성경에 틀리지 안하고 해도 자꾸 문화가 발달돼 나가니까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말의 표현으로써 좀 더 나은 표현이 있고 그게 조금 못하다고  하면은 이거는 개량하는 것이기 때문에 할 수가 있겠습니다.

 개량은 할 수가 있지마는 좋지도 안하고 뭐 이런데 자꾸 고치는 취미로  요량다가는 재미 없으니까 또 요래 하고 자꾸 고치는 취미 제 취미로 하는  것이지 그거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이래서 그 가사는 작가의  가사를 그대로 보존하자. 틀렸으면 우리가 고치자. 또 그보다 더 표현 방법이 더  좋은 게 있으면 이래 고치자. 표현 방법에도 좋은 것도 없고 뜻도 좋은 것도 없고  또 성경적으로도 다 돼 가지고 있고 이러면 그것을 고치는 이것은 다 유행이요  이거는 그저 뭐이든지 남이 하는건 싫어하고 제가 또 새로 만들어서 할라 하는  이거는 하나 유행의 버르징이요 자꾸 이거 보수성을 죽이는 버르징이기 때문에  그런 걸 하지 말자 해 가지고 그렇게 우리가 요번에 이백일 곡 찬송을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고 또 성경적이라 그말은 저먼저께도 내가 말할 때 보니까 성경적이라.

성경에 그뭐 본문에 이래 있다 말하는데 우리가 성경적이라 그말은 성경에서  우리에게 나타나는 신조와 교리적이라 말입니다. 예수 믿는 이치에 맞도록 하라는  그것이지 그 단어를 우리가 성경 단어를 인용하자는 그거 아닙니다.

 먼저 그거 말하는 거 단어를 말했는데 단어 그거는 가치가 없다 하면 어폐가  있지마는 그 단어 그거는 그렇게 중요시하면 안 됩니다. 단어가 나중에 표현하는  믿는 도리를 우리가 생각해야 되지 그라면 단어가 안 됐으면 뭐 그거는 단어가  틀리면 그게 종합해 가지고 하나의 문장이 되는 것인데 단어가 틀리면 문장 틀릴  거 아닌가? 그렇지 안해.

 성경에 있는 단어 그걸 가지고, '예수 믿으면' 성경에 있는 말씀 가지고 '예수  믿으면' 하는 단어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 '지옥 간다'  성경에 있는 그 단어만 그대로 쪽 빼 가지고 '예수 믿으면 지옥 간다' '예수를 안  믿으면 천국 간다' 그 문장을 만들어 낼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성경대로 한다 그거는 문자 한 단어 거게다 가치를 두고  말하는 게 아니고 우리가 예수 믿는 구원 도리에 맞나 안 맞나 그걸 가지고  우리가 말하는 것입니다.

 이랬는데. 이번에 지난번에 찬송가에 대해서 열에 가지 말한 것 무슨 거기  대해서 해석 팜프렛트 받은 것 있습니까? 거기 읽어 보면 다 있습니다. 그거 같은  거, 그저 달리 고친 게 아니고 과거 것을 보수하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꾸, 개량은 좋지마는 변질돼 나가는 거는 못씁니다. 언제든지 보수를  가지고 그저 보수를 가진 그것을 고칠라면 개량이 되면은 고치고 개정이 되면은  고칠까 그리 안 하면 그거 손 대고 고치지 안해야 우리 하는 것이 뭘 서 나가지  자꾸 뭉케 버리고, 세웠다가 뭉케 버리고 또 새로 하고 새로 하고 이라면 뭐이  되겠습니까? 무엇이 건설이 뭐이 건설이 되겠습니까?  이래서 그걸 여러분들이 좀 눈을 뜨고, 찬송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인데, 내가 어떤 사람한테 말  들었는데 왜정 때에 일본 형사들이 그 사람은 찬송을 잘하니까 이거 독창 하나만  하면은 내 보내 주겠다 이렇게 말을 할 때에, 누가 말하더라? 어떤 여성도인데.

