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30 18:31
제 7장. 평양으로 가는길
1. 거창 경찰서에서 진주로 압송
거창 경찰서에 구금된 다음날.
1940년 7월 17일이었다. 진주 경찰서 유치장으로 압송한다고 하였다. 거창 경찰서에서는 더 이상 다루지 않고 진주로 넘긴다는 것이었다.
상부의 명령인 것 같았다. 중죄로 다스릴 모양이었다. 주 목사는 모든 걸 체념하였다.
산다는 것 그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허지만 주 하나님을 계명대로 사랑하며 살 자유가 허용되지 않는 땅 위에선 살 수가 없는 것이다.
손에 무거운 수갑이 채워졌다. 자동차를 타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아내가 어느 듯 알고 어린 딸 경은이를 업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보내는 사람과 떠나는 사람의 마음이 꼭 같이 괴로웠다. 세 살난 경은이가 엄마의 등에서 아빠를 보고 안다고 손을 흔든다.
주 목사는 목이 메어 말을 하지 못했다. 눈에서 말간 물기가 빙그르르 감돌다가 땅에 떨어졌다.
아내가 주 목사 가까이 다가섰다.
?끝까지 참으세요.?
아내는 힘을 주어 말했다.
?굴하면 안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참고 견디세요. 끝까지 참아야 합니다.?
주 목사의 시선이 아내의 시선에 짧게 부딪쳤다.
?끝까지 참아야 합니다.?
다시 아내가 다짐을 했다. 주 목사는 입을 꼭 다문 채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내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주 목사가 수갑 찬 손등으로 얼른 눈시울을 닦고 자동차에 올랐다. 아내에게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온 듯 했지만 삼켜버리는 것 같았다
자동차는 시내를 빠져 미루나무가 줄지어 선 신작로를 달리고 있었다. 이제 가면 살아서 이 길을 다시 돌아올 수 없을런지 모른다. 누가 살아 올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는가? 그의 가슴에는 순교, 순교의 아름다운 제물이 되어지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정든 고향 거창이 뒤로 물러가고 있었다.
인정을 나누는 소박한 이곳에 태어나, 자라고, 교육을 받고, 한 땐 군수의 비서관으로 호강도 누리며 윤택하게 살기도 했다. 그러나 복음을 받고 인간적인 부귀공명을 버리고 복음과 함께 뜻있게 살기를 원하고 신앙생활에 열심을 냈다.
세례를 받고, 집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전도사가 되고, 그리하여 복음을 전했다. 신학을 공부하여 목사가 되고 사명감에 불타 목회를 하였다.
삼군(거창, 함양...등) 시찰장으로 도보로 다니며 일을 보았다. 그러나 이제 모든 것을 버려 두고 거창을 떠난다.
누가 이런 슬픈 비극을 가져다 준 것인가? 정든 교회 교우들과의 뜨거운 관계를 끊게 하고 사랑하던 가족마저 버려둔 채 누가 저 손에 수갑을 채워 데려가는가? ?역적!?누가 만든 이름인가? 누가 붙인 대명사인가?
그는 지금 비애국민이란 오명을 쓰고 아무의 동정도 받지 못한 채, 끌려가는 것이다. 가야산, 덕유산, 지리산은 변함이 없건만 인간만이 변한 것이다.
왜 인간은 변하는 것인가?
그 마음에 죄성이 있기 때문이다. 죄성을 가진 인간의 마음은 간사하다. 옳고 바른 것을 분별할 줄 모르는 것이다.
옳지 않은 것도 옳다고 교육을 시키면 그런 것인가 보다고 따라가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인간은 그가 접해 있는 환경에 따라 그 마음도 좌우되는 것이다.
주 목사는 사람을 원망하지 않았다. 거창읍 교회 교인들에 대한 사랑은 변함이 없었다. 마음은 원이지만 환경에 약한 신자들! 그들이 잘되기만을 마음으로 빌면서 거창을 떠났다.
모든 것은 떠났다. 이제 다시 살아 올 수 있다는 것은 아예 기대 밖이다.
주어진 환난을 잘 이기고 끝까지 참아 순교하는 길 밖에 그에겐 없다. 아내가 마지막으로 당부한 말,
?끝까지 참으세요.?
힘 주어 하던 말이 귓가에 살아 쟁쟁하다.
?끝까지 참아 견뎌야지.?
자동차는 안의 함양을 지나 진주로 들어가고 있었다. 주 목사를 실은 자동차는 저녁 늦게야 진주 경찰서 앞에 정차하였다.
형사들의 지시를 따라 차에서 내려 유치장으로 들어섰다. 더위가 유치창 안에 도사리고 있었다.
바람 하나 통해지지 않는 유치장 안에 주 목사는 감금이 되었다.
다음 날, 주 목사는 고등계 김을도 형사에게 심문을 받았다.
그는 한국 사람이었다. 그러나 일본인 보다 더 지독한 편이었다. 김을도 형사는 주 목사에게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하고 다니면서 설교한 설교 제목과 요지를 상세히 말하라고 하였다.
주 목사는 서슴없이 이야기 해 주었다.
?하나님은 사랑이다?는 요지의 설교를 하자 다른 형사가 기록을 하였다. 설교가 끝나자 김 형사는 다시 입을 열었다.
?천황은 어떻게 생각하나??
?천황은 일본의 임금이오.?
?그 이상은 생각지 않나??
?생각지 않소!?
?청황이 높으냐? 하나님이 높으냐??
?천황은 살아있는 신이야!?
?예수님의 재림시엔 그렇게 됩니다.?
?그 때 천황도 심판을 받아야 하는가??
?그렇습니다. 인간은 똑같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기 때문에 천황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지요.?
?당신은 지금 불경죄를 범하고 있는거야.?
?나는 사실을 말했을 뿐이오.?
?신성불가침의 천황에 대하여 신성모독죄를 범한거야, 용서할 수가 없어.?
여기서도 심한 고문은 계속되었다. 주 목사는 진주 유치장에 있는 동안 4차에 걸친 심문과 견딜 수 없는 고문을 당하였다. 이젠 고문 종류에 따라 그것이 얼마만큼 고통스럽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중에도 매일 성경을 암송하며 찬송을 부르면서 그 쓰라린 고통의 유치장 생활을 견디어 나갔다.
그는 때마다 영혼으로 찬송을 불렀다.
?주 달려 죽은 십자가
우리가 생각할 때에
세상에 붙은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리네?
아련한 기쁨이 가슴에서 뜨겁게 피어올랐다.
?온 세상 만물 가져도
주 은혜 못다 갚겠네
특별한 사랑 받은 나
몸으로 제물 삼겠네?
주 목사의 심령엔 은은한 즐거움이 먼 하늘 끝에서 가슴으로 스며들었다.
그는 감사와 기쁨 가운데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2. 옥중 동지들
주 목사는 이 곳 진주 유치장에서 최덕지 전도사를 만났다.
최 전도사도 일차 검거되어 이 곳에서 1년을 지내다가 병보석으로 지난 해 4월 중순에 석방되었다. 그러나 계속 각 지방으로 반대운동을 하고 다니다가 1940년 6월 23일 동영에서 검거되어 이 곳으로 옮겨진 것이다.
그녀를 만나서도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다. 취조가 있을 때 복도를 지나가는 모습을 철장 속에서 바라보는 정도였다.
7월 중순경, 반가운(?) 동지가 유치장에 들어왔다.
황철도 전도사였다. 그는 창녕군 남지신 영수 집에서 연행되어 창녕 경찰서로 넘어갔다가 진주 유치장으로 압송된 것이다.
주 목사는 황 전도사를 만나 마음으로 반가웠지만 체질 약한 것이 걱정이 되었다. 황철도 전도사는 이 곳 유치장에 온 지 3일이 지나 심문을 받게 되었다. 두 형사가 황철도 전도사를 데리고 경찰서 안에 있는 신사 앞에 세워놓고 소리쳤다.
?절을 해!?
굳굳하게 선 황 전도사는 단호하게 대답하였다.
?못합니다.?
?해!?
?못합니다.?
형사들은 그를 끌고 취조실로 갔다.
몽둥이를 들어 치는 것이었다.
형사들의 몸 속엔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잔인한 힘이 숨어 있는 듯 하였다.
황 전도사는 많은 피를 흘리고 시멘트 바닥에 쓰러졌다. 물을 끼엊어 다시 정신이 나게 하여 유치장으로 보냈다. 심문은 며칠 후에 또 계속되었다.
하루는 고문을 받던 황철도 전도사가 주 목사의 염려대로 견디지 못하여 기절해 버렸다. 강이라는 형사가 주 목사를 불러내었다.
황 전도사를 업고 가라는 것이었다. 주 목사는 황철도 전도사가 쓰려져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는가? 도리깨로 사람을 친 것이었다. 피투성이가 된 황 전도사를 부축하여 등에 업었을 때, 눈물이 앞을 가려 걸음을 걸을 수가 없었다.
주 목사는 자신의 수난보다 동지의 수난을 보고 더욱 가슴아파 하였다.
1940년 9월 20일.
많은 동지들이 검속 되어 유치장에 들어 왔다. 강문서 장로, 이봉은 권사, 강문서 장로의 장남 강찬주, 김여원, 박성근 목사, 김점룡 전도사등이다.
그들은 하동, 합천, 진주지방 신사참배 반대운동 책임자들로 활동하다가 검거된 것이다. 동지들이 많아지니 위로가 되었다.
서로 말은 할 수 없지만 심문을 받기 위하여 오고 가는 길에 얼굴을 대면할 수 있고 무언의 격려를 주고받았다.
3. 기도의 제목
더운 열기가 유치장 안에 기어다니고 있었다.
취침 시간이 되어 자리에 누웠는데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전신이 뜨거운 쇠솥 안에 들어 있는 것 같았다. 바람기라고는 그의 콧김뿐이었다.
주 목사는 일어나 기도를 하였다. 기도하던 중 깜박 졸음이 밀려와 어렴풋이 잠이 들었다.
주 목사는 거리를 걷고 있었다. 진주 시내였다.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니었다.
어느 교회 앞에 발이 멎었다. 그 때는 진주에 교회가 두 개 밖에 없었다. 그 중 한 교회에서 풍악 소리가 울려 나오는 것이었다. 요란한 소리였다. 귀를 째는 씨그러운 소리였다. 주 목사는 교회 뜰로 들어섰다. 풍악 소리는 교회당 안에서 들려 오는 것이었다.