 그래서 '나는 그걸 못 합니다' 뭐 그때, 지금 여기서는 뭐 쉽지마는 그때는  생명이 왔다 갔다 하고 막 있는데 그래 쉬운 게 아니라. '왜 못 하느냐?' '찬송은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하는 찬송이지 당신 기쁘게  하기 위해서 나는 노래를 못 부릅니다' 딱 그래 가지고 거게서 감옥에 도로 끌려  들어가고 했다 말 들었습니다. 지금 학생들도 그래요. 학생들도 이래 말하면  찬송은 하나님 기쁘시게 하는 찬송이라. 어린 것들도 다 그렇게 알고 있어.

 이래서 우리가 그 찬송가를 이백일 곡으로 한 것은 이만해도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는 그 종별이 다 있으니까 하나님을 찬송할라면 얼마든지 찬송할 수 있는데  자꾸 이거 변질돼 나가는, 유행적으로 자꾸 이래 돼 나가는 이런 것으로 아무  뜻도 없고 좋은 점도 없고 그거 또 그전에 배운 것이 나쁜 점도 없는데 자꾸  이거 가사를 고쳐 버리고,  또 곡도, 곡도 찬양하는 그 곡이면 되는 건데 또 별스러운 곡을, 금정산에 가니까  그래 '덱덱덱엑 데에가 에에' 이 쌓았는데 그거 뭐인지 모르겠어. 우리 교회 청년  하나 그렇게 그걸 배워 가지고 떠들어 쌓아서 내가 '야 이놈의 새끼야, 너 귀신 것  배워 가지고 왔구나. 내가 해 줬더니마는 그게 지금 어데 갔는지 여기 좀  다니기는 다녔었는데 그거 으례히 세상으로 나갔을 거라.

 참 예수 믿는 사람은 위에서부터 내려와야 되고 속에 하나님이 믿기 전에 벌써  중생시켜 가지고 그게 차차 차차 이래 때가 되어 믿어져야 되는 것이지 예수를  오래 믿고 난 다음에 그때 큰 은헤를 입은 후에 중생된다 이렇게, 성결교서 중생  교리를 그렇게 말하는데 그들은 예수 믿는 신앙에 체험이 없는 사람이고 또 거게  대해서 자기네들 신앙을 연구하지 안한 사람이라. 자기 신앙을 자체를 연구해  봤으면 그렇지 않는 거, 성경에도 그럴 뿐 아니라 자기도 경험 체험에서 확실히  알 것입니다.

 이래서, 우리가 찬송은 그래 하는 것이고, 그러니까 찬송하는 데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느냐 자기 기쁘게 하느냐? 하나님을 찬양하느냐 자기를 찬양하느냐?  우리가 예수님을 부를 때도 실상 '주여,' 하면은 위험합니다. 주여 하면은 위험해.

주여 할 때는 대답할 놈이 꽉 찼어. 주님 외에 대답할 놈이 꽉 찼어. 영이 꽉  찼어. 성경 말씀을 뭘 붙여도 붙이는 개 좋습니다. '나를 대속하신 주님, 나를  사랑하신 주님' 사랑 하면 그거 성경 말씀이라. '사랑하신 주님,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주님, 나와 동행 하는 주님'  이렇게 성경으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고 성경으로 말씀해 주시는 그 배후에  계시는 그분이 우리 주님이지, 신구약 성경 배후에서 성경 말씀은 나에게 성경  말씀으로 내게 손을 대고 성경 말씀 배후에서 나와 같이 하시고 하는 그분이  우리 주님이시지 우리가 성경 떠나서 우리 주관대로 자꾸 이렇게 하는 그런  주님은 우리 주님이 아니십니다. 어릴 때는 그렇게 연습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래서 제가 언제든지 설교할 때에 '오늘밤에는 무슨 말씀을 주님이 가지고  찾아오셨습니다. 무슨 말씀 합니다.' 이것을 여기 서부교회 와 가지고도 오랫 동안  썼습니다. 인제 그게 장 그래 쓰니까 그저 으례히 말하나 안 하나 그게 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뭐 그렇게 으례히 주님이 지금 말씀하시고 주님이 나를 붙들고  하시고 내 맘대로 한 마디도 나올 수가 없다. 나오면 큰일 나. 나오면 그거  자타를 죽이는 줄 알기 때문에.