교회당 안에 들어서니 예배가 진행되고 있었다. 예배 시간에 농악대들이 풍악을 울리고 있는 것이다.
주 목사는 강단에 서 있는 목사에게로 갔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예배시간에 풍악을 울리다니‥‥?
목사는 주 목사의 말에 계면쩍게 피식 얼굴에 웃음을 피우면서,
?할 수 있습니까? 이렇게 하라는데‥‥?
입을 열었다.
?뭐라구요??
주 목사는 눈을 떴다.
꿈이었다.
그는 이 꿈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생각하여 보았다. 그리고 얻은 결론은 교회가 시국을 인식하고 신사참배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원통한 일이었다 살아 계신 참 하나님께 예배하면서 풍악이 웬일인가? 오늘 한국 교회는 거룩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풍악을 울리고 있는 것이다.
?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짓밟히고 있는 것이고, 복음만을 전해야 하는 신성한 강단이 시국 인식을 위한 연설자의 연단이 되고, 불의한 자들이 마음대로 사용하는 유희장이 되다니‥‥?
한심한 일이었다. 주 목사는 이 밤에 세 가지 내용으로 기도를 하였다.
?주님! 이 땅에 어서 속히 해방을 주옵소서! 불의한 자들, 침략자들, 우상숭배 자들이 다 물러가게 하옵소서.?
이것이 첫 번째 기도였다.
?주여! 이 땅에 신사가 하나도 없게 하여 주옵소서, 모든 신사를 다 불태워 비리소서, 신사는 이 땅에서 그림자도 보이지 않게 하옵소서.
이것이 두 번째 제목이었다.
?주님, 이 땅의 교회를 정화시켜 주옵소서! 우상숭배의 죄를 철저히 회개하고 주님만을 뜨겁게 사랑하게 하시고, 이 땅에 수 많은 교회를 세워 주시고, 이 백성들이 주 예수님을 다 믿게 하여 주옵소서.?
이것이 세 번째 기도의 제목이었다.
주 목사는 이날 이후, 세 가지 기도의 제목으로 밤이고 낮이고 기도하였다.
주 목사의 이 기도는 옥중 성도들 전체의 기도이기도 하였으리라. 이 기도는 6년 후에 그대로 이루어졌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14:4)
주님의 살아 있는 약속의 말씀에 근거하여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4. 공밥 한 덩이에도 감사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다.
촌에는 햇곡식 밥을 먹을 때다. 윤이 자르르 흐르는 햇 쌀밥에 김치 깍두기 된장국을 먹을 수 있다. 그러나 유치장의 주 목사 앞에서 주먹밥 한 덩이와 깨진 사발에 소금국 한 국자가 놓여있을 뿐이다.
주먹밥 이것은 사실 밥이 아니었다. 썩은 콩 부스러기와 좁쌀들, 그리고 밀과 보리가 섞여 있는 잡곡덩어리였다.
주 목사는 그것을 앞에 높고 감사 찬송을 부른다.
?구주여 해변서 떡덩이를
떼시어 인민을 먹였으니
영생의 양식을 나에게도
그 같이 나누어주옵소서?
이 찬송은 주 목사가 평소 식사 전에 즐겨 부르던 찬송이다.
?내 주를 찾고자 갈급 하여
영생의 말씀을 보나이다
해변서 떼신 떡 복됨 같이
성경도 복되게 하옵소서?
가정에서나 심방시에 부른 찬송은 입으로 부른 때가 많았지만 유치장에서 부르는 찬송은 영혼으로 불렀다. 감옥은 은혜 받는데 제일 좋은 곳이라고 출옥 후 주 목사는 늘 말씀하셨다.
?이 복을 주시면 종된 것과
날 매는 사슬을 곧 벗고서
내 맘에 평안함 늘 있으며
또 높은 구주를 만라리라.?
전일 가정에서 밥상을 받았을 때나, 교인들 집에 초청 받아가서 식사를 하게 될 때 주 목사는 이 찬송을 1절만 불렀다.
그러나 유치장 안에서는 3절까지 즐겨 부른 것이다. 가축의 사료 같은 콩밥 한 덩이, 그러나 주 목사에겐 생명을 이어주는 귀중한 밥이기에 감사 찬송과 감사 기도가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왔다.
콩밥 한 덩이에도 주님의 따뜻한 사랑을 체험하면서 맛있게 먹었다. 떨어진 좁쌀 한 톨까지 다 주워 먹었다.
주께서 당하신 고난을 생각하면서 감격의 나날을 보내었다.
가을이 가고 겨울이 왔다.
냉기가 바다처럼 감방 안에 깔린다. 식사시간이 되면 작은 문이 열리고 나무로 만든 쟁반
같은 곳에 콩밥 한 덩이와 깨진 사발에 검은 국물 한 국자가 들어온다.
일부러 얼려서 갔다주는 콩밥이다.
밥덩이는 꽁꽁 얼어 쟁반 위에 용케도 공처럼 앉아 있다. 국은 시금치 삶은 물인지 시래지 삶은 물인지 건더기도 하나 없고 소금을 녹혀서 짜기만 하다.
먼저 국물을 마시고 밥을 씹는다.
그러나 참아야 했다.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며 웃으며 참았다. 찬송과 기도와 성경 암송으로 지루했던 겨울을 무사히 넘겼다.
1941년 3월.
봄이 온 것이다. 앵두꽃 피고 지는 정원을 맴돌던 훈훈한 바람이 유치장 창살 안을 기어들어 왔다.
배는 여전히 고프지만 몸에 한기가 빠져나가니 살 것만 같다. 그러나 이 유치장에 봄과 함께 찾아오는 반갑잖은 손님이 있었다.
경남 도경찰부 고등계 형사부사장이었다. 그는 주 목사를 불러내었다. 진주에서의 마지막 심문을 할 예정이었다.
주 목사는 형사부장 앞에 섰다. 그는 착잡한 심문을 시작하는 것이다.
심문은 끈질기게 계속되었다. 꼬박 이틀 밤을 새우며 심문을 하는 것이었다.
이틀 동안의 지루한 심문과 혹독한 고문으로 시달린 주 목사는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주 목사가 눈을 떴을 땐 유치장 감방에 돌아와 있었다.
5. 부산으로 압송
아침 식사가 끝나자 감방 철문이 열렸다.
?주남고, 나와!?
앙칼진 형사의 목소리가 싸늘한 벽에 부딪히면서 쨍하게 귀를 때린다.
주 목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형사는 주 목사 손에 수갑을 채웠다.
주 목사는 형사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어두컴컴한 시멘트 복도를 지나 경찰서 안으로 들어섰다.
황철도 전도사와 김정룡 전도사, 최덕지 전도사. 모두 경찰서 안으로 들어온다.
?시국 인식을 못하는 최고 악질 너희들은 오늘 부산으로 간다.?
형사부장이 두꺼비 같은 눈을 껌벅이며 말을 뱉았다.
1941년 3월 13일.
주 목사 일행 네 분의 옥중 성도들은 부산행 열차를 타기 위하여 진주 역으로 나갔다.
세 형사가 뒤를 따랐다.
기차가 진주역을 떠나 개양역에 도착되었을 때, 두 분의 성도들이 수갑에 손이 채인 채 기차에 올라오고 있었다.
그들은 최상림 목사와 이현속 장로였다.
형사 둘이 그들을 호송하는 것이었다.
형사들은 자기들끼리 반가웠지만, 성도들은 성도들끼리 반가웠다.
순교자들과 지옥의 사신들!
얼마나 대조적인 그들인가?
한 쪽은 주님을 위해서 열심이고 한쪽은 마귀를 위해서 열심이다. 주 목사는 최 목사와 이 장로를 만났을 때 목이 메었다.
입을 열어 말은 할 수 없지만 눈과 눈으로 그들은 말을 나눌 수가 있었다.
일행은 부산역에 도착하였다.
형사부장이 도경찰부에 연락을 하고 있었다.
?도경찰부는 만원이야! 그래서 남부경찰서로 가라는데‥‥?
형사부장의 거만한 말에,
?비 국민들이 이렇게 많아서야 어디 나라가 평안할 수 있겠나??
형사 하나가 꽥 소리를 지른다.
그리하여 일행은 남부경찰서로 들어가게 되었다.
"잡아들이다 보니 십전 짜리도 잡혀들었어!?
이는 잡아들일 가치도 없는 사람들을 잡아들였다는 말이다. 빈정거리는 말이기도 하였다.
시일이 갈수록 신자들의 수는 줄어들었다. 병보석으로 석방된 분들도 있었다.
박인순 전도사는 처음 도경찰부로 잡혀 올 때부터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는 모진 고문과 끈질긴 심문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사수하여 왔다.
어느 날의 일이었다. 심문을 받기 위해서 간수에게 이끌려 유치장 문을 나서서 걸어나오다가 시멘트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는 처녀였다. 원래 건강한 몸집은 아니었지만 별로 병으로 누워본 일이 없는 건강한 체질이었다.
그러나 계속되는 고문과 심문으로 그는 쇠약해졌다. 이날 박전도사는 끌려나오면서 겨우 몸을 지탱하며 발을 옮겨 놓았는데, 갑자기 머리가 띵하면서 앞이 캄캄해 오더니 눈앞에 별이 나타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쓰러지고 말았다.
그녀의 얼굴엔 핏기가 없었다. 몸이 뻗뻗해지면서 굳어버리는 것이었다. 데리고 나가던 간수가 이 광경을 보고는 소리쳤다.
?박인순이 죽었다!?
이 말은 밖에까지 들렸다. 소식을 들은 성도들은 신사참배 반대로 인한 첫 순교자가 부산에서 나왔다고 감격하였다.
허나 얼마 후 그녀는 다시 깨어났다. 가족들에게 인계되어 그녀는 구금된 지 3개월 10일만에 병보석으로 석방이 되었다.
박 전도사는 병보석 석방이지만 밖으로 나오게 된 것을 못내 서운하게 생각하였다.
도경찰부에는 많은 성도들이 나가기도 했지만 역시 유치장은 만원이었다. 그리하여 부산 외의 지방에서 검속되어 온 사람들은 남부경찰서로 보내게 된 것이다.