 이러니까 거게 보면, 마태복음 6장에 보면 그런 말씀 있지 않습니까?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천하게 여긴다' 그러면 미워하지 안하면 사랑하는 것이요 사랑하지 안하면  미워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게 뭘 말하느냐 하면은 보다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찬송할 때에 하나님 찬송보다도 자기 기쁘게 하는 그것이 만일  앞섰다고 하면은 하나님을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 찬송이 됩니까  하나님을 지금 욕을 하는 것입니까? OOO목사님? 찬송 아니면 욕이야. 욕이  아니면 찬송이고.

 이러기 때문에 자꾸 이거 찬송도 보면은, 찬양대들 기술자라 하는 사람들은  순전히 하나님 찬양이라는 건 완전히 잊어버리고 자기 기술에만 도저히 가지고  야단을 지깁니다.

 제가 언제 테레비 보니까 세계 뭐뭐 몇 나라던가 음악을 한테 주 모아 가지고  몇십 명 모아 가지고 이렇게 반주를 하는데 거기 보니까 참 잘 미쳤습디다. 막  이래 가지고 모두 거게 대한 신경만 도취하니까 막 이 쌓는데 뭐 정신 없어.

완전히 그렇게 실컷 뭐 미쳐 가지고 한번 완전히 자기 전신경 가운데에 어느 한  일분의 일부의 신경, 그 일부의 신경 그것만 충격 줘 가지고 거게서 온 전신은  잊어버리고 그라면 죽을 줄도 몰라요, 그만, 그것만 날뛰고. 이렇게 되는 그게  흥미를 붙이기 시작하면 이제 그게 아니면 만족이 되는 그런 신경 작용의 흥미가  없으니까 자꾸 그렇게 하는 거와 마찬가지로 우리 기독교의 찬송도 그래요.

 제가 금정산에 가 있을 때 보니까 그때 여기 OOO파 또 지시파 방언파 또  예언파 뭐 신유파 와 가지고 하는데, 하면은 당장에 오면은 한 이삼십 명 쭉 모아  앉습니다. 앉으면 '나의 기쁨' 그거 할 때 보면은 힘이 나요. '나의 기쁨 나의' 막  이래 가지고 막 뚝딱 이래 하는데 나중에 그라면 뭐 얼나나 좋아 놨든지 막 뛰고  굴리고 막 이래 돼 버려.

 무슨 하나님을 생각합니까? 그게 내나 춤추러 돌아다니다가 그거 못 하니까  거기 와 가지고 저거 신명풀이 하는 것이지 하나님 찬양이 아니라. 하나님 찬양은  경건함으로 하는 것이고 정성되게 하는 것이지 그렇게 유흥적인, 방랑적인,  음탕적인 그런 찬송온 찬송이 아닙니다.

 이래서, 우리가 찬송을 그렇게 한 것이 그런 뜻에서 한 것이니까 그것을 잘  이해하시고 '보다,' 만일 잘못하면 하나님 찬송보다 자기 기쁘게 하는 것이 되기  쉬울 것이다. 하나님을 즐겁게 하는 것보다도 사람을 즐겁게 하는 것 되기 쉬울  것이다.

 이래 가지고, 될 수 있는 대로 어린 것들을 자꾸 이래 해서 이래 하는데 그걸  여러분들이 구별해 가지고, 저 사람은 지금 찬송한다는 것이 기술에다가 중점을  두고 자기 인기에다 중점을 두고 또 사람들에게 대해서 기쁘게 하려는 그런  것이지 참 하나님을 기쁘시게 영화롭게 하려는 그런 찬송의 그런 요소는 심히  빈약하다 하는 그런 것은 마음을 두고 보면 환하게 압니다. 그건 사람 안 시키요.