주 목사 일행은 남부경찰서 유치장에 입감되었다. 황철도 전도사는 몸이 극도로 쇠약해 가고 있었다. 진주 유치장에서 너무 심한 고문을 당한 때문이다.
부산에 온 이후 계속 팔다리를 잘 움직이지 못하고 창자가 어떻게 되었는지 배가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유치장 안에서 늘 누워지냈다. 공의가 진찰을 하고는 그냥 둘 수 없다고 하였다. 공의는 고등계 형사과장과 형사부장등과 의논을 하여 황철도 전도사를 내 보내기로 합의하였다. 며칠 안 가서 죽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황철도 전도사를 불러내었다.
?오늘 부로 유치장 생활 그만 두고 나가! 자유다.?
황 전도사는 어리둥절하다.
?왜 그러십니까??
?왜 그러다니? 나가라면 나가는거지‥‥?
?나는 나가지 않습니다.?
?죽고 싶나??
?나는 죽지 않습니다.?
?의사가 그냥 두면 죽는다는데도‥‥??
?나는 안 죽습니다.?
?어째서 안 죽는다는 거지??
?하나님께서 내 영혼을 불러 가시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다른 죄수들은 아프지 않는 것도 아프다하며, 대수롭잖은 병도 중병으로 말하여 나갈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이 사람은 나가라고 하는데도 나가지 않겠다고 하니 이상하지 않을 수 없다.
?이상한 사람 다 보겠네!?
하부장이 말했다.
그러나 황철도 전도사는 1941년 6월 28일, 병보석으로 석방이 되었다.
한편 최덕지 전도사는 유치장에서 금식을 시작하였다. 일주일 넘게 금식을 하니 몸이 말이 아니었다.
경찰에서는 걱정이 되었다. 저러다 죽으면 뒤가 개운찮을 것 같아서 석방하기로 결정하였다. 최덕지 전도사를 불러내었다.
고등계 형사부장이,
?당신 그냥 나가시오, 병이 중한 것 같소!?
?우린 당신 같은 사람 시체 치우기도 귀찮으니 그냥 나가!?
?싫습니다.?
?명령이오!?
그리하여 억지로 병보석으로 석방이 되었다. 최덕지 전도사는 나가서도 여전히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하였다.
주일이 되어 교회에 찾아갔더니 말이 아니었다. 교회당 강단 뒤에 신사를 차려 놓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최덕지 전도사는 분개막심 하였다.
그는 탄식하며 외쳤다.
?현실교회는 완전히 마귀당이 되었구나!?
이리하여 최덕지 전도사는 신사참배 반대 뿐 아니라 동방요배 국기배례 반대까지 부르짖으며 다니게 되었다.
최덕지 전도사는 다시 검속되었다. 한상동 목사, 주남고 목사 일행이 평양 형무소에 입감 된 얼마 후에 그녀도 평양으로 압송되어 형무소에 입감되었다. 후에 최덕지 전도사를 중심으로 일어난 재건교회에서는 한상동 목사, 주남고 목사를 위시한 옥중성도들은 신사참배는 반대했지만 동방요배는 한 것처럼 인식하게 되었다.
이것은 대단히 잘못된 사상이요, 그릇된 사고이다. 주기철 목사나 한상동 목사나 주남고 목사가 검속되어 넘어 갈 때엔 동방요배 문제는 나오기 전이었다. 일차 신사참배 반대운동으로 투옥된 후 현실 교회는 점차적으로 총독부지시에 따라 시행되고 있었는데 뒤 늦게 동방요배 문제가 대두된 것이다.
최덕지 전도사가 남부 경찰서에서 병보석으로 석방되어 나가보니 동방요배가 시행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동방요배마저 반대하고 운동하다가 검속이 된 것이다.
그러니 동방요배 반대운동으로는 그녀가 경남지방에서는 제일 처음 사람이 된 셈이다. 그러나 이것이 다른 옥중 성도들보다 결코 위대한 일이라고 앞세울 문제는 못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앞선 투옥된 분들은 그것을 모르고 있었고, 그녀는 늦게까지 남아서 신사참배를 반대하다보니 동방요배 문제가 생겨서 그것도 반대한 것뿐이기 때문이다.
신사참배 반대운동으로 투옥된 성도들이 만일 그때도 동방요배 문제가 있었다면 그것을 반대하지 않았을까?
그것은 상식에 관한 문제다.
6. 평양으로 가는 길
주 목사가 남부 경찰서 유치장에 입감 한지 4개월이 지났다. 평양 형무소로 압송된다는 말이 들렸다. 한편 반가운 생각이 들었다.
그 곳에는 주기철 목사를 비롯하여 많은 의로운 주의 종들이 구금되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있는 바다. 산 순교자들이 모여 있는 평양 형무소로 빨리 가고 싶었다.
1941년 7월 11일.
평양으로 압송되는 날이다. 주 목사는 최상림 목사, 이현속 장로 등과 같이 수갑을 찬 채 경찰서 밖으로 끌려 나왔다. 주 목사는 겨울 두루막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일년이 넘도록 갂지 못한 머리털은 길게 자라 귀를 덮고 어깨 위까지 흘러내렸다. 수염은 아무렇게나 자라 꼭 산에서 내려온 사람들 같았다.
부산본역으로 나갔다. 본역 앞에는 도경찰부에 수감되었던 한상동 목사와 조수옥 전도사가 나와 있었다.
한 목사 부인 김차숙 여사와 시내교회 교인들인 듯 신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도경찰부 고등계 형사부장 하부장과 다른 형사 한 사람도 서 있었다.
주 목사는 한상동 목사와 조수옥 전도사를 보니 너무도 반갑고 기뻐 눈물이 눈시울에 빙 돌았다.
7월의 햇살이 머리 위에 따갑게 내려 쪼인다. 너무 오랜 세월을 햇살을 보지 못하고 살았기에 따가운 햇살이 마냥 고맙고 꿈 같기만 하였다.
도경찰부에서 나온 한 목사와 조 전도사의 손에는 수갑이 채워지지 않았다. 이걸 본 남부서 한 형사가,
?우리만 채워 가지고 갈 필요가 어디 있나??
하고 말하자. 다른 형사가,
?그렇지!?
피식 웃으며 수갑을 풀어 주었다. 자유로운 몸이다. 짧은 시간이지만 자유가 허락된 것이다.
한상동 목사의 얼굴은 긴 머리털과 수염이 조화를 이루어 마치 그림에서 보는 예수님 같았다.
일행은 기차를 탔다. 한 사람 옆에 한 사람씩 형사가 끼어 앉았다. 그러나 차를 타는 승객들은 아무도 죄수와 형사로 보지 않았다.
승객들은 이상한 얼굴 모습들을 바라보며 수군수군 하였다.
?어디 사람인가??
?글쎄 미국 사람은 아닌 것 같고, 코 보니까 말이여!?
?불란서 사람인가베.?
?아니여, 몽고 사람이다.?
?코하고 눈은 꼭 조선사람 안 같나??
?옷도 조선옷 앙이가‥‥?
?참야, 별 희안한 사람도 다 있네.?
승객들은 아무도 이들이 수난 당하는 주님의 귀한 종들인 줄 몰랐다. 시내교회 성도들이 역에서 전송을 하고 눈물을 닦으며 돌아갔다.
기차 안에는 김차숙 여사와 초량교회 양성봉 장로 부인이 함께 탔다.
양 장로 부인은 인삼을 준비하고 한 되들이 병에 커피를 한 병 끓여 넣어 쥐고 있었다. 기차가 떠나는 동안 양 장로 부인은 커피를 옥중 성도들과 형사들에게도 한 컵씩 주었다. 형사들은 머뭇거리며 받아 마셨다.
얼마나 오래간 만에 마시는 커피냐? 시래기 국물과 콩, 조, 밀, 보리, 잡곡만 먹던 창자 안에 커피가 들어가니 목구멍이 아릿해 오면서 창자가 거북하였다.
양 장로 부인은 삼량진에 내렸다. 일행을 실은 기차는 북으로 북으로 달리고 있었다.
사지를 향하여 올라가는 산 순교자들, 한상동 목사, 주남고 목사, 최상림 목사, 이현속 장로, 조수옥 전도사, 그들은 한결 같이 다시 이 열차를 타고 아래로 내려오리라는 기대를 가지지 않았다. 이 열차가 천국행 열차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한상동 목사. 그는 김해 명지에서 태어나 6세에 양자로 가서 외로운 생활을 하였으며 24세에 복음을 받아 주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그 후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어 뜻 있는 목회를 하려 하였으나 신사참배 문제가 일어나자 그는 모든 걸 버리고 분연히 반대운동의 선봉자가 된 것이다.
그 때부터 그는 생명을 주 앞에 바치고 있었다. 경찰은 그를 고문 할 때 혹독하게 다루었다. 그의 옷이 붉게 피로 물들어 가족들에게 넘겨졌을 때, 어머니 배옹애 여사가 아들의 옷을 안고 통곡하다 쓰러졌다.
최상림 목사는 동래군 기장 출신이었다.
일찍 복음을 받아 신앙생활을 하던 중 그의 신앙은 뜨거웠다.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마음 간절하여 평양 신학교에 입학하여 1920년에 졸업하였다. 주남고 목사보다 신학교 4년 선배였다.
최 목사는 고성, 동래, 남해교회 등에서 hr회를 하였다. 최 목사는 남해에서 검속되어 남부경찰서로 넘어온 것이다.
이현속 장로는 함안군 산인면 부봉리 사람이다. 그는 6세 어린 시절에 복음을 받아 믿었고, 경남 성경학원을 거쳐 평양신학교 1학년까지 수업하였다. 그러나 신학교를 계속하지 못하고 전도사 일에만 힘을 썼다.
그는 창녕, 진양, 하동, 산청, 주로 변두리 농촌교회를 다니며 목회를 하였다. 그가 38세 때 진주에 있는 기독교병원인 배돈병원에서 서기 겸 전도사 일을 보게 되었다.
신사참배 문제가 일어나자 반대 뜻을 표명하고 복음을 전하였다. 수차 진주에서 주 목사와도 만나 반대운동에 대하여 의논하기도 하였다. 그는 명원에서 매주 수요일 정기 예배 시에 직원들을 모아 놓고 예배를 인도하였는데, 그 때 배돈병원 직원은 약 40명 정도였다.