 우리 서부교회도 그런 사람은 하다가는 그만 도태돼 버립니다. 안 시키요. 그저  참 진심으로, 제가 하나님을,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할 각각 종류가 있어 거게  대해서 하나님의 그 크심을, 하나님의 그 은혜의 풍성하심이 내게 지금 손을 대고  연결하고 있는 거, 그분이 와서 나를 그 은혜로 만들어서 내가 그 사람이 되어진  것, 또 그분이 이제 모든 것을 나의 구원을 위해서 베풀어 주신 그 하나님의  솜씨를 찬양하는 거 하나님 자체를 찬양하는 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찬양하는 거, 하나님의 만들어 놓은 제작품 그걸, 그것이 영광의 찬미니까  제작품을 보고서 찬양하는 것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라 말이오.

 이러니까 순전히 하나님으로 인해서 기쁘고 하나님으로 인해서 자기에게  간절하고 울어도 하나님으로 인해서 울어야 되는 것이지 하나님 빼내 놓고  인간으로 하는 그것이 세상 노래 되기 쉽다 말이오.

 그러니까 간단하게 이 찬송은 하나뿐이고 나머지기는 전부 노래다 내가 이렇게  구별했으니까 요것을 생각하고 가지면 깨달음이 있을 것입니다.

 잠깐 기도합시다.

 주님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구원은 영원 전 자존하신 그리스도에게부터  시발되어 목적으로 예택으로 예정으로 창조로 대속으로 중생으로 이제 신앙의  단계에 와서 과연 아버지을 깨달았고 대속을 깨달았습니다.

 이는 순전히 주님으로 인한 구원인 것을 저들이 사후에서 압니다. 저들이 이  구원을 이미 받아 가지고 있으나 항상 악령 악성 악습으로 되어 있는 옛사람  이것이 발동합니다.

 주님으로 인하여 말하고 행동하고 또 주님으로 인한 것이 우리에게 움직여서  마지막으로는 주님에게로 들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에게서 나온 것이 주님으로 말미암고 주님에게로 돌아가는 이 생활로 주의  온전하심같이 저희들도 온전한 것은 주님의 온전하심이 우리에게 역사하셔저  주님 한 분의 역사가 팽창되어 우리에게 팽창되고 우리에게 팽창됨이 모든  피조물들에게 괭창되어 아버지에게 영광 돌리는 이 구원을 날마다 이루어 가는  저희들이 되게 하시고 여게 적이 되는 악령 악성 악습으로 된 이것을 항상  대항해서 싸우는 저희들 되게 해 주옵소서.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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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9 찬송가에 대하여/ 요한계시록 14장 9절-12절/ 1987. 4. 7. 화새벽 선지자 2015.12.28
888 찬송가에 대해서/ 야고보서 1장 15절-18절/ 1987. 12. 29. 화새벽 선지자 2015.12.28
887 찬송론/ 요한계시를 2장 23절/ 1889. 2. 5. 주일새벽 선지자 2015.12.28
886 찬송하리로다/ 에베소서 1장 3절-14절/ 1987. 9. 11. 금새벽 선지자 2015.12.28
885 찬양 예배/ 에베소서 5장 15절-21절/ 1984. 2. 15. 수저녁 선지자 2015.12.28
884 참 기쁨 얻는 구원/ 빌립보서 4장 4절-7절/ 1983. 3. 27. 주일오전 선지자 2015.12.28
883 참 나와 나 아닌 나 원수인 나/ 로마서 8장 23절/ 1987. 1. 16. 금새벽 선지자 2015.12.28
882 참 된 생애/ 전도서 1장 1절-4절/ 1979. 12. 20. 목새벽 선지자 2015.12.28
881 참 마음과 온전한 마음으로 주를 믿자/ 히브리서 10장 19절-39절/ 1987. 5. 6. 수새집회 선지자 2015.12.28
880 참 목자/ 요한복음 10장 1절-3절/ 1984. 1. 3. 밤 교역자회 선지자 2015.12.28
879 참 사랑/ 요한일서 3장 1절-3절/ 1980. 3. 9. 주일오후 선지자 2015.12.28
878 참 연보와 그 결과/ 고린도후서 8장 11절-14/ 1982. 5. 24. 월새벽 선지자 2015.12.28
877 참 이스라엘/ 출애굽기 12장 7절-10절/ 1979. 11. 22. 목새벽 선지자 2015.1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