그는 이들 직원들 앞에서 담대히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며, 주의 재림에 대하여 설교하였다. 천년왕국이 임하며 일제는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강하게 전하였으므로 검속 된 것이다.
조수옥 전도사는 안이숙 선생이 평양 감옥에서 처음 본 인상으로 귀염성이 있고, 성스럽고, 총명하더라는 그대로였다. 그의 청춘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불태운 성스러운 여성이었다.
그녀의 고향은 경남 하동이었다.
그녀는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가사를 돌보던 중 20세에 출가하였으나, 결혼에 실패하고 친정으로 돌아와 병원 보조 간호원을 하였다. 그러나 병원 간호원 생활을 그만두고 양재점 재봉교사로 지내다가 복음을 받아 가슴에 뜨거운 열이 있어 진주 성경학원으로 갔다.
경남 성경학원을 마치고 25세 때부터 전도사 일을 하게 된 것이다. 삼천포 교회를 시무하다가 부산으로 내려왔다. 초량교회 전도사로서 선교부 주선으로 부산지방 선교사 전도부인으로 활약하다가 신사참배 반대로 구금된 것이다.
그녀는 처음부터 한상동 목사와 주남고 목사, 이 인재 전도사 등과 뜻이 같아서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협조하여 왔다.
일행은 역을 빠져나와 광장에 나섰다. 광장에는 주기철 목사 부인 오정모 여사와 안이숙 선생 어머니 등 몇 분의 성도들이 소식을 듣고 마중 나와 있었다.
오정모 여사는 김차숙 여사를 보고 깜짝 놀라면서,
?어쩐일로 이까지 따라 왔노??
말을 던졌다.
?염려 마십시오. 짐은 되지 않을터이니.?
김차숙 여사는 사느냐 죽느냐 하는 판국에 무슨 고생인들 못견디랴 하는 자신으로 올라온 것이다. 하(河)부장이 다른 형사에게,
?검찰청에 전화하고 올터이니 잠시 기다려!?
말하고는 역사무실로 들어갔다.
일행은 역광장에서 하부장을 기다리며 희미한 전등불빛 아래서 눈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얼마 후 하부장이 돌아왔다. 시간이 늦어 모두 퇴근하고 경비원들만 남아 있다고 말했다.
?식사나 하고 가시지요.?
김차숙 여사가 형사를 보고 입을 열었다.
?그럽시다.?
형사들도 평양까지 오면서 상당히 익혀진터라 싸늘하지 않았다. 오정모 여사의 안내로 식당에 들어갔다. 냉면을 한 그릇씩 시켰다. 식당 종업원들이 옥중 성도들을 보고 키득키득 웃으며 저희들까리 야단이었다.
?불란서 사람이다.?
?아니다, 호주 사람이다.?
그러다가 가족 중 한 분에게 묻는 것이었다.
?저 사람들이 불란서 사람들이 아닙니까??
?불란서 사람이 아니라 조선 사람이요. 말못할 사정이 있어 저 모양이지요.?
이 말을 들은 종업원들은 얼굴이 굳어지면서 정중히 손님으로 대해 주었다. 참으로 오래간만이었다. 냉면을 먹으니 세상에 이런 음식도 있었는가 싶게 맛이 있었다.
가족들이 형사들에게도 대접을 했다. 식사가 끝나고 일행은 하부장의 인솔로 평양 종로경찰서 정문으로 들어섰다.
주남고 목사, 한상동 목사, 최상림 목사, 이현속 장로, 조수옥 전도사는 각각 헤어져 유치장 감방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여기 종로 경찰서 유치장 안에는 전국에서 신사참배 반대로 투쟁하던 성도들이 집결되어 있었다.
이것은 조선 총독부 경무국의 명령이었다. 그리하여 전국의 지조 있는 성도들을 이 곳에 총 집결시킨 것이다.
주남고 목사는 이 곳에서 주기철 목사와 이인재 전도사, 장계성 장로, 안이숙 선생, 이광록 집사 등 여러분들을 만날 수 있었다.
진주 경찰서에서 보다, 부산 경찰에서 보다, 평양 경찰서에서는 신앙의 동지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는 데에서 한없이 흐뭇함을 느꼈다.
7. 평양 종로경찰서유치장
한상동 목사는 그 밤에 주기철 목사와 같은 감방에 들어갔다.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두 종을 땅 위에서 만날 순간을 주신 것이다.
다음 날 아침, 한 목사와 조수옥 전도사는 대동 경찰서 유치장으로 옮겨갔다. 경남 도경찰부에 있는 분, 두 분만 대동 경찰서로 가고 나머지 세 분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주남고 목사가 갇혀 있는 유치장 감방 맞은 편 감방에 최봉석 목사(최권능이라고 함)가 있었다.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
최 목사의 우렁찬 목소리는 유치장 안의 모든 성도들의 심령에 힘을 주었다. 평양 유치장은 전주나 부산보다 훨씬 대우가 좋았다. 이발도 시켜 주었고, 옷도 갈아 입혀 주었다.
긴 머리털을 깍고 수염을 밀고 나니 한결 마음도 산뜻하였다.
유치장 간수들의 대하는 것도 진주나 부산보다는 좀 부드러웠다.
이상한 일이었다. 무슨 일이 있기는 있는 모양이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처음 기독교인들이 연행되어 왔을 때엔 심한 고문을 가했다고 했다.
고문에 시달려 많은 성도들이 죽어가기도 하였다 한다. 고등계 형사들은 성도들을 짐승처럼 대하였고 장작개비로 패고 고춧가루 탄 물을 코로 마시게 하고 지독한 고문을 가했다고 했다.
그런데 그 해 겨울 만주 독감이 몰려와 모든 경찰들과 형사들을 잡아 눕혔다. 독감으로 인하여 죽은 자도 많이 생기고 지독하게 고생을 하였다.
경찰들은 이것이 기독신자들을 너무 심하게 고문한 죄벌이라고 깨닫게 되었단다. 그리하여 이제는 성도들을 두려워하는 형편이라 좀 부드러워 진 것이라고 하였다.
주남고 목사가 이곳 종로 경찰서에 압송되어 온지 한 달 보름이 되었다.
1941년 8월 25일.
더위는 아직 가시지 않고 기승을 부린다. 갑자기 고등계 형사들이 나타나더니 유치장 안에 있는 기독신자들을 다 불러내었다.
경찰서 안은 기독신자들로 가득하였다. 가족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찾아와서 보자기를 풀고 먹을 것을 나눈다. 주남고 목사의 가족은 몰론 오지 않았다.
오늘 평양 형무소로 옮겨간단다. 붉은 벽돌집으로 가는 것이다. 높은 담에 둘러싸인 형무소, 중죄를 지은 사람이 형을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의 지옥이다.
그런데 들어가면서 다시 나올 수 있을는지 모르는 벽돌집으로 들어간다 하건만 산 순교자들의 얼굴에는 긴장과 주님을 향한 뜨거운 희열이 안개처럼 피어나고 있었다.
자동차가 왔다. 형사들은 성도들의 손에 수갑을 채워서는 차례로 자동차에 올라 태웠다.
성도들을 태운 자동차는 평양 시내를 빠져 형무소에 이르렸다. 형무소의 무거운 철문이 둔한 소리를 내며 열였다. 자동차는 형무소 뜰로 들어가서 멎었다. 일행은 서서히 수갑을 찬 채 차에서 내렸다.
그때였다.
최상림 목사가 큰 소리로 외치는 것이었다.
?아, 주기철 목사님 얼굴에 광채가 납니다.!?
그때 모두들 주기철 목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과연 주 목사의 얼굴에는 찬란한 빛이 발산되는 것이었다.
그 빛을 바라보는 성도들의 얼굴에도 광채가 나는 것이었다. 모두들 서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마음에 기쁨이 충만하였다.
공회 앞에 선 스데반의 얼굴처럼 모두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 같았다. 이 사실은 주남고 목사가 직접 긔의 옥고기에서 밝혀 주었다.
일행은 사무실로 들어갔다. 유치장에서 입고 있었던 사복을 벗고 푸른 죄수복을 입을 때, 최봉석 목사가 소리쳤다.
?우리 주님은 홍포를 입으셨는데 우리는 청포를 입네!?
이 말을 들은 성도들의 눈엔 감격의 눈물이 빙그르르 돌았다. 주남고 목사는 최 목사의 말을 받아 응수하였다.
?지금은 청포를 입지만 앞으로는 홍포를 입게 될 것입니다.?
주남고 목사의 말에 모두들 소리내어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눈물이 동반된 감격의 웃음이었다.
푸른 수인복을 바꾸어 입은 성도들은 이름 대신 번호표를 받아 달고 간수를 따라 감방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긴 시멘트의 어두컴컴한 복도를 지나 36호 방에 주남고 목사는 인도되었다. 옆방인 37호에 주기철 목사가 갇혔다. 최봉석 목사는 좀 떨어진 33호에 지정이 되었다.
폴리갑처럼 80여세 노령의 몸으로 최 목사는 원수들에게 잡혀 왔지만 그의 기백은 물 밖에 갓 나온 생선처럼 펄떡펄떡 뛰었다.
주남고 목사는 주변에 많은 동지들이 숨쉬고 있는 것에 마음 든든하였다. 특히 옆방에 있는 주기철 목사와 연락할 수 있어 더욱 좋았다.
벽은 시멘트로 꽉 막혀 있어 답답했지만 앞으로 걸어 나오면 쇠창살이다.
쇠창살을 손등으로 두드려 본다. 저쪽으로 울림이 가고 다시 저쪽에서 같은 반응으로 울림이 왔다. 두 주 목사는 쇠창살 두드리는 것으로 아침저녁 인사를 나누었다.
대동 경찰서로 연행되어 간 한상동 목사와 조수옥 전도사도 이 형무소로 압송되어 왔다. 자유로이 서로 만날 수 없지만 한 형무소 안에서 같은 콩밥을 먹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었다.
주남고 목사는 조용히 찬송을 불렸다. 그가 즐겨 부르는 찬송이었다.
?예수가 거느리시니 즐겁고 태평하구나
주야에 자고 깨는 것 예수가 거느리시네.
나를 항상 거느리시고 나를 친히 거느리시네,
나를 항상 거느리시고 나를 친히 거느리시네.?
비록 몸은 감옥에 갇혔지만 그의 마음은 천국에 이른 듯 즐거움이 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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